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와대에서 이명박 대통령과 환담중인 이지관 조계종 총무원장(좌측) | |
1. “경찰 수배를 피해 조계사 내 광우병 국민대책회의 수배농성단에 합류했던 이석행 민주노총 위원장이 9월24일 조계사에서 하반기 투쟁을 벌이겠다고 밝히면서 경내 수배자문제 처리를 놓고 조계사가 고민에 빠졌다.“(연합뉴스) 전 불교신문 주필 이 법철 스님은 중앙불교 신문에 발표한“한국불교 조직을 반정부 조직으로 운용할 것인가?”라는 글에서 다음과 갈이 말했다. “....작금의 한국불교계의 총본산인 조계종의 이지관총무원장이 벌이는 대정부 요구의 투쟁은 정교분리를 떠난 반정부투쟁으로 급속히 변하고 있다.
이총무원장은 정녕 불교계의 권익을 위해 투쟁하는 것인가?
수배자 해제를 위한 투쟁인가?
누구를 위한 투쟁인가?
필자는 조계종단에서 40년이 넘는 세월을 살아오는 승려의 한 사람으로 불교조직을 보호하기 위해 통탄과 위태를 언급치 않을 수 없다.” 2. 유명한 백은(白隱)선사(1685-1768)는 순결한 삶을 살았다.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다.
백은선사 집 근처에 사는 처녀가 임신을 한 사실이 어느 날 밝혀졌다.
처녀의 부모들은 엄청 화가 났다.
처음에 처녀는 애의 아버지가 누군지 입을 열지 않다가 한참을 뒤에 백은선사라고 말했다.
화가 난 부모들은 백은선사에게 가서 따졌다.
그러자 백은선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 그런가?" 마침내 애를 낳았다.
애는 백은선사에게 맡겨졌고 선사는 그 일로 소문이 아주 더럽게 났다.
그러나 선사는 그 사실에 아무 신경도 쓰지 않았다.
욕을 바가지로 먹으면서 선사는 젖동냥과 음식을 구걸해서 아기를 잘 키웠다.
아기에게 필요한 물건들은 이웃사람들에게 얻었다.
그러구러 일 년이 지났다.
처녀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처녀는 부모에게 이실직고했다.
아기의 진짜 아버지는 생선가게에서 일하는 젊은 청년이었다.
처녀와 부모들은 백은선사에게 달려가 모든 이야기를 다 고하고 용서를 빌며 아기를 돌려 달라고 간청했다.
그러자 백은 선사는 순순히 아기를 내어 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 그런가?" 3. 내가 보기에 지금 지관 스님께서는 백은선사 보다 더 곤경에 빠진 것 같다.
순수한 사람은 싸우지 않는 법이다.
순수한 사람은 싸우지 않기 때문에 물러 설 것도 없고 굴복할 것도 없다.
그런데 지금 지관 스님께서는 이번 전투의 야전사령관으로 최전선에 서 있는 형국이다.
그래서 피 튀기게 싸워서 이기거나 물러서거나 굴복하거나를 선택하지 않을 수 없다.
최근에 지관 스님께서 “순교” 운운 하셨는데, 내가 보기에 이번 일은 “순교”할 껀수가 전혀 되지 않는다.
지관 스님께서 순교 운운 하였을 때 그 소리를 들은 개나 소도 크게 웃었을 것이다.
그런데 참으로 염려스러운 것은 "지관스님 순교 발언"이 한국불교 역사에 두고두고 웃음거리로 기록되면 어쩌나 하는 점이다. 가령, 이름없는 사미나 비구 혹은 강원의 학승들이 이번 전투에 나섰다 해도 불교계의 최고 어른이신 지관 스님께서는 이번 전투에 앞장서서 용맹을 떨칠 것이 아니라 당신의 얼굴에서 풍기는 부처님의 “대자대비”를 보여주어야 했다.
어 청수 경찰청장이 사과하러 그 먼 해인사 까지 가서 스님께 사과하려고 해도 받아주지 않고, 그렇게 몰인정하게 푸대접 할 것이 아니라 불교계 최고 어른의 풍모로 대자대비를 보여주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랬더라면 양식 있는 수많은 불자들은 크게 환호했을 것이고, 기독교 사람들에게 “과연 불교는 자비로운 종교이구나” 하는 것을 멋지게 보여주어, 속 좁은 기독교인들과 광신도들을 엄청 숙연하게 했을 것이다. 내가 보기에 지관 스님께서는 이 멋진 찬스를 놓치는 바람에 양식 있는 수많은 불자의 마음을 안타깝게 했고, 자신이 일생동안 닦은 도량을 세상에 보여줄 수 있는 절호의 찬스까지 놓치고 만 것 같아 내가 다 안타깝다.
