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음증> - 下
옷을 갖춰 입고 나오는 주홍 머리가 보였다. 그녀가 내 앞으로 섰다. 버스 정류장이었다. 아르바이트가 끝나고 벌써 밤 열 시였지만, 그녀의 얼굴에는 피곤한 기색이 별로 없었다. 얼굴을 보자마자 저쪽에서 오히려 선제공격이 날아왔다.
손님 씨, 내 이름은 알아요?
몰라.
알려 줄게요, 내 이름은……
상관없잖아.
당찬 아르바이트생은 아쉽다는 표정을 지으며 입맛을 다셨다.
관음증 환자?
전에 우리 카페에서 소개팅했잖아요. 다 들었어요, 손님 씨가 한 얘기.
들었어도 상관없고 안 들었어도 상관없어. 너도 결국 바위야.
난 달라요.
단호한 말투였다. 둘 옆으로 벌써 버스가 세 대째 지나가고 있었다.
나는 날 꾸미거나 만들지 않아요. 당신한테 거짓된 나를 보이려고 하지도 않았어요. 그저 바라만 봤어요.
대신 사탕이나 초콜릿 같은 걸 자꾸 줬잖아.
당신한테 호감을 주기 위함이 아니라 그냥 내 마음 그대로예요. 나는 알아요, 우리 모두가 관음증 환자라는 것을. 애써 부정하려고 하지 않아요.
나한테만 유독 상냥한 말투로 말 걸었잖아.
꾸민 게 아니에요. 나는 당신한테 꾸밈없는 홍다희의 모습만을 보여줬어요.
그걸 내가 어떻게 믿지?
이름은 어쩔 수 없이 알게 되었다. 홍다희. 예쁜 이름이다.
너도 결국 바위야. 사랑을 빙자해서 누군가에게 꼬리 치는.
꼬리요?
홍다희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눈가에는 벌써 물기가 가득 어렸다. 가슴이 아팠다. 역시 그녀는 너무 어린 아이였다. 애초에 날 건드리면 안 되었다.
당신은, 당신은 그저 사랑 받아도 그것이 못마땅한가요? 왜 당신의 눈에는 모두가 의심 받아야 하는 거죠? 물론 전에 소개팅했던 그 신문사네 따님은 의심 받아 마땅했죠. 그렇지만 이런 나도 그런가요? 그럼 당신의 마음속에는 누가 들어갈 수 있는 것이지요?
아무도.
나는 헛기침을 했다. 열 번째 버스가 지나갔다. 아마 막차였을 것이다. 저걸 타야 집에 가는데. 아무래도 오늘밤은 걸어가야겠다.
네가 아무리 괜찮은 사람이라도, 내가 문제다. 그 날 나는 그 비취석에게 나 자신을 관찰자라며 의기양양해 했지. 그런데, 아니야. 나는 의사소통 자체가 불가능하게 된 사람이야. 그래서 관음증을 자초한 거야. 나만큼 한심한 사람도 없어. 내가 부족해. 그래서, 넌 안 돼.
홍다희의 복숭앗빛 뺨에 눈물이 주룩 흘렀다. 머릿속이 먹먹해져 왔다.
너는 관음증 환자가 아니야. 그래, 넌 달라. 그래서 안 돼.
그녀는 웃을 때뿐만 아니라 울 때에도 보조개가 만들어졌다. 슬픈 보조개 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두 눈만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노려봤을 수도 있다. 내가 비취석을 쏘아대던 그 눈빛으로. 홍다희는 고개를 돌렸다. 버스가 끊긴 밤이었다. 우리 모두는 돌아갈 길을 잃었다. 그래도, 서로 반대 방향으로 걸어갔다. 이따금씩 관음증으로 인한 헛구역질을 내뱉으면서. 관음증이 존재하지 않는 보금자리로 우리는 느리게 나아갔다.
다음날부터 아듀 커피에는 홍다희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대신 내가 자주 앉던 창가 자리 옆 기둥에 낙서 하나가 남겨져 있었다.
‘안녕. 그러고 보니 나도 손님, 아니 당신 이름 모르네요. 미안했어요. by 홍다희, 오렌지맛 바위.’
