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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학적 완성을 위한 심미적 성찰
―노혜봉 시인의 시적 진화
황치복
1. 본색(本色), 혹은 본래적 자아를 찾아서
노혜봉 시인은 1990년 월간 <문학정신> 신인상을 수상하며 등단한 이래로, 산화가, 쇠귀, 저 깊은 골짝, 봄빛 절벽, 좋을好, 見者, 첫눈에 반해서 등 다섯 권의 시집을 상재한 바 있다. 그러니까 이번 시집은 시인의 여섯 번째 시집이 되는 셈이다. 시력 30년을 넘긴 시인으로서 여섯 권의 시집은 그리 많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동안 매 시집마다 독특한 시세계와 시적 개성을 유지하면서 더욱 깊어지고 성숙해지는 시적 행보를 보인 시인이기에 시적 진화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
그동안 많은 평론가들이 노혜봉 시인의 시적 개성을 해명하기 위해 노력했는데, 대체로 노혜봉 시인의 핵심적 자질들을 정확히 짚어내고 있다고 평가할 만하다. 특히 “일상화된 삶의 고통과 그 고통을 둘러싸고 있는 부정적인 요인들을 아름다움을 향한 욕망으로 이겨내려는 노력”(박혜경, 「삶에 대한 미학적 견인주의」)으로 점철되어 있다는 분석, “여성적 시세계, 전통미학의 특징적인 시세계를 대폭 확장하면서 그 중심에 동양적인 정신세계를 배치하는 법고창신의 새 틀”을 마련했다는 평가(박제천, 「기운생동 백화난만의 블루 프린트」), 그리고 “온고지신(溫故知新)의 정신성을 현대의 기호로 육화시키면서, 시인은 예술과 예술이 결합하는 지평 융합적 사유를 공고히 구축”했다는 지적이나 “초절적 감각의 세계를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형질전환시켜 예술과 예술 사이에서 빚어지는 지평 융합적 시너지효과를 창출하게 되”(김석준, 「견자(見者)의 노래-예술과 일상의 지평 융합적 글쓰기」)었다는 평가 등이 요령을 얻고 있다.
잘 알려져 있듯이, 그동안 시인은 서양의 클래식 음악의 선율이나 우리나라 고유의 전통음악인 판소리의 가락을 배경으로 하여 다양한 여성적 삶과 유년 시절의 추억, 그리고 낡고 오래된 사물이나 풍습이 지닌 아우라를 아름다운 형상으로 그려냈다. 시인에게 아름다움에 대한 갈망과 지향은 가장 주목되는 특징이기도 한데, 그러한 미학적 충동과 열정을 음악이 대변해주고 있었다. 그러니까 음악을 들으면서 연상되거나 상상되는 아름다운 삶의 한 장면이나 가치 있는 정동의 한 국면을 이미지화 하는 것이 시인이 지닌 작시술의 두드러진 특징이었던 셈이다. 시인은 시적 공간에 수시로 인상적인 클래식의 음악을 소환하며, 그 음악이 담고 있는 선율과 가락으로 삶의 아픔과 고통을 감싸 안으려는 시도를 통해서 삶의 속악함과 신산함을 정화하려는 시적 의도를 지니고 있던 셈이다.
이번 시집에서도 이러한 시인의 특징적인 작시술은 여전이 힘을 발휘하고 있으며, 현실을 미학화하려는 시인의 작시술은 “멈추어라! 너 정말 아름답구나!”라고 외쳤던 괴테의 낭만주의적 선언처럼 시간 속의 존재로서의 유한성을 초월할 수 있는 하나의 가능성으로 부각되기도 한다. 그러니까 시인의 시적 전략은 시간의 파괴적인 힘을 벗어나 어떤 영원성에 도달하려는 시도처럼 보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이전의 미학화 전략이 삶의 고통과 신산함을 극복할 대안으로 등장한 것이었다면, 이번 시집에서 확인할 수 있는 심미적 충동은 유한성의 극복이라는 실존적 측면에서 근원적인 세계와 연결되고 있는 셈이다.
