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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립 鄭汝立
역모(逆謀)인가? 음모(陰謀)인가? 어떤 이는 역모라고 하고, 어떤 이는 음모라고도 한다. 그러나 아직까지 그 실체는 미로(迷路)의 실타래도 아닌 깊은 미궁(迷宮) 속에 갇혀 신음하고 있다. 조선의 역사상 전무후무하게 1,000여명의 목숨을 앗아간 " 기축옥사(己丑獄事) "의 주인공 ..정여립이다. 정여립... 지금으로부터 400여 년 전인 1589년 그는 역모죄로 죽임을 당하였다. 자살(自殺)했다는 말도 있고 살해 당한 뒤 자살로 위장(僞裝)했다는 말도 있지만 어쨌든 그는 조선 최대(最大)의 역적(逆賊)이 되어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그의 기록은 모두 사라졌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그 하나로 끝난 것은 아니었다.
옥사(獄事)가 끝나고 호남(湖南)은 ' 반역의 땅 '으로 지목되었다. 그리고 연좌제로 인하여 호남의 사람들은 몰락하였다. 호남의 인물은 모두 정여립과 눈길만 스쳤다는 고변(告變)만 있어도 모두 죽임을 당하였다. 눈에 먼지가 들어가 눈물을 흘린 것을 두고 정여립의 죽음을 슬퍼한다는 죄목을 씌워 죽이기도 하였다. 단순히 이웃에 산다는 이유만으로 집단적으로 죽임을 당하였다. 조선은 피의 광풍(狂風)이 몰아쳤고, 죄없는 수 많은 선비와 백성들이 죽임을 당하였다. 정여립은 누구인가?
정여립 鄭汝立
정여립(鄭汝立 .. 1546~1589) .. 본관은 동래(東萊)이고, 자는 인백(仁伯)이다. 전라북도 전주에서 첨정(僉正)을 지낸 정희증(鄭希曾)의 아들로 태어났다. 통솔력이 있고 명석하였으며, 경사(經史)와 제자백가에 통달하였다고 한다. 1579년(선조 3)에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뒤 1583년(선조 21) 예조좌랑을 거쳐 이듬해 홍문관 수찬(修撰)이 되었다.
처음에는 이율곡과 성혼(成渾)의 문하에 있으면서 西人에 속하였으나, 이율곡이 죽은 뒤 당시 집권세력인 東人에 가담하여 이율곡을 비롯하여 西人의 영수인 박순(朴淳), 성혼을 비판하였다. 이로 인하여 宣祖의 미움을 받자 관직에서 물러났으나, 인망이 높아 낙향한 뒤에도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후 전북 진안군의 죽도(竹島)에 서실(書室)을 세워 활쏘기 모임(射會)을 여는 등 사람들을 규합하여 대동계(大同契)를 조직하고 무력을 길렀다. 600명이 넘었다고 한다. 이때 죽도와의 인연으로 죽도선생(竹島先生)이라고도 불렀다.
정여립은 이율곡(李栗谷)의 천거로 벼슬길에 오른다. 그는 율곡이 죽자 西人(기호학파)에서 東人(영남학파 ..사림세력)으로 옮기고 율곡을 비난하였다. "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못한다 "는 그 시절에 서인(西人)들은 "정여립이 스승을 배반하였다"는 상소를 올렸고, 그때부터 정여립 사건은 시작되는 것이다. 宣祖로부터 스승을 배반한 사람의 표본인 '형서(刑恕) '라는 말을 듣고 정여립은 벼슬을 그만두고 진안 죽도(竹島)로 내려와 대동계를 조직히였다.
西人에서 東人으로
정여립이 자신을 천거한 이율곡의 西人을 뒤로 하고, 당시 집권세력이었던 東人의 편으로 반부(反附)한 이유는 분명하지 않다.그가 이조정랑(吏曺正郞)의 물망에 올랐을 때 이율곡이 반대한 탓이라는 설도 있으나, 오히려 직정적이고 적극적인 성격이 東人의 영수 이발(李潑)과 잘 어울린 탓이라는 의견도 있는 것이다.
그는 스승인 이율곡을 비판한 문제로 西人의 미움이 집중되었고, 宣祖의 눈 밖에 나서 東人세력의 역천(力薦)에도 불구하고 중앙에서 관직을 얻지 못하고 고향으로 돌아 갈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東人 사이에서는 여전히 인망과 영향력이 있어 감사나 수령이 다투어 그의 집을 찾았고, 특히 전라도 일대에서는 그의 명망이 높았다.
이율곡, 정여립 그리고 宣祖
7~8세 때 집에서 기르던 매를 잔혹하게 죽였다는니, 이를 그의 부친에게 고자질한 여종(女從) 역시 돌로 찍어 죽였다느니 하는 기록이 있지만, " 역모자 "를 인격 파탄자로 몰던 것이 전제(專制) 왕조시대의 상용수법 중 하나이었으므로 그다지 신뢰가는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다만 아버지 정희증(鄭希曾)이 익산 현감으로 재임 때 아전들이 15세 무렵의 정여립을 현감보다 더 두려워 했다고 하니까, 소시적부터 결기가 드셌던 것은 사실인 듯하다. 어떻든 그는 통솔력이 있고 두뇌가 명석하여 경사와 제자백가에 통달하였다고 한다.
이율곡의 추천
정여립은 1567년(명종 22)에 소과(小科)에 급제하여 진사(進士)가 되었고, 1570년(선조 3) 24세 전후의 나이에 대과(大科. 식년문과)에 급제하였다. 문과 급제 후 그는 이율곡 그리고 우계 성혼(牛溪 成渾)의 문하에 들어가 스승의 각별한 총애를 받았다. 당시 이율곡의 문하에는 전국의 인재들이 모여 들었는데, 정여립은 특히 박람강기(搏攬强記)한 데다 능변이어서 조야에 명성을 떨쳤다. 이때 이율곡은 호남(湖南) 출신의 학자 중 정여립이 최고(最高)라고 칭찬하였다.
그가 고위직에 오른 것은 대과 급제 13년 후인 1583년(선조 16)에 예조좌랑(정6품)이 되고부터이다. 이듬해에는 이율곡의 천거로 홍문관 수찬(修撰)으로 발탁되었다. 홍문관(弘文館)이라면 경연(經筵 ..임금 앞에서 경서를 강론하던 자리)을 주관하는 핵심적인 정권기관이며, 수찬(修撰)은 비록 정6품이지만 경연에 참가하는 일원으로서 하루에도 한두 번은 왕(王)과 마주 앉아 국정(國政)을 논하는 위치이었다.
정여립의 배신 .. 西人에서 東人으로
그는 " 바람을 일으키는 (風生) " 강한 입심으로 서인(西人)의 대변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런데 이율곡(李栗谷)이 죽자 정여립은 곧 정치적 입장을 바꾸어 동인(東人)의 이발(李潑)과 친밀해지면서 선조 18년(1585)의 경연에서 서인(西人)의 영수이었던 박순(朴淳), 이율곡, 우계 성혼(牛溪 成渾)을 비방하였다.
정여립은 이율곡의 생전에 " 공자(孔子)는 익은 감이고, 이율곡(李栗谷)은 아직 덜 익은 감이다"라고 하였다. 즉 " 공자 = 이율곡 "은 시간 문제라는 이야기인데, 그런 그가 왜 돌아섰을까? 이율곡 또한 정여립을 호남에서 학문하는 사람 중 최고(最高)라고 정여립을 평가하였다.
그것은 정여립을 이조전랑(吏曺銓郞)으로 발탁하자는 물망이 있었는데, 왠일인지 죽기 전의 이율곡이 한사코 막은 탓으로 전해진다. 이율곡은 겉과는 달리 정여립의 과격성(過激性)을 견제한 듯하다. 이조전랑이라면 인사(人事)를 담당하는 요직이다. 선조 시절, 처음으로 동인과 서인의 붕당사태가 빚어진 것도 이조정랑을 차지하기 위한 김효원(東人)측과 심의겸(西人)측 사이의 암투 때문이었다.
