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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의 종말, 무노동사회인가 위험사회인가 | |||||||||||||||||||||||||||||||||||||||||||||||||||||||||||||||||||||||||||||||||||||||||||||||||||||||||||||||||||||
이재규* 사회과학을 연구하는 목적은 어떤 사회적인 현상을 있는 그대로 분석하고 설명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이용하여 미래를 예측하는 것도 하나의 중요한 목적이다.
기술발전은 인간노동과 어떤 상관관계를 갖는가. 자동화된 기술이 인간노동을 끊임없이 대체해 가는 제로섬 관계인가, 아니면 생산성향상과 함께 인간노동이 필요한 또 다른 산업부문을 지속적으로 창출해내는 윈윈 관계인가. 기술발전에 이은 경영혁신이 대량해고와 실업이라는 결과를 낳고 있으며, 이는 종국적으로 블루칼라와 화이트칼라 가릴 것 없이 노동의 종말을 초래할 것이라고 예고하고 있다. 나아가 기술의 발전이 멀지 않은 장래에 심각한 유휴노동을 초래, 지구촌 전체가 몰락할 수도 있음을 경고하는 사람들도 많다. 따라서 세계는 화해할 수 없는 두 세력, 즉 첨단기술의 기술세계를 통제하고 관리하는 정보 엘리트집단과 자동화돼 가는 세계에서 도태된 영구 실업자집단으로 빠르게 양극화되고 있다. 또 한편으로 지식의 발달과 기술의 발달로 발생하는 문제는 두 가지의 상반되는, 그러나 결과적으로 암울하기는 마찬가지인 결과를 초래한다. 하나는 노동의 종말이고 다른 하나는 위험사회의 등장이다.
근대의 전시대를 통틀어서 인간의 가치는 노동의 시장가치에 의해서 결정되었다. 자동화 사회에 있어서 인간노동의 공동체 가치가 점점 더 부차적이고 부적합하게 되기 때문에, 인간의 가치와 사회적 관계를 새롭게 정의하는 방법들을 검토할 필요가 생길 것이다. 기술발전이 어쩔 수 없는 인류진보의 과정이라면 이것이 초래할 폐해를 최소화할 사회제도적 보완이 필요하다. Ⅰ. 서론 1. 문제의 제기 기계가 사람처럼 생각하고 행동한다면, 그때 인간은 무엇을 할 것인가? 겉모습 뿐만 아니라 속까지 사람과 같은 (다만 오장육부만 없는) 기계가 나타나면, 그때 인간이 할 일은 무엇이고, 어떻게 생활할 것인가? HAL 9000(이하 HAL)은 클라크(Arthur Clark)의 공상과학 소설 『2001년 스페이스 오디세이』에 등장하는 컴퓨터의 이름이다. 이 소설은 큐브릭(Stanley Kubrik) 감독의 영화로 더욱 유명하다. 1968년에 영화화된 소설 『2001년 스페이스 오디세이』에서 HAL은 1997년 1월 12일에 탄생하였다.
서기 2001년 달 표면에서 발견된 선돌의 신비를 밝히기 위해 목성으로 떠나는 우주 탐사선 디스커버리(Discovery)호에는 선장 바우먼과 풀 등 2명의 깨어 있는 승무원, 목성탐사의 직접적인 임무를 수행할 3명의 동면 상태의 승무원, 그리고 중앙통제컴퓨터인 HAL이 승선하고 있다. HAL에는 목성으로 가는 항해 과정에 관한 정보는 물론 목성 도착 이후 탐사에 관련한 모든 정보가 입력되어 있다. 그러나 스스로 생각할 줄 아는 HAL은 결국 선장의 말을 듣지 않고 승무원들을 모두 죽이고 만다.
최근 클라크는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결정판인 『3001년 최후의 오디세이』를 내놓았다. 이 소설에는 생각하는 기계가 도처에 널려 있는, 그리고 가상현실이 현실과 혼재하는 미래가 그려져 있다. 매혹적이고 환상적인 세계이다. 하지만 최근 인터뷰에서 “가상현실은 진정한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것이 되어가고 있다. 미래는 막고 싶다”고 한 클라크의 말을 한번쯤 음미해볼 만하다.
이와 같이 인간이 기계에게 지배당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은 과학기술의 발전이 거듭될수록 우리에게 더욱 큰 압력으로 다가온다. 레너트(Douglas Lenat)는 상식을 갖춘 컴퓨터를 목표로 지난 1984년부터 사이크(CYC) - 백과사전이라는 뜻의 encyclopedia에서 이름을 따왔다 - 를 개발하고 있고, MIT의 브룩스(Rodney Brooks)는 인간처럼 행동하고 환경변화에 적응하는 이동 로봇(mobile robot)인 코그(COG)를 제작하고 있다. 일본 와세다대학에서 개발한 와봇(Wabot)은 눈으로 악보를 보면서 열 손가락과 발로 피아노를 연주한다. 최근 일본 혼다자동차에서 개발한 조립공장 밀 핵발전소용 로봇은 키 180㎝에 사람과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으며, 계단을 오르거나 방향을 바꾸고, 웬만한 외부충격에도 몸의 균형을 잃지 않는다. 또 1994년 NASA에서는 단테(Dante)Ⅱ라는 거미 로봇을 개발해 스퍼산(Mount Spurr)의 화산을 탐사하기도 하였다. 일본의 로봇 제조회사 FANUC에서는 로봇이 로봇을 조립하고 있다.
또한 게놈프로젝트로 대변되는 유전자 기술(Genetic engineering)의 발달은, 신학적으로, 인간이 드디어 하느님의 영역을 넘보게 하고 있다. 기술의 발달의 한계는 어디까지인가? 그리고 기술의 발전은 우리 인간에게 ‘행복’을 가져다 줄 것인가, 아니면 ‘비극’을 초래할 것인가 하는 것은 끊임없는 논쟁거리이다. 2. 연구의 목적과 연구의 방법 1) 연구의 목적
앞에서 제기한 기술의 발달이 적어도 2002년에 닥쳐 올 상황은 아니라 해도 멀지 않은 장래에 가능하다고 하면, 제레미 리프킨(Jeremy Rifkin)이나 비비안 포레스트(Viviae Forrester)가 주장하는 『노동의 종말』은 - 벌써 20 대 80 사회는 물론이고 5 대 95 사회까지 예측되고 있다 - 논의의 수준이 아니라 실제상황이 될 가능성이 크다. 이 연구는 미래 기술의 발전(또는 가능성) - action 또는 challenge - 과 그에 대한 반발 - reaction 또는 response - 을 검토한다.
이 연구는 '노동의 종말'이 유토피아적인 '무노동사회'에 가까울지, 아니면 울리히 벡(Ulrich Beck)이 주장하는 '위험사회'가 될 것인지를 논의하고 당면하는 과제를 추론해보고자 하는 것이다. 2) 연구의 방법과 선행연구 21세기 사회, 노동, 기술, 그리고 지식에 관해 다루는 이 글이 성격상 사례 연구에 기초한 깊이 있는 글이 될 수 없음은 당연하다. 최근 연구 현황을 그대로 반영하지도 못하며 논의중인 다양한 측면을 충분히 다룰 수도 없다. 주제의 폭 또한 광범위해서 이 글은 처음부터 ‘추상의 중간 단계’, 즉 연역적이고 논증적인 접근법을 택하였다. 이 연구는 특정한 모집단에서 표본을 추출하여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통칭) 미래학자들의 기존 문헌연구를 바탕으로, 논증하려고 한다. 이런 추론적 연구방법은 주요한 일탈 사례에 의해 새로운 가설이 일반화되면 기존의 명제화된 인과관계(causal relationship)가 부정된다는 약점도 갖고 있으나, 현실적으로 가설 검증을 할 수 없는 대상을 연구할 경우 불가피한 연구방법이라 할 수 있다. <표 1 > 미래의 모습에 대한 선행 연구
Ⅱ 노동의 역사, 노동의 위기, 그리고 노동의 종말 1. 노동의 역사 1) 노동은 언제부터 있었는가
에리히 홉스봄(Eric Hobsbaum)은 『노동운동의 세기(Das Jahrhundert der Arbeitbewegung, 1999)』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공산당 선언』을 읽은 이들은 누구나 알고 있듯이, 노동 운동은 한 세기 이상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 반면 노동 운동사 서술은 100년이 채 되지 않았다. 영국 노동운동사 최초의 중요한 저작은 1890년대에 나왔다. 나는 무엇보다 영국 노동조합에 관한 웹(Webb)부부의 역작들을 떠올린다. 노동 운동 전반에 대해 최초로 저술한 책은 꼭 100년 전인 1900년 독일 예나에서 출판된 쿨만(W. Kulemann)의 『노동조합운동전세계 노동자․고용주 조직 서술』이다. 또한 노동 운동 진영 내부에서 저술된 사회민주주의사(예컨대 1898년 프란츠 메링 franz Mehring이 저술한 『독일 사회민주당사』 초판과 같은 것)들이 이 시기에 등장하였다.
19세기에서 20세기로 바뀌던 시점은 우연히도 앞에 제기된 두 가지 문제에 대해 의미를 가진다. 몇 개의 날짜를 인용해 보자 1893~1894년, 영국 정부는 최초로 『노동통계초록』을 간행하였으며, 벨기에 노동부는 1896년 『노동연감』제 1집을 간행하였다. 달리 말하자면, 1890년대에 유럽 각국 정부들은 처음으로, 확고히 틀을 잡은 노동 운동에 대처해야 했다.”
그러나 『옥스퍼드 대사전』이 ‘노동’(labour)이라는 말을 사회의 물질적 필수품을 공급하기 위한 육체적 노력이라는 뜻으로 처음 사용한 것은, 홉스봄의 노동운동의 역사 인식보다도 한 세기가 앞서는, 1776년판에서 였다. 1776년은 자본주의 경제학의 태두하고 할 수 있는 애덤 스미스(Adam Smith)가 『국부론』을 출판한 해이기도 하고, 미국이 민주주의 시민 혁명(American Revolution)을 일으킨 해이기도 하다. 한 세기가 지난 후인 19세기, 노동은 또한 생산에 참여하는 노동자 및 직공의 일반 집단을 뜻하게 되었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것은 이 두 의미를 연결하여, 궁극적으로는 그 연결을 정치적인 문제로까지 변형시킨 노동조합 및 기타 조직을 뜻하기에 이르렀다. 영어의 이와 같은 용례는 노동에 부여된 의미(‘집단적․육체적 노역’), 즉 일하는 사람들이 하나의 ‘계급’으로 나아가 이루게 되는 자기 형성, 그리고 이 자기 형성에 근거를 둔 정치 사이의 밀접한 관련성, 곧 수렴 현상과 운명의 동질성을 날카롭게 나타낸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을 만하다. 달리 말하면, 그것은 사회의 부와 복지의 주요한 원천으로서의 육체 노동과 노동 운동의 자기 주장, 그리고 이 둘 사이의 관련성을 보여 준다.1)
노동이라는 말이 학문적 뿌리를 갖는 데는 이 정도의 역사에 그친다 해도 적어도 관념상으로 우리가 느끼는 노동의 뿌리는 보다 깊다. 어쩌면 노동은 태초부터 인간에게 지워진 운명인지도 모른다. 창세기 3장 24절에 따르면, “아담과 이브가 하나님에게 불순종하여 죄를 짓고 하나님과 함께 살 수 없게 되었다.” 그 이후 그들은 먹고살기 위해 노동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다니엘 12장 13절에는, “편히 쉬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편히 쉬다”의 성경적 의미는 이 땅의 환경은 참된 안식이 없는 것을 의미하며, 이 땅에서 영의 아버지 하나님을 잃어버린 인간에게는 영원한 안식과 쉼이 없는데,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안식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찾음으로 말미암아 죄악 세상에서도 날마다 안식을 누릴 수가 있다는 것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에서의 해방을 의미한다. 2) 생산함수와 지식함수
노동의 역사 또는 기원이 어쨌거나 간에, 한편으로 인간은 창세 이래 생존이라는 보편적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 노동이 필요했고, 또 노동권을 보장받으려 노력했다. 다른 한편으로 인간은 중노동의 고통에서 벗어나려고 투쟁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노동은 18세기 산업혁명의 진행과 더불어 하나의 이데올로기와 연결되었다. 즉 사회주의 또는 공산주의와 결부되었다. 그리고 문제는 단순한 노동 운동이 아니라 사회주의 노동 운동이 더욱 중요한 논의의 대상이 되었다. 왜냐하면 위기는 사회주의의 위기가 노동 운동 자체의 위기보다 먼저 찾아왔기 때문이다.
