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수님 -
☆ 2013년 1월5일 주님 공현 전 토요일
[청주] 실천하는 사람이 아름답다.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독서 : 1요한 3, 11 - 21
† 복음 : 요한 1, 43 - 51
★ 살아간다는 것은 곧 사랑하는 것이다. 우리 삶에서 사랑이
존재하지 않으면 그것은 더 이상 삶의 의미가 없다. 사랑은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게 하는 필수 조건이다. 요한은 생명과 사랑의
이러한 관계를 신앙 안에서 설명한다(제1독서).
★ 나타나엘은 나자렛에서 특별한 인물이 나오리라고 기대하지
않았다. 그 반면에 예수님께서는 나타나엘에게서 진실함을 보았다.
나타나엘은 예수님에 대해서 잘 몰랐지만, 예수님께서는 나타나엘에
대해서 잘 알고 계셨다. 요한 복음 15장 16절의 말씀처럼, 사실
나타나엘이 예수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나타나엘을
이미 선택하셨던 것이다(복음).
◈ 오늘의 묵상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 ‘이스라엘’은 본래 이사악의 아들 ‘야곱’의
새 이름입니다. 야곱은 ‘속이는 자’라는 뜻입니다. 실제로
야곱은 형 에사우를 두 번이나 크게 속였고, 그로 말미암아
고향에서 떠나야 했습니다. 그가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얻게 되었을 때는 세월이 지나 가족과 함께 재산을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올 때였는데, 바로 형 에사우를 만나기 전날 밤이었습니다.
그날 밤 그는 공포와 두려움 속에 떨다가 신비로운 존재와
씨름하게 됩니다. 이 씨름이 새벽까지 끝나지 않자, 신비로운
존재는 야곱에게 그만 싸우자고 합니다. 그러나 야곱은 복을 받기
전까지는 손을 놓지 않겠다고 합니다. 이에 그 신비로운 존재는
“네가 하느님과 겨루고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으니, 너의 이름은
이제 더 이상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라 불릴 것이다.”
(창세 32,29) 하고 말합니다.
여기서 신비로운 존재는 누구일까요? 누구보다도 먼저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나 사람과도 겨루었다고 하니, 야곱의
내면에 자리 잡고 있던 형 에사우와 싸운 것이기도 하고, 자기
자신과 싸운 것이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그날 처음으로
‘거짓된’ 모습이 아니라 가장 정직한 모습으로 자신과, 자신의
형제와, 하느님과 대면하여 씨름한 것입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이라는 이름은, 거짓된 ‘야곱’의 삶에서 철저하게 자신을
솔직하게 드러내 놓고 자신과 주위와 하느님과 대면할 줄 아는
진실한 삶으로 변화된 것을 가리킵니다.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 이 말은 나타나엘이 다른 이스라엘 사람과 달리,
또한 야곱과 달리, 철저하게 자신과 주위와 하느님과 정직하게
대면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 줍니다. 그러한 나타나엘을
예수님께서 알아보신 것입니다.
-매일 미사 -
◈ [청주] 실천하는 사람이 아름답다 /
반영억라파엘 감곡매괴성모성당
2013년 다해 1월5일 주님 공현 전 토요일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
+ 요한 1,43-51
실천하는 사람이 아름답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이러저러한 많은 사람을 만납니다. 그 중에는
본받고 싶은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 물론
좋은 기억으로 남아서 다른 사람에게 소개 시켜 주고 싶은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오래오래 좋은 사람으로 기억되고, 보고
싶은 사람으로 남았으면 좋겠습니다.
안드레아와 베드로의 고향은 벳사이다인데 필립보도 벳사이다
출신입니다.벳사이다는 갈릴래아 호수 북쪽 요르단강 하구에
위치하며, 그 지명의 뜻은 ‘어부의 집’, 혹은 ‘고기의 집’
입니다.지명을 미루어 생각하면 그들이 어부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필립보는 예수님을 만났고 안드레아가 형 시몬에게
했던 것처럼 예수님을 만난 사실을 나타나엘에게 전하였습니다.
