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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내 꿈이 아니라 하나님이 구원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본문: 창세기 37:1~36
하나님은 인간의 꿈과 실패, 심지어 악함까지도 사용하셔서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계획을 이루십니다.
1. 요셉의 꿈은 인간의 야망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였습니다(37장 1절 ~ 11절)
꿈 — חֲלוֹם (할롬): 본문의 꿈은 인간의 내면적 야망이나 잠재의식이 만든 투사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도적으로 역사의 목적을 알리시는 '계시적 도구'입니다.
여러분, 솔직히 말씀드려 볼까요?
우리는 다 내 인생이 좀 그럴싸하게 잘 풀리기를 바랍니다.
좋은 직장 얻고, 내 자녀가 남들보다 앞서가고, 안정된 노후를 맞이하는 것 등. - 나쁜 게 아닙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교회 안에서도
이 세상의 성공 방정식인 것처럼 '비전'과 '비전 성취'라는 말들이 거룩한 단어로 포장되어 흘러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꿈을 크게 가져라, 하나님이 네 꿈을 이루어 주신다!" 많이 들어보셨지요?
그런데 오늘 본문 창세기 37장은 우리의 이런 기대를 아주 시원하게 부서뜨립니다.
우리는 요셉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긍정의 힘을 가집니다.
"요셉처럼 꿈을 포기하지 않으면 결국 총리가 된다!"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단 한 번도 요셉의 위대한 야망이나 끈기를 칭찬한 적이 없습니다.
오늘 본문은 인간의 꿈을 이루는 성공 신화가 아니라,
인간의 어리석음에도 자기 뜻을 기어이 이루시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성경을 자세히 보면, 요셉의 집안은 결코 모범적인 가정이 아니었습니다.
야곱에게는 네 명의 아내가 있었고, 어머니들의 시기와 질투는 고스란히 아들들에게 대물림되었습니다.
게다가 야곱은 라헬의 아들인 요셉만 대놓고 편애했습니다.
그 비싼 채색옷을 요셉에게만 입혔습니다.
요셉은 또 어떠했습니까?
형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쪼르르 달려가 고자질하는 눈치 없는 17세 철부지 소년이었습니다.
이 깨어지고 상처 입은 가정에 어느 날 하나님이 개입하십니다.
그 통로가 바로 '꿈'(할롬(חֲלוֹם)'입니다.
이 꿈은 요셉이 잠들기 전에 "나 나중에 왕이 되어야지" 하고 꾼 야망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찾아오셔서 보여주신 그분의 구원 계획, 즉 '계시'였습니다.
곡식 단들이 자기에게 절을 하고, 해와 달과 열한 별이 자기에게 절을 하는 꿈을 이야기하자 형들은 분노합니다.
당시 고대 사회에서 형이 동생에게,
부모가 자식에게 절을 한다는 것은 문화적으로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모욕이었기 때문입니다.
형들은 외칩니다.
"네가 참으로 우리의 왕이 되겠느냐? 참으로 우리를 다스리게 되겠느냐?"
사실 이 형들의 분노는 오늘날 우리 안에도 고스란히 살아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내 자존심을 건드릴 때 본능적으로 반발합니다.
"왜 내가 낮아져야 합니까?
왜 내가 저 사람에게 져주어야 합니까?
왜 내 생각대로 인생이 흘러가지 않습니까?"
말씀이 내 죄를 지적하고, 내 열심과 의를 부정하면 마음이 뒤틀립니다.
예수님 당시 사람들이 메시아를 십자가에 못 박았던 이유도 똑같습니다.
자기들의 기대를 만족시켜 주지 않고, 회개와 자기 부인을 요구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너무나 자주, 하나님의 말씀을 내 꿈을 이루기 위한 도구로 전락시킵니다.
내 생각과 다르면 말씀을 밀어냅니다.
우리가 먼저 인정해야 할 것은,
우리는 내 중심적인 꿈을 따라 살고 싶어 하는 죄인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우리를 놓지 않으십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완악함보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더 크기 때문입니다.
