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列聖誌狀通紀 卷七
作者:卞季良 洪啓禧 徐命膺 金致仁
端宗恭懿溫文純定安莊景順敦孝大王
事實
正統六年辛酉〈世宗二十三年。〉七月二十三日丁巳,誕降。戊辰,封王世孫。景泰元年庚午,〈文宗卽位初年。〉冊封王世子。壬申五月卽位。乙亥閏六月十一日,禪位於世祖大王,遂尊爲上王。七月甲申,上尊號曰恭懿溫文上太王,奉移於昌德宮。天順元年丁丑正月甲申,出移於瑜舊家。六月癸丑,因議政府請,降封爲魯山君。甲寅,發向寧越郡。以十月二十四日庚戌薨,享年十七。翌日,葬於郡北五里冬乙旨里辛坐乙向之原。今上〈肅宗。〉二十四年戊寅十二月二十五日乙丑,上徽號曰純定安莊景順敦孝,廟號曰端宗,陵號曰莊陵。
列聖誌狀通紀 卷七 (열성지장통기 7권)
作者 (저자) - 변계량, 홍계희, 서명응, 김치인: 책의 표지에 나란히 적힌 이 이름들은 한 시대에 함께 쓴 것이 아니라, 조선 세종 때부터 고종 대에 이르기까지 수백 년간 이 책이 편찬·증보·교정되는 과정에 참여한 대표적인 문신들을 누적하여 명시한 것입니다.변계량(卞季良): 조선 초기의 대제학으로, 초기 왕실 기록(태조·태종 등)의 기초를 닦았습니다.홍계희(洪啓禧)·서명응(徐命膺)·김치인(金致仁): 영조~정조 대에 활약하며 단종의 복위 사실을 반영하고 이 책을 대대적으로 개수·교정한 핵심 인물들입니다.
端宗 恭懿溫文純定安莊景順敦孝大王 (단종 공의온문순정안장경순돈효대왕): 단종의 정식 묘호(廟號)와 시호(諡號)입니다.
事實 (사실): 일대기나 행장(行狀)의 형식을 취하기 어려운 경우(단종처럼 재위 기간이 짧고 비극적으로 폐위되었다가 훗날 복위된 경우), 그의 출생, 책봉, 즉위, 그리고 복위에 이르기까지의 객관적인 역사적 연표와 전말을 정리해 둔 문서의 제목입니다.
正統六年辛酉〈世宗二十三年。〉七月二十三日丁巳,誕降。戊辰,封王世孫。景泰元年庚午,〈文宗卽位初年。〉冊封王世子。壬申五月卽位。명나라 정통 6년이자 조선 세종 23년인 신유년(1441년) 7월 23일에 태어났다. 무진년(1448년, 세종 30년)에 왕세손으로 봉해졌고, 경태 원년 경오년(1450년, 문종 즉위년)에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임신년(1452년, 문종 2년) 5월에 국왕으로 즉위했다.
乙亥閏六月十一日,禪位於世祖大王,遂尊爲上王。七月甲申,上尊號曰恭懿溫文上太王,奉移於昌德宮。을해년(1455년, 단종 3년) 윤6월 11일에 세조 대왕에게 왕위를 물려주고(양위) 마침내 상왕(上王)으로 추대되었다. 7월 갑선일에 존호를 올려 '공의온문상태왕'이라 하고, 처소를 창덕궁으로 옮겨 모셨다.
天順元年丁丑正月甲申,出移於瑜舊家。六月癸丑,因議政府請,降封爲魯山君。甲寅,發向寧越郡。명나라 천순 1년이자 조선 세조 3년인 정축년(1457년) 1월, (창덕궁에서) 나와 한남군 유(瑜, 세종의 서자)의 옛집으로 처소를 옮겼다. 6월 계축일에 의정부의 요청에 따라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되었고, 갑인일에 강원도 영월군으로 유배를 떠났다.
以十月二十四日庚戌薨,享年十七。翌일,葬於郡北五里冬乙旨里辛坐乙向之原。그해 10월 24일 경술일에 훙서(서거)하니, 향년 17세였다. 이튿날 영월군 북쪽 5리 지점인 동을지리(冬乙旨里)의 신좌을향(辛坐乙向, 북서쪽을 등지고 남동쪽을 바라보는 방향)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今上〈肅宗。〉二十四年戊寅十二月二十五日乙丑,上徽號曰純定安莊景順敦孝,廟號曰端宗,陵號曰莊陵。금상(今上, 이 책을 정리할 당시의 임금인 숙종) 24년 무인년(1698년) 12월 25일 을축일에 휘호를 '순정안장경순돈효'라 올리고, 묘호를 단종(端宗), 능호를 장릉(莊陵)이라 하였다.
