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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짓 휴식과 참된 휴식] 생명을 살리는 휴식
1891년. 산업혁명 이후 급격히 악화하는 노동 환경으로 말미암아 고통받던 노동자들과 그 현실에 교회는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는다. 교회는 노동 문제에 관한 최초의 공식 문헌인 회칙 「새로운 사태」를 통해 당시 노동자들의 비참한 현실과 그 원인을 고발하고, 보호받아야 할 노동자들과 그들의 권리를 대변함과 동시에 그들과 연대해야 할 교회의 사명에 대해 장엄하게 선포한다. 레오 13세 교황은 이 회칙에서 노동의 가치와 노동자들의 권리, 적정한 임금과 ‘휴식’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과중한 노동으로 정신이 무디어지고 육신이 핍진해지도록 노동을 요구한다는 것은 정의도 인간성도 용납하지 않는다”(「새로운 사태」, 31항).
어린이들도 주 70-80시간, 최대 100시간을 노동해야 했던 19세기, 교회가 노동자들의 휴식과 쉴 권리를 주장한 것은 당연하였다. 교회는 세상 창조를 마치신 하느님께서 쉬셨고, 이날은 인간뿐 아니라 동물들도 휴식을 취하고, 거룩하게 지내야 한다는 계명이 담긴 구약 성경을 근거로 삼았다.
고대 근동 지역에서 휴식은 권력을 가진 이들에게만 허용되었을 뿐 노예들에게는 절대 허용되지 않던 ‘특혜’였다. 구약 성경은 고대 근동 사회와 문화에 전면적으로 대항한다. 곧 휴식은 하느님의 모습인 인간이면 누구나 누려야 할 권리이자 의무라는 가히 혁명적인 가르침을 선포한다.
성경의 가르침을 이어받은 교회는 당시 상황에서 무엇을 발견하였을까? 소수의 가진 자들만의 전유물이 된 ‘휴식’, 노예로 전락한 다수 노동자의 비참한 모습이 아니었을까? 하느님께서 금지하신 고대 근동의 모습으로 회귀한 시대상이 아니었을까?
“노동 중간에 휴식을 하는 것은 하나의 권리다. … 하느님의 모습대로 창조된 인간도 충분한 휴식과 여가를 누림으로써 가정, 문화, 사회, 종교 생활을 영위할 수 있어야 한다”(「간추린 사회 교리」, 284항).
‘휴식’은 인간이 노동과 생존의 노예로 전락하는 것을 막고, 다양한 활동과 삶의 경험을 통해 행복하게 살며, 더 나아가 구원을 향하여 나아가게 하는 핵심적 요소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인간 완성을 위해서는 꼭 필요한 휴식을 우리는 충분히 누리고 있는가? 왜 우리는 쉬지 못할까? 그런데도 우리는 왜 쉬어야 할까? 아니, 쉬도록 해야 할까?
잊지 못하는 경험
사제가 된 지도 이제 18년이 되었다. 지금은 부산, 울산, 김해, 양산 등 여러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사제들, 그리고 활동가들과 함께 국적과 인종 그리고 종교 등을 초월하여 ‘노동과 노동자들’을 위해 활동하고 있다.
이주 노동자들과 관련된 일이 대부분이긴 하지만 국내 노동 문제는 언제나 고민과 연대의 대상이다. 그런데 종종 떠오르는 지난날의 기억은 나를 아직도 힘들게 한다.
보좌 신부 시절 어떤 청년에게 왜 성당에 나오지 않느냐며 야단을 친 적이 있다. 그 청년은 글로 표현할 수 없는 표정을 한 채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일자리를 찾아 이리저리 다녔습니다. 그래도 미사는 빠지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부산은 수십 년 전부터 경제 상황이 좋지 않다. 한때 인구가 500만을 넘을 것이라고 예상했던 도시가 이제는 340만, 그리고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2030년 이후에는 300만도 붕괴할 수 있다고 한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이미 수년 전부터 수많은 20-30대가 부산을 떠났다. 일자리를 찾아서 말이다.
