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 4,32-34.39-40; 로마 8,14-17; 마태 28,16-20
+ 찬미 예수님
지난 금요일 성모의 밤에 수고해 주신 분들께 다시 한번 깊이 감사드립니다. 그날 강론 중에 제가 “꽁꽁 얼어붙은 한강 위로 고양이가 걸어 다닙니다.”라고 말씀드렸는데, 마침 그때 제 뒤로 성모님 동산에 고양이가 걸어갔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오늘 혹시 제가 밤양갱 얘기를 하면, 밤양갱이 걸어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밤양갱’이라는 노래 들어보셨나요? 올 초에 슈퍼마켓을 가도, 편의점을 가도 그 노래가 나온 때가 있었는데요, 가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떠나는 길에 네가 내게 말했지 너는 바라는 게 너무나 많아
아냐, 내가 늘 바란 건 하나야 한 개뿐이야, 달디단 밤양갱
달디달고 달디달고 달디단 밤양갱…”
발랄하고 재미있는 멜로디에 비해 가사는 슬픈데요, 헤어지면서 남자가 여자한테 말합니다. “너는 바라는 게 너무나 많아.” 여자는 이 말에 ‘그래, 미안해’라고 말하지만, 속으로는 답답해합니다. ‘아냐, 내가 늘 바란 건 하나뿐이었어.’
그러고는 밤양갱을 얘기하는데요, ‘상다리가 부러지게 차린 음식처럼 너무나 많은 걸 내가 원한다고 너는 생각하지만, 내가 바란 건 사실 딱 하나야.’ 그런 의미입니다. 그 하나가 뭘까요? 사랑입니다. 밤양갱이 상징하는 것은 사랑입니다.
오늘은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우리는 그간 사순시기와 부활시기를 지내면서 토마 사도와 함께 부활하신 예수님을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라 고백했습니다. 지난주에는 성령강림 대축일을 지내며, 주님이신 성령을 내 안에 모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각각 주님이라 고백한 하느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은 어떤 관계이실까요? 이에 대한 고백이 삼위일체 대축일 전례입니다.
흔히 삼위일체 교리가 어렵다고들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려운 교리가 너무나 많아 그래서 이해가 안 가.”라고 말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아냐, 내가 늘 바란 건 한 개뿐이야.” 그 하나가 뭘까요? 사랑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은 대상이 있어야 합니다.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성자를 위해 모든 것을 내어주시는 성부의 사랑이 성령이십니다. 이 성령은 또한 내 뜻대로가 아니라 모든 것을 아버지 뜻대로 하시는 성자의 사랑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아들딸입니다. 이것이 우리 신앙의 핵심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받는 아들딸이고 우리는 서로 형제자매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아들딸이 된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당신 형제로 삼아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예수님과 형제로, 아버지의 자녀로 묶어 주시는 분이 성령이십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을 자녀로 삼도록 해 주시는 영을 받았습니다. 이 성령의 힘으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하고 외치는 것입니다.”
여기서 ‘아빠’는 예수님께서 쓰신 아람어인데요, 우리말 ‘아빠’와 똑같이 ‘아빠’로 발음합니다. 뜻도 똑같습니다. 어린아이가 아버지를 다정하게 부르는 말입니다.
성경에 이 말은 딱 세 번 나오는데요, 오늘 2독서와 영성체송, 그리고 나머지 한번은 게쎄마니 동산에서 예수님께서 기도하실 때입니다. “아빠! 아버지! 당신께서는 무엇이든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소서. 그러나 제 뜻대로 하지 마시고 당신 뜻대로 하소서.”(마르 14,36)
우리가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른다는 것은, 어린아이가 아빠를 부르듯 신뢰하며 부르는 것이지만, 결국 아빠의 뜻에 따르겠다는 더 큰 신뢰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내 청을 들어주시겠지’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나 ‘내 뜻대로 안 된다면, 아빠의 뜻이 더 좋은 뜻입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이 더 큰 믿음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성령께서 몸소,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임을 우리의 영에게 증언해 주십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영은,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임을 알고 있습니다.
주님의 기도를 바치면서 우리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기도하는데요, 이는 내 안에 계신 성령께서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도록 인도하는 것이고,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라 부르지 않고 “우리 아버지”라 부르는 까닭은, 우리가 형제들과 함께, 그리고 우리 형제이신 예수님과 함께 그 기도를 바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기도를 시작하고 마치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고, 고해소에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죄를 용서받습니다. 우리가 미사를 봉헌하는 것은 성자께서 성령을 통하여 성부께 바치시는 제사에 참례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처럼 항상 삼위일체 하느님의 신비 안에 살아가면서 그 신비를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우리가 하느님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태아는 엄마 뱃속에 있으면서 ‘도대체 엄마라는 분이 누구이길래 나를 길러주고 재워주고 나에게 좋은 것만 주나’하고 궁금해할 수 있습니다.
태아가 볼 수 있다면, ‘저 탯줄이 엄마인가보다’ 생각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저기에서 영양분이 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니면 자신을 보호하고 있는 양수가 엄마라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탯줄이나 양수는 엄마가 아니라, 엄마가 나에게 주는 선물의 통로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하느님을 볼 수 없고,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만을 볼 수 있습니다.
아기는 엄마 몸 밖으로 나오면 마침내 엄마를 보게 됩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보려면 하느님 밖으로 나와야 하는데 그런 일은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언제나 삼위일체 하느님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어제 성모의 밤 미사를 봉헌하면서, 성모님께서 삼위일체 하느님의 신비 안에 살아가셨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성부께 의탁하시며 “제 뜻대로 살지 않겠습니다.”라고 고백하셨습니다. 성자께 의탁하시며 “저를 위해 살지 않겠습니다.”라고 고백하셨습니다. 성령께 의탁하시며 “제 힘으로 살지 않겠습니다.”라고 고백하셨습니다.
만일 성모님께서 성부와 상관없이 사셨다면, 가브리엘 천사의 예고에 “싫어요”라고 대답하셨을 것입니다. 성자와 상관없이 사셨다면, “아기만 낳아주고 그 다음은 제 맘대로 살아도 되는거죠?”라고 물으셨을 수도 있습니다. 성령과 상관없이 사셨다면, 가브리엘 천사에게 “잘 찾아오셨어요. 저 말고 누가 그 일을 하겠어요?”라고 말씀하셨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성모님은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제게 이루어지기를 빕니다.”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여기서 주님은 아버지이시고, 말씀은 그리스도이시며, 이루어지게 하시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무한한 사랑의 놀라운 공동체이신 한 분이고 삼위이신 주 하느님,”(찬미받으소서)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 위에, 우리 곁에, 그리고 우리 안에 계십니다.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딱 하나입니다. 사랑입니다. 내가 사랑이듯, 너도 사랑이 되라는 것입니다. 내가 세상에 사랑이듯, 너도 세상에 사랑이 되어주라고 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삼위일체의 신비를 다 이해한 후에 사랑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살아가면서 삼위일체 하느님의 신비 안에서 살아갑니다.
중세의 신비가 마이스터 에카르트의 말을 인용해 드리겠습니다.
“성부께서 웃으신다, 그리고 성자를 낳으신다
성자께서 성부를 향하여 웃으신다, 그리고 성령을 낳으신다.
성부, 성자, 성령께서 웃으신다, 그리고 우리를 낳으신다.”
안드레이 루블료프, 삼위일체 (1411년 또는 1425-1427년)
출처: Angelsatmamre-trinity-rublev-1410 - Trinity (Andrei Rublev) - Wikiped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