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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담은 가족과의 시간 (1985 기무라 하루미 1932~) 목차
I 더 풍요롭게 가족의 시간
01. 가족의 거처——8
02. 파리에서 온 하녀――12
03. 가족이란 무엇인가요? - 16
04. 응석을 용서할 수 있는 사이――22
05. 딸의 삶을 희생한 엄마의 착오―25
06. 가정의 역할을 놓치고 있지는 않으신가요?
07. 부모의 오지랖――39
08. 부모의 집 ―ㅡ 43
09. 늙음을 지켜보다――47
10. 나이의 무게――51
II. 서로를 지지하는 남편과 아내의 마음의 균형
11. 여자의 자립과 남자의 성숙도 - 58
12. 더 많은 말을, 더 많은 사랑을――64
13. 부부의 연륜 ― 71
14. 여자가 선택하는 여자의 삶 - 76
15. 자립과 로맨스 욕망은 인생의 양대 축
16. 남자가 패권을 버릴 때 - 85
III. 부모의 책임, 자녀의 선택
17. 18세의 여행――92
18. 새끼가 둥지를 떠날 때 - 98
19. 자기 몸은 자기가 지킨다 - 103
20. 정성껏 키우다 - 107
21. 내면적 성숙의 중요성 ― 110
22. 남자아이, 여자아이――113
23. 딸의 삶, 어머니의 삶 - 117
24. 아버지와 나 - 122
25. 부모의 자립 자녀의 자립――130
IV. 마음을 담아 삶의 리듬
26. 선물은 찻잔 한 잔――140
27. 정성을 들여 덧씌우고, 삶을 키우다
28. 진정한 매너 ――148
29. 잘 지내는 비밀 - 152
30. 여행과 여유――154
31. 40년 만의 이소베 온천――162
32. 이런 나이 듦도 있다――165
33. 스물두 번째 해의 선택——168
34. 삶의 슬픔을 받아들이다 ― 172
V. 서로 섞이는 남자의 가치관, 여자의 가치관
35. 남자의 눈, 여자의 눈 - 176
36. 여자일 것 - 180
37. 자신을 알다 - 184
38. 남자와 여자의 교차로 - 188
39. 자활의 길은 자립의 길이었다 — 194
40. 여자의 인생 설계 - 200
41. 인간 거리 두기 - 204
42. 감성의 풍요로움이야말로 남자의 매력 - 207
43. 성숙하는 것이 삶의 목적 ― 211
44. 남자와 여자의 금전 감각 - 215
45. 후기ᅳᅳ220p
I 더 풍요로운 가족의 시간
● 01. 가족의 자리
01-1. 가족의 결속이 최우선
나는 무엇보다도 가족의 결속을 소중히 여기며 살아왔다. 주부인 내가 집 안팎으로 꽤 바쁜 일을 하고 있어 가족과 접촉하는 시간을 충분히 확보하기 어렵기 때문에, 더욱 의식하게 되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어떤 식으로 노력하고 있는지 소개해 보겠다.
우선 첫째로, 응접실이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20년 전 집을 다시 지을 무렵, 세상에는 원룸식 구조가 유행하여 손님도 거실로 안내하고 가족이 함께 어울려 대접하는 것이 새로운 인간관계로 각광받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 집 손님은 그런 유형의 사람들만 있는 것도 아니고, 나나 아이들 모두 낯을 가리는 성격이라는 점 등을 고려하여, 나는 다른 공간을 희생하더라도 반드시 응접실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아코디언식 칸막이 같은 어중간한 것이 아니라, 가족의 생활 공간과 완전히 분리된 응접실이기 때문에 서로의 프라이버시가 지켜지고, 가족은 물론 손님도 훨씬 편안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거실이 어질러져 있어도 일단 응접실만 단정하면 된다는 감각은 주부라면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원래는 다다미 8장 크기였지만, 3년 전에 다다미 12장 크기로 넓힌 뒤로는 방송국 텔레비전 카메라 등이 들어와도 “좁아서 죄송합니다”라고 신경 쓸 필요가 없어졌다. 집의 응접실에서 이런 일을 처리할 수 있다는 것은 시간 절약이 된다.
둘째로 들고 싶은 것은, 내게 서재가 없다는 점이다.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우편물이나 각종 자료가 산더미처럼 있어, 이것들을 기능적으로 수납할 수 있는 개인 공간이 있다면 얼마나 편할까 생각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그런 공간을 확보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실제로 틀어박혀 본 적도 있다. 그러나 주부로서 부엌, 방문객, 전기와 가스 등의 안전에 대응해야 하는 책임자로서 존재하고 있는 이상, 개인 방에 틀어박혀 글쓰기에 몰두하고 있으면 갑자기 불안해지고 마음이 편치 않다.
무엇보다도 딸이나 아들이 “다녀왔습니다” 하고 돌아오거나, 아니면 공부하다가 잠깐 거실로 내려왔을 때조차 “다녀왔구나, 춥지 않았니?”라든가 “홍차라도 마실래?”라고 말을 걸어주지 못하는 것은, 외출 중이라면 몰라도 집에 있으면서 서재에 틀어박혀 있기 때문이라면 역시 바람직하지 않을 것이다.
그럴 때의 접촉은 부모와 자식의 정신 형성에 있어서 매우 귀중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집은 거실 한쪽에 식탁이 있다. 어지럽게 쌓인 서류는 어디에 둘 것인가. 그것들을 넣어둘 서류장이 식탁 근처에 놓여 있다. 미관상으로는 결코 좋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어쨌든 잡다한 자료들이라 미적으로 정리할 방법이 없다. 하지만 무엇인가를 희생해야 한다면, 나는 나 자신의 불편함과 미관을 희생하겠다. 내 어지름을 참고 불평하지 않는 가족들도 나름대로 희생을 치르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01-2. 함께 있는 시간을 소중히
세 번째로, 부부의 침실이 있다는 것도 가족 결속을 위한 하나의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맞벌이로 서로 바쁜 부부의 경우, 상대의 자유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침실을 따로 쓰는 경우가 많다고 들었다. 우리 역시 시간적으로 엇갈림이 많은 부부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침실은 함께 쓰고 있다.
내가 침대에 들어갈 때 남편은 이미 코를 골며 깊이 잠들어 있고, 내가 새벽에 일어날 때는 남편이 아직 자고 있거나, 혹은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잘 자고 있네”라고 느끼며 조심스럽게 소리를 죽이고 침대에 들어가는 일이 필요하다. 집안을 정리하는 주부의 입장에서 보면, 남편과 아이들 모두 각자의 방이 없으면 곤란하다.
거실에 어지럽게 놓인 잡지나 여러 물건들을 소유자별로 분류해 각자의 방으로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카이사의 것은 카이사에게 돌려주라”는 성경 구절을 중얼거리면서 말이다. 즉 가족 각자의 물건을 정리하는 장소로서 개인 공간의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꽤 중요한 문제다. 왜냐하면 그 이후의 일에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내 아이들이 어렸을 때 2층은 칸막이가 없는 넓은 공간이었다.
딸이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었을 때 개인 방을 원해서, 그 넓은 공간에서 함께 보냈던 유아기를 아쉬워하며 칸막이를 만들어 방으로 나누었다. 아들은 고등학교 입시 공부를 거실에서 했지만, 굳이 자기 방으로 몰아넣지는 않았다.
고등학생이 되고 나서는 공부는 물론 자기 방에서 하고 있다. 가끔 기분 전환으로 거실에 내려오는데, 나는 앞서 말했듯 집에 있을 때는 반드시 거실에 있도록 하고 있다. 아이에게 어릴 때부터 개인 방을 주는 것이 좋은가 나쁜가 하는 문제는 본말이 전도된 것이 아닐까.
개인 방을 주었다고 해서 자립심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개인 방 때문에 부모와 자식의 관계가 멀어지는 것도 아니다. 자립심이 생겼기 때문에 개인 방을 원하는 것이다.
애초에 부모와 자식 관계에 문제가 있기 때문에 방에 틀어박히는 것이다. 마치 그 반대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매우 이상하다고 본다. 주부도 마찬가지다. 주부가 자기 방에 틀어박히고 싶다면, 그것이 가족 관계의 문제 때문이 아니라면 좋겠지만.
