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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문: 효림 스님 , 사회: 혜안, 인례: 현수, 헌향: 자명행 , 헌다: 명조, 묘행주, 발원문: 송파 13구 명등 사라수, 촬영 및 방송: 방송담당 대원3구 법회팀, 음악: 마하보디 합창단, 지휘자, 반주자, 취재: 미디어팀 , 법회 방역 및 안내: 대원 3구, 법회팀, 보광당 좌석 배치: 청정팀, 법회 후 뒷정리: 송파 1, 2구, 동대문구, 강동 1구 대원 2구, 법회보 제작 : 법회보 제작팀, 법회보 배부: 송파 17구 법회, 데스크 안내: 법당 안내팀, 새법우 안내: 새법우 교육팀, 엘리베이터 안내 : 송파 27구, 재일법회 재 공양물 준비 : 보문부떡 및 생수 보시 : 대원 3, 4구. 보현 1, 3구
보현행자의 서원 : 회향분
오늘은 우란분절 입재일입니다.
현관에서 주보를 배부하시는 17구 법회 보살님들, 사무국 봉사하시분들은 백중기도 입재를 접수하시느라 유난히 분주합니다.
엘리베이터, 보광당 법당 안내, 떡, 생수 배부하는 구 법회 보살님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열심히 봉사를 하고 계십니다.
현수 거사님의 천수경 독경으로 도량을 맑히고 타종, 헌향, 헌다에 이어 사회 혜안 거사님의 말씀으로 법회가 시작됩니다.
보광당 및 발코니석에도 법회 참석 불광 바라밀 형제님들이 가득 자리하고 계십니다.
또 보광당 입구 마루에도 방석을 깔고 빈틈없이 자리하고 계십니다.
금주의 법문 : 효림 스님(경원사 주지)
금주의 법어 : 경전을 독송하면 업장이 소멸한다.
우리가 젊었던 시절에 사용하던 언어가 요즘에는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는 자존심이라는 말을 했는데 요즘 사람들은 자존감이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그 뜻은 큰 차이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누구나 자존감이 높으면 좋지요. 그렇다면 자존감을 높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칭찬입니다. 칭찬을 많이 듣고 성장한 아이들은 자존감이 높습니다. 그리고 아이들만 그런 것이 아니라 성인들도 칭찬을 많이 들으면 자존감이 높아집니다. 부부간에도 서로에게 칭찬을 많이 하면 아내나 남편 모두의 자존감이 높아집니다.
自偈稱讚 [자게칭찬] -효림~
受稱讚人 爲稱讚 當然之事 [수칭찬인 위칭찬 당연지사]
不特別 萬人 渴望 受稱讚 [부특별 만인 갈망 수칭찬]
一讚愚人 成道業 [일찬우인 성도업]
칭찬을 받을 사람을 칭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특별한 것이 아니나
많은 사람들이 갈망하는 것이 칭찬 받는 것인데 우리는 칭찬 받을 사람에게
칭찬을 잘 안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칭찬을 잘 하는 사람은 칭찬 받을 만하지 않을 사람에게도 칭찬을 합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자존감이 높아져서 칭찬을 받을 행동을 하고 칭찬받을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리석은 사람도 칭찬하면 도를 크게 이룬다는 뜻입니다.
왜 이 이야기를 뜬금없이 강조하느냐?
불교는 다른 어떤 종교보다도 자존감을 많이 높여주는 종교이고, 보현십대원에도 부처님을
찬양한다는 것이 들어가 있습니다. 왜 불교가 자존감을 높여주는 종교인가.
우리 인류에게 부처님 말고는 우리 중생에게 모든 사람이 동일한 불성을 가지고 있고 우리는 부처라고 합니다. ‘성불 합시다’ 이것보다 자존감을 높여주는 말은 없습니다.
