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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내고향 안동 원문보기 글쓴이: 장현숙
독립투사 여성 중 유일하게 2등훈장 받은 남자현
남자현 지사 생가 - 경북 영양군 석보면 지경리
남자현 항일구국비
남자현(南慈賢·1873~1933)은 경북 영양군의 양반(부친 남정한은 통정대부(정3품, 당상관)에 오른 인물)에서 태어나 19세(1891) 때 김영주(金永周)와 결혼했다.
5년 뒤인 1896년 7월 남편은 의병에 참가했다가 진보의 흥구동전투에서 전사했다. 이때 남자현은 임신 중이었다.
그녀는 유복자 김성삼(金星三)을 낳아 기르면서 시부모를 극진히 봉양해 진보면에서 주는 효부상을 받기도 했다.
(잡지 <부흥>에 나온 ‘독립운동사상 홍일점 여걸 남자현 여사’, 1948년 12월) 1919년 3·1만세운동 직전에 그녀는 서울로 올라왔다.
1913년부터 5년간 독립운동가들과 연락하면서 활동해왔다는 기록도 있다.(조선중앙일보 1933년 8월 26일자)
3·1운동이 끝난 뒤 그녀는 만주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본격적으로 가담했다.
그녀는 1927년 2월 안창호를 비롯한 독립운동 지도자들이 일제에 넘어갈 위기에 처했던 길림사건 때 비상대책반을 꾸려 활약을 펼쳤다.
그녀는 당시 중국 동포들로부터 구명운동을 이끌어냈고, 사실상 안창호를 구해낸 일등공신이었다.
그 해 4월 남자현은 권총 한 자루와 탄환 8발을 받아서 사이토 총독을 암살하러 서울로 잠입했다.
혜화동 28번지에서 교회 신자로 위장해 살해 계획을 진행해나갔으나 실패했다. 그녀는 삼엄해진 경계망을 빠져나가 다시 만주로 갔다.
1932년 그녀는 일제의 만주 침탈을 조사하러 온 국제연맹 일행에게 자신의 손가락 두 마디를 잘라 보냈다.
“대한은 독립을 원한다”고 혈서로 쓴 흰 손수건에 싸서 들고 만주국의 신경(新京)에 침투했지만 경계가 삼엄해 전달에는 실패하고 말았다.
이듬해인 1933년 남자현은 만주국의 일제 전권대사를 암살할 계획을 세웠다. 무기를 인수하는 과정에서 내부 밀고로 일제 경찰에 붙잡혀 하얼빈 감옥에 투옥됐다.
그녀는 단식을 결심하고 보름 동안 일제가 건네는 식사를 거부한 뒤, 보석으로 풀려나 조선인 여관에서 순국했다.
눈을 감으며 그녀는 아들에게 “내가 가진 돈 200원을 조선이 독립하는 날 축하금으로 바쳐라”라고 유언했다. 이것이 그녀의 숨가빴던 생의 흐름이다.
이제 그 의열(義烈)의 심장 속으로 구체적으로 들어가볼 차례다.
#1. 일제전권대사 죽이러 간 하얼빈 ‘거지할멈’
1933년 2월 27일 오후 3시45분 중국 하얼빈 도외정양가(道外正陽街) 거리. 삐이익, 호각소리가 울렸다.
순간 급박하게 뛰는 발소리 뒤로 일제 경찰 10여 명이 추격하고 있었다.
골목을 돌아섰을 때 저쪽에서 다시 튀어나오는 경찰들. 두어 발의 총성이 울렸다. 총을 겨누며 에워싼 무리 한복판에서 거지 행색의 한 사람이 쓰러졌다.
모자를 깊이 눌러쓰고 있던 그는 여인이었다.
쌍꺼풀 없는 강인한 얼굴의 조선 여인. 그녀의 품에서 비수(匕首) 하나가 나왔다. 성명 남자현(南慈賢). 놀랍게도 그녀의 나이는 환갑을 넘긴 61세였다.
그녀는 피 묻은 의병 군복을 속에 껴입고 있었다.
오래전 남편이 전사할 때 입었던 옷이었다.
(이 내용은 조선중앙일보 1933년 8월 26일자에 보도되었다.
또 1956년 대한문화정보사에서 나온 <독립혈사(血史)>의 ‘남자현여사 약전(略傳)’ 281쪽에도 실려 있다.
(피 묻은 의병 군복은 손자인 김시련 씨의 1991년 증언이다.)
대체 이 여인은 왜 걸인 차림으로 하얼빈 거리를 걷고 있었을까?
일제는 왜 이 여인을 긴급 체포했을까? 우선 시계를 한 달여 거꾸로 돌려 그 해 1월 초로 가보자.
남자현은 부하 정춘봉(鄭春奉)과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일제가 허수아비 만주 정부를 세우고 난(1932) 뒤 중국 깊숙이 침공할 준비를 하고 있답니다.”
“죽일 놈들! 저들이 저렇게 날뛰는 것을 대한독립군들이 지켜만 보고 있어서야 되겠는가.
저들을 겁내지 않는 이들이 있음을 보여줘야겠다.
저들의 심장에 일격을 가할 방도가 없을까?”
“있긴 합니다만…….”
“말해보아라.”
“만주에서 일제 최고 인물인 부토(武藤信義) 전권대사를 처단하는 겁니다.”
“그놈에게 접근하는 것이 쉽지 않을 듯한데…….”