● 02. 파리에서 온 가정부
02-1. 수다로 꽃피는 티타임
“홍차 마실래요?” “그래, 부탁할게.” 잠시 후 네 사람 분의 찻잔에 향긋한 홍차가 따라지고 김이 모락모락 올라온다. 딸의 목소리가 울린다. “여러분~ 홍차 준비됐어요!” 2층에서 아들이 쿵쾅거리며 내려오고, 스테레오 앞에 있던 남편이 일어나며, 나도 원고지를 정리한다.
모두가 테이블 주위에 모여, 고작 10분에서 15분 정도의 즐거운 티타임이 시작된다. 휴식 시간은 순식간에 끝나고, 각자 자기 일로 돌아가면 남는 것은 씻어야 할 찻잔들뿐이다. 딸은 불평 한마디 없이 부지런히 테이블을 정리해 준다.
“가정부가 있다는 건 참 좋네.” 내가 남편에게 말하면 “좋지. 게다가 우리 집 가정부는 파리에서 왔잖아.” “맞아, 해외 유학 다녀온 가정부지.” 여기서 남편과 나는 소리 내어 웃는다. 우리 둘 다 외국여행이 꿈같던 시대에 자란 사람들이라, ‘해외 다녀온’이라는 낡은 표현에는 묘한 공감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둘 다 젊은 시절 외국을 동경했고, 결국 그 꿈을 이루지 못한 채 결혼하고 아이를 키웠다. 그 시절 일본은 아직 전쟁의 상처에서 완전히 회복되지 못한, 이른바 개발도상국이었기 때문에 외국에 나가는 일은 특별한 사람만이, 그것도 외국의 지원을 받아 겨우 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영문과 학생이었기 때문에 잘 기억하고 있다. 영국 화폐 1파운드가 일본 돈으로 약 1,000엔 하던 시기가 오래 계속되었다. 공부에 필요한 원서 같은 것은 가난한 학생이 살 수 없어서, 연구실 도서관에서 빌려 와서 열심히 공책에 베껴 쓰곤 했다. 물론 그때는 복사기 같은 건 없었다.
지금은 1파운드가 대략 240엔 정도이니, 일본의 경제력이 얼마나 강해졌는지 알 수 있다. 덕분에 우리 가족도 영국에서 생활해 볼 수 있었고, 딸의 소원을 이루어 비교적 무리 없이 파리에 유학을 보낼 수도 있었다.
02-2. 이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딸이 여름방학을 맞아 귀국해 있다. 지난 2년 정도 현지에서 자취 생활을 해서인지, 부엌일을 아주 잘 도와준다. 이는 후원자인 부모 입장에서는 뜻밖의 수확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떠났기 때문에 집안일을 제대로 가르칠 틈도 없어서, 딸의 집안일 방식은 조금씩 나와 다르다. 자기식이거나, 파리 친구들의 방식을 보고 배운 것들이다.
그리고 가끔은 이 ‘파리에서 온 가정부’가 약간의 비판을 담아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엄마는 나한테 집안일을 전혀 안 가르쳐줬네.” 확실히 그렇다. 요즘 엄마들에게 딸에게 집안일을 어떻게, 어느 정도까지 가르칠지는 참으로 고민되는 문제다. 아들이 있다면 집안일은 아들과 똑같이 대하고 싶고, 결코 딸에게만 강요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도 있기 때문이다.
이러저러한 이유로, 열여덟 살에 혼자 파리로 간 딸은 거의 아무 집안일도 할 줄 모르는 상태로 기숙사에 들어갔다. 기숙사는 식사가 제공되었다. 하지만 자취를 시작하고 필요에 쫓기면 의욕도 생기고, 제법 집안일도 할 수 있게 되는 법이다. “엄마는 이때를 기다리고 있었단다.” 이렇게 강하게 변명하면서 다시 요리나 설거지 요령을 가르쳐 주고 있다.
어쨌든 파리에서 온 이 가정부는 성실하게 집안일을 해 주니 나는 정말 큰 도움을 받고 있다. 딸도 늘 가족과 떨어져 지내기 때문에 오히려 가족을 더 의식하고, 가끔 있는 가족의 재회를 소중히 여기려고 하는지도 모른다. 9월이 되어 딸이 떠나고 나면, 외로움과 일손 부족이 동시에 몰려와 나는 또 힘들어질 것이다.
● 03. 가족이란 무엇인가
03-1. 약함도 추함도 드러낼 수 있는 사이
“당신 집의 가훈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을 받고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먼저 딸과 아들에게 물어보았다. "우리 집에 가훈 같은 거 있어?” “부모도 모르는 걸 우리가 알 리 없잖아요.” 그럴 듯해서 남편에게도 물어봤더니 “글쎄, 그런 건 없지 않나?” 어쩔 수 없이 스스로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오히려 그런 가훈 같은 규범이나 겉치레를 내세우지 않는 데 우리 집의 특징이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결론에 이르렀다. 겉치레나 이상을 가볍게 여긴다는 뜻은 아니다. 본심과 현실만으로는 발전이 없다. “이렇게 되고 싶다”는 목표는 분명히 필요하다.
요컨대, 겉과 속, 이상과 현실을 균형 있게 대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 비율을 어떻게 할지는 각자의 감각에 달려 있다. 그 균형은 언제나 완벽하게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저울이 좌우로 크게 흔들리면서도 전체적으로 균형을 이루는 정도면 훌륭한 것이다. 그러나 가족이라는 것은, 굳이 말하자면 겉치레보다는 본심에, 이상보다는 현실에 더 무게가 실려 있어도 좋지 않을까 싶다.
세상에서는 체면을 꾸미고 허세를 부리며 살아야 해서 몹시 지치게 된다. 그 피로를 풀어주는 곳이 바로 가정이다. 약함도 추함도 드러내고 서로의 상처를 어루만져 주는 것이 가족이다. 잘 안 되는 부부나 부모자식 관계는 아마 이 부분에 무리가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집에 돌아와서도 긴장을 풀 수 없다든가, 상처를 어루만지기는커녕 오히려 고추를 문지르는 것처럼 아프게 한다든가.
03-2. 여성의 마음속에 숨어 있는 자립에 대한 두려움
『신데렐라 콤플렉스—자립을 두려워하는 여성의 심리』라는 책을 소개해 보자. 코렛 다울링이라는 여성이 자신의 내면을 깊이 들여다보며, 많은 여성에게 공통된 ‘자립을 두려워하는 심리’를 분석한 베스트셀러다. 여성해방운동이 미국 전역을 휩쓸고, 모든 여성 잡지가 자립을 외치던 시대였다. ‘자립’이 여성들의 구호였고, 자립하지 못한 것은 부끄러운 일이었다.
그런 시대에 “여성은 겉으로는 평등과 자립을 말하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자립을 두려워하고 남성에게 의지하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드러낸 것이 바로 이 책이다.
이른바 ‘신데렐라 콤플렉스’다. 힘들게 살다 보면 언젠가 백마 탄 왕자가 나타나 자신을 구해주고, 경제적으로도 풍요롭게 해 주며 더 이상 힘들게 일하지 않아도 되게 해 주리라는 기대. 이런 마음이 있는 한 여성은 남성과 완전히 대등해질 수 없고 완전한 자립도 어렵다.
이 의존심을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이 책은 주장하며 끝을 맺는다. 다우링 여사의 『신데렐라 콤플렉스』는 미국에서도 일본에서도 여성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여성들은 보고 싶지 않았던 것을 굳이 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지금 나는, 다른 측면에서 다우링의 신데렐라 콤플렉스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가족이라는 측면에서다.
다우링이 자신의 내면에 있는 신데렐라 콤플렉스, 즉 남성에게 의존하려는 욕망을 자각하게 된 계기는 이런 사건의 결과였다. 다우링은 이혼을 하고 세 아이를 맡아 생활에 몹시 고생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로럴이라는 훌륭한 작가와 가까워져 동거를 시작했다.