그들은 ‘21세기 유목민들’이다. 먹고 살기 어려운 상황에서 일을 찾아 이리저리 떠도는 청년들이 종교 생활은커녕 제대로 쉴 시간이나 있을까? 불안한 고용 형태인 노동의 비정규직화, 장시간 노동과 저임금, 그와 반대로 높은 수준의 의식주 비용은 결혼은커녕 그들의 생존을 위협한다.
결혼과 자녀 양육에 따른 경제적 부담과 가사 분담은 청년들의 휴식을 더욱더 힘들게 한다. 한마디로 ‘쉴 수 없는 시대를 사는 세대’다. 그런 청년들에게 왜 성당에 나오지 않느냐며 다그치던 지난날 보좌 신부 때의 나를 생각하면 지금도 정말 미안하고, 부끄럽다. 그때는 고통스러운 형제의 현실을 몰라도 너무 몰랐다.
왜 쉬지 못하는가
어느 연구 발표에 따르면, 한국의 전체 국민 소득 가운데 임금 소득 비중은 점점 줄어든 반면에 부동산, 주식, 그리고 금융 자본을 통한 소득 비중은 점점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한국의 전체 소득 가운데 자본을 가진 사람들의 몫은 늘어나지만, 노동자와 자영업자의 몫은 줄어들고 있단다. 노동할 필요가 없는 사람들의 부는 계속 증가하지만, 노동을 반드시 해야 하는 사람들은 지금처럼 노동하면 더 가난해질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지금보다 더 열심히, 더 많이 일해야, 그리고 ‘저녁이 있는 삶’, ‘휴식’을 포기해야 지금의 생활 수준이라도 유지할 수 있단다.
최저 임금은 1인이 생활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최저한도의 임금’을 말한다. 올해 최저 임금은 시급 8,350원, 월급은 노동 시간 주 40시간을 기준으로 약 175만 원이다. 한편 보건복지부가 발표한 올해의 1인 가구 최저 생계비는 102만 원 정도이다. 많은 이가 정부에서 결정하는 최저 생계비가 현실성이 없다고 비판하지만, 정부의 결정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73만 원으로 집과 결혼, 자녀 양육, 의료비, 노후 생활을 준비할 수 있을까? 확실한 것이 많지 않은 세상이지만, 우리가 휴식을 포기해야 하고, 더 많이 일해야만 생활에 필요한 돈을 어느 정도 벌 수 있다는 사실만큼은 확실하다.
우리나라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국가 가운데 가장 많이 일하는 나라 가운데 하나다. 왜 더 많이 일해야 할까? 우리나라 임금체계는 기본급과 각종 수당으로 이루어지는데, 수당은 총수입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야간 노동, 휴일 노동 등 ‘연장 근로 수당’과 같은 수당이 없다면 생활에 필요한 여유 자금을 확보할 수 없다. 추가적인 노동을 하지 않고 기본급만으로는 살 수가 없다. 40시간만 일해서는 평균적인 삶도 쉽지 않다.
한편 장시간 노동은 결코 건강에도 좋을 수 없다. 올해 한국보건사회연구원에 따르면 일주일 평균 60시간 이상 노동하는 사람들은 각종 질환이 발생할 위험이 매우 높다고 한다. 결국 생활에 필요한 임금을 획득하려는 장시간 노동은 우리 자신의 휴식, 건강 그리고 생명을 돈과 과로 그리고 죽음(또는 다른 사람들의 목숨)과 맞바꾸는 행위이다.
노동 시간이 늘면 임금은 증가하지만 휴식은 줄고, 휴식을 위해 노동 시간을 줄이면 임금이 부족한 악순환. 이 악순환을 끊는 방법은 없을까? 노동 시간을 줄이고, 기본급을 인상하는 방법뿐인데, 과연 누가 이것을 하려 할까?
왜 쉬어야 하는가 왜 쉬게 해야 하는가
북유럽 국가의 버스 기사는 낮은 노동 강도와 함께 충분한 휴식을 보장받고 있음에도 그들의 월급이 대학교수의 월급과 비슷하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우리로서는 이해가 잘 안 되는 노동 환경임에도, 그들이 그러한 대접을 받는 이유를 들은 뒤,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많은 승객의 생명을 책임져야 할 직업이기 때문입니다.”