앞서 노혜봉 시인의 시작 과정이 시적 진화의 과정이라고 한 바 있지만, 더욱 주목되는 점은 시인의 주된 시적 관심이 현실이 아니라 예술적 영역으로 옮아가 있다는 점,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예술을 통해서 현실을 포장하고 감싸려는 것이 아니라 현실 그 자체 속에서 예술을 발견하려고 한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이전까지 시인은 예술을 현실화 하려고 했다면 이제는 현실을 예술화 하려고 한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현실에 존재하는 예술적인 자질들, 아름다움의 질료들을 발견하고 그것을 주된 요소로 부각시킴으로써 현실 자체를 예술화함으로써 낭만주의적 영원성을 확보하려 한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현실이란 시인의 사소한 일상을 포함하여 주변의 사물, 우리 민족의 문화적 유전자로서의 고전, 풍습과 풍물, 사물과 자연 등을 모두 포괄한다.
그런데 시인의 이러한 미학적 전략을 단순히 인간적 성향이나 지향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정체성, 혹은 본성에 대한 성찰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점에서 시의식의 진정성과 특이성을 확인할 수 있다. 자신의 본성에 대한 탐구를 통해서 인간은 생명에 대한 근원적 충동을 지니고 있으며, 생명에 대한 근원적 충동은 곧 미학적 본성을 통해 발현될 수 있다는 자각에 기반을 둔 시의식이기에 시인의 시적 지향이 믿음직스럽고 깊이를 담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시인의 자의식을 담고 있는 작품을 통해서 이를 확인해 보자.
나이 수만큼의 표정은 눈길 뒤에 숨었을까
거울 속엔
무덤덤한 그녀의 얼굴이 살고 있다
손댈 수 없는 네 표정을 문질러 보았다
슬픔이 겹겹이 밀리면서 속눈물은 말라갔다
바람결에 거울을 휘젓고 간 그림자,
너는 시든 꽃, 초조한 눈동자에 불안한 입귀
일렁이던 불꽃도 주름 갈피에 꽃향으로 간직했다
잇단음표 향들이 바로 코 앞 어지러운데
곱씹던 말들 기억 너머로 가뭇없이 지워졌다
날 위해 가꾸었던 표정을 네 얼굴 뒤에 묻었다
연두 연두의 여린 잎들이
산목련 꽃잎을 오롯이 흔들었던 호수엔
너한테만 보였던 미소가 햇귀처럼 싱그러운데
얼굴은 알아보지만 전혀 다른 사람으로
착각 한다는 카그라스증후군
어떤 추억도 살아남지 못 했으매
그 옛날 눈 감은, 입술의 접점을
느리고 생생하게, 음표로 베낀 간주곡,
이따금씩 반짝이는 바람결
저 구름호수의 무늬들
보일 듯 말 듯 한 그녀 얼굴, 보일 듯 말 듯.
―「얼굴 사용법」, 전문
‘얼굴’이야말로 한 인생이 집약되어 있는 축소판이자, 그런 점에서 한 존재자의 고유성을 담보하는 가장 적절한 상징이기도 할 것이다. 따라서 “얼굴 사용법”이란 바로 자신의 고유성과 정체성을 발굴하는 기제로 활용하는 것이며, 얼굴을 통해 자신의 지향과 의미를 발견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이 시는 자아 성찰의 시이며, 자화상을 그린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거울 속의 얼굴이란 그런 점에서 현실적인 자아와 본질적인 자아의 구분을 명확히 해주는 구도이다. 시인은 「그녀의 두 번째 얼굴」이라는 작품에서도 “무엇이든 아득히 바라보라는 뜻/ 본색을 보지 못하는 건 때로 약이 되는 법”이라고 하거나 “어린 감나무의 노래가 된 잎들을, 감속에/ 영근 알맹이를 고요히 正色으로 응시한다.”라고 하면서 얼굴이 “본색”이나 “정색(正色)”을 확인하는 기제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 시에서 얼굴은 이중으로 분열되어 있는데, “시든 꽃, 초조한 눈동자에 불안한 입귀”, “주름 갈피”에서 연상되는 늙고 지친 노년의 자아상이 하나라면, “일렁이던 불꽃”이라든다 “햇귀처럼 싱그러운” 미소 등이 함축하고 있는 생동감 넘치는 유년의 자아상이 다른 하나이다. 물론 후자의 자아상은 기억 속에 있는 과거의 모습인데, 문제는 그처럼 지나간 과거의 아름다운 순간들이 “잇단음표 향들”이라든가 “느리고 생생하게, 음표로 베낀 간주곡”이라는 음악으로 환원되고 있다는 점이다. 음악은 아니지만, “이따금 반짝이는 바람결”이라든가 “저 구름호수의 무늬들”이라는 이미지 속에도 심미적 속성이 담겨 있어서 예술적 속성이 자아의 중요한 일부분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그러니까 자아에 대한 성찰과 탐색에서 시적 화자는 음악이라든가 무늬, 혹은 화음과 미적 구도라는 예술적 속성을 발견하고 있는 셈이다. 자아성찰에 대한 시편을 한편 더 읽어보자.
