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
생 (人 生)
한 해가 저물어가는 요즘, 세상은 어떤 빛을 띄우고 있을까... 눈부신 푸른 빛인가, 아니면 현란한
붉은 빛인가?
이것이다. 이것이 12월의 빛, 겨울의 문 앞에 떨어진 태양의 빛이다.
오늘은 겨울나무와
나이듦에 대하여 이야기하기로 한다.
녹색식물은 광합성을 하는데, 광합성은 빛의 강도, 온도, 이산화탄소 농도에 영향을 받는다.
이들은 명반응과 암반응을 통하여 양분을 생산하여 비축해놓는다.
녹색잎은 사람들이 사용할 재화를 생산하는 공장에 비유할 수
있다. 햇빛이 가장 강하고 기온이 섭씨 35도 근방을 오르내리는 여름을 지나고, 햇볕의 강도가 약해지고, 기온이 떨어지기 시작하면
식물의 광합성 작용도 느려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공장을 가동하는 한, 설비를 유지하기 위한 에너지와 생산활동에 사용되는
에너지를 소모하게 된다.
이렇게 공장의 생산성이 자꾸 떨어져서 머지않아 재화를 생산하는데 투입되는 에너지 보다
공장을 유지하기 위하여 투입되는 에너지가 더 커질 것이 예상되는 가을이 되면 컴퍼니는 서서히 구조조정 계획을 마련하게 된다.
이 구조조정의 전단계로 컴퍼니는 공장에서 생산한 재화를 거절하는데, 공장에서 생산한 양분이 줄기로 유입되지 않도록
녹색잎과 가지의 접촉면에 통과하기 어려운 방어벽을 설치한다.
즉, 촘촘한 그물을 설치해놓는 것이다. 컴퍼니의
입장에서는
공장을 떼어낼 경우 이 절단면이 외부와의 접촉면이 될 것이므로 새로운 방어벽이 필요하고,
지금의 그물 형태의 방어벽은 그 기초공사를 해놓는 셈이 된다.
사실 이것은 녹색잎의 입장에서 보아도
가뜩이나 에너지가 부족한 상황이기 때문에 자급자족 하면서 하루라도 더 연명할 수 있는 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공장과 컴퍼니 사이에 새로 설치된 방어벽을 떨켜존(abscission zone)이라고 한다.
방어벽이 생김으로 하여 뿌리로부터 나뭇잎으로 연결된 물관을 통한 물공급도 줄어들게 된다.
공장에서는 생산성이 낮기는 하지만 계속 광합성을 하고 양분을 생산하여 공장내부에 쌓아놓게 된다. 공장 자체로 볼
때에는 과잉생산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과잉생산과 함께 생산한 재화를 공장내부에 쌓아놓음으로써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이
줄어들게 되면 기계가동을 줄여야 한다. 이렇게 엽록소가 파괴되고 나뭇잎은 녹색을 잃게 되는데, 이 때 녹색식물의 잎이 안토시아닌의
영향으로 붉은 색을 띠거나 카로티노이드의 영향으로 노랑색을 띠게 된다.
근래에는 과학자들 사이에서 이들 색소가 단지
엽록소에 가리워져 있다가 엽록소의 파괴로 인하여 그 색이 드러나게 되는 것이 아니라 가을에 특별히 이러한 색소가 생산되고,
독립적인 역할을 한다는 의견이 제출되고 있다.
우리는 해마다 자연이 환경속에서 '무엇이 최선인가'를 지표로 삼아 생체활동을 하는
것을 목격한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은 외연에 눈길을 빼앗기고, '불 타는 듯한 단풍'에 매료된다. 파리한 노란 잎을
보며 가물가물한 햇볕의 한 줌 온기를 느끼고, 태양의 계절이었던 지난 여름을 추억한다.
사람들은 일조량이 줄어들면서
나타나는 우울증을 가을날의 센티멘탈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일조량이 더욱 줄어들고 기온이 내려가는 늦가을이 오면 붉고 노란 단풍이 든 잎을 유지하는 일조차
힘겨워진다.