요셉의 꿈은 인간의 야망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방적인 구원을 위한 계획의 시작이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2. 하나님은 인간의 악함까지도 구원의 도구로 사용하십니다(37장 12절 ~ 28절)
야곱은 형들이 양을 잘 치고 있는지 보고 오라며 요셉을 세겜으로 보냅니다.
형들은 멀리서 채색옷을 입고 오는 요셉을 보며 조롱합니다.
"꿈꾸는 자가 오는도다! 자, 그를 죽여 한 구덩이에 던지자.
그리고 그의 꿈이 어떻게 되는지 우리가 보자!"
참 무섭고 잔인하지 않습니까?
인간은 시기심에 사로잡히면 괴물이 됩니다.
"네가 하나님의 계획 안에 있다고? 우리가 그 계획을 끊어버리겠다"는 선전포고입니다.
맏형 르우벤이 유혈 사태는 막아보려고 목숨만은 살려 구덩이에 던지자고 제안합니다.
구덩이 — בּוֹר (보르): 물을 모아두는 웅덩이지만 본문에서는 물이 없는 마른 구덩이로,
즉 인간의 힘으로는 절대 빠져나올 수 없는 '절망의 상태'와 '죽음의 음부'를 상징합니다.
형들은 요셉이 오자마자 그 화려한 채색옷을 거칠게 찢어발기고 그를 물 없는 구덩이(보르)'에 던져버립니다.
그리고 그 곁에 앉아 태연하게 밥을 먹습니다.
구덩이 밑바닥에서 살려달라고, 집에 보내달라고 울부짖는 동생의 비명 소리를 들으면서 말입니다.
마침 유다가 제안합니다.
"죽여봤자 무슨 유익이 있겠냐.
차라리 지나가는 이스마엘 상인들에게 돈 받고 팔아넘기자."
결국 요셉은 은 20세겔에 노예로 팔려 애굽으로 끌려갑니다.
여기서 아주 짧은 예화 하나를 들려드릴까 합니다.
세계적인 서예가가 글을 쓰다가 그만 실수로 먹물 한 방울을 화선지 한가운데 크게 떨어뜨렸습니다.
구경하던 사람들은 "아, 그 아름다운 작품을 망쳤구나!" 하며 탄식했습니다.
그런데 그 거장은 당황하지 않고, 그 검은 먹물 자국 위에 붓을 몇 번 쓱쓱 움직였습니다.
그러자 잠시 후, 그 지저분했던 먹물 자국이 아주 멋진 매화나무의 단단한 밑둥으로 변했고,
그 위로 아름다운 매화꽃이 피어났습니다.
거장의 손 안에서는 실수와 오점마저도 작품의 일부가 된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이 바로 이런 분이십니다.
형들은 요셉을 파멸시킴으로써 하나님의 계획을 완전히 무산시켰다고 믿었습니다.
자기들이 이겼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자신들의 지독한 미움과 시기, 배신과 악행이
오히려 요셉을 애굽이라는 하나님의 거대한 무대로 이동시키는 도구가 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악을 조장하지 않으십니다.
형들은 분명 자기들의 탐욕과 미움으로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악에 지지 않으시고, 도리어 그 악까지 역으로 이용하셔서 구원의 길을 가게 하십니다.
우리도 살아가면서 인생의 '보르(구덩이)'를 만납니다.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하고, 억울한 오해를 받고, 열심히 살았는데 관계가 무너지고, 사업이 실패합니다.
그 컴컴한 구덩이 밑바닥에 앉아있으면 하나님의 침묵이 야속합니다.
"하나님, 살아계신다면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게 두십니까?
왜 저 악한 사람들을 가만히 두십니까?"
솔직히 저도 목사지만, 인생의 억울한 고난이 찾아올 때 바로 감사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하나님이 왜 즉시 해결해 주지 않으시고 침묵하시는지 답답해서 밤잠을 설칠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말합니다.
야곱이 집에서 요셉의 피 묻은 옷을 쥐고 대성통곡하며 "내 아들이 죽었다"고 절망하고 있을 때도,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손으로 애굽에서 구원의 서막을 짜고 계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내 삶에 이해되지 않는 고난과 억울함이 있다면,
내 손으로 복수하거나 절망하지 마십시오.