노동을 생명의 봉사로, 노동자를 생명의 봉사자로 여기는 사회인 것이다. 인간이면 당연히 인간으로서의 대접을 받아야 한다는 문화가 그곳에는 있었다. 이것은 생명을 존중하는 사회만이 진정한 휴식이 가능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이와는 너무 다르다. 노동 시간 단축으로 부족해진 버스 기사를 충원해야 하는 문제에 엇갈리는 시선들, 휴식 시간임에도 활동 지원사와 보육 교사, 요양 보호사 등 사회 서비스 노동자들의 무급 노동을 당연시하는 문화, 과도한 업무 강도와 장시간 노동으로 목숨을 잃는 우체국 노동자들, 대형 유통 업체에서 불법적인 야간 노동을 하는 청소년 노동자의 현실이 마치 잠을 쫓으려고 약을 먹으며 12시간 이상 재봉틀을 돌려야 했던 1960-70년대 평화시장의 수많은 어린 여공을 생각나게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는 쉼 없이 돌아가는 재봉틀처럼 휴식을 포기한 채, 또는 박탈된 상황에서 살고 있다. 휴식 포기를 강요하는 사회 안에서 살고 있다. ‘휴식이냐, 돈이냐, 생존이냐?’라는 갈림길 위에서 살고 있다. 지금의 우리 사회에서 휴식은 권투 선수가 다음 라운드를 위해 잠시 쉬는 ‘1분’과 같은, 다시 노동에 뛰어들고자 잠시 대기하는 시간인 듯하다. ‘대기 시간’을 마치 휴식인 양 착각하게 만드는 사회이다.
“인간은 일하려고 창조된 것이 아니라, 안식을 위해서 창조되었습니다”(발터 카스퍼 추기경, 「가정에 관한 복음」).
우리는 쉬어야 한다. 제대로 쉬게 해야 한다. 노동자들의 휴식을 돈과 효율성으로 맞바꾸려는 사회는 결국 나와 너, 그리고 우리 생명을 포기하는 사회일 뿐이다. 휴식은 나 자신의 생명뿐만 아니라, 누군가의 생명을 지키는 정의로운 사랑 행위이다.
휴식은 우리 인간을 하느님의 창조 의지대로 일상의 행복을 뛰어넘어 인간다운 삶을 살게 하고, 하느님과의 일치로 나아가게 하는 해방구이다. 휴식을 소중하게 여기는 사회는 생명을 존중하는 사회이자, 노동의 가치를 정당하게 인정하는 사회이다. 진정한 휴식, 그 길은 아직 멀다.
[ 거짓 휴식과 참된 휴식] 어떻게 쉬어야 하나
스트레스를 줄여야겠어, 스트레스가 없는 곳으로 가야지
우리는 종종 스트레스 관리를 스트레스 줄이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스트레스를 줄이는 전략으로는 효율적인 스트레스 관리가 어렵다. 인생 자체, 사는 것이 스트레스의 연속이 아닌가? 스트레스를 받는 일 하나를 해결해 놓으면 어느새 새로운 녀석이 떡 하니 나타난다.
과도한 스트레스는 뇌를 지치게 하고, 스트레스가 지속되면 신체적인 병이 생길 수도 있다. 스트레스 관리는 스트레스를 줄이는 전략보다는 스트레스를 처리하는 능력을 증가시키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다.