노동 운동은 계급 의식과 마찬가지로 같은 ‘프로젝트’는 아니다. 노동 운동은 임금 노동자 계급이 보여 주는 특성으로 사회적 생산의 특정 단계에 대두된다. 이렇게 볼 때 노동 운동은 논리적으로 필연적이며 실질적으로 불가피한 사회 현상이다. 반면 사회주의는 하나의 ‘프로젝트’, 즉 자본주의를 붕괴시키고 하나의 새로운 사회와 경제 체제로 대체하려는 의도이자 시도를 갖는 이데올로기(Ideologie)였다.
산업사회의 생산함수를 간단히 <식 1>과 같이 표현하면 <식 1>에서 C를 강조하는 이데올로기가 자본주의이고, L을 강조하는 것이 공산주의다. P = f (C, L) ………………………………………………………………………… <식 1> C = Capital 자본 L = Labor 노동 그런 점에서 <식 1>은 자본과 노동은 끊임없는 이데올로기 갈등의 공식이라 할 수 있다. 노동은 자본의 극복을, 자본은 노동의 억제 내지 대체를 극단적인 과제를 채택했다. 후레데릭 테일러(Frederick W. Taylor)의 과학적 관리(scientific Management)와 헨리 포드(Henry Ford)의 컨베이어 벨트가 노동을 규격화한 것이라면, 엘튼 메이요(Elton Mayo)의 인간관계론은 노동의 인간적 측면을 강조한 것이다. 그러나 생산성 향상과 품질향상 문제는 Automation, Downsizing, EMS, PLC 등 지식과 기술의 발달로 인간노동의 문제를 전혀 다른 차원으로 이끌고 갔다. 다시 말해, 지식 생산함수 <식 2>는 노동의 위기가 이데올로기의 문제뿐만 아니라, 노동 그 자체를 제거하는 단계, 즉 노동의 종말 단계로 이어진다. P = (K) ………………………………………………………………………………<식 2> K = Knowledge 지식 3) 일자리의 제거
문명은 태초부터 주로 노동의 개념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노동은 구석기 시대의 사냥과 채집, 신석기 시대의 농부, 중세의 장인(craftsmen, journeymen, masters), 현재의 조립 라인 노동자에 이르기까지 매일매일 생존을 위한 핵심적인 부분이었다. 인간의 노동은 지금 처음으로 생산 과정으로부터 체계적으로 제거되고 있다. 1세기 이내에 시장 부문의 대량 노동은 사실상 세계의 모든 산업 국가들에서 사라져갈 것이다. 정교한 정보 통신 기술의 새로운 시대가 다양한 노동 상황에 신속하게 침투하고 있다. 지능 기계가 무수한 과업에서 인간을 대체하면서 수많은 블루 칼라와 화이트 칼라 노동자들을 실업자로 만들고 있다.
『월스트리트 저널』(The Wall Street Journal)은 다음과 같이 보고하고 있다. “대부분의 인원 감축은 보다 적은 노동력으로 보다 많은 일을 할 수 있도록 해주는 새로운 소프트웨어 프로그램과 보다 나은 컴퓨터 네트워크나 하드웨어로 인한 것이다.”2) 기계(기술)는 한편으로는 자본주의 경제를 움직이게 하는 투자의 구현체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대부분의 경우 기계 한 대가 도입되면 노동자 한명 때로는 여러 명의 노동자들이 축출된다. 경제학자들은 기계가 몇 명의 노동자들을 대체하지만 결국에는 이들을 흡수하고, 생산성을 급격하게 증가시키며, 그 결과 국부가 증대된다고 항상 주장해 왔다. 그러나 누가 그 소득을 얻게 되는가? 1819년 경제학자 데이비드 리카도(David Ricardo)는 신규 투자의 원천인 지대와 이익이 감소하지 않는 한 고용량은 중요하지 않다고 말했다. 당시 스위스의 시스몽디(Simonde de Sismondi)는 다음과 같이 반문했다. “과연 그런가? 부(富)가 중요하고 인간은 중요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왕 혼자서 로봇을 사용하여 영국 전체의 산출량을 생산해 내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다.”3)
제레미 리프킨(Jeremy Rifkin)은 『노동의 종말』에서 기업들이 왕을 대신해서 국가의 부와 서비스를 생산하는 전자로봇을 작동시키는 세계에 대해 분석하고 있다.3) ‘노동의 종말’은 두 가지 방향에서 추진된다. 하나는 생산기술의 발달로 인해 노동의 필요성 자체가 없어진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그 결과 노동의 자리가 없어진다는 것이다.
4) 위험사회
컴퓨터 혁명과 생명기술 혁명이 하나의 기술 복합체로 결합하여 토지, 기후 및 계절의 변화라는 농업의 제약 조건으로부터 결별하여 식량 생산의 새로운 시대를 예고한다. 세계보건기구가 홍역의 완전박멸을 선언하는 그 순간, 에즈볼라니 광우병이니 H-157이니 하는 신종 병역들이 화려하게 등단하여 그 같은 선언을 전혀 무색하게 만든다. 근대화의 길을 숨가쁘게 달려와 이제 ‘풍요사회’를 이루었다고 자축하는 순간, 마른 목을 축일 한 바가지의 맑은 물조차 남아나지 않았다는 사실에 경악하게 된다. 일자리를 빼앗은 소위 GNR 기술이 또 다른 위험도 던진 것이다.
독일의 사회학자인 울리히 벡은 『위험사회』에서 이 문제를 깊이 있게 추구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위험사회로서 현대 산업사회의 위험성은 다섯 가지로 정리된다. 첫째, 현대의 위험은 방사선과 같이 인간의 평상적인 지각능력을 완전히 벗어난다. 둘째,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위험의 분배 및 성장에서 더 큰 영향을 받는다. 즉 위험의 사회적 지위가 나타난다. 셋째, 위험의 확산과 상업화는 자본주의의 발전논리를 완전히 종식시키는 대신에 자본주의를 새로운 단계로 끌어올린다. 넷째, 부는 소유할 수 있지만 위험으로부터는 그저 영향을 받을 수 있을 뿐이다. 다섯째, 사회적으로 공인된 위험은 특수한 정치적 폭발력을 지닌다. 지금까지 비정치적인 것으로 여겨졌던 것들이 정치적인 것으로 변한다.3)
기술 대체 및 고용 기회의 상실은 대부분의 미국 젊은이에게 영향을 미쳐, 폭력적인 새로운 범죄 하위 문화를 만들어내고 있다. 뉴욕의 십대 중 실업률은 1993년 1/4분기 중 40%로 상승하였다. 그러한 수치는 불과 2년 전에 비해 2배로, 기록된 25년의 통계 가운데 최악의 기록이다. 미국의 나머지 지역에 있어 1993년의 10대 실업률은 거의 20%에 가깝다. 청년층 실업 증가의 많은 부분은 전통적으로 십대들이 차지해 온 일자리를 대체하는 신기술의 도입에 기인한다. 다시 말해 기술의 발달은 기술 그 자체의 위험 뿐만 아니라 실업자로 인한 부차적 위험도 야기한다. 2. 노동과 자본의 결합과 분리 1) 노동과 노동자 생계의 분리
칼 폴라니(Karl Polanyi)가 마르크스의 성찰을 갱신하면서 제시했듯이, 새로운 산업 질서를 낳은 『대전환』(The Great Transformation)의 출발점은 노동자와 그의 생계가 분리된 데 있었다.4) 이 중대한 사건은 좀더 포괄적인 어떤 출발의 일부였다. 즉 생산과 교환은 이제 더 이상 일반적인, 실제로는 모든 것을 포함하는 생활 방식으로 간주하지 않게 되었다. 더욱이 노동(이에 덧붙여 토지와 화폐)은 단지 상품으로 여겨지고 또 그렇게 다뤄질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노동력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도록 하고, 여러 가지로 다양한 이용(또한 더 좋은 이용)을 가능케 하며, 다른 설비(또한 더 좋은 설비)에 재결합하고 그 설비의 일부로 만드는 것을 바로 이와 같은 새로운 ‘분리’(dis-connection)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분리야말로 ‘신체 및 정신의 노역’을 당연한 현상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것은 노동을 온갖 물건들처럼 취급될 수 있는 ‘사물’(thing). 즉 다른 ‘것’과 함께 처리하고 옮기고 합치거나 깨뜨릴 수 있는 ‘사물’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분리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노동은, ‘자연스럽게’ 그 노동을 포함하면서 그것을 자기 통제적 존재로 응축시키는 ‘전체성’(whole)으로부터 정신적으로 떨어져 나갈 기회가 거의 없다. 부에 관한 전(前)산업적 견해에 따르면, ‘토지’야말로 그와 같은 전체성이었다. 일단 노동이 부의 원천임을 발견한 후에는, 그 원천을 이전과는 전혀 다르게 파악하고 유리하게 이용하는 것은 ‘이성’(reason)의 몫이었다. 2) 노동과 자본의 결합
노동의 의미변화 과정에 노동과 노동자의 소외방향으로만 전개된 것은 아니었다. 헨리 포드(Henry Ford)는 “역사란 속임수다. 우리는 전통을 원하지 않는다”라는 말을 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현재에 살기를 원한다. 우리가 개의치 않아도 될 유일한 역사는 오늘날 우리가 만들어 가는 바로 그 역사뿐이다.” 헨리 포드는 1914년 1월 1일 노동자의 임금을 두 배로 올리면서, 자기가 고용한 사람들도 자기 차를 구입하기를 바란다고 말하였다. 물론 그것은 그의 속마음과는 동떨어진 말이었다. 포드 자동차의 노동자들이 구입한 승용차는 회사의 전체 판매량에서 보면 아주 보잘 것이 없었지만 임금을 두 배로 올린 것은 포드 자동차의 생산비에 심각한 부담을 주었다. 그가 전통적인 방식과는 전혀 다른 조치를 취한 까닭은, 귀찮을 정도로 빈번한 노동자의 이직을 억제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자기가 고용한 사람들을 마지막까지 회사에 붙잡아 두고 싶어했고, 그래서 노동자들이 노동 생활을 계속하는 동안 교육과 훈련비용으로 돈을 계속 투입하였다. 이러한 노력이 효과를 내려면 포드는 직원들을 붙박이로 고용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자신이 이들을 고용하면서 부와 권력에 의존했던 것처럼, 노동자들이 자신의 공장에만 의존하도록 만들어야 했다. 자본과 노동, 양측이 함께 거주하기 위해서는 각기 특정한 상품 양식으로 존속할 필요가 있었다. 자본의 소유자는 계속 노동을 구매할 수 있어야 했고, 노동 소유자는 자기를 구매해 줄 사람의 관심을 끌 만큼 기민하고 강하며 색다른 매력을 지녀야 했다. 양측은 각기 상대방이 정당한 조건에서 정상 상태를 유지해 가는데 관심을 쏟았다. 자본과 노동의 ‘재상품화’(recommodification)가 정치와 국가의 주요 기능이자 관심사가 되었음은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다. 실업자들은 완전히 그리고 진짜 ‘노동 예비군’(labor reserve force)이 되었다. 이들은 긴급히 어떤 일을 하라고 소환될 경우에 대비하여 항상 준비하고 있어야만 했다. 바로 그 같은 일에 노력을 기울이는 국가, 곧 복지 국가(Welfare State)는 진정 ‘좌파와 우파를 넘어서’ 존재했다. 즉 복지 국가란, 그것이 없으면 자본도 노동도 이동하거나 활동하는 것은 물론 생존조차 할 수 없는 보호막이기 때문이다.
