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여도]
양근군은 양평군의 양평읍, 강상면, 강하면, 양서면, 서종면, 옥천면과 광주군의 남종면, 가평군의 설악면에 해당한다. 읍치는 옥천면 옥천리 일대에 있었다. 1747년(영조 23)에 지도 오른쪽에 있는 葛山으로 읍치를 옮겼는데 지금의 양평읍 양근리이다.
지도는 동쪽을 위로 그렸다. 지도의 왼쪽 아래 蛇島에서 남한강과 북한강이 합류되는데 남한강은 오른쪽 위의 呂江으로부터 사도까지 실선으로만 표시되어 있다. 두 강이 만나는 곳에 있는 二水頭村은 팔당댐 안쪽에 있는 양수리이며, 옛 사람들은 ''두물머리''라고 불렀다. 지도에는정승을 비롯한 많은 벼슬아치들의 묘가 표시되어 있음이 재미있는데 모두 전형적인 풍수적 표현을 하고 있다.
남한강가에는 江漢亭을 비롯한 여러 개의 정자가 표시되어 있다. 읍치 위쪽으로는 咸公城이 표시되어 있는데 몽고 침입 때 고을 사람들이 들어가 피난했던 곳이라고 한다. 지도 왼쪽 위쪽의 米源縣倉이 있는 곳은 고려말 공민왕 때의 國師 普愚(1301-1382)가 머물렀던 米源莊이다. 보우 때문에 縣으로 승격되었으나 땅이 좁고, 사람이 적어 얼마 안되어 양근군에 속하게 되었다. 지금의 가평군 설악면이다. 기타 읍치에는 다른 지도에는 잘 표시되지 않았던 壇, 社壇, 發告壇 등이 보이고 있다.(이기봉)
[해동지도]
본래 고구려 陽根郡이었으며 현재의경기도 양평군 양평읍, 강상면, 강하면, 서종면, 양서면, 옥천면일대, 광주군 남종면, 가평군 설악면에 해당하며 양근군의 대부분은 砥平과 합하여져 현재는 양평군이 된 지역이다. 현재의 양평군 양평읍이 郡의 중심지에 해당한다. 북한강과 남한강이 합류되는 지점에 있으며 지도 왼쪽 아래의 二水頭村(양수면 양수리)은 두 물이 모이는 곳이라 하여 두물머리라 불린다.
大灘은 남한강으로 여주 앞을 흐르는 驪江이 이어진 것이다. 지도 왼쪽에서 북으로 연결되는 강은 북한강이 된다. 大路, 中路에 의해 加平, 砥平, 利川 등과 교류하였으며 양근은 서울과 平海를 연결하는 大路상에 위치하였다. 육로와 함께 수운이 통하는 길이라 迷源倉과 같은 창고가 있었다. 강가에 위치하였으므로 觀水亭, 洋洋亭 등 경치가 좋은 곳에 많은 정자가 있었으며 많은 寺刹, 庵子가 산재해 있었음을 지도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또한 농사에 필요한 堤堰이 표시되어 있다.
지도 위쪽의 咸公城(옥천면 용천리)은 고려 때 몽고 군사를 피하던 곳이다. 이 지역은 특히 많은 墓가 있다. 산줄기 표현방식에 있어 脈勢를 강조하였으며 穴이 되는 곳은 풍수 개념에서 나온 山圖와 유사한 방식으로 지도를 그리고 있다.(이현군)
[1872년 지방도]
양근군지도 楊根郡地圖,양근은 양평군 양평읍, 강상면, 강하면, 서종면, 옥천면과 광주군 남종면, 가평군 설악면에 해당한다. 읍치는 원래 지금의 옥천면에 있었으나, 1747년에 현 위치(葛山)로 옮겨갔다. 구읍 지역은 지도상에서도 古邑面이라고 쓰여져 있다. 신 읍내는 한강가에 있어 포구장터를 겸하고 있다. 주산은 멀리 龍門山에 구하고, 안산은 한강 넘어 白屛山이다. 용문산 밑에는 舍奈寺를 그리고 있다. 지도에는 향교 표시가 보이는데 이 양근향교는 오늘까지도 이전되지 않고 구읍에 자리잡고 있다. 도로는 빨간색으로 굵게 그려져 있다. 광주와 경계인 兩水頭(양수리)에서 지평 방면으로 가는 길이 三大路, 즉 대관령을 거쳐 강원도 강릉, 평해 방면으로 가는 關東大路이다. 지금의 6번 국도에 해당한다. 양수리에는 나루가 두 개 그려져 있지만 대동지지를 보면 상류 쪽의 龍津을 정식 경로로 하고 있다. 지도에는 주막촌(店幕) 표시가 기술되어 있다. 읍지도에 따라 주막 표시는 있거나 없거나 하여, 통일성이 결여된다. 도로와 함께 수로도 상세히 그리고 있다. 남한강, 북한강 상에 나타나는 여울들을 하나씩 묘사하고 있다. 지도에는 9개 면을 표시하고 있는데, 모든 면을 산줄기를 등지게 해서 그리고 있는 것이 인상적이다.