나타나엘은 히브리 이름으로 ‘하느님의 선물’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나타나엘은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 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사실 성경에 의하면 메시아의 고향은 베들레헴입니다(미가5,1).
많은 유다인들은 그리스도는 갈릴래아에서 나올 수 없고 베들레헴에서
나야 하며 다윗 후손이어야 한다(요한7,41-42).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자렛에서 무슨 신통한 것이 있겠는가? 하고 말한 것입니다.
그가 알고 있는 것이 결국 걸림돌입니다. 그러나 필립보는 나타나엘에게
“와서 보시오”하고 말하였습니다. 그야말로 “백문이 불여일견”
입니다.
마침내 나타나엘이 필립보의 권고에 의해 발길을 옮기게 되는데
예수님께서 먼저 그를 알아보고 말씀하셨습니다. “필립보가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 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
(요한 1,48). 이 말씀은 그대가 공부하는 랍비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라는 말씀입니다. 당시 율사들은 올리브나무나 무화과
나무 아래 앉아서 율법서를 공부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말씀은
나타나엘이 율법서를 공부하면서 메시아를 기다려왔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뜻이 담겨있습니다.
나타나엘은 자신을 꿰뚫어 보시는 예수님께 놀라 “스승님,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이십니다”(요한 1,49).
하고 믿음을 고백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 믿음에 바탕을
두고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요한1,51). 하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복음은 창세기 28장12절 이하의 ‘야곱의 꿈 이야기’와 아주
비슷합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베텔에 서 있었던 것과 비슷한
하나의 하느님의 현존을 보게 된다는 것을 약속 하신 것입니다.
베텔은 하느님의 계시가 충만하게 나타난 곳이며 하느님께서는 신앙의
눈으로 바라보는 이들에게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믿는 이들은 하느님께서 당신을 드러내심을 보게 될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시쿤등한 반응을 보인 나타나엘에게 ‘와서 보시오’
하고 끝까지 인도하는 필립보의 모습을, 또 ‘와서 보시오’ 하고
확신을 가지고 얘기할 수 있는 믿음을! 그는 귀한 분을 만났으니
이웃에게 소개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베텔의 꿈을 상기해 보면 야곱이 브엘세바를 떠나 하란을 향하여
가다가 한곳에 이르러 밤을 지내게 되었는데 꿈을 꾸었습니다. 그는
꿈에서 하늘에 닿는 층계가 있고 그 층계를 하느님의 천사들이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잠에서 깨어나 “진정
주님께서 이곳에 계시는데도 나는 그것을 모르고 있었구나” 하면서
두려움에 사로잡혀 외쳤습니다. “이 얼마나 두려운 곳인가! 이곳은
다름 아닌 하느님의 집이다. 여기가 바로 하늘의 문이로구나.”
(창세28,16-17)
그는 아침 일찍 일어나 베고 자던 돌을 그곳에 세워 석상으로 삼고
그 꼭대기에 기름을 붓고는 그곳을 베텔이라고 불렀습니다. 베텔은
‘하느님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결국 하느님의 집은 어디에 있는가?
하느님의 눈으로 보는 곳에, 하느님의 뜻을 사는 곳에 있습니다.
묵시록 21장 2절 이하를 보면 “보라, 이제 하느님의 거처는 사람들
가운데에 있다. 하느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거처하시고 그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느님 친히 그들의 하느님으로서 그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 다시는 죽음이
없고 다시는 슬픔도 울부짖음도 괴로움도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라고 적혀있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행하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아름답고 그는 좋은 사람으로 기억되고 보고 싶은 사람으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집을 밖에서 찾지 말고 지금 삶의 자리를
하느님의 집으로 알고 살아야 하겠습니다. 고달프고 힘든 이 집이
하느님의 집입니다.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수도회] 두 달간 기쁘게 하는 한 마디 칭찬
지난 연말, 큰 교통사고를 겪었지만 불행 중 다행으로 크게
다치지 않은 한 가족의 가장이 제게 이런 말씀을 하시더군요.
