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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덜보스의 바울신학 해설 7강
III. 총체적 관점 – 완전함
사도 바울의 권면은, 앞에서 우리가 연구한 성화의 경우에서와같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새로운 순종에도 총체적인 성격이 있다는 것을 특징적으로 보여준다(이곳에서 총체적, totalitär라는 말은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에게 그의 모든 것을, 영혼 전체, 삶 전체를 요구하신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하나님 아들께서 죄인에게 자기 전체를 주시고, 영생뿐만 아니라 그분이 얻은 모든 은사를 부어주시기 때문이다. 이렇게 우리는 그리스도와 모든 면에서, 삶 전체에서 묶여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부활했기 때문이다. 이 점을 이해하지 못하면 복음을 이해할 수 없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의 은혜를 덧입어, 모든 것에 대해 그분과 포괄적이고 새로운 관계를 맺게 되었으므로 이러한 총체적인 시각이 자연스럽게 형성되었고, 이것은 바울이 교회에 주는 권고의 범위도 결정해준다. (바울이 교회에게 하는 모든 권고는 바로 이러한 전체적인 시각에서 주어진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49장 “세상에서의 삶”에서 논하게 된다.
그 외에도 그리스도인은 전인격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구속행위 안으로 참여되어 있다는 관점도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이 주어져 있으므로,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이 요구될 수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에게 양적으로, 범위에서뿐만 아니라, 질적으로, 강도에 있어서 모든 것이 요구된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중심적인 관점 다음으로 전체적인 관점이 바울 권고의 본질과 특성에 속한다[1].
이러한 총체적 관점이 잘 드러나 있는 본문은 앞에서도 자주 인용한 로마서 6-8, 12장이다. 죄가 인간을 전인적으로 주관하는 전체적(총체적, 절대 독재적) 체제인 것과 같이(롬 6:12-13; 7:14), 새 사람은 이러한 방식으로 자기 몸(자기 자신, 전 인격)과 자기 모든 지체(자기 행동과 모든 가능성, 능력)를 하나님이 처분하시도록 맡겨야 한다. 그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난 자이므로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여야 하고, 매사에 그분의 뜻을 묻고 찾아야 한다(롬 12:2). 행하는 것뿐만 아니라 원하는 것, 몸과 혼과 영도 모두 하나님의 요구에 맞추어져 있어야 한다:
o 빌 2: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o 살전 5:23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을 모든 면에서 부요하게 하신 것 같이(고전 1:5; 고후 9:11), 그들도 모든 면에서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해야 한다(고전 10:3; 골 3:17). 그들은 모든 것에서 순종해야 하고(고후 2:9), 모든 것이 사랑 안에서 행해져야 한다(고전 16:14). 신자들은 모든 지혜와 영적 지식으로 충만해서, 하나님 앞에서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일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모든 선한 일에서 열매를 맺으며 모든 능력으로 힘을 얻어서 모든 것을 인내하고 오래 참는 것이 마땅하다(골 1:9-11).
이렇게 바울의 모든 권면은 우리가 다른 말로 바꾸어 표현하기 어려운 독특한 방식으로 전체적이고 비타협적인(절대적으로 그렇게 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문체로 되어 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에게 자연스럽게 다음과 같은 질문이 떠오른다: “나”라는 인간 전체를 요구하는 이러한 명령이 우리 삶에서 어떻게 적용되며 우리가 이 생에서 이것을 어떻게 실행할 수 있을까? 다른 말로 표현하면 도덕적 완전함에 대한 질문이다.
이 질문은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성화 개념에서 다룬 질문과도 연관된다. 바울은 성화를 정결하게 되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도덕적 완전함이라고 했다. 이러한 성화는 “책망할 것이 없는” 것, “티나 주름잡힌 것이 없는” 것, “그 어떤 결점도 발견할 수 없는” 것으로 정의된다. 교회는 이미 현재 삶에서 이러한 거룩함에 도달할 수 있으므로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주님께 흠 없이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바울은 하나님이 교회를 끝까지 견고하게 해 주셔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게 할 것이라는 의미에서, 살전 5:23에서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고 기도할 수 있었다. 이렇게 이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현재적인 성화의 목적과 결과이다.
이러한 선언과 이와 비슷한 바울의 가르침을 근거로, 바울은 진정으로 구속되어 성령님을 받은 사람은, 자신의 정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고 죄로부터 해방된 사람이며, 성령님의 인도를 받는 새 사람이므로, 더는 죄에 빠지지 않는다고 확신했다고 말하는 학자들이 있었다. 이것이 진정으로 세례를 받은 그리스도인에게 보편적으로 해당된다는 것이다. 즉, 바울은 성화에 있어서 책망할 것이 없는 상태가 되는 것을 단지 신자들이 추구해야 할 목표가 아니라 도달할 수 있는 목표로 제시하고 있다는 견해, 즉 바울은 일차적으로 자기 자신의 죄와의 싸움에서 승리해서 사실상 죄를 완전히 떠났고, 그런 상태를 온전함으로 표현하고 있고, 이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고 말했다는 견해를 펼친다.
