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국역사의 이해(비밀결사와 빨치산)
용지니요 2006-05-11 11:07 조회 1452 출처: 본인작성
삼합회 삼합회는 천지회, 첨제회(添弟會), 삼점회 등 여러 명칭을 갖고 있었다는 것은 앞에서 언급했다. 삼합회의 전신인 천지회가 복건성에 있었다는 소림사의 오조를 교주로 하여 강희 13(1674)년에 창립되었다고 말해져 왔으며 광동, 광서, 복건에서 강서, 호북, 호남, 운남으로 확대하여 건륭말기에서 청말에 걸쳐 여러 차례 큰 반란을 일으켰고 태평천국 당시에는 삼합회의 일파인 비수회(匕首會)가 상해 점령에 성공했고 손문의 가로회와 함께 협력했다. 태평천국에서는 가로회는 증국번의 상군에 투신하여 보수적, 반동적 입장에 섰지만 손문 혁명운동에서는 오히려 선구적 역할을 하고 있다. 삼합회의 역사상 최초의 반란은 건륭 52년의 대만에서의 임상문의 난인데 道光시대에 들어서자 끈질긴 발전을 이룩했다. 즉 도광 11(1831)년 5월에는 광동, 광서, 복건 ,절강, 운남, 귀주, 호남, 호북에 걸쳐서 세력을 펼쳤다. 그리하여 당을 五房으로 나누고 복건을 장방, 광동을 이방, 운남을 삼방, 호남과 광동과 광서를 사방, 절강을 오방이라 하고, 방마다 두목을 두어 五色으로 기치를 구분하고 입회 자에게는 구호를 주었다. 도광 30(1850)년 광서에서 일어났던 태평천국의 난은 15년에 걸쳐서 17성을 석권했는데 처음 삼합회의 두목의 한사람으로 홍수전에게 귀의했던 자가 있었으나 교의가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이탈했다. 홍수전은 삼합회의 목표인 「반청복명」은 강희년 때에는 의의가 있었으나 2백년이 지난 오늘에 있어서는 반청만으로 좋고 복명은 이미 시대에 뒤떨어지므로 대중의 지지를 못 받는다고 했다. 그러나 삼합회는 태평천국 난에서는 태평군에서 독립하여 별개의 행동을 취했다. 삽합회의 일파인 비수회라는 이름의 일단은 앞에서 언급한대로 함풍 3(1853)년 9월7일 돌연 상해현성을 탈취하여 17개월 동안 확보했다. 당시 광동, 복건성인은 상해에 약 14만 명이 있었고, 그 대부분은 삼합회에 속하여 각 현성를 습격하고 지현을 살해했다. 비수회가 상해를 점령했을 때 남경의 홍수전에게 보고하여 그들과 연락하려 했으나 홍수전은 당파 근성이 있어서 거절했다. 홍수전은 태평천국 난을 전중국의 민란이 종합적 의지의 표현이라는 시야에서 파악할 능력이 없었던 모양이다. 그리하여 삼합회는 이듬해 함풍 4년에 광동, 광서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광동의 조경(肇慶), 불선(佛仙), 동원(東莞) 등 각지를 점령하고 珠江일대를 장악했다. 그리고 광동 호상의 함대와 싸워 크게 이기고 광동성도 거의 함락지경에 이르렀으나 영국군의 청군 원조에 의하여 함풍 5년에 패퇴했다. 비수회가 점령하고 있었던 상해에서도 동년 2월 17일 영국군의 지원을 받은 관군에게 포위되어 현성은 함락되고 비수회원 약 50명만이 도피했을 뿐 1천 8백여 명은 참살 당했다. 광서에 들어서 삼합회는 12년에 惠州府 寧山에서 폭동을 일으켰고 광서 24년에는 광서성 전역에서 폭동을 일으켜 열 몇 달 동안 석권했다. 그리고 최후로 삼합회는 두목 鄭子良이 광서 26년에 손문의 흥중회가 일으켰던 혜주반란에 참가하여 그 사상적 영향을 받고 신해혁명에의 길을 택하게 된 것이다. 중국 비밀결사의 특수성은 회원상호간의 평등제와 두목의 독재제와의 양면을 겸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정치결사의 색채가 짙은 삼합회에 그런 특색이 강했다. 삼합회의 기원은 일원적이지만 연대가 흐름에 따라 지방적으로 분화되어 전국적인 중앙부가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창립 당시에는 五大公所를 설립하여 각 공소에 몇 개의 성을 분산해 주재시켰는데 세월과 함께 공소의 존재도 애매하게 되고 대집회의 개최도 흐지부지 되고 말았다. 회원은 공소의 수령을 대총리 또는 원수, 또는 大哥라고도 불렀다. 그 다음의 두목을 香主 또는 二哥, 二位의 두목을 백선(白扇) 또는 先住, 혹은 三哥라고 했다. 그 다음은 先鋒, 그 아래는 홍곤(紅棍, 회원의 형벌을 집행하는 직위), 그리고 아래 회원은 초혜(草鞋)라고 불렀다. 입회는 엄중한 의식을 거쳐 시행되었다. 자격은 부자, 학자, 관리, 농부, 상인, 병사, 도적, 걸인 등 구별 없이 충의의 뜻을 지니고 반청복명을 염원하는 자는 아무라도 입회를 허용했다. 입회식에서의 향주(二哥)는 다음 두 가지를 선언했다. 1. 우리는 마땅히 길흉을 함께 함으로써 天地萬有之明의 회복을 구하여 청조를 섬멸함으로써 眞命을 기다린다. 2. 능히 명나라를 회복하고 원수를 갚아 설욕함으로써 천하태평을 건설하며 이를 다스리는 자 있으면 왕후로 봉하니 자손은 역대만세 길이 영광되리라. 이와 같이 삼합회는 반청복명을 근본 신조로 한 반역적 단체였으며 평소 회원은 상호 부조하는 생활을 기능적으로 실천했다. 일단 입회한 자는 모두 홍형제이며 동생동사를 맹서하고 회의 경서 및 율법에 있는 36서 21칙, 10금 10칙에 복종해야 했다. 그리고 규율은 국가의 형법 이상의 형벌과 위압으로 실행되었다. 회원의 친근과 정애에 대해서는 중국의 도덕인 가족제도의 영향이 크게 작용하고 있었다. 예를 들면 규율 가운데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홍문에 들어간 후는 너의 부모는 나의 부모이며, 너의 형제자매는 나의 형제자매이며, 너의 처는 나의 형수이며, 너의 자질은 나의 자질이다. 부모형제가 죽었을 때 장례비가 없는 회원에게는 다른 회원이 출자하여 장례를 완료해야 할 것, 형제의 처를 간음하고 그 자녀와 사통한 자는 사형에 처할 것, 부모를 효경하지 않는 자는 태형 108에 처함.」 또 회원의 상호부조의 규칙에는 「형제가 은전과 재물을 기탁했을 때는 충실히 보관해야 하며 그것을 갈취한 자는 사형에 처할 것. 형제의 재물을 탈취하거나 강매, 사취하여 돌려주지 않는 자는 사형에 처할 것, 형제가 궁핍하여 돈을 빌리려는 것을 모욕하고 또는 거절하는 자는 두 귀를 자를 것, 형제와 사업을 공영하여 제 마음대로 낭비한 자는 태형 108에 처할 것. 도박장에서 속임수를 써서 형제의 재물을 편 취한 자는 중하면 사형, 경하면 태형 72에 처할 것.」 또 회원간의 규율에 관하여는 「타지방의 형제가 강호의 객으로 찾아왔을 때는 사농공상을 불문하고 하룻밤 유숙케 하고 두끼 이상을 대접할 것.」 비밀을 지키는 일에 대해서는 「회의 비밀은 부친도 자식에게 전할 수 없고, 자식도 부친에게 전할 수 없으며 형제, 일가친척, 친구 등 누구에게도 전할 수 없는 것으로 위반자는 만인의 칼 아래에 죽어야 할 것. 형제의 우환 시에는 는 필요한 부조를 아끼지 말 것. 형제가 포박되거나 또는 멀리 출타했을 때는 그 처자를 도와 줄 것. 현상금을 얻기 위하여 형제를 밀고한 자는 사형에 처할 것.」 반란에 관한 규칙에는 「회원은 봉기할 때는 다 함께 군화양초를 내어 일동 협력해야 하며 두 마음을 품는 자는 萬刀 下에 죽음을 당할 것. 起義 時에 몸을 피하여 나오지 않는 자는 두 귀를 자를 것. 다른 성에서 형제를 부르는 문서가 왔을 때 숨어서 응소하지 않는 자는 사형에 처할 것.」 등등의 규율이 있다. 삼합회는 반청복명을 명분으로 조직된 결사였지만 청말에 이르러서는 손문의 흥중회와 결합하게 되면서부터 근대적인 사상결사가 되어 신해혁명까지 가로회와 함께 그 양 날개로 활약했다. 삼합회야말로 근대중국에 있어서 가장 대표적인 혁명적 비적의 하나이다.
가로회 가로회는 삼합회와 마찬가지로 손문혁명의 일익을 담당하여 신해혁명에 활약했던 비밀결사이며 혁명 비적의 가장 진보적 집단이다. 기원은 백련교의 계통에 속하고 건륭시대에 복건지방에서 부활하여 발생한 반관료적 결사이며, 사천성을 발생지로 한 비밀결사이고 정치원칙은 삼합회와 마찬가지로 반청복명이다. 가로회는 태평천국 난에는 참가하지 않았으나 태평천국이 멸망한 이후에 활동이 시작되었다. 즉 증국번이 지도한 상군이 해산되자 생계의 길을 잃은 병사와 난중에 발생한 유민의 대다수가 가로회에 들어오고 나서 세력이 강해졌다고 한다. 일설에는 태평군 후기의 명장 이수성이 자기가 패망할 것을 각오하고 복건, 강서의 형제를 상군에 투항시켜 두었기 때문에 그 투항병이 상군 해산 후에 가로회에 합세하여 세력이 증강된 것이라고 한다. 가로회는 호남과 절강에서 가장 번성했고 양자강 유역의 각 성에서도 꽤 번창했는데 거의 전국에 만연하여 그 세력이 확대되었다. 가로회는 삼합회에 비하면 한결 약탈도적에 가까운 회당으로 도적질을 무차(武差)라 하고 도박을 문차(文差)라 했다. 그러나 의롭지 못한 부호를 습격하는 것을 방침으로 내세웠다. 가로회의 조직원칙은 대체적으로 삼합회와 비슷하다. 삽합회와 마찬가지로 전국적인 총본부가 없고 각 지방의 중요한 회원집단을 모모산(某某山)이라 불렀다. 그런 산이 전국에 수백이나 있었다. 각 산의 수령을 五龍頭, 그 다음을 부룡두라 하고 그 밑에 五堂이라는 다섯 가지 직위가 있었다. 입회에 관한 특색은 삽합회와는 달라서 그 출신이 결백하지 못한 자, 즉 노예나 천민은 입회를 허용하지 않는다. 이발사, 교자 꾼, 배우도 입회를 못한다. 회원을 권자(圈子) 또는 좌현(左玄)이라고 하고 외국인을 馬子, 귀사가(貴四哥) 따위로 부른다. 회원은 외국인과의 교제도 함부로 할 수 없다. 가끔 대회를 개최하는 일도 있는데 이것을 開山이라 하여 깊은 산중의 고묘(古廟)에서 黃道吉日을 택일하여 거행한다. 모택동이 호남에서 광동으로 잠행하는 도중 광동, 강서성 경제의 산중에서 비적 신회원의 입회식에 참석하여 결의 형제의 축배를 나누었다고 전해지고 있는 비적의 두목 원자재(袁子才)와 주문(周文)은 아마 가로회의 한 유파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모택동이 유명한 추수봉기를 치른 뒤 정강산(井崗山)이라는 산채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던 것은 원자재 등 비적의 도움에 힘입은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이때 모택동이 산중의 사당에서 입당자에 대하여 비적이 하는 식으로 입당의 의식을 거행하고 선서를 시킨 것도 모택동과 비적의 관계를 설명하는 것으로 흥미롭다. 가로회의 정치 활동사를 간단히 적어보면 1. 광서 17년에 일어난 밀튼사건이 있다. 이 사건은 가로회에 입회한 이풍(李豊)이라는 회원이 6만 량의 은으로 해관(海關)에 근무하는 영국인 밀튼에게서 반란에 필요한 무기를 구입, 홍콩에서 진강(鎭江)으로 수송하려다가 발각되었다. 이풍은 옥사하고 그의 일가족은 자살했으며 이풍을 지휘하던 가로회의 두목 관희명(關熙明)도 형을 받고 죽은 사건이다. 이풍은 태평천국을 배신하고 청조에 항복했던 이소수(李昭壽)의 아들이다. 부친이 청조에 항복했음에도 사형을 당한 사실에 원한을 품고 원수를 갚기 위하여 가로회에 입회했던 것이다. 이 사건이 있은 후부터 양자강 연안의 인심은 더욱 배외적이 되고 영사관과 세관에 방화하고 외국인을 살해하는 사건이 빈발했다. 2. 광서 18년에는 강서, 호남의 성 경계지 예릉(醴陵)에서 가로회의 두목 두 명이 관헌에게 피살되고 다른 두 명이 체포되어 투옥된 것을 천여 명의 회원이 봉기하여 옥을 부수고 구출했다. 이 사건 후 얼마 안되어 광서 23년에 이르러서는 가로회와 손문 일파의 제후가 밀접해지고 삼합회와 함께 손문혁명의 양익을 담당하게 되었다. 3. 광서 26년은 의화단 사건의 해, 가로회 일파인 동구회(同仇會)의 두목 마복익이 당재상(唐才常)과 함께 호남에서 폭동계획을 세웠다가 모의가 발각되어 당재상은 한구에서 장지동(張之洞)에게 살해되었다. 4. 광서 30년에는 호남에서 황흥(黃興)이 마복익과 모의하고 광서의 각 수령과 연락하는 한편 삼합회, 청방, 백방 등을 결합하여 혁명단체를 만들 계획을 세웠다. 때를 같이 하여 회원의 한사람인 육아발(陸亞發)이 광서에서 거사하고 柳州를 공격하여 총 5천 정을 탈취하고 마복익에게 호남에게 거병하도록 권했다. 그리고는 10월 10일 각처에서 동시에 봉기할 계획이었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9월 15일에 두목 여러 명이 체포되고 마복익도 잡혀서 참형을 받았다. 5. 광서 32년에는 강서성 평향(萍鄕)의 광부들이 조직한 가로회의 일파인 홍강회(洪江會)가 폭동을 일으키고 호남의 예릉 및 유양(懰陽)을 함락, 승승장구하여 장사를 습격했다. 이때 관군병사 속에 가로회와 내통하는 자가 많았으므로 관군은 공중을 향하여 총을 쏘고 그 총을 버리고 도주했다. 호광(湖廣) 총독은 필사적으로 방비하여 교전 20여 차를 치른 뒤 반란을 진압할 수 있었으며 반란군은 탄환이 떨어져 궤멸하고 말았다. 이와 같이 각지의 가로회는 독자적인 명칭으로 활약했다. 쌍용회(雙龍會), 九龍會, 千人會, 白布會, 평진당(平津黨) 등 다수의 명칭을 내세워 활동했으나 그들은 모두 청말 이후는 손문의 영향을 받고 그들과 연락을 취하여 제휴했다. 2차대전 전의 홍방(紅幇)은 신해혁명 후 탈락했던 가로회, 삼합회의 일부가 합류하여 태평천국 난의 조직을 흉내내어 홍수전의 洪자를 紅으로 바꾸어서 조직한 것이다. 이 조직은 선주와 선원으로 구성되었고 統領, 老師父, 師父, 師徒, 弟子 등 淸兵과 비슷한 위계를 갖추고 있었으나 청방(靑幇)처럼 엄격하지는 않았다. 보통은 각조의 두목을 통령이라 부르고 그 아래는 위계질서도 문란했다. 청방에 비하면 비교적 자유롭게 조직된 단체였다.
청방(靑幇) 청방에 대해서는 이제까지 여러 번 언급했으나 淸門, 安淸幇, 淸門羅敎라고도 하여 청방의 기원은 그들의 전설에 의하면 청나라 조정이 청나라 초기에 강소성의 양주에서 북경 부근 통주(通州)까지의 대운하에서 미곡을 운반하는 권리를 한민족 회유책의 하나로 한인의 전(錢), 옹()翁, 번(瀋)이라는 세 사람에게 주었는데, 그 세 사람을 두목으로 조직한 비밀결사가 청방이라고 한다. 청방은 처음부터 반체제 측에 섰던 것이 아니고 체제옹호의 입장을 취하고 생겼다. 따라서 청방의 본시의 이름은 안청방이라 하여 청조를 편안하게 한다는 뜻에서 붙인 이름이었다. 그 후 「안청방」의 안을 빼고 「淸」자를 「靑」으로 고쳐서 홍방의 「洪」자를 「紅」과 바꿨던 것과 같은 이유에서 「靑幇」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청방은 19세기의 중엽에 대운하의 교통이 두절되자 육지에 올라가 객기를 부리는 불량배가 되었다. 시가지에 세력권을 형성하여 교통노동자, 수공업자, 상점원, 하급경찰관 속에 세력을 부식했다. 중화민국이후 그들은 아편굴, 도박장, 창녀촌을 경영하여 재미를 보았으며 간혹 정계, 재계에까지 진출하여 1927년의 공산당 탄압의 쿠데타에서는 노동자들에게 총알을 퍼 붇는 일까지도 있었다. 이와 같이 그들은 청조이래 장개석 정권에 이르기까지 체제 측의 입장에 섰고 중국공산당 성립 후에도 모택동에게 평화를 호소하는 등 지금도 상해에서 청방의 세력은 그대로 남아 있다는 것이다. 청방의 조직은 매우 복잡하고 엄격하여 여러 층의 계급으로 분리되어 있다. 먼저 계급은 단계적으로 大字班, 通字班, 悟字班, 學字班의 순서다. 그리고 입문하는 자의 의식에 입회하는 사람의 수와 입회인의 직위, 그리고 입문자의 인품 등으로 의식의 격이 각각 달라진다. 그 의식은 네 종류로 구분된다. 최하급의 의식을 小善堂, 다음은 大善堂, 그리고 開善門, 최고급은 閉善門이라고 불려 거행된다. 입문자가 입문할 깨에는 먼저 제단을 만들어서 그 위에 「天, 地, 君, 親, 師 之位」라고 적은 위패를 모시고 위패를 뒤로 세 사람의 사부가 나란히 선다. 제단을 향하여 왼편에 전도사, 가운데 본명사(本命師), 오른쪽에 引見師와 세 사람의 사부가 줄지어 서고 그 앞에 입문자가 무릎을 꿇고 배례를 한다. 포권두(抱拳頭)라 하여 오른손 엄지를 안에 넣어서 주먹을 쥐고 그것을 왼쪽 손바닥으로 감싸쥐고 무릎을 굽혀서 엎드려 절한다. 주위에는 동문의 「同繕」이라고 하는 오자반 계급에 속하는 자가 둘러서서 입회인이 된다. 그리고 위패 옆에 동문인 ꡔ통자반ꡕ의 老師父가 몇 사람 입회한다. 또한 입문자의 인망 여하에 따라서 ꡔ대자반ꡕ의 최고계급에 있는 사람이 입회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런 경우는 매우 드물다. 각설하고 일동의 참석이 끝나면 입문자가 배례하고 있는 앞에서 전도사가 엄숙한 소리로 ‘아무개는 幇의 규약을 준수하여 이제 입문식을 거행한다’고 선언한다. 그리고 「삼국궁(三鞠躬)」의 의식이 시작된다. 먼저 사부의 전도사가 큰 소리로 “하늘을 보고 삼국궁!” 하면, 입문자는 본명사 후면의 위패를 향하여 주먹 쥐어 팔짱을 낀 두 팔을 들고 세 번 머리를 조아린다. 다시 전도사가 “땅을 보고 삼국궁!” 하고 소리를 지르면 입문자는 전과 같이 배례 한다. 이런 식으로 천, 지, 군, 친, 사의 다섯 위패에 세 번씩 「삼국궁」의 예배를 하고 그리고는 본명사, 인견사, 전도사에게 전도사의 호령에 따라서 「삼국궁」의 배례를 하고 다음에 또 입회인인 「대자반」이나 「통자반」의 선생에게 같은 예배를 세 번씩 하고 마지막에는 주위에 둘러서 있는 「오자반」의 門徒일동을 향하여 예배한다. 이것이 끝나야 비로소 입문을 허용 받아서 「학자반」이라는 최하급의 도제가 된다. 한번 청방이 되면 「가라(家裸)」 또는 「좌가라(左家裸)」라 하며 서로를 동선(同鐥)이라고 부르며, 의형제를 맺는다. 태어난 날은 달라도 죽는 날은 같다는 혈맹의 형제가 되는 셈이다. 대, 통, 오, 학의 네 계급 위에 또 「예자반(禮字班)」으로서 「老大師翁」이라고 하는 초계급적 계층이 있는데 실재하지 않는 존재다. 그들은 서로 혈맹을 맺은 형제이므로 한번 입문하면 서로 도와야 한다. 어디로 가나 一宿一飯의 대접을 받을 수 있다. 일례를 들면 죄를 벌하여 잡혀서 고문을 받게 된 경우, 고문하는 관리가 청방조직에 들어 있는 자로서 범죄자가 청방인 줄 알면 고문을 안 한다. 용의자가 고문의 고통을 못 이겨 저도 모르게 “三老師小救我那! (세 사람의 스승이여, 불쌍한 나를 구해주시오.)” 하고 소리를 지르면 만약 그 관리가 청방이면 곧 알게 된다. 그리고 곧 고문을 중단한다. 관리는 세 스승의 이름을 묻고 어는 계급에 속하는지를 따져 본다. 범인이 명확히 대답을 하면 고문을 중지하고 하급관리면 몰래 도망시키든지, 상급관리면 무죄로 꾸며서 석방시키는 경우도 있다. 이것은 과거 중국의 국가권력에 저항하는 일종의 사회연대성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안청방을 기원으로 발생한 체제옹호 측인 청방도 다른 일면에서는 반체제적인 사회의 연대적 유대로 연결되어 있는 셈이다. 청방의 조직은 현재에도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의 화교 사이에 큰 세력을 이루고 각지방의 재계를 주름잡고 있다. 물론 재미 화교계에도 청방조직은 침투되고 있으며 본국의 상해에서도 상공업계속에 비밀결사로서 상호 연대하여 그 세력을 유지하고 있다. 아마 공산당원 속에도 청방의 비밀결사에 속해 있는 자도 상당수 있을 것으로 보아야 한다. 중국은 아마 이 청방의 해외에서의 조직을 교묘히 이용하여 국가세력의 신장을 위하여 힘쓰고 있을 것이다. 청방의 이데올로기는 불교의 임제종(臨濟宗)에서 얻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충, 신, 의를 표방한다. 실천방법으로서는 ‘사리를 꾀하지 않고, 어려움을 구하고 위태함을 도와서 늙은이를 구휼하고, 빈자에 동정하고, 의를 보면 용기 있게 행하며, 기꺼이 즐겨 베푼다.’ 고 하는 의협 적인 풍습을 갖는다. 교의가 통속적이고 단순하므로 서민들에게 쉽게 받아들여진다. 하기야 방원(幇員) 가운데는 부정을 행하는 자도 있어서 도적과 같은 취급을 받는 경우도 있었다. 청방의 행동은 정치혁명, 지방동란, 노동운동에 대하여 항상 큰 영향력을 끼쳤으며 손문의 혁명운동에도 그들은 큰 힘을 발휘하기도 했다. 예를 들면 1913년 그들은 혁명파에 호응하여 하남성의 白狼匪와 협력했지만 이듬해 혁명군이 실패한 후는 원세개의 북양군벌에 이용되어 양자강 남부의 행동에 참가하고 있다. 1924년 손문의 소련의 후원을 얻어 광동에 혁명군을 조직하자 장강 유역의 청방은 다시 이에 협력했다. 혁명군이 광동을 출발했을 때 방원은 편의대(便衣隊)를 조직하여 혁명군의 북상을 도왔다. 당시의 상해경비사령 양호동(楊虎東), 진군(陳群) 등은 유력한 방원이었다. 중국이 열강 제국주의에 의하여 반식민지화 됨에 따라서 상해의 청방은 조계의 경찰당국과 내통하고 시정노동자의 공급권을 손아귀에 쥐었을 뿐 아니라, 그의 수령들은 남경정부의 중심인물과 결탁하여 비밀리에 갖가지 특권을 얻어내기도 했다. 이와 같이 청방도 유산계급의 무기로 변하여 진보적 민중세력과 대립하게 되었다. 반공운동에 있어서 중화공진회(中華共進會)의 조력은 대단했는데 이 공진회는 상해지방에 거대한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청방의 영수 장소림(張嘯林), 두월생(杜月笙), 이징오(李徵五) 등이 조직한 것인데, 상해위수 백숭희(白崇禧)를 원조하여 멸공에 힘썼다. 장개석도 청방에 가맹하고 있었다. 1927년 4월 상해총공회(上海總工會)에 대한 장개석의 쿠데타에 청방이 협력하고 있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청방의 포용력은 넓었다. 빈농과 도박꾼 기타 무뢰한뿐만 아니라 토비, 비적도 받아 들였다. 미국의 갱과 흡사하다. 미국의 발전과 함께 성장하나 갱 세력은 파쇼정책을 위한 유력한 무기 구실도 했다. 마적과 토비는 전시대의 유물임은 사실이며 시대가 발전함에 따라서 필연적으로 소멸될 운명에 있었는데 새로운 공업사회는 그 대신으로 소위 갱단이 그 속에서 자라나고 활약할 토양을 제공했다. 근대중국 대도시에 차츰 대두되고 있었던 갱의 모체도 또한 마적이나 토비는 아니고 청방이라고 말할 수 있다. - 위의 설명처럼 손문혁명에 청방이 협력했다는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확인할 방법은 없다.
