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 다섯 가지 장애는 감각적 욕망, 악의, 해태와 혼침, 들뜸과 회한, 의심입니다.
이것은 선한 마음이 아닌 불 선업의 마음의 작용(cetasika.쩨따시까)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것에 반대되는 것이 선업의 마음의 작용으로 심일경성, 환희, 숙고, 행복감, 고찰입니다.
이와 같은 불 선업의 마음의 작용인 다섯 가지 장애를 선업의 마음의 작용으로 바꾸는데는
다섯 가지 선정의 요소를 개발해야 합니다.
이 때의 선정의 요소를 사마타(samatha)라고 합니다. 이 사마타라는 말은 적지(고요함에 머뭄)입니다.
다시 말하면 다섯 가지 장애를 없애야 수행을 해나갈 수 있기 때문에 그 장애를 없애려면 다섯 가지 선정이 필요한데 이 때의 선정을 사마타라고 합니다.
이 사마타라는 선정이 불 선업의 오개를 선업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붓다가 출현하시기 전에는 수행이라고는 오직 이 사마타 방법밖에 없었습니다.
이 선정의 방법은 하나의 대상에 집중하여 마음을 모으는 다소는 인위적인 방법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무엇이나 나타나면 모두 받아들여서 보는 위빠싸나와는 다릅니다.
수행초기에 사마타는 오직 하나의 대상에 의도적으로 몰입하는 것이라서 집중이 잘 되고 편안할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사마타의 집중 없이 하는 순수 위빠싸나는 무엇이나 나타나는 대로 다 조건 없이 보아야 되기 때문에 집중이 잘 안되고 혼란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방법은 꿰뚫어 보는 것이라서 빠르게 법을 얻을 수 있는 장점이 있습니다.
사마타 수행방법은 40가지가 있습니다. 이것은 붓다고사의 청정도론에 근거한 것입니다.
사마타의 목적은 장애를 없애기 위한 고요함을 개발하는데 있습니다.
이 사마타 수행은 그냥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마타 수행을 위해서 필요한 다섯 가지 의근력(mano-indriya)의 균형이 있어야 됩니다.
이것은 믿음, 정진, 알아차림, 집중(고요한 마음의 집중), 지혜의 균형을 말합니다. 이것의 조화가 있어야 장애라고 하는 악업의 행위가 선업의 행위로 바뀝니다.
그러나 위빠싸나는 이러한 방법을 거치지 않고 그 때 마다 바로 대상을 알아차림으로써 장애를 제거합니다. 그리하여 매 순간마다 일어나는 사견과 탐진치라는 번뇌를 제거하여 열반에 이르게 됩니다.
정리를 하면 사마타의 목적은 장애를 없애기 위해 고요함을 진전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방법은 위빠싸나를 위한 전 단계로 필요한 것입니다. 사마타에는 고요함만 있지 닙바나가 없기 때문입니다
위빠싸나의 목적은 자아에 대한 사견의 제거와 이에 따른 탐진치라는 최종적인 번뇌를 제거하는 것입니다. 오직 이 방법만이 닙바나에 이를 수 있는 유일 무이한 길입니다.
붓다께서는 고요함에 편히 머무는 것은 숭고한 삶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의 최종적인 목표는 탐진치가 제거된 닙바나입니다.
그래서 사마타 수행으로는 열반에 이를 수 없기 때문에 선정의 집중력을 키워 위빠싸나 수행을 돕기 위한 방법으로 사용합니다.
그러나 열반이라는 꿈이 없는 사람은 사마타 방법으로 편안함을 얻거나 특별한 능력을 얻으려 할 것입니다.
붓다께서 출가하시어 3선정을 얻고 4선정을 차례로 얻으시고도 번뇌를 해결하지 못하여 다시 6년간 고행을 하셨습니다. 그러다 사마타 수행을 포기하시고 새롭게 위빠싸나라는 수행방법을 찾아내시어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깨달음을 얻고 신통의 힘으로 보시니 지금까지 출현하신 붓다 여섯 분이 모두 위빠싸나라는 사념처 수행으로 법을 얻으신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이 방법은 붓다가 만드신 방법이 아닙니다. 붓다께서 찾아내신 방법입니다.
사마타 수행은 조용한 장소가 필요하며 시간이 많이 걸린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위빠싸나 수행에서는 여러 가지 방법이 필요 없습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용어가 필요 없습니다. 오직 알아차림 하나면 됩니다. 그러나 충분한 알아차림을 하기가 어려워 사마타에서 사용되는 방법을 직간접으로 이용하기도 합니다.
