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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밤, 밤을 먹고 나서 동네를 산책했다. 희미한 바람이 낮의 더위를 식히고 있었다. 그 미풍을 타고 기분 좋은 꽃 향기가 실려왔다.
어디서 나는 것일까? 지나치는 여인들의 화장품이나 향수 냄새는 아니었다. 그보다는 연했다.
알고 보니 초등학교 당장을 넘어 핀 장미 꽃에서 나는 향기였다.
가던 길을 멈추고 어둠 속에서도 그 향기만큼이나 선명하게 빛나는 붉은 꽃송이를 바라보았다.
순간 이 풍경이 매우 낭만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장미 꽃이 있다고는 하지만 그 외에는 건조한 풍경임에도 말이다.
확실히 그것은 은은한 향기 때문이었다. 생각해보니 나는 장미 향을 제대로 느껴본 적이 없다.
그 꽃 향기를 맡아보기는 했지만 그것이 꽃 송이만큼이나 아름답다고 느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것이 내 안의 낭만 세포를 건드린 것이다.
낭만에 대한 생각은 자연스럽게 엘라 피츠제랄드가 노래한 'Isn’t It Romantic'으로 이어졌다.
그녀는 이 곡을 1956년 앨범 [Ella Fitzgerald Sings the Rodgers & Hart Song Book]에서 노래했다.
버디 브레그먼이 이끄는 오케스트라를 배경으로 그녀는 부드럽고 우아하게 노래했다. 생애 처음 사랑에 빠진 여인의 노래 같았다.
'Isn’t It Romantic'은 리차드 로저스와 로렌즈 하트 콤비가 1932년 영화 [Love Me Tonight]을 위해 만든 곡이다.
이후 이 곡은 수 많은 보컬과 연주자들이 즐겨 노래하고 연주하는 스탠더드 곡이 되었다.
그 중에 나는 엘라 피츠제랄드가 제목이 말하는 낭만적인 분위기를 가장 잘 표현했다고 생각한다.
엘라 피츠제랄드는 늘 그랬다. 어떠한 곡이건 그녀의 목소리를 거치면 낭만을 한껏 머금곤 했다.
마치 삶에는 행복만 있다는 듯 그녀의 노래에는 슬픔과 불안이 없었다.
심지어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파란 하늘이 나를 보고 웃고 있는 것은 내가 파란 하늘만 보고 있기 때문이라고.
1961년 피아노 연주자 루 레비가 중심이 된 쿼텟과 함께 녹음한 앨범 [Clap Hands, Here Comes Charlie!]이 대표적이다.
이 앨범에서 그녀는 보통 어둡고 우울한 분위기로 해석되곤 하는 곡들을 대거 노래했다. 하지만 그녀는 어둡고 우울한 분위기를 그대로 두지 않았다.
'Born To Blue'가 대표적이다. 이 곡의 가사는 제목만큼이나 우울하다.
노래 속 주인공은 모든 것에 부정적이다. 삶 자체를 재미 없어 한다. 나아가 태생적으로 우울한 기질을 같고 태어났다고 생각한다. 이 모두 헤어진 연인 때문이다.
이 곡은 매우 어두운 삶을 살다 간 쳇 베이커(Chet Baker)의 노래로 널리 알려져 있다. 쳇 베이커는 이 곡을 실연 당한 사람의 입장에서 우울하게 노래했다.
그러나 엘라 피츠제랄드는 그렇지 않았다. 원곡의 우울한 정서를 무시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우울에 빠지지 않았다.
그것은 마치 우울함을 설명하는 것 같았다. 자신이 왜 우울한지 아는 자의 노래라 할까?
그러니까 노래의 주인공은 "누가 너 왜 그리 우울한데? 라고 물으면 맞아 나 우울해. 이게 모두 실연의 아픔 때문이야. 하지만 뭐 괜찮아. 어떻게든 되겠지. 아니면 네가 나를 좀 우울해 줄래?" 라고 말할 줄 아는 사람인 것이다.
'Round Midnight'은 어떤가? 피아노 연주자 델로니어스 몽크(Thelonious Monk)가 쓴 이 곡은 밤의 긴장을 담뿍 담고 있다.
베니 하니겐이 쓴 가사도 낮에는 그럭저럭 견디다가 자정 무렵이면 사랑이 떠날까 불안해 하고 우울해 하는 사람을 그리고 있다.
이 곡 또한 엘라 피츠제랄드는 밤의 매혹만 남기고 우울은 뒤로 밀어 놓았다.
마일즈 데이비스(Miles Davis)가 뮤트 트럼펫으로 그랬던 것처럼 그녀는 밤을 낯의 불안이 증폭되는 시간이 아니라 낭만으로 가득한 시간으로 표현했다.