封王世孫敎命文
世宗三十年戊辰四月初三日戊午。○冊文不傳。
王若曰:於戲!予承丕緖,思祖宗付託之重,夙夜寅畏。粵稽古昔帝王,國本旣端,又世其胤,所以重宗統、繫人心也。惟爾元孫〈端宗御諱。〉天資岐嶷,稟性英明,乃今年可就師。爰命爾爲王世孫。爾其親近正人,緝煕於學,惟新厥德,以孚永世之休。敬哉!〈撰進之臣,姓名不傳。〉 (찬진지신, 성명불전) 이 글을 지어서 바친 신하의 이름(성명)은 전해지지 않는다.
세종실록120권, 세종 30년 4월 3일 무오 1/4 기사 / 1448년 명 정통(正統) 13년
원손 이홍위를 왕세손으로 삼고 사유를 반포하다
○戊午/封元孫弘暐爲王世孫。 其敎命曰:
王若曰, 於戲! 予承丕緖, 思祖宗附托之重, 夙夜寅畏。 粤稽古昔帝王, 國本旣端, 又世其胤, 所以重宗統繫人心也。 惟爾元孫弘暐天資岐嶷, 稟性英明, 乃今年可就師。 爰命爾爲王世孫, 爾其親近正人, 緝熙于學, 惟新厥德, 以孚永世之休。 敬哉!
又頒宥旨于中外:
王若曰, 自古帝王, 莫不建儲副以端國本, 推嫡孫以定名分。 予以涼德, 承祖宗之緖, 念繼序之道, 永思其艱, 夙夜祗懼。 今元孫弘暐, 時年已八歲, 岐嶷夙成, 玆命爲王世孫, 旣擧彝章, 宜霈鴻恩。 自四月初三日昧爽以前, 犯流以下之罪者, 除奸盜外, 已發覺未發覺, 已結正未結正, 咸宥除之。 敢以宥旨前事相告言者, 以其罪罪之。 於戲! 慶延邦家, 旣正名於世嫡; 恩推渙汗, 庶均福於黎元。 故玆敎示, 想宜知悉。
【태백산사고본】 38책 120권 1장 A면
원손(元孫) 이홍위(李弘暐)를 봉하여 왕세손(王世孫)을 삼았는데, 그 교명(敎命)에 말하기를,
王若曰:於戲!予承丕緖,思祖宗付託之重,夙夜寅畏。
왕은 말하노라. 슬프다, 내가 큰 사업을 이어받아 조종(祖宗)의 부탁의 중함을 생각하여 밤낮으로 공경하고 두려워한다.
粵稽古昔帝王,國本旣端,又世其胤,所以重宗統、繫人心也。
상고하건대 옛날의 제왕(帝王)은 나라 근본이 이미 바르게 되면 또 그 윤자(胤子)로 대를 이으니, 종통(宗統)을 중하게 하고 인심을 집중시키자는 것이다.
惟爾元孫〈端宗御諱。〉天資岐嶷,稟性英明,乃今年可就師。
생각하건대 원손(元孫) 이홍위(李弘暐)는 천자(天資)가 숙성하고 품성(稟性)이 영특하고 밝은데, 올해에는 스승에게 나아가도 되겠으니
爰命爾爲王世孫。너를 명하여 왕세손(王世孫)을 삼는다.
爾其親近正人,緝煕於學,惟新厥德,以孚永世之休。敬哉!
너는 바른 사람을 친하고 가까이 하고 학문을 밝고 넓게 하여 그 덕을 새롭게 하여 영세(永世)의 아름다움을 믿음직하게 하라. 공경할지어다."
하고, 또 사유(赦宥)하는 왕지(王旨)를 중외에 반포하기를,
"왕은 말하노라. 옛날부터 제왕(帝王)이 저부(儲副)를 세워서 나라 근본을 바르게 하고 적손(嫡孫)을 택하여 명분(名分)을 정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내가 얇은 덕으로 조종(祖宗)의 사업을 이어받아 차례를 이을 도리를 생각하매, 길이 그 어려움을 생각하여 밤낮으로 공경하고 두려워한다. 지금 원손(元孫) 이홍위(李弘暐)가 나이 이미 8세가 되어 준수하고 숙성하므로 이에 명하여 왕세손(王世孫)을 삼았다. 이미 이장(彝章)을 거행하였으니 마땅히 큰 은택을 내려야 하겠다. 4월 초3일 매상(昧爽) 이전에 유(流)이하의 죄를 범한 자는 간도(奸盜)를 제외하고, 이미 발각되었거나 아직 발각되지 않았거나 이미 결정되었거나 아직 결정되지 않았거나 모두 용서하여 면제한다. 감히 유지(宥旨)의 전의 일을 가지고 서로 고하여 말하는 자는 거기에 해당한 죄로 죄주겠다. 슬프다, 경사가 방가(邦家)에 뻗쳤으니 이미 세적(世嫡)으로 명분(名分)을 바르게 하였고, 은혜가 광대하게 미치었으니 거의 고루 백성에게 복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교시하는 것이니 마땅히 잘 알라."