아, 그때까지의 고생을 생각하면, 얼마나 큰 행복이 찾아온 것인가. 다우링은 새집의 커튼을 새로 장만하고, 화단에 꽃을 심고, 요리에 정성을 들이고, 나아가 로럴의 원고 정리까지 도와주면서 행복감에 푹 빠져 있었다. 결국, 전업주부의 삶에 충분히 만족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어느 날 로럴이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언제까지 그렇게 시시한 생활을 할 생각인가? 식비도, 집세도, 기름값도 전부 내 수입 아닌가. 자네 몫은 언제 벌어올 건가?” 즉, 로럴은 이른바 ‘내조의 공’ 같은 것은 전혀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남녀평등이라는 원칙 그대로, 모든 것을 완전히 대등하게 하기를 요구했던 것이다.
03-3. 가족이기 때문에 더욱 속마음을 드러낼 수 있다
여러분은 로럴의 주장을 어떻게 느끼십니까. 다우링은 역시 미국 여성답게 이 말을 냉정하게 받아들이고 반성했습니다. “세 아이를 데리고 살아가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일해야 했을 때에는 그렇게도 열심히 할 수 있었는데, 한 번 의지할 만한 남자가 나타나 거기에 기대게 되자, 곧바로 일할 의욕을 잃고 집 안에서의 편안한 생활에 안주하려고 하다니,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그리고 자신의 마음을 깊이 파고들어 보니, 신데렐라 콤플렉스에 물든 추하고 나약한 자신이 그곳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책으로 썼더니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니, 해피엔딩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건 그렇다 치고, 다시 한 번 여러분께 묻고 싶습니다. “로럴의 저 발언을 어떻게 평가하시겠습니까?” 남녀평등주의의 입장에서 보면, 전적으로 정당한 의견입니다.
미국의 남성들은 여기에 더해, 또 하나의 매우 강력한 논리를 펼쳤습니다. 남녀동권을 강하게 주장하는 여성해방운동가들에게 이렇게 반박한 것입니다. “좋습니다. 여성에게도 우리 남성과 같은 권리를 인정합시다. 그러나 권리에는 의무가 따르는 법입니다. 그러니 권리뿐만 아니라 의무도 함께 받아들이십시오.”
그리고 이어지는 말이 더욱 강렬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남성으로서 짊어지고 있는 가장 큰 의무는 징병 의무입니다. 앞으로는 여성도 병역의 의무를 다해야 합니다.” 현재의 미국은 지원병 제도라 강제적인 병역 의무는 없어졌지만, 당시에는 모든 남성이 성인이 되면 3년간 군 복무를 해야 했습니다. 그 기간 중에 베트남 전쟁과 같은 전장에 투입되기라도 하면, 목숨을 보장할 수 없었습니다.
지원병 제도로 전환함으로써 남성에게서 이 의무를 해방해 문제 해결을 꾀했다고도 볼 수 있겠지만, 이 같은 남성들의 반격에 여성해방운동가들이 크게 충격을 받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 이후 여성해방운동의 방향이 상당히 변화한 것도 사실입니다. 로럴을 비롯한 미국 남성들의 이러한 주장 역시 전적으로 정당하며, 관점에 따라서는 여성들의 주장을 정면으로 받아들인 결과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일본 남성들은 아직 그 정도까지 반론하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는 것은, 여성들의 주장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는 해석도 가능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가족으로서, 부부로서의 겉과 속, 이상과 현실의 모순, 혹은 그 균형이라는 관점에서 로럴의 말을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로럴은 여성의 겉과 속을 헤아려, 서로 모순된 채로 두 가지를 모두 받아들여 줄 수는 없었던 것일까요. 장래야 어떻든, 자립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있는 여성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너그러움이 부족했던 것은 아닌지, 그 점이 마음에 걸립니다. 다우링도 그 책에서 분석하고 있듯이, 많은 여성들이 신데렐라 콤플렉스의 영향을 받는 것은 “여성은 결혼해 남성에게 보호받으며 사는 것이 행복하다”는 문화 속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그런 가치관으로 길러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성해방운동이 아무리 활발해져도, 갑자기 완전히 자립하기는 어렵습니다. 이대로 진행된다고 해도, 두 세대, 세 세대는 걸리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아무리 자립심이 강한 여성이라 해도, 아니 남성이라 해도, 바깥 사회에서 살아가는 것은 고된 일입니다. 집에서는 “이제 그만두고 싶다”, “힘들다” 같은 속마음을 털어놓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것마저 허용되지 않는다면…
● 04. 서로에게 응석을 받아줄 수 있는 사이
며칠 전, 몇몇 고등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한 여고생이 약간 반항적인 태도로 갑자기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생님 자녀분들은 참 부럽네요. 선생님은 정말 당당하게 사회의 최전선에서 활약하고 계시니까, 분명 자녀분들에게도 존경받고 계실 거예요. 그런데 우리 엄마는 말이죠, 일을 마치고 돌아오면 TV 앞에 드러누워서 과자를 우적우적 씹고 있고, 자립이니 삶의 보람이니 하는 건 전혀 없는 것 같아요. 그런 멋진 말은 선생님 같은 분이나 할 수 있는 거죠.”
나는 이 여고생이 어머니를 비판하는 마음을 잘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나 역시 그랬으니까요. 고등학생 시절이라는 것은, 한편으로는 부모에게 의존하면서도, 그 부모를 비판하는 까다로운 시기입니다. TV나 잡지에 나오는 다른 집 부모와 비교하면, 우리 집의 볼품없는 모습이 한심하고 화가 나기도 합니다.
"그런데, 네 어머니는 밖에서 일하고 계신다고 했지?” “네.” “밖에서 일하는 건 아주 힘든 일이란다. 특히 여성은 집안일도 함께 해야 하니까 더 그렇지. 그래서 한가할 때만큼은 푹 누워 쉬고 싶어지는 거야. 나도 그래. 아이들을 비켜 앉히고 소파에 드러누워서, 가요 프로그램이나 버라이어티 쇼 같은 걸 아무 생각 없이 보면서 몸을 쉬게 하지. 배가 고프면 과자도 집어 먹고.”
그리고 나는 다시 한 번 물었습니다. “너는 어머니가 밖에서 일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니?” 그녀의 얼굴은 금세 “아, 그랬구나” 하는 안도한 표정으로 바뀌었습니다. 나는 내 말이 이렇게까지 효과를 낸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나 역시 아이들이 유아나 초등학생이었을 때에는 소파에 누워 과자를 먹는 식의 버릇없는 행동은 하지 않았습니다. 교육상 좋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아이들이 고등학생쯤 되면, 부모는 오히려 자식에게 기대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이제는 다 컸으니까 이해해 주겠지”라고 생각하게 되는 거죠. 가족이기 때문에 이런 무례한 모습도 허용됩니다. 아이들도 이미 옳고 그름을 판단할 나이가 되었으니, 밖에서까지 흉내 내지는 않을 거라는 안심도 있습니다.
게다가 그쯤 되면 부모도 나이가 들어 예전처럼 힘을 낼 수 없게 됩니다. 고등학생 시기라는 것은, 자식과 부모의 관계가 그때까지와는 반대로 바뀌기 시작하는 전환점이 아닐까요. 그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계속 수동적인 태도로만 있으면, 부모를 용납할 수 없게 되고 불만이 쌓여 갑니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그렇게 훌륭하고 강한 사람은 아니었구나”라는 발견에서, 새로운 부모 자식 관계가 시작됩니다.
● 05. 딸의 인생을 희생시킨 어머니의 착오
05-1. 고독한 처지 속에서 일곱 아이를 키우다
쿠덴호프 미쓰코(青山光子1874~1941)라는 이름을 처음 들은 것은 지금으로부터 15년 전의 일이었습니다. 그때 NHK 텔레비전이 이 여성을 소개하는 다큐멘터리 드라마를 방송했던 것입니다. 제 기억 속에서는 그것이 불과 5~6년 전쯤의 일로 느껴졌는데, 올해 다시 NHK 프로그램에서 다루면서 “15년 전에 한 번 소개했다”고 했으니, 15년 전이라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겠지요.
그렇다 해도, 그로부터 벌써 15년이나 지났다는 것, 그리고 제가 그것을 5~6년 정도로만 느끼고 있었다는 것은, 시간의 흐름이 얼마나 빠른지를 새삼 느끼게 합니다. 동시에, 쿠덴호프 미쓰코라는 여성이 제게 그만큼 인상 깊은 존재였다는 증거이기도 하겠지요.