마적(馬賊) 1. 마적발생의 자연적 조건 동으로 한만 국경, 북은 시베리아, 서는 코카사스, 남은 중국 본토와 접경하고 있는 혹한의 광막한 지대에는 우랄 알타이계 인종군, 즉 타타르인, 몽고인, 여진인 등이 먼 옛날부터 유목생활을 영위하고 서로 싸우며 점차로 집단화를 이루고 종족화 되었다. 이윽고 송나라 이후로는 같은 유목민족끼리의 투쟁에서부터 북진하여 남부 만주에 정착하여 농경 생활을 하는 漢民族에 대한 침략으로 진로를 돌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중국의 동북, 만주(만주는 일본식의 이름이다. 중국의 동북제성을 만주라 칭하는 것은 어쩌면 중국인의 자존심을 손상시키는 일인지도 모른다. 만주, 만주족, 만주사변 등에 붙여진 만주라는 말은 일본 역사학자들이 지은 일방적인 이름에 불과하며, 그 이름 속에는 중국의 하나의 省의 넓이나 인구도 되지 않는 왜소한 나라인 일본의 콤플렉스가 작용해 중국을 폄하하려는 속셈이 숨겨져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동북 3성의 동쪽은 거의 산악지대이며 중국대륙에서 최대의 목재자원지대다. 산악지대는 아름다운 산림으로 이뤄지고 광활한 계곡이 있어 맑은 하천과 울창한 산림이 그림처럼 전개되고 있는 곳에 수 천 척의 험산준봉이 즐비하여 그 풍경의 대부분은 자연 그대로 남아있다. 그러므로 농경재배는 일반적으로 산기슭에만 한정되고 있다. 소위 녹림거사(綠林居士)인 마적의 원시적인 근거지로서 가장 적합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그리하여 북쪽의 송화강(松花江)을 경계로 시베리아와 접하고 있으며 서쪽은 코카사스의 혹한 혹서 지대로 연결되는 불모의 황막한 평원이다. 이곳에 살고 있는 유목민족은 매우 사납고 잔인하여 끊임없이 싸움을 반복했고, 싸움터에 따라서 이동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때로는 산중에 웅거했고 때로는 목초를 찾아 끝없는 들판을 헤매었다. 그 중에는 타타르인과 같은 紅毛의 인종도 있다. 마적을 중국인은 「홍호자(紅鬍子)ꡕ라고 하는데 붉은 수염을 기른 이민족의 침략자에서 어원을 취했던 것이다. 남부의 만주평야는 동부만주의 산지와는 다르고 또 만주의 북단과 서부의 산악지대와도 달라서 넓은 저지대로 농업에 적합하다. 보리, 밀, 고량, 메밀, 조 등의 농산물을 경작하고, 부업으로는 양돈과 양계를 하며 서부에서는 양을 방목하고 있다. 이곳 남만주를 포함한 동북일대는 청조발상의 땅으로서 청조시대에는 성지라고도 했다. 그 후로 열하, 흑룡강, 길림, 봉천 등의 성으로 구분되어 중화민국시대 까지 통치되어 왔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북방변경의 이민족과 접경하면서 남만주 평야로 한민족인 중국인이 정착하기 시작한 것은 11세기 말경으로 중국본토에서는 송나라의 전성기였다. 당시는 만주서북의 만몽(滿蒙), 화북지대에는 거란족의 요(遼)가 지배하고 있었고 한반도에는 탄탄한 문명국 고려가 있었고 서쪽의 수원(綏遠), 감숙, 령하에 걸친 일대에는 퉁구스족인 西夏가 있었다. 중국의 역사적 특색은 북방의 비정착 유목민족과 본토의 정착 농경민족과의 투쟁의 역사라는 점에 있다. 즉 漢민족인 중국인이 이곳 만주평야에 이주하여 농업목축을 경영하며 정착하게 되고 부터 한민족과 북방 유목민족과의 투쟁이 전개된다. 그리하여 소위 「마적」이라 일컫는 비적의 집단이 이러한 역사적 경과를 겪으면서 서서히 역사의 무대에 각광을 받게 되었다. 즉 마적을 홍호자(紅鬍子) 또는 鬍子라고 중국인이 부르는 것은 붉은 수염의 이민족이 침략해 오는 것을 정착하고 있는 한민족이 자력으로 방비하기 위하여 조직했던 자위조직인데, 세월이 흐르는 사이에 침략자의 명칭을 그대로 사용하여 자기들의 이름으로 부르게 된 것이다. 중국인의 紅鬍子를 일본인은 마적이라고 불렀다. 다시 말해서 일본인들이 붙인 대다수의 중국인이나 동북중국의 다른 민족을 편의적으로 마적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일본식민시대에 일본인을 흉내 내어 한국 사람도 만주의 중국인 자위조직을 마적이라고 불렀고, 만주일대에서 활약했던 한국독립투사들까지 마적이라고 불렀다. 뿐만, 아니라 일제시대에 한국인은 일본인 국경경비대에 고용되어 압록강 연변에서 한국독립군을 마적이라고 부르며 총질을 하여 국내에 못 들어오게 막았다. 그러면 그들이 어찌하여 마적이라고 불렸는가? 물론 그들은 결코 도비(盜匪)라든가 토비 또는 유비(流匪) 따위와는 달랐고, 민중을 침략자로부터 보호하는 것이 임무이므로 보위만을 전문으로 하면 마적의 오명을 받을 리는 없었다. 그들 중에는 가끔 다른 지방에 침입하여 도적질을 하는 자가 생기게 되어 심지어는 산적이나 토비로 타락하여 도적질만을 전문적으로 일삼게 된 자도 있었다. 그래서 성실한 자위조직인 보위단마저도 도매금으로 넘어가 마적이라 불리게 된 결과를 초래했다. - 「마적」이라는 도적의 이름도 실은 일본인들이 지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따라서 그들은 남부의 삼합회나 가로회와는 달라서 정치적인 혁명의식을 가진 집단은 아니었지만 반관료적 의적집단인 점에는 남부의 비적과 공통성이 있었다. 「진한(晋漢)이래 호협(豪俠)을 자처하는 자로서 그들의 평생 직업은 인가를 약탈함에 있고, 분묘를 도굴함에 있고, 도박함에 있다. 그들의 안중에는 정부도 없고, 조국도 없으며 인의나 도덕도 없다. 그들의 일상은 다만 일신의 쾌락을 얻음으로서 족하며 저울을 다투어 금과 은을 분배하고, 요란한 의상을 걸치고 말술을 들이키며 고깃덩어리를 통째로 삼키는 것을 물론이며, 여자를 납치하여 번갈아 가며 겁탈하여 길거리에 버리는 육도(肉盜)질 외에는 돌보는 일이 없다. 마적이라 불리고 토비라고도 하는 자들의 생활은 그렇다.」 이 글은 마적의 뒷골목 생활의 일면을 이야기했을 뿐 그들의 전부의 모습은 아니다. 이것은 마적의 본령이 아님은 물론이다. 대게 마적에 관한 기록은 일본인들에 의해서 이루어졌는데, 민족의 감정적 우월감이 낳은 타민족에 대한 악의에 찬 모함일 수도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 해도 전중국인이 정사의 기록에 있어서 아주 취약하다는 것과 중국 동북지방의 제민족이 문자를 정확히 사용하는데 익숙하지 못했다는 점은 사실인 것 같다.
2. 농민의 자위조직과 마적 역대의 중국 왕조정부 또는 중국 지방 관청은 세금징수의 통치는 했으나 지방농민과 서민에 대하여 혜택을 주는 행정은 거의 없었다. 말하자면 힘의 지배는 있었으나 仁의 다스림은 없었던 것이다. 마적이 창궐함에도 중국의 중앙정부는 전혀 그들을 돌볼 여력이나 마음이 없었다. 농민은 중앙정부 또는 지방관청의 명령과 지휘를 받들고 농촌의 비용으로 스스로의 힘과 노력으로 치수, 관개, 교량, 등대, 도로에서 구휼, 교육사업에까지 담당해야 했다. 다만 중앙정부와의 사이에 연결되는 직접적 정치관계는 전적(田賊), 지조(地租), 가옥세, 酒稅 등 납세관계 뿐이었다. 청조의 경우를 예로 들면 지방총독, 순무 등이 부패하고 각 현의 지현도 타락하여 그들 관료를 둘러싸고 탐관오리가 착취약탈을 멋대로 자행하게 되어 군도가 모발처럼 발생하여 치안이 극히 문란해져도 정부는 그러한 부정과 악정과 혼란이 정치적 문제로 발전하기 이전에는 아무런 문책도 하지 않을뿐더러 도리어 그것을 구실로 하여 지방관료는 한결 착취를 강화하여 농민을 괴롭혔다. 따라서 농민의 치안은 농민 스스로가 담당하여 지켜야 했다. 만주에서 일찍이 북변의 이민족 홍호자의 침략을 방위한 것은 농민 자신들의 자위조직이었다. 말하자면 농민의 보위단이 정부가 할 일을 도맡아서 각처의 촌락을 방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예를 들면 백련교의 대란으로 관군의 힘을 믿을 수 없다 하여 민중이 제힘으로 위난을 막으려고 조직한 자위집단이 상군, 향군, 단련 등이다. 태평천국 난에서는 이러한 자위조직이 관군 대신에 태평군과 싸웠다. 만주에서도 역시 민중의 자력으로 마을의 치안을 지키기 위하여 보위단이니 연장회(連莊會)니 하는 민간조직이 생겼고 그것이 차차 발달했는데 세력이 강해지니 그것이 다시 비적, 토비, 유비 등을 발생케 하는 온상이 되었다. 지방 행정기구는 시대에 따라 구획이 다르나 민국정부가 성립한 후에 결정된 지방행정기구는 區, 鄕, 鎭, 여(閭), 린(鄰)으로 구분되어 5호가 린, 5린이 려, 100호의 촌락지방을 향, 시가를 진으로 하여 이것을 지방자치의 단위로 구분했다. 구는 29향에서 50향과 진으로 구성되고 구 주위에 현이 있다. 각 린, 려, 향, 진, 구에는 각각 관제의 장이 있고 그 위의 현에는 지현이 있다. 그런데 이상의 행정구획은 관제기구이며 실제로는 예부터의 지형 등 자연적 조건으로 발생한 촌락공동체 등을 기초로 저절로 이뤄진 자연촌이 있어서 농민은 이러한 자연촌을 단위로 하여 자치조직을 형성하고 있었다. 예를 들면 30호 내지 50호로 하나의 촌락을 형성하고 한 촌락의 호수의 일할, 즉 50호면 5명으로 하나의 보갑단(保甲團)을 조직한다. 그런데 그 마을에 한 두 명의 좀도둑이 돼지 따위나 훔치려 들었을 경우에는 5명의 보갑단원으로도 지킬 수 있으나 20명, 30명의 토비집단이 몰려와서 인질이라도 납치해 가는 날이면 5명으로는 못 당한다. 그래서 이웃 마을의 보갑단과 연합하여 치안을 담당한다. 그 지방의 지형에 따라서 동일한지는 않지만 대개 30보갑단으로 보위단(保衛團)을 조직한다. 즉 5명의 보갑단이 30개 단이 모여서 150명의 보위단이 되는 셈이다. 이 150명의 보위단이 다시 다른 지구의 인원수가 비슷한 보위단 10개 단과 합세하면 1500명의 보위단 연합체가 구성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10수 개 지구의 횡으로 연결된 보위연합체를 연장회라고 일컫는다. 즉 보갑단 - 보위단 - 연장회라는 계통으로 민간의 수 만 또는 십 수 만 명의 자위조직이 몇 개의 현 또는 십 수 현을 연결한 일대 연합 자위조직체로 성립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조직된 보위단, 연장회 중에서 1割의 인원을 선발하여 전투부대인 의용단을 조직한다. 의용단은 촌락을 스스로 지키는 명예로운 전사이므로 모두 무예에 능한 자들이 많으며 주로 명문자제가 지원하게 된다. 의용단원은 권총, 창검, 마술에 뛰어난 기술을 지닌 자들뿐이다. 그리고 또 평소에도 각처를 순회하여 마을마다 경비를 담당하는 유격대가 이 의용단 가운데서 선출된다. 그리고 보위단장, 의용단장, 유격대장은 마을의 장로회의에서 결정하게 되어 있다. 이상이 만주에서의 농촌자위조직의 구성 내용이다. 그런데 이들 보위단, 의용단, 또는 유격대에도 자기들의 세력권이 있어서 마찰이 자주 일어난다. 소위 내분이 일어나는 것이다. 때문에 다른 현으로 원정하며 약탈하는 불상사도 일어난다. 그 가운데는 의용단에서 탈주하여 토비가 도는 자도 있었다. 그래서 자위조직이 비적이라는 소리까지 듣고 마적이라고 불리게도 된 연유다. 중국의 국가권력과 중국농촌을 기반으로 한 사회조직이 두 개로 균열되어 단층이 생기게 된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상층의 권력계급에서는 유교가 주가 되고 농촌사회에서는 도교를 주로 신앙하여 사상적으로도 중국의 구시대는 두 개로 단절되어 있었다. 이와 같이 구 중국민족에게는 국가라는 것은 단지 농민이 피땀으로 생산한 것을 수탈하는 폭력기관에 불과했으며 민중들은 권력층 관료들을 官匪라고 매도하고 비적이나 다름없이 증오했다. 이처럼 중국사회는 오랜 세월 국가권력과 민중이 대립하여 적대관계에 있었던 것이다. 일찍이 손문은 해방전의 중국민족에 대하여 중국에는 가족주의, 종교주의는 있어도 국가주의는 없다. 중국인은 민족이나 국가에 대하여 애정을 느끼지 못하는 흩어진 모래와 같은 존재에 불과하다고 개탄했다. 때문에 민란은 끊이지 않고 왕조는 자주 교체되어 필경은 제국주의의 침략의 밥이 되었다. 여기에서 비로소 중국민족은 외세배척 운동을 통하여 민족주의에 눈을 뜨고 반제, 반봉건에의 길을 찾게 된 것이다.