닙바나에 이르는 과정에서 위빠싸나는 필수이고 사마타는 선택사항입니다.
위빠싸나에서 사용되는 많은 용어들도 사마타 용어가 많습니다. 위빠싸나 수행이전에 사마타 수행을 할 수도 있기 때문에 선정이란 말이 사용되고 있기도 합니다.
사마타와 위빠싸나는 수행방법을 구별하여 부르는 명칭입니다.
사마타는 하나의 대상에 집중하는 보통의 모든 수행벙법을 말합니다.
위빠싸나는 신수심법 4념처라고 하는 여러 가지를 보고 알아차리는 수행방법을 말합니다.
하나의 대상에 집중하는 사마타는 선정(jhana)을 얻고자 함입니다.
선정은 지금, 여기에 편히 머뭄이라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 상태에 이르기 위해 필요한 것이 사마디(samadhi)입니다.
사마디라는 말은 청정한 마음의 집중이란 말입니다.
그냥 집중, 또는 삼매라고 하면 뜻이 완전하지 않습니다.
청정하다는 것은 6근이 6경에 부딪쳐서 6식하는 과정(18계)에서 있는 그대로 본다는 뜻입니다. 있는 그대로는 탐진치 없이 본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있는 그대로 보아서 고요해진 마음의 상태가 된채로 집중하는 것입니다.
사마타라는 선정을 얻기 위한 사마디가 있습니다.
그것을 근본적 삼매, 깊은 삼매, 안지정, 근본정 이라고 여러 가지로 부릅니다.
이것이 아빠나 사마디(appana-samadhi)입니다. 아빠나(appana)는 근본, 집중이라는 뜻입니다.
사마타에서 필요한 또 다른 사마디는 근행에 대한 집중, 초기 삼매, 근행정으로 부릅니다.
이것이 우빠짜라 사마디(upacara-samadhi)입니다. 우빠짜라(upacara)는 접근, 근행이라는 뜻으로 돌을 던지면 닿을 수 있는 곳이라는 말입니다. 깊지 못한 사마디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상 두 가지가 사마타 선정을 얻기 위해 필요한 사마디입니다.
그러나 위빠싸나에서는 이런 선정을 위한 사마디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깊은 사마디에 들면 대상과 하나가 되어 대상의 빠라마타(실재, 성품)를 볼 수가 없습니다.
고요함에 깊게 빠지면 그 상태에서는 지혜가 나지 않습니다. 수행자가 얻고자 하는 궁극적인 것은 지혜입니다.
그래서 위빠싸나에서는 찰나 삼매, 순간적 삼매, 찰나정을 필요로 합니다.
이것을 카나까 사마디(khanika-samadhi)라고 합니다.
카니까(khanika)는 찰나적, 순간적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위빠싸나의 집중은 사마타의 집중과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위빠싸나는 늘 맑게 깨어서 나타나는 대상을 조건없이 모두 보기 때문에 깊게 들어가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알아차림입니다. 위빠싸나의 알아차림은 가볍고 정확하게 그냥 알고, 알고 하면서 나타나는 대상의 변화를 계속 보아야 됩니다.
그러므로 깊게 들어갈 겨를이 없습니다. 조용히 지켜보면 됩니다.
그래서 찰나사마디가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이상과 같이 사마타와 위빠싸나의 차이, 사마타 사마디와 위빠싸나 사마디가 서로 다른 것을 설명했습니다.
위빠싸나도 두 가지로 구별됩니다.
하나는 순관이라고 하는 순수 위빠싸나(sudda-vipassana) 입니다.
숫다(sudda)라는 말은 청정한, 깨끗한, 순수한 이라는 말입니다.
사마타 방법의 선정이 아닌 알아차림을 통해서 확실하고 분명한 통찰력을 가지고 수행하는 위빠싸나 수행을 순수 위빠싸나라고 합니다.
또하나는 건관이라고 하는 마른 위빠싸나(sukkha-vipassana) 입니다.
숙카(sukkha)는 마른, 건조한 이라는 말입니다. 이 말과 비슷한 수카(sukha)는 행복이라는 말로 서로 다른 뜻입니다.
마른 위빠싸나 수행자를 숙카 위빠싸까(sukkha-vipassaka)라고 하며 마른 관찰자 또는 통찰력이 풍부하지 못한자 라고 합니다.
위빠싸나는 몸과 마음을 대상으로 알아차리는데 이 알아차림이 바른 통찰력을 가졌는가 갖지 못했는가에 따라 두 종류로 구별을 하기도 합니다.