위대한 승리는 상대의 심장 칼을 꽂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자비”로 상대를 감화시켜 변형시키는 것이다.
몸에 문신하고 맥주병들고 고함지르고 설치는 놈은 고수가 아니라 건달 중에서도 최하수 똘마니이다.
아니 건달 똘마니도 못되고 동네 양아치 밖에 안 된다.
고수는 유치하게 문신 하지도 않고, 맥주병 깨고 큰소리치는 양아치 짓거리를 아주 창피하게 생각하고 절대로 그딴 멍청한 짓은 안 한다!
고수는 고수답게 놀아야 고수 대우를 받는 법이다. 어느 나라에 최고 검객을 가리는 대회가 열렸다.
각 지역 예선을 거친 초일류 검객들이 최종심에서 겨루게 되었다.
이날은 임금님도 참관하였다.
최종심에 3명의 검객이 남았다.
대련으로 승부를 가리면 2등과 3등은 죽어야 한다.
그러니 다른 방법으로 자웅을 가렸다.
행사집사가 병에서 파리를 날리면 칼을 뽑아 자르기로 했다.
첫 번째 검객이 등판했다.
집사가 파리를 날렸다.
검객은 쏜살같이 칼을 뽑아서 허공을 한 번 갈랐다.
파리가 두 동강이 났다.
관중이 그 신기에 열광했다.
두 번째 검객이 등판했다.
집사가 파리를 날렸다.
검객은 쏜살같이 칼을 뽑아서 허공을 두 번 갈랐다.
이번에는 파리가 네 동강이 났다.
관중들은 그 믿어지지 않는 신기를 보고 아까보다 더 열광했다.
당연히 두 번째 검객이 일등을 할 것이라 생각들 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검객이 등판했다. 집사가 파리를 날렸다.
검객은 쏜살같이 칼을 뽑아서 두 번 허공을 갈랐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너는 영원히 날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파리는 말짱하게 살아서 훨훨 날아갔다.
관중들은 큰소리로 웃으면서 그를 조롱했다.
그 순간, 임금님이 자리에서 일어나 기립박수를 보내며 말했다. "그대가 이 나라 최고의 검객이다." 관중들은 칼을 두 번이나 휘둘러서 파리를 한 동강도 내지 못한 세 번째 검객을 일등이라고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관중들에게 왕이 다음과 갈이 설명해 주었다. "내가 자세히 보았는데, 처음 칼날은 파리의 머리 앞을 잘랐고, 두 번째 칼날은 파리의 꼬 뒤를 잘랐다.
처음 자른 것은 전생(前生)의 고리를 자른 것이고, 두 번째 자른 것은 내생(來生)의 고리를 자른 것이다.
전생의 고리와 내생의 고리를 잘렸으니 그 파리는 윤회(輪回)의 질서에서 벗어났다.
그러니 그 파리는 영원히 태어날 수 없고 영원히 날 수도 없다." 이 검객이 진정한 고수이고 이를 대번에 알아 본 임금님도 진정한 고수이다.
이런 경지가 되어야 진정한 고수이다!
맥주병 깨고, 유리창 깨고, 이마에 붉은 띠 두르고, 벽돌 던지고 주접떠는 것은 하수 중에서도 최하수요.
떨거지 중에서도 최 하수 떨거지가 하는 야만(野蠻)이다! 4. 백은선사는 자신의 아이라고 인정하지도 않고 부정하지도 않았다.
“나는 책임 없다”라고 하지도 않았고 “내가 책임지겠다”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단지 “ 아, 그런가?”라고 말했다.
그런데 지관 스님께서는 이번 싸움의 야전사령관처럼 최전선에 서 있다.
지관 스님께서 최전선에 나설 것이 아니라 불교계 최고 어른답게 “싸움을 지켜보는 자”의 무심(無心)의 자리에서 벼락이쳐도 천기개벽을 해도 미동도 하지 않았어야 했다.
그랬더라면 불교계 체면도 세우고, 불자들 위상도 한 단계 높여주는 멋진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지관 스님은 그 기회마저 놓쳤다. 백은선사는 자신이 결백했지만 자신을 변명하거나 방어하지 않았다.
순수함의 특징은 굳이 안전을 추구하지 않는다.