그도 그럴 것이—미쓰코가 쿠덴호프 백작과 결혼한 것은 1892년, 메이지 25년(*당시 18세)의 일이었습니다. 그처럼 오래전 시대에 일본 여성이 국제결혼을 하고, 유럽으로 건너가 일곱 아이를 키우면서 당당히 국제사회에서 살아갔다는 것은 믿기 어려운 일입니다. 더구나 결혼 상대는 오스트리아의 주일 외교관이자 백작으로, 넓은 영지와 성을 가진 신분의 남성이었습니다. 비엔나 사교계의 꽃이었다는 이야기만 들으면, 겉으로 보기에는 마치 신데렐라 이야기처럼 보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외부에서 본 이야기일 뿐, 당사자에게는 상당히 혹독한 인생이었습니다. 마츠모토 세이쵸(松本清張1909~1992)의 '어두운 피의 선무(暗い血の旋舞)에는, 미쓰코의 둘째 아들 리하르트의 회상을 통해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입니다.
“주변에 아무리 많은 부와 애정이 있었다 해도, 어머니는 근본적으로는 한 명의 포로였으며, 여성인 동시에 노예이기도 했던 나날이었다.” 주변에는 일본어를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고, 오히려 일본어는 금지되었습니다. 게다가 미쓰코는 끝내 다시는 일본 땅을 밟지 못했습니다. 친정인 아오야마 집안에서 절연당했다는 설명도 있어 놀라움을 자아냅니다.
그 점은 그렇다 하더라도, 쿠덴호프 미쓰코는 그 시대에 성장한 여성으로서 정식 교육을 받지는 못했지만, 상당히 뛰어난 자질을 지닌 인물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한 환경 속에서였다고는 해도, 여러 외국어를 습득했고, 작은 글씨로 편지와 기록을 꼼꼼히 남겼습니다. 예술적 재능도 남달랐던 것이 아닐까요.
NHK 방송에서 소개된 그녀의 작품에는 풍경과 인물을 그린 데생 등, 매우 매력적인 그림들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일곱 자녀 또한 각자 뛰어난 재능을 지닌 채 성장했습니다. 남편인 쿠덴호프 백작과도 일찍 사별하고, 일곱 아이를 키우면서 유럽의 세기말과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격동의 시대를 살아낸 강인함까지 포함해, 미쓰코는 참으로 가련하면서도 대단한 생애를 보낸 인물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 05-2. 처지의 변화가 인격을 바꾸었는가?
그러나 내가 쿠덴호프 미쓰코에 대해 특히 인상 깊게 느꼈던 점은,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들과는 조금 다른 한 가지 사실이었습니다. 내가 15년 동안 잊지 못했던 텔레비전 장면은, 둘째 딸 올가가 어머니를 이야기하는 장면이었습니다. 미쓰코에게는 네 아들과 세 딸이 있었는데, 모두 결혼해 곁을 떠나고 마지막까지 남은 사람은 둘째 딸 올가뿐이었습니다. 미쓰코를 끝까지 간호하며 지켜본 것도 올가였습니다.
리하르트의 회고록에는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어머니는 오랫동안 빈 근교의 별장에서 지냈는데, 그곳에는 둘째 딸 올가가 늘 곁에서 모시며,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동양적인 효심으로 한순간도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마츠모토 세이쵸(松本清張)는 자료를 바탕으로, 이 회고록이 자신의 입장을 강조하기 위해 미쓰코에 관한 모든 것을 미화했다는 점을 밝혀냅니다.
나 역시 15년 전 텔레비전에 등장한, 늙은 올가 본인의 말에서, 어머니로서의 미쓰코에 대해 큰 의문을 갖게 되었습니다. 공원의 벤치에 앉아 홀로 노년을 보내고 있던 올가는, 굳은 표정으로 전혀 웃지 않은 채 어머니를 거의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머니는 제게 전혀 자유를 주지 않았습니다. 대학에도 보내주지 않았고, 결혼할 기회도 주지 않았습니다. 한시도 저를 곁에서 떼어놓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노년의 올가의 말투에는 원망마저 담겨 있었습니다. 단 한 명의 일본인으로서, 그리고 남편을 먼저 떠나보낸 외로운 미망인으로서 긴 세월을 살아온 어머니를 헤아리는 따뜻함은, 그 말 어디에서도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 사실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야기를 마친 뒤 올가는 벤치에서 일어나, 풀이 죽은 채 혼자 어딘가로 걸어가는 모습을 카메라가 끝까지 따라가고 있었습니다. 15년 뒤 새롭게 제작된 NHK 다큐멘터리 『미츠코(ミッコ)』에서는, 일곱 자녀 중 유일하게 생존해 있던 넷째 아들 카를이 화면에 등장해 어머니를 이렇게 말합니다. (아, 그 사이에 그 올가는 세상을 떠났군요.)
“어머니는 우리를 사랑하지 않았던 게 아닐까요. 물론 나름의 방식으로 사랑하셨겠지만요.” 나는 다시 한 번 충격을 받았습니다. 자식들에게 이런 평가를 받다니, 도대체 미쓰코는 어떤 어머니였던 것일까요. 리하르트의 회상에 따르면, 미쓰코는 남편의 유언에 따라 가문의 가장 역할을 이어받고, 막대한 재산 관리를 맡게 되면서 사람이 달라진 듯합니다.
“어머니의 생활이 이렇게 바뀐 결과, 성격도 완전히 달라졌다. 온화하고 인내심 많던 어머니는 엄격하고 전제적인 인물로 변해, 자식들뿐 아니라 직원과 하인들까지 모두에게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다. 예전에는 그저 복종하던 어머니가, 이제는 명령하고, 그 명령을 강요하는 법을 배운 것이다.
특히 딸들에게는 맹목적으로 복종하도록 가르치려 하여, 여동생들을 괴롭혔다.” 막내딸 이다 역시 어머니를 두고 “냉혹하고 엄격한 여성으로, 한마디로 말하면 거의 마귀할멈 같은 인상이었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좋은 혼처를 얻지 못한 올가에게, 어머니와 함께 살던 집은 거의 “저주의 집”과 같았다고 이 책은 말합니다.
미쓰코가 자식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 몇 장 남아 있는데, 그것을 보면 그녀에게 모성애가 전혀 없었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습니다. 일곱 아이를 낳은 것도 당시로서는 자연스러운 일이었겠지만, 사진 속의 미쓰코는 어린 아이에게 뺨을 비비고, 어머니다운 눈빛을 보내고, 품에 안고 있습니다.
그런 어머니가 자식들의 기억 속에서는 “아이들을 사랑하지 않았고, 마귀할멈이었다”고 회상된다는 것은, 얼마나 비극적인 일입니까. 리하르트의 말처럼, 남편 사후 막대한 재산을 맡게 된 환경의 변화가 그녀의 전 인격을 바꾸어 놓았던 것일까요. 나는 그것이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증거로, 모든 것을 자식들에게 넘기고 은거 생활에 들어갔을 때, 미쓰코는 다시 모성애를 되찾은 듯 보입니다. 첫 손자 빅시와 함께 노는 미쓰코의 사진. 빅시가 세 살이었을 때 미쓰코는 세상을 떠났지만, “10년 후에 읽어라”라고 적힌 빅시에게 남긴 노트가 발견되었고, 그 안에는 삶의 지침이 빽빽하게 적혀 있었다고 합니다.
● 05-3. 여성의 자아가 팽창할 때
미쓰코의 변화에 대해 더 무엇을 쓰더라도, 이제는 내 추측일 뿐입니다. 물론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고 재산을 지켜야 했던 처지에 그 원인이 있었을 것입니다. 실제로 그녀는 장남 한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고용인들이 모두 서로 마음이 맞는 사람들뿐이라면, 주인은 파멸한다. 모두가 한패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라는 식의 처세를 적기도 했습니다.
책임감 때문에, 자녀들에게 어머니로서의 섬세한 배려를 할 여유는 아마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아무리 신분 높은 귀족이라 하더라도 돈을 빌려 달라고 하면 절대로 응하지 말 것”이라는 것도 미쓰코의 신조였던 듯합니다. 그녀에게는 주변의 모든 사람이 경계해야 할 대상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게다가 남편의 사랑에 감싸이지 않는 삶. 그런 상황에서 다정함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리였을지도 모릅니다.