나의 스트레스 처리 능력이 어떤지 궁금하다면 내가 계절의 변화와 자연의 기운을 즐기고 있는지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파란 하늘이 느껴진다는 것은 뇌가 스트레스를 잘 처리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뇌가 전투와 평화 상태의 균형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와 다르게 계절의 변화를 느끼지 못한다면 내 뇌는 지나치게 전투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일하는 것이 어려운가 노는 것이 어려운가
일하는 것과 노는 것 가운데 어느 것이 어려운지 묻는다면 당연히 노는 것이 쉽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과도한 스트레스로 고생하는 이들을 보면 노는 것이 더 어렵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일을 하는지 노는지를 결정하는 것은 행동보다 뇌의 상태가 더 중요하다. 어렵게 휴가를 받아 친구나 가족과 적지 않은 비용으로 해외여행까지 다녀왔는데, 막상 휴가 기간에 제일 좋았던 시간이 집에 돌아왔을 때였다며 슬픈 얼굴을 하는 이들이 꽤 있다. 휴가라는 뜻의 프랑스어 ‘바캉스’(vacance)는 그 어원이 ‘자유’라고 한다. 자유를 느껴야 우리 뇌는 쉬었다고 생각하나 보다. 그러나 자유를 위해 저 먼 곳, 남극까지 갔다 왔다고 해도 뇌가 놀지 않고 일하는 상태로 켜져 있었다면 그것은 바캉스가 아니라 일을 한 셈이 된다.
사업을 하는 중년 남성이 스트레스로 찾아왔다.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독점 수입 계약을 체결했다고 한다. 예전 같으면 열심히 매장도 다시 꾸미고 직원도 뽑고 신나게 일을 할 텐데 도무지 의욕이 생기지 않는다고 하소연한다. 뇌가 지쳐 ‘소진 증후군’이 찾아온 것이다. 소진 증후군에서 벗어나 다시 의욕을 찾으려면 뇌를 충전해야 한다. 뇌의 충전은, 곧 뇌를 즐겁게 해 주는 것인데 어떻게 뇌를 즐겁게 해 주는지 물었더니 아무것도 안 한다고 한다. 운동도 안 하고 친구도 안 만나고 아무것도 안 한다는 것이다.
소진 증후군이 무서운 것은 뇌가 지쳐 더 즐거운 에너지가 필요한 상황인데, 뇌가 지쳐 있다 보니 즐거운 일 자체가 싫어지는 것이다. 일도 싫고 노는 것도 싫어진다. 그냥 집에 있거나 누워만 있고 싶은데 그렇다고 뇌에 충전이 오지는 않는다.
일이 많고 바빠지면 노는 일에 소홀해지기 쉬운데 그러면 뇌 안의 충전 장치가 점점 무디게 돌아가게 된다. 일하는 장치만 맹렬히 돌아간다. 너무 일만 했나 보다 깨닫고 다시 놀려고 해도 옛날처럼 즐겁지가 않다. 충전 장치가 작동을 멈춘 것이다. 이쯤 되면 일보다 노는 일이 훨씬 어려워진다. 즐겁게 활동해도 뇌의 충전 장치가 켜지지 않는다, 그냥 일하는 장치만 공회전이 일어나는 것이다.
자기 연민 훈련
뇌 충전 전략 가운데 ‘자기 연민 훈련’이라는 것이 있다. 여기서 연민은 불쌍히 여기라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따뜻하게 감싸 주라는 뜻이다. 이 훈련에서는 우리 뇌 안에 있는 충전 장치를 연민 장치라 부른다. 그 장치를 잘 가동해 주어야 지친 뇌에 에너지가 차오른다.
연민 장치는 ‘자, 이제 작동하라!’고 말로 지시한다고 해서 그 스위치가 켜지지 않는다. 스마트폰을 충전하듯 우리 뇌의 배터리도 외부 에너지원과 연결해야 된다. 그 외부 에너지원으로 효과적인 것이 사람, 자연, 문화이다. 어찌 보면 뻔한 단어들이다. 뇌 충전은 단순한 지식 습득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훈련을 해서 뇌의 연민 장치가 잘 켜지도록 해야 한다. 충전 장치가 논리의 뇌가 아닌 감성의 뇌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받는 스트레스의 대부분이 관계 스트레스라는 것은 그만큼 우리 마음에 친밀에 대한 욕구가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지만 최고의 에너지원도 사람이다. 거울을 보고 ‘넌 정말 멋있어!’라고 외친다고 충전이 되지 않는다. 다른 사람의 눈에 담긴 내 이미지가 따뜻하고 멋질 때, ‘훅!’ 하고 우리 뇌의 충전 장치가 작동하기 시작한다.
