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회 경남시조문학상 수상작
땅두릅/ 김승봉
내한성 네 체취는 꽃샘추위 둘렀었다
역경도 디딘 나날 오늘에야 영근 삶들
익은 봄 세운 발돋움 산 채로 거듭난다
앙가슴 토닥여서 세세히 누린 힘살
온정의 손길들로 염원했던 좌표였다
빼꼼히 익은 땅두릅 봄 햇살도 머금었다
치악산 언덕 비탈 쭈뼛쭈뼛 몽글진 밭
독활이란 예명까지 푸른 품만 돋을 새겨
인편에 전해온 온기 선혈 빛이 앙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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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회 노산시조문학상 수상작
다시마 너는 여자/ 박명숙
지느러미 굽이치는 다시마를 널고 있다
황갈빛 등근육이 번들대는 다시마를
키 작은 마을 여자가 이불처럼 널고 있다
물 좋은 여름 해도 한나절 돌아들어
뿌리째 끌려온 몇 다발의 파도 위를
몸뚱이 무너뜨리며 이랑이랑 타오른다
모가지 치켜들고 날비린내 뿜어내며
덕장으로 끌려온 완강한 목숨들을
아가미 파리한 여자가 갑옷처럼 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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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비산의 봄/ 김교한
좀처럼 허물지 못할 외로움의 기둥이었다
아득히 잃어버린 그리움의 아픔이었다
집요한 꽃샘바람을 넘는 기다림이 있었다
-<시조21> 64호 특집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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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화수류정/ 김민성
단단한 용의 머리 정수리에 올라서서
그날에 군주는 어떤 문장 세웠을까
눈 닿아 마주하려니 하루해가 하마 짧다
계절이 지나다가 용연에 발을 푼다
물 밖의 뿌리보다 물속 가지 깊은 한낮
각 세운 돌담 저으며 솔과 버들 길을 연다
화성은 멀리 있어 그리움의 땅이 됐나
언약은 무지개로 색색이 선명하다
열닷새 방화수류정 달빛으로 너는 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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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심 필사/ 김복근
어머니는 방에 앉아 웅녀처럼 글을 썼다.
가녀린 숨 몰아쉬며 기도하듯 글을 썼다.
별 초롱 잠을 깨우고 묵언 수행 글을 썼다.
노을 진 강을 건너
은빛 마음 추스르며
조그만 탁자 위에 아흔 넘은 손길로
동시집 《손이 큰 아이》 필사되어 살아났다.
오랜 삶 동심 더해 조요롭게 하신 말씀
"니가 우찌 이런 생각을 다 했노?"
어릴 적 정든 목소리 하얀 등을 밝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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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 풍경/ 김연동
선 자리 지키려고, 잃은 자리 찾으려고
서초동 광화문을 기웃대던 사람들이
팔랑귀 열어놓은 채
바람 향방 쫓고 있다
희망 같이 싹이 트는 계절을 등에 업고
큰 나무 그늘 아래 새판 짜는 박수 소리
한강은 기색도 없이
휘돌아 가고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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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김정희
종이학(鶴) 곱게 접어 날려 보낸 그 자리
저 건너 강기슭에 물망초로 피었어라
영원을
약속한 언약
붙박이별 되었고
세월은 강물로 흘러, 까치도 뵈지 않는
은하수 오작교는 사라진 옛이야기
휴대폰
찍은 글씨는
흐름별이 되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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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라지꽃/ 김하정
밤을 헤치며
깨어나는 별꽃들
내일이면 이글거리며
솟아날 태양을 위해
보랏빛 옥합 깨뜨려
그 발등에
입을 맞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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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절기/ 류미야
복도는 나온 방을 들여다보게 하는 곳
안과 밖
겨울과 봄
기쁨, 슬픔
그사이
자비한 신의 가위가
마련해둔 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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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 문희숙
길 건너 덩굴째 타오르는 핏빛 향기
환상이 환상에게 목말라 비벼댄다
가시에 찔린 눈동자에선 미로가 쏟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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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은, 지금/ 서석조
퇴박맞은 분통으로
데워지는 붉은 깃발
팽만의 들 날숨에
그리움은 사라지고
누군가
눈물지으면
마른하늘에 날벼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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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킬 2/ 서성자
아무도 무언가를
기다리지 않는 아침
온종일 추적추적 붉은 비는 내려서
엉겅퀴
덤불에 싸인
얼룩을