하였다. <세종실록 120권, 세종 30년 4월 3일 무오 1448년>
○壬戌/冊王世孫爲王世子。 其冊曰:
義存繼體, 旣膺丕緖之傳, 事重承祧, 宜正元良之號。 爰稽古典, 庸擧彝章。 咨爾元子弘暐, 德備溫文, 姿凝岐嶷, 愛親敬長, 仁孝稟於天成, 重傅尊師, 學問彰於日就。 乃荷昭考之眷, 以定世孫之名, 宗統攸歸, 輿情所屬。 是用策爾, 爲王世子。 於戲玆服寵命, 益懷永圖。 惟懋德是祗, 惟正人是近, 尙念祖宗休烈, 以贊邦家永猷, 可不愼歟? 故玆敎示, 想宜知悉。〈撰進之臣,姓名不傳。〉(찬진지신, 성명불전) 이 글을 지어서 바친 신하의 이름(성명)은 전해지지 않는다.
<封王世子冊文 文宗卽位初年庚午七月二十日壬戌。>
문종실록2권, 문종 즉위년 7월 20일 임술 1/4 기사 / 1450년
국역
왕세손(王世孫)을 책봉하여 왕세자(王世子)로 삼았다. 그 책문(冊文)에 이르기를,
"의(義)는 체통(體統)을 잇는 데 있고 이미 큰 실마리를 전해 받았으며, 조묘(祧廟)를 잇는 일이 중하니, 마땅히 원량(元良)559) 의 호(號)를 바로잡아야 하겠다. 이에 고전을 상고하여 이장(彝章)을 거행하노라. 너 원자(元子)【이홍위(李弘暐).】 는 덕이 온화하고 천자(天姿)가 총명하며 어버이를 사랑하고 어른을 공경하니, 인(仁)과 효(孝)는 천성(天成)으로 타고났고, 부(傅)를 중히 여기고 사(師)를 높이어, 학문이 날로 진취하였다. 이에 소고(昭考)의 권애(眷愛)를 입어 세손(世孫)의 이름을 정하니, 종통(宗統)이 돌아오는 바요, 여정(輿情)이 속하는 바이다. 그러므로 너를 책립(策立)하여 왕세자로 삼는다. 이에 총명(寵命)에 복종하여 더욱 길이 도모할 것을 생각하라. 오직 성한 덕을 공경하고, 오직 바른 사람을 가까이 하고, 조종(祖宗)의 아름다운 공렬(功烈)을 생각하여, 방가(邦家)의 영구한 계획을 도우라. 삼가지 않을 수 있으랴! 그러므로 교시(敎示)하는 것이니 자세히 알아서 하라.“
하였고,
반교(頒敎)하여 안팎에 사유(赦宥)하였는데, 그 교서(敎書)에 이르기를,
"일은 저사(儲嗣)를 세우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고, 예(禮)는 마땅히 이름을 바루는 것을 먼저 하여야 한다. 내가 얇은 덕으로 대업(大業)을 이어받아 계서(繼序)의 중함을 생각하여 항상 마음에 품고 있는데, 원자【이홍위(李弘暐).】 는 영명(英明)하고 인효(仁孝)하여, 우리 황고(皇考) 세종(世宗)께서 이미봉하여 세손(世孫)으로 삼아, 국본(國本)이 정하여지고 안팎이 마음을 걸고 있으니, 지금 마땅히 동궁(東宮)에 정위(正位)하여야 하므로, 공경하게 사직(社稷)과 종묘(宗廟)에 고하여 왕세자로 삼고, 책보(冊寶)를 주었다. 이 성사를 당하여 마땅히 관대한 법조를 반포하여야 하므로, 이달 7월 20일 새벽 이전으로부터 유죄(流罪) 이하 간도(奸盜)를 제외하고, 이미 발각되었거나 아직 발각되지 않았거나, 이미 결정되었거나 아직 결정되지 않았거나 모두 사유(赦宥)한다. 감히 유지(宥旨) 이전의 일을 가지고 서고 고하여 말하는 자는 그 죄로 죄 주겠다. 왕위를 지키고 조종을 잇는 것은 진실로 원량(元良)의 바람에 부합하고, 허물을 사(赦)하고 죄를 용서하는 것은 일시(一視)의 인(仁)을 넓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시하는 것이니, 자세히 알아라."