춥고 건조한 겨울을 보내기 위하여 컴퍼니는 생산성이 극도로 낮아져서 오히려 에너지 소모만 하고 있는
이러한 공장들을 폐쇄하기로 결정한다. 떨켜층을 더욱 두껍게 만들어서 나뭇잎 부분이 분리되도록 하는 것이다.
이렇게
단풍잎은 낙엽이 된다.
나뭇잎을 다 떨궈버린 앙상한 나뭇가지들...
떨어진 나뭇잎은 지면을 덮고, 그 사이 사이로 두꺼운 나무껍질 조각들이 함께 떨어져 내린다.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는 '꽉 막힌' 나무껍질, 유연성이 극도로 부족한 나무의 거친 껍질들을
지면으로 집어던지는 것이다.
이들의 '현재'는 분명 '죽음'이다.
이들에게는 새 봄이
없고, '재생'도 없다. 단지 분해되어서 자연의 순환에 휩쓸려 들어갈 뿐이다.
그러나 나무는 나뭇잎과 뻣뻣하게 굳어진 겉껍질을 던져버리고 적당한 굳기의 겉껍질로 둘러싸인 채
춥고 어두운 겨울을 날 각오를 다지고 있다. 황량한 숲 어귀에 서있는 이 나무의 앞날에는 모진 추위와 배고픔과 목마름이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이 모든 시련과 고통을 겪으면서 몇 달을 견디다가, 나무가 '이제 더는 못하겠다'고 기진맥진해질
무렵 땅 속 깊은 곳에서 한 올 한 올 온기가 돌아오고, 온 몸에 수분이 돌고, 일조량이 늘어나면서 추위를 몰아내고 세상이
밝아지는 '봄'을 맞이할 것이다.
이 나무가 겨울을 이겨낼 수 있는 것은 봄에 피는 새싹 덕분이 아니라, 지금까지
의지해오던 제일 바깥의 껍질을 던져버리고 스스로 최전선에 필사적인 각오로 섰던 '의사소통이 가능한 겉껍질' 덕분이다. (참조: 리걸마인드, 도서출판be)
그리고 봄을 맞이하여 새싹이 돋는다고 하여 이 나무가
'새싹'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라고 하면 옳지 않다. 새싹이야말로 나무의 일부분이며, 나무가 존재하지 않으면 새싹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큰 나무의 삶은 흐느적거리는 갈대나, 한해살이 풀의 삶과는 그 격이 다르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노인인구'가 늘어날 것이라는 걱정소리가 높다. 출산을 장려하고, 사회가
아이들을 위하여 전력을 다해야 한다고 외친다. 그러나 모든 것은 '순리'에 따라야 하는 법이다. 인구가 줄기도 하고, 늘기도 할
것이고 노인인구가 늘어나면 노인층의 생산성 또한 늘어날 것이다. 인구분포를 어느 정도 '조정'하는 것은 가능하겠지만,
'조작'이나 '조장'은 옳지않다는 뜻이다.
더구나 '노인'을 낙엽 아래에 쌓인 나무껍질처럼 생각하는 것은 큰
잘못이다.
바닥에 쌓인 나무껍질은 '이미 죽은 물건'이지만, '노인'은 나무껍질이 아니라 나무 자체이다. 나무가
겨울동안 살아남을 수 있도록 온몸으로 겨울을 견디며 나무를 지키는 존재이다.
그렇다면 겨울이 가버리면 노인의 가치도
사라지는가? 그 또한 아니다. 노인은 나무에 싹이 돋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히는 전과정동안 당당한 사회의 어른으로서 그
모든 즐거움을 누릴 사회의 주인이며, 나무로서는 최후의 보루라고 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 대부분의 노인은
'죽는 날을 기다리는 여생'을 사는 '복지기금의 소비자'로만 인식되고 있다. 아니면 자식들에게 넘겨주어야 할 재산을
움켜쥐고 장수욕심으로 버티고 있는 고집센 사람들로 인식되기도 한다. 이 경우... 자식이 부모를 살해하는 천인공노할 범죄사건을
전해들었다.