그러나 이것을 옳지 않다. 사도가 죄와 죽음의 권세에서 해방되었다(인디카티브)고 할지라도, 이것은 신자가 이미 죄를 이겨서 죄를 떠나 있다는 의미로 말하지 않은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다면, 바울이 신자들에게 죄를 짓지 말라고 끊임없이 권면하고 경고하는 것이 이해되지 않을 것이다. 그는 항상, 한편으로는 이미 승리했다는 사실의 토대 위에서 투쟁하라는 것과, 다른 한편으로는 투쟁을 토대로 승리를 얻는 삶이라는 이중적 관점에서 신자의 삶을 묘사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죄에 대해 돌아가셨으므로 신자는 자기도 (능력으로서의) 죄에 대해 죽었다는 확신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롬 6:11).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위해 살아야 하는 신자의 이런 삶을 표현하고자 이제 바울은 전투 용어를 사용하는데, 이것은 단지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이루어진 승리뿐만 아니라 (신자들의 삶에서) 앞으로 일어날 승리를 기반으로 한다. 바울은 자신의 직무에 대해서 이러한 식으로 말한다. 그 직무는 비록 본질적으로 그리스도의 승리를 선언하는 것이지만(참조: 고전 15:54 이하), 좀 더 명확하게 말하면 우리가 그리스도의 개선 행진에 참가하는 것이지만(고후 2:14), 동시에 그는 대장군 그리스도 밑에서 자기도 싸워야 한다(참조: 고후 10:3-4; 딤후 2:3). 바울은 이러한 군 복무에 대해 말하는데, 그는 머리에서 발까지 완전무장해야 한다는, 완전히 전투적으로 묘사한다(고후 6:7).
그가 싸우는 싸움은 원수의 요새들과 견고한 진들을 무너뜨리고 포로를 잡는 것이다(고후 10:3 이하). 그리스도에 의해 자유를 얻게 된 자들의 삶은 이제 바울과 마찬가지로 군사로 부르심을 받고 싸우는 군복무라는 동일한 성격을 지닌다. 이것은 진정으로 “그리스도를 위해 싸우는 군복무”이다. 이러한 설명은 로마서 6장의 맥락 속에서도 등장한다: 너희 지체들을 죄의 명령에 순종하여 “불의의 무기”로 내어 주지 말고,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의의 무기”로 내어 드려라(13). 신자들이 이 싸움을 싸우는 방식은 자신들의 지체들, 즉 그들의 삶의 표현 전체를 하나님을 섬기는 데 드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자들이 이미 “죄를 짓는 단계”를 벗어났다고 주장하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다. 신자들은 죄에 대하여 승리하신 그리스도를 힘입어 죄에 대항한 싸움을 해 나가야 한다.
이러한 경고가 얼마나 진지한지, 그리고 이 싸움이 어떠한 맥락속에 있는지는 엡 6:11 이하에서 잘 드러난다. 이곳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전신갑주”라는 표현을 두 번 사용하고, 그 후에 여러 가지 개별적인 무장 도구들을 나열한다(참조: 살전 5:8[2]). 이것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로 하는 싸움이다(엡 6:12). 이것은 신자들의 싸움은 도덕적인 면에 있어서도 어둠의 세력과 그리스도의 왕권 사이의 지속적인 종말론적 대립과 결부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골 1:13). 또한, 그것은 로마서 13장에서 “밤이 깊고 낮이 가가웠다”고 말하면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고 말하는 취지이기도 하다.
다른 곳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악의 세력을 이기시고 이들을 자신의 개선마차에 묶어 끌고 오셨고(골 2:15), 자기 백성을 이 권력으로부터 해방시켰다고 하는 반면에(골 1:13), 에배소서 6장에서는 “아직 아닌”, 혹은 “아직 온전히 아닌”이라는 관점이 나타나 있다. 마찬가지로 롬 13:12에서도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라고 말함으로써, 시기가 가까이 오기는 했지만 아직은 온전히 온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이렇게 구속사적인 관점은 도덕적인 함의들도 지닌다.
그리스도인이 여전히 시험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는 경고
이와같은 것은 바울이 시험의 위험에 대해, 그리고 이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사단의 위험에 대해 경고한 것에서도 나타난다. 사단이 시험의 원천이라는 것은 다음 구절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살전 3:5[3]; 고전 7:5; 고후 2:11; 딤전 3:7. 사단과 그의 모든 능력은 그리스도의 권세에 복속되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의 권세의 영향력은 여전히 계속되어 신자들을 시험하고 있다(고전 7:5[4]; 고후 2:11; 11:14; 살전 3:5). 바울이 사탄을 명시적으로 언급하지 않지만 죄로 귀결되는 시험들에 대해서 경고하는 구절들도(고전 7:5; 고후 2:11; 11:14; 살전 3:5) 거기에 비추어 이해해야 할 것이다.