하였다.
백관이 조복을 입고 전(箋)을 받들어 올려 진하(陳賀)하고, 각도 감사(監司)는 관원을 보내어 전을 받들어 진하(進賀)하고, 경기 감사(京畿監司)·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는 친히 전을 받들고 또 동궁(東宮)에도 모두 하장(賀狀)을 올렸다.
【태백산사고본】 1책 2권 47장 A면【국편영인본】 6책 26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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代宗皇帝封王世子勅
文宗元年辛未正月二十四日甲子,謝恩使齎來。
自古有國者,以順民爲先。今王有子〈端宗御諱。〉,國人慾以後王,特從所欲,命爲世子。王其敎之孝悌忠信,俾有以副國人之望,可也。仍命差來陪臣左議政皇甫仍〈實錄注云:「卽皇甫仁也。」〉齎,諭王。王其體朕至懷。
문종실록5권, 문종 1년 1월 24일 갑자 2/4 기사 / 1451년 명 경태(景泰) 2년
사은사 황보인과 부사 김효성이 고명을 받들고 돌아오다
封世子勅曰:
自古有國者, 以順民爲先。 今王有子諱, 國人欲以後王, 特從所欲, 命爲世子。 王其敎之孝悌忠信, 俾有以副國人之望, 可也。 仍命差來陪臣左議政皇甫仍,【卽皇甫仁也。】 齎, 諭王。 王其體朕至懷。
세자(世子)를 봉(封)하는 칙서(勅書)는 이러하였다.
"옛부터 나라를 가진 자는 백성들을 따르게 하는 것을 먼저 하였다. 지금 왕(王)이 아들 【휘(諱).】 가 있어, 나라 사람들이 후왕(後王)이 되게 하고자 하니, 특별히 바라는 바에 따라서 세자로 삼도록 명한다. 왕은 효제(孝悌)와 충신(忠信)을 가르쳐서 그로 하여금 나라 사람들의 소망에 부응(副應)하게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어서 차견(差遣)하여 온 배신(陪臣) 좌의정 황보잉(皇甫仍) 【곧 황보인(皇甫仁)이다.】 에게 명하여 가지고 가서 왕(王)에게 유시(諭示)하게 하니, 왕(王)은 짐(朕)의 지극한 생각을 몸받으라.“
【태백산사고본】 3책 5권 55장 A면【국편영인본】 6책 35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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代宗皇帝降封典詔
端宗卽位初年壬申閏九月十七日丙子,使臣至。
朕恭膺天命,主宰萬邦,封建諸侯,遠邇惟一,此國家之大典、祖宗之成憲也。況朝鮮國,守禮之邦,俾統其民,可無君長?故國王李〈文宗御諱。〉襲先代之爵,事天事大,始終一誠,克敬克仁,遠邇咸譽。屬玆薨逝,宜有繼承。世子〈端宗御諱。〉,王之嫡長,性資忠孝,國論攸歸。今遣內官金宥、金興齎勅,封爲朝鮮國王,繼主國事。凡惟國中大小臣民夙夜惟寅,盡心匡輔,務循禮分,罔或僭踰,長堅忠順之心,永享太平之福。
代宗皇帝降封典詔
명나라 대종(代宗) 경태제가 단종을 조선 국왕으로 정식 책봉하기 위해 내린 국가적 의례(봉전)의 칙서와 조서
端宗卽位初年壬申閏九月十七日丙子,使臣至。
단종 즉위 초년(1452년) 임신년 윤9월 17일 병자일에 (명나라의) 사신이 이르렀다.