ㅁ이라는 방, 마음가면의 모서리 각이 있는,
저 깊은 곳 ㅇ방은 또 어디에 갇혀 있나
불안한, 초조한, 두려운, 가끔은 오만한 ㅁ,
섣부른 이 지병은 날마다 널 보며 자꾸 보챈다
한참 모자라다 스스로 뾰족한 각을 키운다
부추를 다듬으며 매운 파를 다지며 넌, 무기력해
걸레를 빨며, 잡지는, 신문은 안 보아도 괜찮아
스스로에게 거짓말하지 말자 야단치지 말자
지난 달부터 넌, 암, 쬐끔 아팠지, 고까짓 것 괜찮아
불안해 하지도 말자 미련을 삭이지도 말고
죽을 만큼 기침이 심한 건, 평생 두려워해서 못한 말
무서운 부끄러움이 게으른 구석 점, 점으로 닫혔다
ㅁ ㅁ ㅁ 널 미워했던 싫어했던 거울 뒷면의
한 끗 욕심, 지루한 편견으로 쌓인 벽, 우울한
오만함이 짙은 잿빛으로 뒤틀린다 둥글게 맥없이,
방시레 웃음으로 생그레 음악으로 가비얍게 춤으로
가뭇없이 사라진다 저, 비웃음, 눈웃음, 헛울음,
딴청 짓, 허망한 가면의 겹겹 끝자락을 떠나서
애틋한, 안타까운, 외로운, 애착, 애끈한 저, ㅇ
허전한 울림이 눈결에 꿈결에 귓결에 남실대는
ㅇ ㅇ ㅇ 오롯이, 나만을, 올연히, 온 맘을 드러내
말 속에 묶은 맘 그 끈이 나달나달해질 때까지
어느 날, 아무도 모르게 툭, 투두둑 끊어질 때까지
느슨하게 맞선다 진짜배기 그림자 나를 보듬는다.
―「그 겹과 결 사이」, 전문
‘겹’이란 어떤 것이 포개지고 겹쳐진 상태이고, 결이란 바탕으로서의 켜가 지닌 짜인 상태나 무늬 등을 의미한다면, 겹이란 사회화의 과정을 거친 사회적 자아를 의미하고, 결이란 그러한 사회적 자아에 오염되지 않는 상태의 순수한 본래적 자아를 지칭한다고 할 수 있다. 이 시에서 사회적 자아로서의 겹은 “마음가면”이라는 시어가 대변해주고 있고, 본래적 자아는 “진짜배기 그림자”라는 표현이 표상해주고 있다. 결은 본디 가지고 있는 성질로서 천성이라든가 천품 등의 용어들과 친연성이 있고 겹은 습관이라든가 관습, 혹은 사회성이라든가 인위성이라는 어휘와 긴밀히 결부된다.
그런데 겹은 “불안한, 초조한, 두려운, 가끔은 오만한 ㅁ”이라든가 “거울 뒷면의/ 한끗 욕심, 지루한 편견으로 쌓인 벽, 우울한 오만함”, 그리고 “비웃음, 눈웃음, 헛울음, 딴청 짓, 허망한 가면의 겹겹” 등의 구절에서 추론할 수 있듯이, 불안과 가식과 인위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마음의 가면을 쓰고서 살아가는 사회적 자아는 비굴과 거짓, 허위와 가식으로 점철된 것이어서 결코 시적 주체의 진정성을 발현하지 못하며, 그러하기에 때문에 시적 주체를 편안하게 하지 못하며 마음의 평안을 가져올 수 없다. 시적 주체가 자신을 다그치듯이 내뱉는 다짐이라든가 명령어들이 시적 주체의 불안하고 불안정한 내면의 풍경을 대변해주고 있다.
