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마을 그대로’순천 낙안읍성
설날이 다가오면 새삼 옛날이 그립다. 산그림자가 넓게 드리운 고향의 겨울 들판. 이엉 갈아 인 초가지붕. 좁은 돌담을 끼고 도는 고샅길.
까치밥 몇 알씩 매달고 서있는 감나무들. 사금파리 먹인 명주실에 연을 날려보내고, 초가 처마밑을 뒤져 참새잡던 시절. 요즘 아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가난해도 따뜻하고 포근했던 그 시절의 ‘겨울동화’를 알까.
전남 순천시 승주군 낙안읍성은 ‘옛날 이야기’ 같은 정을 담뿍 느낄 수 있는 곳. 순천(順天)은 ‘하늘의 이치에 따른다’는 땅이름처럼
유순하고 후덕한 고을이다. 고만고만한 산자락이 이리저리 겹쳐지며 만든 구릉 같은 산세. 높지 않은 조계산 자락에는 태고총림 선암사와 승보종찰
송광사 같은 명찰이 자리잡아 고풍(古風)을 더한다.
낙안읍성은 순천시에서 서쪽으로 22㎞ 떨어져 있다. 읍성에 발을 들여놓으면 타임머신을 타고 한 세월을 훌쩍 넘어 옛날로 돌아간 느낌이
든다. 읍성에는 사극의 무대 세트처럼 작은 초가들이 옹기종기 어깨를 대고 있다. 잘 갈아엎은 마당 앞 텃밭에선 흙냄새가 구수하게 풍겨온다.
닳아서 모서리가 뭉툭해진 섬돌, 반지르르하게 닦아놓은 장독대…. 원님이 집무를 보던 동헌과 객사도 그대로 남아있다.
낙안읍성에는 사람이 산다. 민속촌이나 향토박물관처럼 옛모습을 그냥 재현해놓은 것이 아니라 사람의 숨결이 배어있다. 6만8천평의 넓은 평지에
자리잡은 낙안읍성에는 100여세대 200여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읍성은 조선 태조 때 세워졌다. 이 고장 출신의 김빈길 장군이 성을 쌓았다고 한다. 나라가 기울던 고려말은 왜구의 노략질이 기승을 부리던
시절. 물자가 풍부한 남해안 일대는 왜구가 늘 눈독을 들이던 곳이었다. 순천은 보성·벌교·여수 일대의 해산물과 농산물이 함께 모이는 교통의
요지였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흙담장을 두른 토성이었으나 300년쯤 후인 인조 때 낙안군수로 부임했던 임경업 장군이 석성으로 증축했다.
성은 1~2m 크기의 직사각형 자연석으로 쌓았다. 높이와 폭은 각각 4m 정도. 성곽의 길이는 1,410m나 된다. 성을 한바퀴 도는데만
약 40분 정도 걸린다. 성내에는 동내리, 서내리, 남내리 등 3개 마을이 있다.
조선시대 모습 그대로인 마을은 역사의 산 교육장이다. TV에 나오는 대로 원님이 죄인을 호령하고 집무를 보던 동헌, 중요한 손님이나 중앙
관리들을 묵게 했던 객사 등이 그대로 남아 있다. 아전들이 거처했던 내아도 볼 수 있다. 낙풍루, 낙민루 같은 누각에서는 남도의 정자문화를 느낄
수 있다.
성곽에 올라서면 옛날의 흑백사진 같은 풍경이 펼쳐진다. 노란 초가 지붕이 반달 같은 곡선으로 소담스럽게 앉아 있다. 전체적으로 황토색이
짙게 배어 있는 듯한 마을 풍경은 화가 김수근의 작품을 떠올리게 한다. 붓 터치가 예리하지도 않고, 색감도 화려하지 않은 그림 속의 그
시골마을.