나를 힘들게 하는 그 사람을 향한 미움을 내려놓고,
그 어둠 너머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잠잠히 기다려 보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구덩이 속에서도 하나님의 시선은 여전히 우리를 향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잔인한 악함과 고난마저도 그분의 선한 뜻을 이루는 도구로 삼으십니다.
3. 요셉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그림자입니다(창세기 37:29 ~ 36, 창세기 45:4절~5)
은 이십 — כֶּסֶף עֶשְׂרִים (케세프 에스림):
당시 고대 근동에서 청소년 노예 한 명의 몸값이었습니다.
요셉은 이 값에 철저히 상품처럼 거래되어 버림받았습니다.
형들은 염소를 죽여 그 피를 요셉의 채색옷에 적신 뒤, 아버지 야곱에게 가져가 거짓말을 합니다.
"길에서 주운 옷인데, 아버지 아들의 옷이 맞는지 보십시오."
야곱은 피 묻은 옷을 보고 찢어지는 가슴을 부여잡고 통곡합니다.
"악한 짐승이 내 아들을 먹었구나!"
아들들과 딸들이 위로하지만 야곱은 위로받기를 거절하며 슬퍼합니다.
그 시각, 은 20세겔에 팔려 간 요셉은 애굽 친위대장 보디발의 집에 노예로 신분이 전락해 있었습니다.
가나안 땅에서 야곱을 중심으로 전개되던 한 가족의 역사가,
이제 요셉의 낮아짐을 통해 애굽이라는 거대한 무대로 확장됩니다.
훗날 온 땅에 대기근이 찾아왔을 때,
야곱의 가문이 애굽으로 내려가 안전하게 보호받으며
한 '민족'으로 자라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거대하고 오묘한 구속사적 마스터플랜이 작동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요셉의 발자취를 가만히 따라가다 보면 누구의 얼굴이 겹쳐 보이지 않으십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요셉은 아버지의 사랑받는 아들이었지만,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형제들을 찾아왔다가 도리어 그들에게 미움을 받았습니다.
예수님도 하나님의 독생자이시며 사랑받는 아들이셨지만,
자기 백성을 구원하러 이 땅에 오셨을 때 자기 백성들에게 철저히 거부당하셨습니다.
요셉이 은 20세겔에 팔렸듯이, 예수님은 제자 유다에게 은 30개에 팔리셨습니다.
요셉이 채색옷이 찢긴 채 구덩이에 던져지고 억울한 누명을 썼듯,
예수님은 옷이 벗기우신 채 억울한 재판을 받으시고 십자가라는 가장 참혹한 구덩이에 던져지셨습니다.
그리고 요셉이 그 종살이와 감옥이라는 죽음의 자리를 통과한 후에 애굽의 총리가 되어 온 땅과 자기 가족을 살려내었듯,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통과하시고 부활하셔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요셉은 훗날 자신 앞에 무릎 꿇고 벌벌 떠는 형들에게 이렇게 고백합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이 고백은 바로 십자가에서 흘리신 주님의 사랑을 그대로 대변합니다.
"너희가 나를 못 박았으나, 나는 너희를 살리기 위해 이 십자가를 졌노라."
우리는 종종 착각합니다.
'나는 요셉처럼 의롭고 억울하게 고난받는 사람이야. 내 주변 사람들이 다 나쁜 형들이야.'
그러나 성경이 폭로하는 우리의 진짜 주소는 어디입니까?
우리는 요셉의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자존심과 유익을 위해 동생을 구덩이에 던져버리고
은전 몇 개에 팔아넘긴 뒤 태연하게 밥을 먹던 그 잔인한 형들의 자리에 서 있습니다.
내 만족을 위해서라면 언제든 예수님을 모른 척하고,
내 안의 시기심 때문에 이웃을 말과 시선으로 죽이는 자들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이 시간 우리가 가슴을 치며 회개해야 할 점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는 늘 내가 피해자인 줄 알았는데, 사실은 내 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세상의 자랑과 나의 의를 붙들고 예수님의 은혜를 값싸게 취급했던 삶을 돌이켜야 합니다.
우리가 여전히 원수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기 때문입니다(롬 5:8).
