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임:베토벤의 ‘영웅’은 어디까지 변할까
내용:지난 2세기 동안 프랑스는 3인의 영웅을 탄생시켰다고 한다. 19세 기를 연 나폴레옹, 나치를 막아낸 드골, 그리고 98 월드컵 승부사 지 단(ZIDANNE). 1895년 프랑스혁명 이후 새 세상의 탄생을 동경하던 서 양음악사의 영웅 베토벤은 1904년 교향곡 3번 〈영웅〉을 완성했다.
인민이 진정으로 세상을 대표하는 신세기를 그토록 갈망하던 베토 벤에게 나폴레옹은 음악적 자유정신으로 다가왔고 그 결과는 전례없 는 혁명적인 규모와 어법의 영웅교향곡으로 결실을 맺었다.
물론 나폴레옹의 황제 즉위 소식을 듣고는 베토벤 스스로 영웅교향 곡 악보를 찢으며 내동댕이쳤다지만 9번교향곡에 이르기 전까지는 이 곡을 가장 사랑했다는 실토 또한 구전되고 있다.
나폴레옹 이후 민족주의와 산업혁명의 과정에서 지식인이 본격적으 로 세계사의 전면에 등장했지만 그들의 좌절과 실망 속에 문학을 필 두로 한 전 예술분야가 낭만주의의 심연으로 빠져들었음을 돌아볼 때 베토벤도 예외가 아니었음을 바로 이 영웅교향곡이 증명하고 있 는 듯하다.
그리고 정보지식혁명을 목도하는 지금 20세기 마지막 베토벤 교향 곡 전곡 사이클링의 주인공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1980년대 들어 서면서 이미 명장들의 전곡레코딩 경쟁은 한계를 넘어서 있었다.
올드스쿨의 2대 거성 푸르트뱅글러와 토스카니니 레코드콜렉터간의 냉전적 양극화는 그들 사후 클렘페러로 모아지는 듯하다가 1960년대~ 80년대에 다각화의 해빙무드를 맞이한다.
카라얀, 솔티, 번스타인, 하이팅크, 셀, 반트, 마주어 등이 그 주 역이다. 이렇듯 베토벤 교향곡 전곡, 특히 제3번 교향곡을 둘러싼 백가쟁명은 20세기 음악연주사의 패권과 직결되는 철권의 심장부였 기에 영웅없는 지역영웅주의식 군웅할거가 지속될 수밖에 없었다.
그 암투의 수혈에는 메이저 음반사의 상업주의가 그 일익을 담당 했다. 미학적 필요성이 검증되지 않은 소모적 정쟁은 이미 대중성 을 지나쳐 상업성으로 치닫고 있었고 90년대 들어 빅뱅은 예고되 고 있었다.
그 예언은 호그우드에 의해 처음 제시되었다. 기존의 정쟁은 맥시 멀리즘에 기초한 양산체제에 따른 과도 팽창으로 이어져 결국 과투 자의 후유증을 남기며 팽창 폭발 이후의 신속한 응축이라는 물리적 실험에 들어서게 되었다.
정격연주(PERIOD INSTRUMENT)라는 새로운 응축의 시도가 유행처럼 번지며 악화는 양화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호그우드의 시도는 메이저 음반사에겐 30여 년 만의 단비였고 노링턴, 아르농쿠르, 가디너, 브뤼헨은 처녀 제물이 되어갔다.
처음의 신선함은 경험 많은 노처녀의 능숙함으로 변질되면서 힘이 부치는 콜렉터들은 자신들의 광적인 유희가 21세기에도 계속되어야 하는지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허황된 사치(MAXIMALISM)나 청순가련 에 가려진 내숭(AUTHENTICCISM) 모두를 거부하는 그 무엇은 부실한 수사학 따위로는 결코 피할 수 없어 보이는 무명악단과 지휘자에게 서 시작되었다.
드라호즈(NAXOS)의 검소하면서도 진솔한 연주는 연주력에 대한 평 가 이전에 정보지식사회의 주역에겐 미식가적 도취 미학이 아닌 아 카데믹한 지성 미학으로 자리할 것이다.
래틀은 올 가을시즌부터 전국 순회연주에 돌입한다. 아바도 이후 베르린 필 입성 제 1순위로 꼽히고 있는 그에게 베토벤의 영웅은 그를 1999년 12월 21세기 제천의식의 제물로 삼아버릴 지도 모른다.
