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다양한 종류의 마음이 필요합니다
장재희 (에바다장애인복지관, 팀장)
자폐인 동물학자, 템플 그랜딘
사회사업가는 언제나 ‘당사자 스스로 자기 삶을 변화시킬 힘과 가능성을 지닌 존재’임을 분명히 인식합니다.
그러나 당사자가 자기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일상에서 마주하는
크고 작은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심리적 힘이 필요합니다.
이를 가능케 하는 것이 바로 ‘경험’입니다.
당사자가 작은 일이라도 스스로 해낸 경험은 자존감을 회복하게 하고, 점차 자신감을 키우며,
삶에 대한 태도와 기대를 변하게 합니다.
이런 과정에서 형성되는 힘이 바로 ‘탄력성(resilience)’입니다.
- <사회사업개론> (김세진, 구슬꿰는실, 2025)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영화가 있습니다. 자폐인 동물학자의 이야기를 다룬 <템플 그랜딘>입니다.
이 영화는 OTT 플랫폼 소개 글처럼 단순히 ‘자폐증을 이겨낸 감동 실화’가 아닙니다.
한 사람의 생애를 통해 사회사업에서 말하는 ‘탄력성’을 잘 설명해 주는 영화입니다.
템플의 어린 시절, 의사는 그녀가 평생 말을 할 수 없고 시설에서 살아야 한다는 절망적인 진단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템플의 어머니는 그녀의 가능성을 믿고 딸의 성장을 위해 끊임없이 교육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녀를 세상으로 밀어 넣었습니다.
그런 템플을 키워 낸 조력자는 어머니만이 아니었습니다.
템플의 다름을 있는 그대로 이해 해주었던 이모와 고등학교 시절 그녀의 천재성을 알아봐 준 은사 칼록 선생님,
학창 시절 곁을 지켜준 유일한 한 명의 친구,
그리고 청소년기와 성인이 된 이후의 일상 속에서 마주한 크고 작은 실패와 성공을 경험하게 한 여러 사람이 있었습니다.
예측 불가능한 자동문을 통과하는 경험부터 무서워하던 동물에게 다가가는 일,
스스로 안정감을 위해 압박 기계를 만들어 낸 경험들은 템플의 삶을 자신의 것으로 채워가는 데 충분한 경험이었습니다.
이러한 경험으로 템플은 어려움에도 적응하고 회복하며 더 나아가 성장할 수 있는 ‘탄력성’을 가진 사람이 되었습니다.
대학 시절 룸메이트의 신고로 압박 기계를 강제로 철거당할 위험에 빠졌을 때,
템플은 포기하는 대신 실험을 통해 기계의 효과를 입증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대학원 시절, 남성이 주를 이뤘던 축산업계에서 여성이라는 이유로 차별받으면서도 굴하지 않고 끈질기게 도전했습니다.
템플은 누구보다도 소를 좋아했지만, 인간을 위해 소가 도축되어야만 하는 현실을 부정하지는 않았습니다.
대신 살아있는 동안 만큼은 소를 존중할 줄 알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러한 생각을 바탕으로 템플은 소를 위한 도축 시설을 설계하고, 축산업계에서 이를 도입하도록 설득해 냅니다.
그 결과 템플은 세계적인 동물학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수많은 조력자가 함께했기에 가능했던 템플의 변화는 그녀 혼자서라면 결코 이루지 못했을 겁니다.
그럼에도 진짜 변화를 이루어 낸 것은 결국 템플 자신이었습니다.
우리 삶도 같습니다. 진짜 변화는 주어진 환경에서 개인이 스스로 부딪히며
크고 작은 경험들을 이뤄갈 때 시작됩니다.
비록 속도가 조금 느리고 방법이 다를지라도 도전과 실패의 과정을 이루며 살 때,
자신 삶의 주인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싱글맘, 엘라
만약, 템플에게 오늘날 현장에서 흔히 쓰이는 ‘문제 중심 서비스’가 적용되었다면 어땠을까요?
아마도 템플의 ‘자폐 행동’에서 비롯된 문제를 없애기 위해 여러 서비스를 기계적으로 연계했을 겁니다.
불안으로 인해 자리에서 빙빙 도는 행동을 보일 때마다 이를 통제할 약물을 처방하고,
소리 지르는 행동을 교정하기 위해 인지행동치료를 적용했을 겁니다.