판에 박힌 일들은 노동자들을 비천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그것은 또 노동자들을 보호해 주기도 한다. 그 일상적인 작업들은 노동을 부패시키기도 하지만, 또 그들에게 생명을 가져다 주기도 한다. 서로간의 동반자 관계가 계속되리라 보여지는 동안, 그 연대를 위한 규칙들의 초점은 긴밀한 교섭은, 때로는 대립과 공존, 또 어떤 때는 휴전과 타협 등에 놓인다고 할 수 있다. 노동조합은 개개인으로서는 무력한 노동자들의 힘을 하나로 모아 집단적인 협상 능력으로 키워 냈으며, 이름뿐인 규제들을 노동자의 권리로 바꾸고 또 그것들을 고용자의 전횡에 대한 압박용 무기로 만들기 위해 투쟁했다. 3) 조직 노동의 미래
19세기, 왜 유럽 각국 정부들은 조직 노동 운동에 대응해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당시에 경영자들은 벌써부터 노동조합이 그들을 파멸로 내몰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었지만, 경제적 이유만으로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미국 및 프랑스의 노동조합 조직률은 오늘날의 수준과 비슷하게 낮았다. 영국과 프랑스에서는 15퍼센트에서 20퍼센트 정도였고, 독일에서는 이보다 조금 낮았다. 정치적 노동 운동, 즉 노동자 정당들도 독일 이외의 나라에선 비교적 약했다. 당시 독일에선 사회민주당이 거의 30퍼센트 정도의 득표로 이미 타 정당에 월등히 앞선 다수 정당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물론 당시에는 거의 몇 안 되는 나라에서만, 남성에게만 허용된, 보통 선거권이 실시되고 있었다.
그러나 다음 사실이 중요했다. 노동자 정당이 존재하는 나라들에서는 선거 민주주의가 도입되기만 하면 그들이 곧 하나의 무시할 수 없는 정치 세력이 될 것이라고 예견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스칸디나비아 등지에서 1914년 이전 시기에 실제로 일어났다. 당시 각국 정부들이 노동 운동에 주목하게 된 이유는 무엇보다 대개 좌익 경향을 보이는 계급 정당의 대두 때문이었다. 그런데 계급 정당은 노동자들의 새로운 계급 의식의 표현이었다. 1906년 이후 영국의 자유-개혁주의 내각에서 통상장관이던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은 이 상황을 명확히 표현하였다. “만약 자유-보수 양당 제도가 무너지면 영국에는 완전한 계급 정치가 대두할 것이다.” 그런데 당시 대부분의 영국인은 노동자 계급에 속했기 때문에, 계급 청치가 등장하면 물론 그들에게 매우 불리한 상황이 전개될 것이 분명했다.
최소한 18세기 혁명의 시대(프랑스 대혁명과 산업혁명) 이래 체제 전복의 가능성, 즉 기존 사회와 전혀 다른 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는 가능성은 이 혁명들의 영향권 안에 살던 모든 계급의 인간들에게 충분히 인식되었다. 노동자들의 노동․생활 환경 개선을 위한 집단 투쟁 역시 이런 사회 변혁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이 볼 때 노동 운동은 새롭고 더 나은 사회, 즉 사회적으로 한층 정의로운 사회를 향한 염원을 담고 있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노동 운동은 경쟁이 아니라 공동사회(Gemeinschaft)에 기초를 둔 사회 이상까지도 포함하고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은 이 모든 전망을 흐트려 놓는 듯했다. 1914년부터 1940년대 말에 이른 ‘파국의시대’는 전쟁, 몰락, 혁명(무엇보다 러시아 10월 혁명)이라는 단어로 표현되는 시기였다. 구유럽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잘못된 길로 나아갔다. 세계대전은 혁명으로, 그리고 식민 제국의 붕괴로 이어졌다.
민주주의와 노동 운동을 제거한 형태, 즉 권위주의 또는 파시스트 체제가 아니었다면 당시 시장 자본주의가 과연 생존할 수 있었을까? 독재와 무제한 시장 경제의 결합에 대해 아직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다. 1960년대 초까지도 영국 수상 맥밀런과 같은 부르주아 정치가들은 후루시쵸프와 마찬가지로 사회주의 경제가 자본주의 경제를 앞지를 것으로 믿고 있었다.
제 2차 세계대전 후 공존 체제가 다시 돌아왔다. 새로운 공존 체제는 첫째, 전후 서구 자본주의의 체계적인 경제 개혁 정책의 틀 안에서, 둘째, 완전 고용과 사회 복지 국가를 통해 의도적으로 노동 운동을 체제 내로 흡수하려는 정책을 토대로, 셋째, 이른바 ‘황금기’(1947~1973)의 경제 기적을 토대로 이루어졌다. 이 새로운 공존은 경제 대공황과 독일 국가사회주의라는 악몽과도 같은 경험없이 가능했을까? 그리고 배후에 소련이라는 초강대국이 버티고 서 있는 공산주의의 약진에 두려움을 느끼지 않고 가능했을까? 아마 그러지 못했을 것이다.
산업 세계의 부유한 국가들에서도 노동 운동은 지속될 것이다. 그 이유는 이러하다.
첫째, 마르크스가 예언했듯이, 최소한 피고용자로서 이해 관계가 고용주의 것과 본질적으로 다른 임금․봉급 소득자가 다수 존재하기 때문이다. 양자 사이에 갈등이 발생할 때 피고용자측은 불가피하게 집단 행동에 나서게 될 것이다. 따라서 단어의 정치적 의미에서건 비정치적 의미에서건 계급 투쟁은 계속될 것이다.
둘째, 계급으로 일컬어지건 아니건 간에 사회 계층, 즉 상반되는 이해 관계를 가진 사회집단들이 아직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들이 200년 전이나 300년 전과 다른 역할을 수행하는 것은 원칙적으로 놀라운 일이 아니다. 따라서 오늘날 단지 부분적으로만 계급적 성격을 띠고 있다 해도 이들 사회 집단의 정치는 역시 계속될 것이다.
셋째, 국가가 소멸하지 않았기 때문에 노동 운동은 계속될 것이다. 그렇다. 국가가 경제의 세계화를 멈추게 할 수는 없다 해도 규제할 수는 있기 때문에, 경제 세계화 시대에 국가의 중요성은 여러 가지 면에서 증대하고 있다. 국가 또는 다른 종류의 공공 기관들은, 사회적 재화를 국민들에게 휴머니스트적인 범주에 따라 분배할 수 있는 유일한 기관으로 남아 있다. 또한 이들 기관은 사회적 재화를 인간적 필요 충족을 위해 분배할 수 있는 유일한 기관이기도 하다. (시장은 결코 이 역할을 할 수 없다.) 이처럼 정치는 아직 사회 개선을 위해 불가피한 투쟁 영역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따라서 국가 차원에서의 노동조합을 약화시키는 세계 경제에서 정치의 중요성은 더욱 커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20세기 말 두 가지 위험이 노동 운동을 위협하고 있다. 노동 운동 지도자들이 시장 이데올로기 앞에 무릎을 꿇는 것, 그리고 시민의 탈정치화라는 위험이다. 계급 정당으로서의 사회민주주의는 이미 양차 대전 사이에 모습을 상실하기 시작하였으며, 이러한 경향은 1945년 이후 더욱 빨라졌다. 특히 1990년 이후로는 그 형체가 완전히 사라져 가는 중에 있다.5) 4) 유연성 문제
이제 상황은 변했다. 이러한 변화에 결정적인 요인이 된 것은장기적심성을 대체하고 들어선 새로운단기적심성이다.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같은 표현에서 보이는 노사간의 밀접한 결합은 이제 아주 드문 경우가 되었다. 노동조합과 개인, 두 당사자는 더 이상 서로 동반자 관계에 안주하리라고 기대하지 않는다. 최근의 한 연구에 따르면, 적절한 수준의 교육을 받은 미국 젊은이라면, 자기가 일할 수 있는 생애 동안, 적어도 열 한 차례나 직업을 바꿀 것으로 예상된다. 이 같은 직업 전환은 현재 세대의 일할 수 있는 생애가 끝날 때까지 계속 높아지리라 기대된다. 오늘날의 구호는 ‘유연성’(flexibility)이다. 이 유연성이 노동 시장에 적용될 경우, 그것은우리가 알고 있는직업의 종말, 단기 계약이나 재계약(rolling contracts)에 기초를 두거나 아예 계약도 없이 이루어지는 고용, 또 계속 고용되리라는 기대가 전혀 없이 단지 ‘추후 통지가 있을 때까지’라는 조항만 있는 경우 등을 내용으로 한다.
미국노동총연맹산업별회의(AFL․CIO)위원장이 노조원을 대폭 확장하지 못하면 노조의 존립이 위태로워질 것이라 경고했다. 뉴욕타임스는 존 스위니(John Sweeney) AFL․CIO 위원장이 지난 주 로스엔젤레스에서 개최된 노조지도자들과의 비공개회의에서 이같이 경고하고 내달 중 산하 노조위원장 특별회의를 소집했다고 전했다. 회의에 참석한 한 노조지도자는 스위니가 “하향 추세를 즉각 반전 시키지 못한 경우 노조의 존립이 불가능해짐과 동시에 주요 관심사에 대해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할 것”이라고 지적했다고 말했다.6)
유연성이란 표어는 사방에서 고발당하고 있는데, 이 말을 다른 말로 바꾸면 고용주가 피고용자를 좀더 쉽게 해고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노동 관계에 대한 ‘탈규제화’ 및 ‘유연화’가 더욱 많이 시행될수록 노동사회에서 위험감수사회로 가는 변동 속도는 더 빨라진다고 할 수 있다. 5) 기계의 부품과 같은 노동
로버트 라이히(Robert Reich)는 현재 경제 활동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대략 네 가지 범주로 나눌 수 있다고 주장한다.7) 상징을 조작하는 사람들(symbol analysts), 즉 아이디어를 창출하고 그 아이디어를 매력적인 것, 판매할 만한 것으로 바꾸려고 애쓰는 사람들이 첫 번째 범주를 이룬다. 노동의 재생산 과정에 종사하는 사람들(교육자나 복지 국가의 다양한 공무원)이 두 번째 범주에 해당한다. 세 번째 범주는 ‘개인 서비스’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포함한다. 이들은 서비스를 받는 사람과 일 대 일로 마주 대하고 일할 필요가 있다. 상품 판매자와 상품에 대한 욕구를 만드는 사람들이 이 범주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네 번째 범주에는 지난 한 세기 반 동안 노동 운동의 ’사회적 하층‘(social substratum)을 형성했던 사람들이 속해 있다. 라이히의 표현에 따르면. 그들은 ‘틀에 박힌 노동자(routine labourer)로서 일관 작업 공정(assembly line)에 매여 있거나. 컴퓨터 연결망이나 한 번씩 점검만 하면 되는 전자 자동화 기계 앞에 앉아 일한다. 그들은 경제 체제 가운데 가장 소모적인 부분으로, 자유로이 처분할 수 있고 교환도 가능하다. 다시 말해 노동이 값싼 기계의 부품과 같아진 것이다.