법화경에 보면 상불경보살품에 상불경보살이라는 분은 어떤 수행을 하느냐 하면, 사람들을 보면 무조건 “나는 당신을 존경 합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장차 부처님이 되실 분이기 때문입니다.“ 이러면서 지나가는 사람에게 예경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상불경 보살은 그러한 수행을 한 것만으로 나중에 부처님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교는 사이비나 이단이 나올 수 없는 종교입니다. 불교를 믿는다는 것은 훌륭한 인격을 갖추는 것입니다. 그래서 훌륭한 인격을 갖추지 못한 사람이 도인인 것처럼 대단하게 행세하게 되면 가짜로 보면 됩니다. 사람이 사람답지 못한 행위를 하면 그 사람이 어떠한 사람이라하더라도 거기에 속으면 안 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오늘 그것을 주제로 이야기를 풀어가기 위해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노래: 마음 둘 곳]
금강경 제 16分 능정업장분(能淨業障分)에 대하여 말씀 드리려고 하는데요, 그러기 전에 하나 말씀드려야 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전에도 언급한 바가 있듯이 저는 시골에서 성장하였고 어릴 때 출가를 했는데 우리 마을에 신문기자 하다가 사직당하고 고향으로 낙향해서 계신 친척이 한 분 계셨어요. 이 분이 실존주의 철학을 가지고 있었어요. 나이가 15세 정도 어린 우리들에게 실존주의를 이야기 했었는데 그 의미를 모두 이해했다고 할 수는 없으나 마음에 큰 감동을 받았어요. 실존이 무엇이냐? 실존주의의 원조는 당시엔 이름도 처음 들어 본 ‘니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니체’는 서양 철학에 있어서 마지막 방점을 찍은 사람이다. 왜냐하면 ‘니체’를 중심으로 그 이전의 서양철학은 모두 부정해버렸습니다. 그리고 서양철학이 밝히고자 하고 이야기 하고자 했던 그 본질을 부정하고 실존을 이야기 했습니다. 그동안 서양철학이 이야기 해온 본질이라는 것이 무엇이며, 또 우리에게 만고불변으로 남아있는 실존은 무엇인가?
중학생 정도의 우리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셨다.
니콜라 철학 서양철학의 중심은 신(神)을 중심으로 한 사고(思考)였다.
그런데 니체는 그것을 부정한 것이다. ‘신은 죽었다.’ 그리고 실존은 오늘 내가 이 자리에서 살아 숨 쉬고 배가 고프면 먹고, 화장실 가고, 살아있는 나 자신의 존재, 이것이 ‘실존’이다.
그래서 너희들이 지금 살아있다고 내 앞에서 눈을 깜박이고 앉아 있지만 너희들 자체, 너희들 실존에 대해서 너희들은 얼마나 알고 있느냐. 이런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그때 그 사람의 이야기가 내 가슴에 박혀서 그것이 점점 성장해서 결국 임효림‘이라는 스님이 만들어졌다는 것입니다.
니체가 본질을 부정하고 실존을 주장하는 그것이 점점 발전해서 나중에 2차 대전이 끝나고 프랑스에서 짜라투스트라 같은 사람이 많은 대중을 모아놓고 실존주의 철학을 강의하는데 수 천 명이 모였고 너무 감동을 받아 졸도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한 실존주의 철학이 등장하면서 서양철학은 죽은 것입니다. 지금도 그 이전의 철학에 대단한 것이 담겨있다고 생각하여 칸트나 데카르트의 철학을 공부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고, 니이체 이전의 사상은 니이체에 의해서 부정되었다는 것입니다.
니체에 대해 덧 붙이자면, 금강경의 무주상, 무아상과 밀접한 관계가 있어요.
니체가 불교가 이야기하는 근본적 의미를 잘 터득했다는 것은 아니나, 니체는 사람을 낙타형인간이 있다고 봅니다. 그 언어를 보면 격동적이고 감동적이지만, 매우 난해하고 어려운 부분도 있지만, 인간을 분류할 때 ‘낙타형인간‘을 말합니다.
낙타형인간이란 가장 순종하고 굴욕적으로 사는 인간이다. 무거운 짐을 지고 채칙을 맞으면서 무더운 사막을 여행하지만 자기 등짝을 내리 치는 채찍에 대해 저항 할 줄 모르고 굴종의 상징 저 낙타를 봐라. 세상엔 그러한 유형의 인간이 있다. 종교가 나오면 종교에 굴종하고, 사상이나 이념이 나오면 그 것들에 굴종하는 인간들, 자세히 따져보고 분석하지도 못하고 무조건 그런 굴종적인 사람이 무수히 많습니다. 권력이나 돈에 굴종하고 말을 잘해서 거짓말을 하면 그 거짓말에 굴종하고 살아가는 인간이 많은데 그런 인간을 ‘낙타형인간’이라고 한다.
거기에 한발 더 나아가서 ‘사자형인간’이 있다. 황금 깃털을 펄럭이는 사자 중에서도 숫사자, 불교에서도 보면 사자를 굉장히 상징화하여 스님들의 법문을 ‘사자후’라고 하잖아요. 우렁차고 하늘에 있는 권력을 상징하는 그런 용에게 끊임없이 저항하지만 그 사자는 그 용을 이겨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에도 그렇게 저항할 줄 아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데 니체가 여기까지만 말했다면 위대한 철학가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인데 끝에 가서 새로운 인간 유형이 만들었습니다. 그것이 독일어로Übermensch), 우리말로 번역하면 ‘초인(超人)’이라고 하는 것인데, 이것은 특별한 능력을 가진 그런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닌, 어린아이와 같이 천진난만한, 천진무구한, 그래서 아무리 폭력적 권력을 만나도 그 권력 앞에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에 한 치의 때도 없는, 우리가 말하는 청정수행자를 말합니다. 옛 큰스님들도 아주 도(道)가 높으면 어린아이와 같이 천진한 행을 한다하여 ’영아행(嬰兒行)’을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 유형의 인간을 ‘초인형인간’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세상을 구제할 수 있고 인류의 모든 모순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은 저항할 줄 아는 ‘사자형인간’아니라 어린아이와 같은 ‘초인형인간’이라는 말을 했습니다. [노래: 일어나]
오늘 노래 선곡을 잘 한 것 같습니다. 내 귀에는 ‘불광이여 다시 일어나라.’
