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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운동 파출소를 쳐부수자
증언자 : 박아랑(남)
생년월일 : 1963. 5. 10(당시 나이 17세)
직 업 : 고등학생(현재 대학생)
조사일시 : 1988. 8
개 요
5월 18일 금남로에서 공수들이 학생들을 집단구타하는 걸 보고 5월 21일 몰래 집에서 나와 백운동 파출소를 부수고 총을 소유한 후 차를 타고 다님(증언자의 부탁으로 가명 처리했음).
공수부대들이 투입됐대
5월 18일 일요일. 나는 19일 월요일에 있을 시험에 대비하기 위하여 몇 명의 학교 친구들과 함께 어울려 학교 도서관에 공부를 하러 갔다. 얼마 동안을 도서관에 앉아서 공부를 하고 있는데 밖이 무척 어수선하고 시끄러운 소리가 도서관까지 들려오는 것이었다. '무슨 일이라도 생겼을까'하는 호기심에 도서관 밖으로 나와보니 헬기 1대가 시내 일대를 맴돌아 나와 친구들의 머리 위까지 빙빙거리고 있었다. 이것을 본 우리는 시내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 전에 매일 도청에서 집회가 있었으므로 단지 오늘도 그럴 것이라는 추측을 했었다.
친구들과 나는 뒤숭숭한 마음으로 학교에서 나와 시내를 가보자고 하여 걸어갔다. 오전 11시쯤 금남로에서 몇백 명의 시위대와 셀 수 없이 많은 전경들 사이에 치열한 투석전이 벌어지고 있는 것을 목격했다. 1시간 정도 그 주위를 서성거리며 구경하는데 시위대열 중에서 누군가가 "공수부대들이 투입됐다"고 소리를 질렀다. 이 말을 듣고 시민, 학생들은 동요하기 시작했고 전경들의 무자비한 진압으로 대열은 흩어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시위대가 밀리기 시작하여 나와 친구들은 일고까지 도망을 가야 했다.
학교까지 도망을 가서 있자 얼마 후 수위 아저씨가 정문 옆 조그만 문마저 잠가 버렸다. 학교 담이 철제였기 때문에 밖에서 학교 안을 볼 수가 있었고 학교 안에서도 밖을 내다볼 수가 있었다. 도망한 1백여 명의 학생들이 담에 기대어 서서 밖을 보고 있는데 대학생 몇 명이 계속 도망가는 모습이 보였다. 당시 할머니가 경영하는 문방구점이 교문 앞에 자리하고 있었는데, 그곳으로 대학생으로 보이는 여학생과 남학생 2명이 도망쳐 숨은 것을 우리는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데 이 광경을 쫓아아오던 공수 3, 4명이 정확하게 봤던 것 같다. 할머니는 숫자가 써진 양철문을 다 닫고 들어가 버렸는데도 공수들은 끝까지 쫓아와 총 개머리판으로 문을 차고 군화발로 차면서 악을 쓰는 것이었다. "빨리 대학생을 내놔라!!" 너무나 집요하고 끈질기게 소리를 지르며 문을 부수려고 날뛰자 할머니는 할 수 없이 안에 있던 학생 2명을 문 밖으로 내보내는 것이었다.
그러자 그 자리에서 공수들은 남학생을 개머리판으로 머리를 사정없이 내리쳤으며, 여학생에게는 뺨을 이쪽저쪽 돌아가며 계속 때렸다. 둘은 실신한 듯 쓰러졌다. 길바닥에 쓰러진 두 사람은 공수 3, 4명에게 목덜미를 잡힌 채 그대로 질질 끌려가는 처참한 모습이었다.
이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학교의 고등학생들이 야유하며 흥분하여 분노하였고 학생탑 주위에 있는 차돌 같은 돌을 주워서 공수들을 향해 던졌다.
이때 돌을 던진다는 것을 알아차린 공수들이 뒤를 돌아보더니 학교 안으로 쫓아오려고 하였다. 그러자 제일고 교장 선생님이 교문 밖으로 나가서 말렸다. 한참 동안 교장 선생님과 공수들간에 말이 오가더니 공수들이 돌아갔다. 그런데 얼마 후였다. 이발관이 있는 쪽에서 공수들이 담을 넘어 들어온다고 악을 쓰는 소리가 들려왔다. 우리는 얼른 교실에 들어가 교탁 밑에 숨거나 청소함 속으로 숨는 등 모두들 제각기 숨었다.
제일고등학교 내에는 방송통신고등학교가 있었는데, 마침 그날이 일요일이어서 방통고생들이 수업을 하고 있었다. 교탁 밑에 숨어 숨을 죽이고 있는데 방통고 쪽에서 두들겨맞는 소리가 살벌하게 들려왔다. 방통고생들은 대개가 머리를 자유스럽게 길고 있는 학생들이 많아서 대학생들처럼 보이기도 했었다.
조금 뒤 밖이 조용해지자 교실에서 밖으로 나왔다. 그러나 학교 앞에서는 선생님들이 지키고 서서 밖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했다. 밖이 조용해지면 나가라고 하셨고, 얼마 후 조용해지는 틈을 타서 학교에서 나왔다.