특별한 숙련도, 고객과 사회적 교류를 넓히기 위한 기법도 그들한테는 필요하지 않다. 그래서 그들에 대해서는 가장 쉽게 교체할 수도 있고 명령도 내릴 수 있다. 그들은 기껏해야 주변적인, 무시해도 상관없는 교섭력을 가졌을 뿐이다. 그들은 (자본의 뜻대로) 처분될 수 있음을 알고 있다. 그래서 자기 직종 고유의 일이나 위탁업무를 늘리는 것, 함께 일하는 동료와 지속적인 관계를 맺는 것 따위는 중시하지 않는다. 그들은 작업장에 충성을 바친다거나 그들 인생의 목적을 계획된 미래에 새겨 두기를 꺼리는 경향이 있다. Ⅲ. 기술의 발전과 노동의 대응 1. 진보의 대가 1) 새로운 기계, 새로운 일자리
많은 미국인들은 약 100년 전 단 하나의 명칭으로 우리의 시대를 특징지으라고 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시대를 영웅적이며 철학적이고 도덕적인 시대가 아닌, 어떤 다른 것보다도 기계의 시대로 명명할 유혹을 느낀다”고 새로운 기계 문화에 관한 글을 써온 영국의 사회 비평가인 토마스 카알라일(Thomas Carlyle)의 견해에 의심 없이 공감했다.“그 단어의 모든 의미로도 그것은 기계의 시대이다…… 인간은 손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머리와 마음에 있어서도 기계적으로 성장을 해왔다.”8)
경제적 과정에서 효율이라는 관념을 가장 대중화시킨 사람은 테일러(Frederick W. Taylor)였다. 1895년에 발간된 『과학적 관리법』(Scientific Management)의 원칙은 작업장을 조직화하는 데 있어 표준적인 참조 사항이 되었으며 그 밖의 많은 사회를 조직화하는 데 사용되었다. 경제사가인 벨 Daniel Bell은 테일러에 대해 말한다. “어떤 사회적인 격변이 어느 한 사람에게 돌릴 수 있다면, 삶의 방식으로서 효율의 논리는 테일러에 근거한다.”고 지적했다.9)
지난 200여 년 동안의 역사를 회고하면, 우리(노동자)는 기계가 빼앗아 가버린 일자리를 떠나 그 기계가 창출한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 헤매는 거대한 이동을 목격할 수 있다. 19세기 초반 기계는 흔치 않은 현상이었다. 대부분 수작업과 가축을 이용하는 농업이 핵심적인 직업이었다. 19세기 중반 경 미국의 노동상황은 변하기 시작했다. 사이러스 맥코믹(Cyrus McCormick)은 수확 기계를, 존 디어(John Deere)는 철제 쟁기를 발명했고, 트랙터가 등장했다. 그 결과 19세기 3/4분기 미국의 총노동력에서 농업 노동력이 차지하는 비율이 3/4분기 총노동력에서 농업 노동력이 차지하는 비율이 대략 75%에서 50%로 감소했고, 1900년에는 그 비율이 30%로, 1940년에는 20%로, 현재는 약 3%까지로 감소했다.
기계에 의해 일자리를 빼앗긴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는가? 그들은 기계가 창출하는 새로운 고용 영역으로 이동했다. 1810년에는 단지 7만 5,000명의 사람들이 선철과 잡동사니들을 생산하는 초기 ‘사람으로 움직이는 공장’(manfactorie)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그 숫자는 1910년 800만 명 이상으로, 1960년에는 1,600만 명으로 증가했다. 비율로 따져 보면 산업 노동력이 총노동력의 35%를 차지할 때까지 급격하게 증가했다.
존 갈브레이스(John Kenneth Galbraith)는 『신산업국가』(The New Industrial State)에서 기술의 숙련 및 생산 능률에 대한 새로운 경향을 구체화하였다. 그는 거대 기업의 권력이 ‘테크노스트럭처’(techno-Structure)로 옮겨간다는 것을 발표했다. 갈브레이스는 “더욱 더 정교해지는 기술의 도입과 관련, 현대 기업의 점증하는 복잡성은 ‘특별한 재능’과 효율적인 기계처럼 기업을 움직일 수 있는 과학적 마인드를 지닌 새로운 종류의 경영자를 필요로 한다”라고 했다.10)
베블랜(T. Veblen)은 “미국의 생산적인 산업이 체계적인 전체로서 잘 조직화되고 이윤의 극대화만을 쫓는 무식한 기업인에 의해 잘못 관리되기보다는 재화와 용역의 생산 극대화를 목표로 하는 유능한 기술자에게 관리된다면 그에 따른 재화와 용역의 산출량은 현 수준을 수백 퍼센트나 능가하게 될 것”이라고 믿었다.11) 베블랜은 가장 엄격한 효율 기준을 사용하여 비능률의 뿌리를 뽑고 흡사 잘 조율된 메가톤급 기계와 같이 국가를 조작하는 전문엔지니어가 운영하는 국가를 상상했다. 후일, 최악의 경제 공황 동안 스스로 테크노크라트(Technocrats)라 부르는 자칭 개혁자 집단은 베블렌의 외침을 받아들여 미국이 엔지니어들에게 독재에 권력을 부여해줄 것을 촉구했다. 2) 제3부문과 서비스부문의 등장
공장이 노동자들을 흡수하고 방출하는 동안, 거대한 제3부문(the third sector)은 새로운 고용의 가능성을 제공해 왔다. 이것은 교사와 변호사, 간호사와 의사, 가정부와 보모, 정부 공무원과 교통 경찰, 사무원, 타이피스트, 수위, 판매원 등 서비스 고용 영역의 확대를 의미한다.
서비스 부문의 기술도 한편으로는 일자리를 창출하면서,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일자리를 제거해 왔다. 이 부문의 고용은 타이프 라이터와 전화로부터 성장했고, 복사기와 우편 주문 카탈로그의 영향으로 위축되었다. 그러나 사람들(노동자들)로 가득한 기업의 드라마의 막을 내리고 기업들로 하여금 섬에 앉아서 기계를 돌려 스스로 일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은 컴퓨터였다. 따라서 제3부문과 서비스부문이 없어진 일자리를 충분히 보상하지 못한다. 그러나 벡은 이에 대해 낙관적인 주장도 펼친다. 벡은 국가가 자원봉사를 하나의 노동으로 인정하고 그에 대한 수당을 지급하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는 낙관적인 견해를 펼친다. 벡은 이를 ‘시민노동’으로 부르고 있다. 국가와 기업으로부터 돈을 받고 내 가족을 위해, 또 불우한 이웃을 위해 노동한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아름답고 새로운 노동이다. 유럽과 미국에서는 지금 이같은 시민노동의 움직임이 꿈틀거리고 있기도 하다.12) 그러나 여기에는 ‘완전고용’을 약속하면서 내용은 그와 정반대 되는 것으로 돌린다. 돈은 받지만 다른 사람이 결정권을 행사하는 노동 대신, 돈은 못 받지만 자기가 결정권을 행사하는 노동으로 바꿔치기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자기 활동적인 시민사회’라는 아름다운 표현에는 다급한 거짓말의 악취가 심하게 풍겨 나온다. 이 경우 ‘자기 활동’이란 직장에서 그 어떤 해고 보호책도 없음을 말한다. 3) 인간이 없는 생산공장: 노동자의 종말
과거에는 신기술이 특정 부문의 노동자들을 대체하면, 대체된 노동력을 흡수하는 새로운 부문이 항상 출현해 왔다. 오늘날 농업, 제조업, 서비스업이라는 경제의 전 부문이 기술 대체를 경험하고 있고, 수많은 사람들을 실업자의 대열로 몰아내고 있다. 출현하고 있는 유일한 부문은 기업가, 과학자, 기술자, 컴퓨터 프로그래머, 전문직, 교육자, 컨설턴트 등 소수의 엘리트들로 구성된 지식 부문이다. 비록 이 부문이 성장하고는 있지만, 정보 통신 기술의 발달로 인한 혁명의 와중에서 해고될 수억 명 중 단지 일부분이라도 흡수할 수 있을까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생산 관행의 재구축과 기계에 의한 인간 노동의 영구적인 대체는 수백만 노동자들의 생활에 비극적인 조종을 울리기 시작하고 있다.
바실리 레온티에프(Wassily Leontief)는 이러한 이행의 중요성을 음미하면서 다음과 같이 경고했다. “보다 정교한 컴퓨터의 도입으로 인하여 마치 농경 시대에 있어서 말의 역할이 트랙터의 도입에 의해서 감소되고 제거된 것처럼, 가장 중요한 생산 요소로서의 인간의 역할이 감소하게 될 것이다”
컴퓨터 혁명과 작업장 리엔지니어링(Reengineering)의 효과는 제조업 부문에서 가장 심각하다. 마르크스가 세계 노동자의 단결을 호소한지 150여년 이후, 프랑스 미테랑 대통령의 기술 자문이자 장관인 자크 아탈리(Jacques Attali)는 노동자 시대의 종말을 주장했다. “기계가 새로운 프롤레타리아이다. 노동 계급에게는 해고 통지서가 발부되고 있다.”
