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림사(祇林寺) & 경주 양남 주상절리군
2024년 1월 6일
청량사 신도회 분황사, 불국사, 기림사 사찰순례 동참
기림사(祇林寺)는 인도 범마라국의 광유성인(光有聖人)에 의해 신령스러운 거북이가 물을 마시는 형국 위에 임정사(林井寺)라 이름하여 개산(開山)하고, 급수봉다(汲水奉茶, 오종수를 길어 부처님께 차를 다려 공양함)와 급수양화(汲水養花, 오종수를 길어 오색화를 키워 냄)를 수행법으로 삼았다고 한다.
‘삼국유사’에는 신문왕(681~692 재위)이 문무대왕릉이 있는 동해 바다에서 용왕으로부터 만파식적(萬波息笛)과 옥대(玉帶)를 선물로 받고 돌아오는 길에 기림사 서쪽에서 쉬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따라서 창건 연대는 적어도 신문왕대 이전으로 올라간다.
선덕여왕 12년(643) 원효스님께서 중창한 뒤석가모니 부처님께서 가장 오랫동안 머무셨던 기원정사의 의미인 기(祇)자와 옛 임정사의 임(林)을 더해 기림사(祇林寺)라 개칭하였다.
<경주 기림사 대적광전(慶州 祇林寺 大寂光殿) - 보물, 조선 인조 5년(1628)>
대적광전은 지혜의 빛으로 세상을 비춘다는 비로자나불을 모셔 놓은 법당을 가리킨다. 선덕여왕 때 세워진 후 여러 차례에 걸쳐 수리한 것으로 지금 건물은 조선 인조 7년(1629)에 크게 고쳤을 때의 것으로 보인다.
규모는 앞면 5칸·옆면 3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다. 겉모습은 절의 중심 법당답게 크고 힘차며 안쪽은 비교적 넓은 공간에 정숙하고 위엄있는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공포에 조각을 많이 넣어 17세기 건축 흐름을 알 수 있고, 특히 수리를 할 때 옛 모습을 손상시키지 않아 중요한 건축사 연구 자료가 되고 있다
<경주 기림사 소조비로자나삼불좌상(慶州 祇林寺 塑造毘盧遮那三佛坐像) - 보물, 조선시대>
기림사 대적광전에 모셔진 불상인 소조비로자나삼불좌상은 향나무로 틀을 만든 뒤 그 위에 진흙을 발라 만든 것이다.
중앙에 비로자나불을 모시고 좌우에 약사(藥師)와 아미타불(阿彌陀佛)을 협시로 배치한 형태이다. 근엄하면서도 정제된 얼굴, 양감이 풍부하지 않은 신체의 표현, 배부분의 띠로 묶은 옷 등에서 16세기 초에 만들어진 불상으로 추정된다.
<기림사약사전 (祇林寺藥師殿) -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조선시대>
이 건물은 1600년대 이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기림사 약사전이다. 사적기(寺蹟記)에 대적광전(大寂光殿) 동쪽에 위치하고 있다고 기술되어 있으며, 중건기(重建記)에는 조선 효종(孝宗) 5년(1654)에 중창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숙종(肅宗) 4년(1678) 약사법당을 중수하였다는 기록이 전하므로 약사전은 1600년대 이전에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얕은 기단 위에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건립되었으며 지붕은 옆에서 볼 때 사람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多包) 양식으로 꾸몄다. 일반적으로 측면에 출입문을 설치하는 것이 통례(通例)지만, 여기서는 배면에 문을 둔 것이 이색적이다.
전체적으로 겉모습이 부드러우면서 균형이 잘 잡혀있는 건축물이다.
<약사전 헌다벽화>
1654년 중창 당시 그려진 것으로 추정하니 우리나라 유일의 가장 오래된 전내 헌다벽화이며 기림사 창건기에 의하면 급수봉다(汲水奉茶)의 수행을 하는 사라수왕이 급수유나의 소임을 맡아 광유성인에게 헌다하는 모습이다
좌측부터 사라수왕 광유성인 승열바라문의 배치이다.
삼월삼짇날과 9월9일 경주 삼화령 미륵부처님께 차를 바친 충담스님의 모습이 연상되기도 한다.
※기림사의 차 문화로는 약사전 내 헌다벽화와 다섯 종류의 물맛이 난다는 오종수가 전해온다.
※※한국의 차 역사는 일반적으로 신라 흥덕왕 3년(828) 김대렴이 당나라 사신으로 갔다가 차씨를 가져와 지리산에 심었다고 전해온다. 그러나 이보다 109년이나 앞서 신라의 왕자 김지장 교각 스님(696~794)이 당나라 구화산에 신라의 차씨 '금지차(金地茶)'를 갖고가 심은 기록이 중국 문헌인 청양헌지·구화산지·개옹다사 등에 전해온다. 당시 기림사 등에서 융성한 신라의 차 문화가 당나라로 건너간 것을 증명하는 기록이다.
중국 구화산에는 김교각 스님이 심은 차나무가 아직도 남아 있고, 중국 스님들은 '금지차' 또는 '공경차'라고 부르며 상품으로 판매하고 있다.
