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이재수의 난을 아십니까? 제주도민을 핍박했던 프랑스 천주교 신부와 천주교도들의 만행과 그들의 인적사항을 조사해주세요. 그리고 이 만행에 대하여 한국 천주교단이 공식적으로 사죄한 적이 있습니까?
ChatGPT의 말:
ChatGPT
'이재수의 난'은 1901년 제주도에서 발생한 민중 봉기로, 천주교 세력의 횡포와 과도한 세금 징수에 대한 제주도민들의 저항이었습니다. 당시 프랑스인 신부들은 고종으로부터 받은 '여아대(如我待)'라는 증표 즉, [이 증표를 지닌 사람을 나 고종황제를 대하듯 대접해주라]는 표시를 통해 특별한 대우를 받았으며, 일부 천주교 신자들은 이를 악용하여 신당 파괴, 금품 갈취, 성범죄 등 다양한 악행을 저질렀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제주도민들은 '상무사'를 조직하여 천주교의 폐해와 부당한 세금에 저항하였고, 이재수가 새로운 지도자로 추대되어 성당을 불태우는 등 적극적인 행동에 나섰습니다. 프랑스 신부들과 천주교도들은 제주성으로 도피하였으나, 민군들은 악명이 높았던 천주교도 300인을 골라 참수하고 일부 프랑스 신부도 처형하였습니다. 이런 기록이 영화로 제작되어 <이재수의 난>으로 나온 적이 있습니다(이정재 주연, 심은하 조연).
그러나 한국 천주교단이 이 사건에 대해 공식적으로 사죄했다는 기록은 현재까지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보충>
제주에 천주교가 본격적으로 뿌리내린 건 1899년 프랑스 선교사인 페네 Peynet와 보좌인 김원영(아우구스띠노) 신부가 파견되어 제주 본당을 설립하면서부터다. 특히 김원영 신부는 서귀포 하논(한논)을 중심으로 교세를 확장했다. 1900년 6월 12일에 라크루 신부와 김원영 신부가 설립한 한논본당(서귀포 호근동 194번지)이 바로 서귀포 성당의 모태가 되었다. 제주도에 세운 두 번째 천주교 교구였다.
조선시대부터 무속 등 민간신앙이 발달한 제주에서 천주교는 필연적으로 지역사회와 마찰을 빚게 된다. 여기에 기름을 부은 자가 바로 지난 봉세관封稅官 강봉헌姜鳳憲이다.( https://blog.naver.com/martis1/222088044505 서귀진성은 언제 사라졌나?) 평안도 출신의 강봉헌은 천주교인을 고용해 갖가지 종류에 세금을 매겨 거둔다. 가옥 · 수목 · 가축 · 어장 · 어망 · 염분 · 노위 등의 세금은 물론, 심지어 잡초에까지 세금을 징수했다. 고종으로부터 '짐과 같이 여기라 如我待'는 어명을 배경으로 프랑스 선교사와 천주교도는 신목과 신당을 불태우고 도민들에게 금품을 갈취하는 등 만행을 일삼았다. 이에 분노한 제주도민들은 천주교에 대한 반감이 끓어올랐다. 천주교인들의 만행을 조사하기 위해 파견한 찰리사察理使 황기연의 보고서를 보면;
1. 살인, 부녀자 강간 및 강탈, 도둑질 등의 범죄를 저질러도 사람을 죽여도 관가에서 체포하지 못한다(교도들은 마음 내키는 대로 땅을 뺏고 이미 팔았던 땅을 다시 사들일 때도 시세가 올랐더라도 예전에 받은 돈만 치르고 우격다짐으로 되돌려 받는 것이 당연시되었다).
2. 천주교도들을 비방하거나 언쟁을 벌인 사람들을 "천주교를 모독했다"라며 성당에 끌어다가 매를 치거나 가두고, 관에서 체포한 사람을 천주교도라고 하여 도중에 빼돌리거나 관가의 감옥에 갇힌 사람을 강권으로 풀어주기도 한다.
3. 제주도의 오래된 신당을 파괴하여 토속신앙을 유린했다.
