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멜의 표류기 - 가파도 6 / 이생진
고독한 분노
너는 나보고 인생을 말하라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인생을 비수처럼 꺼내는 것은
한번쯤 힘껏 살아 볼만한 것이기에
바다처럼 용기를 내어 말하는 것이다
아버지는 내가 그런 것을 알아듣기 이전에
갑작스런 열병으로 세상을 떠나시고
나는 폭풍에 어지러운 조각배처럼 세파에 시달렸다
한번도 멋있는 훈계를 받아본 경험이 없어서
어둠길에 몇 번이고 쓰러져 일어서기를 망설이곤 했다
그래도 크면서 아버지가 해야할 소리를
내 작은 입에 담을 수 있는 것은
분명 인생의 득이 아닐 수 없다
바다에 가까이 다가설수록
그런 다짐의 소리가 고래 등을 타고 오는 것을 어찌하랴
시를 내세워 파도와 싸우게 한 적은 없지만
바다가 내 젊은 아버지를 대신해주는 얼굴이 너무 인자해서
나를 여러 번 삼키려 위협했던 그 얼굴에 볼을 비비곤했다
그때마다 강인한 인간의 화살이
시퍼런 바다의 푸른 살에 꽂혀 꽃으로 피는 것도 볼만했다
나는 멍하니 바다를 보다가도
몸에 배인 의식의 뗏목을 타고
그저 떠내려 갈 것이 아니라
떠밀어보는 도전도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산방산 정상에 오르면 그런 바다가 펼쳐져
내 마음은 날개를 달고 싶어했다
형제섬 두 바위섬 사이로 보이는
가파도와 마라도 이 초라한 영웅들에게
힘찬 박수를 보낼 수 있었던 것도 그때부터다
이곳에 오면 고독이 머리끝까지 올라와
끄덩이를 잡아 흔드는 극단을 만난다
하멜*이나 그밖에 사람들에게도 예외는 아니었으니까
바다는 평화스러운 평면에 이르렀을 때에도
용서하지 않겠다는 심술을 숨기지 못했다
나침반 옆에 놓인 모래시계가 모래를 쏟아 버리고
저도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어디서 너의 목소리가 이명을 타고 이리로 오는구나
고독한 항해
1653년 8월 15일 밤 부서진 스페르웨르호와 함께
물에 빠진 헨드릭 하멜 그리고 64명의 선원
나는 그들의 영상이 화순 모래밭이나
형제섬 순비기나무 넝쿨이나
가파도 포제 제단 앞 검은 돌이나
마라도 등대 발 밑 선인장 절벽 아래 그런 데에
재현되기를 바랄 때가 있다
그보다 <난선 제주도 난파기 蘭船濟州島難破記>
그 책장을 넘길 때마다 13년 동안
유배로 감금으로 끌려 다니며 쓴
원고 뭉치를 가지고 탈출하는 장면을
영화를 보듯 보고 싶은 때도 있다
파도와 싸우는 인간의 강인한 의지
그 화살이 보일 것만 같아
산방산을 오르내리고
화순 모래밭에 비스듬히 눕고
형제섬 동굴을 헤매고
가파도에서 마라도를
마라도에서 다시 가파도를 바라보며
망부석처럼 서 있는 버릇
나는 그 버릇을 아버지의 훈계로 받아들이고 있다
1653년 1월 10일
순풍에 돛을 단다는 말은 멋있는 말이다
하지만 그 돛은 요정이 달아놓은 덫이다
돛은 요정의 웃음처럼 팔락였으니까
네덜란드 서해 군도의 하나인
텍셀을 떠날 때 요정은 그런 얼굴로
돛을 가볍게 올렸으니까
부두엔 갈매기 날고 팡파르가 울려 퍼지고
오색 테이프를 통해 선원과
그리운 사람들의 가슴을 오가는 따뜻한 피
그것이 유혹의 혈액인 줄도 모르고
샴페인을 터뜨린 손이 공중에서 흔들린다
바다 전체가 요정의 집이다
사람도 요정 같고 요정도 사람 같을 때가 많다
그래서 봄 처녀의 마음이 삽시간에 가을로 바뀌고
여름의 정렬이 겨울의 어름으로 싸늘해지는 것이다
날아갈 것 같던 출발의 날씨를 생각하면
바다에 대한 의혹이 갈수록 늘어난다
1653년 6월 1일
바타비아에 닻을 내리고
요정의 간사스런 몸짓에 시달린 환상을 재운다
위험을 예상하지 않는 한
배는 어머니가 옆에 있는 요람이어서 좋다
요람은 수평선 너머의 미래를