어떻든 정여립의 변신(變身)에 서인(西人)세력의 반발은 심하였다. 西人 소속의 의주목사 서익(徐益)이 상소하여 정여립의 배신을 공격하였다. 정여립은 이율곡 생전에 이미 절교(絶交)하였다고 맞받아쳤다. 이에 이율곡의 조카 이경진은 율곡이 죽기 직전, 정여립이 율곡에게 보낸 편지를 왕에게 올려, 정여립의 반복무쌍함을 폭로하였다. 그 편지에는 정여립이 동인(東人)을 맹렬하게 비난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宣祖 ..汝立今之刑恕
이에 이율곡을 높이 평가하고 있던 선조(宣祖)는 "정여립은 오늘의 형서 (汝立今之刑恕也)"라고 정여립을 질타하였다. 형서(刑恕)라면 중국 송(宋)나라의 사람으로 원래 정호(程顥)의 제자이었으나, 사마광(司馬光)의 문객이 되었다가 사마광을 배신하는 등 파벌을 전전하다가 나중에는 권력자 채경(蔡京)의 심복이 되었던 인간이다. 이러한 연유로 형서(刑恕)는 스승을 배신한 인간의 치욕적인 상징으로 여겨지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정여립은 선조(宣祖)로부터 최악의 인간적 모멸을 받은 셈이 되었다. 분노한 정여립은 두 눈을 부릅뜨고 선조를 노려 보았다고 한다. 임금에게 미움을 받은 신하가 조정에서 배겨나가기는 어려운 법이다. 정여립이 벼슬을 버리고 낙향(落鄕)하는 연유이다.
1587년(선조 25)에는 전주부윤 남언경(南彦經)의 요청으로 대동계를 이끌고 전라도 손죽도(損竹島)에 침입한 왜구(倭寇)를 물리쳤다. 이후 황해도 안악(安岳)의 변승복, 해주(海州)의 지함두(池函斗), 운봉의 승려 의연(義衍) 등의 세력을 끌어모아 대동계의 조직을 전국적으로 확대하였다
정여립의 과격성
及壯, 身幹壯偉,容色靑赤,年才七八,與群兒嬉,刀戮鵲雛,希曾詞聞誰所爲,有其家女僕稚兒,指證汝立,其夜,立乘兒父母出隣家,持刀潛入,刺殺其兒,流血滿席.其父母見之號哭,其知其由,一里娶觀,汝立徐出謂之曰,"此兒告我,故吾殺之". 辭氣泰然,聞者大驚,或以爲,"惡將軍出矣"
정여립이 장성하게 되자 체구가 장중하고 얼굴빛이 청적색(靑赤色)이었다. 나이 겨우 7~8세에 여러 아이들과 장난하고 놀면서 칼로 까치새끼를 부리에서 발톱까지 토막내었다. 누가 한 짓이냐고 희증(希曾 ..정여립의 아버지)이 꾸짖으며 묻자 그의 집 여종(女從)이 여립(汝立)을 가리키며 말하였는데, 그날 밤 여립이 그 아이의 부모가 이웃집에 방아 찧으러 나간 틈을 타서 칼을 가지고 몰래 들어가 그 아이를 찔러 죽여 피가 자리에 홍건히 흘렀다.
그 부모가 그것을 보고 울부짖으며 몸부림쳤으나 그 이유를 알지못하였다. 온 마을 사람들이 모여 구경하고 있는데, 여립(汝立)이 서서히 나와 말하기를.. " 이 아이가 나를 일러 바쳤으므로 내가 죽였다 "고 하는데, 말씨가 태연하였다.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크게 놀랐고, 어떤 사람은 악(惡)한 장군이 태어났다고 하였다.
정여립의 학문적 역량
연려실기술(燃黎室記述)의 기록을 인용하면.. " 정여립은 배우고 들은 것이 많아서 성현(聖賢)의 글을 읽지 않은 것이 없고, 이율곡과 성혼(成渾)의 문하에 출입하였다"라고 되어 있다. "기축기사"에는 "정여립은 언변이 출중하여 한번 입을 열면 자리를 함께 한 사람들이 그의 말이 옳고 그름을 떠나 감탄하지 않는 자가 없었고, 비록 그 그릇됨을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감히 그와 더불어 쟁변하지 못하였다"라고 적혀 있다. 또한 정치적 입장이 달랐던 서인(西人) 측도 " 넓게 보고 잘 기억하여 경전을 관철하였으며, 논의는 격렬하여 거센 바람이 이는 듯 하였다"고 한다.
정여립의 기록
아무 것도 알 수 없다. 기록은 모두 사라졌다. 역모자(逆謨者)가 된 정여립의 저술(著述)은 전부 불길 속으로 들어갔다. "기축옥사"에 관한 기록 역시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재로 변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도 정여립의 이름이 남은 것은 의문이다. 역모와 음모 사이에서 이미 400여 년 전에 죽은 사람, 정여립은 신음한다. 그리고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칼맑스가 그랬다. " 역사가 하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 "고.. 사실이 그렇다. 싸우는 것은 역사가 아니다. 그 모든 것을 움직이고, 조정하고, 금 가게 하는 것은 살아있는 인간(人間)이다. 그리하여 정여립은 외로운 사람이다. 무려 1,000여 명의 사상자를 남긴 기축옥사와 관련하여 사면복권(赦免復權)이 이루어지지 않은 이는 정여립 한 사람 뿐이다. 동래 정씨 문중은 살아있는 사람이라도 살려내기 위하여 그의 이름을 영원히 족보(族譜)에서 지웠다. 목숨은 냉정하였다.
그를 철저하게 지우고 역사(歷史)를 기록한 사람은 누구일까. 그에 관한 의문은 여기서 시작된다. "선조수정실록 (宣祖修正實錄)"의 기록대로 정여립은 반역자(反逆者)일 수 있다. 반대로 권력을 차지하려 한 어떤 세력의 음모(陰謀) 속에 그가 갇혀혔을 수도 있다.
호남, 반역의 땅
그가 역모의 죄로 죽은 때는 1589년이다. 세상에는 아무리 세월이 흔적이 쌓여도 풀어내야 할 궁극의 질문이 있다. 정여립의 모반사건이 그러하다. 그 한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다. 기축옥사가 끝나고 호남은 역적의 땅이 되었으며, 반역향(叛逆鄕)으로 지목되었다. 연좌제에 걸려 호남사람들은 몰락하였다.
죽도선생 竹島先生
정여립(鄭汝立)의 꿈은 죽도(竹島)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거기서 끝을 보았다. 그는 죽도에서 죽었다. 남은 몇 개의 기록은 그의 죽음을 자살(自殺)로 단정하고 있다. 그는 왜 그곳까지 가서 스스로의 목숨을 끊는 것으로 바람과 같은 생(生)을 마감하였을까? 기축옥사는 그렇게 진안(鎭安)의 죽도(竹島)로부터 시작하여 조선팔도(朝鮮八道)에 피의 바람을 몰아쳤다.
정여립이 중앙정치를 떠난 것은 1585년이었다. 그는 고향으로 낙향하여 김제 금산과 죽도에 머물며 꿈을 키웠다. 세상은 어지러웠다. 매년 흉년이 들고, 백성들은 무거운 세금을 감당하지 못하고 화적(火賊)으로 변했다. 변란(變卵)의 조짐도 곳곳에서 일어났다. 그때는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꼭 3년 전이었다.
정여립 .. 죽도의 꿈
정여립은 선조 18년(1585)에 벼슬을 버리고 낙향(落鄕)하였다. 그럼에도 동인(東人) 측에서는 정여립을 제일류(第一流)라며 기회가 있을 때마다 천거하였으나, 선조(宣祖)는 끝내 정여립을 기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동인(東人) 사이에서는 여전히 인망(人望)과 영향력이 있어 감사나 수령이 다투어 그의 집을 찾았고, 특히 전라도 일대에서는 그의 명망이 대단하였다.정여립은 많은 선비들과 접촉하면서 진안(鎭安)의 죽도(竹島)에 서실(書室)을 차려놓고 강론하였는데, 이들이 수가 많아지자 전주, 태인(泰仁), 금주(金州 ..지금의 금구) 등의 사람들을 규합하여 대동계(大同契)를 조직하였다.