노인들도 문제가 있다. 태어나서 배우고 다음 세대를 낳고 길러놓으면 자신의 할 바를 다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그것이다. 사람마다 다음 세대를 키워놓고 "내 할 일 다 했다"고 하면서 모아 둔 돈과 경력에 의지하여 하루 하루 여생을
소모하기만 한다면 그 사회는 겉껍질이 없는 나무를 키우는 사회가 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부모는 자녀가 성년이 되는 날 이후로 자신을 계발하고
가꾸는 일을 시작해야 한다.
자녀가 취업을 하거나, 대학을 졸업하거나 혼인을 하는 때가 아니다. 우리 사회의 부모들은
자녀들의 손을 너무 오래 잡고있는 셈인데, 성년을 맞이하는 자녀에게 그들 스스로 그들의 인생을 가도록 잡고 있던 손을 놓아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부모였던 사람들은 자기 자신으로 돌아와서 노인이 될 준비를 해야
한다.
누구나 50대에 들어섰다면 '나는 어떤 존재인가, 내가 존재하는 의미는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해보아야 한다. 나는 어떤 직위에서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왔다는 그런 것
말고, '존재'와 '가치'를 생각할 때라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경험과 풍부한 지적능력을 발휘하여 이제부터 '공존'과
'문화'에 기여해야 하는 것이다.
돈은 문제가 아니다. 그만큼 살아봤으면 알겠지만, 돈이 더 있고 혹은 부족하고
하는 것은 '삶의 질'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사람의 가치는 '바로 그 사람' 전체로 보여주는 것이다. 돈으로
가치나 사람을 만들지 못하고, 사회적 성공으로 존재의의를 평가해줄 수 없다. (참조: 헌법과
정신이상항변, 도서출판be)
30대인 사람들은 '노인은 남들만 되는 줄 안다'고 한다. '다른 사람은 모두 죽을
운명이다'는 이야기와 같다. 그리고 노인은 아무나 다 되는 줄 안다.
그렇지만 사실 '노인'이 되는 것은 큰 행운이다.
그곳에 이르는 길에는
무수히 많은 죽음의 다리가 가로놓여 있음을 알아야 한다. 최근의 뉴로사이언스 노화연구에
의하면 두뇌기능(IQ측정치가 아니라)이 우수한 사람이
장수한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노인은 우수한 지적능력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 모두 '노인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을 지니고 살 일이다. 물론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참으로
성실하게 조심조심 세상을 살아야 할 것이다.
노인이 되었다는 것은 자기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고, 전력을 다하여
세상을 향하여 빛을 발해야 하는 시기에 이르렀다는 의미이다.
이들은 욕심없이 그야말로 '이타적인
삶'을 살 수 있다.
자식에게 무엇을 남겨줄까 하는 걱정도 부질없는 것이다.
다만 시간속을 여행하는 인간으로서
'의미'를 찾고, 이 세상에 '선(善)한 의지'를 남겨주기 위하여 노력해야 한다.
노인기는 초췌한 폐물이 되는 때가
아니라, 한 사람의 일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존엄한 모습을 보여주는 시기, 클라이막스에 도달하는 때를 말한다.
세월과 함께 바위에 새겨진 이 아름다운 그림처럼 사람은 노인기를 지나면서 자신만의 '마스터피스'를
완성하는 것이다.
사람의 삶에 불꺼진 뒤에 남는 시커먼 잿가루 따위는 없다. 그저 번쩍이며 타오르다가 흔적없이 사라지는
강력한 혜성처럼 세상에 뜻을 전하는 것이 우리네 삶이 아닐까
한다.
<퍼옴>
장사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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