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든 서울, 오송회
강상기
■독재자의 끝과 서울의 봄
70년대 후반과 80년대 초에 걸친 기간 동안 나는 주택개발업자가 지은 익산시 영등동 535-26 단독주택에서 살았습니다. 결혼하여 첫딸과 둘째 딸을 낳아 기른 곳입니다. 봄이면 작은 마당에는 철쭉을 비롯하여 꽃 잔디가 참 아름답고 담장 옆으로는 장미가 붉었습니다. 여름에는 큰 플라스틱 함지박을 마당에 내어놓고 거기에 물을 가득 담아 놓으면 어린 두 딸아이가 물장난을 하면서 즐겁게 놀았습니다. 나는 발코니의 의자에 앉아 책을 읽으면서 두 딸아이가 노는 모습을 지켜보곤 했습니다. 엄혹한 독재 시절임에도 불구하고 어린 딸들이 티 없이 놀고 있는 모습을 볼 때만큼은 참 행복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그 당시 익산 원광여자고등학교에서 국어교사로 재직하고 있었습니다. 1979년 10월, 독재자 박정희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나는 몹시 기뻐서 날을 새며 술을 마셨습니다. 유신독재가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끝내 그는 머리에 총을 맞고 죽었다 그의 대갈통이 문제였던 것이다 그것을 깨부시지 않고는 나라가 바로 설 수가 없었다 돈을 좀 벌어온다고 집안에 들면 포악한 가장처럼 그는 경제를 내세워 포악한 정치를 했다 이를 종식시키기 위해 독재자의 친구는 목숨을 건 결심을 했다 시저를 죽인 부루터스처럼 친구는 영웅답게 행동했다 독재자의 탱크 앞에 목숨이 위태로웠던 수백만 명의 희생을 미리 막은 의인이었다 독재자의 죽음 옆에는 허망한 권력처럼 씨바스가 제 멋대로 나자빠져 있었다.
──졸시 「어느 독재자의 끝」
1980년 잔뜩 부풀었던 민주화의 봄을 맞아 나는 교권옹호위원회를 결성해 교육정상화를 위해 앞장섰습니다. 그 이유로 전두환 군부정권에 의하여 원광여자고등학교에서 그해 11월 강제 해직되었습니다. 나는 상경하여 문학평론가 임중빈 씨가 운영하는 출판사에서 출판부장으로 근무했습니다. 아내와 어린 두 딸과 헤어져 객지에서 혼자 생활하는 일은 쉽지 않았습니다. 출판사 근무가 가계에 별 도움이 되지 않아 그만두고 1981년 봄, 군산제일고등학교 국어교사로 부임하였습니다. 군산에서 익산까지 통근할 수 있는 스쿨버스가 있어서 다행이었습니다. 나는 날마다 스쿨버스로 출퇴근을 했습니다. 제일고등학교는 군산의 명문학교였기 때문에 우수한 학생들이 많이 모였습니다. 이 학생들의 장래를 위하여 나는 진학지도실에서 열심히 근무했습니다.
그런데 1982년 11월 3일, 저녁 12시경에 익산경찰서에서 갑자기 전화가 왔습니다. 좀 알아볼 일이 있으니 경찰서 정보과로 나와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무슨 영문인 줄도 모르고 경찰서에 나갔는데 오장환의 『병든 서울』이라는 책을 본 일이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전혀 없다고 했더니 그 책을 주웠다고 하는 사람이 여기에 와 있다고 하면서 정말 모르냐고 윽박질러서 그렇다면 그 사람과 대질해달라고 말했더니 뜻밖에도 이광웅 시인이 나타났습니다. 대질 끝에 내가 받지 않은 것으로 판명되었고, 대신 김지하 시집 『불귀』를 내가 소지하고 있다고 하여 압수당하였습니다. 『불귀』는 일본에서 간행된 것인데 문규현 신부가 가지고 있던 것을 복사해서 소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음 날 오후 그러니까 1982년 11월 4일, 수업도중 군산경찰서 정보과 문형사에 의하여 강제 연행되었습니다. 문형사는 중학교 동창으로서 중학교시절 농구선수를 했습니다. 하필 이런 상황에서 중학교 동창한테 연행되다니! 참 얄궂은 일이었습니다. 그 친구도 처음에는 나를 몰라보다가 내가 혹시…, 하면서 물어보니까 “오래간만에 만났는데 이런 일로 만나니 괴롭구만.”이라고 말하면서 미안해했습니다. 군산경찰서까지 나를 데리고 간 그 친구는 “조사 잘 받아!”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습니다.
■시집 『병든 서울』이 몰고 온 파장
군산경찰서에서 조사를 받다가 저녁 8시경에 전북 대공분실로 끌려갔습니다. 처음에는 대공분실 사무실에 나를 2시간 정도 혼자 있게 하였는데 그 고요함이 오히려 공포였습니다. 나중에 형사 한 사람이 들어와서 대뜸 큰소리로 호통을 치면서 베트남이 왜 망했느냐? 장개석이 왜 모택동한테 패배했느냐? 등을 물으면서 무슨 독서클럽이 있다는데 다 내놓으라고 협박하였습니다. 그러다가 평생진술서를 쓰라면서 갱지 한 묶음을 책상 위에 던져놓고 나갔습니다. 나는 공포에 떨면서 밤을 새워 진술서를 썼습니다.