"선조수정실록"에 의하면 정여립이 역모를 꾸밀 속셈에서 조직한 무력집단이 대동계라는 것이다. 정여립은 임진왜란이 있을 것을 짐작하고 그 때를 틈타 난(亂)을 일으키려고 전주, 금주,태인등 인읍(隣邑)의 무사 및 공사(公私) 천예(賤隸) 중에서 강건한 자들로 대동계를 만들어 매월 15일 한곳에 모여 향사회(鄕射會)를 열고 술과 밥을 마련하여 즐기면서 " 활쏘기란 육예(六藝)의 하나로서 남자가 마땅히 배워야 할 일 "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래서 문인(門人)들은 모두 사례(射禮)를 익히는 것으로 일 삼았으며. " 우리나라의 선유(先儒)들은 단지 예학을 알 뿐인데, 궁술(弓術)을 가르치는 것은 오직 우리 스승뿐"이라고 하였다.
정해왜변 丁亥倭變
1587년 정해왜변이 있자, 여러 읍에서는 병력을 동원하려고 하였는데, 전주부윤 남언경(南彦經)은 실무에 어두워 정여립에게 협력을 요청하였다. 이에 정여립은 곧 이를 사양치 않고 호령을 한 번 내리니 즉시 군병(軍兵)들이 모였고 이들을 편성, 배치하는 일도 즉각 마련되었다. 그 군병들은 모두 대동계원이었던 것이다.
정해왜변이라 함은 선조 20년(1587)에 왜선(倭船) 18척이 손죽도(損竹島 ..지금의 여천) 등 전라도 연안에 침범한 비상사태를 말한다. 왜적이 물러가자 정여립은 군사를 해산하였는데 그때 정여립은 장령들에게 말하기를 " 장차 변고가 있으면 너희들은 각자 부하들을 거느리고 일시에 내회(來會)하라 "고 말하고, 그 군부 (軍簿) 한 부를 갖고 돌아갔다.
이때 정여립의 대동계가 어떤 수준의 전공(戰功)을 세웠는지에 관한 기록은 자세히 전해지지 않지만, 그 신속한 출병(出兵)과 동원 규모로 그의 명성을 크게 떨쳤던 것은 사실이다. 동시에 그의 정적(政敵)들은 정여립의 주변을 미행, 정찰하였고 끝내는 대동계의 조직이 역모(逆謀)의 증거라고 주장하게 된다. 대동계가 역모를 위한 조직인지, 외적의 침략에 대비한 의병(義兵) 조직인지에 관하여는 오늘날에도 논란거리이다. 다만 대동계가 반체제(反體制) 세력으로 의심을 받을만한 구실과 정황은 충분하였다. 조선시대의 계(契)는 경향 각지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존재하였지만, 대동계는 유별났다.
대동계 大同契
정여립은 사람을 모았다. 차별(差別)없는 체제와 평등(平等) 개혁(改革)을실천하기 위한 기초 조직도 만들었다. 그것이 대동계(大同契)이다. 그는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직업 차별을 따지지 않았다. 반상(班常)의 구별도 두지 않았다.
대동계에는 누구나 원하면 발을 들일 수 있었다. 그리고 대동계원은 매 달 보름에 회합하였다. 활을 쏘았고, 말을 탔으며, 칼과 창 쓰는 법을 익혔다. 1587년 전라도 손죽도(損竹島)에 왜구(倭寇)가 침입하였다. 남원부윤 남언경(南彦經)은 정여립에게 협력을 요청하였고, 그는 대동계 무사들을 동원하여 출동, 왜선 18척을 격퇴하였다.
양반, 상인, 노비, 승려와 떠돌이 무사가 대동(大同)이란 깃발 아래 뭉쳤는데, 그 조직의 범위가 군, 현, 도의 경계를 넘어선데다 무술연마에 치중하였다. 계원의 숫자도 600여 명에 이른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같은 기간조직은 일단유사 시 무력의 핵심으로 전환될 수 있는 것...
대동계의 핵심 구성원들
정여립의 휘하에 모인 인물들의 면면을 보면 매우 개성적이었다. "연려실기술(燃黎室記術)"에 따르면 대동계의 핵심 구성원은 지함두, 의연, 길상봉, 길삼산, 박연령 등이었다. 지함두(池函斗)는 평소 도인(道人)의 옷차림으로 다녔는데, 시문에도 밝아 처사(處士)를 자처하였다. 도인의 티를 냈다는 점에서 그는 유방(劉邦)의 사부(師傅)인 장량(張良)과 비슷하였다.
승려이었던 의연(義衍)은 전형적인 선전,선동가이었다. 그는 전국을 돌며 " 내가 중국 요동에 있을 때 동쪽 나라에 왕기(王氣)가 있음을 바라보고 한양에 이르니 왕기는 전라도에 있고, 전라도에 오니 그 기운이 전주 남문 밖에 있다 "는 말을 퍼뜨렸다. 유방 막하의 최고 유세가이었던 역이기(易理氣)의 흉내를 낸 셈이었다.
노비 출신인 길삼봉(吉三峯)은 정여립의 "번쾌"이었다. 번쾌는 중국 한나라 시절 원래는 개고기를 파는 미천한 신분이었지만 유방(劉邦 ..한나라 고조)의 거병(擧兵) 이후에는 그를 따라 무장으로서 용맹을 떨쳤으며, 유방이 항우(項羽)에게 모살될 위기에서 극적으로 유방을 구해내어 후일 유방이 즉위한 뒤 높은 벼슬을 지냈다. 길삼봉(吉三峯)은 정여립의 수하가 되기 전에 화적질을 했는데, 용맹이 뛰어나 관군이 잡으려 하면 번번히 탈주하여 그 이름이 나라 안에 퍼졌다고 한다.
정여립의 17세 아들 옥남(玉男)은 "모반사건" 발각 후 잡혀와 친국을 받으면서 공술하기를 "길삼봉은 힘이 세서 반석을 손으로 쳐셔 깨트렸다"고 말하였다. 이 때 문사랑(問事郞 ..심문 관리)이던 천하의 문사 이항복(李恒福)이 옥남의 공술을 한문으로 빨리 받아 쓰지 못하자 옥남은 "어찌하여 여반대석 권고고파(如盤大石 拳叩叩破)"라고 쓰지 못하는가"고 핀잔을 주었을 만큼 영명하였다. 그러나 이 기록은 모호하다. 정여립이 죽을 때 먼저 변숭복과 아들 옥남을 죽인 후 스스로 자살하였다고 하는데...
정여립의 아들 옥남(玉男)
정여립이 반역할 마음이 생긴 것은 아들 옥남의 영준함과 특이한 신상(身像)을 믿는 까닭이었다고도 한다. 옥남은 눈동자가 두 개씩이고, 두 어께에 사마귀가 일원(日月)의 형상으로 박혀 있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초패왕 항우(項羽)와 한고조 유방(劉邦)의 신체적 특징을 갖추고 있었다는 얘기이다. 당시 옥남의 나이 17세이었다.
호남 사람의 에너지, 기질
지금부터 500여 년 전, 매월당 김시습(金時習.1435~1493)은 그의 저서 "매월당집, 탕유호남후지(매월당집, 탕유호남후지)"에서 호남 사람들의 기질을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지금 호남의 민속이 굳세고 사나워, 싸움에서 절대로 굴복하지 않고 반드시 보복할 생각을 하니, 이것은 백제의 유풍(遺風)이다"
이렇게 강인한 기질은 평소에 숨어 있다가 어떤 계기를 만나면 폭발적으로 분출하였다. 마치 한껏 오므라들었던 용수철이 갑자기 튀어 오르듯, 곧 한(恨)의 분출이었다. 그것은 때로는 구국의 저항으로, 때로는 혁명의 열기로, 또한 때로는 종교적이고 예술적인 열정으로 폭발하였다.