"짐(朕)이 공손히 천명(天命)을 받아 만방(萬邦)을 주재(主宰)하고 제후(諸侯)를 봉건(封建)하니 멀고 가까운 곳이 오직 하나이다. 이는 국가의 대전(大典)이며 조종(祖宗)의 이룩한 법이다. 하물며 조선국은 예(禮)를 지키는 나라이니, 그 백성을 통솔함에 어찌 군장(君長)이 없으랴? 고(故) 국왕【성휘(姓諱).】 은 선대(先代)의 벼슬을 이어 받아, 하늘을 섬기고 대국을 섬기기를 시종(始終) 한결같이 정성으로 하고 능히 경(敬)하고 능히 인(仁)하니 멀고 가까운 곳에서 함께 칭찬하였다. 이제 훙서(薨逝)함에 미쳐 마땅히 후계(後繼)가 있어야 한다. 세자【휘(諱).】 는 왕의 적장(嫡長)으로 성품이 충효(忠孝)하여 국론(國論)이 일치하니 이제 내관(內官) 김유·김흥을 보내어 칙서(勅書)를 가지고 가서 조선 국왕으로 봉(封)하여 이어서 국사(國事)를 주장하게 하니, 무릇 너희 나라 대소 신민(大小臣民)은 밤낮으로 오직 공경하여 마음을 다해 도와서 예분(禮分)에 따르기를 힘쓰고 혹시라도 참람(僭濫)함이 없게 하며, 길이 충순(忠順)한 마음을 굳게 하여 영구히 태평한 복을 누리도록 하라.“ <단종실록>
封王勅月日同上。
得奏,爾父王〈文宗御諱。〉以今年五月十四日薨逝,朕深悼念。玆遣內侍金宥、金興齎文,往爾國中諭祭,幷詔示爾國人,封爾〈端宗御諱。〉爲朝鮮國王,繼爾父主國事。爾宜恪守臣節,益堅事大之誠,永固藩邦,庶遂承先之志,欽哉!故諭。
봉왕칙월일동상(封王勅月日同上)’
“국왕을 책봉하는 내용의 칙서(勅書)가 발급 또는 도달한 날짜는 바로 위 항목에 적힌 날짜와 같다.
*명나라 대종(경태제)이 사신(내관 김유, 김흥 등)을 통해 조선에 보낸 외교 문서들은 한 종류가 아니라 조서(詔)·칙서(勅)·고명(誥) 등 여러 가지였는데, 이 문서들이 모두 1452년(임신년) 윤9월 17일 병자일에 한날한시에 도착하여 선포(宣)되었기 때문에 매번 날짜를 반복해 적지 않고 ‘월일동상(날짜는 위와 같음)’으로 축약해 표시한 것입니다.
참고(칙서와 고명의 차이): '칙서(勅)'는 주로 황제의 직접적인 훈계나 타이름, 특정 물품을 하사하는 등의 내용을 담고, '고명(誥)'은 관직이나 제후의 지위를 공식적으로 임명하는 임명장 성격을 띱니다.
그 칙서는 이러하였다.
"너의 부왕(父王)【휘(諱).】 이 금년 5월 14일에 훙서(薨逝)했다는 주본(奏本)을 받고 짐(朕)이 깊이 슬퍼한다. 이에 내시(內侍) 김유·김흥을 보내어 글을 가지고 너희 나라에 가서 제문(祭文)과 조서(詔書)로 너희 나라 사람에게 유시(諭示)하고 너【휘(諱).】 를 봉하여 조선 국왕으로 삼아 네 아버지를 이어 나라 일을 주장하게 하니, 너는 마땅히 삼가 신절(臣節)638) 을 지키고 더욱 사대(事大)의 정성을 굳게 하여 길이 번방(藩邦)을 튼튼히 하면 거의 선왕(先王)을 잇는 뜻을 이룰 것이니 공경하며 힘쓰라. 그러므로 유시(諭示)하고 관복(冠服)과 예물을 하사한다.
<단종실록3권, 단종 즉위년 윤9월 17일 1452년 명 경태(景泰) 3년>
封王誥月日同上。
國家奄有四海,君主華夷,一視同仁,無間遠邇。命德則寄以一方之任,象賢則錫以累葉之承,所以繫其衆心,而俾臻於乂安也。故朝鮮國王李〈文宗御諱。〉端重謙溫,聰明勤儉,敬天事上,始終一誠,贊父王,旣已有年,致國人,靡不信順,恭承朝命,斯須不違,蓋其先王之賢子、賢孫也。胡享國之未幾,遽告終之來聞?應有繼繩,以統其衆。爾〈端宗御諱。〉乃〈文宗御諱。〉之嫡子,旣賢且長,傳襲惟宜。玆特封爲朝鮮國王。於戲!惟敬可以事大,惟仁可以撫衆,惟保境可以安邦,惟順正可以享福。惟率乃祖乃父之行,庶稱朝廷奬賢之心。往其欽哉,毋怠朕訓。
봉왕고월일동상(封王誥月日同上)’
“국왕을 정식 임명하는 황제의 고명(誥命) 문서가 도달한 날짜 역시 바로 위 항목(윤9월 17일)과 같다”
그 고명(誥命)은 이러하였다.
