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시명 : 가장 진지한 고백: 장욱진 회고전
◦ 전시 기간 : 2023.09.14~2024.01.12
◦ 전시 장소 :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 전시 작품 : 유화·먹그림·메직펜 그림·표지화와 삽화·도자기 그림 등 270여 점
◦ 관람료 : 유료
국립현대미술관(MMCA, 관장직무대리 박종달)이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관장 이계영)과 공동 주최로 장욱진의 60여 년 화업 인생을 엿볼 수 있는 '가장 진지한 고백: 장욱진 회고전'을 개최한다.
장욱진(張旭鎭, 1917-1990)은 한국 근현대 화단에서 이중섭, 김환기, 박수근, 유영국 등과 함께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2세대 서양화가이자, 1세대 모더니스트이다.
‘지속성’과 ‘일관성’은 장욱진 그림의 주요한 특징이다. 그러면서도 재료를 가리지 않는 자유로움과 하나의 고정된 틀에 얽매이지 않는 창작 태도를 보여주며 끊임없이 변화를 시도했다. 현재 알려진 작품들만 헤아려도 유화 730여 점, 먹그림 300여 점으로 그 수가 상당하다. 나무와 까치, 해와 달, 집, 가족 등 일상적이고 친근한 몇 가지 제한된 모티프만을 평생에 걸쳐 그렸지만, 매체에 구애받지 않고 다양한 재료를 사용해 왕성한 작품 활동을 펼쳤다. 또한 서양화를 기반으로 동양적 정신과 형태를 가미하면서도 서로 간 무리 없이 일체(一體)를 이루는 경우는 장욱진 외에 한국 현대미술사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다.
✺ KBS1 <예썰의 전당> [36회] 나의 길을 가련다 – 장욱진 화백
201family | KBS1 <예썰의 전당> [36회] 나의 길을 가련다 – 장욱진 화백 - Daum 카페
장욱진, ‘자화상(Self portrait)’, 1951년, 캔버스에 유채, 14.8x10.8cm. 위 사진은 아래 사진의 부분도
한국전쟁 당시에 그린 ‘자화상’은 황금빛 들녘을 가로지르는 붉은 길을 따라 세련된 연미복 차림으로 걸어온 신사를 앞세우고 있다. 발끝을 쫓아온 강아지도 있고, 머리 위로 새들도 날아다니지만 그는 외롭다. 목가적이고 낭만적이라 칭송받는 이 황금들판은 전쟁통에 피폐해진 현실을 떨치고자 작가가 택한 반어적 풍경이다. 다가올 풍요로운 미래에 대한 작가의 꿈이기도 했다. 지금은 포탄이 넘나드는 하늘에 ‘우리 네 식구’를 닮은 까치를 그려넣어 다 같이 만날 날을 기약했다. 장욱진은 전쟁의 아픔과 불안과 혼란을 모조리 그림 안으로 숨겨 넣었다. 피폐하고 궁핍한 전쟁통에 예술이 줄 수 있는 유일한 해법, 희망을 담았다.
배경도 그렇거니와 한껏 차려입은 주인공의 옷차림이 눈길을 끈다. 그 시절 멋쟁이들의 필수품인 우산과 모자가 양손에 들렸다. 멋 부리고 나선 팔자걸음의 그가 배우 찰리 채플린을 떠올리게 한다. 이 호기로운 모습은 어쩌면 희극배우의 연기일지 모른다. 전쟁의 비극적 상황을 화가는 해학적으로 표현했고 멋을 부려 두려움을 지웠다. 동시에 양복 차림은 토속적인 농촌 배경에 완전히 섞일 수 없는 존재, 즉 전통과의 단절을 경험하고 자신을 성찰하고 있는 근대인의 단면을 보여준다. 이 그림이 시대정신이 투영된 성찰적인 작품이라 평가받는 이유다. 시대를 견뎌낸 젊은 화가의 고뇌가 처절하게 빛난다.
