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2월 20일 화요일 묵상
<2:1>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2:2>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2:3>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그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2:4> 「그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2:5>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하게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그의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2:6> 「그의 안에 산다고 하는 자는 그가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
<2:7>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이 옛 계명은 너희가 들은 바 말씀이거니와」
<2:8>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그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이는 어둠이 지나가고 참빛이 벌써 비침이니라」
<2:9> 「빛 가운데 있다 하면서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둠에 있는 자요」
<2:10>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2:11>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둠에 있고 또 어둠에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그 어둠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라」
(본문 해석)
12월 20일 화요일 요한일서 2:1~11절
1~2절
1절 ‘나의 자녀들아’라는 표현은 매우 따뜻한 호칭이다. 영적이든, 육적이든 우선적으로 부모와 자식의 관계에서처럼 생명에 관련된 호칭이다. 1:8~10에서 빛 안에서의 삶과 죄와의 관계를 기술한 이유를 독자가 죄를 범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즉 거짓에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지속하기를 기대한다. 곧이어 저자는 심지어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그리스도인이 붙들어야 할 사실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의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다는 사실이다. 우리의 중보다는 의로운 대언자이시다. 하나님 앞이란 하늘의 법정을 의미할 수도, 하늘의 성전을 의미할 수도 있다. 대언자(파라클레토스)는 하늘 법정에서 신자는 돕는 변호자를 뜻할 수도, 하늘 성전에서 신자를 돕는 중재자를 뜻할 수도 있다. 예수님은 이 일을 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완벽하면서도 의로우신 분이다. 2절 우리의 중보자는 온 세상의 죄를 사하기 위한 화목 제물이시다. 화목 제물이란 사람들의 죄를 없애줘서 신자를 정결하게 하는, 그리고 하나님의 진노를 대신 담당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제물 되심을 나타내는 말이다. 예수님은 모든 죄에 대해 우리의 심판을 대신 담당하셨고, 모든 죄로부터 우리를 정결하게 하셨다.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를 붙들고 있는 신자는 하나님과 참다운 사귐을, 그리고 다른 성도들과 진정한 교제를 나눌 수 있다.
3~6절
3절 만일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것으로 우리가 그를 알고 있음을 안다고 한다. 여기서 그분을 안다고 할 때 ‘안다’는 하나님과의 관계성 안에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신자가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예수로 인한 새 언약 약속의 성취를 경험하고 있다는 말이 된다. 계명은 언약 관계를 전제로 언약 백성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지켜야 할 하나님의 뜻을 담고 있는 가르침을 말한다. 4절 하나님을 안다고 말하면서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거짓말쟁이며 진리가 그 속에 없다고 말한다. 하나님을 안다고 말하면서 계명을 지키지 않으면 하나님과의 관계를 경시하고 있다는 뜻이며 더 나아가 하나님과의 관계 유지 통로를 거절하고 있기에 구원 영역 밖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5절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그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온전하게 되고, 우리가 그 사람 안에 있는 줄 알게 된다고 한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 사랑의 계명을 따라 그 말씀을 지킬 때, 하나님의 사랑(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그 사람 안에서 완성된다는 의미다. 신자가 예수를 믿는 것은 그 사랑을 받아들인다는 의미다. 그 결과 신자는 구원 영역으로 이동해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 거하게 되는데, 그 안에서 계명을 지키면 그분과의 관계가 유지되고 신자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더 깊고 풍성하게 경험하게 된다. 그것이 온전함의 상태다. 우리가 그 사람 안에 있다는 말은 요한과 계명 지키는 자가 같은 진리 안에 있다는 말이며,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서 서로 사랑의 관계 안에 있다는 뜻이다. 6절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 거한다고 말하는 자는 반드시 그분처럼 행해야 한다. 여기서 ‘그분’은 신자 삶의 모본인데, 일차적으로는 예수를 의지하지만, 예수가 하나님의 온전한 계시자라는 점에서 하나님의 궁극의 모본이다. 그분이 빛의 영역에서 일관성 있게 걷는 것처럼 신자 역시 하나님/예수를 따라 정체성과 고백과 삶을 일치시켜야 한다.
7~11절
7절 새 계명이란 옛 계명과 본질상 다르지 않은 것이다. 여러분이 처음부터 가지고 있던 옛 계명이라는 표현은 일차적으로 수신자 교회가 사도들로부터 전해 들었던 메시지나 가르침일 수 있지만, 구약부터 내려오는 옛 언약의 율법에 관한 가르침을 지칭할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새 계명이 사실은 옛 계명과 다르지 않다는 것, 즉 본질상은 같은 계명이라는 연속성을 강조한다. 8절 새 계명이라고 하는 이유는 구약의 사랑의 계명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사람에 대한 사랑의 본을 보여주심으로 새 계명을 주셨다. 다시 말하면, 구약의 옛 계명이 예수님의 사랑 안에서 완성되었으며, 예수님이 사랑의 모델을 제시하셨다. 이런 의미에서 사랑은 옛 계명이면서, 동시에 새 계명이다. 이 계명은 예수님과 그의 사람들에게 진실하게 나타난다. 왜냐하면 어둠은 사라져가고, 참 빛이 비치고 있기 때문이다. 9절 빛 가운데 있다고 하면서 즉 하나님과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말하면서도 죄의 영역 안에 머무는 자에 대해 언급한다. 이런 모순된 사람이 누구냐 하면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하면서 형제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 사람이다. 10절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증명하게 된다. 그리고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다는 말은 그 자신 안에 다른 사람을 넘어지게 하는 장애물이 없다는 뜻이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 사람을 넘어지게 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11절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바로 어둠에 있는 자다. 즉 그가 하나님과 단절되어, 계속 죄의 영역에 머물러 있는 것을 말한다. 어둠이 그의 눈을 멀게 하여 갈 바를 알지 못한다. 예수님의 사랑을 모르기 때문에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가는 길을 알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