살다 보면 사람이 참 싫어질 때가 있다. 그럴 때 자연과 문화를 활용한 충전이 필요하다. 가끔 먼 산을 바라보다 보면, 내가 산을 보는 것인데 왠지 저 산이 나를 쳐다보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이럴 때 인생에서 잠시 한 발짝 물러서서 내 삶을 쳐다보는 마음의 여유가 생긴다. 이때도 충전 장치가 잘 작동하도록 우리 뇌는 설계되어 있다. 문화 콘텐츠도 마찬가지다. 영화와 소설을 몰입해서 보는 가운데, 내가 아닌 그 콘텐츠의 주인공들이 나를 쳐다봐 주는 듯한 느낌을 갖게 된다.
지친 뇌는 충전 장치가 잘 켜지지 않기에 훈련하는 마음으로 사람, 자연, 문화를 즐길 필요가 있다. 꾸준히 충전 장치를 활성화시키다 보면 일상에서 툭, 툭 켜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소진 증후군 극복을 위한 훈련
소진 증후군은 마음의 에너지가 다 방전된 상태를 의미하며 영어로 ‘burnout syndrome’이라 한다. 말 그대로 뇌의 에너지가 다 타 버렸다는 뜻이다. 소진된 개인이 모이면 피로 사회가 된다. 반대로 피로한 사회는 개인을 소진시킨다. 개인과 사회 시스템은 끊임없이 상호작용을 하다 보니 소진된 마음이 전염병처럼 늘어나고 있다.
소진 증후군이 찾아오면 세 가지 문제가 뚜렷하게 나타난다. 먼저 의욕이 떨어진다. 일을 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의지를 동원해서 애써 봐도 동기 부여가 잘 일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성취감이 떨어진다. 노력해서 무언가 목표를 달성해도 만족감이 잘 느껴지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공감 능력이 현저히 결여된다. 공감은 남을 위로하는 능력이면서 내가 남에게 위로 받는 능력이기도 하다. 내가 지쳤을 때 상대방에게 따뜻한 감성 에너지를 받아서 충전을 해야 하는데, 주는 것은 고사하고 받는 것도 잘 안 되는 마음 상태가 된다.
다음의 소진 증후군 체크 리스트를 통해 자신을 살펴보자. 여기서 3개 이상에 해당하면 소진 증후군을 의심해 보아야 한다.
□ 맡은 일을 수행하는 데 정서적으로 지쳐 있다.
□ 일을 마치거나 퇴근할 때 완전히 지쳐 있다.
□ 아침에 일어나 출근할 생각만 하면 피곤하다.
□ 일하는 것에 심적 부담과 긴장을 느낀다.
□ 업무를 수행할 때 무기력하고 싫증을 느낀다.
□ 현재 업무에 대한 관심이 크게 줄어들었다.
□ 맡은 일을 하는 데 소극적이고 방어적이다.
□ 나의 직무 기여도에 대해 냉소적이다.
□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쾌락을 즐긴다.
□ 최근 짜증, 불안이 많아지고 여유가 없다.
소진 증후군 극복을 위한 ‘연결을 위한 단절 훈련’(Disconnect to connect training)은 자신의 내부를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을 키워준다. 곧 내가 나를 살펴보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다. 모니터링 능력이 커지면 삶의 여유가 생기고 자유를 느낄 수 있다. 채찍질만 해대는 무의식과 시스템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하나의 정보로서 그것을 다룰 수 있는 힘이 생기기 때문이다. 이때 활성화하는 것이 디폴트 신경망(default network)이다.
내 마음을 잘 모니터링하려면 먼저 뇌에서 흘러나오는 내용들에 바로 반응하는 것을 잠시 끊고 살며시 내 마음을 바라보는 훈련이 필요하다. 일상생활에서 활용할 수 있는 몇 가지 사항을 정리해 보았다. 앞에서 언급한 사람, 자연, 문화를 활용한 마음 충전 활동의 소소한 예들이라고 볼 수 있다.