“오는 3월 1일은 우리 대한이 만세운동을 벌인 지 14년이 되는 때이기도 하지만, 만주국 수립 첫돌이기도 합니다.
이날 이들은 신경(新京:일제는 장춘을 만주국의 새 수도로 선언하며 이렇게 이름을 붙였다)에서 거창한 기념식을 벌일 겁니다.
거기서 거사를 벌이면 역사의 방향을 돌릴 수 있습니다.”
“음…… 무기 조달이 가능하겠느냐?”
“잘 알고 지내는 중국인 몇을 통하면 폭탄까지 준비할 수 있습니다.”
“그래, 고맙구나. 이 일은 내가 처리한다.
환갑을 맞은 몸이니 나는 두려움이 없다. 부토를 처형한 뒤 내 몸을 하얼빈 허공에 어육(魚肉) 갈기로 날리리라.”
1933년 1월 20일 이들은 몇 명의 조선인 동지를 규합한 뒤 중국인들과 함께 다시 모였고 권총 한 자루,
탄환, 폭탄 두 개를 준비하기로 했다. 무기를 조달받는 날은 27일 오후 4시였다. 남강 길림가 4호 마기원(馬技遠) 집 문 앞에 붉은 천을 펄럭이면 그때 무기가 든 과일상자를 옮기기로 했다.
일정이 정해진 뒤 행동대장 남자현은 마음의 정리를 하기 위해 22일 최후 기념사진을 찍었다.
그녀가 간 곳은 도외구도가의 무송도사진관이었고,
사진 찍는 비용은 권수승이라는 동지한테서 빌린 돈 대양 3원이었다고 한다.
23일 오전 10시에 거사 장소를 확인했다.
27일 오후 3시 혹시 있을지 모를 상황에 대비해 거지로 변장한 뒤 절뚝거리며 길림가 4호로 향하고 있었다.
일제 경찰이 덮친 것은 이때였다.
거사를 논의했던 사람 중에 조선인 밀정이 끼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함께 일을 벌이기로 했던 손보현이 봉천에서 먼저 체포되었지만 이 사실을 알지 못한 남자현이 무기를 받으러 갔다가 붙잡힌 것이다.
남자현은 하얼빈 감옥에 투옥되어 이루 말할 수 없는 고문을 받았다.
#2. 인력거와 함께 사라진 손가락 두 마디
1932년 3월 1일 일제는 만주국을 세웠다. 만주사변에 대한 국제적 비난 여론이 커지자 국제연맹은 현장조사단을 파견하기로 했다.
이 소식을 들은 남자현은 우리 민족의 독립 의지를 전할 수 있는 호기라고 판단했다.
9월 19일 국제연맹조사단장 리튼(영국인)이 하얼빈에 오기로 되어 있었다.
그녀는 왼손 무명지를 잘랐다.
무명지를 자르며(1932년 9월 17일)
“사랑하는 나의 아들아, 오늘 왼쪽 무명지 두 마디와 이별하려 한다.
이름이 무명지(無名指)라 한들 어찌 쓸모 없는 손가락이겠느냐.
제 나라를 잃고 무명민(無名民)이 되어 떠도는 나보다는 실한 것이었느니,
어쩌면 평생을 가만히 붙어 내 손을 채웠던 이 작은 것이 나라를 위해 큰일을 할 수도 있겠다 싶구나.
중지와 약지 사이에 어중간하게 여기도 붙었다 저기도 붙었다 살아온 줏대 없음을 논죄하는 준엄한 심판이 아니겠느냐.
아들아, 오늘 하얼빈 남강(마기구에 위치)의 어느 중국인 음식점에서 가만히 내 왼손을 들여다 보나니,
성경에 나온 대로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알 수 없을 만큼 쥐도 새도 모르게 처리해야 할 일이 있구나.
며칠 전 국제연맹에서 일제의 만주 침략 현장을 조사하는 대표단을 파견한다는 첩보를 입수하였다.
서럽고 아픈 이 나라의 뜻을 만천하에 알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아니더냐.
우리는 일제의 지배를 원하지 않으며 독립국가로 살아가기를 원한다는 것을
그들에게 알려준다면 세계에서도 여론이 생겨나지 않겠느냐.
일본은 우리의 입을 틀어막고 우리가 마치 그들을 자발적으로 받아들인 것처럼 세상을 속이고 있지 않더냐.
오늘 이 무명민의 무명지가 비로소 제 할 말을 할 것이다.
아들아, 이제 칼을 가지고 왔다. 내 손가락이 먼저 알고 피가 뛰는구나.
이것을 잘라 모레 국제연맹 조사단장인 리튼에게 전할 것이다.
지금 내게 두려운 것은 없다. 나라를 잃고 남편을 잃었다.
더 이상 잃을 것이 무엇이 있겠느냐. 양반가의 할머니 독립운동을 한다?
일견 우습게도 들릴 일이지만, 현실은 그런 모양을 가릴 때가 아니다.
이 늙어가는 육신의 일부를 끊어, 절규를 내놓아야 할 때도 있는 법이 아니냐. 이제 칼을 들었다.
영양 산골에서 자라난 푸른 초목 같은 육신의 한 가지를 잘라내어 이 몸이 살아 있음을, 이 나라의 백성이 아직 피를 철철 흘리며 살아 있음을 보여야겠다.
나, 남자현의 무명지. 세상을 위해 날아가거라.
내 오른손가락이 왼손가락을 들었구나.
