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이란 무엇이냐<5><신천성경p713>우리는 알든 모르든 어느 곳을 향(向)하여 가고 있습니다. 내가 움직이는 이 시간(時間)에도 가고 있고, 쉬고 있는 시간(時間)에도 가고 있습니다. 비단 나뿐만 아니고 이 민족(民族), 혹은 이 세계(世界), 더 나아가 하늘과 땅까지도 어떠한 곳을 향(向)해 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부인(否認)할 수 없는 사실(事實)입니다.
일생(一生)을 거친 후(後)에 나는 어떠한 곳으로 갈 것인가? 이것이 인간(人間)이 해결(解決)해야 할 중요(重要)한 문제(問題)입니다. 종교(宗敎)도 이 문제(問題)를 해결(解決)하기 위하여, 철학(哲學)도 역사(歷史)도 이 문제(問題)를 해결(解決)하기 위하여 동원(動員)돼 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 자신(自身)도 이런 운세(運勢)에 사로잡혀 이끌려가고 있다는 것을 부인(否認)할 수 없습니다. 이 문제(問題)를 해결(解決)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어차피 가야할 운명(運命)에 놓여 있습니다.
우리가 살다 죽는 날, 이 몸은 흙에 묻힘으로써 끝납니다. 그러면 몸이 묻히는 날 마음(心)도, 생명(生命)도, 심정(心情)도, 이념(理念)도, 혹은 소원(所願)까지도 같이 묻혀버리고 마는 것인가?
내용(內容)과 해결점(解決点)과 확실(確實)한 목적관(目的觀)을 세워 놓지 않은 사람은 불행(不幸)한 사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신천성경p714>인간(人間)은 영물(靈物)이기 때문에 그 생명(生命)이 영원(永遠)합니다. 사람들이 하늘 앞에 충성(忠誠)을 다하고 하늘을 위(爲)하여 죽음의 길도 가고 많은 사람들이 싫다하는 길도 소망(所望)을 품고 간 것은, 보통사람들이 느끼지 못하는 것을 느꼈고 보통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가치(價値)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랬기에 죽음의 길도 갈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마음(心)이 현실생활(現實生活)에서 부딪치는 어떠한 역경(逆境)과 슬픔, 죽음보다 더 강(强)하지 못하면, 여러분은 죽음 앞에서 후회(後悔)할 자(者)요. 슬픔과 고통(苦痛) 앞에서 후퇴(後退)하는 자(者)밖에 되지 못합니다.
<신천성경p714>하나님이 인간(人間)의 부모(父母)라면 인간(人間)을 어떻게, 왜 지었느냐? 사랑의 하나님이 인간(人間)을 지을 때 하나님의 사랑에 동참(同參)시킨 자리에서부터 출발(出發)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서 출발(出發)하여 하나님의 사랑의 품에서 자라, 하나님의 사랑의 품에서 상속(相續)하여 가정(家庭)을 이루고, 이 땅 위에서 세계적(世界的)인 사랑과 연결(連結)시킬 수 있는 성숙자(成俶者)가 되어 하나님의 사랑의 품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 인생(人生)길입니다.
<신천성경p715>인간(人間)은 하나님을 닮고 싶어 하고, 하나님도 자신(自身)을 닮게 하고 싶다는 관념(觀念)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니 사람은 하나님과 닮을 수 있는 체(體)를 입고 태어나야 됩니다. 그런 날을 하나님도 고대(苦待)하고 인간(人間)도 고대(苦待)합니다. 그런 사람으로 태어나는 날이 죽는 날입니다.
이런 입장(立場)에서 인간(人間)은 죽음을 환영(歡迎)해야 되겠습니까, 환영(歡迎)하지 말아야 되겠습니까? 환영(歡迎)해야 됩니다. 죽는 데는 뭣 때문에 죽을 것이냐 할 때 ‘하나님의 참사랑을 위해 죽겠다.’라고 해야 됩니다. 그러므로 육신(肉身)을 벗는 것은 무한(無限)한 하나님의 사랑의 활동권(活動權)에 내가 동참(同參)하기 위해서요. 하나님의 사랑의 세계(世界)를 위(爲)해서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태어나는 것이 죽는 것인데, 인간세계(人間世界)에서는 ‘아이고, 죽는다!’ 하고 야단합니다.