20세기 연주사를 대표하는 영웅 교향곡의 레코드 섭렵은 신세기를 향했던 베토벤의 열정에 대한 감사와 반성의 주문으로 계속 이어질 것이다. 극적 주관성의 푸르트뱅글러, 서사적 객관성의 토스카니니, 경도된 아름다움의 미학 카라얀, 정격의 이단자 아르농쿠르, 중세의 고전적 품격과 해학의 쌍두마차 브뤼헨(PHILIPS)과 노링턴(EMI), 바 로크적 정통성과 시대적 역진성이라는 사유의 모험을 만끽한 사발 (FONTALIS)은 왕관없는 대관식의 영웅들이다.
뽀어너스!!
교향곡 제3번 ≪영웅≫
(Symphony NO. 3 "Eroica" OP. 55)
인간의 해방을 부르짖던 베토벤의 일면을 찾아볼 수 있는 곡이다. 1789년 일어난 프랑스의 혁명 에서는 코르시카 섬 출신의 일개 포병 사관이었던 나폴레옹이 반란을 평정하고 국내 최고 사령관 이 되었다. 민중의 권리를 옹호하고 자유의 정신에 불타 있던 베토벤은 프랑스 혁명을 흥미 있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당시 빈에 주재하고 있던 프랑스 대사와 대사관의 비서이자 바이 올리니스트였던 루돌프 크로이쩌로부터 프랑스에 자유와 질서를 가져온 나폴레옹의 업적에 대해 자세히 들을 기회가 있었다. 플라톤의 '공화국'을 숙독한 바 있었던 베토벤은 이 시대의 영웅의 자태를 보여준 나폴레옹을 자신의 작품으로 찬미하고 싶었다. 그리하여 33세 때인 1803년 여름 이 교향곡의 작곡에 착수하여 1804년 봄에 완성시켰다. 스코어의 표지에는 '보나파르트'라고 썼 으며 밑에 자신의 이름 '루비트비히 반 베토벤'이라 적어 이를 프랑스 대사관을 통해 파리로 보 내려고 할 무렵, 나폴레옹이 황제가 되었다는 소식이 빈에 퍼졌다. 이 소식에 분개한 베토벤은 그 사본의 표지를 찢어 버렸다고 한다.
"저 사나이도 역시 속된 사람이었어. 그 역시 자기의 야심을 만족시키기 위해 민중의 권리를 짓 밟고 누구보다도 심한 폭군이 될 것이야."
라고 외치면서 말이다. 이후 다시는 나폴레옹에 대해 언급도 안했다는 그는 2년 뒤 이 곡을 출 판하면서 '한 사람의 영웅을 회상하기 위해 작곡했다'라는 말을 덧붙였다. 17년 후 나폴레옹이 세인트헬레나 섬에서 죽었다는 보도를 듣고 비로소 '나는 그의 결말에 어울리는 적절한 곡을 써 두었다' 라고 했다는 베토벤. 이는 이 작품의 제2악장에 있는 '장송 행진곡'을 의미하는 것이었 다.
알레그로콘 브리오, 3/4박자의 제1악장은 대담하고 힘찬 연주가 물결처럼 밀려가는 분위기의 곡 이다. 종횡 무진한 테마의 처리와 다채로운 음악상이 놀랍다는 평을 듣는다. 제2악장은 아다지오 아사이, 2/4박자의 장송 행진곡인데 위대한 용사의 추모에 대한 장중한 맛이 흐른다. 엄숙하게 묘지로 향하는 영구차, 수레의 삐걱이는 애처로운 소리가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들며 아프게 만든 다. 스케르초 알레그로 비바체, 3/4 박자인 제3악장은 지금까지의 '교향곡의 제3악장은 미뉴에트 를 써야 한다'는 공식에서 벗어나 스케르초를 넣어 독자적인 특성을 나타냈다. 유머와 익살이 섞 여 힘에 차 있으면서도 영웅의 허탈한 모습을 그대로 담은 부분이다. 승리의 개가를 연상시키면 서 화려한 진행으로 계속되는 마지막 4악장은 알레그로 몰토, 2/4박자이다. 발레 음악의 테마를 사용했으면서도 힘차게 연주되는 오케스트라에 의해 장중하게 마무리되는 피날레는 그때까지는 없었던 베토벤만의 독창적인 창안이다.
베토벤이 음악계 선배들의 영향을 받아 모방적인 음악을 만들던 시기를 벗어난 첫 작품으로 평 가되는 이 곡은 그만의 강한 개성과 힘의 균형이 훌륭하게 나타나는 곡이다. 후에 바그너는 이 곡의 4개의 악장을 '활동, 비극, 정적의 경지, 사랑'이라고 평하면서 참된 베 토벤의 모습이 이 곡 안에 다 있다고 했다.
첫댓글 ♡제4호 ㅊㅋㅊ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