피를 뚝뚝 흘리는 무명지를 붓자루처럼 들고, 이 겨레붙이의 소원을 한번 적어보려 한다.
大韓獨立願. 대한은 독립을 원하오.
이제 이 잘린 손가락을 혈서와 함께 리튼에게 보내리라.”
조선중앙일보(1933년 8월 26일자)는 이 거사가 실패로 돌아갔음을 전하고 있다.
국제연맹조사단은 도리중앙대가에 있는 마디얼호텔에 들었다.
일제는 집집마다 바깥에는 만주국 국기를 걸게 하고 안에는 황제 부의의
사진2010.9을 걸게 함으로써 하얼빈 시민이 만주국을 환영하는 분위기를 내려고 애썼다.
이에 반발하는 ‘혐의분자’들은 체포하여 송화강 건너에 있는 송포집중영에 가뒀다.
조사단이 하얼빈에 머무른 14일간 중국인 5명, 러시아인 2명, 조선인 1명(김곡)이 조사단에 편지를 넘기려다가 일경에게 붙잡혀 총살을 당했다.
이 같은 삼엄한 분위기 속에서 남자현은 손가락과 혈서를 전달하기 위해 안간힘을 다했다.
결국 그녀는 조사단이 머문 마디얼호텔에 드나드는 인력거꾼에게 대양 1원을 주고 그것을 리튼 측에 전해 달라고 맡겼다.
이때 대한 여성들의 독립운동 현황에 대한 보고서도 함께 보냈다고 한다.
(동아일보 1946년 3월 3일자) 그러나 고개를 끄덕이고 사라진 중국인은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다.
배달사고로 끝난 무명지는 만주국 신경의 어느 구석진 곳에서 혈서와 함께 흩어졌을 것이다.
남자현의 애국 義烈 6가지
1. 日帝총독·만주국 전권대사 암살행동
2. 도산 안창호·일송 김동삼 구출
3. 하얼빈 감옥에서 단식 항거로 순국
4. 斷指혈서로 ‘大韓獨立願’ 써서 국제연맹에
5. “해방되면 정부에 보태라” 200원 쾌척유언
6. 쪼개진 독립군 진영, 화합 이끌어
#3. 도산 안창호를 구출하라
영양 시골에 묻혀 살던 47세 아줌마 남자현이 만주 망명길에 오르는 것은 1919년 3월 9일이었다.
왜 그녀는 그 나이에 그때까지의 삶과는 전혀 다른 험난한 역정 속으로 뛰어들었을까?
이 점을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그녀가 일본 부토 대사 암살에 실패하고 붙잡혔을 때,
옷 속에 남편의 피 묻은 옷을 껴입고 있었던 사실은 그녀의 내면을 엿보게 해준다.
그녀는 19세에 결혼하여 24세에 남편 김영주를 잃었다.
뱃속에 아이를 키우고 있었던 그녀는 청천벽력이었을 것이다.
남편을 죽인 것은 일본이었다. 1896년 창의한 을미의병은 그 전해 10월
경복궁 건청궁에 난입한 일본군이 이 나라 국모인 명성황후를 무참히 시해한 것에 격분한 민초의 항거였다.
남편의 죽음에 이어 그녀는 나라가 서서히 죽어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런 가운데서도 남자현은 분노를 숨기고, 반가(班家)의 규율을 지키며 10여 년을 살아낸 것이다.
3·1운동은 그런 그녀의 깊은 의분(義憤)을 마침내 폭발시킨 기폭제였다. 그녀의 무장투쟁을 들여다보면 도무지 목숨을 아끼는 기색이 없다.
“남편과 나라가 죽었을 때 나는 이미 죽었다”는 그 생각이,
근현대사에서 가장 용기 있는 한국 여인을 탄생시키지 않았을까.
초기 만주에서의 활동은 교육활동과 독립군 운영을 위한 자금 모집이었다.
50세가 되던 1920년대 중반까지 그녀는 교회를 설립하고 여자교육회를 조직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활동을 했다.
남자현의 활약이 돋보이기 시작한 것은 1927년 길림(吉林)사건 때다.
도산 안창호(1878~1938)는 1926년 북경에서 좌파와 연합해 ‘대독립당’을 위한 촉성회를 열었다.
이른바 대한독립을 위해 좌·우파가 합작하자는 유일당 운동이었다.
이듬해 2월 국내에서는 신간회가 결성되었다. 안창호는 만주에서도 이 같은 분위기를 이끌어내기 위해 길림을 방문했다.
그런데 길림성 당국이 이들을 무더기로 구속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여기에는 안창호를 비롯해 김동삼·오동진·고할신·이철·김이대 등 지도자들이 대거 포함되어 있었다.
만약 길림성이 이들을 일제에 넘길 경우, 독립운동 진영은 치명타를 입을 위기에 처했다. 도산이 일제 경찰에 넘어갈까 모두 간을 졸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도 발을 벗고 나서 구명운동을 펼쳤다.
이 무렵 남자현이 등장해 길림사건비상대책반을 구성하고 적극적으로 활약했다. 그녀는 투옥된 지도자들을 위해 옥바라지에도 힘을 쏟았다.
그녀는 독립운동사에 획을 그은 길림사건을 해결한 숨은 별이었다.
그녀는 이 사건 이후 무장투쟁가로 변모했다. 1926년 4월 그녀는 길림에서 박청산·김문거·이청수 등과 함께 사이토 총독 암살을 모의했다.