폴 크루그만 (Paul R. Krugman)과 로버트 로렌스 (Robert L. Lawrence)는 광범위한 자료에 근거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산업 노동자들이 자동화로 인하여 직업을 상실하게 될 것이라던 1950년대와 1960년대 동안에 팽배했던 우려가, 현재 제조 부문의 일자리 상실이 국제경쟁 때문이라는 선입견보다는 훨씬 진실에 가깝다.”13)
지금 우리는 지난 200년간 불편했던 기술과 노동의 관계를 넘어서서, 과거와는 다른 새로운 관계를 정립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21세기 중반까지는 거의 완전히 자동화된 경제를 약속하고 있다. 2. 일자리 확보를 위한 소비촉진 1) 불만족의 기능
초기, 기업의 지도자들은 사람들이 결코 이전에 원하지 않았던 물건을 ‘원하는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만족하지 못한’ 소비자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GM의 찰스 케터링(Charles Kettering)은 그와 같은 새로운 소비 복음을 설교한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GM은 이미 자동차의 연간 모델 변경을 도입하기 시작하여 소비자로 하여금 이미 갖고 있는 자동차에 대하여 불만을 갖도록 활발한 광고 선전에 착수했다. “경제 번영의 열쇠는 불만족을 조직적으로 만들어 내는 데 있다”고 케터링은 말한다. 갈브레이스(John Kenneth Galbraith)는 기업의 새로운 사명은 “기업이 만족시키려는 욕구를 창출”하는 데 있다고 수년 뒤 좀 더 간결하게 설명했다.14)
20세기 초 경제학자들을 그렇게도 사로잡았던 생산에 대한 지속적인 강조가 새로운 소비에 대한 관심과 급작스레 등장하게 되었고, 더욱 더 많은 경제학자들이 그들의 지적인 관심을 소비자에 둠으로써 경제학의 새로운 하위 부문인 ‘소비경제학’이 1920년대 나타났다. 기업의 영역에 있어 주변적 역할을 해온 마케팅이 새로운 중요성을 띠기 시작했다. 생산자 문화가 하룻밤 사이에 소비자 문화로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15) 2) 수공업에서 공장제 공업으로
경기 침체의 구렁텅이 속에서 케인즈(John Maynard Keynes)는 정부가 경제 정책을 규제하는 방법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던 『고용, 이자 및 화폐에 관한 일반이론』(The General Theory of Employment, Interest and Money)을 발간했다. 통찰력 있는 문구로 그는 미래에 있어 그 충격이 심대할 새롭고도 위험한 현상을 경고했다. “우리는 지금 독자들이 그 이름을 들어보지도 못한 새로운 질병에 시달리고 있으며 독자들은 다가오는 미래에 ‘기술 실업’이라는 것을 수없이 듣게 될 것이다. 이는 노동력의 사용을 경제화하는 수단의 발견이 노동에 대한 새로운 용도를 발견하는 속도를 능가하여 발생하는 실업을 의미한다.”16)
광고인들은 이용 가능한 수단과 기회를 사용하여 ‘집에서 만든’ 제품을 격하하고 ‘상점에서 팔고’ ‘공장에서 만든’ 품목의 판매를 촉진하였다. 젊은이들이 특히 목표 대상이었다. 광고 메시지들은 젊은이들로 하여금 집에서 만든 제품을 입거나 사용하는 것을 부그럽게 만들었다. 점점 더, 광고의 초점은 ‘현대식’또는 ‘구식’의 이슈에 집중되었다. 뒤로 처진다는 공포는 구매력을 촉진하는 강력한 힘이었다. 노동사가 해리 브레이버맨(Hary Braveman)은 “지위의 원천은 물건을 만드는 능력이 아니라, 단순히 물건을 구매하는 능력”이라고 말함으로써 당시의 상업 정신을 꿰뚫어 보았다.17) 3. 고용유지를 위한 시간 단축 1) 기술혁신과 고용감소
기술 확산에 대한 주장은 공급이 수요를 창조한다고 처음으로 주장한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인 19세기 초 프랑스의 경제학자 장 바티스트 세이(Jean Baptiste Say)의 저술에 그 유래를 둔다. 세이에 의하면 “하나의 제품은, 시장에서 그 제품이 다른 제품대신 어떤 가치를 제공하는 즉시 만들어지며 ……하나의 제품을 만들어내는 것은 곧 또 다른 제품을 만들어내기 위한 숨통을 터준다.”18)
기술 혁신이 영구적인 성장과 고용을 촉진한다는 생각은 그간 거센 반대에 부닥쳤다. 마르크스는 『자본론』(Capital)(1867) 제 1권에서 생산자는 계속적으로 노무비를 절감하기 위한 시도를 하고, 가능한 장소와 가능한 시기에, 노동자를 자본 기계로 대체함으로써 생산 수단에 대한 보다 큰 통제력을 얻는다고 주장했다. 자본가는 생산성 향상, 원가 절감 및 작업장에 대한 보다 큰 통제력으로 이득을 얻을 뿐만 아니라 2차적으로는 경제의 어디에선가 착취가 가능한 엄청난 수의 실업 노동자 예비군을 만들어 냄으로써 또 다른 이득을 얻을 것이다. 따라서 마르크스는 생산 자동화의 증가가 궁극적으로 노동자를 제거시킬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특정의 노동 형태가 노동자에서 기계의 형태를 한 자본으로 옮겨지고, 이러한 이동 결과 자신의 노동력이 평가절하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따라서 노동자들이 기계에 저항하는 투쟁을 한다. 한때 노동자들의 노동 활동이었던 것이 기계의 활동이 되고 있다.”19) 물론 기계에 대한 저항은 이보다 앞서 영국의 산업혁명과정에 구체적으로 러다이트 운동(Luddite Movement)으로 나타났다. 2) 근무시간 단축
켈로그(Kellogg), 시어즈 로벅(Sears Roebuck), 스탠더드 오일(Standard Oil), 허드슨 자동차 회사(Hudson Mortors)를 포함한 굵직한 기업체들이 고용을 유지하기 위하여 근로 시간을 주 30시간으로 단축했다.20) 켈로그의 결정은 가장 야심 차고 혁신적인 것이었다. 소유주인 켈로그(W. K. Kellogg)는 “3교대 8시간 대신에 4교대 6시간으로 돌린다면 배틀 크릭에 있는 300명 이상의 가장들에게 일자리와 봉급을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자기 종업원의 적절한 구매력을 확보해 주기 위하여 회사는 남성 노동자의 최소 임금을 일당 4달러로 올려 주는 한편 시간당 임금을 12.5% 인상시켜 주었는데 이는 매일 2시간의 근로 시간 손실을 상쇄해 주었다.21)
많은 비평가들은 “무엇을 위해 재훈련을 하지?”라는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농업과 제조업, 서비스 부문이 자동화를 하고 서비스 부문이 자신들의 영업을 자동화하며 리엔지니어링으로 수백만의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게 됨에 따라 이들을 재훈련시켜 어디에 취업을 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가 급선무가 되어 버렸다. 미국 노동부의 1993년도 연구에 따르면 실직 노동자를 위한 연방 정부의 프로그램 하에서 재훈련을 받은 사람 가운데 20%도 안 되는 사람이 이전 봉급의 80% 정도를 주는 일자리에 취업할 수 있었다.22) Ⅳ. 정보사회의 진전과 반발 1. 정보사회의 도구와 기술 1) 전자 불도저
농업사회의 도구는 쟁기나 곡괭이였다면, 산업사회의 대표적 도구는 불도저(bulldozer) 등이었다. 지식사회의 도구는 무엇인가? 그것은 전자 불도저(electronic Bulldozer, EB)와 정보기술(information technology, IT)이다(Dertouzos, 1997). 농업사회나 산업사회에서는 그 도구를 사용하여 생산성을 엄청나게 향상하였지만, 수확체감의 법칙 즉, 한계 생산성체감의 법칙(the law of diminishing return of marginal productivity)이 작용했다. 그러나 지식 경제의 경우, 수확체증의 법칙(the law of increasing return) 또는 수확유지의 법칙이 작용한다. 따라서 지식사회의 생산성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그 결과 무노동 사회(work free society)가 - 적어도 개념상으로는 - 가능하다.
정보사회의 도구 즉, 전자 불도저(EB)는 각종 FA․OA․HA로서 다음과 같은 기술의 발달로 가능하다.
(1) automatization(컴퓨터 + 기계)
컴퓨터가 내장된 자동제어 기계는 지금까지의 자동화(automation) 즉 주어진 작업을 되풀이하는 것과는 구분된다(또한 일본의 린 생산방식에 사용되는 autonomation과도 구분된다).
(2) 인간 - 기계 인터페이스(human-machine interface)
컴퓨터가 인간의 기능을 일부 대체하는 것으로 의족․의지․의안․전자코․전자귀 등을 포함한다.
(3)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 AI)
인간의 단순한 지시를 인식하는 차원을 넘어 개념(concept, 정치․사회․문화 등)까지 인식하여 스스로 정보를 수집․판단하는 노보트(knowbot)23)를 말한다.
(4) bodyo 또는 bodynet
착용 가능한 컴퓨터(wearable computer), 이동컴퓨터(mobile computer)의 개념을 포함하여 「어디에나 부착되고 어디서나 사용 가능한」컴퓨팅 환경(ubiquitous computing)을 말한다. 2) 정보기술
인간의 뇌세포에 해당하는 마이크로프로세서의 트랜지스터 수는 인텔 펜티엄급인 경우 6백만개 정도이다. 이에 비해 인간의 대뇌는 1백20억개의 뇌세포, 소뇌는 1천억개의 뇌세포를 갖고 있다. 소뇌는 대부분 운동과 신경을 제어하므로, 인간의 뇌세포수를 3백50억개로 잡을 경우에도 컴퓨터의 트랜지스터수 6백만개보다 훨씬 많다. 따라서 현재까지는 인간의 능력에 비해 컴퓨터의 능력은 상당히 뒤떨어진다.
그러나 인간의 뇌세포는 2000년전의 수와 큰 변화가 없다. 이에 비해 컴퓨터는 25년전 마이크로프로세서의 트랜지스터의 수가 1천개에서 현재 6백만개로, 1년반동안 2배씩 성장해왔다. 따라서 10~20년후에는 1조개의 트랜지스터를 장착한 컴퓨터가 나타나 인간을 따라잡을 것이며, 20년후에는 인간의 뇌세포를 능가하게 될 것이다.
컴퓨터의 능력은 5단계로 진화해간다. 우선 정부 여론조사나 호적정리에 사용되는 데이터 프로세싱 단계이다. 두 번째는 신속한 데이터 수집으로 전략적인 의사를 결정하는 단계이다. 세 번째는 학습능력 습득 단계로 컴퓨터가 학습을 통해 추론능력까지 소유하게된다. 이는 최근 6백만개의 트랜지스터를 가진 IBM 컴퓨터(딥 블루)가 체스 세계챔피언을 물리친 것이 그 예이다. 네 번째가 발명과 예술단계이다. 이것은 컴퓨터에게는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져왔다. 컴퓨터의 진화과정을 인정한다면 이것도 가능하다는 주장이다. 마지막으로 컴퓨터가 인간의 감정까지 소유하게된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러나 감정은 인간의 독특한 영역이므로 컴퓨터는 결코 소유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그림 1> 21세기 EB와 IT 환경
2. 기계와 인간의 대결 1) 자동 피아노와 수퍼스타 가설
1952년에 나온 공상과학소설 『자동 피아노』(Player Piano)에서 본거트(Kurt Vonnegut)는 기술자들의 발명 덕분에 기계가 거의 모든 육체노동을 대신하는 미래세계를 그렸다. 그가 내다본 - 이런 기술적인 창의성 때문에 초래된 - 사회적 현상은 비참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돈벌이가 되는 일자리를 찾지 못하고 실업수당에 의지해 살거나 무의미한 정부의 일자리 마련 프로그램에 고용되어 있다. 아주 창의적이고 재능 있는 사람들만이 의미 있는 일자리를 찾을 수 있는데, 자동화로 인해 일자리가 점점 줄어들기 때문에 그들의 숫자도 계속 감소한다. 『자동 피아노』가 나온 뒤 처음 20년간은 본거트의 생각이 완전히 틀린 것 같았다. 제2차 세계대전부터 1970년대 초까지 선진경제권은 자동화로 말미암아 없어질 것이라고 본거트가 예상했던 바로 그런 종류의 일자리를 오히려 훌륭하게 새로 만들어 냈다.
기술과 소득분산의 관계에 관해 시사적인 가설이 하나 있다. 시카고 대학의 경제학자 로젠(Sherwin Rosen)은 본인이 직접 컴퓨터나 팩스를 쓰지는 않지만,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사용함으로써 돈을 더 많이 벌게 되는 사람들이 있다는 ‘수퍼스타’ 가설을 내놓았다. 로젠은 Journal of Political Economy에서 통신과 정보기술 덕분에 개인의 영향과 통제범위가 확대된다고 주장했다. 무대에서 공연하는 배우를 볼 수 있는 사람은 몇백 명에 불과하지만, 텔레비전 스타의 연기는 몇천만 명이 볼 수 있다.