- 《황성신문》 광무 5년 6월 21일 자 //[출처] S# 18 이재수의 난이 시작된 곳, 서귀포 성당|작성자 서귀포LaB
말 그대로 프랑스 신부들은 치외법권의 지위를 누렸으며 천주교도들의 범법 행위에 관리들은 방관했다. 양민 폭행 치사 사건이 바로 서귀포성당에서 벌어지고 '이재수의 난'이라고 알려진 신축 민란辛丑民亂의 도화선이 되었다. 사건은 강봉헌이 제주로 온 1900년 6월에 시작된다. 김원영 신부는 제주 남부인 하논에 본당을 설치하려 했으나 인근 마을 주민들이 반대하며 나섰다. 마을 주민들은 천구교당 반대하는 목패를 마을 입구에 세우고 제주 목사에 소장을 제출하기에 이른다. 이듬해인 1901년 2월 김원영 신부를 비롯한 40명의 교인들은 천주교당을 반대하는 마을 훈장이자 유지인 현유순 집에 들이닥쳤다. 천주교도들은 현유순과 오신락 노인을 잡아 서귀포 교단-하논본당-으로 끌고 가 폭행-고문이라는 주장도 있다-을 한다. 이 와중에 오신락 노인이 숨졌다. 대정 군수 채구석蔡龜錫은 오신락의 시신을 부검했고 폭행에 의한 타살이라고 결론 내린다. 이때 관노였던 이재수도 동행했다고 알려졌다.
이 부분에서 서귀포성당 측의 입장은 서로 엇갈린다. 오신락 노인이 폭행당한 것은 맞지만 그가 양심의 가책을 느껴 자살했다고 주장한다. 양측 주장의 사실 관계를 떠나 이 사건은 불이 번지듯 일파만파 확대된다. 참다못한 제주도 유지들은 그 해 4월 천주교의 폐해와 부당한 세금에 저항하기 위해 상무사商務社를 조직한다. 상무사를 중심으로 폐해를 시정 건의가 제주목사에 전달되는 한편 민의를 모으기 위한 평화적 집회도 연다. 5월 천주교도들은 상무사의 지도자였던 오대현을 납치했다. 이재수가 새로운 지도자로 추대되었고 일본인들에게 무기를 구입해 제주 내 성당을 불태우기에 이른다. 프랑스 신부들과 천주교도들은 제주성으로 도피했으나 관에서도 이들을 지켜주지 못했다. 제주성으로 진입한 민군들은 악명이 높았던 천주교도 300인을 골라 참수했고 프랑스 신부 중 일부도 처형되었다.
프랑스 측은 이를 빌미로 프랑스 군함 2척을 파병했다. 프랑스 함정을 타고 온 신임 목사 이재호, 찰리사 황기연은 방문을 내걸고 그때까지 남아 있던 군중 만 명을 달랜 뒤 해산시켰다. 6월 11일에는 민란의 지도자인 채구석ㆍ오대현ㆍ이재수 등 주모자들과 봉세관 강봉헌을 잡아들였다. 그것을 지켜본 민중들이 다시 모여 이재수의 석방을 요청했다. 그러나 진압 관군이 그들을 곧바로 압송하여 서울로 보냈다. 프랑스는 압송된 자들의 처벌과 피해 배상금을 요구했다. 재판이 열렸고 오대현ㆍ강우백ㆍ이재수 등 주모자들은 교수형에 처해졌다.
[출처] S# 18 이재수의 난이 시작된 곳, 서귀포 성당|작성자 서귀포LaB
2.
조선시대 정조 때 권철신, 정약전 등 천주교도가 주어사舟魚寺 천진암天眞庵에 모여서 비밀리에 천주학을 공부하였습니다. 이 때 그 사찰의 스님들은 그들을 숨겨주고 돌보아주었다가 나중에 관군에 발각되어 처형당했습니다. 그러나 최근 한국천주교는 그 당시 스님들의 희생을 기억하기는 커녕 오히려 그 곳을 천주교 성지로 만들어 기념하고 있습니다. 이 역사적 사실에 대하여 한국 천주교단에서 어떠한 해명이나 반응이 있었습니까?
ChatGPT의 말:
ChatGPT
정조 시대 1779년 에 권철신, 정약전, 이벽, 정약전 등 천주교 신자들이 주어사와 천진암에 모여 비밀리에 천주학을 공부하였고, 당시 사찰의 스님들은 이들을 숨겨주고 돌보았습니다. 그러나 조선 정부의 천주교 탄압으로 인해 천진암의 스님들은 처형당하고 천진암은 폐사되었습니다.
현재 한국 천주교는 천진암과 주어사를 천주교 성지로 기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에서 당시 스님들의 희생을 충분히 기리고 있지 않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불교계에서는 천진암과 주어사의 역사적 의미를 재조명하고, 스님들의 희생을 기억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습니다.
천진암 터에 세워진 '대한민족 100년 계획 천진암 대성당 조감도'
한국 천주교단이 이에 대해 공식적인 해명이나 반응을 보였다는 구체적인 기록은 현재까지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둘러싼 논란이 계속되고 있는 만큼, 종교 간의 상호 이해와 존중을 바탕으로 한 대화와 협력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된 자세한 내용은 아래 영상을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https://youtu.be/AIppf6spHj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