오후 5시쯤 함께 있던 친구들과 흩어져 제각기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우리 집까지의 거리는 학교에서 불과 15분 정도 걷는 거리였는데, 이날은 도저히 걸어 갈 수 없을 것 같아 시내버스를 탔다. 거리거리에는 군용 트럭(기억나진 않지만 엄청난 숫자의 차들)이 세워져 있고, 젊은 사람들이 가득 실려 있었다. 젊은 사람들은 대부분 두 손을 허리 뒤로 하고 고개를 차 바닥에 처박고 있었다.
시험을 거부하기로 결의
5월 19일. 아침 일찍 버스를 타고 학교에 등교했다. 모두들 어제의 상황을 이야기하면서 교실 안은 술렁거렸다. 누가 선동을 한 것도 아닌데, 우리 반 학생들은 책상과 의자를 교실 뒤로 밀치고 앞 교실 바닥에 그냥 앉아서 '선구자', '애국가'를 부르면서 시험을 거부하기로 결의했다.
몇몇 학생들 사이에서 "시내로 나가자"는 소리가 터져 나왔으며, 다른 학교 학생들과 우리 학교 3학년들이 밖으로 나가면 우리 반 학생들도 나가겠다고 밖의 동태를 살피고 있는데 3학년이 밖으로 나가지를 않았다. 기다리다 못한 1, 2학년들은 모두 교실에서 나와 운동장으로 모였다.
교문 앞에서는 선생님들이 지키고 있었다. 운동장에 모여 있는 우리의 머리 위로는 시내를 중심으로 헬기가 계속 돌고 있었다. 앞에서 누군가가 교문을 박차고 나가기만을 기다리며 모두들 그런 생각으로 망설이고 있었다. 끝내 앞장서는 학생은 아무도 없었다.
선생님들은 계속해서 교실로 들어갈 것을 종용하였고, 결국 우리는 교실로 들어 갔다. 의자들을 뒤로 밀쳐두고 교실 바닥에 앉아 있는데, 선생님께서 오셔서 학생들을 귀가조치하기로 했다는 학교 결정을 전달해 주셨다. 또한 선생님은 같은 동에 사는 학생들 3, 4명씩 짝을 지어주면서 귀가하도록 하셨다.
오후 1시쯤에 집에 돌아가기 위해 1번 버스를 탔다. 버스는 정규노선으로 가지 못하고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쪽으로 돌아갔다.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로터리를 갔을 때 로터리 주변에는 공수들이 가득가득 거리를 메우고 도로를 차단, 진을 치고 있었다.
시내버스가 멈추었다. 버스 안에서 밖을 내려다보다 나는 너무 무서워서 가슴이 뛰었다. 대부분의 공수들 얼굴은 빨갛게 보였고 충혈된 눈으로 버스 안을 들여다보는 공수들의 눈초리는 너무나 무서웠다.
더욱 분노할 사실은 로터리 주변, 텅 빈 도로 한가운데서 공수부대원들이 청년 한 명을 무릎꿇게 하고 머리를 땅에 처박고는 곤봉으로 사정없이 때렸다. 군화발로 차는 것은 예삿일이었다. 이를 보고 있던 시내버스 안 시민들은 모두 눈물을 흘렸다. 시내버스가 골목골목으로 가다가 산수오거리까지 와서는 차가 도저히 갈 수 없다며 버스에서 내리라고 하여 할 수 없이 그곳에서 내릴 수밖에 없었다. 산수 오거리에서 집까지 골목을 통해서 걸어갔다.
백운동 파출소를 쳐부수자
5월 21일. 20일은 부모님이 밖으로 못 나가게 하여 하루 종일 집안에 있어야 했다. 이날 동생과 집 옆에 있는 목욕탕에 가기로 하여 함께 집에서 나왔다. 동생과 목욕탕 으로 들어가 동생이 탕 안으로 들어가는 틈을 타서 얼른 목욕탕에서 빠져나와 시내에 구경을 갔다. 적십자병원 앞까지 걸어가다 지나가는 트럭이 있어서 얼른 올라탔다. 10-13명의 청년들이 타고 있었고, 차 앞에는 태극기가 꽂혀 있었다. 그들은 몽둥이로 차체를 두들기면서 '전두환을 찢어죽이자', '김대중을 석방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내 외곽지대를 돌아다녔다.
내가 탄 트럭은 광주상고를 지나 임동 삼거리까지 가게 되었다. 이때의 시각이 오후 2, 3시 경이었는데, 시민들뿐만 아니라 차량들도 엄청나게 많았고 모여든 사람들은 도청을 탈환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어느 한 순간 차들이 갑자기 도청 쪽으로 공격해 갔다. 밀고 갔다가 다시 밀리는 순간 시민들은 가슴에 총을 맞고 피를 흘리며 돌아왔다. 다시 공격했다가 후퇴하는 싸움이 계속됐다. 그러나 부상자와 사상자만 더 늘어갈 뿐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할 것 같았다. 사람들은 부상자들을 서석병원으로 옮겨 치료를 받게 하였고 시민들도 총과 각목으로 무장을 하여야 한다고 아우성쳤다. 나와 몇몇 청년들은 각목을 구하기 위하여 트럭을 타고 광주상고 부근의 목재사로 간 뒤 무조건 각목을 차에 실었다. 목재사 주인은 말리지 않고 그저 가져가라고만 했다.