또한, 사도는 하나님은 미쁘셔서 사람이 “감당하지 못할 시험”을 허락하시지 않기 때문에, 교회가 지금까지 “감당할 수 있는 시험”만을 겪어 온 것이라고 위로한다. 그럼에도 그는 옛 이스라엘의 예를 제시하면서 이렇게 경고한다: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 이렇게 도덕적인 관점에서도 신자들은 아직도 위협을 받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승리하셨다고 해서 이것이 우리가 깨어 있고 정신차리고 있어야 할 필요성이 사라진 것이 아니다.
육체의 정욕에 대한 경고
신자의 삶에서 지속해서 작용하는 육체의 정욕에 대해 언급하는 가르침도 이와 같이 구속사적인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갈 5:17이 이에 대한 대표적인 구절이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은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다”.
다른 곳에서 바울은 육체와 성령님의 지배에 관해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체에 있지 아니하고 (성)령에 있나니[5]”(롬 8:9)라고 말하는데, 이 말은 갈 5:17과 모순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성령에 있다”는 말은 먼저 성령님이 인간의 육신의 능력이 없어질 정도로 인간의 자아를 무력화 한다는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롬 8장 말씀은 오히려 육신에 따라 살지 말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으라는 근거가 되며, 이로써 그렇게 살도록 격려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갈 5:17이 분명히 말하고 있는 것, 즉 신자는 성령님과 육신이 서로 주도권을 잡고자 투쟁하는 단계를 벗어나지 않았다는 것을 전제한다. 그러므로 갈 5장에 따르면 육신의 권세는 여전히 신자들이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할 정도로 영향력을 행사한다(그러므로 우리는 성령님의 능력으로 싸워야 한다). 이곳에서 “원하는 것”이란 신자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 행하고자 하는 것임에 틀림없다(빌 2:13). 육신의 지속적인 영향력, 즉 육체의 소욕에 의해 신자들이 “원하는 것”은 순조롭게 되지 않고, 그런 것을 행하고자 할 때에 방해 받는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육신의 종노릇을 하고 있다는 것이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롬 7:14 이하에서 묘사하고 있는 상황, 즉 죄 아래 팔려서 죽어 있는 상태가 부활한 것이 될 것이다.
우리가 성령님에 따라 행할 때, 율법 아래에 있었을 때 체험했던 도덕적 무능력 상태에서 살지 않게 된다. 롬 7:14 이하와 갈 5:17 사이의 중요한 차이점은, 롬 7장은 육신의 상태로부터 출발한 것이며, 갈라디아서 5장은 성령님 안에 있을 때의 관점에서 바라본 것이다. 갈 5장에서 육신의 영향력이 지배하면 신자들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은, 신자들이 믿음으로 살지 않음으로써 성령님이 선사하신 자유를 누리고 살지 않는다면, 로마서 7장에서 묘사하는 상황이 다시 돌아오는데, 이것은 신자가 근본적으로 항상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일시적으로 그런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내적 불화는 신자의 실존의 본질에 속한다는 것이 아니라, 신자의 상태가 – 도덕적인 의미에서도 – 투쟁의 상태에서 있다는 것과, 따라서 항상 깨어 있어야 하며 단지 항상 믿음으로 새롭게 성령님의 인도를 따를 때에만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한편으로는 그리스도 안에서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육신과 율법에 대해 단번에 죽었기 때문에, 육체를 따라 살아가는 실존 방식과 율법 아래에서의 삶으로부터 떠났다고 말할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신자들은 여전히 육체의 소욕들과 시험에 노출되어 있다는 점에서 옛 사람과 새 사람이 대립하여 싸운다는 것이 그들에게는 계속되는 현실이다.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자유는, 죄가 더는 우리를 이길 수 없다는 도덕적 완전주의 의미에서가 아니라, 이것을 이미 그리스도에 의해 정복된 세력으로 여기라는 것이다. 그 자유는 투쟁을 요청하는 자유이다. 그 이유는 투쟁이 더는 희망이 없는 싸움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승리로 결정된 싸움이므로, 성령님 안에서, 그리고 그분 능력을 받아서 이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의 완전함(온전함)의 의미
성령님에 의해 자유롭게 된 삶의 특성인 “완전함”과 “흠 없음”에 대해 말하는 문구들은, 앞에서 논의된 것과 밀접한 관계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 이에 완전함의 개념을 단지 도덕적으로만 해석하고 양적인 것에 제한하는 것을 피해야 한다.