1. 세 번 깊게 호흡하며 그 호흡의 흐름을 느끼기: 출근해서 컴퓨터를 켜는 동안, 회의 시작 전에, 주문한 커피를 기다리는 동안에 호흡의 흐름을 느끼며 마음을 느껴 본다.
2. 조용한 곳에서 음미하며 식사하기: 음식의 색깔, 향, 그리고 밥알의 움직임을 느끼며 먹는 식사 방법도 내부 세계에 집중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3. 하루 10분 사색하며 걷기: 여유 있게 몸의 움직임을 느끼는 경우 뇌의 긴장감을 이완시키고 자기의 마음을 바라보는 여유가 생긴다.
4. 일주일에 한 번 벗과 공감하며 수다하기: 지치고 불안한 마음은 내 마음을 바라볼 여유를 갖지 못하게 한다. 이때 서로 공감하는 수다만한 위로가 없다.
5. 슬픈 영화와 같은 슬픈 작품을 주 1회 감상하기: 즐겁고 재미있는 내용으로 마음을 조정하는 것을 기분 전환이라 하는데, 기분 전환만 주로 하다 보면 내 마음의 슬픈 콘텐츠를 바라보는 능력이 줄어들게 된다.
6. 일주일에 3편의 시 읽기: 사람의 마음은 논리보다 은유에 움직인다. 은유에 친숙해지는 것은 내 마음을 바라보는 데 큰 도움이 된다.
7. 스마트폰을 집에 두고 하루 기차 여행하기: 기차 창문을 멍하니 보다 보면 명상 효과가 일어나고 내 마음을 바라보는 힘이 자라난다.
단순해 보이지만 이런 연습을 하다 보면 내 뇌가 만들어 내는 생각과 감정이 하얀 스크린에 비춰지는 것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자유를 찾는다는 어원의 바캉스, 곧 심리학적 자유는 내가 나를 바라보는 여유에서 찾아온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이 여유가 창조적 마인드를 갖게 하고 일에서의 성공도 가져온다는 것이 오늘날 뇌 과학의 주장이다.
[ 거짓 휴식과 참된 휴식] 그리스도인의 ‘참된 휴식’이란
거짓 휴식과 참된 휴식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8년 9월 5일 교황청 일반 알현에서 십계명 가운데 세 번째 계명인 ‘주일을 거룩히 지내라.’에 대해 가르치면서 휴식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십계명의 여정은 오늘 우리에게 휴식의 날에 대한 계명으로 인도합니다. 이 계명은 실천하기 쉬운 계명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휴식을 취한다는 것은 참으로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거짓 휴식’과 ‘참된 휴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휴식은 수고와 고생으로 표현되는 삶의 자리인 일상을 떠나는 것이다. 또한 평상시에 하고 싶었던 것들을 하는 시간이다. 이를 우리는 ‘힐링’(healing)을 추구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몸과 마음의 치유와 회복을 뜻하는 힐링을 찾는다는 것은 한편으로 인간이 지닌 ‘공허함의 표시’라고 할 수 있다.
무언가로 채워지고 싶어 하는 것, 곧 자신의 일상을 지탱할 수 있는 무언가를 찾고 그것으로 채워지고 싶은 욕구가 우리 안에 가득한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그동안 영위한 힘든 노동에 대한 보상이라도 받겠다는 듯 휴식의 시간 동안 재미를 유발하는 많은 것을 하고자 한다. 그런데 과연 이러한 유형의 즐길 거리가 우리에게 휴식을 선사할까? 이에 대해 프란치스코 교황은 단호하게 아니라고 대답한다. “즐기고, 밖으로 나가고, 크루즈 여행을 하고, 많은 여행을 하는 것 말고도 많은 것이 여러분에게 마음의 충만함을 주지 못합니다. 그것들은 여러분에게 휴식을 주지 않습니다.”
교황의 통찰에 따르면 이러한 것들은 사람들에게 ‘거짓 휴식’만을 선사한다. 이러한 유형의 휴식은 현실 도피의 수단으로 작용하며, 사회 경제적으로 성공하는 것만을 지상 목표로 삼아 늘 이러한 휴식을 누리지 못하는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게 한다.