그 달 중순에 남자현은 김문거로부터 권총을 받아 서울로 잠입했다.
혜화동에서 고씨 성을 가진 주인의 집에 기거하며 교회 일을 보며 기회를 노렸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해 1월에 송학선(宋學先)이라는 청년이 총독 암살을 시도한 사건이 일어나 일제 경찰의 경계와 감시가 아주 심해져 있었다.
몇 번이나 붙잡힐 위기를 겪은 뒤 남자현은 서울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당시의 잡지 <부흥>에는 이런 기사가 하나 실렸다.
“왜적들은 선생을 붙잡으려고 대활동을 개시하였는데 선생이 호탄현 지방을 지나다가 홍순사라는 자에게 걸렸다.
선생은 그를 향하여 책망 절반 설유(說諭) 절반으로 ‘내가 여자의 몸으로
이같이 수천리 타국에 와서 애씀은 그대와 우리의 조국을 위함이어늘 그대는
조상의 피를 받고 조국의 강토에서 자라나서 어찌 이 같은 반역의 죄를 행하느냐?’
홍순사는 그 심장과 골수를 찌르는 선생의 일언일구에 감동되어
그 잘못을 사과하고 도리어 갈 길을 인도하여 여비까지 70원을 내어 드리니 이로써 선생의 강한 의지와
크나큰 인격의 감화력이 어떠함을 가히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잃어버린 남자현 유해…
국립묘지에 가묘로 묻히다
#4. “가진 돈 200원은 독립축하금으로 써라” 유언
그녀는 하얼빈 무송도사진관에서 마지막으로 찍은 그녀의 사진을 기억했을까? 그 비장한 표정의 사진은 어디로 갔을까?
1933년 2월 27일 변장한 거지 차림으로 일제에 붙잡힌 남자현은 하얼빈 주재 일본영사관에 설치된 감옥 속에서 봄과 여름을 보냈다.
잔혹한 고문에 시달리던 그녀는 8월 6일 곡기를 끊기 시작했다. 일제가 식사를 넣어주자 그녀는 이렇게 소리쳤다.
“이제 너희가 주는 것은 먹지 않겠다.”
이후 9일(단식 기간에 대해서는 이견이 다양하다)이 지난 17일 사경을 헤매자 당황한 일제는 인사불성인 그녀를 병보석이라는 이름으로 적십자병원으로 옮겨 가족에게 인계했다.
친손자 김시련 씨는 이때의 상황을 이렇게 증언했다.
김씨는 당시 부친 김성삼과 함께 만주 교하에 살고 있었다.
“아버지는 신의주에서 일을 하고 계셨는데, 갑자기 집에 빨리 가고픈 생각이 드셨답니다.
그래서 와 보니 일경으로부터 할머니가 위독하다는 전보가 10여 통 와 있었어요.
그 길로 아버지는 만주 적십자병원을 향해 집을 나섰어요. 그때 나는 아버지와 함께 가겠다고 떼를 썼지요.
어쩌면 할머니를 다시 못 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부자가 도착했을 때 할머니 남자현은 숨을 거두지 않기 위해 애를 쓰는 듯했다. 아들과 손자를 보자 그녀의 두 눈가에서 굵은 눈물이 주루룩 흘렀다.
할머니는 “이제는 됐다”라고 조용히 말했다.
그러고는 하얼빈 지단가(地段街)의 조선인 조씨가 운영하는 여관으로 옮겨 달라고 했다.
그날 저녁 여관에는 남자현의 독립운동가 동료들이 북적였다.
여러 무리가 와서 인사를 하고 눈물을 흘렸다. 이들이 떠나가자 그녀는 아들과 손자를 가만히 불렀다. 그러고는 행낭에서 249원80전을 꺼냈다.
“이 돈 중에서 200원은 조선이 독립되는 날 정부에 독립축하금으로 바쳐라.
그리고 손자 시련을 대학까지 공부시켜서 내 뜻을 알게 하여라.
남은 돈 중에서 49원80전의 절반은 손자 공부시키는 데 쓰고 나머지는 친정에 있는 증손자에게 주어라.”
그녀의 최후를 기록한 신문(조선중앙일보 1933년 8월 26일자)에는 다음과 같이 보도됐다.
“이미 죽기를 각오한 바이니까…….” 단지(斷指)한 손을 내어놓으면서
“이것이나 찾아야지” 하고는 기운이 없어 더 말하지 못하고 혼수상태에 들어갔다.
남자현의 마지막 말에 대해서는 몇 가지가 더 있다.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이 먹고 안 먹고의 문제가 아니라 정신에 있다.”
(손자 김시련 씨의 증언) 이 말은 먼저 나온 말이 아니라,
가족들 중에서 “지금이라도 식사를 하셔서 원기를 회복하는 것이 어떠냐”는 하소연에 대한 대답으로 보인다.
그녀가 선택한 단식이 ‘정신을 살리는 길’이었음을 천명한 것이리라.
그녀는 또 “자는데 깨우지 마라”는 말도 남겼다.
죽음에 대해 초연해진 내면을 엿보게 하는 숙연한 일언이다.
이튿날 점심 때까지 곤히 잠자던 남자현은 결국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
혼수상태로 풀려난 지 닷새 만이었다.
국내 신문들은 ‘부토 모살범(謀殺犯)’이란 제목으로 순국 사실을 알렸다.