꿈의 동산에서 무덤처럼 잠재워주니까 좋다
1653년 6월 14일
스페르웨르를 타고 바타비아를 떠난다
스페르웨르란 새매란 뜻이다
섬에 가면 새가 되고 싶듯이
배를 타도 새가 되고 싶은 때가 많다
배는 바다 위를 떠도는 새이니까
새 매 같이 강한 새
밀려오는 고독을 물어뜯는 부리가 있어 좋다
그 예리한 눈이 바람 속을 꿰뚫어 본다
그런 강한 새가 되고 싶다
하지만 그놈도 요정 앞에서는
날개의 힘을 빼앗기고 비참하게 추락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런 것을 예감하기를 싫어한다
1653년 7월 30일
오늘 같이 좋은 날엔
그리운 것들이 신기루를 타고 날아온다
그러나 저녁 무렵 대만 해협을 빠져 나올 때
신기루는 바다 저 편으로 사라지고
폭풍이 해상의 밤을 길게 잡아 달렸다
1653년 8월 1일
이른 아침 안개 속을 더듬어
섬 근처에 와 있음을 알았다
물이 깊어 닻은 내릴 수 없고 긴 시간 떠돌아야했다
불붙은 뗏목 하나 우리 배 가까이 떠내려와
부딪칠까 겁이 났는데 다행히 뗏목의 불은 멀어지고
다시 기다란 밤이 별도 없이 찾아온다
흔들리는 선실에서
펜촉에 흘러가는 잉크가 항해사의 고독을 달래듯
글자를 따라가며 잔잔한 소리로 속살거린다
어디로 가는지 모르지만 끝없이 가볼 거라고
등불 밑이 고향의 안마당 같다
1653년 8월 11일
열 하루 동안 폭풍우에 시달리면서도
대만 해협을 벗어나지 못했다
마귀의 독침에 찔린 것이다
점점 바람과 물의 싸움이 거세 진다
여기서는 신도 마귀에 사기 당하는 것이 아닌가 의심할 정도다
그러나 참아라 참아라 한다
그리고 화살처럼 꼿꼿해라 한다
1653년 8월 14일
사흘동안 돛만 올렸다 내렸다했다
그때마다 새매 스페르웨르는 숨이 끊어질 듯 허덕였다
이제 하늘에 맡기는 수밖에
요정의 겁탈이라도 할 수 없다
돛을 모두 활대(橫木)에 걸고 바람부는 대로
파도치는 대로 내버려둔다
바다를 이기려면 순응하는 수밖에 없는데
자꾸 피하려하니 빠져나갈 길이 없다
패배와 같은 승리 그런 것은 없을까
바다 한가운데서 바다를 피하기란 어렵다
호랑이 굴로 들어온 머리를 좌우로 흔들어본다
흔들수록 머리통이 허수아비 같다
1653년 8월 15일
운명이 결정되는 날이다
8월 15일 바람이란 바람은 모조리
아니 지상의 바람까지도 모여들어 가세한 듯
선원들의 말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온통 파도 소리뿐
돛을 올릴 생각조차 못하겠다
어느새 바다 물이 선실에까지 밀려왔다
위험을 느낄수록 당황한다
작은 배가 떠내려가고
고물(船尾)망원대가 떨어져 나가고
이번엔 하늘처럼 믿었던 이물(船頭)이 맥을 못 춘다
속수무책이다
선원들의 짐을 하나 둘 바다에 던진다
선원들은 갑판 위에서 아우성이다
모두 버린다 버리는 순간 순간 떠오른다
그러나 침묵은 신을 초대하는 호소다
모두 하늘에서 밧줄이 내려오는 기적을 바란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폭우는 밧줄이 아니었다
실망의 소나기였다
실망이 집더미만 할수록 네가 산더미처럼 밀려온다
이때 파도가 고물을 넘어 들어와서
갑판 위에 있던 선원들을 쓰러트린다
선장은 헛소리 지르듯 외친다
"듣거라 곧 돛대를 배 밖으로 잘라버릴 테니
이제부터 신의 말에 귀를 기우리라
우리는 이 순간부터 황천의 객이 되어
모든 지식도 기능도 노력도
소용없는 물거품이 되고 말았소"
절망의 소리다
두 번재 모래시계가 쓰러진 밤 열 시
파도 소리를 헤치고 들려오는 소리
"육지다! 육지!"
누구의 헛소리인가
하지만 너를 만날 것 같은 소리
이것은 요정의 소리라도 좋다
뭍에서 사기 당할 때마다 느끼던 달콤한 소리
"육지다! 육지!"
항해 중 갈매기 한 마리만 봐도 반가운데
이렇게 어려운 상황에 섬이라니
이건 천운이다 천운!