바로 여기에 거짓 휴식의 독성이 자리한다. 이러한 독성은 늘 새로운 것과 더 자극적인 것, 그리고 쾌락을 위해 더 많은 것을 소유하려는 욕망을 갖게 한다. 이것은 이른바 ‘발포성 위안’만을 추구하게 한다. 발포성 위안은 그 자극이 가라앉으면 현실로 돌아가기 힘들 정도의 공허감과 무기력감 때문에 휴식이 현실에 힘을 주지 못하고 반복되는 악순환을 초래한다. 그렇기에 이러한 독성은 하느님께 자리를 내드리지 않게 하고 일의 속박과 돈에 대한 숭배에도 저항하지 못하게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교황은 인류가 오늘날처럼 많은 휴식을 취한 적이 없었음에도 오히려 인간은 늘 공허감을 느낀다고 경고한다.
그렇다면 교황이 생각하는 ‘참된 휴식’은 어떤 것일까? 여기서 어느 성서학자의 성찰을 떠올리게 된다. “노동과 휴식은 인간에게 찾아오는 것이고, 그것은 고통을 수반하지만 하느님 안에서 서로 만나 정화되고 조화를 이루게 된다.” 이에 따르면 그리스도인에게 노동과 휴식은 하느님과의 결속 관계에서만 그 의미를 갖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성경은 이러한 측면을 분명하게 제시한다. “자기의 노고로 먹고 마시며 스스로 행복을 느끼는 것보다 인간에게 더 좋은 것은 없다. 이 또한 하느님의 손에서 오는 것임을 나는 보았다”(코헬 2,24).
더욱이 성경은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의 휴식에 대해 언급하면서 이를 인간 휴식의 기원으로 제시한다. 무엇보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손수 만드신 모든 것이 참 좋았다고 말하는 창세기는 하느님의 쉼을 강조한다. “하느님께서는 하시던 일을 이렛날에 다 이루셨다. 그분께서는 하시던 일을 모두 마치시고 이렛날에 쉬셨다. 하느님께서 이렛날에 복을 내리시고 그날을 거룩하게 하셨다”(2,2-3).
탈출기 또한 “주님이 엿새 동안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들고, 이렛날에는 쉬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님이 안식일에 강복하고 그날을 거룩하게 한 것이다.”(20,11)라고 설명한다. 결국 구약 성경이 제시하는 안식일은 하느님께서 당신이 직접 창조하신 모든 것에 대해 기뻐하신 날이고 거룩하게 만드신 날이기에, 주님을 위한 거룩한 안식의 날을 엄격하게 준수해야 한다고 엄명한다(탈출 31,12-17 참조).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그리스도인에게 참된 휴식은 무엇보다 창조주의 휴식에 참여하는 것이다. 곧 인간 스스로 하느님께서 직접 만드신 모든 것을 응시하는 날이요, 자신이 누구인지를 다시 한번 직시하는 것이다. 인간이 삼위일체 하느님과 비슷하게 그리고 그분의 모습으로 만들어진 하느님의 자녀임을 상기하면서 하느님 외에 다른 어떤 것에도 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존재임을 되새기는 것이다.
그렇기에 하느님과 대화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휴식은 기쁨 속에서 창조주 하느님에 대한 찬미를 동반하는 시간이 된다. 하느님과 함께하는 거룩함이 수고의 일상을 멈추게 하는 시간이요, 그 수고가 축복을 받도록 내드리는 시간이다. 이를 통해 하느님께 삶의 한 자리를 내드리는 것이다. 이로써 휴식은 현실에 대한 축복으로 자리한다.