3. 연장회, 보위단, 의용단 연장회의 조직단위인 보위단의 단원은 대개 15세에서 30세의 향촌청년이다. 단원수는 마을에서 보유하고 있는 무기와 동수여야 한다. 따라서 단원인 백 명 있다면 그 보위단이 소유하는 무기는 대개 장총 60정도 정도 밖에 안 된다. 나머지 부족한 수량은 권총, 칼, 검, 창 등으로 무장한다. 권총은 주로 대련(大連)에서 밀수하여 들어오는 모젤 총을 사용한다. 보위단이라 해도 전투만을 일삼지 않고 평소는 마을의 길을 닦기도 하고 촌락 주위에 구축된 흙담의 수리를 위하여 봉사작업을 하기도 하고 공공시설의 건조에 종사하기도 한다. 또 마을을 통과하는 화물과 화물을 운반하는 소달구지, 마차 등을 보위하여 토비의 습격을 경비하기도 한다. 그리고 수 십 대의 화물수송의 안전을 위하여 보위단에서 다음 마을의 보위단으로 릴레이식의 방법으로 보위한다. 이런 경우 일정의 통행세를 지불하면 보표(保票)라는 자그마한 기를 준다. 그 보표를 가지고 여러 지구의 마을을 통과하면 각 촌락의 보위단에서 보호해 준다. 이런 경우 통과하는 여러 마을이 하나의 연장회에 속하는 지역일 수도 있다. 그리고 또 귀중한 화물과 금, 아편 등의 수송을 보위할 때는 특별 통행세를 바치기도 한다. 다른 연장회와의 세력권 다툼과 양민을 괴롭히는 토호 등이 타현의 나쁜 지현과 결탁하여 마을의 유력자나 유력자의 자제를 납치해 가 금품을 강요하는 일이 있었다. 해당지역의 연장회의 연락을 받고 보위단 중에서 선발된 의용단이 敵의 鎭과 현성을 공격하여 싸운다. 예를 들면 A현, B현 C현의 각 보위단이 하나의 연장회에 속해 있을 때 D현의 악질 지현이 현내의 유력자의 딸이나 노인을 인질로 납치하여 금전을 요구하거나 촌민에게 불법적인 금품을 강요하든지 하면 그 현내의 보위단으로서는 악질 지현의 행정권내에 있으므로 손을 쓸 수가 없다. 그러면 그 A현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D현의 보위단에 연장회장을 통하여 구원대의 파견을 요청한다. A현은 보위단에서 의용단 또는 유격대를 파견하여 D현성을 습격하는 것이다. 다른 현을 습격해도 권력이 미치는 영역 밖이므로 D현의 지현으로서는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 일본의 봉건시대의 사정과 같다고 보아도 좋다. D현의 보위단에서 연장회장을 통하여 구원의 연락이 있으면 A현의 의용단은 야음을 틈타 가마대를 편성하여 출동한다. 특히 어려운 전투가 예상될 경우에는 의용단 중에서 특별히 선발되어 조직훈련을 받은 유격대가 일선에 앞장선다. 유격대원은 모두 알맹이 용사들이다. 용감하고 담력이 세고 무술에 자신을 가진 단원들이다. 열자가 넘는 베를 물에 적셔서 담장에 걸치고 타고 넘어가는 재주와 턱을 빼고 양어깨의 뼈를 빼서 좁은 구멍으로 잠입하는 기술과 동전을 공중에 던져 올리고 쏘아서 떨어뜨리기도 하고, 전선줄을 권총으로 쏘아 끊기도 하는 무술에 능란한 용사들이다. 그들은 20기, 30기를 단위로 하여 수명씩 분대를 지어 야심을 이용하여 말을 달려 잠행한다. 현성을 공격하고 관청을 습격, 불을 지르고 지현을 죽여서 효수를 한다. 감옥을 부수고 죄수를 풀어 주며 인질을 구출하고는 여러 현을 통과하여 말을 달려 돌아온다. 인질탈환 따위의 소전투가 아니고 규모가 큰 전투에는 유격대와 의용군만이 아니고 보위단 전체가 전투임무에 임한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의용단이 그 전위로서 활동한다. 연장회 산하의 보위단, 의용단 유격대의 경비는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통행세와 같은 특별수입도 있으나 평소의 운영비는 마을의 보유 금으로 충당한다. 정규적 세금이란 것은 地租며 성장이 각현의 지현을 통하여 현의 세연국(세무서)에서 각 마을의 촌장을 거쳐 촌민에게서 받아들인다. 세금과 同額의 보유 금을 마을의 공동 보유 금으로 촌장이 보유한다. 즉 납세할 때는 먼저 촌장이 마을의 공동보유금으로 우선 대체하여 현의 세무국을 통하여 성의 재무청 납부해 둔다. 그리고 가을의 수확기가 되면 토지대장에 의하여 현물 징수한 곡물을 현성 내로 운송하고 마을의 商務會長과 농회장에게 징수한 곡물을 돈으로 환금시켜서 보유 금에 넣는 것이다. 이때 납세액과 같은 금액을 보위단, 의용단, 유격대의 경비에 쓰기 위하여 현물징수하고 같은 방법으로 환금하여 촌장이 보유한다. 즉 관납과 민납의 이중 납세인 셈이다. 정규의 세금이라지만 촌민 자신의 복지향상을 위하여 사용되는 것도 아니고 지방관료와 군벌의 군사비로 사용된다. 뿐만 아니라 성장, 순무, 도독, 지현 등이 재벌이나 탐관오리와 결탁하여 자기들 사복을 채우려고 ꡔ특별비ꡕ라는 여분의 금전을 얹어서 징수한다. 예를 들면 성정부에서 한 현에 대하여 300만원의 부과금을 할당했다고 하면 촌민들은 수수료니 어쩌니 하는 다른 명목으로 200만원쯤 여분으로 바친다. 이것은 성장, 재무청장, 지현, 그들은 싸고도는 세무국장, 재벌, 관료, 기타 이른바 탐관오리들의 주머니에 들어간다. 군벌시대에는 군벌간의 전쟁이라도 일어나면 그 외에 특별군비의 징수가 있다. 즉 농민은 2년, 3년 후의 세금까지 강제 징수되어 가렴주구에 시달리는 것이다. 딸을 팔고 아들마저 팔아서 한 가족이 이산하여 유민이 되거나 토비가 되어 약탈하게 되며 수탈이 심해지면 농민은 비적과 손을 잡고 반란을 일으키게 된다. 봉천성에만 22개의 연장회가 있다. 토지는 모든 성에서 백만 천지, 一天地는 163평에 해당한다. 장작림(張作霖)이 동북 3성을 지배하고 있던 시대에는 농지 1천지에 대하여 국세로 은 1원을 징수했다. 국세를 징수할 때 촌장은 국세 1원의 은화를 더 얹어서 징수하여 이에 충당한다. 게다가 또 특별비를 1원 더 가하면 1천지에 3원, 봉천성에 백 만 천지가 있으니 3백만원을 농민에게서 수탈한다. 게다가 앞에서 언급한대로 수수료 기타의 명목으로 탐관오리의 사복을 채우는 수탈이 2백만원 있다고 치면 봉천성에서만 5백만원의 3중 4중의 착취를 해먹는다는 말이 된다. 아무리 연장회가 있고 보위단, 의용군, 유격대가 있어서 치안을 돌보고 지방농촌의 복지를 위하여 노력하여도 토비 유비가 약탈폭행을 하지 않을 수 없는 형편이다. 연장회의 회장을 총람파라 부르고 그 아래에 제1부총람파, 제2부총람파가 있어서 연장회를 총 지휘한다. 각 보위단장을 「람파」라고 부르고 각 보위단을 지휘한다. 그 아래에 여러 개의 보갑단을 지휘하기도 하는 유격대의 반장을 맡아보는 포두(包頭)라는 소두목이 있다. 만주사변 이전 장작림 시대에 만주에서 활약했던 일본인 총람파 小日向白朗, 중국이름 「尙旭東」, 별명이 小白龍의 말에 의하면 도로와 참호의 수축과 특별경비 등에 종사하는 보위단원에는 일당 30仙을 기준으로 지불하고 다른 현으로 원정하는 의용군단에게는 일당 20선에서 50선, 기마대 일기, 즉 말 한 마리 사람 한 명에 대하여 은 1원 5각(1角은 10선)을 연장회에서 지불하게 된다. 의용단과 유격대가 행동을 개시하는 계절은 대게 봄의 파종시인 3월에서 옥수수를 거두어드리는 10월말까지이다. 격투가 예측될 경우에는 의용단의 양가자제를 출동시키는 대신에 다른 곳에서 특별히 협객을 고용한다. 이런 경우에는 일당 외에 특별수당을 30원에서 50원의 은화를 선불한다. 소위 援助人의 수당이다. 이와 같은 자유계약의 실업자를 어디서 어떻게 고용해 들이는가 하면 다음과 같다. 봄, 가을로 일년에 두 번 장이 서는 길림 봉천성 경계의 北三條子, 장춘, 하얼빈 중간에 있는 雙城市, 그리고 발해 연안에 있는 錦州 남부의 사후소(砂後所)의 시장이다. 여기서는 각 지방의 농민과 수공업자와 상인들이 모여들어서 각지의 특산물, 일용잡화, 가내공예품의 교역을 한다. 장이 열리고 있는 기간 중은 갖가지 진기한 구경거리와 물품이 매매된다. 멀리 열하와 내몽고 부근에서 반년이나 걸려서 양모, 우단 등을 낙타와 당나귀에 싣고 팔러 온다. 이 시장에는 「목숨을 팝니다」 하고 큰 칼 한 자루, 창 한 자루, 혹은 권총 한 정을 가진 낭인들이 나타난다. 그 중에는 말을 타고 종을 거느린 호걸도 있다. 그들을 가리켜 「수매장사(收買壯士)」라고 한다. 「무예에 뛰어나게 능한 자, 힘이 센 자는 유격대 중에도 흔하게 많기는 어려우므로 람파나 총람파가 부하를 데리고 몰래 시장에 나와서 값진 보물을 물색한다. 매수자 쪽에서는 그 지방의 유력자를 중개로 내세운다. 매수자 쪽에서는 대게 유명한 투쟁경력을 가진 낭인의 이름을 알고 있으므로 거래는 비교적 간단하게 끝난다. 그들의 가격은 무술을 능숙히 다루는 기량 여하에 따라서 결정된다. 민국 10년경에는 싸움 한판에 30원 정도로 거래되었다. 말하자면 지금 돈으로 4, 50만원쯤 된다. 값나가는 장사는 100원까지도 올라갔다. 선금이 필요한 자에게는 대금의 3분의 1이나 반액을 준비금으로 지불해 주었다. 중국의 낭인은 평소는 농사일을 하기도 하고 푸줏간이나 말굽장이 등의 장사를 하고 또 객관의 고용인 노릇도 하며 풍운을 타고 일어날 기회를 기다린다. 한가지 덧붙일 것은 보위단장, 연장회장 등을 결정하는 장로회의에서는 「부람(扶攬)」 또는 「부지(扶趾)」라고 하는 점술을 사용한다. 즉 순결하고 예쁜 소녀를 간택하여 예를 올리고 성스럽게 회당으로 모신다. 그리고는 소녀의 눈을 가리고 모래 위에 모래시계와 비슷한 「부람」이라는 용기에 매달린 붓으로 신의 의사를 나타내는 암시에 따라 글자 비슷한 것을 쓰게 하여 결정하는 풍습이다. 그러나 이런 점술은 하나의 형식으로 민중을 납득시키기 위하여 행하는 것이었다.
4. 반만, 항일 의용군의 본거지 일본제국에 의해 만주사변이 폭발하자 남만주의 연장회는 총람파 상욱동(마적명:소백룡)의 제1부총람파인 고문빈(高文斌)의 지휘 하에 제2 부총람파 이해봉(李海峰 마적명:老北風), 제3 부총람파 오국벽(吳國壁 마적명:三勝) 등에 의하여 반만동북항일 의용군이 조직되어 일본군의 만주침략에 저항했다. 만주사변 돌발 당시는 총람파인 상욱동은 그 전 해 군벌 장학량(張學良)의 봉천성 점령 미수사건 당시 상욱동이 일본인이라는 이유로 퇴거명령을 받아서 중국에 없었다. 그래서 부총람파인 고문빈이 지휘했다. 일본의 관동군과 독립수비대는 연장회를 비적집단이라 하여 토벌을 개시했다. 장학량의 동북군은 일본군에 이렇다 할 대항도 하지 않고 화북방면으로 이동해버렸다. 마적의 연장회만이 일본군의 침략에 저항했으나 일본군을 토벌한다는 것이 전부 양민만을 학살했었다. 반만동북 항일의용군은 능숙한 기마게릴라고 각처에서 일본군과 맞서 저항했다. 그러나 의용군은 정규군이 아닌 민병조직에 불과했으므로 다만 게릴라전법으로 저항했을 뿐 전투에 승리를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한편 일본측의 비적소탕전도 시일만 끌 뿐 좀처럼 끝장이 나지 않았다. 당시 남만일대의 연장회의 항일전투의 총사령부는 도교의 사원인 천산에 있는 무량관이었다. 이 무량관이야말로 당시 90세를 넘은 스승 갈월담도사(葛月潭道士)를 최고의 사상적 지도자로 받드는 남만주 일대의 연장회 통일총본부가 있는 곳이었다. 그래서 중국항일전쟁을 먼저 시작했던 만주마적의 총본부 「무량관」에 대하여 몇 마디 언급해 볼까 한다. 열하마적인 소백룡이 내몽고의 경책현성(經柵縣城)을 습격하여 지현을 죽이고 채합이(蔡哈爾) 도통(都統)의 추격을 받고 다륜(多倫)의 라마묘의 장가불야(章嘉佛爺)에 구조되어 화북을 우회하여 남만주로 잠입하고 마지막 구원의 장소를 구했던 곳이 남만주 도교의 본산인 「무량관」이었다. 무량관이란 어떤 곳인가. 「초여름의 햇살을 받으며 나는 흐르는 땀을 씻으면서 줄 참나무, 느릅나무, 배나무, 살구, 밤, 소나무 등이 울창한 삼림을 헤치고 산을 기어올라 무량관으로의 길을 재촉했다. 열하, 채합이, 화북으로 쫓겨온 나는 봉천까지 도주하여 그곳에서 많은 동지들이 결의형제의 의식을 요구했으나 추격되고 있었던 나의 심정은 초조하여 몸둘 바를 몰랐다. 일각이라도 빨리 무량관의 감월담도사를 만나 法衣에 매달려 불안초조에서 벗어나고 싶은 생각만이 가득했다. 빠른 걸음으로 산길을 오르면서 문득 나무 숲 사이로 흘러드는 맑은 바람에 땀을 씻는 상쾌한 느낌으로 나도 모르게 걸음을 멈췄다. 바로 발 아래로 계류가 바위를 씻으며 흐른다. 나는 한숨을 내쉬고 하늘을 바라 보았다. 마침 그때 명산 마천령(摩天嶺)의 웅장한 봉우리들이 구름 위에 높이 솟아 있었다. 그리고 그 옆의 狼子山 위에는 흰 뭉게구름이 바람에 불려 이쪽저쪽 흩어지며 흘러가고 있었다. 뭉게구름 아래로 소나무 숲 속에 흰빛 암석을 노출하며 솟아오른 기봉 천산(553미터)이 하늘을 향하여 그 웅장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나는 시선을 천산의 산기슭에로 옮겼다. 산록에 즐비한 높고 낮은 암산의 주름진 구릉의 한쪽에 도교의 궁전, 무량관 대가람의 지붕이 멀리 소나무 사이로 보일 듯 말 듯 했다. 너무나 웅장한 광경에 마음의 불안과 초조함도 잊고 황홀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나는 걸음을 재촉하여 통나무 다리를 건너서 계류를 넘고, 바위에서 바위로, 무량관으로 가는 꾸불꾸불한 산길을 더듬어 올라갔다. 산길의 경사가 가파르고 험하여 급한 오르막을 타느라고 숨을 헐떡였다. 산록에서 이럭저럭 너 덧 시간은 올라갔다. 그때 돌연 눈앞에 거인 같은 자연석이 나무숲을 내려다보며 온 산을 위압하듯 우뚝 나타났다. 자연석의 표면에는 열 자가 넘는 큰 글자로 ꡔ무량관ꡕ이라고 새겨져 있었다.」 천산역은 당시 남만주철도의 봉천 남쪽에 있는 안산(鞍山)과 海城과의 중간에 있는 한가한 역이다. 천산역에서 내려서 동쪽으로 향하여 올라가면 무량관이 있는 기봉천산이 하늘을 향하여 우뚝 솟아 있는 것이 보인다. 도교는 노자의 「도덕경」을 최고의 성전으로 하여 후한에 들어 장도릉에 의하여 창설된 것이다. 그 후 北魏의 구겸지(寇謙之)가 노자사상에 유교의 인의도덕을 내용으로 권선징악 사상을 가미하고 한편 불교교단을 모방하여 이를 조직화해서 도교교단의 확고한 지위를 구축했다. 공자의 유교가 군왕을 중심으로 권력옹호의 사상으로 타락한데 비하여 이와 대립했던 노자의 도덕경은 일관하여 피지배자 편에 선 종교가 되어 탐관오리와 싸웠고 그들의 가렴주구로부터 민중을 옹호해 왔다. 각설하고 전술한 소백룡의 회상을 좀 더 더듬어서 「무량관」으로 들어가 보자. 「무량관 문의 좌우에는 당나라의 진숙보(秦叔寶)와 위지경덕(尉知敬德)이라는 두 용사를 무신으로 모시고 있다. 이 무사는 仁王처럼 사악한 잡귀를 막기 위하여 받들어 모신 것이다. 문을 들어서면 돌이 바닥에 깔린 정원의 광장이며 정면에 三官宮의 전당이 있다. 삼관이란 것은 天, 地, 水를 관리하는 신이며, 上元天官, 中元天官, 水元天官의 三禮로서 제각기 인간의 선악을 감독하는 신이라는 것이다. 삼관궁을 오른쪽으로 회랑을 통하여 안마당에 들어가면 좌우에 각각 28 春殿의 전당이 있으며 거기에는 북두칠성을 나타내는 「현천상제」의 상과 文藝神 「文昌帝君」의 상을 모시고 있다. 즉 도교에서는 天上界에는 인간과 같이 제왕이 있고 그 제왕은 북극에 살고 있다 하여 북두칠성을 「현천상제」로 모시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문창제군」은 文昌星이라는 별이며 「皇帝의 아들」이라 하여 文藝神으로 받들고 있어서 옛날부터 국가시험에 합격하기 위하여 과거보는 사람들이 참배하여 장원급제를 빌었던 곳이다. 그리고 마지막 전당에는 도교 최고의 신 「원시천존(元始天尊)」의 상을 모시고 있다. 이것은 소위 노자의 「道」를 신격화한 것이다. 이러한 여러 신들의 전당 사이를 지나서 복도를 빠져나가 안으로 들어가니 객전(客殿)을 겸한 주지의 방이 있다. 이 방에 갈월담노사가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소백룡의 회상에 의하면, 노사는 「화광동진(和光同塵)ꡕ이라고 쓴 편액 아래의 의자에 앉아서 조용히 향을 피우며 명상에 잠겨 있었다. 깃이 넓은 도승은 法衣의 앞자락을 여미고 큼직한 베로 지은 신을 신고 있으며 머리에는 백발을 묶고, 흰 수염을 턱 아래 길게 드리우고, 검은 베로 만든 도승의 관을 쓰고 있다. 즉 남만 십 수만의 마적을 지휘하는 최고의 지도자 갈월담노사의 모습이다. 천산의 무량관에는 대가람의 본전 외에 사원 후방의 산과 구릉의 구석구석에 도사들의 승당과 숙방(宿坊)이 있다. 이것을 閣 또는 洞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곳에 상주하는 도사는 30여명이며 참선을 하기도 하고 무술의 수업을 하기도 한다. 무술은 太極拳法을 주로 하여 「오금희(五禽戱」라고 하는 새, 원숭이, 토끼, 고양이, 이리 등 짐승의 동작을 모방하여 몸놀림을 단련하며 말을 타고 몸을 가누는 법을 습득한다. 그리고 무술의 기예로서는 刀劍, 손칼, 투창 등의 연마도 하고 물론 장총, 권총도 연습한다. 그러한 수련은 정신수양이 목적이며 사상교육을 무술을 통하여 행하는 것이 목적이다. 그 중에는 결혼전의 15,16세의 양가의 자녀들도 호신술을 배우기 위하여 이곳 도장에서 일정기간 수련을 받기도 한다. 보위단과 의용단에도 능숙하게 무기를 다루는 여자가 참여하고 있는 것은 이런 도장에서 무예를 배운 여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현재 중국의 인민공사에 속해 있는 민병대 조직의 원형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 보위단이라면, 이 「무량관」은 민병의 군사교련을 행하는 장소이며 총사령부라고 말해도 무방하다. 나는 여기에서 중국 민병조직의 원형을 보는 느낌이다. 도교의 경전 대신에 모택동 사상이 현재 도교경전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잘못된 해석은 아닐 듯 싶다.
5. 女馬賊 서춘포(徐春圃) 반만동북항일 의용군을 총지휘했던 것은 총람파 상욱동, 소백룡의 부총람파 고문빈이다. 고문빈은 봉천(瀋陽)의 서북방 開原의 서쪽에 있는 법고문(法庫門)의 명문의 자제이며 保定군관학교 출신, 성명은 고음주(高陰周)라 하고 문무(文斌)는 字다. 그 고문빈의 휘하에 약 1500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있는 묘령의 여마적인 서춘포라는 여걸이 있었다. 그녀는 무예에도 마술에도 발군의 기량을 갖고 있었다. 적은 총탄이 날아오는 속을 그녀는 말 옆구리에 붙어서 총알을 피하며 질주하는 말타기 명수였다. 여자의 부친, 서석구(徐錫九)는 그녀가 소녀시절에 내몽고에 가까운 합랍심둔(哈拉心屯)의 토비 왕아동(王亞東)에게 인질로 납치되어 감금된 일이 있었다. 그녀는 부친을 구출하기 위하여 오빠 서패진(徐佩珍)이라는 소년과 둘이 상욱동의 도움을 받아 높은 저택 토담을 뛰어넘어 호족 왕아동을 납치하여 인질로 잡아 부친 석구와 교환하여 구출했다는 억센 소녀였다. 그때 서춘포의 나이는 겨우 15,6세였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상욱동과 서씨 남매의 일족은 고문빈과 알게 되고, 고문빈의 천거로 후일 군벌 장종창(張宗昌)의 부하가 되었다. 그리하여 장작림 휘하의 제일선에 서서 1924년 제2 봉직전(奉直戰)에 참전하여 오패부(吳佩孚)의 군대를 격파했다. 장종창은 산동 액현(掖縣) 출신이며 하얼빈의 충중사(沖仲仕)의 홍방(紅幇)조직에 속했던 비적 출신의 장군이었다. 장종창은 국민당이 北伐에 나설 당시에 동북군의 총지휘를 맡고 제일선에 서서 산동까지 출전했으나 북경에 있던 장작림이 북벌군에 패하여 東三省으로 후퇴했을 때 후방에 남아 북벌군의 추격을 받고 풍옥상(馮玉祥)의 부하 한복거(韓復渠)군대에 피살되었다. 일본군이 만주사변을 일으켰던 소화 6년에는 앞에서도 말한 대로 상욱동은 봉청성 습격미수사건으로 퇴거명령을 받고 일본에 망명하고 있었으므로 대신 고문빈이 지휘를 맡아서 동북항일 의용군을 조직하여 일본군에 대항했다. 이 전투 중에 여마적 서춘포의 오빠 서패진이 전사하고 여동생 서춘포가 1500기의 의용군을 지휘, 일본군과 교전하여 용맹을 전 만주에 떨쳤다. 여마적 서춘포는 상욱동의 건아자(乾兒子, 수양 딸)가 되어 있었으므로 상욱동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일본군의 마적소탕전에서 몸을 피하여 화북으로 이동했다가 나중에 八路軍에 참가했다. 이달순지조는 黑龍會의 內田良平 등과 마찬가지로 일본 군국주의의 중국침략의 첨병 역할을 했을 뿐이고, 시베리아 「오기꾸」 역시 그저 무용담만 무성해서 날조된 부분이 많아 일본군의 조종을 받거나 이용당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렇지만, 서춘포는 매수와 협박과 추적에도 불구하고 결코 일본군의 앞잡이 노릇을 한 일은 없었다.