그래서 그녀는 곡 사이사이 가벼운 기교를 부리며 어두운 밤을 즐긴다.
1960년 앨범 [Let No Man Write My Epitaph]에 담긴 'Who’s Sorry Now'도 그런 경우다.
이 곡은 앨범 타이틀과 같은 제목의 영화에 슬픔을 주제로 한 이 곡에서도 그녀의 노래는 슬픔 그 자체보다는 그에 대한 위로의 마음이 더 강하다.
같은 앨범의 마지막 곡으로 수록된 'Reach For Tomorrow'는 그녀가 슬픔을 위로하고 희망을 담아 노래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곡이 아닌가 싶다.
이 곡의 가사는 과거보다는 내일을 바라보며 꿈을 유지하라. 현재보다 내일은 나을 것이라는 희망 가득한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곡을 엘라 피츠제랄드는 진실한 친구의 조언처럼 신뢰감 가득한 분위기로 노래한다.
그래서 나는 이 곡을 들을 때면 모든 어려움이 해결되고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며 막을 내리는 영화를 그리곤 한다.
아! 앨범 [Let No Man Write My Epitaph]는 엘라 피츠제랄드가 직접 출연했던 같은 제목의 영화를 바탕으로 제작되었다.
그녀는 영화에서 'Reach For Tomorrow'를 비롯해 'Angel Eyes', 'I Can’t Give You Anything But Love' 등을 노래했다.
우울한 분위기의 노래를 긍정적으로 노래할 줄 알았던 만큼 그녀는 밝고 사랑스러운 분위기의 노래는 그 정서를 더욱 또렷하게 표현하곤 했다.
실제 그녀를 기억하게 하는 곡들은 모두 낭만적이고 경쾌한 분위기의 곡들이 대부분이다.
1963년도 앨범 [Ella Fitzgerald Sings the Jerome Kern Song Book]에 담긴 'A Fine Romance' 같은 곡이 그렇다.
넬슨 리들 오케스트라의 산뜻한 연주를 배경으로 그녀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낭만 가득 노래했다.
아무리 우울한 사람이라도 새로운 삶의 기회를 꿈꾸게 만들 정도로 순도 높은 낭만이었다.
1954도 앨범 [Songs in a Mellow Mood]에 담긴 'People Will Say We're in Love' 같은 곡도 엘라 피츠제랄드의 매력을 제대로 담고 있다.
엘리스 라킨의 피아노 반주 위로 그녀는 사랑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는, 행복을 감추려 해도 감추지 못하는 사람이 마치 자신인양 연기하듯 노래했다.
엘라 피츠제랄드의 사랑스러움은 선배 트럼펫 연주자 루이 암스트롱과 함께 노래할 때 더욱 빛났다.
루이 암스트롱(Louis Armstrong)은 알려졌다시피 솔로 연주와 노래에서 재즈의 기본을 제시, 확립했던 인물이다.
또한 늘 웃음을 잃지 않으며 대중친화적인 노래와 연주를 펼쳤다.
엘라 피츠제랄드의 낭만적인 노래는 루이 암스트롱의 영향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엘라 피츠제랄드와 루이 암스트롱은 1956년부터 이듬해까지 석 장의 앨범을 함께 했다.
행복은 나누면 배가 된다는 말처럼 밝은 성향의 두 보컬의 어울림은 모든 곡에 더 큰 행복을 불어넣었다.
첫 앨범 [Ella and Louis]에 담긴 'Cheek To Cheek'은 그 중 빛나는 곡이었다.
1935년 어빙 벌린이 프레드 아스테어 주연의 영화 'Top Hat'을 위해 쓴 이 곡은 사랑하는 사람과 볼을 맞대고 춤을 추면서 느끼는 천국에 있는 듯한 행복을 그리고 있다.
그에 걸맞게 루이 암스트롱과 엘라 피츠제랄드는 손을 맞잡고 볼을 맞댄 채 흥겨이 춤을 추는 연인들처럼 노래했다.
남녀가 서로를 바라보는 눈에는 사랑으로 가득하며 가벼운 움직임에는 내일의 행복으로 가득하다.
1957년에 선보였던 [Ella and Louis Again]에 담긴 'Love Is Here To Stay'도 마찬가지다.
거쉰 형제가 1938년 영화 'The Goldwyn Follies'를 위해 썼던 이 곡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세상이 달라지더라도 사랑은 그대로일 것임을 말하고 있다.
여기서도 엘라 피츠제랄드와 루이 암스트롱의 호흡은 사랑스러웠다.
실제는 16세의 차이가 나는 선후배 이상은 아니었지만 노래만큼은 설렘과 행복으로 가득한 연인 같았다.