"국가에서 사해(四海)를 모두 점유(占有)하여 화·이(華夷)의 군주(君主)가 되어 일시동인(一視同仁)639) 하며 멀고 가까움에 사이가 없다. 덕이 있는 이를 명하여 한 지방의 책임을 맡기고 여러 어진 이를 높여서 누대(累代)의 습작(襲爵)을 주었다. 이로써 민중(民衆)의 마음을 묶고 다스려 편안한 데 이르게 하는 바이다. 고(故) 조선 국왕 【성휘(姓諱).】 은 단정하고 무게가 있으며 겸온(謙溫)하고 총명(聰明)하고 근검(勤儉)하며, 하늘을 공경하고 상국[上]을 섬기기를 시종(始終) 한결같이 정성으로 하여 부왕(父王)을 도운 것이 이미 몇 해가 되었다. 나라 사람들이 믿어 순종하지 아니함이 없고 공손히 조명(朝命)640) 을 받아 잠시라도 어기지 아니하였으니 대개 그 선왕의 어진 자손이었다. 어찌하여 향국(享國)641) 한 지 얼마 아니 되어 갑자기 고종(告終)642) 을 아뢰는가? 응당히 계승자(繼承者)가 있어서 그 백성을 다스려야 한다. 너【휘.】 는 이【휘.】 의 적자(嫡子)로서 이미 어질고 또 장성하니 전하여 이음이 오직 마땅하므로 이에 특별히 봉하여 조선 국왕을 삼는다. 아아! 오직 공경(恭敬)하여야 사대(事大)를 할 수 있고 오직 어질어야 민중을 무휼(撫恤)할 수 있으며, 오직 경토(境土)를 보호하여야 나라를 편히 할 것이고, 오직 순정(順正)643) 하여야 복을 누릴 수 있다. 오직 너의 할아버지와 너의 아버지의 행실을 따르면 거의 조정에서의 어진 이를 권장하는 뜻을 맞출 것이니, 가서 공경히 힘쓰고 짐의 훈계를 게을리 하지 말 것이다.“
*관복(冠服)과 예물을 하사한다.
구장 면복(九章冕服) 1부(副), 구류 조추사 평천관(九旒早皺紗平天冠) 1정(頂)【옥형(玉珩)·유주(琉珠)·금사건(金事件)·선도(線絛)·전부[全].】 , 구장 견지사 곤복(九章絹地紗袞服) 1투(套) 계(計) 7건(件), 심청 장화 곤복(深靑粧花袞服) 1건, 백소 중단(白素中單) 1건, 훈색 장화 전후상(纁色粧花前後裳) 1건, 훈색 장화 폐슬(纁色粧花蔽膝) 1건【옥구선도(玉鉤線絛) 전부[全].】 , 훈색 장화 금수(纁色粧花錦綬) 1건, 훈색 장화 패대(纁色粧花佩帶) 1부(副)【금구(金鉤)·옥정당(玉玎璫) 전부[全].】 , 홍백소 대대(紅白素大帶) 1도(絛)【청선조도(靑線組絛) 전부[全].】 , 옥규(玉圭) 1지(枝)【대(袋) 전부[全].】 , 대홍소 저사석(大紅素紵絲舃) 1쌍(雙)【말(襪) 전부[全].】 , 대홍평라 소금운룡 협포복(大紅平羅銷金雲龍夾包袱) 3조(條), 주홍 법복갑(朱紅法服匣) 1좌(座)【호갑(護匣) 전부[全].】 , 저사(紵絲) 4필(匹), 직금 흉배 기린(織金胸背麒麟) 2필, 내대홍(內大紅) 1필, 심청(深靑) 1필, 암화 골타운(暗花骨朶雲) 2필, 내심청(內深靑) 1필, 흑록(黑綠) 1필, 나(羅) 4필, 직금 흉배 기린(織金胸背麒麟) 2필, 내대홍(內大紅) 1필, 흑록(黑綠) 1필, 소(素) 2필, 내심청(內深靑) 1필, 흑록 1필, 백모사포(白氁絲布) 10필이다.
<단종실록3권, 단종 즉위년 윤9월 17일 1452년 명 경태(景泰) 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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莊陵表石陰記前面篆大字「朝鮮國端宗大王莊陵」。
端宗大王諱弘暐,文宗大王嫡嗣。母妃顯德王后權氏,以正統辛酉七月二十三日,誕生王。戊辰,封王世孫。景泰庚午,冊封王世子。壬申五月,文宗昇遐,王嗣登大位。乙亥,尊爲上王,上號恭懿溫文。天順丁丑,王在江原道之寧越郡。是年十月二十四日薨,春秋十七,葬郡北辛坐乙向原。肅宗大王二十四年戊寅,追諡王恭懿溫文純定安莊景順敦孝大王,廟號端宗,陵曰莊,祔永寧殿。
莊陵表石陰記 장릉 표석 음기
前面篆大字「朝鮮國端宗大王莊陵」
앞면에는 전서(篆書)체의 큰 글자로 ‘조선국 단종대왕 장릉’이라 새겨져 있다.