매일 보이던 홍다희가 없어도 그리 불편하진 않았다. 예쁘장한 아르바이트생이 화창하게 건네는 인사말이 없어도 아쉽진 않았다. 나는 평생 사랑이란 것을 모르고 살아온 사람이었다. 조금 그립기는 했다. 오렌지맛 사탕 한 알쯤은 거뜬히 굴러들어갈 그 보조개가.
그리고, 죽도록 미안했다. 어린 아이에게 상처를 주었으니까. 이전까지의 나는 이렇게 생각했었다. 가식과 허세에 절어 있는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사람들을 아프게 하는 것이라고. 나는 남을 아프게 하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모든 의사소통을 포기했다. 나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점잖은 사람이라고 자화자찬하며 관찰자, 아니 시름시름 앓는 관음증 환자가 되었다. 하지만 끝내 나는 한 아이에게 상처를 주고 말았다. 나는 틀렸다. 이번에도 잘못된 선택이었다. 아아, 나는 나를 버렸어야 했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나는 환자가 아니오, 관음증이 아니오, 시치미 뚝 떼고 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대신 가슴 속에 남아있던 양심이란 것을 쓰기로 했다. 가식. 그래, 가식을 조금이라도 배우기로 했다. 말없이 상처 주는 것이 얼마나 천박한 일인지 깨달았으니까. 약간의 가식, 약간의 소통은 있어야 최소한의 품격은 지킬 수 있을 터였다. 관찰을 포기하지는 않았다. 거듭 느끼듯이 관찰은 이제 내게 숨과 같은 일이니까.
심장이 뛰었다. 그 뜨거운 라떼를 단숨에 들이켜 버렸다.
빌어먹을, 한 여자 때문에 나의 관찰에 차질이 생겼다. 나의 삶, 죽음까지도.
품격 있는 신사의 말투를 습득하기까지는 무려 3개월이 걸렸다. 카페라떼 한 잔 주세요, 따뜻한 걸로요. 이 한 마디를 못하고 얼마나 얼굴 붉혔던가. 확실했다. 나는 그동안 진보하지 못하고, 퇴보했다. 이제 와서 후회해 봐야 소용없지만 말이다.
등신처럼 말을 더듬던 지난날이 생각났다.
카, 카페, 라, 떼.
카, 카페, 라, 떼.
카, 카, 카……
이유 없이 답답했다. 오늘은 관찰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커피도 도통 넘어가질 않는다. 아듀 커피 건물 옥상에 올라왔다. 탁 트여 맑은 공기가 나를 맞았다. 텅텅 비어있는 직사각의 공간에 나 밖에 없었다. 위대한 관찰자는 옥상 난간으로 향했다. 발로 걸으려 애썼지만 질질 끌면서 갔다. 도무지 발목에 힘이 들어가지를 않았다. 뭘까, 이 무력감은. 위대한 관찰자가 옹졸한 패배자였음이 판명되는 순간의 쇼크인가. 나는 단두대 앞에 올라선 죄수처럼 난간에 하반신을 기대고 고개를 숙였다. 떨어질까, 말까. 죽을까, 살까. 비극에서 조롱 받아 희극으로 발령 받은 햄릿은 맥없는 고민을 자꾸 꺼내보았다. 고개를 숙이니 도로를 휘젓는 콩나물들이 보였다. 아듀 커피 창문으로 볼 때보다 더 많이, 더 조그맣게 보였다. 아무래도 나는 천상 관찰자인가보다. 아니, 인정해야지. 천상 관음증 환자인가보다. 고질병인가보다. 불치병인가보다. 고쳐질 수 없는.
혹여 저 콩나물들 중에 오렌지색 머리가 있지는 않을까. 어리석다. 모든 오렌지색이 다 홍다희는 아니다. 홍다희라고 해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나는 나를 버리지 못하고 그녀를 ‘죽이고’ 말았으니.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이제는 어딜 가나 주홍빛을 보면 심장이 무겁다. 낙담 가득한 역도 선수가 쿵 내려놓은 바벨에 가슴팍이 내리눌린 듯. 쉽사리 헤어 나오지 못한다.