그보다는 못하지만 회사중역․변호사․, 또 흥행가 기질의 학자들까지도 컴퓨터․팩스 및 전자우편 등을 통해 과거보다 훨씬 더 넓은 분야에 손을 뻗칠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임금구조는 점점 더 ‘토너먼트’(Tournament) 성격을 띄게 될 것이라고 로젠은 내다보았다. 2) 조지 웰스의 오류와 사용자 편리성
기술은 철로와 같은 것이 아니고, 올라가면서 여러 번 방향을 바꾸는 나선형의 계단과 같다. 산업혁명의 장기적인 영향이 그 좋은 본보기다. 빅토리아 시대의 미래학자들에게는, 산업기술의 자본이용 편중이 무한정 계속되어 자본가와 노동계급간의 격차가 언제가지나 계속된다는 견해가 확실한 것처럼 여겨졌었다. 『타임 머신』(The Time Machine, 1895)에서 조지 웰스(Herbert George Wells)는 인간 이하의 신분으로 노동자들이 전락하는 미래를 전망했다. 이러한 빅토리아 시대 사람들의 생각은 나중에 틀린 것으로 밝혀졌다. 실제로 만일 웰스가 오늘처럼 자료를 쉽게 얻을 수 있었다면, 소설을 쓰기 오래 전에 벌써 임금이 다시 오르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 20세기에는 국민소득에서 자본이 차지하는 비중은 점점 줄었고, 노동의 비중이 계속 늘었다.
게다가 기술발전이 언제나 숙련노동의 필요성을 증가시키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과거 기계화의 주요 효과 중 하나는 여러 가지 작업을 수행할 수 있는 특별한 기능의 필요를 감소시켰다. 수동직기로 직물을 짜는 데는 상당한 기술과 경험이 필요했다. 그러나 동력직기를 돌보는 일은 거의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있다. 오늘날까지 기술의 진보가 특정 기능의 수요를 계속 증가시켜온 것은 사실이다. 그 기능은 정식교육을 받고, 또 정식교육을 잘 받는 사람들이 가장 쉽게 배울 수 있는 종류의 기능이다.
200년 전에는 문자해득을 요하는 직종이 소수에 불과했다. 또 100년 전에는 현대의 대학교육과 같은 것을 요구하는 직종이 몇몇에 불과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고등교육이 부유한 계층만의 사치품이 아니며, 전문직을 생각하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아주 실용적인 것이고 또 사실상 필수품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이런 추세가 무한정 계속될 것인지의 여부는 그렇게 분명하지만은 않다.
우리가 ‘사용자 편리성’(User-friendly)이라는 용어를 쓸 때는 언제나 과거보다 숙련기능이 낮아도 괜찮은 생산기술을 지니고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평범한 사람들의 일이 평가절하 되고 불균형이 확대되는 현 시기가 일시적인 단계에 불과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어느 정도 충분한 시간이 지나면 입장이 바뀔 것이다. 아주 부자연스럽기 때문에 희귀해지거나 비범한 기능의 일은 대부분 컴퓨터가 맡거나, 또는 컴퓨터에 의해 쉽게 처리될 것이다. 그래도 모든 사람이 하는 일을 기계가 대신할 수는 없을 것이다. 물론 아주 장기적으로 보면 우리가 하는 일을 모두 기계가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때 가서 그 문제를 해결할 책임은 기계들의 몫으로 남을 것이다. 3) ATM과 행원
은행 지점들은 감원이 어렵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 은행들은 부동산은 물론 직원들까지 줄여 끊임없이 비용을 삭감하려고 하는데도 점포수는 늘어나고만 있다. 연방저축보험공사에 따르면 1986년대는 1만4,200개의 사업은행들이 5만8,211개의 지점을 가지고 있었다. 10년이 지난 1996년 현재 미국에 존재하는 은행수는 9,500개인데 유인점포수는 15%가 증가한 6만6,700개에 달했다. 금융시장 조사기관인 멘티스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수신고가 40억달러 이상인 대형은행 중 약 43%가 금년에 지점망을 확대할 계획이라고 대답한 반면 불과 27%만이 지점망을 축소할 계획이라고 응답했다.
자동 현금출납기(ATM)와 컴퓨터 뱅킹 같은 기술이 발달하면 유인점포가 상당수 사라질 것으로 생각됐지만, 실제로는 고객들은 여전히 직원들과 얼굴을 맞대고 은행업무를 보길 좋아한다. 양켈로비치 파트너즈사의 최근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73%가 유인점포를 더 선호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약 64%는 특정거래의 경우에는 기계를 이용할 생각이 전혀 없다고 대답했다. 기계보다 사람을 더 선호하는 이유는 제각각이다. 사람들은 ATM에서 돈을 인출할 땐 편리한 생각이 들지만 예금을 하는 건 내키지 않는다고 한다. “거래내역을 기록하는 진짜 사람이 있어야 마음이 놓인다. 착오가 발생하면 즉각 바로잡을 수 있으니까.”라고 하는 사람들이 많다. 창구직원이 서비스를 하면 건당 3달러의 비용이 드는데 비해 ATM 서비스는 건당 22센트밖에 들지 않는다는 사실이 ATM을 도입하는 충분한 이유가 된다고 모두들 생각했었다. 그러나 멘티스의 제임스 무어사장은 은행들은 셀프 서비스 기계를 아주 빈번하게 이용하는 고객들보다는 유인점포만을 이용하는 고객들로부터 평균적으로 더 많은 수입을 올렸다고 말한다. 컨설팅회사 매킨지는 ATM 도입으로 은행업계는 15억달러의 운영비를 추가로 부담하게 된 반면 창구축소로 절감한 비용은 2억달러도 안된다고 추산한다. 어떤 은행가는 유인점포가 단순히 수표를 현금으로 바꾸고 입금하는 장소가 아니라 금융상품을 파는 곳이 되기를 바라고 있다. 4) 완벽한 사이버시장
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 같은 업계 선구자들은 「접촉에서 해방된 자본주의」라는 얘기를 한다. 어느 곳에서든 누구나 쉽게 정보에 접근할 수 있게 되면 애덤 스미스가 말한 완전한 시장에 가장 근접할 수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3%만 직접거래이고, 97%는 홍보에 사용되는 시간이 될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컨설팅사 인터내셔널 데이터의 전망에 따르면 오는 2000년까지 미국에서만 4천6백만명의 소비자가 1년에 평균 3백50달러씩의 물품구매를 온라인을 통해 하게 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그렇지만 수천개가 넘는 온라인 상점에서 적당한 상품을 고르는 것은 고역임에 틀림없다. 소비자들이 1996년에 인터넷으로 거래한 금액이 모두 합쳐봐야 겨우 5억~6억달러 정도였다고 업계에서 추측하고 있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현실적으로도 대부분의 온라인 상점들이 손해를 보고 있다. 미국의 거대한 전화사 MCI가 2년전에 개설한 ‘마켓플레이스 MCI’라는 온라인 쇼핑몰의 문을 닫았다. 대부분의 업자들에게 지금의 인터넷은 완전한 시장이기는 커녕 성가신 존재이다.
그런데도 왜 여기에 대한 연구가 이어지고 있을까? 그것은 이 분야가 점차 빠른 속도로 발전하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사이버마켓에 대한 궁극적인 기대는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다만 꿈을 향해 나아가는 길에 예상과는 다른 현상들이 일어나고 있을 뿐이다.
세계 최대의 칩 제조업체 인텔의 앤디 그로브 사장이 최근 그의 회사가 인터넷 사업을 통해서 벌어들인 수익에 대한 질문에 답변한 다음과 같은 대답이야말로 사이버 시장 개척자로서의 태도를 단적으로 나타내주는 말이다. “사이버 시장으로부터 내가 벌어들인 투자수익률(ROI) 말이요? 당신들 미쳤소? 신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가 자신의 ROI가 얼마라고 얘기한 적 있었소?” Ⅴ. 무노동 사회와 위험 사회 1. 무노동 사회 함수와 무노동 사회의 과제 1) 무노동 사회 함수 기술과 정보를 바탕으로 한 사회는 유사 무노동 사회(Quasi-Work Free Society, WFS)라고도 할 수 있는데, WFS의 모습은 <3>식과 같이 표현할 수 있다. WFS=f(ΣEB․ΣIT․ΣINS)-γ ………………………………………………………… <식 3> WFS=무노동 사회(Work Free Society) EB=정보사회의 도구, 전자불도저(electronic bulldozer) ΣEB=ΣOA․ΣHA․ΣFA OA=office Automation HA=home automation FA=factory automation IT=정보기술 INS=하부구조(infrastructure) γ=기술의 보복 또는 퇴행현상 <식 3>에서 f(ΣEB․ΣIT․ΣINS)를 λ로 표시하면 <식 3>은 <식 4>로 정리된다. WFS=λ-γ ………………………………………………………………………………… <식 4> <식 4>의 우변을 부등식으로 표시하면 <식 5>와 같다. λ-γ⋛0 …………………………………………………………………………………… <식 5> <식 5>를 분리하면, λ-γ>0 → 진보 ……………………………………………………………………………<식 6> λ-γ=0 → 정체 …………………………………………………………………………… <식 7> λ-γ<0 → 퇴보 …………………………………………………………………………… <식 8> 등으로 정리할 수 있다. 우리들은 역사의 진보 편(λ-γ>0)에 선다고 가정하면, <식 9>는 무노동 사회를 표현한다. WFS=Max Σλ - Min Σγ …………………………………………………………… <식 9> 2) 여가 사회
사실 인류문화는 원시사회부터 놀이와 더불어 시작되었다. 모든 형태의 문화는 그 기원에서 놀이요소가 발견되며, 인간의 생활문화 자체가 놀이의 형식을 지니고 있었다. 여가사회학자인 호이징가(Johan Huizinga)는 인류를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ce) 즉 “사고하는 인간”이라기 보다는 『호모 루덴스』(Homo Ludens, 1938)에서 인류를 “놀이하는 인간”으로 부르는 편이 적절하다고 주장했다. 인류의 초기사회부터 놀이적 성격을 띤 여가가 존재해 왔으며 이는 인류문화 형성의 근간이 되었다. 따라서 “생활=여가”라는 여가관으로 표현할 수 있다.
그러나 산업화와 더불어 여가개념에도 변화가 나타났다. 사회전반에 팽배해 있던 일 중심 사상(work value)으로 노동시간의 개념 구분이 명확해졌다. 일의 대립개념으로서 자유시간(여가)에 대한 인식과 욕구가 현저히 증대되어 갔던 것이다. 그런 산업사회가 종말을 맞으면서 미래는 진정한 여가사회의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다. 3) 과거의 무노동 사회: 시간 낭비의 예술
니체(Friedrich Nietzshe)는『인간적인 , 너무나 인간적인』에서 이미 노동과 그 가치 척도가 노동과 다른 것으로 간주되는 놀이와 무위(無爲)에 얼마나 깊이 침투되고 있는가를 아이러니컬하게 보여주었다.
과거 노동은 선량한 양심을 모두 자기편으로 끌어들였다. 즐거움에 탐닉하는 것을 ‘기력 회복의 욕구’라고 해놓고도 즐거움에 탐닉하는 자기 자신을 수치스러워 했다. 소풍 나가는 모습이 누군가에게 들키기라도 하면 ‘건강은 자기 책임’이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양심을 스스로 속이지 않고는 친구들과 어울려 산책을 나가는 따위의 관조적 삶에 탐닉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던 시대도 있었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 자유를 정의할 때 중요하게, 아니 가장 우선적으로 부각시킨 사항은 자유가, 다름아닌, 노동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를 뜻한다는 것이었다. 노동해야 했던 사람은 부자유스러울 뿐만 아니라 남녀를 막론하고 그 사회의 구성원이 아니었다.
사실 일찍부터 노동이란 하찮은 일이었고, 비천한 자들이나 하는 것이었지 상류계층이, 양반이, 배운 자가, 그리고 지도자가 할 그런 것이 아니었다. 버트렌드 러셀에 따르면, 인류역사상 가장 행복했던 때는 페리클레스(재위기간 BC 443~429)시대 아테네 귀족들이라고 했다.