정여립의 모반 사건으로 기축옥사가 일어나던 해(1589), 허균(許筠. 1569~1618)은 갓 스무살의 청년이었다. 이후 그는 전라북도 서부지역을 자주 왕래하였는데, 정여립의 난과 임진왜란으로 피폐해진 이 지역의 분위기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는 여러 해 동안 호남을 출입하여 그 풍습에 밝다. 사람들을 이끌어 주는 큰 선생이없는데다, 사람들의 품성 또한 경박하여 자기가 옳다고 하며 남에게 굽히려 하지 않는다.게다가 입고 먹는 자원이 매우 넉넉하여 모두 목전의 일만 보고 먼 장래를 도모하지 않는다. 이 세가지가 학문을 하지 않는 빌미가 되었으니 탄식할 일이다 許筠의 성소부부고...
정여립과 "대동"의 꿈
고향으로 낙향한 정여립은 이 지역 민중들에게 잠재되어 있는 이런 저항의 에너지를 결집하여 새로운 세상을 열려고 하였던 인물이다. "연려실기술(燃黎室記述)"에 의하면, 정여립은 "천하는 공물(公物)이니 어찌 일정한 주인이 있겠는가"라고 하며, "전주, 금구, 태인 등 이웃고을의 여러 무사들과 공사(公私)의 노비 등 계급의 상하를 통하여 "대동계"를 조직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정여립이 사람들을 모아 단련했다는 집터가 모악산(母岳山) 서쪽 제비산(帝妃山)자락에 있다. 이곳은 전주(全州)에서도 한참 남쪽의 외곽으로, 금만평야가 펼쳐지는 초입에 자리하고 있다. 그가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는 금구와 태인은 모두 드넓은 징개맹개 들에 속한다. 정여립은 계급의 상하를 불문하고 이 지역의 평민 이하 하층민들(무사, 승려,노비 등)을 모아 대동계를 조직하였다. " 대동(大同) "이란 곧 큰 도가 행해져 천하가 공평해진다는 의미이니, 그가 민초들과 더물어 자유롭고 평등한 이상적 사회를 건설할 꿈을 꾸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다른 시각 .. 정여립의 "모반"의 꿈
당시 세간에는 " 목자(木子 .. 木子 = 李)는 망하고, 전읍(奠邑 = 鄭)은 흥한다"는 '정감록"류의 동요가 유행하고 있었다. 정여립은 그 구절을 옥판(玉板)에 새겨 승려 의연(義衍)으로 하여금 지리산 석굴 속에 숨겨 두도록 하였다.
그리고 그는 후에 산 구경을 갔다가 우연히 발견한 것처럼 위장하여 변숭복, 박연령 등으로 하여금 자신을 시대를 타고 난 인물로 여기게 만들었다. 십 수년 전부터, 천안 지방에서는 길삼봉(吉三峯)이라는 자가 화적질을 하고 있었는데, 용맹이 뛰어나 관군(官軍)이 아무리 잡으려 해도 잡을 수 없었다. 정여립은 지함두를 시켜 황해도 지방으로 가서 " 길삼봉, 길삼산 형제는 신병(神兵)을 거느리고 지리산에도 들어 가고, 계룡산에도 들어 간다" ..
" 정팔룡(鄭八龍) "이라는 신비롭고 용맹한 이가 곧 임금이 될 것인데, 머지 않아 군사를 일으킨다 "라는 소문을 퍼트리게 하였다. 팔룡(八龍)은 정여립의 어릴 적 이름이었다. 소문은 곧 황해도 지방에 널리 퍼져 " 호남, 전주지방에 성인(聖人)이 일어나서 만백성을 건져, 이로부터 나라가 태평하리라 "는 유언(流言)이 떠돌아 다니게 되었다.
정여립은 매월 15일에 모여 회의를 열고 무술은 연마한 뒤 동지들을 모으기 위하여 전국 가지를 답사하였다. 정여립은 선조 19년(1586)에 김제 군수 자리에 앉으려고 인맥을 움직인데다, 기축옥사가 일어난 선조 22년(1589)에는 황해도 도사직을 맡겠다는 운동을 하였다. 특히 황해도 도사직은 정적들로부터 "역모의 준비"라는 의심을 받았다. 즉 대동계의 세력을 황해도에까지 확대하여 서울을 남북에서 협공하려 했다는 전략이라는 것이다. 황해도라면 명종 시절 임꺽정의 난으로 민심이 흉흉했던 곳이었으므로 제2의 혁명기지가 될 만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祭天文
일부 학자는 대동계가 비밀결사도 아니고 매월 정기적으로 모이는 공개적인 모임이었다는 이유로 대동계는 강력한 무력집단도 아니었으며, 모반을 위해 조직된 것도 아니었다고 주장하며 정여립의 모반을 부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정여립을 둘러 싼 여러 행적들.. 특히 황해감사의 고변 직후 그의 집을 덮친 금부도사가 제천문(祭天文) 7장을 압수하였다.
제천문이라면 임금이 하늘에 제사를 올릴 때에만 짓는 글이다. 이로 미루어 보면 거사 일정 등 구체적인 시나리오는 없었다고 할지라도 역모를 위한 은밀한 준비만은 부인할 수가 없다. 그리하여 "정여립은 억울하다"고만 볼 것이 아니라 그의 혁명성과 공화주의 사상에 초점을 집중하는 재해석이 필요할 것이다.
역모설, 음모설의 정리
음모설을 주장하는 주요 근거는 다음과 같다.
첫째, 그의 도피는 안악의 부하 변숭복의 급보로 이루어지는데, 그는 수사의 손길이 곧 자기에게 미칠 것을 알면서도 집안에 각종 수신(受信)문서들을 방치하여 후일 이 문서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들을 연루자로 만들어 죽게 할 리가 없다는 것. 둘째, 급보를 받고 도망간다면 연고지가 아니라 지리산 같은 심산으로 방향을 잡았을것이며, 또 가족에게 행선지를 알려 추격의 손이 미치게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
셋째, 150년 후에 나온 "동소만록"같은야사에서는 그가 죽도에 가서 놀고 있을 때 선전관 등이 달려와서 박살하고 자결하였다고 보고하였다는 것이다. 이 기록은 기축옥사는 후유증이 컸던만큼 이설(異說)의 채택에 신중을 기하였을 것으로 보아 동인들 사이에서 구전되어 오는 설을 그대로 기록하였다고도 볼 수 있다.
넷째, 김장생(金長生)이엮은 " 송강행록(松江行錄)"에 의하면 고변이 있자, 다른 사람들은 그의 상경을 기다렸는데 이상하게도 송강 정철은 그의 도망을 미리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자진하여 옥사처리를 담당하였다는 것이다. 즉 정철이 미리 알았다는 것은 정철이 정여립의 유인과 암살을 지령한 음모의 최고 지휘자라는 것이다.
역모설의 주요 근거는 ..
첫째, 그가 남긴 글 중에 천하공물설(天下公物說)과 누구를 섬기던 임금이 아니겠는가라는 하사비군론(何事非君論)을 들고 있다. 하여튼 정여립이 모반을 꾀하였든, 아니든 그는 혁명성을 지닌 사상가이었다. 둘째, 그의 집에서 압수된 제천문(祭天文)에는 宣曺의 失덕을 열거하여 조선왕조의 운수가 다 하였음을 논하고, 천명의 조속한 이행을 기도한 흉악한 문구가 있었다고 한다. 아마 그는 선조 밑에서는 아무 것도 이룰수 없다고 판단하고, 혁명을 은밀하게 생각하였는지도 모른다.
대동이란 ?
