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모하는 님이시여/한줄기 빛 뿌려 주신 은혜로움/ 오체투지로 온 몸 땅에 맞닿아 고개 숙이나이다./
땅 속 깊은 곳에 묻힐지라도/ 그 사랑 틔울수만 있다면/ 흐르는 땀방울로 심지 맑게 태우오리다/



부친 한 응준(韓應俊)의 엄격한 가정교육으로 고향땅(충남 홍성)에서 한학에 정진하던 신동 한 용운은 근대사 격랑의 소용돌이 앞에서 무력한 자신을 발견하고 설악산 백담사에서 승려가 되어 피나는 정진과 철저한 수련을 쌓았다. 스승 김 연곡스님의 도움으로 양계초의<음빙실문집>과 <영환지략>을 읽고 세계정세와 서양철학에 관심을 갖고 세계일주 여행계획을 실천하기 위하여 해삼위(블라디보스톡)를 건너갔다가 일진회로 오인을 받아 나라없는 통안과 설움을 안고 고국 땅으로 돌아온다. 그후 일본 신문물을 견학하고 인간정신의 유신을 위하여<조선불교유신론(1913)>을 탈고한다. 또한 만주 일대의 독립군을 방문 격려하는가 하면, 임제종운동을 통하여 한.일불교조약을 분쇄하는 한편, <한문독본(1912><불교대전(1914)><정선강의 채근담(1917)>을 차례로 내놓으면서 민족계몽운동에 앞장을 섰다.



1917년 12월 3일 설악산 오세암에서 깨달음의 경지(悟道)를 체험하고 역사의식과 시대정신에 눈떴다. 그리하여 한 용운은 <惟心(1918)>이란 종합잡지를 창간하였는데, 이것이 3.1운동의 전위지였다. 기미년 3.1운동의 선봉에 서서 33인을 대표하여 연설하고, 만세삼창을 선창하였다. 자유, 평등, 평화의 대강령을 빍힌 장문의 독립선언서"조선독립에 대한 감상의 개요"를 옥중집필했다. 옥중에서는 투쟁 3대원칙(1.변호사를 대지말것, 2.사식을 취하지말것. 3. 보석을 요구치말것.)을 정하여 몸소 실천에 옮기면서 "달아달아 밝은 달아/ 쇠창을 넘어와서 나의 마음 비췬 달아/저 달속에 계수나무 베어내고 무궁화 심고저"라는 애끊는 호곡(號哭)의 옥중 시를 남겼다. "이제 내나라에서 죽으니 한이 없다"는 생사를 초월한 정신으로, 자신이 직접 추가한 공약삼장 그대로,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굳세게 주체적인 삶을 살았다.
3.1운동으로 3년의 옥고를 치른 후 철창철학, 육바라밀등의 강연을 하여 청년들의 독립정신을 고취하였다, 한편 지금까지의 투쟁 방향의 전환을 시도한 새로운 민족운동의 형태로 민족자주자립운동을 전개했다. 이러한 활동의 일환으로 물산장려운동을 펴서"조선인은 조선것으로"라는 국산품 애용운동을 전개한다. 그리고 2천만의 피와 정성을 모아 민립대학을 설립하고자 주장하였다. 또한 법보회를 조직하여 불교 대중화 운동에 앞장을 섰다. 그리고 불교 청년회를 조직하고 이를 불교청년총동맹으로 확대 개편하면서 불타정신의 체험, 합리종정의 확립, 대중불교의 실현이라는 3대강령을 실천에 옮겼다. 그러면서 일제의 조선사찰령 반대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불교의 자주적 역량을 위하여, 민족 종교로서의 역할과 불교의 시대정신을 일깨워갔다


사랑의 증도가(證道歌)"님의 침묵"(1926)을 남긴 이후 1927년 신간회를 발기하여 중앙집행위원과 서울 시(당시 경성)지회장으로 피선되어 활동하였다. 민족의 정통성을 다시 찾기 위하여 민족이 하나로 뭉쳐야 된다고 역설하였다. 하루는 신간회 봉투 뒷면에 쓰인 일본 연호 소화(昭和)란 글자를 보자, 이것을 몽땅 아궁이 속에 넣고 불태워버렸다. 한 용운은 가슴이 탁트이는 후련한 마음으로 "소화(昭和)를 소화(消火)해 버리니 시원하군!"하는 한마디를 남겼다. 1929년 11월 광주학생의거를 민중대회로 지원하는가 하면, 여성의 자각. 전문지식을 갖추자. 소작농민의 자각. 자립 역행의 정신을 보급시키라는 글들을 차례로 발표하면서 범민족적 표현단체건설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나병 구제 연구회를 조직하기도 하고 간이 수용소 설치를 결의하는 등 대사회(對社會)활동에 박차를 가하던 시기다.

마저절위
절굿 공이를 갈고 갈아 바늘을 만들고,
대나무 책의 가죽끈이 닳아 떨어졌다는 고사로 쉬지말고 노력하라는 뜻.