“이렇게 누워서 지난날을 돌아보니, 그간 별 의미를 두지
않았던 하루 일과, 부담스럽게만 느껴졌던 가족, 귀찮게만
여겨졌던 직장업무, 스트레스로 다가왔던 거래처 사람들이
그렇게 소중해 보이더군요. 이제 가까운 사람들 더 사랑하며,
매일 매일에 좀 더 의미를 부여하며 그렇게 살아가라는
표시겠죠?”
들떴던 연말연시가 어느새 지나가고 다시금 삶의 현장에서
고생들이 많으시겠지요?
한 조사에 따르면 고된 업무 속에서 그나마 희망을 안겨주는
것은 직장 상사나 동료들의 따뜻한 한 마디 말이랍니다.
그러나 칭찬에 유독 인색한 우리들이지요. 선진국에서 상사란
존재는 부하직원을 격려하고 지원하는 사람인 반면, 한국에서
상사란 존재는 ‘스트레스의 요인’일 가능성이 많답니다.
칭찬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는 마크 트웨인이란 사람의 다음과
같은 말을 통해서 잘 알 수 있습니다.
“나는 한 마디의 칭찬으로 두 달을 기쁘게 살 수 있다.”
올 한해 서로 서로에게 이런 말 좀 더 많이 사용하면 좋겠습니다.
“요즘 많이 힘들지?”
“이번 일 마무리하느라 정말 수고 많았어요.”
“자네가 역시 최고야!”
“자네, 정말 일 잘 하는군.”
최근 큰 프로젝트를 제대로 성사시킨 한 회사원의 이야기입니다.
직속상관은 여러 차례에 걸쳐 다른 사람들 앞에서 그 회사원을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했다지요. 그 회사원은 성과 자체보다
상사가 인정해준 점이 더 기뻤답니다. 상사로부터 인정과 격려를
받은 그 회사원은 그날부터 출근시간이 기다려졌답니다. 멀리서
직장건물이 눈에 들어오기만 해도 가슴이 뛰기 시작했답니다.
보십시오. 칭찬 한마디가 이렇게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칭찬하는 CEO로서의 예수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공생활이 시작되자마자 예수님께서 역점을 두신
프로젝트가 ‘인재 양성’이었습니다.
어떤 면에서 예수님은 타고난 리더였습니다. ‘인사가 만사’
란 사실을 잘 알고 계셨던 예수님께서는 제자단 모집과 양성을
위해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십니다.
부족한 사람들, 때로 아직 기본적인 교양도 갖추지 못한 사람들을
뽑아 교육시키느라 예수님은 많은 고초를 겪으셔야했습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예수님의 다양한 교육적 접근 방식입니다.
각 사람의 취향이나 성향, 수준, 상황에 적합하게 개별적으로
접근하십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나타나엘(하느님의 선물이란 의미를 지닌
이름)은 진리를 향해 개방되어 있는 제대로 된 신앙인이었습니다.
정직하고 성실한 사람, 당시 보기 드믄 유다인이었습니다.
나타나엘의 인간됨됨이를 즉시 파악한 예수님께서는 그를 당신
제자단에 꼭 포함시키고 싶으셨던 나머지 즉시 효과를 보는
칭찬이란 도구를 사용하십니다. 칭찬도 보통 칭찬이 아니라
들으면 입이 찢어질 정도의 칭찬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칭찬의 강도가 얼마나 세었던지, 나타나엘은
그 ‘한방’에 완전히 돌아서고 맙니다.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자 사람은
거짓이 없다.”
올 한 해 동안 이렇게 사람을 살리는 칭찬, 사람을 사람답게
만들어 주는 칭찬. 사람의 품위를 드높이는 칭찬을 보다 많이
사용하면 좋겠습니다.
가정 안에서도 혹시 실직 중에 계신 가장에게 실망의 눈초리를
보내기 보다는 이런 말씀 한번 던져주시기 바랍니다.
“아무것도 안하고 있어도 당신의 존재가 제게 얼마나 소중한지
모른답니다.”
“아빠, 힘내세요. 아직 우린 견딜만해요.”
-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인천] 겉으로만 보이는 것에만 의미를 두어서는 안 됩니다.
