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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박동일교장 최영주학생 이충옥교감 조윤경교사 |
| "선생님, 저 다시 돌아올거에요"
올해로 정신여자고등학교 1백20회 졸업생이 되는 영주(남포교회). 영주는 학교를 떠나는 것이 못내 아쉽다. "졸업해도 교복은 고이고이 간직하며 '정신(貞信)'의 추억을 간직하겠다"는 영주는 선전포고를 한다.
"선생님, 저 공부 다 마치면 다시 정신동산으로 올게요. 선생님처럼요!". 영주는 한가지 더 귀띔한다. "이건 저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에요. 정신여고 졸업생이라면 다 같은 마음일 거에요"
그랬다. 82년 졸업생이면서 정신여고에서 영어교사로 재직중인 조윤경교사(소망교회)는 영주의 마음을 십분 이해할 수 있다. "선생님들을 보면서 꿈을 키워왔다"는 영주의 말에 조 교사 또한 "졸업 후 다양한 곳에서 커리어를 쌓았지만, 선생님과 학교를 잊지 못해 다시 찾았고, 선생님들이 어여쁘게 받아주셨다"고 영주를 바라봤다.
"어머머, 그랬어! 그랬구나 윤경아. 아니지, 조 선생."이라며 소녀같은 미소를 잃지 않은 이충옥교감(동교동교회 권사)도 조 교사의 선배이자 스승.
74년 졸업생인 이 교감에게 올해 졸업을 앞둔 영주는 물론 졸업한 지 20년이 넘은 조 교사까지 '국어'를 배웠다.
'지나간 여고시절 조용히 생각하니 그것이 나에게는 첫사랑이었어요~'라는 노랫말을 생각해보면, 이들의 첫사랑은 같은 곳에서 이뤄진 셈이다.
하지만 모든 시작에는 뿌리가 있는 법. 이들 사제 3대의 연결고리를 이어준 이가 박동일교장(남대문교회 안수집사)이다.
대학을 졸업한 해 바로 정신여고에 부임한 박동일교장의 첫 제자가 바로 이충옥교감인 것. "제가 부임한 첫날, 선생님께서 저를 데리고 종로 4가에 있는 세운상가 친구분에게 데려가셨어요"라고 지난 추억을 되새기는 이 교감은 "선생님께서 저를 바로 옆에 세워두시고 한참을 '내 제자'라고 자랑 하셨어요. 선생님 기억나세요?"라며 박 교장에게 묻는다.
박 교장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내가 그랬었나? 흠흠, 기억안나"하며 제자 앞에서 수줍은 모습을 감추지 못했다.
"아! 선생님 저도 첫 제자가 이번에 부임했잖아요. 그 친구 옆자리가 허전한 거 같아서 좋은 남자친구 한명 소개할라구요"라며 조 교사도 거든다. 세대가 세대를 넘어 한 학교에서 스승과 제자, 선배와 후배로 뿌리를 내리는 모습이 거룩해 보이기까지 하다.
4대가 한자리에 모인 그 순간부터 "꺄르르~"웃음이 그치지 않는다. "선생님, 제가 두발자유화 세대잖아요. 머리 지저분하다고 선생님한테 정말 잔소리 많이 들었었죠" 조 교사가 추억 되살리기에 나섰다.
"그래도 그때는 양호한 편이야. 요즘은 왜 이렇게 교복 치마를 접어입니? 지하철 계단 올라갈 때마다 내가 가슴이 조마조마 해. 영주야 너 일어나봐 치마 얼마나 접었어?" 이 교감이 영주를 살짝 노려본다. 영주도 질세라, "선생님~ 저 안접었어요."라며 열심히 손사레를 친다.
세대를 초월해 스승과 제자, 선배와 후배로 만난 이들에게는 분명히 뭔가 특별한 것이 있었다.
영주는 그것이 바로 '사랑'이란다. "시간은 다르지만 정신동산에서 키워왔던 꿈만은 같다"는 영주는 "선생님들의 잔소리도 분명 스승과 제자만의 관계만은 아니었다"고 감사를 대신 표현했다. 그래서 저도 그 사랑을 후배들에게 전하고 싶단다.
나이든 제자도 사랑스럽고, 손녀 뻘인 제자도 마냥 사랑스럽기만 한 박동일교장. 직접 암기법 학원까지 다니며 학생들에게 암기노하우를 전했던 박 교장은 "총각 선생으로 여고생들의 선물 세례를 수 없이 받았다"며 농을 거냈지만, "교사로 애쓰는 제자들이 예전만큼 보람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다"고 씁쓸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34년간 교직에 발담고 있는 박 교장은 "학교가 전부였던 시절 학부모들은 학교를 믿고 학생을 맡겼고, 학생들도 학교와 교사들의 권위를 인정했었지만 요즘은 수능이 모든 기준이 된다"면서 아쉬움을 드러냈다.
"여고시절 다양한 학교행사로 밤낮으로 뛰어다녔던 생각이 난다"는 조 교사도 "요즘은 학부모들의 항의가 너무 많아서 찬송가경연대회만 역사의 맥을 이어가고 있다"면서 "예나 지금이나 입시경쟁은 치열했는데 점점 세상이 너무 강퍅해지는 것이 아닌지 걱정이다"고 안타까운 마음을 덧붙였다.
"학교 다닐 때 별명이 90도 였다"는 조 교사는 "선생님들이 지나가실 때마다 90도로 깍듯이 인사해서 붙여진 별명이었다"면서 "그런데 요즘은 선생님보다 동아리 선배들에게 더 깍듯하고 조심스러워 한다"고 섭섭한 마음도 살짝 고백한다.
박 교장은 "교사들이 소명의식보다 직장으로만 여기는 것도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지만 "개성넘치는 요즘 아이들을 통제하기가 힘든 것은 사실"이라며 교사들의 어려움을 대변했다.
옆에 조용히 앉아 있던 영주는 "선생님들의 고충을 마음깊이 이해하려고 하지 못한 것 같아 죄송하다"며 어쩔 줄 몰라했다. 그런 영주의 마음이 예쁘기만 한 조 교사는 영주의 손을 잡고 "그래도 너희와 함께 한 지난 3년이 너무 행복했다"면서 "모교 잊지 말고 꼭 꿈을 이루라"고 격려했다.
"대학가면 반드시 교직 이수해 다시 선생님 곁으로 오겠다"는 제자의 등을 어루만지면서 이 교감도 "대학가면 신앙생활 등한시 하지 말고 기독교 관련 동아리에서 꾸준히 성경공부를 이어가라"면서 "이건 선배로서 하는 말인데 영주 너, 반드시 믿는 사람 만나서 결혼해야 한다"는 가장 중요한 당부도 잊지 않았다.
떠나는 제자와 보내는 스승의 모습이 애틋하다. 하지만 이들의 끝이 곧 시작을 알리는 새로운 출발임을 알기에 '이별'을 전제한 졸업을 축하 할 수 밖에 없는 것은 아닐까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