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여 - 조용필
죽마고우 완규
내가 국민학교 다니던 때, 우리마을은
샘골을 중심으로 2~4킬로 떨어진 곳에 여러 마을이 있었다.
서리(상반, 중반 하반), 물레방아가 있던 상덕, 중덕,
노루실, 구숫말, 불당골, 장선생님 딸과 면장님 아들이 살던 삼베울,
사쳉이, 홍선생님 아들이 있는 덕성리, 저수지가 있는 적동,
그 안쪽 마을인 묵방, 굴암절(소풍가는 곳)이 있는 한덕골 등…
우리 마을의 이름은 천리(泉里) 또는 샘골이라 하였는데
농촌마을치곤 상당히 큰 마을로
150가구가 있었고 우리 성씨도 10가구 이상이 살고 있었다.
게다가 용천국민학교가 있어 가장 파워가 있었고
우리 마을도 암암리에
주막거리와 암무탱이(?)로 나누어서 세력이 형성되었다.
그 중에서도 우리집 옆에 살던 가장 친한 친구 박완규...
나는 키가 작고 싸움에는 흥미가 없었지만
그가 항상 나의 호위무사처럼 대변해 주었다.
그래서 나를 괴롭히거나 하는 아이들은 없었다.
그는 흥분했을 때는 약간 말을 더듬기도 했다.
눈 만 뜨면 만나고, 정월 대보름날 아침에 나의 더위를 사가며
꼴을 베러가서 꼴따먹기 놀이를 하면
"꼴(소 먹이는 풀)을 한 아름 베어놓고
낫을 던져 똑바로 낫이 땅에 꽂히면 이기는 게임"
거의 내가 이기는 경우가 많아서 완규가 벤 꼴을
내가 가져올 수 있어 쉽게 꼴을 베고 올 수 있었다.
나에게 딱지와 구슬도 항상 제공(잃어 줌)해 주었던 완규....
그땐 몰랐었는데 지금 생각하니
나의 이기심에, 얼굴이 화끈거리며 미안한 생각이 든다.
그런 모습을 늘 보시고 계신 완규 어머니는 화가 나셔서
완규에게 온갖 욕을 한동안 퍼부으신다.
이렇게 한바탕 완규에게 욕을 하시고야 맘이 편해지시는 모양이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도
늘 이기려고만 했던 나의 이기적인 모습이
지금 생각하니 너무 부끄럽다.
철이 없던 때라 하더라도
반 반은 아니라도 열번에 세네번은
져주었어야 하지 않았을까...
그런데 완규는 아주 귀한 아들이다.
그는 16형제.자매 중 막내인데
14명은 돌아가시고, 스무살 위인 형과 둘 만 살아남았기 때문이다.
그런 귀한 아들인데도, 나한테 당하는 것을 보고 화가 나셔서
아들에게 화풀이를 하시는 거다.
우리들이 2학년 때인가 완규형이 결혼을 했다.
아내는 다른 마을에 사시는 분인데 내가 보기엔 무척 똑똑하신 분 같았다.
공동우물이 우리집 옆에 있었기에
물동이에 물을 길으러 나오시면 자주 만났다,.
집에서 형제들의 정을 받지 못하고 쓸쓸하게 생활하던 나에게
젊고 예쁜 새댁과 말을 주고 받는 것이 즐거웠고
기다려지기까지 했다.
하늘의 별을 보며 은하수, 별에 대한 이야기도 하시고
견우직녀 이야기, 나뭇군과 선녀이야기 등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해 주면
누나처럼 다정한 느낌이 들었던 기억이 난다.
지금도 우물가에서 만나 이야기를 해 주시던
젊고 예뻤던 새댁 아주머니 모습이 그려진다.
지금은 우물도 없어지고 우리집도 없어졌지만
완규네 집은 그대로 있다.
지붕과 내부만 새롭게 단장한 채로....
여주에 있을 때는 벌초하러 갔다가 잠시 방문하면
형과 형수 부부가 사시는데 80이 넘으셔서
건강도 안 좋아보이고 허리는 굽었지만
웃으시는 모습은 옛날과 같았다.
2년 전에는 고향을 떠나 아들이 있는 인천으로
이사가셨다고 한다.
완규는 초등학교 졸업한 후에는
거의 만나지는 못하고 어머니를 통해 소식을 들을 뿐이었다.
그리고는 고등학교 다닐 때, 동창회 모임에서 처음 만났다.(사진)
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교 입학한 후로는
벌초하러 선산에 갔기에
1년에 한 번 정도는 만났던 기억이 난다.
여자 동창이 운영하는 주점에서 1~2시간 막걸리 한 잔 하면서
완규는 친구들의 근황을 죽 설명해 주었다.
이미 결혼하여 아이를 낳은 여자 동창들도 있었고
타향으로 가서 사는 친구들 이야기도 들려주고
고향을 지키고 사는 친구들 이야기도 해 주었다.
완규는 새로 들어선 공장에서 일을 한다고 했다.
그 후 군생활을 하던 3년 동안 친구를 만나지 못하고
어머니를 통해서
결혼해 용인에서 아들을 낳고 잘 산다는 말을 들었다.
아내가 똑똑하고 시부모에게 잘 한다고 칭찬하시면서
며느리를 잘 얻었다고 부러워하셨다.
그렇게 행복하게 살고 있던 완규는
내가 제대하기 얼마 전
오토바이를 타고가다 차와 충돌하여 사망했다는 소식을
제대한 후에야 듣게 되어 문상도 가지 못했다.
이 후 매년 벌초하러 고향에 방문하지만
벌초한 친척들과 함께 점심을 먹고 집에 돌아오곤 했다.
죽마고우도 없고, 친구 집을 방문하려해도
완규 부모님이 나를 보면 아들 생각이 나서 우시며
내가 돌아간 다음에도 한 동안 아들 생각을 하신다는
완규 형의 말을 듣고는 방문조차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고향생각을 하면 어릴 때
미역감고, 물고기 잡고, 다슬기 잡고 놀던 추억과 함께
방과 후 운동장에서 축구하던 모습이 떠오르면서
자연스럽게 완규가 제일 먼저 생각난다.
그때 내가 그와 함께 했던 여러 게임에서
조금이라도 져 주려고 생각하지 않은 이기심이
부끄럽게 생각되며 후회된다.
지금 고향에 살아있다면
술한잔 기울이면서 어릴 때 추억을 이야기하고
그때 내 행동을 사과하고 싶다.
보고싶다!!
그리고 미안하다. 완규야~~
편안한 안식을 누리며
나를 용서해 주렴.
첫댓글 그럴적 불알친구? 완규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시네요~~
제 고향인 선산군 해평면 낙성리- 지금은 낙동강을 사이에
둔 구미시에 편입되었지만,,,,,,,,저 또한 완규와 비슷한 친구가
있었습니다~~
이제야 철이 드는 모양입니다.
그동안 당연하게 생각하며 살아왔던 내 삶이
지금 생각해보니 너무 이기적이 삶이었다는 것을....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마음이 변한다고 했는데
혹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