端宗大王諱弘暐,文宗大王嫡嗣。
단종대왕의 휘(이름)는 홍위(弘暐)이시며, 문종대왕의 적장자(嫡嗣)이시다.
母妃顯德王后權氏,以正統辛酉七月二十三日,誕生王。
어머니는 현덕왕후(顯德王后) 권씨이시며, (명나라 연호) 정통(正統) 신유년(세종 23년, 1441년) 7월 23일에 왕을 탄생하셨다.
戊辰,封王世孫。景泰庚午,冊封王世子。
무진년(세종 30년, 1448년)에 왕세손(王世孫)으로 봉해졌고, 경태(景泰) 경오년(문종 원년, 1450년)에 왕세자(王世子)로 책봉되셨다.
壬申五月,文宗昇遐,王嗣登大位。
임신년(1452년) 5월에 문종대왕께서 승하하시자, 왕이 대통을 이어 왕위(大位)에 오르셨다.
乙亥,尊爲上王,上號恭懿溫文。
을해년(세조 원년, 1455년)에 (세조에게 선위하고) 존호를 올려 상왕(上王)이 되셨으며, ‘공의온문(恭懿溫文)’이라는 상호(上號)를 올렸다.
天順丁丑,王在江原道之寧越郡。
천순(天順) 정축년(세조 3년, 1457년)에 왕은 강원도 영월군(寧越郡)에 계셨다.
是年十月二十四日薨,春秋十七,葬郡北辛坐乙向原。
이 해 10월 24일에 승하하시니, 춘추(향년)는 17세이셨다. 영월군 북쪽의 신좌을향(辛坐乙向, 서북쪽을 등지고 동남쪽을 바라보는 방향)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肅宗大王二十四年戊寅,追諡王恭懿溫文純定安莊景順敦孝大王,廟號端宗,陵曰莊,祔永寧殿。
숙종대왕 24년 무인년(1698년)에 왕을 단종으로 추존하여 시호를 ‘공의온문순정안장경순돈효대왕(恭懿溫文純定安莊景順敦孝大王)’이라 하고, 묘호(廟號)는 단종(端宗), 능호는 장릉(莊陵)이라 하였으며, 종묘의 영녕전(永寧殿)에 신주를 모셨다(祔).
*단종대왕으로 복위, 장릉으로 복릉은 1698년, 장릉비는 1733년세 세움, 즉 복위복릉이후 35년이나 지난 뒤에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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懿德端良齊敬定順王后宋氏
事實
端宗大王二年甲戌正月二十二日甲戌,冊封爲王妃。世祖大王卽位之乙亥七月甲申,尊爲懿德王大妃。丁丑六月癸丑,降封爲夫人,命營室於東大門外英嬪貞洞以居焉。中宗大王十六年辛巳六月初四日甲申薨,壽八十二。命禮曹喪禮依大君夫人例,葬於楊州乾川里癸坐丁向之原。今上〈肅宗。〉二十四年戊寅十二月二十五日乙丑,上諡號曰定順,徽號曰端良齊敬,陵號曰思陵。
懿德端良齊敬定順王后宋氏 의덕단량제정정순왕후 송씨.
事實 (사실)(왕후의 평생에 관한) 실제 기록.
[본문]
端宗大王二年甲戌正月二十二日甲戌,冊封爲王妃。
단종대왕 2년 갑술년(1454년) 1월 22일 갑술일에 왕비(王妃)로 책봉되셨다.
世祖大王卽位之乙亥七月甲申,尊爲懿德王大妃。
세조대왕이 즉위한 을해년(1455년) 7월 갑신일에 (단종이 상왕이 됨에 따라) 존호를 올려 의덕왕대비(懿德王大妃)가 되셨다.
丁丑六月癸丑,降封爲夫人,命營室於東大門外英嬪貞洞以居焉。
정축년(1457년) 6월 계축일에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등되면서 왕후 역시) 군부인(郡夫人)으로 강봉되었고, 동대문 밖 영빈정동(英嬪貞洞, 지금의 서울 종로구 숭인동 낙산 자락)에 집을 지어 거처하게 시켰다.
中宗大王十六年辛巳六月初四日甲申薨,壽八十二。
중종대왕 16년 신사년(1521년) 6월 4일 갑신일에 승하하시니, 향년(壽)은 82세이셨다.
