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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대통령 당선인 이명박은 누구인가?
1. 생년월일 : 1941년 12월19일
2. 신체 : 키 173㎝ 몸무게 70㎏ 허리 32인치
3. 혈액형 : B형
4. 종교 : 기독교
5. 가족 : 부인과 1남 3녀
6. 취미 : 테니스. 영화 보기
7. 좋아하는 음식 : 순두부, 김치찌개, 비빔밥, 스파게티
8. 장점 : 긍정적 사고
9. 신체 비밀 : 남보다 손바닥 길이만큼 팔이 길다.
10. 하루 중 가장 행복할 때 : 늦은 시간 케이블 TV로 영화를 볼 때
11. 첫사랑 : 초등학교 5학년 때 짝 (그런데 나를 너무 구박했다)
12. 이성을 볼 때 어디를 먼저 보나 : 눈
13. 살아오면서 가장 즐거웠던 순간 : 첫 손자를 봤을 때
14. 살아오면서 가장 후회스러운 것 : 어머니에게 새 옷 한 벌 못해드린 것
15. 아랫사람을 평가하는 기준 : 창의력, 적극성 (정직, 성실은 기본)
16. 지금까지 살면서 가장 고마운 사람 : 어머니, 야간학교 보내 준 선생님
17. 꼴불견인 사람 : 무책임한 사람
18. 자신이 가장 멋있을 때 : 젊은이들과 테니스 칠 때
19. 학창 시절 가장 못했던 등수 : 3등
20. 잠버릇 : 머리만 대면 깊이 잔다. 자다 깨 전화 받아도 평상시처럼 대화하고 다시 잠든다.
21. 스트레스 해소법 : 땀 흘려 운동하는 게 최고
22. 살면서 가장 창피했던 적 : 고교 시절 여학교 앞에서 뻥튀기장사 했을 때
23. 나의 패션 : 아내 손에 달려 있다
24. 자신 있는 스포츠 : 테니스, 수영
25. 가장 좋아하는 외국인 : 비비안 리(‘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여주인공 스칼렛 오하라 역)
26. 좌우명 : 최선을 다한다.
27. 한 달 독서량 : 평소에는 10권쯤
28. 감명 깊게 읽은 책 : 슈바이처 전기, 법정스님의 무소유
29. 인간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 : 신뢰
30. 화났을 때의 행동 : 눈을 감고 입을 꽉 다문다
31. 대표적인 습관 : 피곤하면 자동차에서 잠깐씩 토막잠을 잘 때가 있다
32. 은퇴 후 나의 모습 : 초등학교 선생님, 고고학자
33. 어린 시절의 꿈 : 선생님, 소방관
34. 내가 생각하는 행복 : 화목한 가정, 따뜻한 사회
35. 별명 : 컴도저(컴퓨터가 달린 불도저)
36. 배우고 싶은 것 : 서예(어려서부터 잘했다)
37. 내가 누렸던 최고의 사치 : 첫 월급으로 샀던 라이카 M3 카메라
38. 다시 태어난다면 : 교육자로 살아보고 싶다
39. 가장 부러운 사람 : 좋아하는 테니스 치면서 돈도 잘 버는 샤라포바
40. 가장 잊을 수 없는 친구 : 어려운 시절 힘을 준 몇 사람
41. 지금 잃고 싶지 않은 것 세 가지 : 가족, 건강, 친구
42. 젊은이에게 권하고 싶은 가치 : 꿈, 희망, 도전, 용기
43. 존경하는 정치인 : 간디, 안창호
◇굴껍데기처럼 들러붙은 가난
이명박 당선인은 일본 오사카에서 가난한 목장노동자였던 아버지 이충우씨(1907-1981)와 어머니 채태원씨(1905-1964) 사이에서 태어났다. 4남3녀-큰누님 귀선, 큰형 상은, 둘째형 상득, 작은누이 귀애, 그리고 명박, 여동생 귀분, 막내동생 상필-중 셋째 아들이었다. 어머니가 치마폭에 보름달을 안는 꿈을 꿨다고 해서 明博(밝을 명, 넓을 박)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유년 시절은 지독한 가난으로 점철된 시기였다. 6.25 때 작은누이 귀애와 동생 상필을 먼저 떠나보낸 아픔을 겪어야 했고, 7명의 식구가 단칸방에서 하루하루를 연명했다. 하루 두 끼를 '술지게미'로 때워야 할 정도의 빈한한 삶이었다.