다음 날 나는 대공 분실 맞은편에 있는 무주여인숙으로 끌려갔습니다. 나에게는 담당형사가 붙었습니다. 나에게 평생진술서를 쓰라고 한 바로 그 형사였습니다. 목소리는 우렁우렁했으며 얼굴은 위협적이었습니다. 이광웅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쓰라고 했습니다. 나는 교무실도 따로 쓰고, 익산에서 군산으로 통근하는 관계로 자리를 함께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고 했더니 “그래도 국어선생끼리 왜 이야기가 없었겠느냐? 여기가 어디라고 거짓말을 해? 들어온 이상은 그냥은 못나간다.”면서 그전에 고문한 사람들을 예로 들며 순순히 자백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듣지 못한 말을 하라니 정말 미칠 지경이었습니다.
며칠이 지나도 들은 말이 없다고 했더니 고문기술자 한 사람이 들어왔습니다. 첫인상이 고약하게 생겼습니다. 눈자위에 칼자국 같은 흉터가 잔인하게 보였습니다. “너는 뜨거운 맛을 봐야 불거냐?”면서 무슨 말이든지 들은 것이 있으면 적어내라고 협박해서 전두환이 미국 방문 중 차를 시키는데 영어로 “아이 엠 커피”라고 말했고, 또 전두환 허벅지에 시퍼렇게 멍이 들었는데 이유는 대통령이 되어 기쁜 나머지 이순자가 “여보, 이게 꿈이여 생시여” 하면서 허벅지를 쥐어뜯어서 그랬다는 등의 말을 적었습니다. “이 자식, 안 되겠구만.” 하더니 나를 대공분실로 끌고 갔습니다.
사무실에서 다른 형사 한 사람을 부르더니 나를 지하실로 끌고 갔습니다. 옷을 다 벗으라고 하더니 두 팔목을 노끈으로 묶고 무릎에 깍지를 끼게 하더니 쇠파이프를 무릎 아래쪽에 집어넣어 테이블 양쪽에 걸쳐 놓고 고문을 시작했습니다. 얼굴에 수건을 덮고 그 위에 주전자의 물을 부어댔습니다. 사타구니에도 찬물을 부어대면서 “좃도 아니구만.”이라고 중얼대면서 킥킥거렸습니다.
“우리보다 월급도 많은데 웬 불평을 그렇게 했느냐? 전두환이가 광주에서 만행을 저지른 것을 나도 분개한다. 그러나 나도 살아야 한다. 위에서 시키니까 어쩔 수 없다. 어서 빨리 하나 내놓아라. 독서 서클이 있다면서?”
“없습니다.”
“이 자식, 여기가 어디라고 거짓말 혀! 안되겠구먼!”
마침내 양쪽 엄지손가락에 전선줄을 감아 전기고문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차라리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나는 이렇게 대공분실에 불법구금 당한 채 20여 일 동안 가혹한 고문에 의한 강압조사를 받았습니다. 조사과정에서 당한 물고문, 통닭구이고문, 전기고문 등으로 인하여 엄청난 육체적 고통을 겪었습니다. 혹독한 고문에서 오는 심한 강박관념과 공포 상태는 나를 정신적 혼미에 빠지게 했습니다. 이렇게 사건은 조작되어 1982년 11월 25일 나는 구속되었습니다.
그 때를 다시 뒤돌아보면 ‘오송회’ 사건은 한 권의 시집 때문이었습니다. 오장환 시인이 쓴 『병든 서울』이라는 시집은 신석정 시인 집에 있던 것이었습니다. 이를 필사해 이광웅이 가지고 있었는데, 그 시집을 동료교사들과 나눠보기 위해 다시 복사를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받은 복사본을 박정석이 가지고 있었는데, 집에 놀러온 서울대 제자에게 빌려주었습니다. 그 제자가 술에 취해 버스에 놓고 내렸습니다. 전주 직행버스 주식회사 소속 버스 승객 점검원인 전모씨가 1982년 7월 20일 군산시 장미동 소재 시외버스 터미널에 정차된 버스 안에서 승차인원을 점검하다가 『병든 서울』 복사본을 습득하여 군산경찰서에 신고하였고, 군산경찰서는 당시 용공불온서적으로 분류되어 있던 위 시집의 출처를 수사하게 되었습니다.
복사본 표지는 제일고등학교 상장을 사용했기 때문에 쉽게 출처가 드러났고, 이광웅의 독특한 글씨체도 바로 드러났습니다. 결국 이광웅이 복사본을 동료 교사에게 배포한 사실을 밝혀내게 되었습니다. 군산경찰서는 상부기관인 전북도경 대공분실에 이를 보고하였고, 본격적인 수사에 착수하게 된 것입니다. 대공경찰은 43일 동안 교사들에게 북한과의 연계 여부, 광주항쟁의 중심인물인 윤한봉과의 관계를 추궁하며 통닭고문, 전기고문, 물고문 등으로 위협한 끝에 ‘오송회’라는 이적단체를 조작해 발표했습니다.