[여지도]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의 양근군 지도와 전체적인 구도와 내용이 거의 동일하다. 틀린 점이 있다면 오른쪽 중간 부분에 徐府院破墓와 權判書亭이 《광여도》에는 徐府院君破墓와 權判書峯으로 되어 있는 정도다. 전자는 본 지도가, 후자는 《광여도》가 틀린 것으로 보인다.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의 양근군 지도도 본 지도와 거의 동일한 구도와 내용을 담고 있어 상호 관련성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해동지도》에는 본 지도에 없는 도로가 있고, 산지와 하천에 대한 표현 방법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해동지도》, 《광여도》, 본 지도 모두 하천의 본류와 지류를 구분하기 어렵게 그려놓았다. 《광여도》에서는 오른쪽 위의 春川江에서 흘러와 아래쪽의 廣州界로 흐르는 북한강을 굵게 표시하여 본류와 지류의 구분을 시도하고 있다.
그러나 오른쪽 위의 呂江에서 흘러와 왼쪽 아래의 蛇島에서 북한강과 합류되는 남한강은 다른 하천과 구별할 수 없게 그려져 있다. 본 지도에서는 북한강 역시 다른 하천의 굵기와 차이를 보이고 있지 않아 본류와 지류의 구분이 더욱 어렵게 되어 있다.
주기의 지지 부분에는 총 8개의 면이 적혀 있지만 본 지도에는 단지 2개의 면만 표시되어 있다. 이것도 《해동지도》의 지도 위에 2개의 면 명칭만 적혀 있는 것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주기에 적혀 있는 본 지도의 지지 내용은 《광여도》와는 같으나 《해동지도》와는 다르다. (이기봉)
[지승]
양근군은 현재의 경기도 양평군 양평읍, 강상면, 강하면, 양서면, 서종면, 옥천면, 광주군의 남종면, 가평군의 설악면 등에 걸쳐 있었다. 지도 위의 읍치는 옥천면 옥천리 일대에 있었는데, 1747년(영조 23)에 현재의 양평읍 양근리인 지도 오른쪽의 葛山(칡미)으로 옮긴다.
왼쪽 위의 春川江이 현재의 북한강이며, 오른쪽의 驪江이 현재의 남한강으로 두 하천은 왼쪽 아래의 蛇島(현재의 두물머리인 양수리)에서 합류하여 서쪽으로 빠져나간다. 지도는 동쪽을 위로 향해 그렸는데, 읍치까지 이어지는 산줄기의 방향을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양근군 지도와 거의 동일하다.
그러나 일부 부분에서 다른 점이 나타나고 있어 필사 과정의 흐름을 알 수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아래쪽에 풍수적인 산줄기 모양을 하면서도 다른 곳과 달리 墓의 속자가 기록되지 않은 2개를 들 수 있다. 《해동지도》에는 모두 墓의 명칭이 기록된 반면에 뒤의 2개 지도에도 본 지도처럼 기록되어 있지 않다. 이를 통해 볼 때 본 지도와 뒤의 2개 지도가 기본적으로 《해동지도》 계통을 필사하면서 2개를 빠뜨렸고, 이렇게 빠뜨린 내용을 확인하지 못하고 계속 필사한 것으로 판단된다. 客舍가 있는 읍치 부근에 본 지도에는 《해동지도》와 마찬가지로 大院古寺垈란 글씨와 탑의 모양이 그려져 있는 반면에 뒤의 2개 지도에는 없다. 이를 통해 볼 때 본 지도나 그 계통이 뒤의 2개 지도보다는 《해동지도》 계통에 더 가까운 것으로 볼 수 있다.
《광여도》와 《여지도》 사이에도 약간의 차이가 나타나고 있다. 대표적인 곳으로는 읍치 왼쪽의 蹇止山 부근의 산줄기인데, 《해동지도》와 본 지도 및 《여지도》에는 산줄기가 표시되어 있지만 《광여도》에는 없다. 본 지도에는 경기도의 다른 고을과 달리 面이 왼쪽에 西從面과 西串面 2개밖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 이 점은 《해동지도》에도 동일하게 되어 있어 필사 과정에서 수정하지 못한 것으로 판단되며, 뒤의 2개 지도에도 동일하게 되어 있다. 《해동지도》의 주기에 面의 명칭과 거리만이 적혀 있음에 반해 본 지도와 뒤의 2개 지도에는 초경과 종경이 적혀 있어 다른 자료를 통해 보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다만 주기에는 보충할 수 있었지만 지도 위에 위치를 기록할 수 있을 정도의 자료는 보충하지 못한 것으로 볼 수 있다.(이기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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