어떤 것을 방어하고 안전하게 자신을 지키려고 한다는 것은 순수하지 않고 계산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판세를 엔간히만 읽을 줄 아는 사람이라면 진작부터 지관 스님의 계산 정도는 다 읽을 수 있었다.
지관 스님이 “순교” 운운하면서 최강수를 두면서 자신을 방어하려는 것은 내면에 두려움이 있기 때문이다.
자신을 방어하거나 아니라고 부정할 때 두려움이 있다.
두려움은 사람을 방어적으로 변하게 한다.
두려움이 없다면 굳이 방어적이 될 필요가 없다.
방귀 뀐 놈이 “이 무슨 고약한 냄샌가?”라고 먼저 말해야 외형상으로는 자신은 방귀를 안 뀐 놈처럼 보이는 법이다.
두려움은 스스로를 무장하게 한다는 사실은 심리학에서 밝혀낸지 이미 오래이다.
5. 지관스님께서 쓸 수 있는 마지막 카드가 있기는 있다.
잠시 비를 피해 내 집으로 들어온 나그네도 아니고, 범법자들이 조계사로 피신해 왔을 때 잠시 숨겨준 것까지는 사안의 특성상 그리 비난할 일은 못된다고 할 수도 있다.
너그럽게 말해서 그 동안 일은 이미 과거사이고, 앞으로 어떻게 하느냐가 더 중요한 과제이다.
비가 멎으면 나그네를 보내야 한다.
나그네가 아니라 귀빈이라도 내 집에 오래 있으면 집안 꼴이 말이 아니고 일상의 리듬이 깨어져 가족 전체가 엄청 불편해진다.
그러니 비가 멎으면 반드시 나그네를 보내야 한다!
그런데 나그네도 아닌 범법자를 조계사에 더 이상 피신하게 해서는 안 된다!
범법자를 숨겨주는 것은 선행도 아니고 자비도 아니다.
실정법 위배되는 중대한 범죄행위다! 한국불교계는 물론 지관 스님 개인이 더 이상 무서운 곤경에 빠지기 전에 범법자들을 당장 조계사에서 내보야 한다.
그것이 상식으로 보나 긴 안목으로 보아 범법자를 위한 일이고 조계사와 불교계를 위한 바른 선택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법철 스님은 위의 글에서 이 지관 총무원장이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고 있다"면서 다음과 같이 일갈했다. “이지관 총무원장은 한국사회에서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고 있다.
칠순(七旬)의 중반을 넘어선 그에게는 방하착(放下着)과 자비실천 뿐이어야 한다는 것이 중론이다.
그러나 그는 경악스럽게도 종교편향이라는 구호를 외치며, 위정자와 대정부투쟁에 나섰다.
끝이 보이지 않는 투쟁이다.
민주적 대선에서 압도적으로 승리한 이대통령을 종교편향이라는 구호로 대통령직에서 끌어내릴 수 있다고 확신하는 것일까?
도대체 대선은 왜 하나?
대선에 참여한 국민들은 무엇인가?
바보인가?
봉인가?
어쨌든 이총무원장은 9월10일 대구 동화사에서 열린 대구경북 범불교도대회 준비회의에서 마침내 ‘순교’를 거론했다.
그는 '위법망구'와 '순교정신'을 거론하며 호법 의지를 강도 높게 표현한 것이다.
저 월남패망 때처럼 소신공양(燒身供養)할 수 있는 승려가 나서기를 촉구하는 것일까?
자신을 낳아주고 길러준 부모말도 듣지 아니하고 입산출가한 승려들이다.
몇 명의 승려나 그의 순교론에 공감하여 실천할지 그것은 전망이 난망하다.” 한국불교계에서 조계종총무원장이라면 불교계의 최고 어른이고, 최고 고수이다.
지관 스님께서는 이제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다.
실기하여 자신도 만신창이가 되고 불교계도 만신창이가 되게 해서는 안 된다.
지관 스님 자신의 삶은 물론 불교계를 위해서 지혜로운 용단을 한시바삐 내려야 한다.
그 용단은 불자뿐 아니라 온 국민의 눈에 최고수의 용단으로 비춰져 박수갈채를 받는 그런 멋진 카드여야 한다.
만약 지관 스님께서 이 글을 보신다면 시비 걸지 말고 그 미남 얼굴로 자비 넘치게 웃으시면서 백은선사처럼 다음과 같이 말했으면 좋겠다. "아, 그런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