이번 전시는 1920년대 학창 시절부터 1990년 작고할 때까지 약 60여 년간 꾸준하게 펼쳐 온 장욱진의 유화, 먹그림, 매직펜 그림, 판화, 표지화와 삽화, 도자기 그림을 한 자리에서 조망한다. 장욱진은 그의 화문집(畵文集) 『강가의 아틀리에』 서문에서 밝혔듯이, “참된 것을 위해 뼈를 깎는 듯한 소모”까지 마다하지 않았다. 누구보다 자유로운 발상과 방법으로 화가로서의 본분을 지키며 자기자신을 소모시켰다. “나는 정직하게 살아왔노라.”라고 당당하게 외치며 ‘진솔한 자기 고백’으로 창작에 전념했다.
그가 떠난지 30여년이 흘렀지만, 그의 그림은 지금도 여전히 세상을 향해 정직하게 고백하고 있다.
“그림처럼 정확한 나의 분신(分身)은 없다.
난 나의 그림에 나를 고백(告白)하고 나를 녹여서 넣는다.
나를 다 드러내고, 발산하는 그림처럼 정확한 놈도 없다.”
-장욱진, 「마을」, 『조선일보』, 1973. 12. 8.
강운구, 장욱진 사진/ 덕소에서, 1974년, 인화지에 젤라틴, 실버프린트, 32.8×22.4cm, 개인소장
장욱진, ‘자화상’, 1951년, 종이에 유화 물감, 14.8×10.8cm, 개인소장
1. 첫 번째 고백
내 자신의 저항속에 살며
“누구나 그러하듯이 사람은 언제나 어디서나 저항 속에 사는 것 같다. … 누구를 막론하고 직업인은 모두가 자기 직책을 빌려 스스로의 생명에 대한 순수성을 지키려 하고 안간힘을 쓰며, 이 순수성에 대한 타인의 침해를 막으려 드는 것이 상례이다. … 나의 경우도 어김없이 저항의 연속이다. 행위[제작 과정]에 있어서 유쾌할 수만도 없고, 소재를 다룰 때 기교에 있어 재미있게 나왔다 해도 결과[표현]가 비참할 때가 많다. 이렇다 보니 나의 일에 있어서는 저항의 연속이 아닐 수 없다. … 일상(日常) 나는 내 자신의 저항 속에 살며, 이 저항이야말로 자기의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다.”
‐ 장욱진, 「저항」, 『동아일보』, 1969. 6. 7.
장욱진의 첫 번째 고백, 여기서는 그의 학창 시절부터 중장년기까지의 작품들을 살펴본다. 그의 청년기(10~20대) 작품들은 고전색과 향토색이 짙게 느껴지는 모티프들이 주를 이룬다. 이 시기 그의 작품들은 흑백과 갈색의 모노톤으로 토속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장욱진은 장년기(30~40대)를 거치며 명도와 채도의 대비를 통해 시각적인 주목도를 높인다. 형태는 더욱 평면화, 도안화시키는 과도기적 양상을 보여준다. 아동화적 도상을 분할 구성하여 표현해낸 시도나, 서양 동화 같은 정경에 동심이 천진하게 깃든 정감 어린 풍경 등이 그러하다. 이후 중년기(40~50대)에 이르면 실존의 절대적인 형상으로서 뼈대나 윤곽만으로 대상을 조형화시키며 기호화된 형태들을 그린다. 그 과정에서 반복적으로 물감층을 쌓아 만든 까칠한 질감의 마티에르가 점점 원근법적 공간을 지우고, 그림 표층을 긁어내는 방식으로 화면의 질감을 더욱 다양하게 조성한다. 잠시 구상과 추상을 혼성한 반추상과 더 나아가 순수 추상화를 그리기도 했다. 그러나 1960년대 중반 이후에는 다시 형상성(形像性)이 회복되며 장욱진 그림만의 졸박(拙朴)한 양식이 이어진다.
첫 번째 전시실에서는 완숙한 장욱진 작품의 전형(典型)이 완성되기까지 “내 자신의 저항 속에 살며” 장욱진만의 독창적인 ‘한국적 모더니즘’이 창출되는 여정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작품과 함께 유기적으로 배치한 장욱진 관련 아카이브들을 통해서도 이러한 그의 저항의 과정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