해방을 위한 휴식
더 나아가 이러한 휴식과 찬미는 해방에 참여하는 것이다. 구약 성경은 이스라엘이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었음을 기억하라고 가르친다. “너희는 너희가 이집트 땅에서 종이었다는 것과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를 구해 내신 것을 기억하여라”(신명 15,15).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손을 통해 해방되었듯이, 종들도 자신들의 주인과 함께 해방의 파스카 축제를 지낼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해방의 상징인 휴식은 우리에게 또 다른 측면을 제시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또 다른 일반 알현(2018년 9월 12일)에서 강조하였듯이 해방에 참여하는 휴식은 자아의 종살이에서 벗어나는 것이 되어야 한다. “죄를 짓는 자는 누구나 죄의 종”(요한 8,34)이듯, “인간은 하느님의 사랑의 계획을 거부하여 스스로 자기를 배신하고 죄의 노예가 되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1739항). 이에 대해 회심을 목전에 두고 있던 아우구스티노는 「고백록」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나는 묶여 있던 것입니다. 누구의 쇠사슬이 아닌 바로 내 의지의 쇠사슬에 말입니다. 원수가 내 마음을 쥐고 있으니 그것이 원인이 되어 쇠사슬이 되었고, 나를 묶어 놓은 것입니다. 이를테면 삿된 마음에서 육욕이 생기고, 육욕을 따르다 보면 버릇이 생기고, 버릇을 끊지 못하면 필연이 생기게 되는 것이옵니다. 이렇게 서로 뒤얽힌 - 그러기에 쇠사슬이라 일렀습니다만 - 고리들에 묶이듯 나는 모진 종살이를 하는 것이었습니다”(8,5,10).
히포의 주교는 이러한 모진 종살이를 ‘죄악의 법’이요 ‘습관의 폭력’이라 표현하면서 자신의 영혼을 감옥에 갇혀 있게끔 만들고 있다고 고백한다. 이러한 굴레에서 해방을 가져다주는 치료약은 예수 그리스도뿐이시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려고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그러니 굳건히 서서 다시는 종살이의 멍에를 메지마십시오”(갈라 5,1).
결국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 11,29)라고 하신 말씀처럼 해방의 상징인 휴식은 예수 그리스도께 가까이 가는 것이요, 이를 통해 자신이 짊어지고 있는 온갖 무거운 짐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하느님 안에서의 쉼
“때때로 손에서 일을 놓고 휴식을 취해야 한다. 잠시 일에서 벗어나 거리를 두고 보면 자기 삶의 조화로운 균형이 어떻게 깨져 있는지 분명히 보인다.”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의미심장한 이 명언에 드러나듯 우리는 휴식을 통해 현실을 직시할 수 있다. “나의 사랑은 나의 무게입니다.”(「고백록」, 13,9,10)라는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표현처럼 나의 마음이 어느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랑은 ‘영혼의 움직임’이기에 방향성이 매우 중요하다고 판단하는 성인에게 ‘무게’는 사물을 자신의 자리로 기울게 만든다.
더욱이 사랑은 사랑하는 주체와 사랑받는 대상을 일치시키는 힘을 가졌기에, 하느님을 사랑하면 하느님이 되지만 땅을 사랑하면 땅이 된다고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강조한다. 그렇기에 성인은 “당신 선물에서 저희가 안식을 얻습니다. 거기서 저희가 당신을 누립니다. … 당신의 선물로 저희가 불타오르고 위로 이끌려 갑니다. 타오르면서 갑니다. 마음의 오르막길을 저희는 오르고 그러면서 층계송을 노래합니다.”(「고백록」, 13,9,10)라고 고백한다.
이처럼 우리 삶의 무게 중심에서 하느님과의 관계가 제대로 정립될 때, 우리는 휴식을 통해 다시 내면의 평화를 회복할 수 있다. 하느님 안에서 쉴 때만이 내적 긴장감을 해소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수고와 고생으로 표현되던 일상생활은 더 이상 회피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오히려 그 안에 자리하는 하느님의 자비하심과 축복을 바라보아야 한다.
진정으로 참된 휴식은 프란치스코 교황이 단언하듯이 자신에게 인생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고백하게 하는 시간으로 자리매김한다. 우리 모두가 이러한 고백에 동참하여 천국을 앞당겨 맛보고 살아가면서 “내 영혼은 오직 하느님 품에서 안온하구나.”(공동 번역 성서, 시편 62,1)라고 노래하는 참된 휴식의 시간을 갖도록 하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