그런데 “허망한 가면”인 겹이 “우울한/ 오만함이 짙은 잿빛으로 뒤틀리”고, “둥글게 맥없이” 무너지자 결이 살아난다. 겹이 사라지자 “저 깊은 곳 ㅇ방”에 있던 결은 “애틋한, 안타까운, 외로운, 애끈한 저 ㅇ”으로서 “눈결에 꿈결에 귓결에 넘실대”는 모습으로 찾아오게 된다. 사각의 감옥 같던 ‘ㅁ’으로 점철되었던 겹이 붕괴되자 원만구족한 ‘ㅇ’의 속성을 지닌 결이 되살아나는 것이다. 결이란 “오롯이, 나만을, 올연히, 온 맘을 드러내/ 말 속에 묶은 맘”으로서, 그것이 회복되자 시적 주체는 “진짜배기 그림자”가 자신을 보듬는 충일한 정서를 경험한다. 물론 우리는 ‘진짜배기 그림자’라든가 ‘눈결’, ‘꿈결’, ‘귓결’ 등의 어휘에서 심미적 충동을 발견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시적 주체가 추구하는 것이 “나무, 돌, 살갗 따위에서 조직의 굳고 무른 부분이 모여 일정하게 켜를 지으면서 짜인 바탕의 상태나 무늬”를 뜻하는 ‘결’이라는 것을 상기해 보면, 그 속에는 어떤 경향성이라든가 조화, 혹은 균형 같은 심미적 요소가 숨어 있음을 추론할 수 있다. 삶과 죽음이 길항하는 다음 대목에서도 삶의 본질이 아름다움과 연결되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그대가 내 가슴을 쥐고 목숨 줄을 꽉 조였을 때,
어두운 숲길 내 시간이 그루터기에 걸려 쓰러져 있었다
죽음이란 유혹, 알약에 취해 실컷 몸과 놀고 싶었다
내 명줄을 딸이 꽉 잡고 있었다
하늘 한 조각이 꽉 내 발목을 잡고 있었다
살아 봐, 살아 보는 거야,
개똥밭에 굴러도 뒹굴며 살아 봐,
엷은 보라색, 보라색은 신비한 하늘색이지
새로 태어나는 색이지, 신새벽 저 창문을 봐,
오롯이 보이는 새별, 개밥바라기별을 다소곳 바라 봐.
―「색체예보」, 부분
갑작스러운 심근경색으로 사경을 헤매게 되었다는 것, 그리하여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들다 딸이 명줄을 붙잡고 있어서 다시금 이승으로 돌아오게 되었다는 것, 그리고 새로 태어난 것 같은 회생의 순간에 시적 주체는 새벽의 개밥바리기별을 바라보면서 동시에 “엷은 보라색”이라는 ‘색’을 바라보게 되었다는 것 등의 사건이 진술되어 있다. 사실 이 시집 속에는 소리에 대한 관심만큼이나 색에 대한 관심이 넘쳐나고 있는데, 대표적으로 앞서 언급한 ‘본색’이라든가 ‘정색’들이 그러한 성향을 대변해준다. 그런데 시적 주체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삶으로 돌아오는 순간 “새로 태어나는 색”인 “엷은 보라색”을 보게 되는 것이다. 먼동이 터오거나 일몰이 다가올 때 지평선에 자욱하게 깔리는 색이 엷은 보라색일 것이다. 따라서 엷은 보라색은 삶과 죽음의 경계에 걸쳐 있는 색이라고 할 수 있을 터이므로 삶과 죽음의 기로에 서 있던 시적 주체가 그러한 색을 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굳이 그러한 순간에 깨어난 의식이 ‘색’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신비한” 엷은 보라색을 본다는 것은 시적 주체의 무의식에 잠재되어 있는 심미적 본성을 대변해주는 현상으로 이해할 수 있다.
