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적내용 |
김원범은 광주(光州) 사람으로서 1886년 1월 9일 광주군 당부면 북촌리(當府面 北村里)에서 출생하였다.일찍이 거의하였던 13살 연상의 친형인 김원국(金元國)과 함께 1906년 광주 교외 무등산(無等山)에서 거의하여 의병 삼백여 명을 규합하여 선봉장이 되어 일본군과 수차례 교전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1907년 성재 기삼연(省齋 奇參衍)과 김 준(金準)이 거의하자 김 준의 휘하에 들어가 장성(長城) 등지에서 활약하였는데, 특히 의병 3백여 명을 이끌고 광주수비대(光州守備隊)와 교전하여 일본군 40여 명을 사살하였다.1908년 봄 성재와 김 준 등이 순국하고 김 준 휘하의 오성술·조경환·전해산 등 부장들이 각기 의병장을 칭하게 되자 처음에 전해산(全海山) 의진의 중군장이 되었다.그러나 다시 조경환(曺京煥·敬煥)의 휘하에 소속되어 활약하였는데 이것이 인연이 되어 피신 중이던 형 원국도 광주군 선암시장(仙岩市場)에서 조경환을 상봉한 후 동생이 경환의 휘하에서 활약한다는 소식을 듣고 그의 선봉장이 되고, 원범은 도포장(都砲將)이 되었다.이 해에 원범은 창평 무동촌(昌平 舞童村)·장성 낭월산(郎月山)·영광 토산(靈光 土山)·함평 오산(咸平 鰲山) 등지에서 다시 적과 교전하였다.특히 이즈음 형 원국은 광주 등지에서 의병토벌전의 주역이던 소위 삼국대장(三國大將)이라고 칭해지던 요시다(吉田)를 광주 교외에서 교전 중 사살하였는데 이 전투에도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그해 9월 영광군 황량면(黃良面)에 살던 일헌병의 밀정 변영서(邊永瑞)를 부하 20명과 함께 함평군 식지면 군평(群坪)에서 붙잡아 총살하였다. 이 일은 전해산의 명에 의한 것으로서 당시 호남의진의 각 의병장간에 유기적 작전계획이 가능하였던 것으로 보인다.1909년 1월 의병장 조경환이 전사하자 다시 전해산과 합세하여 대동창의단(大同倡義團)을 조직하고 해산을 대장으로 추대하고 본인은 중군장을 맡았다.그후 광주·나주·담양·장성 등지에서 계속 원국과 함께 활약하였다.1909년 2월 광주 무등산(無等山)에서 일병과 교전 중 마침내 체포되어 광주수비대에서 취조를 받다가 1909년 9월 2일 스스로 혀를 끊어 23세의 젊은 나이로 순국하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8년에 형 원국과 똑같이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註·독립운동대사전 276·277면 ·호남절의사 469면 ·폭도토벌지 49호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1권 620면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2권 376·646면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별집 1권 914·916면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90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