우리가 불자로서 그러하거니와 스님들은 스님들대로, 초인적, 천진무구한 그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 불교를 살리는 것이고 불광이 다시 일어나는 것입니다. 내가 이 노래를 들으니까 거듭 말씀드립니다만, 우리에게 광덕이라는 고승은 불교사에 있어서 청정 고승이다. 포교를 잘하고 불광법회, 불광사라는 거대한 사찰을 창건하신 스님이시기도 하지만 그 보다 더 높은 것은 한 사람의 수행자, 한 사람의 승려로서 정말 우리에게 청정을 보여주신 그러한 분이다. 그래서 불광이 다시 일어서는 것은 그 청정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이것 하나만 알면 불광 뿐아니라 한국불교가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아주 감동적입니다.
그러면 금강경 제 16分 능정업장분(能淨業障分) 본문을 읽겠습니다.
復次須菩提야 善男子善女人이 受持讀誦此經에 若爲人輕賤이면 是人은 先世罪業이 應墮惡道. 以今世人 輕賤故로 先世罪業이 卽爲消滅하고 當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니라. 須菩提야 我念過去無量阿僧祗劫하니 於燃燈佛前에 得値八百四千萬億那由他諸佛하여 悉皆供養承事고래 無空過者이니라. 若復有人이 於後末世에 能受持讀誦此經하면 所得功德은 於我所供養諸佛功德으로는 百分不及一이면 千萬億分과 乃至算數譬喩이라도 所不能及이니라. 須菩提야 若善男子善女人이 於後末世에 有受持讀誦此經하여 所得功德이 我若具說者인댄 或有人聞에 心卽狂亂하여 狐疑不信하리니. 須菩提야 當知하라. 是經義 不可思議며 果報亦不可思議니라.
다시 수보리야 선남자 선여인이 이 경을 수지하고 독송하면 만약 사람들이 가볍게 천대하면 이 사람은 선세죄업이 분명히 악도에 떨어질 것이로되 금세의 사람들이 가볍게 천대하거나 선세의 죄업이 모두 소멸되거나 마땅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느니라. 능정업장(能淨業障)은 능히 업장을 소멸하여 깨끗하게 한다는 뜻입니다.
항차 마음이 착하기만 한 사람에게도 이렇게 갑질을 하는데, 금강경을 읽고 불도를 수행하겠다는 감응을 받고 ‘나도 이제부터 아상(我相)이 없는 사람이 한번 돼 보자!“ 이런 생각을 하고 이렇게 실천을 합니다. 그러면 주변에서 바로 깔보고 무시하는 갑질이 들어옵니다. 이때 참으로 금강경을 수지 독송하는 수행자라면, 이것을 능히 극복하고 이겨 낼 수 있어야 합니다.
경전에서 말하는 것은 바로 이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금강경을 독송하는 사람은 바로 이 대목에 대하여 분발해야 합니다. 아, 나의 무주상(無住相)실천에 대하여 나를 무시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면 나는 더욱 분발하여 더욱 상(相)에 머물지 않는 수행을 실천해야 하겠구나! 이렇게 생각하고, ‘이것이 바로 경전에서 부처님이 말씀하신 선세(先世) 죄업(罪業)이 소멸한다고 하는 그 것이구나.’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금강경에서 말하는 상에 머물지 않는(無住相) 수행을 실천하는 인격(人格),
그러나 그 무주상(無住相)에 조차 머물지 않는 이 인격이 최고의 인격이고, 부처님의 인격입니다. 무주상(無住相)의 경지는 무주상에 조차 머물지 않는 무주상(無住相)이고, 이것이 바로 부처님의 경지이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을 얻는 경지입니다. 이러한 경지는 동서를 막론하고 어떤 성자도 말하지 못한 경지입니다. 이러한 경지는 동서를 막론하고 어떤 성자도 말하지 못한 경지입니다. 물론 철학에서는 이런 경지는 말하지 못했습니다.