대학 시절 템플이 만든 압박 기계는 당사자 동의 없이 철거되어 템플의 의견은
그저 자폐인의 통제해야 할 어려운 행동으로 묵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물론, 서비스 연계 자체를 문제 삼는 것은 아닙니다.
당연히 필요한 서비스는 당사자에게 연결되어야 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당사자의 의견이나 삶을 존중하지 않는 서비스 연계는
템플이 지닌 뛰어난 재능을 강점으로 키워 세계적인 동물학자로 배출하기는커녕,
끊임없이 교정되고 치료를 받아야 하는 무력한 수혜자로서 고립시켰을 겁니다.
<레디컬 헬프(Radical Help)>에 소개한 ‘엘라’사례가 단선적 지원인 ‘문제 중심 서비스’의 한계를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젊은 싱글맘 엘라는 주거, 정신 건강, 육아, 실업 등 복합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기존의 영국 서비스 시스템은 엘라의 각 문제를 개별적으로 다루는 일에만 집중했습니다.
주거 문제에는 주거 담당자가, 정신 건강문제에는 정신 건강 서비스가, 실업 문제에는 고용센터가 지원하는 식이었습니다.
어린 자녀 두 명과 반려견 한 마리를 혼자 돌보고 있던 싱글맘 엘라가 영국에서 받는 서비스는 무려 70개가 넘었지만,
정작 삶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엘라는 수많은 기관 담당자들을 만나고, 끝없는 서류 작업과 약속을 소화하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파편화된 서비스는 엘라의 삶을 총제적으로 달라지게 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녀는 각 문제 속에서 ‘수혜자’ 역할에 갇히고, 끊임없이 서비스를 ‘받기만 하는’ 존재가 되어갔습니다.
이는 엘라의 내재된 강점이나 잠재력을 발견하기보다, 그녀를 ‘문제 덩어리’로 규정하고 의존성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결국 엘라는 ‘도움받기’가 일상이 되었지만, 스스로 삶을 변화시킬 동력이나 역량은 오히려 약화되는 악순환에 빠졌습니다.
- <사회사업개론> (김세진, 구슬꿰는실, 2025)
코텀이 엘라의 사례를 통해 말했듯이, 조각난 서비스 방식은 현대 사회의 복합적 문제를 해결할 수 없고,
결코 사람을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오히려 당사자를 무력하게 만들고, 공동체로부터 고립시킨다고 하였습니다.
코텀은 단순히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을 넘어 사람들이 서로에게 의지하고 배우며 성장할 수 있는
관계와 환경을 조성하는 일을 문제 해결의 근본으로 보았습니다.
템플이 어머니라는 단단한 지지망, 이모의 농장이라는 새로운 경험,
여러 시행착오가 있었던 학창시절을 경험하고 스스로 성장해 나갔던 것처럼 말입니다.
이처럼 당사자가 고유한 모습 그대로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될 때, 모두가 자기 삶의 주인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겁니다.
템플 그랜딘이 실제 강연에서 “세상에는 다양한 종류의 마음이 필요합니다”라고 강조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생각해 봅니다.
템플이 강조한 문장은 우리가 현장에서 만나는 당사자와도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템플이 소의 눈높이에서 바라보았기 때문에 이뤄낸 성과가 있듯이,
여러 가지 어려움 속에서도 열심히 삶을 이어온 엘라의 시선과 방식 속에서도 인생의 지혜와 강점이 숨어 있을 겁니다.
우리가 만든 좁은 서비스 기준에 당사자를 끼워 맞추며 결함이나 문제를 찾아낼 것이 아니라,
그들이 삶을 살아가기 위해 발휘해 온 여러 강점과 가능성을 찾아내야 합니다.
우리가 만나는 모든 당사자의 삶에는 그 삶만의 새로운 가능성과 방향이 존재한다고 믿습니다.
그렇기에 사회사업가는 당사자가 가진 고유한 삶의 방식과 숨겨진 강점을 끝까지 신뢰합니다.
https://cafe.daum.net/coolwelfare/OX67/232
첫댓글 재희 팀장님! 작년 11월 사회사업개론 강독회에서 뵈었는데 기억하실까요?
이렇게 글로 다시 만나니 반갑습니다^^
좋은 글 써주셔서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글쓰기 모임 응원합니다👍
단비 선생님 안녕하세요!!
그럼요, 당연히 기억합니다. 같이 글도 읽고, 공부하고, 밥도 함께 먹었는걸요!
응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단비 선생님이 응원해주신 덕분에 마무리도 잘 해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도 늘 응원하겠습니다. 언제나 좋은 날 되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