6. 홍창회(紅槍會)와 大刀會 동북항일 의용군과 함께 일본군에 저항하여 크게 분전한 비적 중에 하남의 홍창회와 산동의 대도회가 있다. 이 두 개의 비적조직은 권비의 난의 의화단에서 이탈된 비적들로서 그 원류는 백련교 계통에 속한다. 이들 역시 천신을 받들고 주문을 외우고 일신을 지켜준다고 믿는 부적을 삼키고 싸움터로 나가는 용감한 비적들이었다. 그들은 모두 산동성의 의화단의 잔당들이며 그들이 표면에 나서서 활약하기 시작했던 것은 민국 5(1919)년 하남성에서 발생한 홍창회가 발단이었다. 이윽고 그들은 산서, 직예, 산동에까지 반란 지역을 확대하고 같은 유파인 대도회, 소도회, 팔괘교 등과 함께 힘차게 세력을 확대했다. 민국 17(1929)년에는 만주 東邊道의 통화현, 관전현(寬甸縣) 지방까지 침투했다. 홍창회 활약이 중국의 신문에도 보도되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민국 14(1926)년 무렵부터였다. 그 당시 섬서에서 하남으로 침입해 왔던 군벌 악유준(岳維峻)의 폭정에 반항하여 홍창회는 지방의 민중과 함께 궐기했다. 그때 제2 봉기 작전에서 장작림에게 패했던 오패부는 하남성에서 「拳直連盟의 계획」을 세우고 「3년 간 모든 세금을 면제한다」는 조건으로 수 십 만의 홍창회원을 규합하여 악유준의 군대를 격퇴시켰다. 이때 홍창회는 적군이 퇴각하면서 백 량의 화차에 싣고 가던 대포, 소총 등을 노획했다. 그리하여 오패부는 홍창회 비적을 이용하여 한때 하남성의 실권을 장악했으나 권력을 손아귀에 넣자 홍창회를 탄압했다. 결국 홍창회는 군벌 오패부에게 이용당했을 뿐이었다. 대도회는 의화단 이래의 비적의 전통을 충실히 지키고 일종의 정신요법으로 질병을 치료한다고 자랑했다. 회원이 되어 이런 치료술을 습득하면 창과 총칼이라도 몸에 들어가지 않고 전쟁에 이기는 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확실하다고 선전하여 많은 회원을 획득했다. 산동의 대도회 본부에서 千長海 등 6명의 교사가 동북지방 통화현에서 대도회를 조직했던 것은 민국 16(1928)년 이었다. 순식간에 수 백 명의 회원을 규합하여 조직했다. 그들은 먼저 통화현 과송천(菓松川) 지방에서 촌락을 습격해 온 4, 50명의 토비들을 격퇴했다. 그리하여 두목인 동변부자(東邊好子, 별명)가 인솔한 비적 집단을 임강현(臨江縣) 토애(土崖)라는 곳에서 격퇴했다. 민국 17(1929)년 11월, 대도회의 영수 천장해는 회원 90명을 인솔하고 老德江이라는 자를 두목으로 받들고 있던 토비의 근거지 金川縣 한호두(恨虎頭) 지방을 습격하여 납치되었던 인질 5명을 구출하고 노덕강 이하 수명을 체포했다. 동시에 아편, 奉天票 3만원, 총기, 탄약 등을 노획했다. 이와 같이 만주에 세력을 침투시키고 있던 홍창회와 대도회는 그 뒤 만주사변이 폭발하여 일본군의 비적토벌이 시작되자 동북항일 의용군과 함께 항일투쟁의 선두에 나섰다. 노일전쟁이 한창일 때는 만주 마적의 일부는 러시아의 남하를 방어하기 위하여 일본군에 협력했고, 후방교란과 정보활동에 힘썼다. 그러나 일본이 전후에 만주 鐵道를 거점으로 그 군국주의적 침략정책을 전개함에 따라 그들은 일본에서 이탈하고 민국 이후는 군벌에 이용당하기도 했다. 대다수의 그들 마적은 군벌의 착취에 반항했고 일본군과 과감히 맞서 싸웠다. 그러한 반항적 성격에도 불구하고 만주 마적은 비록 민중자체를 보위하기 위하여 반관비적이기는 했지만 보수적 입장으로 시종일관해 세력은 거국적이지 못했다. 그 점에 있어서 마적은 삼합회와 가로회 등의 남방 비적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데가 있었다. 다만 홍창회, 대도회를 포섭하여 일본의 침략과 싸웠던 민중의 무장조직 동북항일 의용군의 항전이야말로 만주마적이 마지막으로 장식한 마적의 꽃이었다.
중국 공산당과 비적 1. 공산당의 동맹군, 비적 1926년 國共合作 하에 광동에서 장개석이 총사령관이 되어 국민혁명군이 북벌을 개시하려 했을 때, 북경의 군벌 오패부가 봉천(심양)의 군벌 장작림을 격파했던 1922년의 제1奉直戰, 그리고 24년 장작림이 오패부를 격파했던 제2봉직전의 뒤를 이어 동북 삼성의 치안은 매우 문란했다. 두 번이나 치른 군벌전쟁으로 농민은 수탈을 당하여 토비가 되고 패잔병은 비적이 되어 농민을 약탈했다. 이 혼란의 틈을 타고 소위 官匪라고 불렸던 경찰, 보갑단, 군대마저 비적화하여 비적 이상으로 더 포악하게 노략질을 일삼았다. 특히 봉천성(遼寧省)의 동부 통화현 대라현(大羅園)과 육통청(六通淸) 지방에서 한층 더 혹심했다. 이러한 상황은 화북지방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장작림은 공산당을 탄압하여 이대교는 사형을 당했고 장개석의 4․12쿠데타에 반항했던 농민폭동과 비적의 창궐은 관비의 발호를 加一層 조장했다. 1927년 동북지방 봉천성 동쪽의 농민은 이러한 비적과 관비의 난폭한 노략질을 방지하고 마을을 지키는 치안 조직을 만들기 위하여 같은 비적인 대도회를 산동성의 본부에서 불렀다. 산동에서 동북으로 갔던 대도회는 천장해 외에 6명이었으나 짧은 기간 동안 수 백 명의 회원을 조직하여 치안유지에 나섰다. 그처럼 극심하게 굴었던 관비도 대도회를 당하지 못했다. 홍창회에 대해서는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두 번에 걸친 봉직전의 뒤를 이어 화북에서도 民匪 官匪가 멋대로 날뛰고 있었기 때문에 같은 비적 집단인 홍창회가 치안유지를 담당했다. 그들은 천신을 모시고 주문을 외우며 호신의 부적을 삼키고 싸움터로 나갔다. 그들은 토비, 관비, 兵匪, 관료군벌과도 싸워서 그 세력은 하남, 산서, 직예, 산동 그리고 멀리 동북지방에 까지 침투해 나갔다. 이와 같이 홍창회의 이름이 1926년경부터 유명해진 것은 풍옥상(馮玉祥)의 국민 제2군 악유준을 격파하여 화차 백 량의 대포, 소총, 탄약 등을 노획했을 무렵부터다. 이 홍창회 비적 문제는 필경 중국 공산당의 농민운동의 대상으로 문제가 되었다. 이 무렵 비적문제에 대하여 중국 공산당에서는 이대교와 그 견해가 다른 진독수(陳獨秀), 구추백(瞿秋白)과의 사이에 이론이 양분되어 있었다. 즉 홍창회를 무산 계급혁명의 동맹군으로서의 농민투쟁의 일부로 볼 수 있을까? 아니면 그것은 반동적인 성격의 것으로 혁명에는 도리어 유해한 존재로 볼 것인가? 하는 두 의견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전자는 이대교이며, 후자는 진독수와 구축백이었다. 삼합회는 태평천국 난에는 태평군에 협력하여 민족해방의 투쟁에 참여했고 손문의 신해혁명에서는 삼합회도 가로회도 선구적 역할을 수행했다. 대도회도 총창회도 본시는 가로회와 마찬가지로 백련교도의 전통을 계승했던 것이다. 홍창회의 투쟁은 언제든지 반 권력투쟁이었으나 민중에 대해서는 항상 보위군으로서 농민을 보호한다. 그들은 무력으로 반란을 하지만 그것은 언제든지 제국주의와 군벌과 관료에 대해서만 일으킨 반란이다. 그들에게는 도의가 있고 인간이 지니고 있는 선천적인 도덕적 감정이 있다. 그것을 그들은 仁俠의 정신이라고 말한다. 그들이 그러한 정신을 소유하고 있었으므로 잔인무도한 군벌과 관헌에 반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의 몸속에 내포되어 있는 선천적인 도의감, 이것이야말로 그들 자신을 구원하는 것이다.’라고 이대교는 주장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는 이렇게도 말한다. 그들 자신의 체내에 지니고 있는 도의적 정신에 입각한 「선천적, 자각적 능동성」, 그것이 바로 무산계급의 동맹군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라는 것이다. 이대교는 그들의 「자각적 능동성」을 계발하여 계급투쟁의 동맹군이 되게 해야 하며, 그들 홍창회에 근대적 무기를 주어 무장시키고 민족해방투쟁의 동맹군으로서 그들과 손을 잡을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이의 계급투쟁에 대한 사고방식은 경제학적 유물론의 입장에서가 아니고 오로지 형이상학적 도덕심의 발동으로 파악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와 같은 이대교의 주장에 대하여 원래 농민운동에 대하여 비판적이었던 진독수 등 당의 중앙간부들은 코민테른의 방침에 따라 홍창회 등 전통적인 농민비밀결사의 활동을 특히 불신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홍창회 운동의 느슨한 조직과 미신중독을 관찰한다면 이 운동이 전투의 시련을 감당해 낼 것으로는 생각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이 운동은 파괴적인 경향이 너무 많다. 건설적인 경향을 결여하고 있다.........홍창회의 지도권은 쉽게 토호의 손에 들어가서 홍창회는 그들의 도구로 변해 버린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지게 되면 토비적 특성을 지닌 홍창회는 토호의 기초적인 대량 전투력이 되는 일이 많다.」 그리하여 진독수 등은 비판적 태도를 취했다. 그러나 비적의 농민운동을 한정된 목적을 위하여 일시적으로 이용하는데는 찬성하고 그것이 국민혁명의 중요한 반군벌 세력임을 마지못해 인정하면서 결론에 가서는 홍창회를 농민운동의 자산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장애물이라는 인상을 남기도록 명백히 계산되어 있었다. 그리고 당원에게는 홍창회가 「기본적으로는 반동적 성격」임을 경고하고 또 「홍창회가 실력으로 지방의 정치권력을 장악하는 것을 절대로 허용하지 않는다」고 하여 홍창회와 적극적으로 연합하려고 하지 않았다.
2. 제1인터내셔널과 천지회 중국 공산당의 창시자 이대교가 중국의 공산주의 운동의 협동자로서 비적집단 홍창회의 반권력적 민족주의를 높이 평가한 것은 그의 사상에 중국민족 전체가 국제적으로는 빈한한 반식민지 민족이며 선진자본주의 국가의 무산계급과 연합할 수 있는 점에서 무산계급의 진영에 속하는 민족이라는 견해가 있는 반면에, 중국 국내에는 아직 근대적인 자본가계급도 없고 근대적인 무산계급도 존재하지 않으므로 토착자본의 힘은 약하고 노동자의 수도 전체적으로 보아서 적고 노동자와 자본가간의 계급투쟁이 일어나게 되지도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강제적으로 선동해도 패배할 가능성이 강하다. 오히려 계급적 모순은 국내에서는 7활을 점하는 농촌에서의 농민과 지주 및 군벌과의 투쟁이며 국제적으로는 제국주의와 그 앞잡이인 매판자본, 제국주의의 앞잡이가 되어 서로 항쟁하고 있는 군벌에 대한 농민의 투쟁이 바로 중요하다고 생각하며, 그 기본적인 모순은 영국 제국주의의 중국침략에 대한 중국민족 전체의 반제국주의 투쟁에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7활을 점하는 농민 중에서 가장 첨예한 분자가 비적이라고 생각했다. 공산주의자는 먼저 농촌에 들어가서 반권력 사상을 계급적으로 자각시킴으로써 그들을 공산주의운동의 협동자가 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청말 사상가인 新公洋學派의 장학성(章學誠 1738~1801)의 「聖人에게 배우다, 이는 賢人이니라. 賢人에게 배우다, 이는 君子이니라. 民衆에게 배우다, 이는 聖人이도다.」라고 말한 民衆이야말로 道이며 대중이 바로 聖人이 배워야 할 대상이라는 사상을 이대교가 얼마만큼 받아들였는지 잘 알 수 없지만, 그는 대중 속에 道가 있고 인간 속에 있는 선천적 도의성에 대하여 그가 죽는 최후 순간까지 일관하게 지니고 있던 신조였던 것 같다. 그는 비적의 혁명성과 그 근원인 인간의 선천적 도덕성을 마지막 순간까지 믿었던 인물이다. 특히 이대교가 중국혁명의 전통 속에서 세계사회주의혁명과 본질적인 일체성을 찾으면서 중국의 비밀결사를 높이 평가했던 것은 손문혁명에 협력했던 삼합회의 전신인 전통적 비밀결사 「천지회」가 일찍이 마르크스의 제1인터내셔널 중국지부가 된 일이 있음을 실제로 이대교가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천지회가 제1인터내셔널과 관계를 맺었다는 사실은 태평천국 난이 민족혁명이었음을 증명하고 있으며 또 중국 혁명이 처음부터 국제주의와 제휴하려는 요구와 경향을 가지고 있었음을 증명한다.” 사실, 그는 1926년 그가 처형되기 전해의 논문에서 마르크스 제1인터내셔널의 중국지부가 비적인 천지회 안에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이 사실은 이대교의 마르크스주의를 수용하는 방법이 중국의 전통과 토양 속에서 어떻게 수행되어야 하는가 하는 중대한 시사를 보여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자료다. 이대교와 모택동과의 접촉은 李가 북경대학의 도서관장이고 毛가 그 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던 1981년의 가을에서 1919년의 1월경까지의 수개월간에 불과했다. 그 후 모가 장사로 돌아간 뒤로 두 번쯤 북경에 들렀다가 이대교를 만났었다. 그간 모택동이 얼마나 이대교의 영향을 받았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오늘에 와서 모택동의 그 후의 사상과 행동을 살펴보면 모택동이 바로 이대교의 사상을 이어받은 正統的 계승자가 아닐까 생각된다. 모택동과 주덕(朱德)의 정강산(井崗山) 시대 때 국민당은 모와 주를 「朱毛匪」라고 불렀다. 말하자면 모와 주는 국민당의 비적 소탕 공작의 대상이 되는데 결코 이유가 없었던 것도 아니다. 손문마저 일찍이 북양군벌로부터 孫匪라고 불려지며 토벌의 대상이었던 것을 상기하면 장개석도 북양군벌 쪽에서 보면 비적이었다.
3. 모택동과 비적 모택동은 1927년 중공의 「8․7긴급회의」 결정에 따라서 호남성 위원으로서 추수봉기를 일으키고 장사 진격에 실패하자 정강산에서 농성하게 되었으며 모택동이 정강산이 험준한 요지임을 어떻게 알고 그곳으로 들어갔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 모택동이 무한의 8.7회의 후에 호남성 동변의 安源, 平江, 醴陽, 禮陵 일대의 농민자위군을 조직하고 이것을 4부대로 편성하여 추수봉기를 계획하고 있을 무렵, 무한에서 호남성을 지나 산을 넘어 강서성의 강고(鋼鼓)로 가는 도중, 호남성 유양에서 지주의 용병에 잡힐 뻔했으나 농민에게 구출되었다. 그는 농민의 안내로 강서성과의 경계지대까지 도착했다. 모택동은 그때 자기를 구출해 준 농민의 이름을 누가 물어도 가르쳐주지 않았다고 하는데, 그 농민이 바로 동향인 상담현(湘潭縣) 상칠도(上七都) 청계향(淸溪鄕) 소산충(韶山冲)에 있는 상남안(上南岸)의 죽마고우인 김역막(金亦漠)이라는 빈농출신의 비적이 아니었던가 추측하고 있다. 모택동은 이곳에서 김역막의 소개로 강서의 비적 두목인 원자재와 술잔을 나누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앞에서도 언급한대로 비적을 한정된 범위 내에서 이용하는 것은 당 중앙에서도 결정하고 있다. 모택동이 추수봉기 때 장사 진격에 실패하여 퇴각하는 도중, 중요도시 점령에 중점을 두는 코민테른 방식에 의한 혁명방법을 포기하고 농민군을 편성하여 잠시 산 속 요새에 근거지를 구할 결심을 하게 된 것도 강서 비적 원자재의 조언에 의한 것이 아닐까. 원은 이곳 성 경계지역에 세력을 펴고 있어서 이 지방의 지리에도 밝았다. 모택동은 원자재의 안내로 정강산에 근거지를 만들기 위하여 흩어졌던 부대를 재편성했다. 새로 입당하는 자에 대하여 비적의 입회식 방식에 따랐다. 밤중 사람이 없는 사당에서 “개인을 희생하고 계급투쟁을 하며, 조직에 복종하고 비밀을 엄수하여 영원히 배신하지 않는다.” 라고 선서하게 한 것도 비적과 모택동과의 관계의 일단을 말하는 대목이다. 모택동이 비적의 인협정신이란 반체제적 도덕을 말함이며 이것을 교육함으로써 위대한 혁명의 협동자가 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역시 이대교의 영향을 받은 결과로 보아진다. 실은 이러한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이대교적 발상의 바탕은 이미 모택동이 장사시대의 은사 양창제(楊昌濟)로부터 받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제 1사범의 교사에는 양창제(장사인)와 서특립(徐特立, 1867년 장사부근에서 출생함)이 있어서 학생의 신망을 모으고 있었다. 양창제는 중국 송대의 철학인 理學(陸象山 및 朱子의 窮理의 철학)의 전통을 이어받은 사람으로 王船山(이름은 夫之, 호남 사람, 淸軍에 저항하여 실패한 후 저술에 몰두했다. 1619~1692)과 담사동(譚嗣同, 淸末 戊戌變法 때에 新政을 주장하고 쿠데타를 계획하여 처형당함 1865~1898)에도 심취하고 칸트, 스펜서, 루소 등에 관해서도 잘 알고 있었으며 실천을 중요시하는 독자적 윤리관을 가지고 있었다. 학교에서는 철학윤리를 담당했으나 텍스트는 ꡔ논어ꡕ를 발췌한 것으로 논어의 본문을 해설하면서 자기의 세계관, 인생관을 서술하는 형식을 취했다. 제1편을 ꡔ의지ꡕ라는 제목으로 「三軍(다수의 군대)의 師(총대장)를 사로잡을 수는 있으나 匹夫의 뜻(志)을 뺏을 수는 없다.」고 한 공자의 말에 대하여 자기 견해를 다음과 같이 전개한다. 「의지가 강한 자는 멋대로 발동하는 정욕을 억제할 수 있으며 사회적으로는 권세의 압박에 대하여 저항할 수 있다. 도덕이란 극기의 연속, 인생이란 부단한 경쟁이다. 빼앗을 수 없는 뜻을 지니고 있는 한 완성 못할 리 없다. 근세 교육학자의 설에 의하면 사회에 속하는 사람은 사회의 이익을 위하여 나서야 한다. 자기 자신의 이익과 사회의 이익이 충돌했을 경우에는 후자를 위하여 전자를 희생시켜야 한다. 허나, 자신의 이익은 희생시킬지언정 自己主義를 희생시킬 수는 없다. 자기주의를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 이것이 匹夫의 뜻(志)을 빼앗을 수 없다는 뜻이다.」
양창제의 철학은 관념론적이긴 하지만 그의 문제의식은 유물론이나 관념론이냐? 하는 이자택일에 있지 않고 외계에 대한 주체의 우위를 인정하고 우위에 설 수 있는 주체확립, 그리고 주체의 확립을 위한 노력을 요구하는 윤리와 가치관을 강하게 내세웠음에 불과하다. 이대교가 비적의식에서 찾으려 했던 선천적 도덕도 소박한 유물론자로부터는 비판을 받을 것이다. 이대교가 추상적인 마르크스주의의 유물사관에 냉담하면 도 계급투쟁이라는 인간정신의 主意的 발동에 깊이 공감을 느꼈던 것은 그도 역시 양창제와 같은 철학적 기반 위에 서 있었는지 모른다. 모택동이 이 두 사람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었다면 그가 중국혁명의 주체적 동력을 농민의 에너지에서 찾아서 마르크스주의를 수용하여 이것을 실현 시켰던 근거를 이해하게 된다. 문화대혁명이란 것도 이러한 사상적 계보와 별개의 것은 아니다.