대동(大同)이란 본래 중국의 고대 사상가들이 추구한 이상사회로, 차별이 없고 자유로운 평등사회를 일컫는다. 대동사상은 "莊子" "列者" 등의 道家 서적과 "서경"과 "예기" 등 유가(儒家)서적에 공통되게 등장하는 말인데, 특히 "예기(禮記)"의 예운(禮運)에 보이는 내용이 대표적이다. 그 전문은...
大道之行也, 天下爲公, 選賢與能, 講信, 修睦, 故人不獨親己親, 不獨子其子, 使老有所終, 壯有所用, 務寡孤獨廢疾者皆有所養, 男有分, 女有歸, 貨惡其奔於地也不必藏於己, 力惡其不出於身也, 不必爲己, 是故謨廢而不與, 盜竊亂賊而不作, 故外戶而不廢, 是謂大同.
큰 道가 행해지면 천하가 공평해져서 현명하고 유능한 사람이 지도자로 나서고, 信義가 존중되며 친목이 두터워진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자기 부모만을 부모로 알지 않고 (남의 부모도 내 부모처럼 공경하며), 자기 자식만을 자식으로 여기지 않는다. (남의 자식도 내 자식처럼아낀다).
늙은이가 편안하게 여생을 마치게 되고, 젊은이들은 마땅한 일거리가 있으며, 아이들은 잘 자라도록 보살핌을 받는다. 또한 홀아비와 과부, 의지할 곳 없고, 병에 걸린 사람들도 모두 보살핌을 받는다. 남자들은 모두 분수에 맞게 살고, 여자들은 모두 적당한 곳에 시집을 간다.
재물을 헛되이 버리는 것을 미워하지만, 또한 불필요하게 개인적으로 소유하지도 않는다. 애써 일하지 않는 것을 미워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자기만을 위하여 힘쓰지 않는다. 그러므로 권모술수가 일어나지 않고, 도둑이나 불량배가 생기지 않는다. 이때 집집마다 문을 두고도 닫는 일이 없으니, 이를 "대동 大同"이라고 한다.
정여립이 조직했다는 " 대동계(大同契) "는 이러한 대동사상을 토대로 하였다. " 천하가 공물( 天下가 公物) "이라는 그의 발언은 "천하가 공평하기(天下爲公)"를 희구하는 대동의 정신과 근본적으로 상통하고 있다. 차별과 억압이 일상화된 시대에 그것은 분명 반역의 조짐이었으나, 천대를 받는 민초들에게는 희망의 메시지이었다. 조선이 끝날 때까지 내내 흉악한 역적으로 지목된 정여립을 이 지역 사람들은 위대한 영웅으로 기억하고 있다.
기축옥사 己丑獄事
1589년(선조 22) 10월 2일.. 황해감사 한준(韓準)으로부터 조정으로 비밀 장계(壯啓)가 올라 왔다. 정여립이 모반을 꾀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이 고변(告變)은 정여립의 일당으로 황해도 안악(安岳)에 사는 조구(趙球)의 밀고를 받아, 안악군수 이축(李軸), 재령군수 박충간(朴忠侃), 신천군수 한응인(韓應寅)이 황해감사에게 보고함으로써 알려지게 되었다.
고변의 내용
이 고변은 정여립이 황해도와 전라도에서 군사를 일으켜 그 해 겨울 서울을 공격하여 신립(申笠)장군과 병조판서를 죽이는 한편, 임금의 교서(敎書)를 위조하여 지방관들을 죽이거나 파직시킴으로써 사회적 혼란을 야기시켜 모반을 성사하려 한다는 내용이었다.
고변에 따르면, 정여립은 임꺽정(林巨正)의 亂이 일어났던 황해도 안악에 내려와, 그 곳에서 교생 변숭복(邊崇福), 박연령(朴延齡), 지함두(池函斗)와 승려 의연(義衍), 도잠, 설청 등과 사귀면서 비밀리에 모반을 꾸미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이에 선조는 정여립의 생질인 예문관 검열 이진길(李震吉)만을 빼고 중신회의를 열었다. 이 때는 이산해(李山海)가 영의정, 정언신(鄭彦信)이 우의정을 맡고 있었고, 이발(李潑), 백유양(白惟讓) 등의 東人들이 득세하고 있었다. 우의정 정언신은 정여립을 변호하였다. 또 백유양의 아들 백진민(白震民)은 황해도 수령의 절반이 西人이고 또 이율곡의 제자들이 많은 곳이라 그들의 무고일지도 모르는 만큼, 정여립이 상경하여 입장을 스스로 밝힐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하였다.
그는 또 재령군수 박충간의 제보에 대하여는 오히려 근거없이 발설한 것이라며, 박충간을 참형에 처해야 한다고까지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西人들은 의기양양할 수 있었지만, 東人들은 위축되기 시작하였다. 정여립이 東人이었기 때문이다.
자살 또는 타살
사건은 급속도로 진행되면서 선전관과 금부도사가 전라도와 황해도에 급파되었고, 정여립은 진안의 죽도로 피신하였다. 진안현감 민인백에 의하면, 정여립은 진안 죽도에서 부하인 변숭복을 죽인 후 자결하였다. 서인측은 자살로, 동인측은 타살로 규정한 정여립의 죽음이 자살로 보고되면서 정여립의 역모는 기정사실화되어 간다.
변숭복(邊崇福)은 황해도 안악에서 조구(趙球)가 고변한 사실을 알고 안악에서 사흘 반나절만에 전라도 금구로 달려가 정여립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정여립은 그날 밤으로 변숭복 그리고 아들 옥남(玉男) 등과 함께 진안현 죽도로 달아났다.
금부도사 유금이 도착하였을 때는 이미 달아난 뒤였다. 이에 진안현감 민인백(민인백)이 관군을 이끌고 정여립을 추격하였다. 이들에 둘러싸인 정여립은 먼저 변숭복과 아들 옥남을 칼로 친 다음에 칼자루를 땅에 꽂아놓고 스스로 목을 찔러 자살하였다.
정여립의 자살로 정국은 돌변하였다. 그의 말을 들어보고 결정하자던 東人들이 설 땅을 잃고 말았던 것이다. 그가 자살하였다면, 혐의가 있는 것이 분명하였다. 그렇지 않다면 왜 자살하였을까? 이에 대하여는 정여립이 누군가의 꾐에 빠졌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만일 꾐에 빠지지 않았다면, 그가 관련 문서들을 없애 버리지 않을 리가 없다는 이유때문이다. 그리고 꾐에 빠진 것이라면, 유인한 자는 변숭복일 가능성이 크다.
또한 정여립은 자살한 것이 아니고 他殺 당한 뒤 자살로 위장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도 가능하다. 변숭복을 먼저 죽인것도 그에게 유인 당하였다는 사실을 알고 처치한 것으로 해석할 수 도 있다. 칼을 거꾸로 꽂아두고 자살한다는 것은 사실 무리가 많은 설정이다.
하여튼 정여립의 난과 관련하여 납득하기 어려운 의문이 많이 있다. 그가 도망을 가면서 하필이면 누구나 다 아는 자신의 연고지인 죽도를 택하였고, 더욱이 그 곳으로 간다고 행방을 알린 일부터가 이상하다. 진안현감 민인백이 그를 죽도로 추적한 것도 그래서 가능하였다. 무엇보다도 이상한 것은 정여립이 그곳으로 도망갔을 것이라고 송강 정철(松江 鄭澈 ..서인)이 미리 말했다는 점이다.실제로 정여립의 난으로 촉발된 기축옥사는 정여립 본인을 문초하여 밝혀진 것이 아니고, 반대 세력의 장계(壯啓) 하나로 촉발되었으며, 그리고 그의 집에서 나온 문서들을 근거로 東人들을 일망타진한 사건이었다.
변숭복(邊崇福)과 송익필(宋翼弼)
송익필(宋翼弼)은 요즈음에도 기축옥사를 조작한 혐의를 받고 있는 인물이다. 그는 살아있는 제갈공명이라는 말을 듣던, 西人들의 대표적 모사(謨士)이었다. 그는 김장생, 김집의 스승이요, 이율곡과 성혼의 친구이었던, 즉 당시 집권세력인 東人과 대립관계에 있던 西人의 중추 인물이었다.