이상하게도 나이를 이야기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나이가
많아서 못하겠다고 말씀하시고, 또 나이가 너무 어려서 뭘
하겠냐는 말씀도 듣습니다. 그런데 과연 나이가 과연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일까요? 나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마음입니다. 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마음, 어떠한 경우에도 포기하지 않는 마음,
주님께 철저하게 의탁할 수 있은 마음 등을 갖출 때 비로소
내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요즘에 인기 있는 개그
프로에서 체중이 많이 나가는 개그맨이 자신의 역할을 마치면서
이렇게 말하지요.
“오해하지 마라. 마음만은 홀쭉하다.”
겉으로 보이는 부분이 아니라, 마음이 중요하다는 이야기.
분명히 우리들이 공감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들은
왜 겉모습만을 더욱 더 중요하다며 쉽게 판단해서 이야기할까요?
세월의 흐름에 따른 피부의 노화는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습니다.
물론 철저한 피부 관리로 인해서 자신의 나이보다 훨씬 더 좋은
피부를 간직할 수는 있겠지만, 갓난아기의 피부를 영원히 계속
유지하겠다는 것은 오히려 욕심일 뿐입니다. 그러나 마음마저
노화하도록 내버려둔다면 이것은 큰 죄입니다. 즉, 부정적인
마음, 쉽게 포기하는 마음, 주님을 의심하는 마음 등을 간직하는
마음의 노화는 주님의 뜻에 반하는 커다란 죄라는 것입니다.
남들에게 젊게 보이려고 노력하십니까? 그런데 이제는 주님께
젊은 마음을 보여드리기 위해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요?
예수님 시대의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 특별히 율법학자나
바리사이들과 같은 종교 지도자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것은 율법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 안에 담겨 있는
뜻보다는 겉으로 사람들에게 보여 지는 모습이 더욱 더
중요했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위선자라는 혹독한
말씀까지 하셨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나타나엘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한
이유로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엉뚱한 말씀인 것
같지만, 이는 무화과나무의 특징을 율법에 비유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무화과나무는 나무와 잎은 크지만 열매가 아주
작지요. 이처럼 무성하지만 제대로 된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를 율법에 비유하신 것입니다.
겉으로 보이는 율법에만 충실했던 나타나엘은 그제야 예수님께서
정말로 어떤 분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바로 자신의 닫혀 있었던
마음을 활짝 열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그리고 이로 인해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는 상태에서 탈출할 수 있었고, 이를
통해 하느님의 아드님을 직접 목격하고 함께 할 수 있는 영광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겉으로만 보이는 것에만 의미를 두어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는
젊은 마음으로 주님과 더욱 더 하나가 되는 진정한 주님의
제자가 되어야 할 때입니다.
우리는 사랑을 구현하도록 마음을 바꿀 수도 있고, 반대로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잘못된 습관에 물들 수도 있다(샤론 샐즈버그).
1월 8일에 있을 서품식 준비를 위해 모인 인천교구 신학생들.
세라비(신은경, ‘행복한 동행’ 중에서)
어느 잡지에서 본 글을 나누고자 합니다.
조이스 캐롤 오츠는 노벨 문학상 후보를 발표할 때면 줄곧
언급되는 작가 중 하나다. 그녀는 캐나다 록포트라는 작은
마을에서 장녀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상상력이 풍부하고
재기발랄했지만, 집안 형편이 어려워 상급 학교에 진학하지
못했다. 친구들이 도시의 상급 학교로 떠나가자 그녀는 졸업식
날 교실에 혼자 남아 흐느껴 울었다. 그 모습을 본 학교
관리인 할아버지가 그녀에게 “세라비!”라고 위로해 주었다.
“세라비(C’est la vie)는 프랑스어로 ‘그게 인생이야!’
라는 뜻이란다. 프랑스인들은 일이 뜻대로 되지 않으면 양팔을
벌리고, 어깨를 으쓱 올리며 ‘세라비!’라고 하거든. 우리
인생이 우리 마음대로만 되는 건 아니야. 그러니 불평하거나
좌절하지 말렴. 그래봤자 변하는 건 아무 것도 없으니까.