이 해 8월 27일자 조선중앙일보의 보도는 이렇다.
“30년 만주를 유일한 무대로 조선00운동에 종사하던 남자현(여자)은 당지 감옥에 구금 중이든 바,
단식 9일 만인 지난 17일에 보석 출옥하였는데, 연일 단식을 계속한 결과 22일 상오(하오) 12시반 경에 당지 조선려관에서 영면하였다.”
순국한 뒤에도 남자현의 장례는 일제가 주목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인이 결집하는 계기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23일 오후 3시 30여 명이 모인 가운데 여관에서 영결식이 치러졌고,
3시20분에 발인하고, 6시경에 마가구 공동묘지에 안장됐다.
하루 만에 장례를 치른 것은 일제의 강요가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9월 들어 아들 김성삼이 부고를 인쇄해서 돌렸는데, 일제 총영사관 경찰서에서 400장을 압수하는 사건이 생겼다.
일제는 남자현의 사망 원인이 단식이라고 적은 부고 내용을 문제 삼았다.
그들은 질병에 의한 사망이라고 주장했다.
아들이 돌린 부고는 장례식을 알리는 게 아니라 묘비 입석식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10월 12일 오후 4시 외국인 공동묘지(지금의 문화공원.묻히다하얼빈시 남강구 동대작가 1호,
남강 러시아 공동묘지 서쪽 한인묘역)에 자리 잡은 남자현 묘 앞에 비석이 세워졌다. 1988년 여름 손자 김시련은 아버지 김성남이 동지들과 남자현의 묘지 앞에서 찍은
기념 사진 한 장을 들고 묘지를 찾으러 이곳으로 갔다.
묘지는 평지가 되어 있었다. 1958년 하얼빈시 도시건설 대약진 때 시내에 있던 묘지가 모두 황산묘지로 옮겨졌다고 한다.
김시련은 이때 “할머니의 묘지는 찾을 수 없으나 할머니가 싸우다
세상을 뜬 하얼빈을 보고 가는 것만 해도 만족합니다”라고 말했다.
남자현 열사의 중국 하얼빈(哈爾濱) 묘지가 47년 전 콘크리트 바닥에 묻혀 버린 것이 밝혀진 것은
남자현 열사의 중국 하얼빈(哈爾濱) 묘지가 47년 전 콘크리트 바닥에 묻혀 버린 것이 밝혀진 것은 2005년이다.
다큐멘터리 사진작가인 강위원 교수가 중국 헤이룽장(黑龍江) 성 일대를 조사했는데 남 열사의 묘가 사라진 것을 발견했다.
중국은 1958년 하얼빈시 난강(南崗) 외국인묘지 일대에 문화공원을 조성하면서 연고가 밝혀지지 않은 조선인 묘를 모두 없앴다.
남 열사는 1933년 숨진 뒤 하얼빈시 난강구 둥다즈(東大直)가 1호에 있는 난강 외국인묘지의 조선인 묘역에 묻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왔다.
당시 연고가 있는 조선인 무덤은 이곳에서 20km 떨어진 황산(皇山)묘지에 이장됐는데 남 열사의 묘는 보이지 않았다.
1967년 국립묘지 이장 땐 가묘로 묻혔다.
1933년 고려여관에서 남자현 임종 때 아들 김성삼과 손자 김시련
한편 남자현 사후 1년 뒤 교하 김성삼의 집에서 1주기 추도회가 열렸다. 당시 동아일보(1934년 9월 5일자)는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도만(到滿) 십여 년에 쓰러져가는 조선민족사회를 위해 일향분투하던
고 남자현 여사는 작년 가을 하르빈(하얼빈) 감옥에서 나오자마자 옥중고초의 여독으로 마침내 세상을 떠난 바 지난 8월 22일은 동 여사의 1주기이므로
현재 교하에 거주하는 김성삼씨 자택에서 1주년 추도회를 거행하였다더라.”
해방 이후 1946년 8월 22일 남자현을 기리는 행사가 벌어졌다.
독립촉성 애국부인회가 추념회를 가진 것이다.
13년 전 17일 단식으로 옥사한 남자현 여사를 추념한다는 취지를 내걸고 오후 2시부터 서울 인사동 승동예배당에서 벌어진 기념행사였다.
남자현의 기억은 당시 여성들에게도 큰 울림을 주었던 것 같다.
전통적인 규범 속에서 자란 구 여성이 나라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초개(草芥)같이 버린,
인상적인 궤적은 그러나 그 이후 너무나 까마득히 잊힌 감이 있다.
#5. 의병 남편 잃고 인생을 혁명하다
남자현의 생은 불가사의하다. 그녀의 가슴속을 가득 메운 신념과 열정은 어디에서 태어난 것일까? 그녀가 태어난 경북 영양군 석보면 지경리로 가보자. 1873년 12월 7일 그녀는 통정대부 남정한(南珽漢)과 이씨 부인 사이에서 둘째 딸로 태어났다(2남1녀). 언니를 일찍 여읜 데다가 어려서부터 무척 총명했던지라 당시 문하에 70여 명의 제자를 가르치고 있던 아버지가 소녀 남자현을 무척 아꼈다. 일곱 살에 한글은 물론 한자까지 읽고 쓸 줄 알았다 한다. 그리고 12세 때는 소학과 대학을 읽었고, 14세에는 사서를 독파하고 시를 지었다.