2. 예술, 시간과 달관의 결정체
시인은 자아상과 자신의 본성에 대한 성찰과 탐구에 대한 갈망을 지니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러한 성찰의 근본에는 항상 소리라든가 색과 같은 예술적 자질들, 혹은 아름다움의 질료들에 대한 관심이 놓여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러한 관심은 사실 첫 시집인 산화가에서부터 노혜봉 시인의 시적 특징이며 개성적인 부분이었고, 그래서 “미학적 견인주의”라는 평가를 받은 바도 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그러한 관심은 현실의 고통과 신산함을 치유하기 위한 방편이거나 위로의 형식이었지 그 자체가 본질적인 관심사라고 하기는 어려웠다. 이번 시집의 주된 특징은 아름다움 그 자체에 대한 관심이 더욱 농후해져서 음악가나 화가, 혹은 무용가나 판소리 소리꾼을 직접 시적 대상으로 삼아 그 예술적 경지를 그리고자 한다는 것이다. 시인이 주목하는 예술가들은 ‘대가’, ‘명인’, 혹은 ‘득음’이라는 어휘들이 함축하고 있는 어떤 성숙과 완성의 경지에 도달하여 다른 사람이 지니기 어려운 기품을 가진 달인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시인의 예술적 관심사를 확인할 수 있다. 평생 한길을 걸어서 이제는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독자적이며 독보적인 경지에 도달한 예술가의 초상화와 그 예술적 극한, 혹은 절대성을 부조하려는 시도는 시인의 예술적 지향성과 의지를 암시해준다. 예술가를 그린 삶에 대한 시작품은 피아니스트 라흐마니노프의 예술혼을 그린 「낙엽무덤에서 깨어나다」라는 작품도 뛰어나지만 프리다 칼로의 삶과 예술을 그린 다음 작품이 가장 인상적이다.
짙은 초록색 수박 한 통이 한 가운데, 온전히 튼실히 잘 익은 수박 한 덩이는 얼마나 부러운 존재인가!
날벼락. 교통사고, 쇄골 갈비뼈가 부러짐, 골반 뼈가 세 동강으로 부러지고 으스러짐, 다리뼈가 11개나 부러짐. 반의반으로 잘린 수박 세 조각, 산산조각이 난 뼈와 뼈에 그녀를 톱질 하는 소리 칼로 난도질하는 소리 망치소리.
초록색 껍질을 벗기고 꽃잎처럼 톱날 모양으로 자른 수박 한 덩이, 꽃다운 처녀는 두 팔을 빼고는 온몸에 깁스를 한 채 오직 천정만을 보며 누워있다, 올무에 걸린 채 울부짖는 짐승. 침대에 묶여있는 식물,
천정에 달린 거울 속 제 모습. 살에 박힌 대못, 고통과 사슬에 얽매여있는 한 존재, 살고 싶다는 버둥거림, 압도적인 외침, 단 하루치의 삶! 허공에 떠 있는 한 순간. 그림은 살고 싶다는 단호한 외침.
결혼은 환상적 상실. 사랑한다는 배신, 서른 번이 넘는 수술, 끝없는 나락으로 세 번의 유산까지, 그림보다 더 예술적인 생명 창조, 살아 숨 쉬는 노란 연두색 수박 같은, 그 초록색 탯줄을 끊고 아기파랑새를 귀하게 품에 안고 싶었나. 자기혁명 인간승리의,
살점이 무르도록 새빨갛게 눈물이 익어 까만 씨가 점, 점으로 살아 있는 수박, 선홍색 피로 물든 온몸, 겹겹 삶을 저몄던 고통이 영글어 새까만 글자로 박혀있다. ‘인생 만세’ 라는 47개의 사리가 선명하게 빛을 밝힌다.
파랑새로 꼭두새벽 창공을 날고 싶다는 저 희망.
―「프리다 칼로의 마지막 그림 ‘인생만세’」, 전문
어린 시절에는 소아마비를 앓았고, 고등학교 다닐 때에 교통사고를 당해서 척추와 골반뼈, 그리고 자궁을 다쳐 잘 걷지도 못하게 되었고, 서른 번이 넘는 수술을 감당해야 했으며, 세 번의 유산을 겪었고, 사랑하는 연인 디에고 리베라의 외도와 배신으로 고통을 겪어야 했던 멕시코의 독창적인 화가 프리다 칼로의 인생과 그녀의 마지막 작품인 <인생만세>의 예술적 경지가 그려지고 있다. 한 인생이 겪을 수 있는 모든 고통을 집약해 놓은 듯한 프리다 칼로의 인생과 그녀의 마지막 작품이 <인생만세(viva la vida)>라는 점을 대비해 보면, 작품이라는 자체가 아이러니하면서도 프리다 칼로의 예술적 승리를 함축해 놓은 듯하기도 하다.
