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체 지우기
김분홍
얼룩을 두려워 하지 말아요 아픈 기억도 지워지니까요
서랍 속의 연필은 나를 대필하지 못해요
당신은 선조체가 발달했고
펜은 그런 취향을 잘 대변합니다
잉크는 누구의 머릿속에 고여 있는 생각입니까
그날의 악몽에서 벗어나지 못한 내 삶은 잉크병 속에 방치 되기도 했죠
침묵의 뚜껑이 열리면서
펜은 논리적인 문장을 만들어 주었고
옹이가 박힌 연필은 흑심을 품고 뭉툭해집니다
희뿌연 하늘을 보면 화이트보드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거기에 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릴 수 있기 때문이죠
당신은 올 풀린 스웨터의 형상으로 무수한 글자들을 풀어 냅니다
말줄임표와 별들이 빼곡하게 적혀 있는 하늘
뭉게구름이 수시로 뭉개고 있군요
탄력은 노랗다는 겁니까? 까맣다는 겁니까? 탄력은 붉은색
통통 튀는 당신의 입술도 붉군요 기억은 타이어 마찰음처럼 히스테리해요
지금 그 마찰음은 어디로 굴러가는 걸까요
지워지지 않아서 지울 수 있는
당신의 얼룩이 아직도 나의 얼룩을 어루만지고 있군요
*선조체 : 뇌의 한 부분으로 마음을 다스리는 영역
우리는 브로콜리
샴쌍둥이가 등 돌린 사이라고 해서 풍경까지 등 돌린 건 아니다
우리는 흩어지지 못하고 쌓여가는 관계라서
사막에 뿌리 내린 변종을 꿈꾸는 바오밥나무
샴쌍둥이가 다리를 공유했다고 해서 얼굴까지 공유한 건 아니다
우리는 일가를 이뤘기에
다종의 얼굴을 다중으로 교체한다
밑동 잘린 장대비를 수확하는
우기의 계절
다리 따로 우기 따로 떠도는 우리는
하나일까 둘일까
마음이 뭉툭해진 구름은 마블링을 넓혀 갈 수 없다
구름을 아삭하게 끓는 물에 데칠 순 없을까
질문은 대답으로 쌓여 간다
자라지 않기로 결심한 구름은
다리가 퇴화하고 머리가 진화하기 시작한다
배우들이 가채를 쓰고
황후의 두 얼굴을 연기한다
낱장으로 태어나지 못한 슬픔이 다발로 묶인다
시집 〈눈속에 꽃나무를 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