한편으로는 또, 이 모든 영지와 재산을 자신의 손에 쥐고 있다는 생각 속에서, 미쓰코의 자아는 끝없이 팽창했을 것입니다. 말하자면 ‘자아의 확대’입니다. 어쨌든 “나는 대단한 사람이다”라고 느꼈을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그런 의식 속에서, 자신의 제멋대로인 행동은 모두 허용되어야 하고, 자녀들 역시 자신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나는 이렇게나 가족을 위해 나 자신을 희생하며 살아왔으니, 너희도 나를 위해 희생적으로 봉사해도 되는 것 아니냐.” 이런 생각이 올가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고, 평생 묶어두는 결과로 이어졌을지도 모릅니다. 올가는 결혼 상대를 찾지 못해서 어머니 곁에 남았던 것일까요, 아니면 어머니를 돌보느라 결혼할 기회를 잃었던 것일까요.
이제 와서는 따질 방법이 없지만, 올가의 말투에서는 어머니에 대한 깊은 원망이 분명히 읽혔습니다. 공원을 떠나던 올가의 늙고 쓸쓸한 뒷모습은 참으로 슬픈 것이었습니다. 세상에는 외로운 사람이 많습니다. 고독 그 자체는 반드시 슬픔이나 고통만은 아니며, 때로는 즐겁고 고귀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누군가를 원망하면서 겪는 고독, 후회로 가득 찬 고독은, 당사자에게도, 그것을 보는 사람에게도 얼마나 애달프고 견디기 힘든 것입니까.
게다가 그 원망의 대상이 자신의 어머니라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미쓰코의 처지가 다른 여성에게 주어졌다면 어땠을까 생각해 봅니다. 마츠모토 세이쵸(松本清張)는 자신의 어머니를 예로 들며, ‘데몬(악마)’이라는 다소 격한 표현까지 사용해, 교육을 받지 못했던 메이지 시대 여성의 전형으로 파악하려 한 듯합니다. 그것도 일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나는, 같은 상황이 남성에게 주어졌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해 봅니다. 미쓰코처럼 막대한 재산을 관리하는 남성은 얼마든지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도중에 그런 처지에 놓이게 된 데 있는 것일까요. 아니면 부성애와 모성애는 본질적으로 달라서, 모성애만이 변질되기 쉬운 것일까요. 혹은 여성이기 때문에, 온몸으로 이 거대한 일을 감당해야 했고, 그 결과 ‘어머니 역할’이 사라져버린 것일까요.
어머니가 가장이 되면 가족은 무너질 수밖에 없는 것일까요 답을 내리기에는 너무나 복잡한 문제입니다. 그런데 이 나 자신—미쓰코처럼 극적인 운명을 살아온 것도 아니고, 막대한 재산을 맡은 것도 아닌 평범한 어머니에 불과하지만—일이 많이 들어와 조금 돈을 벌게 되었을 때, 가족을 대하는 마음이 평소와 달라진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 역시 나름대로 자아가 팽창해, 가족에게 은근히 생색내는 태도가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차 좀 가져와.” “거기 좀 치워놔. 왜 이렇게 어질러?” “엄마가 이렇게 피곤한 거 안 보이니?” 물론 입 밖으로는 내지 않는 말도 있습니다. “엄마는 밖에서 일해서 돈을 벌고 있어.” 이 말을 입에 내는 순간 끝이라는 정도의 판단력은, 그래도 아직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 05-4. 아이에게는 아이의 인생이 있다
내게는 딸이 있는데, 집안일을 잘 도와줘서 매우 큰 도움이 됩니다. “뒷정리 부탁할게.” “저녁은 적당히 해서 다들 먹여줘.” “빨래 좀 널어줘.” 이렇게 이것저것 부탁을 남겨두고 집을 나설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편한 일인지, 주부라면 쉽게 짐작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딸이 아직 어렸을 때, 나 혼자서 아무 도움도 없이 버텨야 했던 나날은 떠올리기만 해도 참으로 힘겨웠습니다. 집을 나가기 전에 몇 끼니 분의 식사를 미리 준비해두곤 했으니까요. 그런데 이제는 “나머지는 부탁해” 한마디로 집을 나설 수 있으니, 정말 고마운 존재입니다. 문득, 이대로 곁에 계속 두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내 딸이니 돈 관리도 안심하고 맡길 수 있고, 제멋대로 부탁도 할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나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딸에게는 딸의 인생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내가 이 세상에서 사라진다면, 그와 함께 사라져버릴 역할을 딸에게 맡기게 할 수 있을까요. 부모의 사정으로 딸을 묶어서는 안 됩니다. 쿠덴호프 미쓰코는 바로 그것을 했던 것입니다. 자녀가 일곱이나 있으니, 그중 한 명쯤은 곁에 남아 자신을 돌봐도 괜찮다고 생각했던 것일까요.
옛날 유럽의 가정에는 형제 부부나 조카들을 돌보며 평생 독신으로 지내는, 존재감이 희미한 ‘이모’ 같은 여성이 흔히 있었다고 합니다. 하인과는 다른, 그런 편리하면서도 믿을 수 있는 여성이 없으면 가정의 세세한 일들을 처리하기 어려웠기 때문일 것입니다. 가장의 위치에 있는 오빠는 여동생의 장래를 아예 생각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얌전한 성격을 이용하고, 무엇보다 곁에 있으면 편하다는 이유로 점점 편리하게 부려 쓰게 됩니다.
그러다 정신을 차리고 보면, 조카들은 이미 성장해 더 이상 그 ‘이모’를 필요로 하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그때서야 사람들은 어렴풋이 생각하게 됩니다. “이 사람의 인생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라고. 이런 대가족에서 살인 사건이 일어나고, 범인이 가장 그럴 것 같지 않았던 그 ‘이모’였다는 추리소설도 있었습니다. 그녀의 억눌린 마음이 결국 살인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이런 ‘이모’를 만들어낸 책임은 누구에게 있을까요. 누구도 책임을 느끼지 않습니다. 모든 것은 그저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어버렸을 뿐입니다. 하루하루의 생활을 꾸려 나가는 데는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서, 그것에 쫓기다 보면 그저 하루를 흘려보내게 되는—마치 마약과도 같은 무서움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어디에도 멈춰 서서 다시 생각해볼 틈이 없습니다.
가족이란 참으로 어려운 것입니다. 자신이 아닌 가족을 위해, 각자가 어느 정도의 희생을 치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시간과 노동을 내놓거나, 불편을 감수하거나 말입니다. 하지만 가정을 지키기 위해 누군가 한 사람이 전적으로 희생된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두려운 일입니다.
가정을 항구에 비유하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항구 안을 쾌적하게 유지하기 위한 규칙은 지켜야 합니다. 하지만 본래 배는 항구 밖을 항해하는 존재입니다. 우리 주부처럼 항구를 관리하는 역할을 선택한 사람은, 그 역할을 어떻게든 수행해야겠지만 말입니다.
쿠덴호프 미쓰코의 드라마틱한 생애는, 그 자체가 너무도 극적이었기 때문에, 여성의 문제를 여러 가지로 과장된 형태로 우리 앞에 들이밀고 있습니다. 일곱 자녀 모두에게 외면당했다는 사실을 접하면, 도대체 무엇이 잘못된 것이었을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동안, 딸에게 프랑스의 한 대학에서 합격 통지가 도착했습니다. 우리는 또 몇 년 동안 서로 다른 나라에서 떨어져 지내게 될 것입니다. 딸은 그렇게 자신의 인생을 살아갈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06 가정의 역할을 잃어버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전 올림픽 선수였던 I 씨가 한탄하며 말했습니다. 그녀는 스포츠 교실을 운영하고 있다고 합니다.
“요즘은 정말 놀라운 아이들이 많아요. 언덕길을 오를 때 몸을 앞으로 기울일 줄을 몰라서, 뒤로 벌렁 넘어져 버리는 거예요.” 어머, 깜짝 놀랐습니다. 지구의 중력에 자연스럽게 반응한다면, 언덕에서는 무게중심을 앞으로 옮기는 것쯤은 당연히 자연스럽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걸 못하는 아이가 있다니요.