차라리 ‘세라비!’하고 웃어 넘기고 네가 할 수 있는 최선을
찾아보아라.”
그녀는 비록 상급 학교 진학은 하지 못했지만 동생들을 돌보고
집안의 농장일을 거들면서 치열하게 읽고 썼다. 때로 미래에
대한 불확실함과 지금의 처지가 서러워 눈물을 흘릴 때도
있었지만, 그럴 때마다 “세라비!”라고 외친 뒤 다시 습작에
몰두했다.
마침내 그녀는 <전율하는 가을>로 성공적인 데뷔를 했다. 후속작인
<세속적 기쁨이 있는 정원>은 전미 문학 비평가상을 받는 쾌거를
이뤘다.
그녀는 요즘도 이 말을 즐겨 한다. 인생의 고통에 직면했을 때,
그것에 사로잡히기보다 “세라비!” 하고 웃는 순간, 마법이
시작된다는 걸 믿기 때문이다.
- 인천 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마산] 과거를 아시는 분
나타나엘은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었지만 나자렛 출신이란 말에 마음을
닫습니다. 그러나 그분을 만나는 순간 바뀝니다. 영혼을 꿰뚫는 말씀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
예수님의 이 말씀에 나타나엘은 승복했습니다.
나무 아래 있는 것을 봤다는 말에 그렇게 달라질 수 있을까요? 그건 아닐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지난날을 이야기했을 것입니다. ‘나무 밑에
있는 것을 보았다.’는 표현은 나타나엘의 과거를 이야기했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는 필립보한테 말했습니다.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 시골에서 무슨 인재가 나오겠느냐는 말입니다. 당시로는
예루살렘 말고는 어디에서도 인재가 나올 수 없는 분위기였습니다.
나타나엘은 위대한 스승을 찾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마음을 읽으셨고 그의 소년 시절과 꿈을 이야기했을 것입니다. 그것이
‘무화과나무 아래 있는 것을 보았다.’는 표현입니다.
나타나엘은 꿈을 이루어 줄 분으로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꿈을 이루어 주실 분입니다. 이 한 해, 그분의 제자로 살아간다면
우리가 바라는 많은 것들이 현실이 되어 나타날 것입니다.
- 신은근 신부(마산교구 교포사목) -
◈ [기타]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
2013년 1월5일 주님 공현 전 토요일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
(요한 1, 43-51)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요한 1, 43-51)
세상에 인류를 창조하시고 각 한사람마다 하나씩 다 기억하시어
사랑해 주시는 하느님께서는 찬미와 영광 받으소서.
예수님께서는 믿지 않는 나타나엘이 예수님 쪽으로 오는 것을
보시고 그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
나타나엘에게 하신 이 말씀이 저희에게도 해당되기를 기도합니다.
마음 안에 아무런 거짓도 없고, 주님의 평화와 사랑과 진리가
가득한 사람이라면 주님께서도 그를 보고 얼마나 대견해하시고
기뻐하시겠습니까?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교인들이 주님을 믿고 따른다고 하지만,
삶 안에서는 주님을 닮지 않은 모습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세상에 휩쓸려 거짓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그런
세상에 살고 있고, 또 그것이 세상에서는 지혜로 통하는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그러다 보니 마음에 수많은 거짓이 들어 있어 양심은 무디어지고,
죄에 대하여 둔감하게 되어 자신의 영혼의 상태가 어떤 모습인지
깨닫지를 못합니다.
그러나 어느 날, 어느 순간에 자신의 영혼의 상태를 보게 될 때
자신의 모습에 놀라 까무러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며 하느님의
이름도 제대로 부르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한 날이 저 세상에 가서 온다면 얼마나 비참하고 원통하고
후회스럽겠습니까? 아무런 변화의 기회도 없고,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라면.....
그러한 날이 저 세상에서 맞이하지 않도록 우리는 깨어 기도하고
자신의 양심을 바로 세워야합니다. 매일 매일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그 안에 허물이나 잘못된 것에 대하여 참회를 하며 하루하루를 보낼
때 우리는 희망의 내일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의 주님, 주님의 사랑으로 저희의 양심을 비추어 볼 수 있게
하여 주시고, 주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이 되게 하여 주소서.