4. 상호 교육받은 모택동과 비적 비적과 모택동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추수봉기에서 패퇴한 뒤, 군을 재건했을 때 비적의 두목 원자재와의 관계에서 원자재의 부하를 비롯하여 많은 비적들이 입당하여 군 재건에 협력했던 모양이다. 원자재는 같은 비적인 왕좌(王佐)와 함께 자기들의 근거지였던 정강산으로 모택동이 거느린 공산군을 맞아들이고는 호남비적 周文과 陳光保 등의 부하를 모아서 공산군을 편성했다. 그 후 南昌봉기에서 패한 진의(陳毅)의 2천과 주덕(朱德)이 거느리는 호남농민 8천 명의 군대가 합류하게 되어 험준한 정강산의 공산당은 주덕이 군장, 모택동이 당 대표가 되어 3개 사단의 군을 편성했다. 그래서 겨우 군대표로서의 면목을 갖추게 되었다. 그때까지 모택동은 비적과 무직인 낭인집단을 교육시켜서 紅軍의 재건을 서둘렀다. 중국 공산당 정부를 수립한 강서 남부의 서금(瑞金)이라는 첩첩 산악지대도 그들 비적의 협력 없이는 얻을 수 없었던 것이다. 정강산 시대의 공산당 구성분자에 대하여 ꡔ중국혁명사상ꡕ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중국에 존재했던 것은 러시아에서와 같은 직업적, 혁명적 집단의 전통이 아니고 비밀결사의 전통이었다. 그것은 잠재적으로 현실적으로 항상 무장권력의 확립을 지향하면서 역사 속에 그 발자취를 남기고 있다. 그래서 모택동의 정강산의 투쟁은 그가 획득했던 마르크스. 레닌주의 이론에 입각한 운동을 중국 토착적 혁명운동의 형태와 결합시킴으로써 그의 행동을 전개시켰던 것이다. 물론 이런 경우 비적의 비밀결사운동이 역사적으로는 그 자체의 능력만으로는 사회변혁으로 전진할 수 있는 방향을 결정적으로 찾아내지 못했으며 오히려 반대로 비밀결사운동은 항상 서민 속에 도사리고 있는 ꡔ匪ꡕ 또는 ꡔ賊ꡕ으로 전화했다는 사실은 거듭 지적되어야 한다. 따라서 그런 의미에서 중국비적의 전통적 형태가 그대로 20세기 중국혁명으로 직결될 수 없음은 새삼 말할 필요도 없다. 거기에는 결정적인 단절이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모택동이 그의 독자적인 투쟁을 국민당의 반란부대, 농민자위대, 광부 등을 이끌고 원자재, 왕좌라는 비적이 웅거하는 정강산에서 우선은 그들과 함께 혁명운동을 시작했다는 사실, 그리고 또 국민당이 일관하여 「紅匪」 또는 「共匪」라는 딱지를 붙여서 모택동 혁명군 토벌에 전력을 경주했다는 사실을 나는 실로 상징적인 사태라고 생각한다.」 정강산 시대의 공산군이 이러한 비적과 유민과 노동자의 혼성집단이었다는 것은 그 후 3년이 지나서 서금시대에까지 갖가지 폐단을 조성하기도 했지만 「성인은 대중에게 배운다」고 한 신공양학파의 장학성과 이대교의 사상적 전통을 이어받은 모택동은 이러한 잡다한 대중을 교육시킴으로써 그들을 공산주의자로 육성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黨의 정풍운동을 일으켜야 했다. 모택동은 그래서 서금시대의 1930년에 「興國조사」를 시행하고 조사보고를 했는데, 그 보고 가운데 당시의 區정부위원의 구성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이상 18명 中에 도박꾼이 6명, 재봉사와 도박꾼 노릇을 겸하고 있는 자가 1명, 재봉사 일만 하고 있는 사람이 1명, 의사 1명, 도사가 1명, 파산한 대지주가 1명, 부농2명, 중농1명, 내력을 알 수 없는 인텔리가 3명, 근본을 알 수 없는 여자노동자가 1명이다.」 실로 정강산 시대에서 3년이 지난 그 당시에 이미 이런 조사보고가 시행되었다는 사실은 그 당시의 당의 실체를 충분히 추측할 수 있다. 물론 그 중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구성분자는 비적이었을 것이다. 「정풍(整風)운동의 과정에 있어서는 사상적으로, 정치적으로 반성과 동시에 조직상의 반성이 중시되었다고 한다. 예를 들면 이전에 다른 정당 또는 단체에 관계했던 일이 있는가 없는가 하는 따위들이다. 잘 알려지고 있는 바와 같이 그때 중국에는 국민당 이외에 삼민주의 청년단, 청년당 등이 있었고 그밖에 또 홍창회, 가로회, 청방, 홍방 등의 비밀결사가 많이 있었다. 그리고 전에 이러한 단체에 관계하고 있었던 자는 당내에 적지 않았다. 그간의 사정은 무장투쟁을 통해서 당세의 확대라는 상황, 더구나 손문의 혁명운동 초기에 있어서 비밀결사, 소위 회당(비적의 집단)에 의거하여 혁명을 일으키려고 했던 상황 등을 상기해 보면 아마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상에서 보는 바와 같이 모택동은 코민테른의 혁명방침과는 결별하고 농민투쟁에 중점을 두었다. 농민을 중심으로 모든 계층의 반체제 분자를 규합하여 이것을 민족주의와 공산주의와의 鐵의 혁명집단으로 구축했다. 그 속에는 비적출신이 대부분을 점하고 있으며 그 비적에게서 모택동 자신도 많은 것, 예를 들면 게릴라 전법, 지형을 이용할 때의 전법, 당원과 공산군과의 관계에 있어서의 편성방법 등을 배웠을 것이다. 그는 대중에서 배웠을 뿐만 아니라 또한 대중 속에 있는 혁명의 정신적 요소, 이대교의 말을 빌면 「先天的 道義感」이란 것을 추출하기 위하여 대중을 교육시켰던 것이다.
5. 江西 비적의 입산식 모택동이 우연한 기회에 참석했다고 전해지고 있는 원자재의 江西匪의 입회식(강서 비적은 이것을 입산식이라고 한다)의 정경을 소개하겠다. 강서비의 입회식은 앞에서 서술했던 청방의 그것에 비하면 비교적 간단한 것 같다. 「해가 저물고 가랑비가 멎었으나 짙은 비구름이 무겁게 흐린 하늘은 칠흑같이 어두운 밤을 몰아왔다. 낙타산(駱駝山) 기슭에 있는 용왕묘(龍王廟)의 산문은 굳게 닫혔다. 입산식은 비적집단에 들어가는 세례와 같은 것으로 방비(幇匪)의 소개로 신원이 확실한 자만이 허용되었다. 까닭은 관헌의 끄나풀이 잠입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이다. 묘내(廟內)에는 마당에까지 가득 찬 사람 그림자, 정숙하게 거행될 입산식을 기다리고 있다. 본당의 정면에는 그들이 선조로 받드는 홍균노조(鴻鈞老祖)의 상을 걸고 전면의 네모진 탁자의 바른쪽에 큰칼 한 자루, 왼쪽에 권총 한 자루를 놓고, 가운데는 향로가 있고 거기에서는 가느다란 향연이 무럭무럭 피어오른다. 촛대에는 붉은 촛불이 주의를 밝게 비추고 있으며 그 외에 香 한 묶음이 놓여 있다. 전면 좌우에 全山을 지배하고 있는 山主의 소두목들이 줄을 지어 정좌를 하고 줄지어 있다. 외팔당대야(外八堂大爺)라는 외무를 맡아 관리하는 비적이 신입지원자를 불러들여서 祖師의 像에 삼궤구배(三跪九拜)의 예를 올리게 한다. 다음에 일동을 자리에 앉게 하고 비적 동지의 약속인 방규(幇規)를 엄숙하게 낭독하여 서약시킨다. “비밀을 누설한다. 명령에 반항하여 불복한다. 싸움에 임하여 도주한다. 간음하고 부녀자를 범한다. 관헌의 앞잡이 노릇을 한다. 공용물품을 사적으로 이용한다. 동지를 속이고 모멸한다. 동지의 부녀자를 희롱한다.” 이상 여덟 과오 중에서 어느 것을 범해도 목을 벤다. 이밖에 八切이라는 보상의 항목도 들었다. “의무에 충실한 관병을 격퇴하고 출전을 많이 한 자, 소임을 확장하여 적의 동태를 정탐하고 동심협력하여 용맹한 자, 사람을 다수 거느리는 자, 특히 사력을 다하여 체포를 거부하고 私鹽(소금밀매업)의 이익을 많이 탈취한 자, 민가를 위협함이 많고 사람을 살해하여 피를 보아도 두려워하지 않는 자로, 그 중에서도 幇을 위하여 부상하거나 죽음을 당하고 다른 동지를 대신하여 투옥된 자의 유족은 老公의 위치를 주고, 종신 은급을 준다.” 등등이다. 신입비적은 老九라 부르고 군대의 신병은 별 하나의 2등 병이다. 여기에서 본인의 공적에 따라 승급하게 되는데 은급생활에 들어가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노구는 맨 아래 계급이며 강도살인, 사염판매는 노팔(老八), 인질을 미끼로 금품 강요, 도박개장의 役에서 탐정노릇은 노칠(老七), 다음에 보초나 통신역활을 맡아 승급하면 노육이다. 老六은 수가 많지만 老五라는 직위는 비적단체 한 개에 한 사람 밖에 두지 않기로 정하고 있다. 이 자리가 공석이 되지 않는 한 보통 비적은 노육에서 승진이 중단되며 만년 노육도 적지 않다. 이에 불만을 품고 탈출하면 서약한대로 죽음을 각오해야 한다. 노육의 말로는 자연사하거나 아니면 유족에게 은급이 간다 하더라도 본인의 자유는(제재를 받기 때문에) 소멸해 버리고 마는 경우가 많다. 다만 정부의 상당한 군관이 비적으로 입회하면 예외적인 지위를 주는 일이 많은 것은 그것을 크게 고무시키고 환영해야 할 입장이기 때문이다. 老五는 비적이 은거한 하나의 山의 사법권을 장악하고 있는 중요한 위치이며 비적의 시비와 상벌을 가려서 정하는 역이다. 김역막은 이 직위에 있었다. 그가 결정한 사항에는 두목 원자재도 왈가왈부할 수 없게 되어 있다. 김역막은 산주들인 소두목들 옆에 자리 잡고 그 옆에 빈객으로 모택동을 앉혔다. 더욱 기이한 일은 지방의 보안대장 광백기(光伯奇)가 동석하고 앉아 있는 모습이다. 신입 비적의 입산식에 비적을 소탕해야 할 보안대장이 빈객으로 초대를 받고 참석하고 있는 것은 도적의 회합에 경찰서장이 초대되어 있는 꼴과 같지만, 당시 보안대장 자리에 있는 광백기는 이 지방을 세력권으로 노략질하고 다니던 비적의 두목이었다. 이연새(李連塞)의 상무총회는 광백기 일당의 발호에 애를 먹고 궁여지책으로 상관의 양해 하에 光을 보안대장으로 천거했던 것이다. 물론 광의 부하 비적들도 두목을 따라 모두 대원으로 탈바꿈했다. 그래서 어제까지 노략질 해 왔던 주민이 치안유지를 맡아보게 된 것이다. 쥐새끼가 고양이 노릇을 하게 되었지만 서(鼠)서방의 본바탕이 없어질 리는 없다. 다만 이연새가 사는 마을은 그가 대장이 된 뒤로는 한번도 비적의 폐해를 입은 적은 없다. 옛날의 동지라기보다 서로 통하는 情理에서 입산식에 초대되었다 하여 이상할 것도 없다. 외팔당대야는 원형을 지어 둘러앉은 새로 입산한 자들에게 비적으로서의 주의사항을 다시 훈시하고 오른쪽에 있는 탁상의 큰칼을 들며 왼손에 한 묶음의 향을 움켜쥐고 “너희들 만약 산주의 명령을 거역하고 幇規를 문란케 한다면 이런 꼴이 된다. 에잇!” 하고 큰소리를 지르며 큰칼로 길쭉한 향의 묶음을 내려 쳤다. 그것이 단두향(斷頭香)의 의식이라 하여 새로 입산한 자들은 절단된 선향을 한 개씩 주어서 소중하게 보관해 둔다. 이어서 고참 비적과의 첫인사, 신입산자(新入山者) 끼리의 첫 대면 등으로 상세한 형식적 방규(幇規)의 설명이 끝났다. 다음은 축하잔치다. 여러 개의 촛대에 불을 밝히고 탁자와 의자를 내오고, 술과 요리가 준비된다. 자원해 비녀(匪女)가 되었거나 미색이 특출 나 보쌈 해 온 여자도 자리에 내놓는다.」 이상은 ꡔ인간 모택동ꡕ에 기록된 강서비적의 입산식 광경이다. 확실한 자료에서 얻은 기록인지 분명하지는 않지만 강서비적 원자재의 비적단 입회식이 어떤 것인지 대강 짐작할 수 있다. 어쨌든 1926, 7년 전후의 시점에서 중국의 강서성 산촌에는 아직 이러한 전근대적 사교적 사회가 잔존하고 있었다는 중국의 현실을 읽을 수 있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한 계급혁명을 어떻게 실천으로 옮길 것인가 하는 공산주의적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현실적으로 중국혁명에 관해서 이대교와 모택동과 같은 생각에 매달리게 될지 모른다. 이런 점에서 중국 혁명의 주역은 비적집단의 핵심이었던 농민이 그 주체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하여도 결코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6. 비적의 戰法 비적의 전략전술은 역시 중국고전의 병법에서 받아들인 전법을 많이 사용한 것 같다. 대게 한민족 그 자체가 항상 피동적 입장에서 전쟁의 역사를 이어왔던 관계로 권력 측의 토벌군 공격에 대하여 비적이 싸울 때는 한민족 특유의 전법을 취하게 되는 것이 당연했다. 토벌하는 관군으로서는 공격태세를 취해야 했고 그래서 중국고대의 병법은 도리어 토벌하는 측이 써먹기 어려웠던 모양이다. 이와는 반대로 비적으로서는 고전적 전법 그대로 응용하여 싸울 수 있는 입장에서 항상 유리했다. 중국의 민란이 오래 계속된 것도 이런 관군의 약점과 비적 측의 강점과의 상이점이 빚은 중국적 상황에 그 이유가 있는 것 같다. 먼저 한민족의 옛날부터의 전쟁하는 방식을 대별하여 그 특색을 들어보자. 1. 수세에 능하고 공세에 약하다. 2. 지구전에 능하고 속전에 서툴다. 3. 계책에 능하고 전면전에 무능하다. 4. 강점에 피하고 약점의 공격에 편중한다. 5. 하천전투에 능하다. 6. 심리조종이 교묘하다. 7. 선전을 잘한다. 8. 주민의 자위력을 이용한다. 9. 미신을 이용한다. 이상 아홉 가지 전쟁의 방식은 5천년에 걸쳐 당해 왔던 외부침략에서 한민족이 스스로의 체험을 통하여 습득한 방식이라고 생각된다. 고전적인 손자, 오자, 육도(六韜), 三略, 위료자(尉繚子), 이위공문대(李衛公問對), 司馬法 등 무경칠서(武經七書)에서 모택동의 지구전론에 이르기까지 중국 병법의 요점은 모두 이상의 아홉 가지로 요약된다. 다만 비적의 경우 그 전투규모에 따라서 아홉 가지 중에서 어느 것에 중점을 두고 싸우느냐 하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제1의 ‘수세에 능하고 공격에 약하다’는 것과 제2의 ‘지구에 능하고 속전에 서툴다’는 예를 들면 먼저 생각나는 것으로, 정강산과 서금시대에 모택동이 취했던 전략전술이다. 모택동이 소년시절부터 ꡔ수호전ꡕ을 읽었고, ꡔ삼국지연의ꡕ를 애독했다는 일은 주지하는 바지만, 그는 손자병법도 함께 숙독했을 것이라 추측된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모택동은 정강산에서 손자에 열중했다고 한다. 예를 들면 ꡔ수호전ꡕ의 守將 송강은 양산박을 끝까지 지켰다. 또 ꡔ삼국지연의ꡕ에 나오는 유비 현덕도 어느 쪽인가 하면 조조 같은 공격형과는 달라서 수세를 견지하다가 공세로 전환하는 전법에 능숙했던 모양이다. 중국의 병법은 춘추전국에서 완성을 보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손자가 吳王 합려(闔廬)를 알현하고 병법 13편을 올렸다. 또 吳子가 吳子六篇을 편찬했을 무렵에는 兵學은 이론상으로도 또 실 용면에서도 완전한 것이 되었다. 무경칠서라는 것도 「이위공문대」를 제외하면 아무튼 춘추전국 이전의 저술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즉 孫吳의 병법은 물론이고 司馬法은 周의 병법, 위요자(尉繚子)는 전국말기의 저작이며, 육도(六韜)는 태공망 여상(呂尙)의 유법(遺法), 삼략은 황석공(黃石公)의 비법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공자는 원래 怪, 力, 亂, 神을 말하지 않는다 하여 전쟁에 대해서는 별로 언급한 일이 없지만 병서로서 가장 심오한 이치를 설파한 병서는 공자의 ꡔ춘추ꡕ라고 말해지고 있다. 제1의 「수세에 능하고 공격에 약하다」는 조항에 대하여 예를 든다면 모택동이 웅거했던 정강산의 지형은 가장 수비하기에 절호한 장소이다. 비적의 두목 원자재가 이곳을 본거지로 진지를 구축하고 있었던 것은 전국시대의 이목(李牧)이 창시했다고 전하고 있는 ꡔ견벽청야법(堅壁淸野法ꡕ이라는 옛 전법에서 배운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원자재의 인물에 대해서는 중국공산당사에는 별로 기술된 것이 없고 몇 마디 나와 있을 뿐이지만 상당한 인물이었던 모양이다. 이목은 趙나라(지금의 산서성) 북변의 무술장수였으나 代(지명)의 안문(雁門)이라는 험준한 요새에 진을 치고 흉노의 침입을 방비하고 있었다. 그의 수비방법은 독특한 것으로 제 마음대로 관서를 두어 조세를 징수하여 모두 軍府에 납부케 하고 병졸의 비용에 사용했다. 매일 소를 여러 마리 잡아서 부하 장졸들에게 먹이고 사격연습에 전력을 다하는 한편, 봉화를 엄중히 하고 다 수의 첩자를 내보냈다. 규약을 만들어서 흉노가 침공해 와도 엄하게 진지를 지킬 뿐 함부로 적과 싸우는 자는 엄벌에 처했다. 그런데 흉노는 이것을 보고 이목을 겁쟁이인 줄 생각했을 뿐만 아니나 이목의 부하 군졸까지 자기들 장군은 겁이 많지 않는가 생각하게 되었다. 조나라 왕도 이목의 무능을 책했다. 이목은 그래도 자기 방식을 고치지 않았다. 드디어 조나라 왕은 분노하여 이목을 소환하여 다른 장수를 대신 파견했다. 그런데 새로 부임한 장수는 흉노가 침입할 때마다 나가 싸웠다. 전투는 항상 불리하여 일년 사이에 많은 진지를 잃었다. 때문에 백성들도 농사를 지을 수가 없게 되었고 다시 이목을 파견해 줄 것을 조왕에게 간청했다. 그래서 조왕은 이목을 다시 기용하려 했으나 이목은 문을 닫고 병을 빙자하여 나오지 않았으므로 조왕은 스스로 이목을 찾아가서 그전대로의 수비법을 취해도 좋다는 조건을 내세워 이목이 부임할 것을 승낙시켰다. 代로 돌아온 이목은 전과 다름없이 수세를 지키고 움직이지 않았다. 때문에 수년간 흉노는 손을 쓸 수 없었고, 결국 이목은 겁이 많아서 전의가 없는 것이라 생각했다. 수비병들도 이목이 자주 베푸는 음식만 얻어먹고 상여금 혜택을 곧잘 입으면서도 하는 일이 없어서 모두 한번 싸우기를 원하게 되었다. 그러자 이목은 전차 천3백 대, 기마 만 3천 필, 적으로부터 현상금이 걸려 있는 용사 5만 명, 활 잘 쏘는 자 10만 명을 선발하여 전투 훈련을 시켰다. 그리고 가축을 방목하고 백성을 들에 가득 차게 하여 적에게 좋은 먹이를 펼쳐 보였던 것이다. 처음 흉노가 조금 침략해 오자 거짓 도주하여 들에 있는 백성 수 천 명을 그냥 버려두었다. 적의 대장 단우(單于)는 이 소식을 듣고 대거 침공해 들어왔다. 그러자 이목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기마를 포진시켜 군사를 좌우로 날개처럼 풀어서 이와 결전, 적을 크게 무찌르고 흉노 십여 만을 죽였다. 이 싸움에서 단우는 도주하고 그 후로 10년 간 감히 조나라의 변성에 접근하지 못했다. 