당시 송익필은 당시 정권을 쥐고 있던 동인의 영수, 영의정 이발(李潑)에 대하여 노비문제로 개인적인 원한이 있었다. 한편 송익필은 정여립이 자신의 친구이었던 이율곡의 제자이었기 때문에 정여립의 능력을 잘 알고 있었다. 송익필의 동생 송한필(宋翰弼)은 변숭복과 박연령 등을 불러 정여립에 대하여 " 전주에 聖人이 나타났으니, 곧 정여립이다. 그는 길삼봉과 서로 친하게 왕래하였는데, 길삼봉은 하루에 3백리를 걸으며 지혜와 용맹이 바랄 데가 없으니 역시 神人이다. 너희들이 만일 가서 볼 것 같으면 벼슬이 스스로 올 것이다"라는 말을 하였다.
송익필이 꾸미고, 송강 정철이 실행한
교생이었던 변숭복과 박연령 등이 그 말을 듣고 정여립을 만나니, 정여립도 그들을 후하게 대접하였으며, 곧 정여립의 측근 심복이 되었던 것이다. 그런 만큼 변숭복 등은 근본적으로 송익필 즉 서인의 사람이었다. 조구(趙球)가 정여립의 반역을 고발한 것도 송익필,송한필 형제의 사주에 의한 것일 가능성이 크다. 송익필은 동인을 공격하는 서인의 상소문을 대신 써 주고, 송강 정철을조종하여 정여립사건을 주도면밀하게 추진하였다. 그래서 세간에에서는 기축옥사를 두고 송익필이 꾸미고, 정철이 실행한 사건이라고 하는 것이다.
송익필은 토정 이지함, 이율곡, 성혼과 더불어 시대의 스승으로 꼽혔으며 조선 중기 8대 문장가에 포함될 정도로 학문이 깊었으나, 아버지 송사련이 기묘사화 때 사건을 날조하여 좌의정 안당 가문에 멸문지화를 안긴 과거사 때문에 동인의 핵심 제거 대상이 되었다.
마침내 동인 이발 등이 나서 송익필의 조모가 원래 안씨 가문의 노비이었던 사실을 사실을 들춰내어 송씨 일가를 모두 노비신분으로 환천(還賤)시켜 버렸다. 가문 몰락의 恨을 품고 보복의 기회만을 노리고 있던 송익필은 낙향한 뒤 공화주의 사상에 가까운 반왕조적 대동사상에 빠져 이상사회를 꿈꾸던 정여립의 대동계를 반격의 고리로 활용하였던 것이다.
기축옥사 己丑獄事
10월8일에 영의정 유전(柳琠), 좌의정 이산해(李山海), 우의정 정언신(鄭彦愼), 판의금부사 김귀영(金貴營) 등이 재판관(委官)이 되어 죄인들을 심문하였다. 고향에 물러나 있던 송강 정철은 송익필, 성혼(成渾)등의 권유를 받고 입궐하여 차자(箚子)를 올렸다.
송익필 기획, 정철 연출
정철은 입궐하자 마자 차자(箚子)를 올려, 우의정 정언신은 정여립의 一家이니 재판관으로 적당하지 않으므로 마땅히 교체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결국 정철이 위관(委官)이되어 심문을 담당하게 되었다. 송익필은 정철의 집에 머물면서 동인세력의 타도를 지휘하였다.
정여립과 공모하였다는 죄로 이기, 황언윤, 방의신, 신여성 등이 처형되었다. 정여립의 조카 이진길(李震吉)은 "지금 임금의 어두움이 날로 심하다"라고 쓴 편지가 발견되어 매를 맞아 죽었다. 그 와중에 11월 2일, 정언신, 정언지, 이발, 이길, 백유양 등 동인들을 처단해야 한다고 정철의 사주를 받은 생원 양천회(梁千會)의 상소가 올라왔다.그리고 정여립의 조카 정집의 공초에서도 이들의 이름이 거론되었다.
정여립이 죽고 나서 많은 사람들이 기축옥사에 대한 이야기를 남겼다. 정여립이 죽고 150여년이 흐른 후 남하정은 "동소만록(棟巢漫錄)"에서 기축옥사는 송익필이 뒤에서 조종하고, 정철이 이를 성사시켰다..라고 기록하였다.
3년 동안 1,00여 명을 죽인 조선 최대의 비극
결국 정언신은 강계로, 이발(李潑)은 종성으로, 이길(李吉)은 희천으로, 백유양은 부령으로 귀양을 떠나야 했다. 그 후 12월12일에 교생 선홍복을 문초할 때 다시 이발, 이길, 이급(李汲), 백유양, 이진길, 유덕수의 이름이 나왔으므로, 이들은 다시 잡혀와서 곤장을 맞고 죽었다.
이 때 정철은 겉으로는 이발 등을 구하는 척 하였지만, 뒤로는 갖은 수법을 동원하여 이들을 옭아 넣으려고 혈안이 되었다. 그는 평소 미워하던 사람들을 모두 역당으로 몰아 처단하였다. 3년 동안 죽인 자만 해도 1천 명이 넘었다. 반면 정여립의 난을 고변한 박충간 등 22명은 평란공신(平亂功申)이 되어 관직을 올려 받았다. 이때가 1590년(선조 23) 2월이었다.
서애 유설룡은 임진왜란을 겪고 나서 지은 "운암잡록(雲巖雜錄)"에서 기축옥사의 전말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 처음에 임금이 그를 체포하러 가는 都事에게 밀교(密敎)를 내려, 여립의 집에 간직되어 있는 편지를 압수하여 대궐 내에 들이게 하였다. 그래서 무릇 여립과 평소에 친근하게 지내어 편지를 주고 받은 자는 다 연루(連累)를 면치 못하게 되어 士類가 죄를 얻게 된 자가 많았다. 옥사(獄事)는 덩굴처럼 뻗어나서 3년이 지나도 끝장이 나지않아 죽은 자가 몇 천 명이었다 "
동인의 영수인 이발, 정여립과 9촌간이었던 우의정 정언신, 정개청, 최영경을 미롯한 수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그 뿐만 아니라 서산대사 휴정(休靜)은 묘향산에서 서울까지 끌려와 산조 임금의 국문을 받은 뒤 죄가 밝혀지지 않아 살아났고, 사명당 유정(惟政)은 오대산에서 강릉부 관아로 끌려가 모진 고문을 받고 풀려났다. 만일 그들이 기축옥사로 희생되었다면 임진왜란 당시 숭병은 누가 일으켰을까 ???
그리고 대동계를 조직하였다는 이유만으로 금구현은 김제에 복속되었고, 조선왕조의 본향인 전주에 있던 동래 정씨들은 하나도 남기지 않고 전주에서 쫒겨났다. 그리고 3년 뒤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그로부터 몇 백년 동안 호남 인재의 등용(登龍)이 제한되었으며, 그러한 결과로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는 토양이 제공되었다.
송강 정철이 왜?
당시 정여립은 서인들에게 증오의 대상이었다. 정여립은 서인(西人) 이율곡의 추천으로 홍문관 수찬까지 올랐다. 이율곡(李栗谷)은 정여립을 " 호남에서 학문하는 사람 중에 정여립이 최고이다 "고 할 정도로 정여립을 높이 평가하였다. 그러나 율곡이 죽고 난 뒤 정여립은 동인이 되었고, 스승인 율곡을 배신하였다는 비판을 받았고 또한 선조(宣祖)도 정여립을 미워하였다. 이에 정여립은 벼슬을 그만 두고 고향으로 낙향하였다.
