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많은 똑똑한 아이들은 어디로 갔을까? - 권재원
교육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PISA라는 단어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지 잘 알지는 못하더라도 '세계'를 대상으로 한 '시험'이라는 것, 그리고 그런 큰 무대에서 다른 선진국을 제치고 우리가 우수한 성적을 거뒀다는 것은 상식이 되었다.
상식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사교육 덕분'이지 형편없는 공교육의 결과가 아니라는 쪽과 '과중한 학습 노동 때문이며 학생들의 행복을 희생시킨 대가'로 크게 나뉜다. 그러나 어느 쪽도 자세한 분석이 없는, 자신의 세계관을 반영한 판단에 불과했다. 기껏 해야 자신의 주장에 대한 근거로 '사교육 시장 확대 추이'나 '학생 행복 지수' 따위의 이름을 단 도표 하나 달랑 꺼내들 뿐이다. 말만 앞서는 사람들이 자아도취나 다름 없는 주장을 하는 동안 저자는 묵묵히 지금까지 나온 PISA 보고서 전부를 혼자 독파했다. 연구에 온전히 시간을 쏟을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교사로서 학생을 가르치면서도 여가 시간을 쪼개 연구를 진행한 것이다. 하지만 책의 내용처럼 '대한민국의 교사는 우수하다'라는 것을 증명하는 듯 그의 분석은 치밀하다.
저자의 말처럼 '이 책은 PISA의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우리나라 공교육의 현실을 진단하고, 앞으로의 교육 개혁 방향을 제안하는 책이다.' PISA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 읽기에도 좋지만 글을 쓴 목적이 우리의 현재와 미래를 향한다는 말이다. PISA 분석에 대한 내 시각은 저자와 대동소이하다. 그러나 해석과 나아가 미래에 대한 예측은 다른 점이 있다. 저자는 책의 신뢰도를 위해 자료를 벗어나는 해석을 최대한 줄이려 했지만 나는 그와 상관 없으니 마음껏 생각을 펼쳐보려 한다.
*저자의 분석에 대해 한 가지 첨언을 하자면, 핀란드에서 자체 분석한 2012년도 PISA에서 순위가 급격히 낮아진 이유는 다문화자녀의 비중이 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응시자 중 15%인 1,270명이 다문화자녀였기 때문에 모국어로 시험을 봐야하는 PISA에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이는 머지않은 우리의 미래이기도 하다.
저자가 PISA 분석을 통해 추출한 교훈은 '넘치는 것을 버리고 부족한 것을 채우자'는 것이다. 이를 실현하기 위한 제안은 다음과 같다. 학력 신장을 목적으로 강화된 제도들을 폐지하는 것과 일정 시간 이후에는 사교육도 받을 수 없도록 수업량과 학습량에 상한선을 두는 것, 그리고 문학을 비롯한 예술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다. 또한 '지식을 전달하는 학교'에서 '학생이 성장하는 학교'로 변하기 위해 혁신학교에서 먼저 바뀐 학습관에 따라 재배치된 교육 활동을 실험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평생교육이 다른 나라에 비해 뒤떨어진 상황의 위험성을 꼬집으며 직장은 학습이 일어나는 곳으로 변해야 하고, 문화시설도 두 배 이상으로 늘려 도처에서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역설한다.
저자의 제안이 와닿는가? 그렇다면 고려해야 할 점이 있다. 저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시간이 더 이상 우리 편이 아니게 될 가능성이 높다'는 강력한 변수가 있다. 위의 제안은 교육 개혁만으로는 달성하기가 어렵다. 사회 인식의 변화가 반드시 따라야 한다. 한 가지 예를 들어 보면 예전에 '과외 금지'가 강력하게 시행됐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과외가 사라졌는가? 오히려 변형된 형태로 성행하게 됐다. 사람들의 의식 속에는 학교 수업 외에도 공부를 해야만 한다는 생각이 강하게 자리잡았기 때문이다. 왜 그럴까. 그때 당시에 입시 성적에서의 우위는 경제적, 사회적 지위에서의 우위와 연결된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의 인식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인식이란 그리 짧은 시간에 바뀌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나로서는 교육 개혁이 시도로 그칠 것이라는 우려가 가득하다. 하지만 인간자본론의 입장에서 본다면 머지않은 미래-길게 봐서 30년 후에 우리가 거대한 위기에 봉착하게 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시간이 부족해 여러 가지 시도를 할 수는 없고, 그렇다고 마땅한 답도 없는 것이 지금 우리의 상황이다.
반면, 시간은 우리에게 기회를 주기도 한다. 한 패러다임에서 다른 패러다임으로 넘어가는 시기에는 언제나 예상치 못한 변수가 가득하다. 학교의 위상과 역할이 흔들리고 기업도, 정치도 갈피를 잡기가 어렵다. 즉, 기존의 질서가 깨어지기 마련이다. 이를 혼돈의 시기로 볼 것인가, 기회의 시기로 볼 것인가는 우리의 선택이다. 시기를 포착하여 국가적 대타협을 준비하는 것이 우리가 그릴 수 있는 가장 큰 그림이 아닌가 싶다. 그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첫째는 교육의 중요성을 최대한 많은 사람이 인지하고 있도록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진보와 보수, 지역과 세대, 사용자와 노동자 등 각종 차이를 넘어 사회적 연결망을 구성하는 것이다. 이 무슨 허황된 소리인가 싶겠지만, 나는 이 의견대로 살아가고 있으며 나 이외에도 이런 움직임을 준비하는 이는 많다. 내가 진행하고 있는 눈덩이 프로젝트도 그런 움직임 중 하나이다.
누군가가 보수는 말도 안되는 주장도 그럴 듯한 자료를 내세우며 설득하는 반면, 진보는 감성에 호소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말했다. 어려운 내용을 평균 정도의 문해력만 있다면 충분히 이해하고 추론할 수 있을 정도로 바꾸느라 저자가 고생 깨나 했을 것이다. 이 정도의 책이 사장될 국가라면 감히 인간의 성장을 위한 '교육'에 관심이 많다고 말할 수 없다. 그저 생존과 신분 상승을 위한 도구를 얻기 위해 목매는 거라고 인정해야 한다.
사족.
기왕 서평을 쓰는 김에 PISA에 대해서도 하나만 이야기하고 싶다. PISA의 통제변인 중 가장 눈여겨볼 것은 만 15세를 대상으로 한다는 점이다. 경제학에서든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든 만 15세 이후는 성인으로 취급받는다. 하지만 우리 나라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다. 고등학교 진학은 성인이 여러 선택 중 자신에게 맞는 것을 스스로 고른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강요받아 하나밖에 없는 선택처럼 여겨진다. 자신의 의지로 선택했다는 느낌이 들지 않을 때 몰입은 불가능하다. 2006년부터 2012년까지 PISA에 응시해 우수한 성적을 뽐낸 학생들은 2013년 PIAAC에서는 16~24세의 성인이 되었다. 그러나 모든 영역에서 떨어진 모습을 보인다. 최상위층의 비율은 더욱 줄어들었다. '학습할 능력'을 평가하겠다는 PISA는 이렇게 한계를 보인다. 사람은 기계가 아니다. 부품이 공장라인을 모두 통과하면 완제품이 되듯이 공교육이 끝남과 동시에 사람이 완성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만 15세의 소양은 기능이 아니라 가능성에 불과하다. 그 가능성을 억압하는 사회에서는 제대로 발현될 수 없다. 사회를 바꾸기 위해서는 무수한 노력과 제법 긴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니 결과에 일희일비하며 야단법썩 떨지 말고 우리가 지혜를 모은 바대로 차근차근 걸어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