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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사람들은 이런 날을 염천(炎天)이라고 했습니다.
어느 시인의 표현대로 '해는 식어도 고랑 고랑 펄펄 끊는' 날씨입니다.
차 문을 열고 나서는데 띄약볕이 한 낮을 볶는 것처럼 뜨거웠습니다.
이 날 동아시아문화재단 사무국장을 지낸 문화기획자 변광섭님이 점심을 함께 하자며 리모델링이 마무리단계인 청주시 내수읍 초정리 시골집으로 초대했습니다.
그의 시골집은 '초정행궁'과 인접해 있습니다. 초정행궁은 세종대왕이 1444년 봄과 가을, 121일 동안 머물며 초수로 불리는 탄산수로 안질환을 치료했던 '초정행궁'을 재현한 곳입니다.
그러니까 집주인은 과거 조선 최고의 명군(名君)이 한 때 머물렀던 곳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니 명당(明堂)의 기(氣)를 받은 겁니다.
시골집 주변 환경은 더없이 좋습니다.
초정리는 조선시대때 부터 물 맛 좋기로 유명해 지금도 일화 탄산수 공장과 롯데주류 소주공장이 있고 탄산천을 활용한 사우나도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지척에 있는 증평 좌구산휴양림으로 가는 길목이고 상당산성과 초정을 잇는 트레킹코스 세종대왕 100리길의 종착지이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시골집 근처엔 청주시가 250억 원을 투입해 치유센터도 짓고 일화 공장터엔 테마파크도 들어선다고 합니다. 이 때문에 이 동네 땅값 시세도 들썩인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초정 시골집은 1970년대 농촌주택개량사업으로 지은 반세기가 넘은 평범한 농가주택이었습니다.
3년 전 방문했을 땐 내부는 어둡고 답답하고 불편한 구조라 동선이 편리하고 쾌적한 아파트에 익숙한 요즘 사람들은 하루도 머물기 힘들 것 같더군요.
집주인은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시골집의 활용방안을 찾다가 '책의 정원'이라는 컨셉으로 지난 봄부터 리모델링을 시작했습니다.
지금은 시골집 외양도 달라졌지만 내부는 '환골탈태(換骨奪胎)'한 수준입니다.
다만 현재 공사중인 정원은 잔디나 강돌을 깔고 꽃나무만 심어도 좋을텐데 경주 포석정같은 스타일의 조경을 그리고 있어 시골집과 얼마나 어울릴지 궁금합니다.
집안에 들어서니 확실히 리모델링 전보다 밝아지고 커졌습니다.
서재겸 거실 전면을 커다란 통창으로 만들어 차경(자연의 경치를 빌리는것)을 극대화하고 중간 구조물을 모두 없애고 밝은색 강화마루를 깔아 시각적으로 훨씬 넓어보입니다.
통창앞에는 마루를 새로 깔아 한옥 느낌이 납니다.
다탁(茶卓)위에 아이스아메리카노 한잔을 놓고 거실에 앉아(드러누워도 좋지만) 초정리를 병풍처럼 감싸고 있는 구녀봉 초록 능선과 구름이 둥둥 떠있는 투명한 하늘만 바라봐도 힐링이 됩니다.
방 두개중 큰 방은 갤러리로 꾸며 그림을 10여점 걸어놓고 바닥에 7점의 도자기를 배치했습니다.
그리고 고풍스러운 나무 소파와 연륜이 쌓인 원목탁자를 놓아 차분한 분위기를 연출했습니다.
이 방은 한지를 곱게 바른 장지문을 열면 바로 작열하는 햇볕사이로 싱그러운 작약이 환하게 웃고 있는 안마당이 보입니다.
집 가운데 방도 서재입니다. 한지를 단정하게 바른 벽 양쪽이 온통 책으로 둘러쌓여 있습니다.
작은 도자기 두점이 놓인 창문을 활짝 열면 뒤뜰의 산뜻한 바람이 방안으로 들어옵니다.
이어령 전 장관이 보낸 서신과 다양한 그릇
거실 옆으로 오픈된 주방도 신경을 쓴 흔적이 역력합니다.
거친 질감의 긴 나무를 천장에 매달아 백열등을 박아넣은 조명도 운치가 돋보일 뿐 아니라 벽면에 수납장 대신 나무판자를 붙여 질그룻을 가지런히 올려놓은 것도 보기좋았습니다.
화장실은 2곳인데 무궁화 네개 짜리 호텔 못지않게 중후하고 깔끔하게 마감했습니다.
비워둔 시골집을 개조해 귀촌하거나 전원주택으로 쓰고 싶은 사람들에겐 참고할만한 집입니다.
집주인은 이 집의 활용방안을 고민하는듯 합니다.
틈틈이 이 집을 찾아 머리도 식히고 글도 쓰고 있지만 세컨드하우스로선 관리하기 힘든점도 있을 겁니다.
그래서 예술인들을 위한 다양한 쓰임새를 모색하고 있는데 문화기획자 답게 좋은 아이디어가 나올 것으로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