암흑과 폭풍우 때문에 이곳이 어딘지 분간은 못해도
앞을 가로막고 있는 것은 분명 섬
그러나 바다의 깊이는 밑 없는 하늘 같고
폭풍은 비를 몰고 분노는 또 다른 분노를 일으킨다
파도가 사나워서 상처 입은 배의 요동을 막지 못한다
거듭 거듭 밀려오는 파도
이번엔 세 겹의 산이 간격도 없이 밀어닥친다
배가 예리한 칼에 잘리는 무처럼 잘린다
선창에 쓰러졌던 선원들은
빠져나올 겨를도 없이 물에 빠지고
갑판 위에서 비틀거리던 선원들은
파도 속으로 뛰어들고
나머지 선원들도 파도에 휩쓸려 간 곳이 없다
그들 중 15명은 바닷가에 밀렸는데
모두 홀랑 벗겨진 채로 있다
그들은 깨지고 찟기고 으스러져
하나도 성한 몸이 아니다
요정의 잔인성이 강인한 인간의
의지를 할퀴고 물어뜯은 것이다
이들밖에 살아남은 사람이 없는가 했는데
이쪽 저쪽에서 살려달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렇지만 깜깜한 해상에서는 보이는 것이 없었고
그렇다고 도와 줄 수도 없었다
파도 소리 그 요란한 소리
생명을 잡아가며 내는 소리와
잡혀 먹히는 자의 절규 그 외엔
밤바다 위에 존재하는 것이 없었다
1653년 8월 16일
아침 동이 틀 무렵
바다는 어젯밤의 요동을 숨기고 있었다
그것이 미웠지만 바다에 사는 사람은
그것을 미워할 수가 없다
소리를 질러 더 살아남아 있는 자를 확인하려하나
음성은 발 밑으로 떨어져 모래밭에 숨는다
풀밭까지 기어오른 사람
모래밭에 밀려난 사람
아직도 물 자락에 잠긴 사람
모두 서른 여섯
대개가 중상을 입고 쓰러져 있다
파도는 밀려가면서 몰라라한다
안타까워하는 기색이 없다
그러나 거대한 힘에 선원들은 손을 들고
아무 소리 못한다
낡은 조개껍질만치도 안 보이나보다
누가 이 허망을 달랠 수가 있을까
떠날 때 64명이던 것이 36명
남은 자들의 비통함은 말할 수 없다
파선된 배 조각에 끼어있던 사람을 끌어낸지
세 시간만에 그 사람은 죽고 다시 바다는 조용해진다
선장 에그베르츠(Egbertz)가
바닷가에 시체로 밀려 있어 인근에 묻고
찔레꽃 몇 송이 꽂아놓는다
모두 유실되고 말았다
먹을 것! 마실 것!
아무것도 눈에 띄지 않는다
사흘이 되어도 아무런 대책이 서질 않는다
여기가 무인도는 아닌지?
그들은 뭍에서의 표류가 시작되는 순간이다
이렇게 하멜은 기록하기 13년간
유배와 감금으로 이어지고
서른 여덟이 스물 두명으로 되었을 때에도
하멜은 기록을 멈추지 않는다
1666년 9월 어느 아침
여덟 명의 선원을 데리고 읍성을 빠져나간다
표류된지 14년간의 애사 하멜의 표류기
<난선 제주도 난파기 蘭船濟州島難破記)
그 원고의 반출
파도는 그들의 배 스페르웨르호를 부숴버렸고
선원 스물 여섯 명을 바다에 빠뜨렸지만
이 막중한 역사의 기록은 빼앗지 못했다
이렇게 바다와 도전했던 사람들은
그 승리의 기록을 배에 실었다
도전의 의지
나는 다시 배에 올라 허망한 구름을 보지만
결코 허망한 것이 아니었음을
허망을 더듬는 투망 속에서 찾아낸다
나는 바다 위를 떠도는 나그네요
바다의 넓은 허망 속에 투망을 던지는 마술사다
생동감에 넘치는 물고기는
나의 긴 여로에 편승해서 싱싱한 시를 먹고 산다
* 헨드릭 하멜 Hendrik Hamel (? ~ 1692)
화란의 선원. 스베르웨르(Sperwer)호의 서기
* 1653년 1월 하멜은 선원 64명과 일본 나가사끼를 향해
동인도회사의 용무를 띠고 본국을 떠났다.
항해 중 폭풍을 만나 1653년 8월 15일 제주도에 표착하였다.
이들은 다음해 5월 서울로 호송되어 그보다 먼저 조선에
와있던 화란인 박연(朴燕)의 확인을 받고 감금된 채
13년을 지내다가 1666년 9월 탈출하여 일본을 거쳐
1668년 7월 본국 암스텔담으로 돌아갔다.
그후 하멜은 조선에서 억류되었던 체험을 <난선 제주도
난파기 蘭船濟州島難破記>를 저술함으로써 처음으로
우리나라가 세계에 소개되었다.
- 이생진 시집 <먼 섬에 가고 싶다>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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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조선의 비밀 - 하멜표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