생활전선에 뛰어든 것도 세상 물정 모르는 초등학생 시절이었다. 고향인 포항(당시 영일군) 재래시장에서 어머니를 도와 좌판을 열고 꼬마 상인으로 행세했다. 김밥과 풀빵을 만들었고 아이스크림에 뻥튀기 장사를 했다. 과일과 생선도 팔았다. 상거래 기술을 남들보다 먼저 익힌 셈이지만 이 당선인은 "굴껍데기처럼 들러붙은 가난이 떨어질 줄 모르던 시기였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가난으로 고교 진학이 언감생심이던 그 때, 그는 주변의 도움을 받아 동지상고(야간부)에 수석으로 입학했다.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공부를 했다. 3년 내내 수석은 그의 몫이었다.
동지상고 재학시절 뻥튀기 장사를 하던 시절의 유명한 일화가 나온 것도 이 무렵이다. 여고 앞에서 뻥튀기 장사를 하는 것이 부끄러워 밀짚모자를 눌러썼다. 이를 본 어머니가 "네가 구걸을 하는 것도, 남을 속이는 것도 아닌데 뭐가 부끄러우냐. 당당하게 살아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는 지금도 "어머니의 소중한 가르침을 잊지 않고 살아왔다"고 말하곤 한다.
◇대학합격, '첫 신화'
1959년 12월 고교 졸업 후에는 '먹고 살기' 위해 서울로 올라와 일을 해야 했다. 가족들과 함께 둥지를 튼 곳도 고단한 삶으로 점철된 이태원 판자촌. 매일 새벽이면 일자리를 찾아야 하는 일당 노동자 신분이었다. 그러다 엉뚱한 생각을 했다. "대학시험이라도 한 번 쳐보자"며 도전장을 던졌다. 교재가 없어 청계천 헌책방 주인이 준 책으로 공부했다고 한다. 낮에 일하고 밤에 공부하느라 함께 생활하던 노동자들로부터 "불 좀 끄라"는 원성을 들을 정도였다. 주경야독 끝에 1961년 고려대학교 상과대학에 지원했다. 결과는 합격이었다. 시골 촌뜨기 일당 노동자가 이뤄낸 첫 '작은 신화'였다.
대학 재학 시절에도 일하는 고학생이었다. 이태원 재래시장에서 환경미화원 생활을 하며 학교를 다녔다. 그는 후에 서울시장으로 당선되자 월급 전액을 환경미화원 자녀들을 위해 기부했다. 이 당선인은 그 이유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환경미화원 시절 어두컴컴한 새벽에 일을 하다보면 차에 치여 다치거나 부상을 입는 분들이 많았다. 다치면 그 가족들의 생계가 막막했다. 그래서 내 월급을 환경미화원 자제들에게 기부한 것이다".
그가 사회의식에 눈을 뜬 것도 이 무렵이다. 상과대 학생회장을 맡아 '한일 국교정상화'를 반대하는 6.3시위를 주도했다. 대법원에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형을 선고받는다. 이로 인해 서대문형무소에서 4개월을 복역했다. 운동권 학생이란 '주홍글씨'가 새겨져 취업이 제한되는 시련을 겪어야 했다.
◇'운명적 만남' 정주영과의 조우
이 당선인은 자신의 삶을 바꾼 사건 중 하나로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과의 만남을 꼽는다. 그의 말을 빌자면, "정주영이 없었다면 이명박도 없었다."
그는 대학 졸업 후 당시 박정희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운동권 학생으로 취업이 제한됐던 그는 "한 젊은이가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고자 하는데, 국가가 그 길을 막는다면 국가는 젊은이에게 영원한 빚을 지는 것입니다."라는 내용의 편지를 써서 청와대와 담판을 시도한 셈이다.