신자의 완전은 무엇보다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것을 포괄하는 구속의 충만과 관계한다. 이곳에서도 당연히 직설법과 명령법 사이의 관계가 적용된다. 직설법은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의 충만함에 참여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구절에서 나타난다:
o 고전 2:6-7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는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에서 없어질 통치자들의 지혜도 아니요, 오직 은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으로서 곧 감추어졌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o 빌 3:13-15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어떤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o 골 1:27-28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o 골 4:12 “그리스도 예수의 종인 너희에게서 온 에바브라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그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애써 기도하여 너희로 하나님의 모든 뜻 가운데서 완전하고 확신 있게 서기를 구하나니”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선물로 받은 구속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든 범위로 침투하고 펼쳐진다는 의미에서 성숙과 성장이라는 생각과 연관된다.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서 온전히 발전시켜 나감으로써 성장하여 장성한 자가 되어야 한다는 개념은 엡 4:13에서 이주 분명하게 드러나는데, 거기에서는 교회가 세워지는 것에 대해 말하면서, 온전히 성장하여 다 자랐다는 의미에서 „온전한 사람“을 아직 미숙한 „어린 아이“와 대비시킨다. 우리는 이 동일한 대비를 고전 2:6 이하와 3:1 이하에서도 볼 수 있다. 그리고 골 1:28도 동일한 방식으로 해석해야 한다.
성장이라는 개념은 새로운 삶은 성장해야 한다는 것, 즉 온전함을 향해 계속 진전해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말해준다. 믿음이 자라는 것(고후 10:15), 의의 열매(고후 9:10), 거룩한 성전으로 성장하는 것(엡 2:21), 모든 선한 사역에서 열매 맺고 올바로 하나님을 깨닫는 것에서 성장하는 것(골 1:10), 감사함(고후 4:15)과 기쁨(고후 8:2), 사랑의 일(고후 8:7)과 모든 선한 일(고후 9:8)이 점점 더 넘치게 하는 것 등과 같은 다양한 표현은 그리스도인의 삶과 도덕적 자유함이 어떤 것인지를 분명히 보여준다.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진보가 있어야 하는데(참조: 롬 5:3 이하), 이것은 자동으로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실천할 때 이루어진다. 이러한 이유에서 바울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라고 격려할 수 있었고(고후 7:1), 흠이 없는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함을 얻은 자들의 거룩한 목표라고 말할 수 있었다(엡 5:27; 빌 1:10; 2:15).
o 고후7:1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
o 엡5:25-27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
o 빌1:10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o 빌2:15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그는 이 “흠이 없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하나님께서 교회에 주실 선물이지만(고전 1:8), 교회도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을 면밀하게 분별해서 행함으로써 그런 선물을 받을 준비를 해야 한다고 말한다(빌 1:10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요약해서 말하자면, 바울이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해 말할 때 드러나는 주도적인 관점은, 신자들이 여전히 겪어야 하는 시험이 아니라, 모든 죄를 이기는 성령님의 능력이라는 것이다. 신자가 믿음 생활을 시작한 후에 그 상태에 계속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은, 완점함에 대한 그의 서술형적, 명령형적 진술과 맞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항상 미래를 가리키며, 교회가 이미 무죄 상태에 도달했다든지, 그런 상태에서 안식할 수 있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그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죄를 짓지 않는”(non peccare), 더더욱 “죄를 지을 수 없는”(non posse peccare) 삶으로 묘사하지 않으며, 단지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posse non peccare) 것으로 묘사한다.
교회가 이미 달성한 도덕적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과 신실함을 믿는 믿음이(살전 5:24), 현재의 모든 유혹과 불완전 속에서 “흠 없는 것”과 “티 없는 것”을 이루어 나가고 이것을 목표로 삼아 살게 한다는 것을 바울을 가르치고 있다.
살전5:23-24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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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리덜보스는 이곳에서 볼프강 쉬라게의 책을 참고문으로 지칭했는데, 그의 책들은 신학윤리, 바울윤리 연구 부분에서 공헌했다. 나도 이것들을 읽고 많이 배웠다.
[2] 살전 5:8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정신을 차리고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을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
[3] 살전3:5 “이러므로 나도 참다 못하여 너희 믿음을 알기 위하여 그를 보내었노니 이는 혹 시험하는 자가 너희를 시험하여 우리 수고를 헛되게 할까 함이니”.
[4] 고전7:5 “서로 분방하지 말라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합의상 얼마 동안은 하되 다시 합하라 이는 너희가 절제 못함으로 말미암아 사탄이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5] “성령 안에(엔 프뉴마티)”.
*강의자 : 송다니엘 교수
*본 리덜보스의 바울신학 해설 7강은 2024년 8월 25일(주일)과 9월 1일(주일)에 실시된 부천개혁교회의 사경회와 부천개혁성경신학교의 집중강의를 겸하여 강의된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