“학교 창문에서 떨어지는 아이들이 종종 있잖아요. 그것도 균형 잡는 법을 모르기 때문이에요.”
그렇군요. 저는 운동신경이 둔한 것에 대해 어릴 적부터 콤플렉스를 느끼고 있었는데, 요즘 흔하다고 하는 그런 아이들과 비교하면 훨씬 나았던 거구나 하고, 이제 와서야 괜히 자신감이 생기기도 합니다. 그런 아이들은 세 살 정도까지의 생활 경험 속에서 당연히 몸에 익혀야 할 것들을 익히지 못한 것이 원인이라고 합니다.
“그 아이 엄마에게 ‘아이 상태가 좀 이상하다’고 말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고 우겨요. 자기 자신도 이상하니까 자기 아이가 이상하다는 걸 모르는 거죠.” 정말이지, 요즘은 이런 이야기가 끊이질 않습니다. 예를 들어 젓가락을 제대로 잡을 수 있는지 여부는 전적으로 부모의 가정교육에 달려 있습니다. 그런데 그 부모가 제대로 잡지 못하고 올바른 사용법도 모른다면, 아이에게 가르칠 수 있을 리가 없겠지요.
한 설에 따르면 젓가락을 올바르게 잡지 못하는 어머니가 34%나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현재 고등학생의 60%가 젓가락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한다고 하니, 10년, 20년 후에는 젓가락을 올바르게 사용하는 것이 오히려 ‘특수 고급 기술’이 되어버릴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올바른 사용법’이라는 정해진 방식 자체가 사라지고, 각자 제멋대로 다양해지는 걸까요?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임시교육심의회가 3년에 걸쳐 교육개혁에 임했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문제로 지적된 것은 가정의 교육력 저하였습니다. 부모가 부모로서의 역할을 다하지 않고, 모든 것을 학교에 떠넘기려 한다는 것입니다. “선생님, 우리 아이가 게임만 하고 공부를 안 해요. 좀 혼내 주세요.” 이렇게 가정 문제를 교사에게 호소해 본 적은 없습니까? 교사도 마지못해 받아들입니다. “네, 저도 한번 주의줘 보겠습니다.”
"왜 학교가 부모의 역할까지 맡아야 합니까?”라고 물으면, 학교 측은 이렇게 답합니다.
“부모가 하지 않으니까 학교가 할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가장 놀랐던 것은 학교 급식 영양사의 진정서였습니다. “요즘 가정의 식사 영양 관리는 매우 빈약합니다. 학교 급식이 있기 때문에 아이들의 건강이 유지되고 있는 것입니다. 부모에게 식사를 맡겼다가는 아이들의 건강이 위험합니다.”
아이들은 1년에 몇 번이나 학교 급식을 먹을까요? 1,095끼 중에서 고작 약 180끼 정도입니다. 그렇다면 가정의 식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한, 아이들의 건강은 지킬 수 없는 것이 아닐까요. 교육개혁 심의회로서는 사실 부모들에게 직접 경종을 울리고 싶었던 것입니다. “정신 차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가정’이라는 성역에 대해서는 그렇게 말할 수 없기 때문에, 결국 또다시 학교에 부탁할 수밖에 없습니다.
“가정의 교육력 저하를 학교가 쉽게 보완하려 하지 말고, 가정의 현실을 고려하면서도 먼저 문제를 가정에 던지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어머니가 젓가락 잡는 법조차 모르는 현실이라면, 문제를 던진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결국 학교가 모든 것을 떠맡을 수밖에 없는 것일까요. 그리고 어머니는 역할을 잃게 되니, 오히려 학교의 역할인 ‘공부’를 가르치게 되는 걸까요. 여러분은 이런 역할의 뒤바뀜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07. 부모의 지나친 간섭
● 07-1 부모가 있다는 건 참 좋은 일이야
파리에서 하숙 생활을 하고 있는 딸이 여름방학을 보내기 위해 귀국했습니다. 파리에서는 친구들끼리의 교류는 꽤 많은 듯하지만, 기본적으로는 혼자 사는 생활입니다. 아무도 없는 방에 돌아와 혼자 식사를 하고, 혼자 공부를 하고, 누구에게도 “잘 자”라는 인사도 하지 않은 채 침대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아침이 되면 알람시계에 일어나 문을 잠그고 학교로 나갑니다.
그런 생활에 익숙해진 딸이 부모와 함께 사는 것을 번거롭게 느끼지 않을까, 저는 조금 걱정이 되었습니다. 우리 가족은 특히 함께 모이는 것을 좋아해서, 휴일에는 오전, 오후, 밤 최소 세 번은 “차 마실까?” 하며 얼굴을 마주하고 수다를 떱니다. 영화나 전시회를 보러 갈 때도 각자 따로 나가는 경우도 있지만, 가능하면 서로 권해서 함께 가기로 되어 있습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부모 쪽에서 딸과 아들을 끌어내는 느낌이죠. “맛있는 거 사줄게”라는 덤까지 붙여서요. “나는 어디서든 적응을 잘하는 편이야.” 딸은 이렇게 말하며 오랜만의 가족 생활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었습니다. 9월이 되면 다시 커다란 여행 가방을 끌고 태연하게 떠나겠지요. “혼자 사는 것도 또 나름대로 좋거든” 같은 말을 하면서요. 정말 적응력 좋은 아이지요.
그런 딸이 귀국한 지 일주일쯤 되었을 때였을까요. 다림질을 하다가 이런 말을 중얼거렸습니다. “일본에서 사는 것도 참 좋네. 어디를 가도 안전하고, 부모도 있고.” 그녀의 부모 중 한 사람이 바로 나라는 사실이, 잠시 동안 믿기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예상치 못한 말이었으니까요. “그렇지, 부모가 있다는 건 좋은 거야.” 이렇게 맞장구를 치면서, 왜 딸이 새삼 부모가 있는 것이 좋다고 느꼈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일본의 안전함을 말한 뒤에 이어진 말이니, 역시 부모에게 보호받고 있다는 안도감을 새삼 느낀 것이 아닐까 짐작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파리에서의 혼자 생활이 아무리 편하다고 해도, 한순간도 긴장을 풀 수 없는 엄격함이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 아닐까요. 문단속 같은 자기 보호, 전기나 가스의 위험에 대한 주의, 지각하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관리하는 일까지—
● 07-2 잃고 나서야 알게 되는 것
그러고 보니 딸이 이런 말을 한 적도 있었습니다. 어느 날 아침, 제가 늦잠 자는 딸을 깨우러 갔을 때였습니다. “사람 목소리로 깨워주는 건 참 좋네.” 또한 혼자 살게 되면 영양 관리나 체온 유지 등, 자신의 건강을 지키는 책임도 모두 스스로 져야 합니다. 말 그대로 모든 것을 자기 자신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자립’이라고 하면 그럴듯하게 들리겠지만, 사실은 상당한 긴장을 요구하는 일이죠. 일본에 휴가로 돌아와 부모와 함께 살면서, 딸은 아마 무척 편안한 기분을 느꼈을 것입니다. 딸이 외출할 때면, 저는 꽤 잔소리를 합니다. “어디 가니, 몇 시에 돌아오니, 밥은 집에서 먹니?” 그러면 딸도 예를 들어 밖에서 “예정보다 조금 늦어졌는데 지금부터 돌아갈게요. 한 시간쯤 걸릴 것 같아요.”
라고 전화를 걸어 옵니다.
보통이라면 부모가 번거롭다고 느끼겠지요. 적어도 파리에서 혼자 살 때는 어디를 가든, 몇 시에 돌아오든 자유였으니까요. 그런 자유로움 뒤에서는 부모의 간섭이 시끄럽게 느껴질지도 모릅니다. “참견하지 마세요, 속박하지 마세요, 이제 어린애 아니니까 내버려 둬요” 하고 말하고 싶을지도요. 딸은 단지 공동생활의 규칙을 지키고 있을 뿐일까요?