루이 암스트롱의 구수한 목소리와 엘라 피츠제랄드의 부드러운 목소리는 성격이 맞지 않는 남녀의 대비가 아닌 사로 부족한 것을 메워주는 천생연분의 어울림으로 다가왔다.
같은 앨범에 수록된 'Let's Do It (Let's Fall In Love)'도 그랬다.
1928년 콜 포터가 뮤지컬 'Paris'를 위해 쓴 이 곡은 만물이 사랑을 하듯 모두 사랑하자며 연애를 권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에 걸맞게 엘라 피츠제랄드와 루이 암스트롱은 연인들이 사랑을 남들에게 자랑하는 노래했다.
사람들은 손을 곡 잡고 같은 곳을 바라보는 남녀의 모습을 질투한다.
이처럼 엘라 피츠제랄드의 노래는 밝고 긍정적이다. 그렇게 노래할 때 제일 매력적이다.
나는 이러한 밝음과 긍정성이 그녀의 삶에 기인하는 것이라 믿었다. 그녀의 삶 또한 노래만큼 행복했으리라 믿었다.
그러나 실제는 달랐다. 1917년 버지니아 주에서 태어난 그녀는 그리 행복하지 않은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녀의 부모는 결혼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녀를 낳고 얼마 지나지 않아 헤어졌다.
이후 어머니는 새로운 남자와 가정을 이루었는데 그 의붓아버지는 그녀를 학대했다. 이를 피해 그녀는 할렘에 사는 이모네 집으로 떠나야 했다.
그런 중에 좋았던 학교 성적은 나빠졌고 아예 학교를 빠지며 비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심지어 매춘 지역에서 경찰 단속을 망보는 일을 하기도 했다. 그 결과 그녀는 감화원 생활을 하기도 했다.
결혼 생활도 그리 행복하지 않았다. 그녀는 두 번 공식적인 결혼을 하고 한번은 비밀리에 결혼했다. 모두 결과가 좋지 않았다.
그나마 베이스 연주자 레이 브라운과의 6여 년간 이어갔던 두 번째 결혼 생활이 안정적이었다 할 수 있는데 이 또한 워낙 두 사람이 각자의 공연 활동으로 바빴기 때문이었다.
성격 또한 그녀는 활달함과 거리가 있었다. 밴드 멤버들과 함께 어울리는 것도 쉽지 않았다. 그저 공연을 하고 다음 공연을 준비하며 홀로 시간을 보내곤 했다.
이런 삶에서 어떻게 그녀는 행복 가득한 노래를 부를 수 있었을까? 자기 삶의 어두움을 감추기 위해서였을까?
그보다 나는 그녀가 현실에 좌절하지 않고 삶을 보다 나은 방향으로 개척하려는 마음으로 밝고 긍정적으로 노래했다고 생각한다.
실제 그녀는 “중요한 것은 당신이 어디서 왔느냐가 아니라 어디로 가고 있느냐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에 걸맞게 그녀는 현실의 어려움을 불평하지 않았다.
1934년 17세의 어린 나이에 할렘의 아폴로 극장의 노래 경연 대회에서 우승하며 본격적으로 노래를 시작하게 된 것도 매사를 긍정적으로 바라보려는 자세의 결과였다.
사실 그녀는 노래가 아닌 춤으로 경연에 참가하려고 했다. 그러나 자신보다 월등히 춤 실력이 뛰어난 다른 참가자들을 보고 주눅이 들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대신 노래로 참가하기로 마음을 바꾸었다. 이 선택이 그녀의 삶을 완전히 바꾸었다.
전문 보컬의 삶을 시작한 이후 처음 인기를 얻었던 곡도 느린 발라드가 아닌 밝고 경쾌한 곡이었다.
칙 웹 오케스트라의 일원으로 활동하던 1938년에 부른 'A-Tisket, A-Tasket'이 그 곡이었다.
엘라 피츠제랄드는 어린 시절 즐겼던 수건 돌리기 놀이에서 영감을 받아 직접 가사를 썼다.
그리고 장난기 가득한 소녀처럼 유쾌하게 노래했다. 이것은 이후 그녀가 평생에 걸쳐 노래할 즐거운 노래를 예견하는 것이었다.
수줍음이 많은 성격도 그녀가 노래에 보다 집중할 수 있도록 했다.
그 결과 콜 포터, 로저스 & 하트, 어빙 벌린, 거쉰 형제, 해롤드 알렌, 제롬 컨, 자니 머서 등 스탠더드 재즈 작곡가들의 곡을 거의 모두 섭렵할 수 있게 했다.