송강 정철 우리는 그의 이름에서 곧 관동별곡과 사미인곡 그리고 속미인곡 등작품을 떠올린다. 가사문학의 대가인 그의 작품 속에는 " 선정(善政)에의 포부"나 " 연군의 정 (戀君의 情)"을 노래하는 장면이 자주 나온다. 이러한 그의 작품들은 그에 대한 좋은 인상만을 주고 있다. 그러면 정철은 선정(善政)을 베푼 관리이었을까? 아니었던 것 같다. 그는 강원도 관찰사로 재직 시, 일 처리가 공정치 못하여 백성들로부터 자자한 원망을 들었던 것 같다. 강원도 해변가에 사는 어부들이 잘 모르는 물고기를 잡으면 " 정철아, 죽어라"하면서 몽둥이로 쳤다는 이야기가 전해내려 왔다는 내력을 보면 그렇다.
오늘 날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은 정철을 기축옥사를 주도한 장본인으로 여기고 있다. 그리고 기축옥사는 당시 수세에 몰린 서인측이 정여립을 옭아매고 그를 통하여 당시 실권세력인 동인들을 제거하기 의한 음모라고도 말한다. 호남지방을 중심으로 1000 명이 넘는 선비들을 죽인 사건이 기축옥사의 중심에는 정철이 있다.
기축옥사가 끝나고 동인은 몰락하고, 서인이 권력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고 권력의 단꿈은 예나 지금이나 그리 오래가지 못한다. 정철은 선조에게 전권을 위임받아 수 많은 정적들을죽였지만, 그의 말로는 비참하였다. 기축옥사의 중심 , 정철 역시 1591년 광해군을 세자로 옹립하려다, 신성군(新城君) 우(玗)를 사랑하는 선조의 노여움을사서 유배되었다.또한 그에 대한 평가도 좋지 못했다.
정철은 성질이 강퍅하고 시기심이 많아 질투를 일삼고, 사사로운 감정을 반드시 모함으로 보복을 하였고, 뱀과 전갈 같은 성질로 귀신과 불여우 같은 음모를 품었으니 독기가 모여서 태어난 것이며 오직 사람을 상하게 하고 해치는 것을 일삼았습니다
사헌부에서 정철의 관직을 삭탈하라며 宣祖에게 올린 내용이다. 하기야 宣祖도 나중에는 자신이 정철에게 속았음을 토로하며 "간악한 정철"이라고 하면서 " 정철을 말하면 입이 더러워질까 염려된다"며 입에 올리지 못하게 했다.
정여립의 재 해석
정여립은 결국 역모자로 고변을 당하게 되고, 그는 진안의 오지(奧地) 죽도(竹島)로 숨어 들었다가 관군(官軍)이 추격하자 자결(自決)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이에 대하여는 아직도 학계의 의견이 엇갈린채 의문의 여지를 남기고 있다.
그러나 이 사건은 피비린내 나는 기축옥사를 불렀고 이로 인하여 호남은 반역향으로 몰리고 만다. 그 후 400여 년,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분분하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정여립이 과연 역모를 꾀하였는지 ? 아니면 정적들에 의한 음모인지 ? 그가 자살하였는지, 아니면 타살 후 자살로 위장되었는지를 밝히려는 노력보다는, 이제는 진보적인 지식인으로서 그의 사상과 혁명성에 초점을 맞추어 그를 새롭게 조명해야 할 것이다.
최초의 공화주의 사상가
" 천하는 공물 "이라는 인민주권설(人民主權說)을 주장하고, "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주자학적 국시(國是)를 부정(否定)한 사상가(思想家)로 평가될 수도 있고, 이루지 못한 후백제 견훤(甄萱)의 꿈 그리고 금산사 중심의 미륵사상이 농축된 정씨왕조(鄭氏王祖)의 건설을 구상한 혁명가(革命家)로도 평가될 수 있다.
그러나 반역자로서의 억울한 누명을 벗겨주려는 노력보다는 그의 진보적 철학과 사상에 초점을 맞추어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의 정치 사상사에 있어서 주자학적(朱子學的) 절의(節義)와 충군(忠君)사상이 가지는 긍정적 요소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가지는 폐해 또한 적지 않았다.
왕권에 대한 도전을 금기시하였으며, 이기면 군주가 되지만, 지면 그 의지와 가치에 관계 없이 역적이 된다는 논리(成卽君主,敗卽逆賊)는 정치사상의 발전에 커다란 암초가 되었다. 따라서 그들의 꿈이 아무리 훌륭하였다 해도 아직도 묘청(妙淸)의 난, 만적(萬積)의 난, 이징옥(李澄玉)의 난, 홍경래(洪景來)의 난, 동학란(東學亂)으로 불리고 있으며, 역사에 묻혀진 정여립의 난도 또한 이러한 사례에 속한다.
실패한 올리버 크롬웰
의회민주주의가 가장 앞선 영국의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보다 50여 년 앞서 인민주권의 공화주의를 주장한 우리나라 최초의, 아니 세계 최초의 공화주의 사상가이며 선각자이었다는 평가는 과분한 것일까? 정여립의 이러한 사상이 의미를 갖는것은 당시 주자학적 세계관에 입각한 왕권, 충군, 절의와 세습신분을 최고의 가치로 삼던, 그리고 이에 대한 도전이 얼마나 엄혹한 징벌을 받았는가를 잘 알고 있던 시대에 전근대적 봉건질서를 부인하고, 그것도 누구의 암시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의 사고와 판단에 따라 새로운 정치사상을 수립하였다는 것에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그리하여 조선왕조의 실패한 크롬웰이었다는 평가가 가능하다.
호남은 과연 반역의 땅인가
영,호남의 망국적 지역 감정의 뿌리는 언제부터일까? 신라가 백제를 멸망시킨 때부터라고도 하고, 왕건(王建)이 고려에 끝까지 저항한 후백제를 증오하여 "훈요십조(訓要十條)"에서 호남사람의 등용을 막았다고도 한다. 그러나 1589년에 일어난 정여립의 역모사건 역시 호남사람들에게는 깊은 상처가 된 사건이었다.
이율곡과 정혼의 제자이며 같은 서인(西人)인 정여립은 문무를 겸비한 천재이었으나, 선조가 정여립에게 조정의 인사권을 쥔 막강한 자리인 이조전랑(吏曺銓郞)에 임명하려는 데 이율곡이 정여립은 본래 포악하고 성질이 급하다고 반대하였다. 정여립은 율곡에게 몹시 서운하여 西人에서 탈당하여 조금 더 진보적인 東人으로 적(籍)을 옮겼다.
정여립은 "정감록"에 있는 정씨가 나라를 세우리라는 예언을 굳게 믿었던 듯하다. 아들의 이름도 옥남(玉男)이라고 지었다. 玉에서 점을 하나 빼면 王이 아닌가. 이러한 류의 풍수지리설은 고려시절에도 이씨가 나라를 세운다고 하여 이자겸, 이의민 등이 설쳤고, 조선시대에는 정씨들이 들먹거려져 정씨는 왕비의 책봉에서 철저하게 제외되었다.
당시 조선왕실은 걷잡을 수 없는 당쟁과 부패에 찌들어 있었고, 백성들은 도탄과 수탈에서 자신들을 구원해 줄 미륵불의 출현을 기다렸다. 특히 논이 많아 타 지역보다 상대적으로 수탈이 더 심한 호남인들에게 미륵신앙은 더욱 절대적이었다. 정여립은 이러한 민중의 의도를 깊이 파악하고 이미 민심이 왕실을 떠났음을 알았다.
정여립의 모반 사건이 일단락되자, 선조는 이후로 호남인이 등용되지 못하도록 하였다. 조선은 계유정난(수양대군의 찬탈 사건) 때 이징옥(李澄玉)의 난으로 함경도 사람의 진출을 막았고, 明宗은 구월산의 의적 임꺽정(林巨正)으로 인하여 황해도를, 영조는 이인좌(李鱗佐)의 난으로 영남을 미워하였고, 순조는 홍경래(洪景來)의 난으로 평안도 사람의 진출을 막았다. 물론 그 이면에는 토지를 독점하려는 경기,충청지방 양반들의 음모가 있었다.