결국 그는 1965년 정 전 명예회장이 이끌던 현대그룹 계열사인 현대건설에 입사했다. 현대건설은 당시 직원 98명의 중소기업이었다. 면접에서 그는 "건설이 뭐라고 생각하나?" 라고 물은 정 전 명예회장의 질문에 "건설은 창조입니다" 라고 답했다고 한다.
이 당선인은 한나라당 검증청문회에서 "신입사원 연수회 당시 정 전 명예회장이 '술을 먹자, 낙후되면 물러서라'고 해 내일 당장 쓰러지더라도 최선을 다해 끝까지 버텼다."는 일화를 소개하기도 했다. 이후 그는 타고난 부지런함과 번뜩이는 아이디어로 정 전 명예회장의 신임을 받아 초고속 승진을 거듭했다. 입사 2년 만에 대리, 29세 이사, 입사 12년만인 1977년 35세의 나이에 사장에 오르는 등 '샐러리맨 신화'를 써 나갔다.
태국 건설현장에서 성난 인부들로부터 금고를 지켰던 일, 밤새 불도저를 해체한 뒤 조립하며 구조를 익힌 일, 현대자동차를 지키기 위해 전두환 대통령 시절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에 맞섰던 일 등이 당시의 대표적 일화들이다.
그는 마침내 46살에 회장이 된다. 현대건설, 현대엔지니어링, 인천제철 등 현대 계열사 10여 곳의 최고경영자를 지냈다.
◇'청계천' 신화로 '청와대 CEO'로
이 당선자가 정계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1992년이다. 27년간의 현대그룹 생활을 끝내고 14대 총선에서 민자당 전국구 의원으로 당선된다. 그 해 대선 출마를 선언한 정주영 회장과도 결별하게 된다.
1995년에는 서울시장 신한국당 후보 경선에 나섰지만 정원식 전 국무총리에게 패하는 쓰라림을 맛봤다. 그러나 1996년 15대 총선 때 '정치1번지' 서울 종로에서 출마, 이종찬 새정치국민회의 후보와 노무현 민주당 후보를 누르고 재선에 성공했다. 그러나 같은 해 9월 비서관이었던 김유찬씨가 선거비용 초과 지출 사실을 폭로하면서 선거법 위반 혐의를 받게 되고 결국 1998년 의원직을 사퇴해야 했다. 어느 때보다 치열했던 한나라당 경선에서 김유찬씨와 박근혜 전 대표측 법률특보를 지낸 정인봉씨가 검증의 도화선을 당긴 것도 바로 이 사건이었다.
1년여를 미국에서 머물던 그는 1999년 말 귀국, 당시로서는 생소하던 '사이버금융' 사업에 손을 댔다. 2000년 LKe뱅크, e뱅크증권중개 등을 설립했다. 대선전 내내 이 당선자를 괴롭힌 BBK 전 대표 김경준씨와의 악연이 시작된 것도 이때쯤이다.
이후 그는 사업을 접고 2002년 7월 민선 3기 서울시장에 당선되면서 화려하게 정계에 복귀한다. 기업 경영기법을 시정에 도입하는 새로운 시도를 선보인 그는 재임 기간 중에 청계천 복원사업, 서울시 대중교통체계 개편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 2006년 7월 퇴임 후 곧바로 대선 출마를 선언, 근 1년여를 지지율 1위로 독주한 끝에 제 17대 대통령 선거에 당선되었다.
◇가족관계
이 당선인은 1970년 12월 19일 그 해 2월 이화여대 사범대학 보건교육학과를 졸업한 김윤옥씨와 결혼했다. 1965년 입사한 현대건설에서 이사로 승진해 승승장구할 때였다. 김씨와는 자신이 나온 포항 동지상고 은사의 소개로 만났다. 동지상고의 영어교사가 부인 김윤옥씨의 오빠와 경북고교 동창이었다. 두 사람은 동창회에서 ‘잘 나가는 제자’와 ‘예쁜 여동생’ 자랑을 하다 중매를 주선했다. 부인 김윤옥씨는 평범한 공직자 집안 출신으로 1947년 3월 26일 진주에서 출생했으며 대구여중ㆍ고를 나왔다.