실제 그녀가 남긴 앨범들 중에는 1956년의 [Ella Fitzgerald Sings The Cole Porter Song Book]처럼 한 작곡가, 작사가의 스탠더드 곡들을 주제로 한 송북 앨범이 8장이나 된다.
그리고 그녀의 노래는 그 곡에 대한 모범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훌륭했다.
이를 위해 1959년도 앨범 [Ella Fitzgerald Sings the George and Ira Gershwin Song Book]에 담긴 ''S Wonderful'을 들어보자.
거쉰 형제는 이 곡을 1927년 브로드웨이 뮤지컬 [Funny Face]를 위해 썼다. 사랑이 주는 커다란 행복을 그린 노래였다.
넬슨 리들이 이끄는 오케스트라를 배경으로 엘라 피츠제랄드는 사랑의 행복을 조금씩 고조되는 노래로 표현했다. 곡의 정서를 입체적으로 반영한 노래였다.
한편 아이라 거쉰은 엘라 피츠제랄드가 노래하기 전까지 나는 우리 형제의 곡들이 얼마나 좋은지 알지 못했다고 했다.
그녀가 스탠더드 곡을 얼마나 이상적으로 노래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무대에서 엘라 피츠제랄드는 전혀 수줍어하지 않았다. 쾌활한 열정으로 가득한 사람인 양 관객을 압도하며 노래했다.
1960년 당시 서독이었던 베를린의 도이치란드 홀에서의 공연을 담은 앨범 [Ella In Berlin]에서 부른 'Mack The Knife'가 대표적이다.
그녀는 노래를 시작하기 전에 여성이 노래한 적이 없는 노래라며 가사를 생각하며 노래를 들어달라고 한다. 그리고 모든 열정을 다해 흥겹게 노래한다.
폴 스미스의 피아노와 짐 홀의 기타가 중심이 된 쿼텟과 함께 한 노래임에도 그녀의 시원한 노래는 전체 사운드를 마치 빅 밴드와도 같은 울림을 준다.
한편 이 곡은 루이 암스트롱의 노래로 많이 알려져 있다.
그래서인지 엘라 피츠제랄드도 중간에 루이 암스트롱을 언급하며 그의 굵고 허스키한 목소리를 흉내내기도 한다. 그것이 공연을 더욱 즐겁게 한다.
그녀가 바람과 달리 가사를 생각하며 노래를 듣지 못할 정도로 말이다.
이 베를린 공연에서 그녀는 'How High The Moon'도 노래했다. 이 곡을 그녀는 자신의 모든 기교를 발휘해 노래했다.
그 기교란 빠른 속도에서도 정확한 발음, 저역으로부터 고역까지 분수처럼 단번에 상승하는 폭 넓은 음역, 맑고 깨끗한 톤, 그리고 루이 암스트롱에게서 전수받은 스캣 솔로 이다.
특히 특별한 가사 없이 흥에 따라 구음(口音)으로 마치 색소폰이나 트럼펫처럼 자유로이 솔로를 이어가는 스캣은 그녀의 인기가 단지 밝고 긍정적인 분위기 때문만이 아니라 넘볼 수 없는 탁월한 노래 실력에 기인한 것임을 깨닫게 했다.
또한 곡의 후반부에서는 'Smoke Gets In Your Eyes'를 살짝 넣기도 하는 부분에서는 그녀가 무대에서는 재치와 위트로 가득한 밝은 사람이었음을 생각하게 한다.
한편 말년에 그녀는 당뇨병으로 인한 합병증으로 고생했다. 1993년에는 이로 인해 두 다리를 잘라야 했다.
그렇다고 그것이 그녀를 불행하게 만들지 않았다. 노래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더 노래하는 것이라 했을 정도로 그녀는 노래하는 삶을 사랑했다.
그녀의 마지막 스튜디오 앨범으로 남아 있는 1989년도 앨범 [All That Jazz]를 들어보면 어느덧 그녀가 활력을 잃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노래를 즐기는 그녀의 모습은 그대로이다. 조금은 힘겨워하지만 그래도 밝고 긍정적인 분위기로 노래를 이어간다.
엘라 피츠제랄드는 1996년 6월 15일 집에서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평생 그녀는 낭만을 담아 노래했다.
그녀를 재즈의 영부인(First Lady)이라 부르는 것은 그녀의 음악적 성과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그녀의 노래가 사람들을 행복하게 했기 때문일 것이다.
만약 세상이 우울하게 보인다면, 그래서 한줌의 행복이 필요하다고 느낀다면 엘라 피츠제랄드의 노래를 들어보기 바란다.
당신의 의지와 상관 없이 긍정적인 마음이 스르르 안에서 생기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와 함께 당신의 삶 또한 장미의 향기처럼 그윽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