그리하여 어느 날 어느 때라도 자신의 본 모습을 보게 될 때,
그러한 기회가 주님의 은총임을 깨닫고 참회의 기회로 삼는 겸손한
사람이 되게 하여주소서.
그리하여 주님께로부터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주님의
자녀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 라는 말씀을 듣게 하여주소서.
아멘.
- 희망 신부님의 묵상 글 -
◈ [기타] 사랑은 오래 참고 봉사하는 것입니다.
2013년 다해 1월5일 주님 공현 전 토요일
<우리는 형제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습니다.>
(요한 1서 3장 11~21절)
오늘 독서 서두에 보면 ‘서로 사랑해야 한다.’ 는 말씀이
있습니다. ‘사랑’이라는 단어가 있는데요. 여러 가지 정의가
있겠지만, 요즈음에 가장 마음에 와 닿는 글귀는 이런 겁니다.
장 바니에 라는 사람의 책에 나온 글귀인데요. 이렇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봉사하는 것입니다.’
아마 공동체를 만든 그가 그 안에서 많이 본 모습 중에 하나가
‘공동체 구성원들이 힘들어서, 또 상처를 받아서 공동체로부터
멀어지는 모습’일 거란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그런 말을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드는데요.
저도 본당 공동체 안에서 살아가다보면 많이 보는 일 중에 하나가
‘내가 빠지면 되지...’ 하는 모습인 거 같습니다. 공동체 일을
하다보면 지치기도 하고, 상처를 주고받기도 하면서 틀어질 때가
있는데, 그럴 때 ‘내가 빠지면..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 이런
어려움을 안 겪어도 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거 같습니다.
저도 본당에 처음 발령받아 왔을 때 충실한 마음을 가지고자 했지만,
3~4번 정도 삐진 적이 있습니다. 그럴 때 ‘다 놓아버리자...’
라는 생각을 했었던 거 같은데요. 요즘 공동체에 관한 글들을 읽고
묵상하면서, ‘그 생각이 제일 위험한 거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삐져서 공동체와 거리를 좀 두었을 때 이런 생각들이 들었습니다.
‘공동체에 붙어 있지 않으니 그 안에서 맺을 수 있는 어떤 열매도
맺을 수 없게 되었구나.. 힘들 때마다 쓰러지니 더 깊이 뿌리를 내려
성장하지 못하겠구나... 칸막이를 치고 담을 쌓으니 공동체 안에서
맛볼 수 있는 어떤 기쁨과 행복도 느낄 수 없게 되었구나...’ 하는
것들입니다.
그런 생각들을 경험하고 나니 장 바니에의 이야기, 곧 ‘사랑은
오래 참고 봉사하는 것이다.’라는 말이 더 깊이 와 닿는 거
같습니다. 공동체를 사랑하는 것은 오래 참고 봉사하는 것이지 떠나는
게 아니다.. 하는 이야기를 하는 거 같습니다.
우리 주위에 있는 노부부를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 오랜 세월
동안 겪어야 할 어려움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그런데도 끝가지
함께 살아가는 그 모습이 정말 대단해 보입니다. 아마 저보다
부부이신 분들이 더 잘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저도 노신부님이나
노수녀님들을 볼 때에 그런 존경심을 갖게 되는 거 같습니다.
‘많은 어려움과 시련이 있으셨을 텐데.. 그래도 저분은 평생
끝까지 성실하셨구나..’ 하는 생각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집니다.
오늘 하루, 다음의 글귀를 한 번 묵상해 보시면 좋을 거 같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봉사하는 것입니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김난도 교수님의 강의에서..)
요즘 아버지들이 소외되었다는 것을 주위 사람들의 말에서 알 수
있는 거 같다.
오랜만에 집에서 티비를 보고 있는데 여행 갔다 온 아들이 이런
말을 한다.
“어... 집에 아무도 없네...”
초인종이 울려서 나가보니 반장님이다. 나를 보고 하는 말이 이렇다.
“집에 아무도 없어요~”
- 밤송이 신부님의 묵상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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