19세가 되던 해에 아버지의 제자 중 한 사람이었던 열 한 살 많은 김영주와 결혼했다. 김영주 또한 안동의 전통적 유학자 집안(의성 김씨)의 아들로 학문이 빼어나 부친이 맺어준 인연이었다. 1895년 10월 을미사변(명성황후 시해사건) 이후 망국의 징후를 개탄하며 근왕창의(勤王倡義)를 표방하고 일어선 을미의병전투에 남정한의 제자들이 대거 참전했다. 김영주는 김도현 의진(義陣·추정)의 소대장으로 활약하다가 진보와 일월산을 연결하는 산줄기를 오르내리며 전투를 벌이다가 숨졌다.
남편이 순국할 무렵 남자현은 어렵사리 가진 첫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다. 삶이 와르르 무너지는 느낌으로 24세 과부는 일본에 대한 분노와 증오를 새겼다. 그러나 그녀는 의병활동을 하기에는 역부족이었고, 또 모셔야 할 시부모와 키워야 할 아이가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운명에 순응하며 묵묵히 집안일을 감내하고만 있지 않았다. 어쩌면 스스로 해야 할 더 크고 중요한 일을 떠올리며 오랫동안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랬기에 어수룩히 촌부(村婦)로 사는 듯 보였던 그녀는 독립운동을 펼치는 영양 일대의 운동가들과 교류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경성을 지나 만주로까지 활동무대를 넓혔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기 직전인 2월 말, 47세 남자현은 보따리를 싸고 홀연히 고향을 떠났다. 남대문동에 사는 김씨 부인이 그녀를 불렀다고 한다. 2월 26일 연희전문학교 부근에 있는 교회당에서 김씨 부인을 비롯한 교회 신자들과 함께 조선선언격문을 읽었다. 그는 열흘 정도 서울에서 활동하다가 3월 9일 만주로 망명했다. 남자현의 만주행에는 남편과 알고 지냈던 안동 출신 일송 김동삼(당시 만주 지역의 최고 지도자, 1878~1937)의 힘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6. 여성 독립운동가로선 최고 훈장 받아
그녀에 대한 평가의 목소리를 들어보자.
“조선 민족의 결점은 당파와 분쟁이라. 이로써 나라가 망하였거늘 조국 광복을 운동하는 그네들이 또 외지에 가서도 당파싸움을 계속하고 있었다. 서북파니 기호파니 안파니 이파니 하여 1922년 3월부터 8월까지 남만 화인현 등지에는 동족 간에 피 흘리는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 때문에 상해임시정부에서 김리대 씨가 특파되어 화해공작에 애썼으나 성과를 보지 못하였다. 선생은 이 일을 크게 근심하여 산중에 들어가서 한주일 동안 금식기도 하고 손가락을 베어 그 피로 글을 써서 책임관계자들을 소집하였다. 그 성의와 순국정신에 감격한 소위 독립운동 간부들은 누구나 그 뜨거운 눈물과 죽음을 각오하는 피의 설유에 각각 잘못을 회개하고 완전한 쌍방 간의 화합이 성립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환인·관전 등지의 주민들은 그 은공을 감사하여 곳곳마다 나무로 비를 세워 그 공덕을 표창하고 만주 각층 사회에서는 누구나 선생을 존경하게 되었다.” (잡지 <부흥> 1948년 12월호, ‘독립운동사상의 홍일점, 여걸 남자현’)
“한 사대부 집안의 며느리, 의병의 미망인이 적지 않은 나이에 무장 항일투쟁을 위해 만주행을 자처했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가히 혁명적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안동독립기념관 김희곤 관장)
“남자현 여사는 항상 죽은 남편의 피 묻은 옷을 갖고 다녔다고 합니다. 중국인 노파로 변장해 장춘으로 가다 일본영사관 헌병에 체포됐을 때도 지니고 있었지요. 원수의 밥은 사절이라며 끝까지 항거하다 기력이 쇠진해 숨을 거뒀지요.”(박용옥 전 성신여대 교수)
“남자현은 한시도 쉬지 않고 무장투쟁을 했고 꽤 중요한 임무들을 수행했지만 아마도 여자여서 공식 직책이 맡겨지지 않은 것 같다.”(박영석 전 국사편찬위원장)
“아버지(김성삼)와 할머니(남자현)가 길 가다가 왜놈의 밀정을 만났답니다. 할머니가 아버지께 ‘보자기 있느냐’고 하더니 옆의 가지밭에 들어가 가지를 하나 따 보자기에 싸서 마치 총구인 것처럼 밀정의 등에 들이대고 ‘손들어’ 하더니 집으로 끌고 갔답니다. 할머니는 밀정이 두 시간 만에 울면서 잘못했다고 빌자 내보내 주었답니다.”(손자 김시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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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초 윤보선 대통령 때 건국공로훈장 복장을 받았어요. 중장·복장·단장의 세 급이 있었는데, 할머니가 여자로서는 최고였지요.”(손자 김시복)
1933년 2월29일, 만주에서도 가장 추운 도시인 흑룡강성 하얼빈.
남의 나라에 빼앗긴 산하지만 고향집 양지바른 곳에서는 봄소식이 들릴 만도 한데 꽁꽁 언 송화강변은 을씨년스럽기만 한다. 요 며칠간은 영하 30℃를 오르내리는 맹추위가 계속돼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동상에 걸리는 사람이 속출했다. 콧물마저 얼어버리는 한파였다.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대항해 항일 의병활동을 하다 하늘나라로 가버린 남편. 그가 유품으로 남긴 피 묻은 속옷에 누더기 겨울옷 여러 벌을 덕지덕지 껴입은 남자현 여사의 몸도 송화강의 얼음처럼 차디차게 얼어붙어 있었다.