질문에 답하겠습니다.
상당부분 이해가 되셨으리라 생각되지만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상우 님께서 질문하신 8정도에서 말하는 정은 바르게 수행하는 수행자의 바른 정을 말합니다. 바르지 못한 정은 많습니다. 불 선업을 가진 정입니다. 도둑질을 할 때나 노름을 할 때도 대단한 집중력이 필요합니다. 이 때의 집중력이 오히려 수행자의 집중력 보다 더 뛰어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바른 정이 아닙니다. 선업의 정이 바른 정입니다.
위빠싸나 수행을 할 때는 깊은 사마디나, 초기 사마디로 집중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은 사마타에서 선정을 얻을 때 필요한 고요함을 얻기 위한 사마디 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선정의 사마디는 지혜가 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위빠싸나는 찰나 사마디의 상태로 알아차림이 있어야 지혜가 납니다.
그래서 지나친 사마디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가볍게 그냥 알면 좋습니다. 그러나 확실하게 알아야 되겠지요.
마음을 항상 새로 내야 한다는 말은 마음을 보는 수행자는 이해할 수 있는 말입니다.
수행자가 알아차림을 하는데 항상 같은 알아차림을 할 수는 없습니다.
알아차리다가 약해지기도 합니다. 대상을 보다가 망상도 하고 졸기도 하고 게으름을 피우느라 혼미한 상태에 있기도 합니다.
이 때 약해진 알아차림을 강화하기 위해서 "지금 내 마음이 무엇을 하고 있는가" 하고 마음을 새로 내서 보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보는 것이 마음을 새로 내서 보는 것입니다.
자주 이렇게 해 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노력을 한다는 것입니다.
마음은 매 순간 새로 일어납니다. 일어날 때마다 마음이 새로 일어난 것을 알면 되지만 워낙 빠르게 일어나서 바로 사라지기 때문에 잘 모릅니다. 그래서 때때로 새로 마음을 내서 항상 새롭게 알아차림을 강화하려는 뜻입니다.
마음을 새로 내면 더 많이 알아차릴 수 있고 대상을 분명히 보게됩니다.
마음을 새로 내는 여러 가지 방법 중에 분명한 앎(삼빠쟌나)도 포함됩니다.
선정상태에서는 알아차림이 밀밀하지 못합니다. 선정은 고요함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의 대상에 집중하고 있으면 당연히 그렇게 됩니다. 그것은 대상에 깊게 집중되어 있는 것이지 알아차림이 확실한 것은 아닙니다.
선정상태에서는 대상과 깊게 밀착되어 있어 하나가 되어 있으므로 객관적으로 볼 수 없습니다. 위빠싸나는 대상의 성품을 보아서 지혜를 얻어야 하기 때문에 객관적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위빠싸나는 객관적이고 사마타는 주관적입니다.
순수 위빠싸나는 사마타의 선정이 없기 때문에 초기에 산란하거나 혼란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 자체가 알아차릴 대상이지만 보는 힘이 약하기 때문에 장애에 휩쓸리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상태를 지나치면 빠르게 발전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집중을 위해 사마타의 선정을 빌리지 않고 명칭을 붙여 집중의 효과를 얻으려 한 것입니다.
위빠싸나는 명칭, 모양, 관념 이라고 설명되는 빤냐띠라는 것을 사용합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빠라마타라고 하는 실재, 성품을 보아 지혜가 납니다.
모양인 빤냐띠로서 몸을 보고 성품인 자수화풍이라는 빠라마타로 대상을 꿰뚫어 봅니다.
그러므로 명칭은 사마타 에서나 위빠싸나 에서나 사용하는 것입니다.
빤냐띠는 빠라마타와 대칭이 되는 말입니다.
대상을 보다가 명칭을 붙이지 못해 뭐라고 명칭을 붙여야 되는가 생각할 때는 이미 알아차림이 끊어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망상에 빠진 것입니다.
명칭을 붙일 때 겪는 흔한 현상입니다. 그 때는 명칭을 붙이지 마십시오. 그리고 느낌을 보십시오. 명칭을 붙이는 어느 것이나 모두 느낌입니다. 그것은 뭐라 말할 수 없는 그냥 그 느낌입니다.
느낌을 그대로 보십시오. 그것을 개념화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것은 애매한 느낌입니다.
그때는 명칭 없이 그대로 느낌을 알아차리십시오.
오히려 그렇게 하는 것이 수행에 발전이 있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