인도 천축국(天竺國)의 승려 광유(光有)성인이 이곳에 와서 창건할 때 임정사(林井寺)라는 우물 정(井)로 절이름을 지었듯이 이 절의 事蹟記에 기록되어 있는 오종수(五種水) 등과 함께 도처에 차유적(茶遺蹟)들이 산재(散在)하고 있으며, 다섯가지 물(五種水)은 차(茶)를 달이는데 최고의 물로 알려져 있다.
1. 중방 장군수(將軍水)
중앙 응진전 앞에 위치하며 마시면 기골이 장대해지고 힘이 생기니 일본인들이 탑을 얹어 매몰하였다고 전함. 수맥탐사결과 탑 밑 열십자 방향으로 물이 흐르고 있으며 단 맛이 난다고 전함
2. 동방 오탁수(烏啄水)
동쪽 방향 옛 동암 자리에 있으며 까마귀가 쪼아서 판 샘이라 하여 오탁이라 칭함. 식수로 사용하였고 지금도 물이 흐르고 있음
3. 남방 명안수(明眼水)
사천왕문 앞 노송 밑에 흐르는 물을 마시면 눈이 밝아진다 하여 사람들이 줄을 이어 이 물을 사용하였으며 지금은 흔적만 있으나 그 자리에는 수맥은 존재하고 있음
4. 서방 화정수(華井水)
화정당 옆에 자리하고 있으니 우물의 형태를 간직하고 사용이 가능한 상태임. 폐의 기운을 다스려 마시면 마음이 편안해지므로 화정수(和靜水)라 표기 하기도 함
5. 북방 감로수(甘露水)
북암 옆자리에 위치하며 몇 해 전까지 사용하였으나 덮어버린 상태임. 정조때 문신인 성대중(1732~1812)의 동도칠괴(東都七怪)에 기록된 기림사의 감천이니 유천(乳泉)의 일종으로 차수(茶水)중 제일로 꼽고 있음
<경주 기림사 건칠보살반가상(慶州 祇林寺 乾漆菩薩半跏像) - 보물, 조선 연산군 7년(1501)>
경주 기림사 건칠보살반가상(慶州 祇林寺 乾漆菩薩半跏像)은 경상북도 경주시 양북면의 기림사에 모셔진 조선시대 건칠보살좌상이다. 건칠불이란 나무로 골격을 만든 뒤 삼베를 감고 그 위에 진흙을 바른 다음 속을 빼낸 불상을 말하는데, 우리나라에는 남아 있는 예가 매우 적어 이 불상의 가치가 더욱 크다.
타래머리 위에 보관(寶冠)을 따로 만들어 올렸으며 관 표면에는 덩쿨무늬가 화려하게 새겨져 있다. 얼굴은 둥글고 풍만하며 눈·코·입 등이 단아하게 묘사되어 보살상의 특징있는 얼굴을 만들어 내고 있다. 양 어깨에는 천의(天衣)를 걸치고 있으며, 목에는 3가닥의 장식이 달린 목걸이를 하고 있다. 가슴 부분에 있는 독특한 띠매듭은 조선시대에 나무로 만든 불상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왼손은 대좌(臺座)를 짚고 다리는 대좌 아래에 내린 반가좌(半跏坐)의 자세를 취하고 있는데, 이런 자세로 보아 관음보살을 형상화한 것으로 짐작된다. 전반적으로 얼굴 모습이나 체구는 당당한 편이나 손과 발이 작게 만들어져 비례감이 떨어진다.
보살상의 대좌에 홍치(弘治) 14년(연산군 7년, 1501)에 만들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으며, 유례가 드문 건칠불이라는 점에서 매우 귀중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경주 양남 주상절리군(慶州 陽南 柱狀節理群) - 천연기념물>
자연유산 / 천연기념물 / 지구과학기념물 / 지질지형
양남 주상절리군은 신생대 제 3기의 에오세*(5,400만 년 전)에서 마이오세**(460만 년 전)사이에 경주와 울산 해안 지역의 활발했던 화산 활동에 의해 형성된 바위의 기둥 모양의 틈이다. 주상절리는 지표로 분출한 용암이 식을 때 수축 작용에 의해 수직의 돌기둥 모양으로 갈라져서 생긴 틈을 말한다.
이곳 해변의 1.7km에 걸쳐 10m가 넘는 정교한 돌기둥들이 분포하는데, 기둥의 형태가 주름치마, 부채꼴, 꽃봉오리 모양으로 다양하다. 일반적으로 절리가 지표면에 수직으로 발달하는 데 반해 이곳은 수평 방향의 절리가 흔하고 부채꼴 모양의 절리도 나타나는 점이 특징이다. 또 한 곳에 세 방향의 절리가 발달하여 서로 만나는 것도 드문 경우이다.
주상절리군 주변에는 몽돌길, 야생화길, 등대길, 데크길 등 주상절리가 보이는 해안을 따라 산책할 수 있는 파도소리길이 조성되어 있다.
* 에오세 : 지질 시대의 신생대 제3기를 다섯으로 나눈 가운데 두 번째에 해당하는 시대. 기후는 온난 · 습윤하였고 산림이 우거져서 석탄층이 많이 퇴적하였다.
** 마이오세 : 신생대 제3기를 다섯으로 나누었을 때 네 번째로 오래된 시대. 지금으로부터 2,400만 년 전부터 520만 년 전 까지의 기간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