아니, 저는 이국에서의 혼자 생활이라는 엄격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부모에게 보호받고 있다는 것의 소중함을 이해하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습니다. 잃고 나서야 비로소 그 가치가 보이는 것들이 있지요. 부모의 고마움 같은 것이야말로 그 대표적인 예가 아닐까요. “부모도 있고”라는 딸의 말은, 부모 입장에서는 조금 쑥스럽긴 합니다. 하지만 이미 스무 살이 넘은 딸을 실제로 지켜줄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오히려 부엌일이나 다림질 같은 건 제가 도움을 받는 쪽이니까요. 이제는 그저 마음을 쓰는 것 정도밖에는 할 수 없습니다. 비행기는 안전할까, 제시간에 도착했을까, 물건을 잊어버리지는 않았을까— 이런 부모의 쓸데없고 지나친 걱정도, 사실은 잃고 나서야 그 가치를 알게 되는 것 중 하나입니다.
08. 부모의 집
● 08-1 부모의 집과 자기 집
유럽과 미국, 그러니까 제가 직접 확인한 나라는 미국, 프랑스, 영국인데요, 이들 나라의 젊은이들은 의무교육이 끝나는 시점에서 대체로 집을 나와 자립 생활을 시작합니다. 취직하는 사람은 물론이고, 대학에 진학하는 경우에도 장학금을 받거나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지냅니다. 물론 부모 집에서 통학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쓰는 표현이 흥미롭습니다. “부모의 집에 살고 있어요.” 일본인이라면 아마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요. “자택에서 통학하고 있어요.”
그 밖에도 “부모님 집에서”, “부모와 함께 살고 있다” 등 여러 표현이 있겠지만, 서구 여성들이 말하는 “부모의 집”이라는 표현은 상당히 뉘앙스가 다른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것은 부모의 집이지 자신의 집이 아니며, 단지 함께 살게 해 주고 있는 것뿐이라는, 마치 하숙인 같은 감각이 깔려 있는 듯합니다. 결코 “내 집”이라는 발상은 없는 것입니다. 이런 표현 하나만 보아도 일본과 서구의 부모 자식 관계는 다릅니다. 어느 쪽이 좋고 나쁘고의 문제가 아니라, 문화적으로 분명히 다릅니다.
기업이 여성을 채용할 때, 하숙 생활을 했던 사람은 그것만으로 탈락시키고 자택 통학자를 우선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도대체 어떤 의도일까요. 자택에서 통학한 여성은 부모의 감독 아래 있으니 행실이 안심된다고 생각하는 걸까요. 그렇다면 일본 사회는 참으로 자립한 여성을 싫어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부모의 감독이 없으면 스스로 행동을 통제할 수 없는 여성을 채용한다면, 기업으로서도 곤란하겠지요. 아니, 어쩌면 그것이 의도적일지도 모릅니다. 자립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여성 직원보다, 순순히 관리 아래 들어오는 여성이 더 무난하다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르지요.
● 08-2 진정한 자립이란
제 딸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그곳에서 배우고 싶은 것이 있었고,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외국으로 갔습니다. 하지만 본인이 의식했든 그렇지 않든, 나중에 생각해 보면 딸은 자립하기 위해 부모 곁을 떠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유학을 시작한 뒤, 잠시 귀국했다가 다시 프랑스로 돌아갈 때, 말로는 표현하지 않았지만 무척 괴롭고 외로워 보였습니다. “그렇게까지 힘들어하면서 왜 굳이 외국에 가니. 집에 있으면 되잖아.”
제가 이렇게 말했지만, 딸은 아무 말 없이 떠났습니다.
“이대로 부모와 함께 있으면 나는 안 되겠다”라고 느꼈던 걸까요. 사실 저는 참견이 많고 잔소리가 심한 어머니였습니다. 하지만 어머니란 다 그런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같은 여자니까 잘 안다고 착각하고, “괜히 하는 말 아니니까 부모 말 들어라”라며 자신의 옳음을 의심하지 않는 존재 말입니다.
저 역시 제 어머니 때문에 애를 먹었지만, 결국은 어느새 똑같은 어머니가 되어버렸습니다. 참 아이러니한 일이지요. 지방 사람이라면 상경을 계기로 자립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도쿄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방법도 쓸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딸이 외국으로 간 것이 아닐까, 그렇게 상상해 보기도 합니다. 어디까지나 짐작이지만요.
귀국한 뒤 딸은 어떻게 할런지. “방을 얻어서 혼자 살아볼까.” 그런다면 “스스로 벌어서 한다면 그렇게 해라.” 물론 그렇지요. 부모 돈으로 독립한다는 건 이상한 일이니까요. 그러면서 “저 자립했어요”라고 말한다면 그것도 우습겠지요.
여기서 자립의 정의를 내리려는 것은 아니지만, 하숙 생활이 회사채용 측이 우려하는 문제로 이어진다고 생각한다면 그것 역시 이상한 일입니다. 또한 부모와 함께 산다고 해서 자립심이 자라지 않는다는 것도 사실은 말이 안 됩니다.
아는 사람 집 이야기인데요. 결혼해서 따로 살고 있는 딸이 가끔 친정에 오는데, 올 때마다 냉장고에 있는 음식이나 선물로 들어온 것들을 몽땅 챙겨 간다고 합니다. 이 경우의 “부모의 집”이라는 의미는 서구 여성들의 그것과는 다른 듯합니다.
부모의 것은 곧 자신의 것, 부모이니까 어느 정도 제멋대로 해도 된다는 감각. 결혼해서 남의 집 사람이 되었는데도, 아직 탯줄이 끊어지지 않은 사례가 아닐까요.
09. 노인을 지켜보며 보내다
● 09-1 세대의 교체
당연한 일이라면 당연한 일이지만, 내 생활권 안에서도 세대 교체가 착실히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 당연한 일을 이제 와서 멍하니 지켜보는 심정입니다. 단골 빵집은 원래 부부가 함께 일하던 곳이었습니다. 부부가 다정하게 함께 일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참 감동적인 일이지요. 세상이 샐러리맨 중심으로 변해버린 오늘날, 부부가 함께 가게를 꾸려가는 모습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좋게 느껴집니다.
이런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가 나쁘게 자랄 리 없겠지요. 그러다 어느새 아이가 일을 거드는 모습도 보이게 됩니다. 그리고 어느 날, 갑자기 풋풋한 젊은 여성이 가게에 나타납니다. 며느리가 온 것입니다. 아들은 더욱 의욕적으로 일하고, 부모도 만족스러운 표정입니다. 며느리의 배가 불러오고, 어느새 등에 아기가 업혀 있습니다.
몇 해가 지나면 어느새 노부모는 가게에서 보이지 않게 되고, 또 몇 해가 지나면 가게 앞에 근조 화환이 늘어서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인간 세상의 생로병사이지만, 내 눈앞에서 이런 교체의 전 과정을 지켜보게 된다는 것은, 결국 내가 꽤 오랜 세월을 살아왔다는 뜻이겠지요.제 친구들의 부모님들도 요즘 들어 잇따라 세상을 떠났습니다.
20년도 더 전의 한 대화가 떠오릅니다. 제 친구 중 한 사람은 스님이었고, 또 한 사람은 의사였습니다. 스님이 한탄하며 말하길, “요즘은 죽는 사람이 적어서 우리 집안은 장사가 안 돼 곤란하다.” 그러자 의사가 위로하며 말했습니다. “의학의 힘으로 오래 산 사람들이, 언젠가 한꺼번에 많이 죽게 될 거야.”
맞다, 의학이 아무리 발전해도 인간이 영원히 살 수 없다면, 언젠가는 그런 때가 오겠지— 저는 그때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지금, 20년 전에 예견되었던 그때가 온 것만 같은 느낌이 듭니다. 우리 집 근처에는 장례식장이 있어서, 대부분의 집에서는 자택이 아니라 이곳에서 츠야(通夜-밤샘기원)나 장례식을 치릅니다.
매일 아침, 식이 예정되었다는 명패가 네다섯 개씩 나란히 걸려 있는 것을 보며, 길을 지나가다가 이런 생각을 합니다. “아, 또 몇 분이 돌아가셨구나.” 장례식장은 크게 번창하여, 건물도 많이 증축되어, 두 건의 츠야나 장례식을 동시에 진행할 수도 있는 것 같습니다. 참석자들은 순간 어느 쪽인지 헷갈리는 모습입니다.