命禮曹喪禮依大君夫人例,葬於楊州乾川里癸坐丁向之原。
(중종이) 예조에 명하여 상례를 대군부인(大君夫人)의 전례에 의거하여 치르게 하였고, 양주 건천리(乾川里, 지금의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계좌정향(癸坐丁向, 자좌오향과 함께 남향을 뜻함)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今上〈肅宗。〉二十四年戊寅十二月二十五日乙丑,上諡號曰定順,徽號曰端良齊敬,陵號曰思陵。
금상(숙종) 24년 무인년(1698년) 12월 25일 을축일에 시호를 정순(定順), 휘호를 단량제경(端良齊敬), 능호를 사릉(思陵)이라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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思陵表石陰記前面篆大字「朝鮮國定順王后思陵」。
懿德端良齊敬定順王后宋氏,端宗大王妃。正統五年庚申,誕生。景泰五年甲戌,冊封王妃。乙亥,尊爲懿德王大妃。天順元年丁丑,降爲夫人。正德十六年辛巳六月四日,昇遐。葬於楊州南群場里癸坐之原,壽八十二。肅宗戊寅,復位上諡。
分類:卞季良 洪啓禧 徐命膺 金致仁
사릉 표석 음기(思陵表石陰記)
前面篆大字「朝鮮國定順王后思陵」
앞면에는 전서(篆書)체의 큰 글자로 ‘조선국 정순왕후 사릉’이라 새겨져 있다.
懿德端良齊敬定順王后宋氏,端宗大王妃。
의덕단량제경정순왕후송씨는 단종대왕의 비(妃)이시다.
正統五年庚申,誕生。
(명나라 연호) 정통(正統) 5년 경신년(세종 22년, 1440년)에 탄생하셨다.
景泰五年甲戌,冊封王妃。
경태(景泰) 5년 갑술년(1454년)에 왕비로 책봉되셨다.
乙亥,尊爲懿德王大妃。
을해년(1455년)에 존호를 올려 의덕왕대비가 되셨다.
天順元年丁丑,降爲夫人。
천순(天順) 원년 정축년(1457년)에 군부인으로 강등되셨다.
正德十六年辛巳六月四日,昇遐。정덕(正德)
16년 신사년(중종 16년, 1521년) 6월 4일에 승하하셨다.
葬於楊州南群場里癸坐之原,壽八十二。
양주(楊州) 남쪽 군장리(群場里, 현 사릉 자리)의 계좌(癸坐, 북북서 방향을 등진 자리) 언덕에 장사 지냈으며, 향년은 82세이셨다.
肅宗戊寅,復位上諡。
숙종 무인년(1698년)에 (왕후로) 복위되고 시호가 올려졌다.
* 分類:卞季良 洪啓禧 徐命膺 金致仁 해당 비문의 서술 및 제작에 참여한 역대 문신(분류)들의 명단입니다.
조선 초기의 대문장가인 변계량(卞季良)부터 조선 후기 영조 대의 학자이자 관료인 홍계희(洪啓禧), 서명응(徐命膺), 김치인(金致仁) 등이 나열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정순왕후의 복위와 표석 건립이 숙종(1698년)을 거쳐 영조 대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인 왕실의 권위 확립과 문헌 정리 작업의 일환으로 완성되었음을 보여줍니다.
변계량 (卞季良, 1369~1430): 조선 초 태종~세종 대의 대제학으로 왕실의 주요 대외 외교 문서와 초기 의례의 기틀을 닦았습니다. 단종·정순왕후보다 앞선 세대이므로, 왕실 기록물의 초기 형식(체제)을 확립한 인물로 분류된 것입니다.
홍계희 (洪啓禧, 1703~1771): 영조 대의 핵심 관료로, 영조의 명을 받아 《선원계보기략》을 수정·보완하고 왕실 능묘의 표석과 비문을 다시 정리하는 작업을 주도했습니다.
서명응 (徐命膺, 1716~1787): 영조~정조 대의 문신이자 규장각 제학을 지낸 대학자입니다. 영조 대에 단종의 어머니인 현덕왕후의 능인 현릉(顯陵) 및 장릉·사릉의 개수와 표석 서사 작업에 깊이 관여했습니다.
김치인 (金致仁, 1716~1790): 영조 대에 영의정을 지낸 인물로, 왕실의 종묘 의례나 단종·정순왕후 관련 추모 사업 및 비석 건립의 최고 책임자(총리대신 등)로서 이름을 올렸습니다.
* 조선국정순왕후 사릉 표석문은 1771년(영조 47년) 10월에 세움
왕후로 복위, 사릉으로 복릉은 1698년, 능비는 1771년, 즉 복위이후 73년이나 지난 뒤에 세워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