이상은 이목에서 시작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는 수세를 견지하여 공세로 전환한다는 「견벽청야법」이 중국고대사에 기록되어 있는 개요인데 그 특색은 경계와 수비를 엄중히 하는 한편, 군사가 휴양할 여유를 주고 적에게 인마 물자를 빼앗기지 않게 수비선 내에 보호하면서 수세를 견지하는 전법이다. 이 전법은 비적들이 항상 여러 지방의 성 경계지역 중에서 수비에 유리한 험한 지대를 골라서 산악전법으로 응용했던 것이다. 원자재가 이 古傳전술을 답습했던 것을 모택동이 이어받아서 침공해 오는 국부 군을 대비했다. 중일전쟁의 전략으로 모택동이 연안에서 강의한 ꡔ지구전론ꡕ도, 또 오늘날 주은래가 외교전에서 사용하고 있는 외교전술도 「수세에 능하고 공격에 약하며」 또는 「지구전에 능하고 속전에 서툴다」는 중국고래의 「견벽청야법」 전통을 계승하여 이를 발전시켜 현재에 응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7. 비적과 紅軍의 합작 모택동이 정강산에 웅거하여 가장 어려웠던 것은 비적의 문제였다. 비적 원자재와 왕좌를 이용하여 그들의 근거지인 정강산에 진지를 구축했으나 비적은 역시 비적이다. 즉 그들은 會黨匪가 아니고 단순한 토비였다. 그러니 그들이 공산당에 입당하여 모택동에게 협력한 것은 사상적 근거가 있어서 그랬던 것은 아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무엇 때문에 싸우고 있는지 가끔 의문을 갖고 비적의 본성을 드러내곤 했다. 그래도 모택동은 끈질기게 그들을 설득했다. 때로는 술책을 부려서 자연스럽게 공산당 규율을 따르도록 가르치고 유도하면서 비적의 힘을 이용했다. 즉 이와 같은 자기편의 내부공작을 하는데 있어서도 계략을 썼으나 속단으로 결판을 내지는 않았다. 또 뒤에서도 말하겠지만, ‘제4의 강한 데를 피하여 약점공격에 편중한다’는 대목은 그의 ꡔ지구전론ꡕ에서도 서술되고 있는 점이지만 그러한 전쟁방식은 결국 피동적인 싸움이며 비적의 전법이다. 최후의 승리는 수세를 공세로 전환하는 결정적인 때를 기다려야 한다. 정강산에서의 비적과 모택동과의 관계가 어떤 형태를 취하고 있었던가를 아그네스 스메틀리의 설명을 인용하여 나중에 언급하겠으나 우선 정강산 요새의 지형을 머리에 넣고 넘어가야 할 필요가 있다. 이곳이야말로 중국 공산당이 진정한 의미에서 고고의 소리를 올리고 태어났던 곳이니까 말이다. 정강산은 남북 90華里, 동서 80화리, 주위는 550화리 정도니까 한국의 3개 군의 넓이다. 높이는 정강산을 지맥으로 하는 萬洋山은 1800m, 정강산을 둘러싸고 있는 팔면산(八面山), 동목령(桐木嶺) 등 모두가 1500에서 1700m의 고봉들이므로 지형은 꽤 험준하다. 그리고 외곽으로는 영신(永新)의 만원산(萬原山), 연화(蓮花)의 무공산(武功山), 九龍山, 다릉(茶陵)의 十八田 등이 정강산을 둘러싸고 있다. 「一夫가 關門을 막으면 萬夫도 못 당한다」고 하는 천혜의 요새로 못 봉우리에 둘러싸인 고원 안에서는 농사를 지을 수 있고 가축을 방목할 수 있다. 실로 수세의 편에서는 견고한 생존기지인 셈이다. 상해의 당 중앙에서 정강산 및 서금시대에 모택동에 대하여 게릴라전을 그만두고 산을 내려와 평지 전으로 총반격하라고 명령이 와도 모택동은 완고히 거절하여 응하지 안았다. 그는 추수봉기 남창봉기에 실패했던 경험에 비추어 이제는 수세에 들어가서 장기적 지구전으로 전국적 계급 투쟁을 전개해야 할 길을 열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어쨌든 정강산 전투는 이목의 「견벽청야법」을 응용한 전투였다고 봐야 한다. 정강산의 싸움, 그것은 「수세에 능하고 공세에 서투른」 한민족 전쟁의 특색을 현대에서 나타내었던 대표적인 전쟁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정강산에서의 홍군의 내부에 여러 가지 모순이 있었던 것은 오합의 집단인 비적의 세력과 그 전투기지를 이용했던 이상 당연한 일이었다. 아그네스 스메틀리는 그의 저서 「중국홍군은 전진한다」에서, 정강산시대의 모택동이 어떻게 비적들을 회유하고 그들을 세뇌하여 그들로 하여금 천부의 「자각적 능동성」을 혁명 에너지로 유도해 갔던가를 극명히 묘사하고 있다. 좀 길지만 다음에 인용해 보겠다. 「공산당원과 청년공사 동맹원은 흥군 대열의 이쪽저쪽에 끼어 있어서 회의를 열고 병사위원회의 과업에 참가하여 모든 활동에 지도적 역할을 수행했다. 그들 공산주의자들은 홍군을 꿰뚫는 붉은 줄이 되어 군대에 혁명적 형태와 지식과 방향을 지시했다. 홍군은 비적의 두목 왕좌를 제29연대, 즉 남호남 농민의 연대장에 원자재를 같은 부대의 대대장에 임명하여 약속을 지키고 있었다. 부하 비적과 농민들은 그들의 연대에 조직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부대 안에는 정치적 공작을 담당한 공산당원인 공장노동자와 고참 혁명병사가 다수 들어 있었다. 왕좌와 원자재는 입으로는 달콤한 말을 하면서 마음속에는 독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은 홍군의 활동에 의심을 품고 지켜보았다. 「우리는 아무 것도 모르니까 가르쳐 주세요」 하고 곧잘 말하지만 실제로는 언제든지 태만을 부려서 방해를 놓고 모략을 부려서 뜬소문을 퍼뜨렸다. 정치위원들은 그들 앞에서는 속수무책인 수가 많았고 그들 대열 속에 진짜 병사위원회를 조직하기는 매우 어려웠다. 비적들은 그들 부대 안에 조직되어 있는 공장노동자와 병사들을 늘 적의를 굳히면서 경계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점차로 농민들이 정치공작원들의 지시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으므로 왕좌와 원자재는 자기들에게 불리하게 상황이 변하고 있음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들은 오랫동안 생각한 끝에 어느 날 계책을 세워서 대행자를 농민들에게 보냈다. 그들 대행자는 王과 袁을 선전하여 농민의 환심을 사려했다. 예나 지금이나 농민의 벗인 왕과 원은 농민동맹의 편이며 토지의 몰수에 찬성한다고 퍼뜨렸던 것이다. 왕과 원은 수확물의 5분의 1또는 그보다 낮은 地代로 농민에게 토지를 분배했다. 그러면 농민은 풍요해질 것이다. 왕과 원은 언제든지 농민들의 편이다. 가까운 앞날에 두 사람은 틀림없이 홍군을 제압하게 되므로 농민은 그들 두 사람을 지원해야 한다. 홍군은 무엇인가, 아무도 홍군을 잘 모르고 있지 않는가? 농민들은 이런 이야기에 귀를 귀기울였다. 그렇다 원과 왕은 옛날부터 우리들을 보살펴 주었다. 홍군은 입으로는 달콤한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저 녀석들은 먼 곳에서 들어온 타관 사람들이다. 우리들을 잘 알고 있는 사내를 믿고 따르는 편이 낫다. 어느 날 홍군의 정치공작원이 한 마을에서 이유도 모르게 피살되었다. 이어 또 한 공작원이 같은 변을 당했다. 이런 일이 계속 일어났다. 모두들 왕과 원이 이 살인의 책임자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증거가 없었다. 비록 그 증거를 잡았다 해도 홍군은 감히 손을 쓸 수 없었다. 그렇게 할 때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까닭은 吉安에서 동으로 걸쳐 정강산 주변의 북부, 동부, 남부의 모든 도시에 국민당 군대가 천천히 집결되고 있었던 것이다. 한달 이내에 큰 전투가 벌어질 상황이었다. 홍군은 외부, 내부의 이중 전투를 할 수는 없었다. 만약 홍군이 왕좌와 원자재에게 손을 대면 그들은 농민을 홍군에게 등을 돌리게 하고, 군벌과 비밀동맹을 맺을지도 모른다는 염려 때문이었다. 그래서 마을에 침투해 있는 정치공작원과 비적이 인솔하고 있는 농민부대의 노동자들은 왕과 원, 그리고 이 두 사람의 심복부하들을 경계하고 신중히 대하도록 지령을 받았다. 마을에서는 정치공작원은 새로운 공작방법을 강구해야 했다. 홍군는 말보다도 실천을 앞세워야 하게 되었다. 홍군은 왕과 원의 부하 병사들과도 가까이 하여 그들을 내편으로 끌어 들여야만 했다. 이윽고 홍군은 새로운 군규율을 결정할 때가 와서 농민을 교육할 기회를 얻었다. 홍군의 최고기관에서 작성한 군규 초안을 병사위원회에서 토론했다. 드디어 초안을 가결하기 위한 마지막 대중집회의 날이 다가왔다. 홍군의 전원이 소집되고 농촌에서 농민들도 초대되었다. 그것은 실로 성대한 군중집회여서 軍規는 하나하나 차례로 심의되었다. 제1조는 언제 어떠한 경우에도 홍군의 군률과 명령에 엄중 복종해야 함을 규정했다. 적과의 연락, 살인, 강간, 무기를 소지하고 도망치는 일, 전투 중 명령을 거부하는 일, 거리와 마을의 매춘부에게 홍군의 비밀을 누설하는 일,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 즉 노동자, 농민, 영세상인으로부터의 약탈, 이상의 행위에 대해서는 사형에 처한다. 지주와 자산가, 대부호에게서 물품을 몰수하는 일은 몰수위원회 독자의 의무라 했다.」 왕좌와 원자재 등 비적은 정강산 일대의 농민으로부터 어느 정도 신뢰를 받고 있었다. 그것은 이 비적들은 먼 곳에 나가서 약탈을 하지만 자기 지방의 농민에게는 별로 심하게 굴지 않을 뿐 아니라 관비 즉 군벌관료들의 약탈행위에 대항하여 농민을 지켜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적은 역시 비적이었다. 그들에게는 삼합회와 가로회와 같은 정치적 목표가 없었다. 때문에 홍군과 공산당의 사상적 목적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었다. 그들은 권력에 반항하여 자기 배를 채우기 위하여 비적이 되었을 뿐이다. 모택동은 그들로부터 여러 가지 산악전법과 게릴라전의 기술을 배웠다. 그러나 그들은 독을 품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해독제를 먹여야 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외과수술은 위험했다. 적에게 포위되어 있는 상태에서 같은 진영의 내부에서의 대수술은 적에게 공격의 허점을 마련해 주게 된다. 모택동은 그래서 아홉 가지 중의 제3의 사항인 한 민족 특유의 「계책」을 썼다. 먼저 홍군과 비적의 병사와의 사이에 서로 친교를 맺게 함으로써 그들을 정치적으로 세뇌해 가면서 마지막에는 군률을 제정하고 비적의 행동을 서서히 건실하게 단속하여 공산주의자로서 행동할 수 있게 주입식 교육을 시켰던 것이다. 즉 비적이 인간으로서 지니고 있는 선천적 「자각적 능동성」을 외과수술이라는 방법을 쓰지 않고 한방치료의 방식을 취하여 유도했다. 그리하여 원자재, 왕좌 비적을 공산군 진영의 전력 속으로 짜 넣었다. 그와 같은 방법으로 모택동은 비적에게는 배우고 비적에게 가르치면서 자기 진영을 굳히고 정강산 전투에서 공격해 들어오는 국민당 군벌의 공세를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이다.
8. 匪賊의 兵法과 孫子 비적의 전법은 대게 게릴라전이 많다. 그 게릴라전이 점차로 번져 나가면 수많은 게릴라전이 사방에서 일어나서 몇 백 몇 천 만의 농민이 반란군에 몰려들게 된다. 그것이 모여서 합류하면 이 속에 참가하고 있는 지식분자가 지도자가 되어 중국 고대의 병법에 바탕을 둔 전략형태를 갖추게 된다. 태평천국의 난 등도 처음은 게릴라전에서 출발하지만 나중에는 당당한 전략형태를 갖추어 싸우게 되었다. 그러다 보면 이미 비적이라 할 수 없게 된다. 누가 뭐라 해도 비적의 전투의 특징은 역시 게릴라전이다. 손자의 병법에는 게릴라전의 철학을 설명한 대목이 있다. 즉 손자의 「虛實篇」, 「軍爭篇」, 「九變篇」 등인데 우선 여기에서는 주로 「허실편」에 대하여 살펴보자. 손자의 병법의 특색은 전쟁 그 자체를 상변양법(常變兩法)의 관점에서 고찰하고 있는 점이다. 손자의 「시계편(始計篇)」에서의 五事七計論이 常法이며 그것의 궤도론(詭道論)이 變法이다. 비적은 폭도의 집단이므로 병법을 써야 한다. 손자가 말하는 궤도의 내용은 대체로 다음 14개조로 이루어지고 있다. 1. 能而示之不能 - 능하면서도 능하지 못함을 보인다. 2. 用而示之不用 - 이용할 생각이면서 쓰지 않을 것처럼 보인다. 3. 近而示之遠 - 가까우면서도 먼 것처럼 보인다. 4. 遠而示之近 - 멀면서도 가까운 것처럼 보인다. 5. 利而誘之 - 利이써 유리함을 유인한다. 6. 亂而取之 - 문란케 하여 목적을 취한다. 7. 實而備之 - 상대가 실하면 나도 준비한다. 8. 强而避之 - 상대가 강하면 피한다. 9. 怒而撓之 - 노하게 하여 꺾는다. 10, 卑而驕之 - 비천하게 굴어서 상대를 교만하게 한다. 11. 侏而勞之 - 적을 편안하게 하여 도리어 지치도록 한다. 12. 親而離之 - 친하게 하여 이반하게 한다. 13. 攻其無備 - 준비 없는 곳을 친다. 14. 出其不意 - 불시에 적을 친다.
이상은 일일이 설명을 안 해도 뜻을 알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을 실천에 응용하기는 쉽지 않다. 손자의 「허실편」은 「軍形篇」, 「兵勢篇」과 더불어 손자병법의 삼위일체를 이루는 것으로 먼저 「군형편」이 있고 이것을 몸체로 하여 구체적인 방법으로서의 「병세편」을 썼고, 다시 그 「병세편」을 몸체로 하여 그 用으로서의 「허실편」을 썼다. 「허실편」의 초두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잘 싸우는 자는 남을 이르게 하고 남에게 이르지 않는다. 능히 적으로 하여금 스스로 이르게 하는 자는 이를 이롭게 하는 때문이다. 능히 적으로 하여금 이르지 못하게 하는 것은 해로운 때문이다. 그러므로 적이 편안하면 능히 이를 수고롭게 하고, 배부르면 능히 이를 주리게 하고 편안하면 능히 이를 움직인다.」 즉 「남을 이르게 한다(致人)」은 말은 적을 내 마음대로 움직이게 한다는 뜻이다. 적이 원하지 않더라도 우리편이 원하는 대로 적군이 이르지 않을 수 없게 강제하는 일이다. 비적이 정부의 대군에 의하여 토벌되는 경우, 열세를 가지고도 관군과 싸워야 한다. 이런 경우 정공법으로서는 응전할 수 없다. 다른 방법을 써야 한다. 즉 奇智를 부려서 관군의 정곡을 쳐야 한다. 이것이 「實을 피하여 虛를 친다」는 「허실편」의 핵심이다. 아군의 열세를 거꾸로 이용하여 적의 대군의 허를 찌름으로써 적을 자유롭게 우롱한다. 그 다음에 이어서 「그 반드시 가는 바에 나가고 그 뜻하지 않는 바에 나간다. 천리를 가고 지치지 않는 자는 무인지경을 가기 때문이다. 쳐서 반드시 취하는 자는 그 지키지 않는 바를 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잘 치는 적이 그 지킬 바를 모른다. 잘 지키는 자는 적이 그 칠 바를 모른다. 미호미호(微乎微乎), 형체 없이 본다. 神乎神乎, 소리 없이 듣는다. 고로 능히 적의 司命이 된다」 먼저, 「출기소필추(出其所必趨), 추기소불의(趨其所不意)」라는 귀절부터 설명하면 「우리편은 적이 반드시 나가는 중요한 지점에 기선을 제압하여 출진한다. 그러면 적은 그 지점의 회복을 위하여 전력을 다 하게 될 것이다. 때문에 다음으로 중요한 지점에 다른 허점이 생긴다. 그러면 우리편은 그 허술한 지점을 쳐서 적의 의표를 찌른다」는 뜻으로 실을 피하여 허를 치는 방식의 병법이며 무인지경을 가는 것도, 지키지 않는 곳을 치는 것도, 치지 않는 곳을 지키는 것도, 모두 致人하여 不致於人하는 허실의 줄다리기이다. 「치인이불치어인(致人而不致於人)」이란 항상 자기편의 실태를 적이 간파하지 못하게 하고 언제든지 적의 실태를 먼저 간파하여 그 허를 찌르는 전투 법으로 「미미하구나 형체 없음에 이른다(微乎微乎, 至無於形). 신기하구나 소리 없음에 이른다 (神乎神乎, 至於無聲). 고로 능히 적의 司命이 된다(故能爲敵之司命)」 는 결과를 얻게 된다. 「적의 사명」 즉 적에게 명령하는 입장에 서게 됨을 말하는 것이다. 병법 「육도」의 「용도편」의 奇兵 제27에 역시 손자의 「허실편」과 같은 말이 나온다. 「무왕, 태공에게 물어 말하되 “무릇 兵을 쓰는 법의 大要如何뇨” 태공이 대답하기를 “옛날에 善戰하는 자는 능히 천상에서 싸운 것이 아니고 지하에서 싸운 것도 아니다. 그 성패는 모두 神勢에 의함이라. 이를 얻는 자는 이기고 이를 잃는 자는 패하느니라.”」 즉 周의 무왕이 태공망에게 묻고 태공망이 대답하고 있는 뜻은, 고대로부터 전투에 능숙교묘했다는 자는 공중에서 싸웠던 것도 아니고 땅밑에서 지능 치고 싸웠던 것도 아니다. 그 승패는 모두 거느리는 군대의 형태와 형세 여하에서 결정되는 바, 말하자면 군세가 신과 같이 천태만상으로 변화하여 적이 그 실을 간파하지 못했다는 한가지로 결정되며, 이 군세를 잃는 자는 패하여 멸망했다는 말이다. 모택동의 정강산에서 서금시대, 그리고 2만 5천 화리의 장정을 겪고 연안을 거점으로 한 항일투쟁에 이르기까지의 전투에서 일관했던 것은 모두 근대전의 전법이 아니고 비적들이 해 오던 중국 고대의 병법의 응용이었다. 다만 상이점이 있다면 거기에 정치적 목표, 즉 이데올로기가 있고 협력했던 농민의 「자각적 능동성」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진지로 정강산과 서금을 골랐던 것도 그곳에서 자급자족 할 수 있다는 地의 利를 얻었기 때문이다. 병법 「위료자」는 그 「治本篇」 머리말에 「무릇 사람을 다스리는 자는 무엇이냐. 가로되, 오곡이 아니면 배부르지 않고 사마(絲麻)가 없으면 몸을 가릴 수 없노라.」고 쓰고 兵農일치를 설파하고 있다. 또 그 「제담편(制談篇)」에서는 「천하를 시켜 농사를 짓게 하지 못하면 음식을 얻을 수 없고, 싸우지 아니하면 벼슬을 얻을 수 없게 하여 백성으로 하여금 팔을 들어 다투어 나가서 농사와 전쟁을 하게 하면 천하에 상대할 자 없느니라.」 또 그 「무의편(武議篇)」에 「대국은 農戰함」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비적도, 모택동도, 일관하여 농본주의를 바탕으로 싸우고 있다. 그 점에서는 문화혁명 후의 오늘까지는 오로지 농본주의의 전쟁철학에 입각해 왔다고 말할 수 있다. 다만 모택동의 능본주의는 계급과의 연대에 의한 그 지도 하에서 시행해 왔다는 점에서 종래의 비적의 농본주의 또는 농본주의를 위한 농민전쟁과는 다르다.