먼 이국땅인 이곳에서 안중근(安重根)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사살한 것을 떠올리며 남 여사는 자나깨나 뇌리에 박혀 있는 말, ‘일제의 심장에 일격을 가하겠다’는 결심을 다시 한번 되새겼다.
한참을 강변에서 서성이던 그녀는 하얼빈역 쪽으로 향했다.
1932년 3월1일 흑룡강성과 길림성, 요령성을 망라하는 중국 동북3성에 괴뢰정권인 만주국을 세운 일본은 하얼빈을 특별시로 지정했다. 불과 20여년 전까지만 해도 강변에 몇 안 되는 어민들이 살던 이 도시의 인구는 어느덧 50만명에 육박하고 있었다.
그녀의 고향인 경상도에서도 많은 동포가 이곳으로 망명하거나 이주했다. 만주의 주요도시인 하얼빈과 장춘, 연길을 중심으로 60만명의 동포가 살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조선 민족의 결점은 당파와 분쟁이다.” 주변에 사는 중국인들이 하는 말을 그녀는 여러 차례 들었다.
고향을 떠난 동포들은 나라가 망하고 조국 광복 운동을 하면서도 먼 이국 땅에서 이리 갈라지고 저리 갈라졌다. 모두가 어렵게 생계를 이어가다 보니 일본 경찰의 밀정노릇을 하며 지내는 사람도 상당수 있었다. 독립운동 지도자들도 서북파니 기호파니 서로 편이 갈라지고 원수처럼 지내도 누가 나서 화해를 시키지 못했다.
부토를 제거하려다 日 경찰에 체포
“이 모든 것이 일제의 침략 때문이다. 만주국 최고의 권력자인 부토(武藤信義)를 제거하는 것만이 내가 일제의 심장에 일격을 가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다.” 그녀는 지난달부터 만주국 건국일인 3월1일 행사에 참석할 예정인 만주국 일본전권대사 부토를 제거하기로 하고 차곡차곡 계획을 짰다. 중국인들로부터 권총 1정과 탄환, 폭탄도 사들였다.
그녀는 만주 거리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거지 차림으로 곧 하얼빈역에서 신경(新京·현재의 장춘)으로 떠날 계획이었다. 만주국 건국 행사가 만주국의 수도인 신경에서 열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래도 느낌이 이상했다. 아니나 다를까, 하얼빈 교외 정양가(正陽街)를 지나던 중, 일본 경찰이 그녀를 체포했다. 거사를 계획했던 동지 중에서 누가 배신을 한 것이다. 대한제국 독립을 위해 일편단심으로 14년간 동분서주하던 남 여사는 끝내 소원을 이루지 못하고 일본영사관 유치장에 감금되었다.
그 후 감옥에 갇혀 있다 죽기로 결심한 그녀는 단식에 들어갔다. 6개월간 옥중에서 당한 고초의 여독으로 단식 9일 만에 인사불성이 된 그녀를 일제는 보석으로 석방했다.
그녀는 적십자병원에 입원했다가 다시 하얼빈에 있는 여관에 거처했으며, 임종이 다가오고 있음을 스스로 깨달았다. 남 여사는 유복자인 아들에게 중국화폐 248원을 내놓은 뒤 “우리나라가 독립이 되면 독립축하금으로 이 돈을 희사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1933년 8월22일 향년 60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훗날 유족은 1946년 3월1일 서울운동장에서 거행된 3·1절 기념식장에서 김구, 이승만에게 이 돈을 전달했다)
1933년 8월27일자 조선중앙일보는 이렇게 보도했다. ‘30년간 만주를 유일한 무대로 조선○○운동에 종사하던 남자현(여자)은 감옥에 구금됐다가 단식 9일 만인 지난 17일 보석 출옥했다. 연일 단식을 계속한 결과 22일 상오에 당지 조선여관에서 영면하였다.”
그녀의 사망소식을 풍문으로 들은 고향사람들의 슬픔은 누구보다도 컸다.
의병인 남편은 왜군과 전투중 전사
그녀는 1872년 12월7일 영양군 지경마을에서 영남의 석학인 부친 남정한(南珽漢)의 3남매 중 막내딸로 태어났다. 부친은 정3품 당상관인 통정대부를 지냈다. 어려서부터 총명해 일곱 살에 이미 한문과 국문을 익히고, 12세에는 소학(小學)과 대학(大學)을 읽었으며 14세에는 사서(四書)를 독파했다고 전해진다.
19세에 결혼했는데 남편은 안동시 일직면 귀미동 출신 김영주(金永周)이다. 의성김씨 가문인 남편은 1896년 의병활동을 하다 왜군과 전투 중 전사했다. 남편이 죽기 전해인 1895년에는 일본 자객들이 경복궁을 습격하여 명성황후를 시해한 을미사변(乙未事變)이 발생해 안동과 영양 등지에서는 의병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남편이 전사하던 당시 그녀는 첫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다. 유복자로 태어난 아이가 김성삼(金星三)이다. 그녀는 아이를 기르면서 시부모를 봉양하지 않을 수 없어 양잠을 하며 손수 명주를 짜서 내다 팔아 가계를 이어 나갔다.