비유하지만 저 서양철학의 마침표를 찍었다고 하는 ‘니체’의 초인도 금강경에서 말하는 무주상의 인격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니체의 위버맨시Übermensch)를 초인이라 번역하지만, 사실 니체는 위버맨시Übermensch)를 천진(天眞)한 어린아이의 때가 묻지 않는 경지를 그렇게 표현했습니다. 그래서 금강경에서 말하는 무주상(無住相)의 경지에 비견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역시 미치지 못하는 경지입니다. 다시 말해서 천진무구(天眞無垢)한 경지가 있다고 해도 그 경지에 조차도 머물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말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금강경의 무주상의 경지는 일체법을 다 부정하지만, 아울러 그 부정하는 그것에 머물지 않고 다시 일체법을 다 긍정하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아상(我相)을 부정하지만 그 부정한 그것조차 부정하여, 그곳에 머물지 않는 경지입니다.
다시 번역분을 읽어보면,
만약 다시 어떤 사람이 있어, 앞으로 오는 말세(末世)에 능히 이 경을 받아 지니고 읽고 외워서 공덕을 얻은 것은, 내가 모든 부처님께 공양한 공덕으로는 백 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고, 천만 억 분 내지 어떤 숫자적 비유로도 능히 미치지 못한다. 수보리야, 만약 선남자와 선여인이 앞으로 오는 말세에 이 경을 받아 지니고 읽고 외워서 얻는 공덕을 내가 다 갖추어 말한다면, 혹 어떤 사람은 듣고 마음이 곧 미친 듯이 혼란스러워져, 여우같이 의심하며 믿지 않을 것이다. 수보리야, 당연히 알라. 이 경은 뜻도 불가사의하고 , 과보(果報)도 또한 불가사의하니라. .”
정말 우리를 구제하는 것은 우리의 청정한 마음이요, 정말 우리가 부정하는 것은 내 마음 속에 있는 상(相)을 극복하고 아름다운 인격을 구현하는 것이다. 그것 하나는 알고 계셔야 될 것 아니겠느냐? 노래 한곡 들으며 오늘 능정업장분(能淨業障分) 법문을 마치겠습니다.
효림 스님과 함께 오신 가수님들은 법문 중간 중간, 노래를 부릅니다. [마음둘 곳], [일어나], [거리의 수행자]
♬ 찬탄곡 : 어디로 가시는가 (이영효 작사, 서근영 작곡) 마하보디 합창단 ♬
여울져 흐르는 무심한 계곡물 굽이굽이 흘러서 어디로 가시는가
때로는 돌아치고 때로는 기다리며 낭떠러지 떨어져도 미소로 노래하네
걸림 없는 대 자유를 그댄 알고 가시는가 근심 걱정 모두 모아 흘려보내며
천년의 세월 침묵하며 뒤돌아보지 않고 흐르는 계곡물이여
빨갛게 물들어 날리는 단풍잎 너울너울 춤추며 어디로 가시는가
살며시 안아주며 속삭이고 매만져도 버리고 또 버리며 다음 생도 그렇게
걸림 없는 대 자유를 그댄 알고 가시는가 번뇌 망상 모두 모아 날려보내며
낡은 업보 옷 갈아입으려 윤회의 수레바퀴 돌리는 여린 잎이여
백중 축원을 하시고 계신 혜담 스님
발원문 낭독 : 송파 13구 명등 사라수 보살님 (불광법회.불광사 정상화 기도 발원)
현안 보고 : 현진 법회장님
백중 입재 공양물을 준비하고 계신 보문부 보살님들.
법등 가족모임을 하고 계신 구법회들로 하여금 보광당이 빈자리가 없습니다.
무더위에도 토요일 청정팀 여러분들의 봉사로 보광당은 청결하고 질서있게 일요법회가 완벽하게 준비된 모습입니다.
오늘도 대웅전에서는 금강경 독송을 이어가고 있는 불광 형제님들
조계사, 봉은사, 동명사, 화광사의 1인 시위 진행하고 계신 거사님, 보살님들.
우리는 횃불이다. 스스로 타오르며 역사를 밝힌다. 내 생명 부처님 무량공덕 생명 용맹정진하여 바라밀 국토 성취한다. |
첫댓글 불광법회에서 당당히 금강경 법문 이어가시는 효림스님 깊이 존경합니다 _()()()_
기타와 함께 하는 자권 가수님의 노래도 훌륭했습니다~^^
훌륭하게 법회일지 작성하시는 마음님 덕분에 매번 복습을 잘하고 있어서 감사합니다
오늘 사진 찍어주신 송지보살님 보현화보살님 감사합니다_()_
니체의 철학사상까지 등장하니 효림스님의 법문이 점점 멀어져 가려 합니다
다음에 다시 찾아야겠습느다.
미디어팀의 사진 구성도 좋고 마음님의 글과 사진편집도 넘 훌륭 합니다.
감사합니다.
마하반야바라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