고샅길마다 아름드리 느티나무와 팽나무, 은행나무, 푸조나무 등 고목들이 버티고 서서 까치와 참새를 불러들인다. 싸리비 자국이 남아 있는
마당 가에는 어머니들이 정한수를 떠놓고 소원을 빌었음직한 정갈한 장독대가 있다. 또 한 굽이 돌아가면 흥겨운 주막집이 깃발을 내걸고 손님을
맞는다. 평상에 앉아 마시는 막걸리가 걸쭉하다. 무쇠솥에 지어낸 밥 냄새도 구수하다.
고령토를 빚어 도자기를 만드는 도예방, 물레로 삼베나 명주를 짜는 아주머니, 새끼로 멍석을 짜는 할아버지도 만날 수 있다. 옛 추억을
떠올린 여행객들은 마당 한 쪽에서 주먹만한 돌로 비석치기를 한다. 아이들에게는 물푸레 나무로 깎은 자를 들려 자치기도 가르친다.
나무판에 굵은 철사를 박아 만든 썰매로 얼음을 지치고, V자형 가지에 노란 고무줄을 묶어 만든 새총으로 참새를 쫓던 재미…. ‘인스턴트
시대’의 아이들에게 동짓달과 정월, 그 길고 긴 겨울날의 사연을 다 보여줄 수는 없다. 그러나 아이들 손잡고 낙안읍성에 가면 아이들도 컴퓨터
게임만큼이나 흥미진진한 아버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새벽 안개가 성벽을 넘어 산줄기를 타고 사라지는 겨울 아침. 밥짓는 연기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낙안읍성에는 정이 뚝뚝 묻어나오는 우리들의
옛날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여행길잡이
호남고속도로 승주IC에서 빠져 857번 도로를 타고 내려가면 남내리 4거리가 나온다. 우회전해 10분 정도 가면 왼쪽으로 낙안읍성 들어가는
길. 서울에서 순천역까지 하루 10여차례 기차가 다닌다. 순천역에서 낙안읍성까지는 63번 버스를 타면 된다. 순천역에서 낙안읍성까지 택시로는
20분 거리. 고속버스는 센트럴시티에서 떠난다. 광주까지 간 뒤 광주종합터미널에서 순천행 버스를 타도 된다.
청매실농원 순천농장에서 매실 사료로 2년을 키운 순천시 연양동 한우고기식당(061-724-5455)의 ‘일품매우’는 육질이 부드럽다. 산성
성분을 완화시켜주는 알칼리성 매실 효과 때문. 안심추리·안창 2만원, 등심 1만8천원, 갈비 2만원, 갈비탕 5,000원. 매실 제품이 찬으로
나온다. 승주IC 입구에 있는 진일식당(061-754-5320)은 백반 전문점. 전어 내장으로 담근 밤젓, 꽃게장, 생선구이 등 반찬만 무려
15가지나 된다. 돼지고기를 썰어 끓인 김치찌개도 압권. 4,500원. 승주 선암사와 송광사 입구에는 산채백반집들이 많다.
순천까지 갔다면 선암사와 송광사를 빼놓을 수 없다. 조계산 앞 뒤로 앉아 있는 선암사와 송광사는 모두 1,500년 가까이 된 고찰.
선암사는 1698년 세워진 보물 400호 승선교와 강선루 앞 오솔길도 아름답다. 선암사는 신라 경문왕 때 도선국사가 가람을 일으켰다. 30여동의
전각과 함께 보물 8점, 지방문화재 11점 등 모두 19점의 문화재가 있다. 송광사는 신라말 혜린선사가 창건한 후 보조국사 지눌이 당시 타락한
불교를 바로잡고 우리 불교의 전통을 새롭게 하기 위해 정혜결사를 벌였던 도장이다. 지눌, 진각을 비롯한 16국사를 배출했을 정도로 이름이 높다.
목조문화재가 많은 사찰로 16국사영정을 봉안하는 국사전과 목조삼존불감, 고려고종제서 등 국보 3점을 비롯해 보물 13점, 천연기념물과 문화재
18점, 지방문화재 14점 등 곳곳에 역사가 깃든 문화재가 남아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