그 시절 귀족이란 무예와 예술 그리고 서커스만 즐겼다. 생산활동과 관련된 모든 노동은 노예가 했다. 중국에서 귀족은 자신이 노동을 하지 않는다는 증거로 손톱을 길게 길렀고, 피터 대제(재위기간 1682~1725)가 수염세를 제정하기 이전의 제정 러시아 귀족과 정교회 승려들은 자신이 노동하지 않는 신분임을 표시하기 위해 수염을 길게 길렀다. 조선시대 양반도 일을 하지 않았다. 심지어 저자에 가서 상행위도 하지 않았다. 이와 같이 무노동 사회는, 존재하지 않는 사회 즉 가상사회가 아니라, 역사적으로 제도적으로 존재했다. 4) 미래의 무노동 사회
과거의 특권적 무노동 계급을 제도적 산물이라고 한다면, 앞으로의 무노동 사회는 기술의 산물이 될 것이다.
인간의 두뇌가 지금보다 얼마나 더 진화할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컴퓨터는 앞으로도 분명히 크게 진화한다. 무어의 법칙에 의하면, 컴퓨터 칩 하나에 들어가는 트랜지스터의 수는 1년6개월만에 2배씩 증가한다. 따라서 지금부터 20년 후쯤이면 인간의 두뇌를 능가하는 컴퓨터가 나오게 된다. 컴퓨터의 생산성이 크게 향상될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일단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이것이 미래 사회에 어떤, 그리고 얼마나 영향을 미칠지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무노동 사회」(work free society)라고 명명할 새로운 시대를 상상해보자. 그 시대의 부자들은 거대하고도 완전 자동화된 공장을, 그리고 완전 자동화된 서비스 배송센터를 소유한 사람들일 것이다. 그때의 중산층 사람들은 임종할 때, 자녀들에게 소나 말, 또는 토지 대신에 로봇을 유산으로 물려줄 것이다.
제조업에서 의료분야에 이르기까지, 이 세상의 제품과 서비스는 대부분 컴퓨터가 달린 기계 즉 로봇에 의하여 생산될 것이며, 그 기계들은 사람들이 소유하는 주된 재산이다. 그 시대 사람들은 일을 하지 않을 것이다. 필요한 기계마저도 기계가 만들 것이다. 지금도 일본의 화낙(FANUC)사에서는 로봇이 로봇을 만들고 있다. 5) 무노동 윤리와 무노동 환경
이런 엉터리 같은 시나리오가 실현되려면 최소한 두 가지 요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하나는 사람들이 무노동 윤리(work free ethic)를 수용해야만 할 것이다. 다른 하나는 정보시장과 거대한 기계 공장이 극적으로 발전해야만 한다. 전자는 그리 어렵지 않을 듯하다. 우리들은 언제나 일을 적게 하고많은 것을 가지려 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다시 한번 더 생각하면, 우리는 다양한 시대의 귀족 사회처럼 일을 할 필요가 없는 극히 일부의 사회계층은 보아왔으나, 국경을 초월한 무노동 환경(work free environment)을 아직껏 겪어보지는 못했다. 사람들은 늘 일을 해야 할 의무를 지니고 있었고, 나중에는 노동 그 자체를 권리로 간주했다. 그리고 일을 더 많이 하여, 더 많은 돈, 더 많은 만족, 더 큰 명예를 얻고자 하는 소망은 부자나 가난한 자나 할 것 없이 모두에게 강한 추진력이 되어 왔다. 그러므로 우리는 비록 무노동 사회가 기술적으로는 가능하게 되더라도 그것을 받아들일 것인가에 대해서는 생각이 엇갈린다. 후자 또한 쉬운 일이 아니다.
따라서 앞으로도 무노동 사회에 대한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다. 그러나 우리가 무노동 사회를 하나의 이상적인 상태로 둔다면, 부분적으로 자동화가 이뤄진 사회적 변화에 대해 약간의 힌트를 얻을 수 있다. 만일 사람들이 무노동 사회를 추구하기로 선택한다면, 그것은 그들이 원하는 여가를 즐기기 위해서 선택할 것이다. 사람들이 여가시간을 보내는 방법은 대체로 두 가지이다. 하나는 그들 자신을 위해서인데, 공부하는 것 자체가 좋아서 공부하든지, 더 좋은 건강을 위해 운동을 하든지, 더 큰 개인적 만족을 위해 정서적 영양분을 공급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사람들은 각종 미디어가 제공하는 것을 보면서 무위도식하든지, 환각제를 복용하든지, 혹은 불행에 찌들어 자아 파괴적 행위를 할 지도 모른다. 우리들은 더 큰 자아도취와 정신적 퇴폐의 증가를 경계해야 한다.
마치 산업혁명이 육체 노동을 덜어주면서 육체적 퇴폐가 발생한 것처럼, 정보기술과 정보시장이 우리들의 두뇌 활동을 덜어주면서 그런 재해는 발생할 것이 확실하다. 의심할 바 없이, 건강한 육체를 유지하기 위해 육체적 운동을 하듯이, 우리의 두뇌가 건강하고 긴장을 유지하도록 우리들은 의식적으로 정신적인 운동을 해야만 한다. 즉 끊임없이 배워야 한다는 말이다.
6) 무노동 사회의 두 가지 삶 - 자본주의적 삶과 사회주의적 삶
무노동 사회가 극단적으로 유리하다는 입장에서 미래의 경제 체제를 본다면, 약간의 혼동이 있을 수 있다. 모든 사람들이 수입을 창출하는 기계 혹은 다른 종류의 자본, 자산을 보유하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은 자본가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본주의에 호감을 가지며 그들 자신을 자본가로 간주할 것이다.
그 반면에, 모든 여가시간이 그들 자신의 수중에 있으므로, 사람들은 대규모로 다른 사람들을 돕는 경향을 보일 것이다. 그로 인하여 그들은 훌륭한 사회주의자가 될 것이다. 우리들이 그런 상반되는 성향을 무엇이라고 부르던 관계없이 무노동 사회에 대한 극단적인 시각을 철회할 때, 우리들은 이러한 이타주의적 성향이 정보시장이라는 한층 더 현실적인 세계에서도 지속될 것이라 희망할 수 있을 것이다. 2. 위험사회와 위험의 분배 1) 시간과 공간을 넘어선 위험
기술의 발전 결과, 현대 사회는 위험사회가 된다는 현실 인식에 기초하여 벡이 주장하는 성찰적 근대화(reflexive modernization) 란 ‘풍요사회’를 향한 근대화의 과정이 ‘위험사회’로 귀착되는 과정을 되짚고 반전시키려는목표를 가지고 있다. 사회변화의 과정을 전근대성, 단순한 근대성, 성찰적 근대성으로 분류하면서 경제적 결핍을 극복하기 위해 그 동안 감내했던 누적된 생태의 성찰적 근대화가 필요하다고 벡은 주장한다.
벡에게 과학이나 산업의 발전은 한 묶음으로 엮인 위험들(risks)과 위해들(hazards)이며, 우리는 이전에 단 한번도 이와 같은 것에 직면해 본 적이 없다. 이러한 위난들(dangers)은, 더 이상 시간적인 제한을 갖지 않는다. 즉 그 영향은 후세에게도 미친다. 그 공간적 결과도 마찬가지로 제한되지 않는다. 즉 국경을 넘어선다. 그리고 아무도 ‘위험사회’의 위해들에 대해 책임질 수 없다. 나아가 이러한 위해들로 말미암아 생명이나 신체상의 해를 입은 사람들에 대한 보상은 바로 그 계산 가능성이 문제가 되면서 불가능해지고 있다. 따라서 사회가 실제로 진화하려면 근대화는 반드시 성찰적이어야만 한다고 벡은 주장한다.
산업사회와 위험사회는 벡에게 별개의 사회구성체(social formations)이다. 산업사회의 기축적인 원리는 재화(goods)의 분배이지만, 반면에 위험사회의 원리는 해악(bads) 또는 위난의 분배이다. 나아가 산업사회는 사회계급들로 구성되는 반면에 위험사회는 개인화한다. 하지만 위험사회는 아직, 그리고 동시에 산업사회라고 벡은 계속해서 주장하고 있다. 그 이유는 위험사회의 위험들을 만들어 내는 것이 과학과 함께 주로 산업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농장 노동자들이 제초제가 건강에 용납할 수 없는 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하자 영국 정부는 정부 산하기관인 ‘살충제 자문위원회’에게 이 문제의 조사를 맡겼다. 그들은 “제초제가 조금도 위험하지 않다”고 분명하게 결론지었다. 제초제가 정확한 조건하에서 생산되고(다이옥신은 생산과정의 진행중에 조금씩 변화된 상태로 생산될 수 있다), 정확한 조건하에서 사용되는 한, 과학 문헌에 따르면 아무런 위험도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정확한 사용조건이란, 한 농부대표가 지적했듯이, 실험실의 작업대 위에나 있는 것이었다. 2) 결핍사회
벡은 기술이 초래하는 ‘풍요사회’이전에 존재하는 결핍사회(a society of scarcity)의 분배의 문제들 및 갈등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인다. 근대화(modernization)는 노동과 조직의 기술주의적(technological)합리화의 격량을 의미하지만, 그 같은 격량을 넘어서서 근대화는 다음과 같이 훨씬 더 많은 것을 포함한다. 사회성격과 규범적 삶(biographies)의 변화, 생활양식과 사랑의 형식의 변화, 권력과 영향력 구조의 변화, 정치적 억압과 참여의 변화, 지식규범의 변화가 그것들이다. 명확한 물질적 필요, 즉 ‘결핍(scarcity)의 독재’가 오늘날 제3세계의 많은 지역에서 그러하듯이 사람들의 사고와 행위를 지배하는 한, 사회적으로 생산된 부와 함께 그와 연관된 갈등의 분배가 전면에 떠오르게 된다.
서구 복지국가들에서는 지금 이중의 과정이 진행중이다. 한편에서 물질적 생존과 굶주림으로 위협받는 제3세계와 비교했을 때, ‘일상의 빵’을 위한 투쟁은 기본문제로서의 긴박성을 잃어 버렸다. 많은 사람들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굶주림이 아니라 ‘비만’이다.
콜롬부스처럼 신세기와 신대륙을 발견하기 시작한 사람은 누구라도 확실히 ‘위험’(risk)을 감수했다. 그러나 이것은 개인적인(personal) 위험이지, 핵분열이나 방사성 폐기물의 축적처럼 전 인류를 대상으로 하는 위험과 같은 지구적 위난(danger)이 아니다. 산업화 초기 시대에 ‘위험’이라는 낱말은 용맹과 모험을 뜻했지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의 자기파멸에 대한 위협을 뜻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화학적-생물적-기술적 용어로만 수행되는 환경논의는 부주의하게도 인간을 단지 유기적 물질로만 보게 될 위험이 있다. 3) 위험의 분배
부(富)처럼 위험은 분배의 대상이며, 양자는 지위 즉 각각 위험지위와 계급지위를 구성한다. 하지만 양자는 각각 아주 다른 재화와 연관되어 있으며, 그 분배에 관한 논쟁도 아주 다르다. 사회적 부의 경우에는 소비재, 수입, 교육기회, 재산 등이 희소성을 지닌 욕구품목으로 취급된다. 반대로 위험은 근대화에 따른 부수적인 문제로 많을수록 바람직스럽지 않은 것이다. 위험은 제거되거나 부정되고 재해석되어야 한다. 획득의 긍정적 논리는 회피, 부정, 재해석, 처분의 부정적 논리와 대비된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기를 바라는가? 무엇이 보존되어야 하는 인류의 인간적 질이며, 자연의 자연적 질인가? 이런 의미에서 널리 퍼져 있는 ‘파국’에 관한 이야기는 이런 발전을 원하지 않음을 보여 주는 객관화된 날카롭고 급진적인 표현이다.