제한(制限)된 사랑권 내(內)에서 무제한(無制限)의 사랑권 내(內)로 돌입(突入)하는 기쁨을 맞는 순간(瞬間)이 제2의 출생(出生)인 죽음 길을 통(通)하는 순간(瞬間)입니다. 여러분은 죽음의 공포(恐怖)에서 해탈(解脫)하지 않고는 하나님과 관계(關係)를 맺을 수 없습니다.
<신천성경p716>천국(天國)은 방대(尨大)한 곳입니다. 이 우주(宇宙)보다 더 크고 더 넓은 세계(世界)입니다. 그것은 형용(形容)할 수 없을 정도(程度)로 방대(尨大)한 세계(世界)입니다. 그리고 그 세계(世界)에서는 사랑하는 사람이 그런 세계(世界)의 어디에 있다고 하더라도 내가 보고 싶다고 하면 즉각 나타납니다. 무슨 마음을 갖고 보고 싶어 하는지 저 쪽에서는 대번에 안다는 것입니다. 오자마자 인사(人事)합니다. ‘이렇게 생각(生角)해 줘서 고맙다,’라고 상대(相對)가 마음먹은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세계를 설명(說明)할 필요(必要)가 없습니다. 설명(說明)할 필요 없이 다 느끼는 것입니다. 거기에 가서 척 만나게 되면 ‘무슨 말을 할 것이다.’라고 압니다. 알고 듣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멋진 세계(世界)입니까?
참사랑은 직단(直斷)거리를 통(通)합니다. 참사랑은 직단(直斷)거리를 통하고, 참사랑의 속도(速度)는 최고(最高)의 속도(速度)입니다. 사랑하는 자식(子息)이 외국(外國)에 나가 있다고 하더라도 부모(父母)는 그 자식(子息)을 생각(生角)하면 벌써 자식(子息)에게 갔다 오는 것입니다. 거리를 초월(超越)합니다. 참사랑의 속도(速度)는 최고(最高)의 속도(速度)이기 때문에 이 방대(尨大)한 대우주(大宇宙)를 자기생활(自己生活)의 활동무대(活動舞隊)로 측정(測定)하는 것입니다. 시간(時間)과 공간(空間)을 초월(超越)하니 거리감이 없습니다. 다 눈 앞에 있는 것과 같습니다.
천국(天國)은 하나님의 사랑의 세계(世界)입니다. 사랑의 공기(空氣)를 맡는 세계(世界)입니다. 거기에는 생명(生命)이 꽉 차 있습니다. 어디 가든지 생명(生命)이 약동(躍動) 안 하는 데가 없습니다. 그리고 전부(全部) 혈연적(血緣的)인 인연(因緣)으로 묶여 있습니다. 하나님의 한 핏줄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슬퍼하는 것이 있으면 온 영계(靈界)가 한 세포(細胞)와 같이, 한 몸같이 슬픔을 느낍니다. 또 한 하나님이 기뻐하게 되면 전부(全部)가 기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이 방대(尨大)한 대천국(大天國)을 움직이고 있습니다. 거기에 화답(和答)해서 생명권(生命權)이, 모든 만물(萬物)이 주체(主體) 대상(對象)을 중심삼고 예술적(藝術的)인 미화(美和)의 대상(對象)이 되어 있습니다. 핏줄과 같이 연결(連結)되어 있어서 하나님이 기뻐하면 나도 기쁘고 하나님이 슬퍼하면 나도 슬퍼집니다.
<신천성경p716>하늘의 소망(所望)을 품고 사는 사람은 인간(人間)이 슬퍼하는 죽음의 고개도 기쁨으로 넘어설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하늘의 소망(所望)을 품는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죽음을 앞에 놓고 세상만사(世上萬事)를 원망(怨望)하고 탄식(歎息)하는 사람이 되지 말고, 기뻐하고 하늘 앞에 서서 자기(自己) 죽음의 가치(價値)를 자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늘은 이러한 소망(所望)의 아들딸들을 찾고 있습니다. 이러한 자리에 서서 하늘의 기쁨을 느낀 사람이 있다면 그는 하나님이 사랑하지 않으려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 자리에서 하늘을 대하여 울부짖는 무리(武吏)가 있다고 한다면 하늘이 그 울부짖음에 응답(應答)하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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