그러나 일부 학자는 호남차별론의 문제점을 지적하기도 한다. 즉 정여립의 모반 사건의 조사와 처벌 책임을 맡았던 위관(委官)에 ' 송강 정철(松江 鄭澈) '을 임명하였다는 사실을 근거로 든다. 정철은 비록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전주에서 가까운 담양 출신이라는 점이다. 정철은 위관을 맡으며 심지어는 함께 수학하였던 동문들마저 죽음으로 몰고 가 이 지역 사대부들의 저주를 받았다. 이 사건이 지역차별의 전제가 되려면 委官을 다른 지역 사람이 맡았어야 했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또 정여립 사건이 발생한 지역이 원래 기호학파의 서인(西人)지역이라는 것이다. 조선의 세력판도를 보면 東人은 영남학파가 중심이고, 西人은 기호학파가 중심이었다. 즉 집권당지역(湖西)에서 발생한 역모사건이 정여립사건이기 때문에 이로 인하여 호남 전체가 반역향(叛逆鄕)으로 낙인 찍히지는 않았다.
다만 나주(羅州)와 더불어 호남의 대읍(大邑)인 전주지역 연루자가 워낙 많아서 그 후손들의 출사가 제한되었으므로 호남이 지역 차별을 받은 것처럼 여겨진 것은 사실이다. 시대를 거슬러 오면서 지역갈등의 원인은 일반국민들과는무관하게 지속적으로 권력층 또는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왜곡된 정서로 자리잡아 오늘에 이른 것이다.
죽도와 천반산 .. 정여립의 흔적들
전북 진안군 죽도(竹島)는 육지 속의 섬이다. 소위 "물돌이 섬"이다. 강물이 사방을 에워싸고 흐르고 있다. 하늘에서 바라보면 " 강물에 떠있는 삿갓 "의 모습일 것이다. 동북쪽은 덕유산에서 흘러내리는 구량천이 휘돌아 감고, 서남쪽은 금강의 상류가 감싸 안고 있다. 죽도에는 산죽이 우우우 자란다. 겨울에도 흰 눈 사이로 푸른 댓잎이 청청하다. 구량천은 죽도를 지나자마자 금강 상류에 몸을 섞는다. 죽도가 곧 "두 물 머리"인 셈이다.
죽도 앞은 천반산(天盤山 .. 646m)이다. 천반산은 죽도를 향해 용머리를 내밀며 엎드려 있다. 소가 엎드려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돌고래가 콧등으로 막 공을 쳐 올리려는 순간 같기도 하다. 공은 바로 그 앞에 있는 죽도이다. 천반산 콧잔등은 구량천 백사장 하나 사이로 죽도에 닿을락 말락 하다. 킁킁 콧김을 내뿜으며 냄새를 맡고 있다.천반산 잔등은 평평하다. 사람이 살 만한 분지가 숨어 있다. " 하늘에서 떨어지는 복숭아를 받는 소반 " 같다고 하여 천반산(天盤山)이고, 천반낙도(天盤落桃)의 땅이라고도 불린다.
정여립은 낙향하여 죽도에 공부방(서실..書室)을 차렸다. 그리고 매달 보름날에 대동계원들이 모여 무술을 단련하고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 곳 전라도뿐만 아니라 저 멀리 황해도에서도 참가자가 많았다. 1587년에는 나라의 요청으로 대동계를 이끌고 남해안을 침범한 왜선 18척을 물리치기도 하였다.
정여립의 발자취들
죽도 앞 천반산에는 곳곳에 정여립의 흔적들이 남아 있다. 훈련 할 때마다 천반산 제일 높은 곳에 "대동..대동"이라는 깃발을 꽂았다는 깃대봉, 훈련지휘소인 한림대 터, 망을 본 망 바위, 정여립이 말을 타고 뛰어 넘었다는 30m거리의 두 뜀바위, 정여립의 연설대이었다는 장군바위, 부하들의 시험 무대인 시험 바위, 정여립이 바둑을 두었다는 말바위 등이 있다.
금강 쪽에는 정여립이 목욕할 때에 옷을 벗어 걸어 두었다는 의암바위도 있고, 수백 명의 밥을 지었다는 "돌솥"은 전설로만 남아 있다. 그리고 천반산에는 송판서굴과 할미굴도 있다. 송판서는 세종 때 예조판서를 지냈던 송보산(宋寶山)을 말하는데, 그는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에 항의하여 벼슬을 버리고 내려와 이곳에서 수양했다고 한다. 정여립은 관군(官軍)을 피하여 죽도(竹島)로 피신한 후 송판서굴에서 자결하였다.
전북 김제의 발자취
전북 김제 금산사(金山寺) 부근에는 정여립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전해 내려 온다. 금산사(金山寺)는 후천개벽을 외치는 미륵신앙의 중심지.. 정여립의 출생지는 "전주 남문 밖"으로만 되어 있어 정확한 위치는 분명치 않다. 하지만 그는 한동안 금산사 아래 구릿골(현재의 동곡마을)에 살면서 이곳에서 처음으로 대동계를 조직하였다.
정여립이 살던 집터 .. 제비산(帝妃山) 자락
그의 집터는 지금도 금평저수지 앞 제비산(帝妃山) 월명암 부근에 있다. 그가 죽은 후 조선시대를 통털어 제비산(帝妃山)에는 어떤 건물도 지을 수가 없었다. 역사 속에 기록된 정여립의 출생지는 전주 남문 밖으로만 알려져 있어서 여러 곳이 물망에 오르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동래정씨 문중의 족보에서 지워졌다가 다시 살아난 정여립이었기에 그의 무덤은 커녕 출생지조차 분명치 않은 것이다. 다만 한글학회에서 편찬한 "한국지명총람"에 그에 대한 기록을 참조할수 있을 뿐이다.
이곳 제비산 자락.. 이 터는 풍수지리상 명혈 중의 명혈인 제비산(帝妃山. 270m)자락으로 금평저수지를 굽어다 보고 있다. 멀리 동학혁명의 진원지이었던 고부의 두승산이 한폭의 수채화처럼 보이는 이곳에 벼슬에서 물러난 정여립이 집터를 잡은 이유는 본가인 전주와 처가인 봉남면 봉서동(鳳棲洞)과 가까웠기 때문일 것이다.
정여립이 제비산(帝妃山) 즉 임금의 아내라는 뜻을 지닌 명산에 거처를 잡았다는 것 자체, 주자학적 절의(節義)가 판치는 세상에 대한 도전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가 살았던 집터는 지금 밭으로 변해 있다. 그러나 그 옛적에 집터이었음직하게 그럴듯한 축대가 남아있고, 밭에는 조선 중기의 기와조각이 여기저기 널려 있다고 한다. 이를 근거로 이이화선생은 "기축옥사 이후 조저에서는 이곳 제비산 밑 정여립의 옛 집터와 전주 남문 밖 그가 태어났던 생가터의 땅을 파헤치고 숯불로 혈맥을 끊어 버렸다. 그 후 조선왕조가 망할 때까지 역모의 땅인 이곳에 건물이 들어선 일이 없으므로 문제의 기와조각은 정여립이 유적이라고 할 만 하다"라고 말하고 있다. 정여립이 타고 다니던 "龍馬의 두덤"이라는 곳도 있다. 구릿골 아래 김제시 금산면 쌍룡마을 앞 논 가운데 무덤이 바로 그것이다.
龍馬의 무덤
정여립은 상두산에서 6km쯤 떨어진 김제 황산으로 활을 쏘았는데, 용마가 더 빠르게 달려가 그 화살을 물어 왔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날 화살을 쏘았는데, 용마가 화살을 물어 오지 못하였다. 정여립은 화가 나서 곧바로 그 용마(龍馬)의 목을 베어 버렸다. 그러나 나중에 살펴보니 화살이 용마의 엉덩이에 꽂혀 있었다. 정여립은 크게 자책하여 그의 칼과 함께 용마를 그곳에 묻었다. 확인되지 않는 이야기이지만 이 지방에서는 정여립의 영향력이 그만큼 대단하였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