각목을 차에 싣고 백운동 로터리로 갔다. 각목으로 백운동 파출소를 깨부쉈다. 마침 백운동 부근에 중장비기계(집 부수는 기계)가 있어서 쉽게 파출소 무기고를 열고 총을 집어들었다. 총은 모두 10정 정도로 카빈 소총이었다. 총알은 없었다.
총을 각각 한 정씩 들고 임동 삼거리로 가는 도중에 대학생 정도 되는 사람이 "고등학생이 총을 들면 위험하니까 나에게 주라"고 해서 나는 내가 들고 있던 총을 그에게 넘겨주었다. 총을 건네주고 임동 삼거리로 오는 도중 시체 1구를 목격했는데(정확한 장소는 기억이 안 남), 목과 몸이 잘려진 남자 시체가 피투성이가 된 채 길바닥에 늘어 져 있고 그 주위를 시민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우리는 오후 4시 30분쯤 임동 삼거리에서 시민들에게 각목을 나눠주었다. 얼마 후 시민들 중 어느 한 사람이 "이 곳에서는 사상자만 생기니까 모두 광주공원으로 모여주시오"하고 소리치고 다녔다.
그 소리를 듣고 나는 트럭에서 뛰어내렸는데 보도블럭에 팔꿈치를 찧어 피가 조금씩 흘러내리고 있었다. 팔을 감싸고 광주공원 쪽으로 걸어갔다. 이때 마이크로 버스 1대가 내 옆에 멈추었다. 버스에 올라타보니 여고생 3, 4명, 대학생 1, 2명, 남고생 1명이 타고 있었다. 여고생 1명이 나의 상처난 팔을 치료해 주었다. 알고 보니 마이크로 버스는 시내 외곽을 돌아다니면서 부상자를 치료해 주는 차였다.
차는 사직공원 쪽으로 가고 있는데 광주공원 쪽에서 2명의 남학생이 내리길래 얼떨결에 따라 내렸다. 광주천 다리를 건너려고 셋이서 걸어가다가 나를 찾아 헤매시던 어머님과 아버님을 만나게 되어 나는 어쩔 수 없이 귀가해야 했다.
5월 24일. 우리 집은 여인숙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평소에 많은 사람들이 들락거리긴 했지만 이날 밤 11시쯤 약간은 불량스럽게 보이는 청년 7, 8명이 잠을 좀 재워달라고 사정을 하는 것이었다. 모두들 총을 한 자루씩 들고 있었다. 어머니는 밖으로 나가서 젊은 청년들에게 이야기를 했다.
"잠을 재워주는 대신에 혹시나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까 모두 들고 있는 총을 나에게 맡겨라. 그러면 내일 아침 다시 총을 전부 돌려주겠다." 그러자 이 젊은 청년들은 가지고 있던 총을 모두 맡기고는 아침 6시에 깨워달라고 부탁을 하고 잠을 자러 2층으로 올라갔다. 다음날 새벽 5시쯤 어머니가 그들을 깨워주자 카운터에 내려와 각자 자기 총을 되돌려받고 고맙다는 인사를 여러 차례 한 뒤 밖으로 나갔다.
또 한번은 이런 경우도 있었다. 정확히 며칠인가는 기억을 할 수가 없지만 우리 집에는 남자와 여자가 동거를 하며 방을 얻어 숙박하는 젊은 부부가 있었다. 가끔씩 이 부부를 찾아와서 놀고 가는 그 남편의 친구가 있었다. 그런데 그날 이 친구라는 사람이 놀러 와 있는데 공수들이 가택수색을 온 것이었다. 공수들은 신분증을 검사하고 방마다 구석 구석을 검사하였는데 놀러 온 친구에게는 신분증이 없었던 것이다. 결국 친구라는 사람은 잡혀갔고 그로부터 며칠 후 돌아왔는데 정신이상자가 되어 돌아왔다는 얘기를 들었다.
이런 경우도 있었다. 5·18 기간 중에 숙식을 하던 손님들 중 기자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다. 기자라는 자는 매일 아침 일찍 카메라를 여러 개 메고 나갔다가 저녁 늦게 들어왔다. 그러고는 두 손에 가득 쥐어져 있는 대여섯 개의 필름통을 나의 어머님에게 맡기고는 나갔다가 며칠이 지나면 어머님에게 맡겨놓은 필름을 찾아가곤 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내가 밖에 나가고 없는 사이에 아예 집을 떠났다. 그러나 정확히 그 사람이 기자인지 아닌지는 알 수가 없었다.(조사정리 안은정) [5.18연구소]
첫댓글 자료 감사합니다.
사랑과 행복이 함께하는 시간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