● 09-2 우리 집의 노인 문제
동창 A의 어머니가 암으로 돌아가신 것은 아마 재작년이었을 것입니다. “병원에서 함께 지내며 점점 쇠약해지는 어머니의 잠든 얼굴을 지켜보고 있으면, 눈물이 끝없이 흐릅니다.” 이런 내용의 편지를 A에게서 받은 적이 있습니다. 힘들겠구나 하고 동정은 했지만, 그 슬픔이 완전히 와닿지는 않았고 어디까지나 남의 일로 느껴졌습니다.
곧 장례식이 있었습니다. B와 C의 어머니도 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바쁜 와중에 병문안도 가지 못한 채 결국 돌아가셨고 장례식이 치러졌습니다. 저는 그때마다 이렇게 위로의 말을 했습니다. “그래도 오래 사셨으니, 연세로는 부족함이 없으셨잖아요.” A나 B나 C를 위로하려고 한 말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 집의 노인 문제에 대해서는 어쩐지 실감이 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제 어머니가 병석에 눕게 되면서, 모든 것이 현실이 되었습니다. 제 어머니는 여든다섯이었습니다. A, B, C의 어머니들이 돌아가신 나이를 훨씬 넘은 고령이었습니다. 그리고 “연세로는 부족함이 없다”는 말이 전혀 위로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깨달았습니다. 어머니가 쓰러진 후, 저는 비로소 많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저를 이렇게 말해왔습니다.
“아내이자, 두 아이의 어머니이자, 대학 교수이자, 수필가이기도 하면서, 여러 역할을 훌륭히 해내는 사람이다…” 하지만 누구도 저를 “딸”이라고 말해주지는 않았습니다. 저 자신도 ‘딸’이라는 역할을 의식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가 쓰러지자, 간병의 역할은 딸인 제게로 돌아왔습니다.
저는 틀림없이 ‘딸’이었습니다. 간병을 하면서, 노쇠를 지켜본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도 늦게나마 분명히 알게 됩니다. 거스를 수 없는 시간의 흐름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주사를 놓고 약을 먹이며, 말로 격려를 해도, 그 뒤에는 결코 되돌릴 수 없는 인간의 절망적인 운명이 버티고 있습니다.
어머니의 얼굴을 바라보며 이 냉혹한 사실과 마주하고 있으면, 허무함에 짓눌릴 것만 같습니다. 늙음도 죽음도, 결국 자신의 부모가 그렇게 되기 전까지는 제대로 알 수 없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의 일이 되었을 때, 비로소 더 많은 것을 알게 되겠지요.
10. 나이의 무게
● 10-1. 처음으로 경험한 가족의 노쇠
어머니는 지금까지 몸져눕는 병도 없이, 이른바 노망(치매) 증상도 없이, 내가 집을 비운 사이 집안일을 도와주고 계셨다. 왠지 이대로 시간이 영원히 흘러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물론 마음 한구석에 불안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B양의 어머니는 아직 일흔다섯인데, 벌써 딸을 알아보지 못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제는 집에 돌아가게 해 주세요”라고 말하며, 수십 년이나 살아온 집을 나가려고 하거나, 친딸인 B양에게 “당신은 누구십니까?”라고 묻는다는 슬픈 이야기를 들으면, 나는 내 어머니가 그런 식으로 치매에 걸리지 않은 것에 크게 감사하게 되었다. 또 다른 친구의 어머니는 일흔둘에 암으로 기관지 절개까지 받으며 고통스럽게 돌아가셨다고 한다.
나는 역시 우리 어머니가 암과는 인연이 없는 체질이라는 것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나는 주부들을 중심으로 한 에세이 교실을 운영하고 있는데, 그들이 제출하는 글에는 병상에 누운 노인을 며느리로서, 딸로서 간병하는 이야기가 자주 등장한다. 이것 역시 나에게는 남의 일처럼 느껴졌다. 고생이야 상상은 되지만, 어딘가 실감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태평하게 지내고 있었다고 해도, 언젠가는 끝이 오리라는 것은 각오하고 있었다. 어떤 형태로 끝이 올지는 알 수 없기에, 노인을 모시고 있는 가정은 시한폭탄을 안고 있는 것과 같을지도 모른다. 내가 일주일쯤 외국에 나가 있는 사이, 어머니는 가정부에게 갑자기 이상한 말을 하기 시작했다. 가벼운 뇌경색이었다.
본인에게는 상당히 충격이었을 것이다. 그 이후로는 침대에서 일어나려 하지 않게 되었다. 그 뒤의 경과를 길게 설명해도 의미가 없으니 생략하겠다. 어쨌든 장폐색이 생기고 위궤양까지 생겨, 싫어하는 것을 억지로 설득해 입원시키게 되었다.
이제는 더 이상 가망이 없다고 생각했다. 손자인 내 아들이 “어떻게든 안 되는 거야?”라고 절박한 목소리로 묻는다. 아들에게는 처음으로 마주한 ‘노쇠’이자 ‘죽음’이었을 것이다. 나는 애써 침착하게 대답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야. 이것만은 수명이니까. 인간은 영원히 살 수는 없는 거야.” 그 말은 동시에 나 자신에게도 되뇌는 말이었다.
●10-2. 나이에 걸맞은 삶
하지만 현대의 의료는 정말로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의사가 위내시경을 하자고 해서, 나는 거절하려고 했습니다. “이제 더 이상 괴로운 일은 하지 말아 주세요.” 예전과 달리 그렇게 아프지 않다고 하며 검사가 시작되었고, 위궤양이 발견되어 투약과 수액 치료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제는 더 이상 가망이 없다고 생각했던 여든다섯 살의 어머니가 점점 식욕을 되찾고 회복해 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절대로 입원 같은 건 하고 싶지 않다며 완강하게 거부하던 어머니를 설득한 것이 우선 잘한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친구들이, 나이가 많아도 얼마든지 건강을 되찾은 사례들을 들려준 덕분에, 나는 용기를 얻어 어머니를 설득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의사가 환자의 나이에 얽매이지 않고 보통 환자를 대하듯 치료해 주었다는 점입니다. 이미 여든다섯이니까 하고 손을 놓아버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작은 개인 병원의 젊은 의사였지만요. 병문안을 와 준 친지와 지인들의 호의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지금 어머니는, 예전에 비하면 동작이나 판단력이 다소 둔해진 것 같기는 하지만, 식탁 정리도 해 주십니다. 빨래도 널어 주십니다. 무엇보다도, 의사에게 받은 세 가지 약을 꼬박꼬박 챙겨 드십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면, 아, 사람은 몇 살이 되든 낫고 싶은 것이구나, 살아 있고 싶은 것이구나, 하고 마치 큰 발견을 한 것처럼 납득하게 됩니다.
아무리 상상력을 발휘해도, 십대였을 때는 삼십대 아줌마의 마음을 짐작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내가 중년이 된다는 것은 믿을 수 없는 일이라고 진심으로 생각했습니다. 이십대 한창때에, 오십대 아줌마들이 빨간 옷을 입고 화장을 하고 친구들과 어울려 떠들썩하게 여행을 다니는 모습을 보면, 추하고 눈 뜨고 보기 힘들다고까지 생각했던 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결국은, 지금의 우리는 바로 그런 일을 의기양양하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끄럽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뭐, 젊은 사람들의 시선에 다소 과하게 의식하게 되는 경우가 없지는 않지만요. 이런 경험을 거듭하다 보니, 나도 언젠가 어머니의 나이가 되는 것은 시간문제이며, 피할 수 없는 사실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지만 역시 알 수 없는 것은, 그 나이에는 그 나이대로의 삶이 있다는 점이 아닐까요. “그 나이가 되어 보지 않으면 모른다”는 말을 예전부터 들어 왔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특히, “그 정도까지 살았으면 이제 됐지 않느냐”는 생각은 결코 들지 않는 것입니다.
“생명의 소중함”이라는 말은 흔히 쓰여 닳아버린 표현이라, 나는 사용하는 것을 꺼리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굳이 그 의미를 생각해 본다면, 그것은 그 사람의 “살고자 하는 마음”을 존중해 주는 다정함과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