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권오용(경북 영주시)
바람이 머문 자리는 민들레꽃이 피지만 바람처럼 가버린 어머니가 안 계신 집은 빛이 없는 동굴 같은 적막감만 있었다.
어머니는 47세에 우리 6남매를 남겨 놓으시고 곁을 떠나셨다. 처음 머리가 조금씩 아프실 적에 동네에서는 바람머리라고 하면서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정도가 심해도 능력 없고 융통성 없으신 아버지는 병원 한번 약 한 첩 안사다 주셨다. 하긴 화전민의 후예처럼 가난에 이골이 난 아버지의 능력 밖이니 병원이고 신약이다 사치로 들리던 때이다. 어머니가 안계시니 동생들은 기가 죽어 앉지도 서지도 못하는 불안 속에 있었다. 마치 밭 갈러 가는 어미 소를 떠나보낸 송아지처럼 멍하니 있을 뿐이었다. 잘 입는 것은 고사하고 몸도 억지로 가릴 무명치마에 감자와 조, 보리밥으로 끼니를 때우기도 하고 굶다시피 가신 어머니다. 이런 뼈저린 가난 속에 부에 대한 동경이 왜 없겠는가? 서울 사는 이모를 늘 부러워하시면서 너는 어른이 되면 서울 가서 돈 많이 벌어 그렇게 잘 살라는 말을 자주 하시곤 했는데 그 때 어린나이에는 못 가본 서울이 어떤 곳인지도 몰랐고 아마 지금 우리 집처럼 끼니 걱정을 안 하겠지 정도로만 생각했다. 그 때 어머니는 딱 한번 서울에 가셨는데 그 때도 머리가 아파 서울 변두리에서 돌팔이로 있는 작은 이모 댁에 침 맞으러 며칠 다녀온 게 전부다. 20호 정도 사는 우리 동네 보다 한 백배정도 될 걸로 짐작하면서 어린 시절을 보냈는데 지금 생각하니 정말 우물 안의 개구리였다. 국민학교 저학년 여름 방학 때 큰집에 다녀왔다는 옆 짝이 얘기하는 것 중에 가장 맛난 음식을 먹었다고 자랑을 하길래 그 음식 이름을 물어보니 들었는데 잊어버렸다고 하면서 그냥 국수에 팥죽 물을 부었는데 그렇게 맛이 좋다고 했다. 지금 생각하니 짜장면이다. 이런 것도 모르고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그래도 그때가 가장 즐겁고 신나는 때였다는 생각을 한다.
바람이 없어야할 음력 팔월 열사흘날 가끔 빗방울을 동반한 바람이 세차게 불면서 한참 영글어 갈 곡식을 시샘이라도 하는 듯 바람이 몹시 불던 날, 어머니는 길길이 뛰면서 머리를 감싸고 우셨는데 이장 집에 가서 택시비와 약간의 병원비를 빌려가지고 아버지와 영양 병원으로 실려 가신 어머니는 주사 한방에 저 세상으로 가버린 어처구니없는 의료 사고였다.
지금 같으면 법에라도 하소연하고 보상비라도 받았겠지만 그때에야 어디에 누구에게 손과 머리를 빌리겠는가. 아버지는 추수도 않으시고 매일 동네 주막에 가서 외상술로 취해 하루를 보내고 하시니 갓 스무 살을 넘긴 나는 봉제공장에서 잔심부름을 하는 시다이니 힘없음이 한스럽고 세상이 더럽고 원망스럽다는 생각만 했으니 아버지를 말릴 힘도 없었다. 동생들은 멀리 떨어져 있는 내가 보살필 여력이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는 계모를 맞이하였고 우리 남매를 마음의 감옥에 가두는 것으로 산골 생활의 나날은 검정으로 칠 했었다. 이런 아픔도 시간이 주는 치유의 약으로 다 스쳐가 버린 바람이 되었다. 바람은 광장을 지날 때에도 티끌하나 남기지 않고 다 쓸어가 버리듯이 우리 집의 아픔도 다 쓸어가 버리고 지금 시골 고향집에는 그 때 어머니가 친정에서 가져다 심은 재래종 국화가 예쁜 열매를 맺고 꽃피울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허리 굽고 지팡이에 의지하신 아버지는 조각처럼 앉아 계시는 걸 지난 추석 벌초 때 보면서 우리 남매의 살아가는 소식을 낱낱이 전하면 잘 듣지 못하시고는 기억이 희미해서인지 묻고 또 묻곤 하신다. 바람은 어느 것 하나 지나치지 못하고 알맹이 없이 불어가듯이 원망스럽고 좁은 가슴으로만 보이던 아버지도 시간이 바삐 끌어주는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어머니처럼 바람같이 내 곁을 떠나실 것이기에 추석 차례를 마치고 돌아오는 고향길이 더욱 무거웠다. 추억을 산 귀퉁이에 두고 다니겠지만 어머니를 돌아가시게 한 그 때 바람은 내 가슴에 머물고 있어 벼가 익어 가는 가을 벌판은 늘 어머니를 생각하게 한다. 풍요함을 모르시는 어머니께 흰쌀밥을 한상 드리고 싶은 간절함이 있지만 이 넒은 사방 천지에 어디 계신지 바람에게 묻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