버림받고 팔려 간 요셉의 고난은,
장차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대속의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그림자입니다.
4. 하나님이 원하시는 믿음(시편 46편 10절, 창세기 37장 전체)
우리는 인생의 위기를 만날 때마다 본능적으로 발버둥을 칩니다.
"내가 이 문제를 해결해야지. 내가 더 열심히 노력해서 이 상황을 뒤집어 놓아야지. 내 꿈은 내가 사수해야지!" 하면서 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요셉의 인생을 통해,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시편 46편 10절 말씀입니다.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이 말씀은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라는 말씀입니다.
신앙생활은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는 기술이 아닙니다.
신앙은 도리어 내 화려한 채색옷이 찢겨나가고,
내 힘으로 빠져나올 수 없는 구덩이에 갇히는 순간에,
내 주도권을 하나님 앞에 완전히 내려놓는 법을 배우는 여정입니다.
야곱도 자기 편애라는 우상을 내려놓아야 했고,
요셉도 눈치 없는 교만함과 철부지 같은 생각을 구덩이와 노예 생활을 통해 깨뜨려야 했습니다.
형들도 자신들의 시기심이 얼마나 무서운 죄인지를 처절하게 깨달아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설명해 주지 않으십니다.
요셉이 애굽으로 끌려갈 때 하늘에서 "요셉아, 걱정 마라. 13년만 버티면 총리 시켜줄게" 하시는 음성은 들리지 않았습니다.
철저한 침묵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무거운 침묵 속에서 가장 바쁘게 구원의 길을 만들고 계셨습니다.
꿈보다 말씀을 붙드십시오:
내 느낌, 내 체험, 내 주관적인 확신이나 직통 계시 같은 신비주의에 흔들리지 마십시오.
이제 우리에게는 완전한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 말씀'이 손에 쥐어져 있습니다.
내 기분이 어떠하든, 기록된 성경이 말씀하시는 복음의 진리 위에 여러분의 인생을 굳게 세우십시오.
비교와 시기를 오늘 멈추십시오:
형들의 죄는 '남의 자리'를 견디지 못한 것입니다.
왜 요셉만 사랑받느냐는 시기심이 살인 모의로 이어졌습니다.
오늘 누군가의 성공을 보며 속이 쓰리십니까?
SNS를 보며 내 처지를 비하하고 계십니까?
하나님이 각자에게 주신 고유한 삶의 걸음이 있음을 인정하고,
오늘 내 곁에 있는 한 사람을 진심으로 축하해 주는 작은 순종을 시작해 보십시오.
결론: 신앙의 본질과 마무리
창세기 37장은 해피엔딩의 성공 스토리가 아닙니다.
질투와 미움으로 얼룩진 콩가루 집안 이야기이고,
동생을 팔아넘긴 잔인한 범죄 이야기이며,
속아서 피눈물을 흘리는 노인의 슬픔 이야기입니다.
인간들의 모습만 보면 이 가문은 진작에 망했어야 맞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인간의 가능성에 소망을 두지 않습니다.
복음은 우리의 어리석음과 악함 속에서도,
그 모든 어둠을 재료 삼아 찬란한 구원의 역사를 만들어내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소망은 내가 꾸는 거창한 꿈에 있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이루시는 구원에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이 비록 지금 물 없는 구덩이처럼 메말라 보이고,
하나님이 철저히 침묵하시는 것처럼 답답할지라도 낙심하지 마십시오.
요셉을 애굽으로 보내어 이스라엘을 살리신 것처럼,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낮고 천한 이 땅에 보내어 십자가에 못 박으심으로
우리를 건져내신 그 신실하신 하나님이 지금도 저와 여러분의 삶을 붙들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세상이 아무리 흔들리고 내 삶의 계획이 다 틀어져도,
신자는 마지막 날에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반드시 이렇게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내 꿈이 아니라, 신실하신 하나님이 다 이루셨습니다."
이 위대한 주권의 하나님을 신뢰하며,
매 믿음의 걸음을 묵묵히 걸어가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마지막 메시지
"신앙의 본질은 내 주도권을 내려놓고,
침묵 속에서도 신실하게 구원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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