이 당선인 부부는 3녀1남을 두었다. 장녀 주연(37), 차녀 승연(35), 막내 딸 수연(33)씨와 외아들 시형(30)씨가 있다. 주연, 승연씨는 미국 줄리어드 음대에 유학해 기악을 전공했고 수연씨는 이화여대 미대를 나왔다.
주연씨의 남편은 현재 삼성화재 법무담당 상무보로 있는 이상주(38)씨. 이씨는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1993년 제35회 사법시험에 합격, 검사로 임용돼 부산ㆍ수원지검에서 근무하다 2004년 삼성화재로 옮겼다. 차녀 승연씨의 남편은 서울대 의대를 졸업하고 서울대병원 내과 전문의로 있는 최의근(35)씨. 현재 승연씨 부부는 이 당선인 소유의 논현동 집에서 살고 있다. 이 집에는 아직 미혼인 막내아들 시형씨가 함께 살고 있다. 시형씨는 대학 2학년 때 군에 입대, 병장으로 제대했고 이후 미국 유학을 갔다가 돌아와 국내의 한 외국계 투자은행에 취직했다.
막내 딸 수연씨는 2001년 9월 조양래 한국타이어 회장의 차남인 현범(36ㆍ한국타이어 부사장)씨와 결혼했다. 이 결혼은 재벌(효성그룹)과 정치인 집안의 혼사라는 점에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 당선인은 부인에게는 너그럽고, 자식에게는 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 측근은 “자식에게 용돈을 박하게 주며 돈을 아껴 쓰는 법을 가르쳤다고 얘기한다.”고 말했다. 그는 현재 외손자ㆍ손녀 6명을 보았다.
이 당선인의 부친은 경북 영일군의 가난한 농사꾼 집안 출신이었다. 부친 역시 물려받은 농토가 없어 어렸을 때부터 고향을 떠나 목축 일을 했고, 일제 때였던 1935년 일자리를 찾아 일본 오사카로 갔다. 이 때문에 이 당선인을 비롯한 7남매는 막내만 제외하고 모두 오사카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평생 목부(牧夫), 옷감 장수 등으로 고단한 삶을 살다가 이 당선인이 현대건설 사장으로 있을 때 작고하였다.
모친 채태원씨는 이 당선인의 삶에 가장 영향을 준 사람으로, 이 당선인은 자신을 기른 스승이 ‘가난과 어머니’라고 말할 정도다. 생활력이 강했던 모친은 찢어지는 가난 속에서 행상으로 남편과 자식을 부양하면서도 이웃이 “자식들 갖다 먹이라”고 주는 음식을 절대로 받지 않았다고 한다. 자식들이 가난에 주눅 들지 않고 ‘부자든 가난하든 사람과 사람의 관계로 당당하게 서로 만나야 한다.’는 교훈을 가르치려 했다는 게 그의 회고다.
모친은 가족을 위해 새벽기도를 올리는 것이 가장 큰 일과였을 만큼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이 당선인이 고려대 재학 시절 6ㆍ3사건에 연루돼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다 석방된 1964년 겨울 작고했다. 그가 복역할 때 병색이 완연한 모습으로 찾아와 “나는 네 소신이 옳다고 생각한다. 네 소신대로 행동하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큰형은 자동차 부품업체인 ‘다스(구 대부기공)’ 회장으로 있는 상은씨이고, 둘째형은 상득씨이다. 상득씨는 동지상고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육사에 진학했으나 2학년 때 몸을 다쳐 퇴교하고 서울상대 경제학과에 입학하여 졸업했다. 1961년 코오롱에 입사, 17년 만에 대표이사가 되었다. 포항시 남, 울릉군 지역구 5선 국회의원으로 현재 국회부의장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