안동대 김희곤 교수 등이 펴낸 ‘영양의 독립운동가 열전’이라는 책자를 보면 남자현이 독립운동에 뛰어든 시기는 1919년 3·1운동 전후다. 그녀는 46세 되던 해인 1919년 2월말 고향을 떠나 망명길에 나섰다.
3·1운동이 일어나기 사흘 전인 2월26일, 그녀는 시위운동이 일어난다는 소식을 편지로 받고 상경했고, 연희전문학교 부근에 있던 교회신자들과 더불어 3월1일 오후 3시에 ‘조선선언격문’을 반포하고 시위에 참가했다. 그녀가 서울에서 교회신자들과 독립운동을 함께 한 것을 계기로 만주로 망명한 뒤에도 선교활동이나 교회를 중심으로 교육운동을 펼친 것으로 보인다.
그녀는 서울에서 열흘 정도 생활하다가 3월9일 아들과 함께 압록강을 건너 중국 요령성 통화현에 망명하여 정착하였다. 그곳에서 비밀무장단체인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1919년 5월 만주에서 조직된 무장독립운동단체)에 가입, 군사들의 뒷바라지를 하기 시작하였다. 이때쯤 그녀가 청산리전투에 참여해 독립군을 간호했다는 기록도 있다. 그 뒤 그녀는 활동무대를 북간도로 옮겨 주로 농촌사회를 누비면서 동포들의 단결을 위해 12개의 교회를 건립했다. 이와 함께 여성계몽운동에도 힘써 10여 개의 여자교육회를 설립하여 여성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데 주력하였다.
안창호·김동삼 구명활동에도 앞장
그녀가 일본총독을 암살하기 위해 채찬(蔡燦) 등과 함께 국내에 잠입해 거사를 추진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1927년 2월말에 터진 ‘길림사건’에서 그녀의 적극적인 활동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길림사건은 상하이 임시정부요인인 안창호 선생을 비롯한 독립운동계의 최고위급 지도자 47명이 중국관헌에게 검거된 사건이다. 안창호는 당시 민족문제 해결을 위해 분화된 이념 차이를 극복하려는 유일당 운동을 펼치고 있었는데, 만주에도 ‘좌우합작’을 독려하기 위해 왔다.
안창호는 길림성 동대문 밖 대동공사에서 김동삼, 오동진 등 독립지도자들과 함께 강연을 하는 기회를 가졌는데, 일본경찰이 길림성 당국에 그 모임을 공산주의자들의 집회라고 속여 이들을 현장에서 구속하도록 요구했다.
이에 우리 임시정부를 비롯해 모든 동포들이 구명운동에 나섰다. 중국은 우리의 항의에 따라 일본의 요구를 무시하고 체포한 인사들을 보석으로 석방하였다. 당시 그녀는 안창호 선생 등 많은 애국지사들이 석방될 때까지 정성껏 옥바라지를 했다.
그녀의 활동이 다시 바깥으로 드러난 것은 만주벌의 호랑이로 불렸던 일송(一松) 김동삼(金東三) 선생이 일본 경찰에 체포되던 때였다. 1931년 10월 일제가 만주사변을 일으켜 요령성뿐만 아니라 길림성에까지 침략의 손길을 뻗치자 김동삼은 길림성을 떠나 하얼빈에 있다가 그곳에서 일본 경찰에게 붙잡혀 투옥되었다. 아무도 김동삼과 접촉을 하지 못하고 있을 때 그녀는 그의 친척으로 위장해 면회허가를 받고 연락책 역할도 했다. 김동삼의 지시내용을 동지들에게 전하고, 비록 실패하긴 했지만 그가 국내에 호송될 때 구출하기 위하여 치밀한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1932년 3월1일 만주가 완전히 일본에 넘어가자 이를 비난하는 국제여론이 일어났다. 국제연맹은 그해 9월 그 현장을 조사하기 위해 하얼빈에 대표단을 파견했다. 이 소식을 들은 그녀는 대한민국 독립의지를 국제사회에 알릴 수 있는 기회가 왔다고 판단하고 일제의 만행을 조사단에게 직접 호소하기 위해 왼손 무명지 2절을 잘라 흰 천에 ‘한국독립원(韓國獨立願)’이라는 혈서를 쓰고, 이를 영국인인 리튼 국제연맹조사단장에게 보내려 한 일화는 유명하다.
중국문단에서는 ‘혁명의 어머니’, 일제는 ‘전율할 노파’라 부른 남자현 여사의 투쟁은 광복 후 여성단체가 나서서 다시 역사의 무대로 등장했다. 광복 이듬해 8월22일 독립촉성애국부인회가 ‘13년전, 17일 단식으로 옥사한 남자현 여사’를 추모한다는 취지로 추념회를 연 것이다. 1962년 3월1일에는 윤보선 대통령이 그녀에게 독립유공자 건국공로훈장 복장(2등 훈장)을 수여했다. 이 훈장은 모두 58명이 받았는데 신채호, 이봉창도 포함되어 있었다. 여성 중에서는 남자현이 유일했다. 영양 출신 남자현 여사가 한국 여성사에 남긴 족적이 그만큼 선명한 것이다.
글=심충택<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장>
사진=손동욱기자 dingdong@yeongnam.com
▨참고문헌 : 김희곤·강윤정·한준호 저 ‘영양의 독립운동가 열전’
공동기획 : 경상북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