사실 오송회라는 이름은 당국에서 지어준 것입니다. 1982년 4월 19일 교사 5명이 학교 뒷산 소나무 아래서 4·19혁명이 국가기념일에서 제외된 것을 한탄하며 막걸리를 마시고 4·19와 5·16희생자를 위해 묵념을 한 일이 있습니다. 이를 빌미로 해서 수사기관에서는 맨 처음 ‘오성회’로 만들었습니다. 익산남성고등학교 출신이라는 점을 참작했습니다. 그러다가 그 중 한 명이 남성출신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어 다시 바꿨는데, 소나무 아래에서 위령제를 지냈다고 해서 ‘오송회’가 된 것입니다.
나는 전주북부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되었습니다. 경찰서 유치장에 와 보니 그 지독한 대공 분실이 차라리 따뜻했습니다. 경찰서 유치장은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다 앞문과 뒷문이 모두 유리창도 없는 철창이어서 마치 동물우리와 같았습니다. 겨울바람이 몹시 불어서 담요 한 장 가지고 체온을 유지하기에는 너무 가혹했습니다. 더구나 모진 고문으로 인해서 내 손가락과 종아리 쪽이 심하게 피멍이 들어 있었는데 담당 경찰관에게 물파스를 구해달라고 해서 바르며 지냈습니다.
지금 같으면 변호사를 통해서 상처 부위를 디지털 카메라로 찍어 채증도 해야 할 일을 나는 그 상처의 흔적을 없애고 있었습니다. 너무 춥고 몸의 통증이 심해서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정말 개 떨듯이 떨며 지냈습니다. 소변을 보면 붉게 피가 섞여 나오기도 했습니다. 허리가 몹시 아파 일어나 몸을 움직이면 담당 경찰관이 앉으라고 제지하였습니다. 너무 추워서 그런다고 하면 카메라로 유치장을 감시하고 있어서 안 된다고 했습니다. 안부가 궁금했던 이광웅 시인도 바로 내가 있는 옆방에 있었습니다.
“형! 어떻게 된 거여?”
“다 조작한 거여! 전부 내가 뒤집어 쓴 거여!”
이때 나는 실체가 없는 사건임을 알았습니다.
유치장 안에서 하루 종일 대화 없이 무료하게 지내는 일은 더욱 고통스런 일이었습니다. 언제 검찰에 불려갈지 모르고 또 언제 대공분실에 다시 불려갈지 모르는 불안한 상황 속에서 담당 경찰은 나에게 『정화』라는 잡지를 읽어보라고 주었습니다. 정화추진위원회 본부에서 발간하는 월간지였습니다. 내가 아는 사람의 글도 실려 있었는데 군사정권에 온갖 아첨을 떠는 구역질나는 내용이었습니다. 정말 ‘정화’시켜야할 잡지였습니다.
책을 읽는 도중 문득 아내와의 결혼기념일이 생각났습니다. 내일이면 82년 12월 5일. 우리의 6주년 결혼기념일이었습니다. 유치장 안에서 내 생각을 어떻게 아내에게 알릴까 궁리했습니다. 나는 밥 한 숟갈을 몰래 남겨 놓았다가 『정화』 잡지의 활자를 찢어서 새 내의를 넣어줄 때 묻혀 들어온 종이에 붙였습니다.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최고야(아내의 본명은 최승희이지만 최고야는 내가 지어 부르는 이름이다.)
오늘은 우리의 6주년 결혼기념일에요. 함께 있었으면 언제나처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눌 텐데- 하는 아쉬움으로 6년 결혼생활을 돌이켜 봅니다. 어깨를 쫙 펴세요. 결코 위축되지 마세요. 하느님께서 하나로 짝지어 주실 땐 좋은 일, 궂은 일 함께 도우며 지내라는 것 아녜요? 암, 그렇구 말구요. 인간이 떳떳이 어깨 펴고 사는 길은 결코 호화로운 주택에서 호의호식하는 일은 아닐거예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양심의 평화만 있다면 어느 정도의 궁핍은 견딜 수 있어요.
그 종이쪽지를 헌 내의 속에 집어넣었는데 다행히 내의를 빨기 위해 옷을 뒤집어 보던 아내가 그 쪽지를 받아 읽을 수 있었습니다. 아내는 나의 내의에서 풍기는 파스냄새를 맡으며 그 편지를 읽었다고 합니다. 눈시울을 붉히면서…….
강상기 / 1946년 전북 임실에서 태어났으며 1966년 월간종합지 『세대』, 197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시집 『이색풍토』, 『철새들도 집을 짓는다』, 『민박촌』, 『와와 쏴쏴』가 있고, 산문집 『빗속에는 햇빛이 숨어 있다』, 『자신을 흔들어라』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