오도송
사나이 가는 곳은 어디나 고향인 것을
그 몇사람 객수 속에 길이 갇혔나
한 마디 버럭 질러 삼천 세계 뒤 흔드니
눈 속의 복숭아 꽃 붉게 붉게 지네


요시찰 인물이 되어 떠돌이의 신세를 면하지 못하던 한 용운. 나이 55세에야 비로소 성북동 막바지에 집한칸을 마련하게 되었다. 이 집을 지을 때 남향으로 주춧돌을 놓으니" 그건 안돼, 날더러 총독부를 바라보라는 모양인데 차라리 북향하는 것이 났겠어" 하며 북향집 심우장을 지었다. 이곳 심우장은 일제 강점기동안에도 민족 혼을 간직한 조선의 따이었다. 손수 지은 이 택회의 심우(尋牛)는 소를 찾는다는 뜻이다. 소를 마음에 비유하여"마음자리 바로 찾아 무상대도(無上大道)를 깨치기 위한 집이다"라는 뜻이다. 여기서 만해는 비밀 결사인 만당(卍黨)의 영수로 추대되고 단채 신채호 선생의 애국지사 묘비명을 썼으며 마포형무소에서 옥사한 독립운동의 선구자 일송 김 동삼선생의 시신을 업어다 장례를 치르면서 뜨거운 눈물을 흘린 곳이기도 하다. 일제의 황민화정책, 창씨개명운동, 조선인 학병 출정등을 반대하던 북향집 심우장이다. 손수 심은 향나무 한 그루가 잘자라 오늘도 길손을 기다리고 있다.


확암의 십우송을 만해 한용운이 차운하다
십우송은 사람의 수준에 따른 가르침으로 소 치는 일을 예를 든 것이다. 처음에는 차차 마음이 밝아지는데서 시작하여 역량이 부족함을 나타내고, 다음에는 마음이 순진한 경지에 이르러 근기가 점차 성숙해감을 표시하고, 드디어 사람과 소의 구별이 보이지 않으메 이르러, 주관과 객관을 아울러 잊음을 표방한 내용으로 수심견성(修心見成)의 차제(次第)를 비유한 것이다. 송나라 확암선사의 십우송을 만해 한용운 선사가 차운한 시다.
1. 심우(尋牛)
원래 못 찾을 리 없긴 없어도
산 속에 흰 구름이 이리 낄 줄이야
다가서는 벼랑이라 발 못 붙인 채
호랑이 용 울음에 몸을 떠느니
2. 견적(見跡)
여우니 삵괭이니 득실대는 산
머리를 돌려 또 물으니 "이것이 무엇?"
문득 보니 풀 헤치고 꽃 밟은 자취!
다른 데 가 굳이 찾을 필요 있으리
3. 견우(見牛)
이제 꼭 그 소리를 들어야 하랴.
푸른 풀밭 딛고 선 희고 희 모습!
한 걸음을 안 옮긴 채 그를 보느니
저 털 저 뿔 오늘에 됨은 아닐세.
4. 득우(得牛)
보고는 못 붙들까 애태웠듯이
잃을세라 이 걱정 끊기 어려워...
깨달으니 그 재갈 손에 있는데
본디 같이 있은 듯함 이상도 해라
5.목우(牧牛)
기르고 길들이기 잊지 않음은
행여나 옛 버릇 나 달아날세라.
어느덧 굴레 씌워 끌지 않아도
온갖 일 따르게 됨 신기하여라.
6. 기우귀가(騎牛歸家)
채찍질함도 없이 돌아가는 길
안개 놀 끼었는들 상관 있으랴.
긴 길가 그 많은 풀 먹어치울 제
봄바람의 향기도 입에 씹히네
7. 망우존인(忘友存人)
빠른 걸음 소에 맡겨 산이며 물을
달리느니 세월은 한가롭기만...
도림을 휘돌던 일 잊고 난 뒤로
간간이 창 밖으로 꿈은 달리네
8.인우구망(人牛俱忘)
색만이 공 아니라 공도 또한 공이기에
막힘도 없으려니 통함인들 있을 줄이..
하늘높이 빼어 든 칼 먼지 하나 못 앉거니
천주에 조종 있음 그 어찌 용납하리
9. 반우환원(返牛還源)
삼영이라 육통이라 별 것 없거니
소경인 양 벙어린 양 됨만이야 하랴.
돌아보니 털도 뿔도 나지 않는 곳
봄이라 활짝 핀 꽃 붉기도 한 빛!
10.입전수수(入廛垂手)
어디에나 마음대로 드나들면서
울고 웃고 그 볼엔 흔적도 못내..
괴로움의 바닷 속 언제인가는
불길 중에 연꽃을 피게 하리라



남한산 동문쪽 산 기슭 양지바른 곳에 위치한 만해 기념관. 백산선생님과 남한산성내에서 점심약속이 있는 날이면 차를 타고 가다가 선생님과 기념관 표지판이 보일 때쯤서 <님의 침묵>을 암송하곤 하였었다. 입구에서부터 낭낭히 들려오는 "님의 침묵"에 마음가짐을 경건히 하고 굳은 지조와 대쪽같은 절개로 어두운 시대에 등불을 밝혀주셨던 위대한 님의 영전앞에서 묵념을 올렸다. 사진과 활자 하나 하나 마음에 새겨넣으며 향기롭고 고귀한 님의 숨결을 가까이서 느껴볼 수 있었던 좋은 시간이었다.
첫댓글 고맙습니다_()_
사진으로 보니까 더 멋지군요.잘 보고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