전분(傳分)과 중과(衆寡)의 병법 클라우제비츠는 ꡔ전쟁론ꡕ에서 전투에서의 병력의 절대적 우세와 상대적 우세와의 관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절대적 우세를 확보할 수 없을 경우에는 병력의 교묘한 운용으로, 결전 시에 상대적 우세를 꾀하는 것이 중요하다.ꡕ 이것은 열세를 가지고 우세한 군대를 격파하는 비적 유격전의 기본철학이며, 그리고 또 모택동의 전쟁철학의 바탕을 이루고 있다. 모택동의 「지구전론」에서 일관되게 서술되고 있는 것은 앞의 전쟁론과 같다. 이 전쟁철학을 광대한 중국이라는 지형을 무대로 구체적으로 하나하나, 적시적소 일본제국주의를 대상으로 하여 모택동의 전략전술을 변증법적 발상에 입각하여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전쟁은 절대적 우세가 최선임을 더 말할 나위도 없다. 따라서 「상대적 우세」는 차선의 것으로 자기편이 열세의 경우에 취하는 전투태세이다. 결전 시에 있어서 상대적 우세를 획득하는 것은 나폴레옹 전략의 상투적 수법이었다. 나폴레옹은 결전의 장소에는 우군의 병력을 집중하고 적의 주력에 대해서는 상대적 우세를 확보함으로써 승리를 획득하는 것이 그의 특기였다. 후일 副將인 모로가 “폐하는 언제든지 소수로 다수로 이겼다.”고 말한 것에 대하여 나폴레옹은 “그렇지 않다. 나는 항상 다수로서 소수에 이겼다.”고 대답했다는 것은 상대적 우세의 요점을 설명한 것이다. 클라우제비츠의 이론은 이 사실에서 출발했던 것으로 안다. 엘바섬을 탈출한 나폴레옹은 1815년 웰링턴 휘하의 연합군과 최후의 결전을 시도하기 위하여 워털루를 향하여 진군한다. 프로이센의 브륫펠군은 이때 나폴레옹군의 측면을 급습하여 戰局을 전환하는 열쇠를 쥐었다. 당시 클라우제비츠는 브륫펠을 주장으로 받들고 참모총장 그나이제나우의 막하, 제 3군단의 참모장이며 대령이었다. 그는 나폴레옹 전쟁에 참가하고 그 체험에서 ꡔ전쟁론ꡕ을 썼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이미 클라우제비츠가 ꡔ전쟁론ꡕ을 내놓기 2300여 년 이전에 이 상대적 우세 또는 집중전략의 이론을 손자가 그의 병법에서 專分, 衆寡의 이론으로 훌륭하게 설파한 것이다. 중국의 수천년 동안의 비적의 반란은 손자의 병법을 기지 있게 응용한 것이다. 게릴라의 유격전에서 출발하여 열세를 가지고 우세에 이기고, 그 전력을 확대하여 마지막에는 왕조를 타도하고 새로운 정권을 수립하기까지의 과정은 오로지 손자의「전분, 중과의 理法」 즉 클라우제비츠의 「절대적 우세와 상대적 우세」의 관계를 설명한 병력의 교묘한 운용으로서 「결전 시에 취하는 상대적 우세의 전법」이었다. 모택동의 지구전에 나오는 전략도 또 오늘의 중국의 세계 전략에도 서로 일관된 공통점이 있다. 손자는 그 「허실편」에서 전분과 중과의 이법에 의한 유격전의 비법을 가르치고 있다.
「남을 나타내고 나에게 나타남이 없으면 즉 나는 집중되고 적은 흩어진다. 내가 집중하여 하나가 되고 적이 흩어져서 열이 된다. 이는 하나로 10분지 1을 치는 것이다. 즉 나는 많고(衆), 적은 적다(寡). 능히 衆으로 寡를 치면 즉 나와 더불어 싸우는 자는 約(여력이 남는다)이다. 나와 더불어 싸우는 바의 땅은 적이 알 수 없다. 모르기 때문에 즉 적은 여러 곳을 방비해야 한다. 적이 방비해야 할 곳이 많으면 나와 더불어 싸우는 적은 적다. 그러므로 앞을 방비하면 즉 뒤가 허술하고, 뒤를 방비하면 앞이 허술하고, 왼쪽이 허술하여, 방비 안 하는 곳이 없으므로 즉 허술하지 않는 곳이 없다. 적은 것은 남에게 갖추게 하는 것이다. 많다는 것은 남이 나에게 갖추게 한 것이다.」
먼저 자기편이 적에게 거짓 형태를 보이는 것이다. 즉 자기편 正을 적에게 奇라고 생각하게 하고, 자기편 奇를 적에게 正인줄 착각하게 한다. 이 궤계(詭計)는 무엇을 뜻함일까. 앞에 말한 나폴레옹 전술을 이에 적용하면 奇兵의 측면적 행동을 正兵의 주력적 운동이라고 착각케 하고, 주력인 정병을 적에게 제2의 병력으로 잘못 생각게 하여, 적의 주력을 허술하게 하는 계책이다. 그 필연의 결과가, 「나는 집중되고 적은 흩어진다. 나는 집중하여 하나가 되고, 적은 분산하여 열이 된다. 이는 열을 가지고 하나를 치는 계산이 된다.」 고 하는 전분의 계, 즉 專一의 병력으로 분산된 적을 숫돌로 계란을 깨뜨리듯 치려는 계책이 되는 셈이다. 그리고 제2의 결과로서, 「즉 나는 다수이고 적은 소수이다. 능히 다수로서 소수를 치면, 즉 나와 더불어 싸우는 자는 約이다」 하는 것이 되어 최후에는 적의 고립된 핵심과 격돌하여 격파하고 승리를 얻게 된다.
결국 여기에서 손자의 말을 요약하면 奇形을 보여 적의 주력을 분산시켜서 적의 백의 힘을 10분의 1인 10의 힘이 되게 약화 고립시킨다. 한편 자기편은 전 병력을 집중하여 10분지 1로 약화된 적을 격파하고 계속하여 또 다음의 10분의 1을 친다. 이와 같이 개별 격파로 적의 손발을 모조리 잘라버리고 끝으로 모든 방비를 하나하나 잃어버린 적의 중핵부대와 일전하여 이를 분쇄, 적의 전 병력을 남김없이 궤멸시키는 게릴라 전법을 풀이한 것이다. 모택동이 정강산시대에서 서금시대까지 호남, 강서, 복건의 각성에 출격하여 싸웠던 전법은 모두 손자의 「전분, 중과」의 응용전쟁이며 유격전술이었다. 손자의 전분, 중과의 병법은 요컨대 집중, 분산에 관한 병법이어서 항일전쟁 중에도 八路軍과 新四軍이 이를 사용하여 일본군과 대결했다. 또 이 병법은 태평양전쟁 중에서의 미일 양군의 전략에도 공통된다. 지금 생각하면 미드웨이 해전에 패한 후로 태평양의 작은 섬 여러 곳에 병력을 배치하여 방비하지 않았던 곳이 없었던 일본군은 극단적인 분산작전을 취했던 것이며, 이에 대하여 중요지점에 「전력」을 기울였던 미군은 집중전략을 썼던 것이다. 집중전략과 분산전략과의 대항전이 되자 미일양군의 승패는 이미 결정이 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정강산의 출격(出擊) 모택동은 정강산에서 홍군을 편성하자 주지하는 바와 같이 삼대규율과 팔대규칙을 설정했다. 삼대규율에서는 1. 명령에는 절대 복종한다. 2. 빈농으로부터 절대로 물품을 몰수하지 않는다. 3. 지주한테서 몰수한 것은 모두 직접 정부에 인도하여 처분을 위임한다. 또 팔대규칙에서는 1. 인가를 떠날 때는 모든 문짝을 본시대로 돌려 줄 것(인가에서 문짝을 빌려서 군인들이 침상으로 썼다. 그 문짝을 돌려준다는 말이다) 2. 자기가 깔고 잔 멍석은 말아서 돌려줄 것. 3. 백성에 대하여 예의를 바르게 하고 될수록 그들을 도와줄 것. 4. 빌려 쓴 물건은 모두 돌려줄 것. 5. 망가진 것은 전부 변상할 것. 6. 농민과의 거래를 성실하게 할 것. 7. 물품을 구입했을 때는 대금을 지불할 것. 8. 위생에 주의하고 변소는 인가에서 충분한 거리를 두어 세울 것. 이상의 규칙은 비적과는 달라서 지주의 것은 몰수하지만 반드시 정부에 인도하여 홍군의 용도에 충당하여 사용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리고 빈민한테서는 아무 것도 몰수하지 않으므로 비적이라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때, 홍군이 정한 요격전의 「네 가지 원칙」은 비적과 같은 고전적 전술에 바탕을 둔 병법이다. 정강산의 주덕, 모택동의 홍군을 그 당시의 관료와 군벌들이 주모비(朱毛匪)니, 紅匪니 하고 불렀던 것은 그들이 비적과의 합작부대였었고 전쟁하는 방식이 비적의 특기인 유격전이었던 까닭이다. 모택동이 그때 결정했던 그 「4원칙」이란 것은,
1. 적이 나오면 우리는 물러서고 2. 적이 머물면 우리는 소란케 하고, 3. 적이 피하면 우리는 치고, 4. 적이 물러가면 우리는 나간다. 이것을 중국말로 쓰면 그 억양이 좋다. 티진우오토(敵進我退) 티치우오라오(敵止我擾) 티풰우오치(敵避我擊) 티토이우오친(敵退我進)
이것을 노래로 부르며 병사들이 외웠다. 그리하여 이 몇 줄의 노래는 그 후 중국공산군의 요격전술의 대원칙이 되었는데, 겨우 16자의 구절 속에 우리는 곧 손자의 「허실편」을 상기한다. 실례를 들면 전술한바 「전분, 중과」 병법을 실천할 경우다. 부대를 움직이는 방법을 가르친 「허실편」 맨 마지막에 있는, 「병형은 水形을 닮았다. 물의 형태는 높은 곳을 피하여 낮은 곳으로 흐른다. 兵形은 실을 피하여 허를 친다. 물은 地形에 말미암아 흐름을 제어하고, 兵은 적의 세력에 따라 승리를 제어한다. 그러므로 兵에 常勢가 없고 물에 常形이 없다. 능히 적에 因하여 변화하고 승리를 취한다. 이것을 神이라 한다.」 라는 병법의 이용이다.
고대부터의 비적의 민란은 먼저 이와 같은 열세로서 관군의 대적과 대결하는 유격전에서 시작했다. 백련교의 난, 왕윤의 난, 천지회, 삽합회의 난, 태평천국의 난, 捻匪의 난, 대도회, 홍창회 등의 모든 민란은 無形의 형태를 띠고 「전분, 중과」의 병법을 썼던 것이다. 만주사변 때, 일본의 관동군과 독립수비대의 토벌에 저항했던 동북 항일 의용군도 또한 이 전략전술을 사용했다. 즉 형태 없는 적과 싸우느라고 일본군은 동분서주로 지쳤고, 양민을 비적의 의용군인줄 잘못 알고 수 없이 많이 살해했다. 예를 들면 태평군이 화북에 침입한 후 염비와 공동작전을 편 후에 동치 3년 이후 대두한 염비는 유동작전에 뛰어 났었는데, 처음은 流賊답게 움직이지도 않았고 또 순수한 비적처럼 산악을 점검해 있는 것도 아니고 일정한 촌락에 거주하여 처자를 기르며 봄, 가을에 두 번 부자형제가 함께 부근 촌락을 방화 약탈했다. 또 먼 지방에 나가서 약탈한 물건을 싣고 돌아와 농사일에 종사했으므로 보통 양민과 다름없었다. 그래서 관군이 공격해 와도 구별을 못했다. 즉 형태 없는 兵形을이용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원정 나갈 때는 수 백 명, 수 천 명이 넘는 염비가 一捻 二捻으로 50명, 100명을 단위로 회오리바람처럼 유동하고 선회하면서 관군을 괴롭혔다. 「회군평념기(淮軍平捻記)」, 「상군기(湘軍記)」 등 정부측의 보고서에는 그 무렵의 염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내용의 보고를 기록하고 있다.
[염비는 주로 기마대이며 하남을 중심으로 벌판을 바람처럼 달리며 마필은 5,6만두나 되었다. 그들은 하룻밤에 3,4백 리를 예사로 달리고 말이 쓰러지면 민간에서 약탈한다. 식량도 가는 곳마다에서 약탈하므로 행동이 신속하다. 그러나 토벌의 주력인 정부 측의 淮軍은 1명 1騎라도 소중히 해야 하므로 개별적 전투에는 이겨도 끝까지 몰아세워 섬멸하기가 어려웠다. 염비는 농민 특유의 유격전을 주로 했으나 때로는 조우한 회군과 일대격전을 벌이는 경우도 있다. 그때는 여러 길로 분산하여 협공하여 오는가 하면 일단이 되어 집중 공격해 오기도 한다. 회군 쪽은 서양식 총포로 무장하고 있지만 捻은 길이 2장 (1丈은 10자)의 창을 휘두르며 신출귀몰, 말을 타고 진중으로 달려들기도 한다. 이런 경우에 총포는 쓸모가 없다.]
즉 兵形도 없이 「병형은 수형을 모방한다.」는 옛 전법을 교묘히 구사하여 정부 측의 회군과 증국번의 상군을 괴롭혔던 것이 염비의 난이었다. 그 점에서는 정강산의 모택동도 전국시대의 조나라 이목처럼 성 경계지역의 진지에 의지해 숨어 「견벽청야법」을 취하고, 산에서 내려와서 싸울 때는 역시 「병형은 수형을 모방한다」는 손자의 병법에 입각한 유격전을 전개하여 각처에서 국민당 군벌의 군대를 쳐부순 것이다. 모택동이 정강산에서 손자를 연구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모택동의 ꡔ지구전론(持久戰論)ꡕ 모택동의 ꡔ지구전론ꡕ을 마르크스 레닌주의의 세계혁명을 위한 일종의 전쟁론으로 평가하는 것은 그것이 세계자본주의의 모순, 즉 일본제국주의의 중국침략전쟁에 대한 중국민족의 저항이라고 볼 경우, 국제적 계급투쟁인지 모른다. ꡔ지구전론ꡕ을 자세히 분석해 보면 그 속에는 많은 부분에 중국 고대부터의 반란전쟁에서 배우고 있는 점이 있다. 그것은 일본제국주의의 중국 침략전이 중국대륙 내부에서 일어난 군벌들 간의 혼전의 사이를 누비며 쳐들어갔던 「견아착종(犬牙錯綜, 개 이빨을 뽑아 모은 것 같은 변변치 못한 세력이나 무기, 병력이나 그 추종자)」한 전쟁이었기 때문이다. 모택동은 ꡔ지구전론ꡕ의 51에서 먼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단언할 수 있다. ‘지구전적 항일전쟁은 인류전쟁사 중 그 영광스러운 한 페이지를 장식하게 될 것이라’고.” 「견아착종」한 전쟁형태는 매우 특수한 형태의 하나이다. 이것은 일본이 갖고 있는 야만성과 그들의 병력부족, 중국이 갖고 있는 진보성과 영토의 광활함 등의 모순 된 여러 요인에서 발생했다. 착종 견아착종한 전쟁은 역사상에 있기는 했다. 러시아 10월 혁명 후의 3개월간의 내전에서 이와 같은 상황이 존재했다. 그러나 중국의 특성은 장기성과 광활함에 있다. 이것은 역사적인 기록을 돌파할 것이다.」 모택동은 여기에서 러시아 10월 혁명 후의 3개월 간 내전의 상황에 언급하고 있지만 중국내륙을 무대로 발호했던 백련교의 내란은 연속하여 수세기에 미쳤고, 가경시대의 백련교의 내란은 10년 가까이 계속되었다. 태평천국의 난은 15년에 걸쳐서 전중국의 거의 반을 차지했다. 모택동이 일본제국주의와의 항일전쟁을 치르면서 자기 조국의 혁명전쟁의 전통을 배우지 않았을 리 없다. 그리고 조국의 내전에서 언제든지 중국 고대의 병법을 썼던 것이다. 모택동은 그의 ꡔ지구전론ꡕ의 52에서 마치 손자병법처럼 말한다.
[내전과 외전- 항일전쟁은 전체로서는 內線작전의 지위에 있는 것이지만 주력군과 유격대와의 관계에서는 주력이 내선에 서고 유격대가 외선에 서서 적을 협공하는 형태를 형성한다. 각 유격구(遊擊區)의 관계도 또한 마찬가지이며 각개 유격구는 모두 자기지구를 내선으로 하고 다른 지구를 외선으로 하여 적을 협공하는 대단히 많은 전선을 형성한다. 전쟁의 제1단계에서는 전략상 내선작전을 행하는 유격대는 광범하게 적의 후방을 향하여 성큼성큼 전진한다. 그리고 제2단계에서는 보다 맹렬히 전진하여 후퇴와 전진과의 奇形의 형태를 형성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손자병법의 골자이며 손자는 「전세는 奇正에 불과하며 기와 정의 변화는 무궁무진한 것이다」라고 했으며 또 「奇正의 相生함은 순환의 발단이 없음과 같다. 무엇으로 이를 다 밝힐 수 있으랴」 고 그 「병세편」에서 서술하고 있다. 즉 모택동의 ꡔ지구전론ꡕ에 씌어 있는 내선작전은 손자의 정에 속하며 외선작전의 유격전은 奇에 해당된다. 손자의 병법은, 각편을 통하여 「常과 變은 서로 통하며, 정과 기는 서로 序(바뀐다)한다」고 하여 유기적 관계를 말하고 있으며 그의 13편 전체는 일편의 사슬로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모택동은 ꡔ지구전론ꡕ의 54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포위(包圍)와 反包圍 - 전쟁 전체에서 보면 적의 전략적 進攻과 외선작전에 의하여 아군은 전략적 방어와 내선작전과의 위치에 놓여 있으며 의심할 여지없이 아군은 전략적 호위 속에 들어 있다. 이것은 적의 아군에 대한 제1의 포위이다. 우리 편이 수적으로 우세한 병력을 가지고 전략상의 외선으로부터 여러 갈래로 나누어져서 우리를 향하여 전진하는 적에 대하여 작전상으로나 전투상의 외선작전을 취한다면 각개 약진하는 적의 각 부대를 우리 편의 포위 속에 잡아넣을 수 있다. 그것이 아군의 적에 대한 제1의 반포위이다. 또 한편 적의 후방의 유격전쟁의 근거지에서 본다면 독립된 각 근거지는 모두 적의 4면 내지 3면에서의 포위 속에 놓여 있는 것이며, 전자의 예는 五台山이고 후자의 예는 산서성 북부이다. 그러나 만약 각 유격근거지를 연결하여 본다면 그리고 또 각 유격근거지와 정규군의 진지와를 연결시켜서 본다면 우리 편도 역시 많은 적을 포위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도 「병세편」의 「奇正의 變」을 응용한 전법으로 역시 손자병법의 하나다. 이상에서 모택동이 서술하고 있듯, 기정의 천변만화, 正이 奇를 낳고 기가 정을 일으키며, 순환하여 무궁무진한 상태는 어느 것이 정이며 어느 것이 기인지 분별하기조차 어렵게 한다. 정신이 어지러울 정도의 변화는 차라리 奇變이라 부르는 것이 적당치 않을까 생각된다. 그런데도 손자는 이것을 결코 기변이라 하지 않고 어디까지나 奇正의 變이라고 보았다는 점에 손자의 깊은 철학이 숨어 있는 것으로, 기정의 무궁한 변화 속에 손자가 항상 정을 인정하고 있는 것은 주목해야 할 것이다. 모택동이 ꡔ지구전론ꡕ을 서술한 때는 이미 일본군은 광동, 무한을 함락시키고 화북 방면에서도 산서성 깊숙이 침공하고 있던 1938년 5월이었다. 모택동이 연안을 본거로 정하고 이곳을 정이라 하며, 각처에 유격전의 근거지를 설치하여 奇로하고, 항일전을 전개하고 있었을 무렵이다. 모택동도 또한 이 전투에서 기정의 무궁무진한 변화 속에서 손자와 마찬가지로 정을 體로서 인정하고 기를 用으로 하여 그의 ꡔ지구전론ꡕ를 서술한 것은 모택동다운 발상이었다. 守勢를 正으로 하고 공세를 奇로 하는 중국고대의 전법은 비적들의 반란전쟁에 답습되어 이제야 모택동의 변증법적 전략전술에 까지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 전통은 주은래의 세계외교 전략에까지 승화되었다. 미국과 중국의 접근도, 일본과 중국의 우호조약도, 수세에 서서 적의 패배를 기다린다는 중국고대의 전략전술과 별개의 것은 아니다. 중국이 大國主義를 취하지 않는다는 것도 이와 같은 비적의 반권력 정신을 답습하고 있기 때문이며 十全大會에서 연속 혁명을 규정했던 것도 그 중의 하나로 봐야 한다.