고개를 계속 숙이고 있으니 관찰도 멈추지 않았다. 저 횡단보도 위로 벌써 자동차가 오십 대 넘게 지나갔다. 버스도 지나갔다. 그 날, 홍다희를 ‘살해’했던 버스 정류장을 이따금씩 들르던 그 버스. 아, 그 버스도 오렌지색이다, 참.
충동이 일었다. 쉬고 싶었다. 한 발만 떼면 연못에 던져진 조약돌처럼 기묘하게 잠수할 텐데. 그래, 나도 결국 바위였다. 다른 이뿐만 아니라 나조차도 똑같았다. 균형을 잃으면 추락하기 마련이었다. 바위, 비취석, 에메랄드, 조약돌. 다 똑같은 돌덩어리들이다. 우린 조각된 몸을 가지고 서로 원래 다른 모양이었던 척, 뽐을 내며 굴러간다.
그때, 초보자가 스노클링을 하듯 눈꺼풀 새로 물이 차올랐다. 눈이 아파서 나는 뒷걸음쳤다. 옥상 난간에서 점점 멀어져 갔다. 내 의지가 아니었다. 그래도, 뒷걸음질을 마다하지 않았다. 겁보다는 서러움이 컸다. 왼발과 오른발이 엇갈렸다. 풀썩, 주저앉아 버렸다.
크게 심호흡을 했다. 건물 배때기에 ‘아듀 커피’ 로고가 오목조목 박혀있다. 은은한 무드등으로 장식되어 있다. 다짐했다. 스스로 바위인 것을 인정하지 않겠다고. 떨어지지 않으면서 관찰에 종지부를 찍을 참이었다.
아듀 커피를 찾았다. 낯선 사람, 낯선 인사, 낯선 목소리가 끼얹힌다. 차분히 가다듬고 메뉴판을 훑었다. 마지막 관찰을 하면서 충분히 목을 축여야 했다.
오렌지 주스, 주세요.
주문을 마치고 나의 전용석에 앉았다. 가방에서 필통과 노트를 꺼냈다. 두근두근. 긴장되는 마음을 애써 달랬다.
관찰이 시작되었다.
이 사람, 저 사람. 이 여자, 저 남자. 날아가는 비둘기, 파레뜨로 얼룩진 하늘. 심어진 빌딩과 짙어지는 공기. 도시, 거리, 사람, 사랑. 사랑, 사랑. 또, 사랑.
오른손이 끊임없이 움직였다. 나는 관찰 결과물을 노트에 적었다. 눈동자와 손가락이 펜촉을 사이에 두고 합일되는 순간이었다. 또 다른 희열이었다. 다시 눈물이 흘렀다. 바보였다. 나는 나를 잊고 살아왔다. 흰 종이 위에 무채색의 단어들이 줄을 섰다. 가지런한 글씨들은 행렬과 분산을 반복했다. 그러면서 시가 되고, 이야기가 되었다. 혹자는 또 이것을 보고 추악하다, 더럽다고 할지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상관없다. 이것이 나의 언어이자 소통이었다. 남들의 왈가왈부에 입 닫을 수는 없었다. 소통을 이어가야 했다. 이 방법만이 유일하다면.
나는 관찰자가 아니라, 생산자였다. 물론, 그렇다고 관음증 환자가 아닌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조금 더 두고 봐야했다. 아직도 저 낙서를 보면, 왼쪽 눈동자가 따끔따끔하므로.
똑똑.
앞에서 소리가 났다. 손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주위가 환했다.
기분이 딱히 좋은 것도 아닌데, 그다지 행복한 것도 아닌데, 너그러운 웃음이 났다. 실룩샐룩 입술이 움직였다. 나 홀로 킬킬거리고 있는데 저쪽에서 먼저 말 걸어왔다.
손님, 오늘도 같은 걸로 드려요?
아니. 오늘은, 아니.
사탕 드려요?
그래.
초콜릿 드려요?
그래.
쪽지도 드릴까요?
그래, 좋아.
웬일이세요?
나도 이제 좀 말하고 싶어서.
그것 봐요. 당신이나 나나, 관음증 환자이기 전에 사람이었잖아요.
아, 또 깜빡할 뻔했네. 손님, 이름 좀 알려주세요.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