덮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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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이셔츠를 다리며/ 서일옥
건방을 떨면서 우쭐대던 당신 어깨가
천만큰 시름을 지고 힘없이 누워 있다
그 슬픔 함께 하려고
무릎 꿇고 바라본다
온몸으로 부르짖는 소리 없는 전언들이
흑백의 결을 타고 울음처럼 번지는 시간
무너진 생의 칼라를
다시 세워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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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 손영희
두려움과 망설임,
후회와 결연한 의지
강을 건너기 위해 무엇이 더 필요한가
저 건너
우두망찰 서 있는
나에게로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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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공원/ 양계향
새 역사 창조했던 월드컵 경기장 옆
하늘과 가까운 곳 자리잡은 명당이라
누구의 작명 솜씨냐 하늘공원 멋지네
햇빛, 구름, 바람, 비 가득히 품어 안고
'하늘을 담는 그릇' 전망대 이름처럼
고운 꿈 가득 담고서 오래도록 번성하라
상전벽해 그 문자 이를 두고 말하는가
난지도 매립지 흔적조차 볼 수 없고
은물결 억새 파도에 노을빛이 곱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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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정보 유출/ 옥영숙
봄볕을 쬐고 있는 기와불사 기왓장
다양한 소원 성취 만수무강 적혀 있다
복 짓는 사월 초파일
주소까지 상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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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확하는 날/ 우영옥
하매나 손 모두어
기다리는 햇살 끝에
후두둑 떨어지는
굵직한 호두 열매
제철에 내리는 결실,
무릎 먼저 구부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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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치다/ 윤정란
별들이 사라지든 꽃들이 미쳐가든
여의도에 해 뜨고 광화문에 바람 불어
늘어진 무료 급식소 퇴출당한 백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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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병/ 이남순
쓰러져 본 사람만이
섰던 날을
기억한다
가득 차 있을 때는
듣지 못한
숨비 소리
나누고
비운 후에야
바람과
섞이는 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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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네킹 아파트/ 이분헌
폼나는 신상으로 선보인 아파트
먼발치 유리벽 안 마네킹의 유혹일 뿐
옥조인 신발끈에 눌려
임대도 가쁜 하루
다달이 적금통장 희망을 쏟아부어도
저금리 살얼음판 겨우겨우 건너는데
키높이 구두를 신고
우쭐대는 저 콧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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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독서/ 이우걸
밤은 신이 두고 간
가없는 발견의 영토
꿈꾸는 사람에게는 별을 찾게 하고
외로운 사람에게는 달을 보게 하는
빽빽하게 늘어선
거리의 상가들이
판화처럼 자신의 이름들을 밀어올릴 때
우리는 바쁘게 스친
세계를
다시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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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명(名命)/ 임성구
난생처음 당신에게 건네받은 고귀한 선물
가는 곳곳 달고 다니며 빛나길 염원합니다
살과 뼈, 온몸이 타버려도
온전하게 빛나기를
*명명 (名命): 단순하게 붙여주는 命名과 달리, 부여받아 평생을 달고 다니는 名命은
이름 중에 가장 빛나는 진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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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문을 여는 아침/ 하순희
"왼종일 아무도 전화 한 통 없으니
이 세상에서 이미 죽은 거나 마찬가지네"
화안한 마음거울로
웃음꽃을 피우셔요
누구도 어쩔 수 없는 각자 가진 생명의 꽃
소중히 물을 주고 사랑으로 보살펴서
거뜬히 창문을 열고
응원하셔요 자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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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게시글
함께 가는 길
경남시조 제41호/ 경남시조시인협회/ 2024
바보공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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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19 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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