후기 중국에서 비적이 계속 발생하는 원인에는 대체로 두 가지 조건이 있었다. 즉 하나는 자연적 조건이며 또 하나는 그 자연적 조건에 제약되어 왔던 역사적 조건이다. 자연적 조건이라는 것은 이 나라의 생산관계의 발전을 규제해 왔던 토양과 물과의 관계이다. 즉 전전의 사회과학자들이 중국이 근대화에 뒤늦었던 이유로 든 아시아적 정체성이란 한줄기 황하, 또는 양자강에서 관개하기 위한 치수의 필요에서, 중국이 일찍이 봉건국가에서 탈피하여 전체국가를 형성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위가 발달하지 못했던 자연적 조건에 바탕을 둔 생산관계를 말함이며, 그것은 황하, 양자강의 하류에 홍수를 일으키는 중국 서북부의 황토 고원에서 흐르는 미세하고 물에 약한 토사의 특질이 하류에서 침전하여 중구 동남부 지방에 수없이 대홍수를 일으키면서 沖積토양을 형성하는 과정에 있어서의 인간과 자연과의 투쟁과 그 생산관계에 있어서의 자연조건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광범위하게 걸쳐 있었기 때문에 필요했던 통일정치 지배체제 즉 제국국가를 필요로 했던 자연적 조건, 이것이 중국을 몇 천 년 동안 농업국가로 제약했고 전제국가 체제로서 이 나라의 농업을 규제해 왔던 것이다. 농민은 농업과 가내 수공업을 규제 받았던 것이다. 때문에 농민은 농업과 가내 수공업을 견고하게 연결한 폐쇄사회, 즉 촌락공동체를 형성하고 원초적 자본주의는 하천의 유역, 혹은 항만지방에 한정되어 기형적 발전 밖에 못했던 것이다. 환언하면 중국의 봉건 할거적(割據的) 정치가 춘추전국 후 붕괴하여 專制국가가 확립되어 내려온 것은 유럽과 같이 경제적 유통관계의 발전에 의한 것이 아니고 한줄기 황화와 양자강의 물을 넓은 중국전역에 농업용수로 이용해야 했으며 그 치수관개의 필요에서 정치의 봉건적 할거체제가 장애가 되었다. 그래서 전제체제가 일찍 확립되었던 것인데 그 전제체제는 거대한 착취기구가 되어 농민을 극도의 빈궁으로 몰아 넣어서 중국경제의 근대화를 저해했다. 또한 이 전제체제를 성립케 했던 같은 자연적 조건에서 오는 하천의 범람은 하룻밤에 몇 평 방 마일의 농촌지대가 진흙의 바다로 변하게 했고 그 결과, 몇 만 몇 십만의 농민이 유민이 되어 비적이 된다. 또 그 반대의 자연현상으로는, 예를 들면 서북지방과 같이 한발이 오래 계속되어 기근이 들면 난민이 생겨서 비적이 된다. 즉 자연과 체제와의 협공 속에서 농촌은 황폐하여 중국 근대화가 지연되었던 것이다. 중국근대화의 지연은 결국 서구제국주의에 이어 편승했던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의 대상이 되어야 했던 결과를 초래한다. 또 하나는 역사적 조건인데 그것은 황하의 상류지방에서 시작하여 양자강 하류일대로 확대되었던 한민족의 농업사회에 대하여 북방 유목민족이 기후가 온화하고 풍요한 땅을 찾아 남하하여 평화적인 농경민족을 침략했다. 여기에 이 민족에 의한 왕조의 지배라는 중국의 역사적 조건이 발생했던 것이다. 이 조건은 온화한 농경민족이 정착하고 있는 풍요한 농업지대의 북쪽에 한랭한 초원지대가 펼쳐져 있었고 그곳에 사나운 기마민족이 유목을 생업으로 하며 남하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는 지리적 조건이 있었기 때문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이민족에 의한 전제지배, 즉 무력통치는 착취를 일삼았으나 民力涵養의 복지정책을 시행하지 않는 정부가 역대로 내려오면서 끊어졌다 이어졌다 했다는 사실, 따라서 중국의 지배기구인 관료체제와 그 지배 하에서 생산하는 농업사회와의 사이에 유기적 기능이 조성되지 않고 국가의 지배체제와 피치자 사회와의 사이에 벽이 발생했다는 사실, 즉 이상의 제조건이 원인이 되어서 비적이 발생하고 집단을 형성하여 반란을 일으키게 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비적은 역대왕조의 말기가 되면 체제 측의 부패를 틈타서 하나의 정치적 목표를 가진 대집단으로 발전하고 혁명을 일으켜서 왕조를 무너뜨리고 신왕조를 성립시켰던 것이다. 중국의 역사는 이와 같은 왕조교체의 역사이며 그리고 그 원인이 되었던 비적반란의 역사인 것이다. 실로 중국 易姓革命 비밀을 푸는 열쇠는 여기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대교는 근대 유럽의 자유, 평등주의와 자본주의적 합리주의 및 과학적 진화론 등에 비판적 태도를 취하고 정통파 마르크스주의자인 진독수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설과도 대립하여 마르크스의 추상화된 유물사관마저 경시하고, 오로지 계급투쟁에 있어서 인간의 主意的 능동성만을 중시했다. 그는 중국혁명의 원점은 농민에 있으며 농민 속에 혁명의 에네르기를 발굴하려 했다. 그리하여 그는 비적 홍창회의 무력투쟁을 그가 처형되었던 전년인 1926년에 이미 이를 중시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 하다. 진독수가 비적 홍창회를 반동적이라 하여 그 혁명성을 부인했는데도 이대교는 이를 높이 평가했다. 오늘 중국 비적의 연구소가 적은 것은 비적이 비밀결사이며 그들 동지간의 규율이나 역사에 대한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국의 비적은 카리스마적이며 다분히 사교적 요소와 비합리적인 형이상학적 요소를 내포하고 있어 이것을 합리적으로 설명하기가 곤란하다. 그러나 옛 중국사회의 수많은 수수께끼를 푸는 열쇠는 무엇보다도 비적 연구에 있다고 생각하며 오늘의 중국을 연구하는데 필요불가결한 과제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舊중국사회의 상호부조와 연대정신은 원시공동체의 종말을 고한 것이 아니고 중국 수 천 년 역사의 저변 깊숙이 맥맥히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전통이야말로 비적이 일관하여 지켜 오고 있던 상호부조의 사회연대의식이다. 앞으로 새로운 시대가 도래한다면 중국의 동양적인 상호연대의식이 다시 새로운 분장을 하고 재생하게 될 것이라고 믿고 있는 학자도 있다. 비적과 농민들은 자기를 해방시킬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음을 자각해야 한다. 백련교비가 말한 「眞王」이 도래하여 민중을 구출한다는 농민의 전통적인 신앙에서 오는 피동적 태도를 버리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길이 바로 우리의 임무라고 말한 어느 민족주의자의 시를 끝으로 후기를 마치려 한다.
언제 어디 구세주가 있었던가. 신선도 皇帝도 우리를 구해 주지 않았다. 아무도 우리의 구속을 풀어 주지 않는다. 스스로 자신을 구하는 길밖에 또 무엇이 있느냐 |
첫댓글 홍진영 선생님 아래 부분 글이 폭이 좁아선지 읽을 수가 없습니다.
전 잘 보이는데요...?
오른쪽에서 글이 짤립니다. 저만 그런가요?
중원공산당이 왜 "홍군"이라고 하는지 이제야 알겠군요,,,자신들이 마치 태평군의 후예인것처럼 위장하는 수법이군요,
사실은 태평군을 학살한 자들의 후예일텐데,,전에 모택동의 일대기를 저술한 서양서적을 본적이 있는데, 그 책에 보면
모택동은 원래 중원남부에서 소규모의 도적떼들과 마적질,약탈질을 하던 놈인데, 어느 순간에 갑자기 뜹니다.
그리고 모택동이 초기에 성장하는 과정들을 보면 초기엔 미군의 지원을 엄청 받습니다. 자금지원과 무기지원,
거기다 수송지원까지 엄청받았고요, 중원대륙 이곳저곳 다닐때는 아예 미군 군용기가 모택동이를 여기저기 모셔다 줍니다. 스탈린의 지원에 비해서 실상은 영미의 지원이 더 많았을것
홍선생님, 모택동 홍군의 "대장정"말입니다. 대장정 루트를 보면 겉으로는 국민당 장개석군과 일본군의 공격을 피해서
다닌 피란길이라는 식으로 세뇌시키는데, 그 루트를 보면 중원 남부를 서진해서, 운남성,사천성을 완전히 훑고 지나가면서, 북진해서 지금의 장안(서안)위에 연안에서 멈춥니다. 이게 과연 무슨 목적이었을까요?
제 추측으론 지금의 운남성,사천성 산악지대로 피신한 태평군 잔당이나 대륙조선 반항 유민들을 대학살하는 작업이었거나, 혹은 기타 대륙조선의 각종 유적파괴, 그리고 마지막에 연안지역에 있던 대륙조선 독립군들의 숨통을 끊어놓기 위한
작업이 아니었을까요?
제 생각엔...
대륙조선의 잔당들 멸살과 문화흔적을 지울 힘이나 여가까진...당대의 모택동에겐 없었다 보입니다.
남명계 국민당군의 점령지가 아닌...대조선과 타타르청의 경계지대를 탄 걸 겁니다...
당시, 사천과 감숙 섬서성은...아직 염비들의 세력권이요...국민당군들이 크게 힘도 쓰지 못하던 지역였기 때문이요....염비들엔...패망 태평천국의 잔당들만 합류한게 아닌...남명에서 몰려든 토왜들의 조직인 천지회계열 홍방(紅房)애들이 진치고 있던 곳이였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그 티벳과 사천성 서부...그리고 감숙과 섬서성은...대륙조선(청구조선=청나라)와 타타르청의 당대 국경지대였을 겁니다.
중가르 정복때나 타타르청이 이 티벳과 사천 신장성 감숙성등에 진출하는 것이고...섬서성엔 대조선 통치를 위한 도호부를 설치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당시는 이미 러시아공산당에 의해...몽골계 타타르정권은 러시아와 중앙아에서 괴멸됀 상태이라...
타타르청의 당시 본거지(중심지)인 카자흐스탄은 이미 러시아영토인 것이며...신장성과 티벳 사천성은...
무굴잔당들을 소탕한단 명목으로 타타르가 대륙조선에게 빼앗은 점령지 비슷한 곳이니...
당시는...루방 본거지를 잃고 방황하는 타타르 점령군들만이 닜던 무주공산에 비적들만 들끓던 째니...
남방 토왜공산군(홍군)들의 우회진격로론 제격이였을 겁니다.
남방 모택동군이 벌인 고난의 대행군...
이건...지들 계열인 삼합회(홍방)과 청방의 결합인 염비들의 지역을 통해...
러시아 공산당의 통치가 미치는 신장성과 내몽골을 가까이둔...서안지역으로로 입성으로...
러시아 공산당의 군사지원을 본격적으로 받을수 있는 루트를 확보하고...
국민당(남명)군을 남북으로 애워싸는 핵심 포위전술였기 때문일 겁이다.
그 고난의 행군을 증언하는 어느 공산군(홍군)아주머님 얼굴은...
현재의 북경&산동 중원인들과도 엄청 차이가 나는 추한 얼굴였고...
낭떨어지에서 덜어져 죽기도 많이 했고...
먹을것이 없어... 군화도 삶아 먹고...사람뼈도 갈아 먹었다...ㅡ. .ㅡ...
이러던데...
그럼, 사람뼈에 붙어 있었을 사람고기는 않 먹었을 라고...?...란 의문이 들더라고여...???
그 토왜공산군(홍군)들은...지들의 전통 미풍양속인 식인을 하며 행군했단 얘기 같습니다.
행군하는 아군은...다치거나 죽는 즉시...아군의 식량이돼는...참으로 야만적이긴 하나...
군사 작전상으론...기가막힌 군량조달 체게였던 겁니다.
와, 정말 홍선생님의 분석을 들으니 모든 의문이 술술 풀리는군요, 왜 그렇게 모택동군이 험난한 운남성,사천성 눈덮인 산악지대만 골라서 이동했는지 이제야 알겠군요, 조여오는 장개석군과 왜군을 피해서,,,지들 홍군 혈족들이 자리잡은 운남성,사천성 깊은 산악지대로 피한것이군요, 대장정때 엄청난 홍군이 죽고 연안에 도착한 홍군은
반의 반도 안되었던걸로 아는데, 이제야 홍선생님 말씀을 들으니 왜 그렇게 숫자가 줄었는지 알겠군요,,
남방계 토왜들의 전통습성인 식인문화, 즉 지들 동료를 잡아먹으면서 행군을 하다보니, 결국 홍군의 숫자가
연안에 도달했을때는 엄청 줄었던 것이군요
왜 모택동이가 홍군을 이끌고 서쪽으로 갔다가 북쪽으로 갔는지도 이제 이해가 되네요,,처음엔 지들 혈족이 남쪽에서 올라와 똬리를 튼 운남성,사천성 산악지대로 피신했다가,,,홍선생님 말씀대로 북쪽에서 그쪽으로 내려온 타타르계 몽골계등과 싸움을 벌여야 했을 것이고, 그러다 보니 다시 후퇴해야 하는데,,장개석군이 있는 동쪽으로 다시 가지는 못하고,
서쪽은 추운 티벳 고원이니 못가고, 결국 스탈린 소련군의 지원을 받기 위해서 소련군이 밀고 들어오는 북쪽을 향해 간 것이군요, 장안 북쪽 연안에서
멈췄다는 것은 그때 연안 주변에 소련군이 진주하고 있었다는 얘기가 되는군요,,
사천과 티벳은...지들 혈족들의 원 주거지라 보단...
아주 먼 옛날 초기 무굴(명)의 요동지역이자...그 곳으로 침투한 타타르(청)의 지역권인데...
타타르청이 러시아와 양이들에게 처참하게 무너지던 당대에는...이 타타르들의 점령지에 통치 공백이 생기고... 이 곳의 태평천국군 잔당이 많이 유입됀 "염비'집단에...새롭게 삼합회(홍방,가로회)세력중 서남아왜들이 또아릴틀어 나름 보증수표가 좀 되니 그 루트를 선택했다 보여집니다.
국민당은...광동성등의 동남아왜...메이지는...인도네시아등지의 해양왜일 것이고여...
국민당과 홍군의 싸움은...대륙조선(청조)의 를 다 먹은 동남아왜와 서남아왜의 전리품 다툼였다 봅니다
물론, 남명(남인)출신 대원군의 고종...아님 더 윗대 정체불명의 황게인 철종...
이때 부터 북경의 주인은...남명(무굴)의 계통으로 바뀐 것이라고 해석됍니다.
지들의 주인님인 남명(무굴)의 이성계 방계혈통 고종에게...그 속민들인 동남&서남아 토왜들이 배신을 친 것이고...
토왜들의 친척인 인도네시아 중심의 해양왜들이...메이지유신으로 독립선언을 한후...
역시, 북경의 주인으로 밀었던...바지사장 고종(남명황가)을 토사구팽하고...
동족인 대륙왜(서남아,동남아)들과 먹이다툼을 한게 중일전쟁이라 봅니다.
그러기에 현 중원공산당들의 말이...해양왜인 일본애들과도 다르고...
신장성 하북 하남성과도 다른...뭔 프랑스 말 같은 희안한 한자발음인 걸 겁니다.
대표적인게...ㄱ"을 항시 ㅈ"으로 발음...이는 양이들이 G"발음을...정작 ㄱ"보단 ㅈ"으로 많이 발음하는 희안한 이중 발음과 한 이유일지 싶습니다.
홍선생님, 지금 티벳과 사천성,운남성 산악지대에 살고있는 우리와 혈통과 문화가 비슷한 나시족,장족,묘족등 소수민족과,
티벳족이 혹시 구한말에 소련군에 밀려서 동쪽으로 밀려 들어온 타타르인들이 아닐까요? 티벳 고원은 너무 추워서 사람이 살기가 극도로 힘든 곳인데..티벳족이 애초부터 거기에서 살지는 않았을 것 같고, 누군가에 쫒겨서 그쪽으로 밀려들어
갔을 가능성이 큰데, 홍선생님의 말씀을 들으니, 구한말에 소련군과 영국군에 쫒겨서 동쪽으로 밀린 세력들이 지금의
티벳족들이 아닐지? 지금 러시아의 타타르공화국 역시, 그때 스탈린이 타타르족을 찢어놓는 과정에서 서쪽으로 찢어놓은 타타르족이 아닐까요?
대체로 맞는듯 예상합니다.
근데 제 생각엔...역사왜곡의 승자들은...청구조선(청조)의 역사와 문화도 섬멸의 대상였지만...
당대 가장 강력했던 패자인 타타르청의 역사와 문화말살이 제1과제 였을 것이니...
그 타타르들이 점령한 지대인 준가르분지...티벳&사천 신장성일대는...원래의 동무굴(동쪽 명나라=요동군)인 준가르 원주민들일 확률이 많고...지배족인 타타르(북청)인들은 아주 깨끗하게 인종청소됐다 보입니다.
문화혁명 이후로도 벌어진 신장지구의 인종청소 유적청소는...
대조선(청구조선=청나라)의 흔적도 지운 것이지만...
특히, 이(동쪽 명나라,요동)를 점령한 타타르(북청)인들의 인종청소가 첫번째 목표였지 싶습니다.
타타르(대청 혹은 북청이자 서청)과 청(동청)의 통일과 분열의 역사는 어떠했을까요? 저는 한반도는 중국중심의 동청이었는지 북방의 북청이었는지가 의문입니다. 그 문제는 현대사의 독립운동과도 아주 밀접한 관계고요. 고려공산당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의 대립은 두 세력(북청과 동청)의 대립같기도 하고요.
적군과 백군의 싸움도 아마 그와 무관하지 않을거라 예상합니다.
레닌은 그 출신이 타타르요 카잔이란 도시는 지금도 러시아에선 아시아적인 요소가 많다고 합니다. 스탈린은 카프카즈의 아쉬케나지 같고요.
스탈린의 본명은 "요셉 쥬가쉬빌"이었다고 합니다. 원래 19세기 말에 당대의 석유는 아시아는 영국+네덜란드가
지금의 인도네시아,버마에서 독점하고 있었고, 미국과 남미는 록펠러의 스탠더드 오일이 꽉잡고 있었고,
그나마 지금의 카스피해 유전인 바쿠유전이 러시아 짜르의 영향하에 노벨형제들과 합작으로 개발하고 있었는데,
롯췰드세력이 똘마니들 시켜서 바쿠에서 유전노동자 폭동을 일으켜서 올스톱하게 만들었다더군요,
노벨형제와 러시아짜르가 같이 합쳐서 바쿠유전을 해먹는것을 빼앗으려 했던 것 같아요,
그때 스탈린이 그 유전노동자 폭동을 선동한 주모자중 하나였다던데
그니까 스탈린은 가짜 가명이고,,한국도 그 친애비가 누군지 아무도 모른다는 어떤 넘이 성씨를 마음대로 바꿀 수 있게 해놨지요,, 호주제 폐지라고, 아마도 한국인들 정체성 말살의 일환으로 유돼들이 내린 지령을 수행한 듯 한데.
어쨋거나 스탈린은 가짜 성씨고,,요셉 스탈린의 진짜 성씨는 "쥬가쉬빌"이고 이건 그루지야 어로
"유다의 자손, 유다의 아들" 뭐 이런 뜻이랍니다. 지금도 그루지야는 거의 유다들 똘마니 국가 비스무리 하더군요,,그니까 스탈린은 애초부터 롯췰드 세력의 똘마니 유다로서, 러시아를 공산화시켜서 소련이라는 유다식민지화 시키는 과정에서 러시아로 침투시킨 수백명의 유다들중 하나였나 봅니다..
이순주님, 좀 이해가 안가는 것은 레닌역시 "가짜성씨"이고, 레닌의 진짜 유다성씨는 잘 기억이 안나는데
'보르도닌"이던가 아니던가, 하여간 따로 있습니다. 러시아를 붕괴시키고 유다들의 식민지인 공산식민지화 시키려고 수백명의 유다들을 러시아로 침투시키는데 레닌도 그중 하나고 레인은 원래 유다혈통에, 입양된것도
유다집안에 입양된 것으로 아는데, 레인이 타타르출신이라는 이순주님의 말씀은 잘 이해가 안됩니다.
그 말은 레닌이 유다인이 아니라 타타르인이라는 말씀인가요?
본명은 블리디미르 일리야 울리야노프이고요. 거의 모든 책에서 레닌에 대한 비난이나 조롱으로 타타르인이라는 표현이 나오거든요. 이마가 보통 양이하곤 다르게 둥글고 넓은 것인 저는 청나라 사람들이 변발을 하는 것은 그런 이마를 흉내내기 위해서가 아닌가 추측해 봅니다. 지금 양이들의 얼굴을 따라하기 위해 여자들이 턱을 깍는 것처럼요.
어처면 우리가 유태인이라고 뭉뚱그려 말하는 족속중에 타타르인도 포함될지도 모르고요.
블라디미르 일리야 울리야노프라는 이름의 뜻은 "유리왕의 자식으로 있던 세상의 지배자" 정도고요. 그 이름이 왠지 타타르계가 아닐까 하는 의심을 더 크케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