하나의 공식으로 요약하면 이렇게 표현할 수 있다. 즉 빈곤은 위계적 이지만 스모그는 민주적이다. 근대화 위험의 확장에 따라, 즉 자연, 건강, 영양 등의 위험의 확장에 따라 사회적 차이와 한계는 상대화된다. 대단히 상이한 결과들이 이로부터 계속해서 도출된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위험은 그 범위 내부에서 그리고 그로부터 영향을 받는 사람들 사이에서 평등화 효과를 보여 준다.
나는 배고프다! 다른 한편 위험사회에서 작동하는 운동은 이런 식으로 표현될 수 있다. 나는 두렵다! 불안(anxiety)의 공동성이 필요의 공동성의 자리를 차지한다. 위험사회의 유형은 이런 점에서 불안에서 비롯된 유대가 생겨나고 정치적 힘이 되는 사회적 시대를 보여 준다.
위험이 다중화하면서, 무오류성을 가장함으로써 배울 수 있는 능력을 박탈하려는 압력이 커진다. 그런데 가장 자명한 것, 즉 인간의 실패를 용인하는 것은 재난을 유발하는 것과 같은 것이므로 어떻게 해서든지 피해야만 한다. 이런 식으로 위험의 다중화와 무오류성에의 복속은 서로 한패가 되어 위협의 정도와 직접적인 상관관계가 있는 위험의 최소화를 위한 압력을 약화시킨다. 4) 실업에 기초한 위험사회의 미래
실업 상승의 원인은 더 이상 경제 위기의 순환이 아니라 기술적 발전을 주로 한 자본주의의 성공에 있는 것이다.24) 만약 우리가 국민국가적인 고루함을 적어도 가설적으로나마 철폐한다면, 노동과 부의 탈국가적 분배에 대한 세 가지 시나리오를 암시받을 수 있을 것으로, 벡은 주장한다.
첫째, 지구적 인구 이동이 추진된다. 세계적 규모의 불평등이 확대되면서 인구는 희소하지만 부유한 북쪽 국가들과 인구는 풍부하지만 가난한 남쪽 국가들의 구별이 두드러진다. 그러다 보면 과잉 인구 지역으로부터 유혹적인 생활 수준을 갖춘 인구 희소 지역으로의 새로운 민족 이동이 발생할 것이다.
둘째, 노동의 이민이 증가한다. 이동하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일자리이다. 빈민과 무직자가 사는 곳인 세계의 인구 과잉 지역으로 일거리들이 수출된다. 여기에는 그 일거리에 상응하는 직업 훈련의 제공이 결합된다. 셋째, 빈국과 부국 사이에 초국가적 일자리 분담이 추진된다. 그 어떤 이민도 없이 국경성과 대륙을 넘어 노동과 부를 분배할 수 있는 새로운 방식들이 생겨난다. 장기적으로는 정보기술적 생산 양식 덕분에 ‘거리’가 없어질 수 있게 됨으로써 노동과 부의 탈국가적 분배가 실현되며, 이에 별다른 자질이 필요 없는 일자리들은 부국에서 빈국으로 수출된다. 이와 동시에 한층 높은 자질을 요구하는 직장들은 인구가 희소하지만 고도의 자질을 갖춘 국가들에 정착한다.
사실 국민국가(nation state) 내에서 옮겨 다니는 것은 이동성이라 불리면서 대단히 바람직한 것으로 여겨졌다. 특히 노동시장에서 지역간 불균형이 존재할 때 이동성은 대단한 환영을 받았다. 그것은 일자리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가는 ‘유연한 노동자’의 희망사항에 속하기도 한다.
이와 반대로 국민국가들 사이의 이동성은 이동성이 아니라 이민으로 간주되는데, 일반적으로 탐탁지 않게 여겨지면서 엄청난 제한을 받게 마련이다. 따라서 국민국가들의 국경선 막대를 사이에 놓고 바람직한 이동성은 바람직하지 못한 이민으로 그 형태가 바뀐다. 국민국가 내부에서는 환영받을 일을 한 인간들이 이제는 범죄인 취급을 받는 것이다. 그들은 경제 난민, 망명자, 심지어는 (국가적 공간 안에서라면 노동청이 그 업무를 맡았을)밀입국자 조직단에 가담한 불법 입국자가 된다. 보편주의적인 여러 가치와 권리를 믿는 시민이 어떻게 해서 초국가적 공간에서 이동성의 적이 되어 국가적 공간에서 그 이동성을 지속적으로 고발할 수 있단 말인가? <표 2> 노동의 미래에 관한 시나리오들
자료: Ulrich Beck, Schoene neue Arbeitswelt, Suhrkamp Verlag, Frankfurt am Main. 1999, p.78 Ⅷ. 결론 1. 요약 최초 노동은 기아를 해결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채집수렵사회에서부터 시작한 인류가 지혜가 발달하여 토지를 경작하고, 정착생활을 한다. 그러나 토지와 결합한 노동이 의식주 해결에 충분하지 않자, 인간은 피로를 줄이고, 또한 생산성 향상을 위해 기계를 발명하고 또 시간연구와 작업연구를 통해 작업조직과 생산방법을 개선하였다. 이 무렵부터 인간의 노동은 채집수렵사회 그리고 농경사회의 그것과는 달리, 노동은 생계유지와는 무관해지게 되었다. 소위 임노동과 임금 노동자가 등장한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기계를 소유한 자본가가 등장한다.
임금 노동자는 곧 집단을 이루고 계급을 형성하고는 자본가 계급과 대립한다. 이 대립에 두 가지의 다른 방향이 형성된다. 하나는 노동자 계급을 발판으로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려는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라는 프로젝트가 추진되었고, 다른 하나는 보다 많은 임금소득의 획득과 일자리 확보를 위한 순수한 노동의 문제가 길을 달리 했다.
사회주의 프로젝트는 과학적 관리에 기초한 노동생산성 혁명의 결과, 1950년 대 이후 극복되었다. 그러나 순수 노동운동은 계속되는 듯 했다. 하지만, 배당 등 이자소득에 의존하는 노인인구 등의 증가와 주주중심경영에 대한 압력, 그리고 기술의 발전은 생산성 향상과 일자리의 증가는 반비례하게 되었다.
생산성 향상을 위한 기술의 향상과 작업방법의 개선이, 즉 지식과 지식이 결합한 지식혁명의 단계에 이르자, 그것은 인간의 육체적 피로를 없애는 단계를 지나 일자리 자체를 제거하는 단계에 이른 것이다. 게다가 기술의 발달은 다른 한편으로 사회를 위험사회, 즉 위험을 세계화하고 또 민주화하는 문제를 야기했다. 결론적으로, 사회주의 몰락과 더불어 ‘역사의 종말’이 찾아 왔고, 지식혁명 결과 ‘노동의 종말’과 더불어 ‘무노동 사회’에로 진전하고 있는 한편, 기술의 발달은 인류사회를 ‘위험사회’라 만들고 있는 것이다. 앞으로의 사회는 위험사회 문제를 해결하고 새로운 무노동 사회에 적합한 윤리를 형성하는 과제를 안게 된다. 그런 과제를 해결하는 것이 소위 지식근로자의 사명이다. 2. 미래의 과제 대량적인 공식 고용이 부재한 사회에 있어서, 수많은 사람들의 기회와 책임을 다시 정의하는 것이 21세기의 가장 중요한 사회적 이슈가 될 것이다. 사람들은 장차 경제가 호전될 것이라는 속삭임에 귀를 기울이고 있지만, 전 지구상의 노동자들은 일자리 없는 경제의 호전이 어떤 것일까에 대해서 당혹해하고 있다. 다국적 기업들은 매일매일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추어가고 있고, 수익이 계속 증가하고 있다고 발표한다. 그러나 동시에 기업들은 대량의 해고를 단행하고 있다.
20세기 자본주의를 발전시킨 것은 자유주의가 아니라, 대공황과 파시즘의 악몽 그리고 공산주의의 약진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그러나 복지 국가로 표상되는 황금기가 쇠퇴하면서 노동 운동도 같이 퇴조하였다. 연대와 집단 행동에 대한 확신, 공산주의의 붕괴, 케인즈 학파의 부정 등이 21세기의 문턱에 선 노동 운동의 발전을 위협하고 있다.
그러나 노동 운동의 미래에 대한 암울한 전망에도 불구하고, 실패한 것은 사회주의의 프로젝트일 뿐 노동자의 처지와 삶의 질을 개선한다는 의미에서의 노동 운동은 의연히 존속해 왔고 또 존속할 것이라는 근본적 낙관주의가 홉스봄의 기조를 이루었다. 임금 노동자가 존재하는 한 그리고 서로 모순되는 이해 관계를 지닌 사회 집단이 존재하는 한, 또 사회적 재화를 인간적 필요 충족을 위해 분배할 수 있는 유일한 기관으로서 국가가 존재하는 한, 노동 운동은 계속되리라는 것이다. 물론 자본주의가 노동 집약적 산업으로부터 기술 집약적 산업으로 이동함으로써 노동 운동의 기반이 좁아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다음 세기의 노동 운동은 수사를 넘어서 진정한 의미에서의 국제주의적 운동으로 발전함으로써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라고 예견한다.
위험은 인간의 행동과 태만의 반영이며, 고도로 발전된 생산력의 표현이다. 이것은 위난의 원천이 더 이상 무지가 아니라 지식에 의해, 그리고 자연에 대한 불충분한 지배가 아니라 산업시대에 확립된 규범과 객관적 제약의 체계에 있음을 의미한다.
21세기의 어느 무렵, 사회가 무노동 사회이든 혹은 위험사회이든 간에 다음의 몇가지 질문이 대답되어야 할 것이다.
첫째, 자본은 지구적이고 노동은 지방적인가? 둘째, 완전고용사회가 완전히 물러간 지금, 민주주의가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셋째, 지식과 기술은 궁극적으로 위험을 제거할 수 있는가? 넷째, 미래의 경쟁은 더욱 개방적일 것인가 아니면 폐쇄적일 것인가? 다섯째, 어디로 가고 있는가? 역사가들은 우리에게 문명은 과대하게 발달했을 때, 특히 세계적인 규모로 과도하게 군사화되었을 때 쇠퇴한다고 주장한다. 고대 로마에서 제2차 세계대전의 독일과 일본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역사의 교훈은 풍부하다. 참고문헌 이인식, (1995), 『미래는 어떻게 존재하는가』, 민음사. 이재규, (1998), 『빅뱅경영』, 21세기북스. ______, (1998), “세계화․정보화시대 예상되는 조직구조의 변화가 조직행동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추론적 연구”, 인사조직연구, 인사조직학회. ______, (2000), “ 자본주의 이후 사회의 인적자원관리의 과제 - 노동유연성, 재고용 가능성, 기업지배구조를 중심으로-, 서울대학교 경영대학 노사관계 연구, 노사관계 연구도 제일금융연구원, (1997), 『전자화폐』, 한국경제신문사. 최종락, (1994), 『미래의 세계』, 한국경제신문사. 현원복, (1997), 『미리 가본 21세기』, 겸지사. Arimoto, Tateo, (1996), 『과학기술의 흥망』, Japan Information Centre of Science and Technology. Attali, Jacques, (1990), 『21세기의 승자』, 유재천 역, 다섯수레. Bauman, Zygmunt., " Rise and Paul of Labor" 임지현 편, 노동의 세기, 삼인, 1999, pp. 40~59 Beck, Ulrich, (1986), Risikogesellschaft, Suhrkamp Verlag, Frankfurt am Mai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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