<인생만세>라는 작품은 여려가지 면에서 프리다 칼로의 인생에 대한 축소판이기도 한데, 시적 화자 또한 그러한 면에 주목하고 있다. “반의반으로 잘린 수박 세 조각”이라든가 “톱날 모양으로 자른 수박 한 덩이” 등은 프리다 칼로의 “산산조각이 난 뼈와 뼈”, 그리고 “그녀를 톱질하는 소리 칼로 난도질하는 소리” 등을 환기하는 객관적 상관물이다. 짙은 초록색의 온전한 수박은 성숙하고 완성된 삶에 대한 지향을 함축하고 있으며, 수박 껍질 속의 붉은 속살은 “선홍색 피로 물든 온몸”을 표상하기도 하지만, 또한 삶에 대한 열정과 예술적 완성을 향한 칼로의 의지를 응축하고 있기도 하다. 특히 시적 화자는 수박 속살에 검정색으로 써진 를 보면서 그것이 “살점이 무르도록 새빨갛게 눈물이 익어 까만 씨가 점”이 되고, 그 점이 “겹겹 삶을 저몄던 고통이 영글어 새까만 글자로 박혀있다”고 해석한다. 그리고 그 까만 씨앗은 47년을 살았던 프리다 칼로의 인생을 함축해 주는 “47개의 사리”라고 규정하기도 한다.
프리다 칼로는 사랑하는 연인 디에고 리베라의 아이를 낳고 싶었으나 자궁을 다쳐 세 번의 유산을 경험한 채 출산의 불가능성만 확인한다. 프리다 칼로가 지닌 출산에 대한 욕망에 대해 시적 화자는 “그림보다 더 예술적인 생명 창조”라고 해석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프리다 칼로의 회화 작품들은 바로 그러한 생명 창조를 대신하는 제2의 생명 창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작품인 <인생 만세>는 프리다 칼로가 살아온 인생을 집약하는 생명 창조로서 그녀의 분신과 같은 존재가 되는 셈인데, “47개의 사리”라는 표현이 그러한 사실을 웅변해주고 있다. 시인은 이러한 프리다 칼로의 예술혼을 그리면서 자신의 예술혼을 가늠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예술의 또 다른 극한을 보여주는 작품을 한편 더 읽어보자.
손은 줄잡고 발뒤꿈치 힘껏 줄당기기, 지신밟기에서
탈판, <동래야유>가 외길 춤꾼의 등불을 높이 밝혔다
…평생 허튼짓 놀며 살아야 한량 춤이 될 둥 말 둥
걷는 것이 아니라 휘저어 보는, 느릿느릿 노닐다가
몸짓이 가야금 선율에 파묻혀 들어가는 어깨춤 신명
허공에 저절로 손가락이 붓방아 방아를 찧는데
발뒤꿈치를 돋아 디디며 뒤틀듯 디뎌 발끝을 옮겼다
선생님은 일부러 박을 어긋 내는 손발 끝선도 아닌데
아무도 흉내 못 내는 엇 박 춤이 장끼라고 하대요
(본래 제 박을 아차! 지나쳐 놓치면 삔다 하지)
‘…조금은 앞지르다가 조금 뒤처지는 그 찰나를 잡채지
흥이 나면 안개 속을 헤매 듯 절로 노닐게 돼야’,**
<동래야유><동래지신밟기><동래학춤><동래고무鼓舞>
춤사위를 꿰뚫어 본뜬 듯 선생님의 도포 자락이 서늘하다
45 킬로그램도 무거운, 핏방울 실핏줄 하나도 무거워
비칠비칠 거닐다 마지막 엇 박 춤 그리는 곡선
옴싯옴싯 나는 듯 지팡이를 번쩍, 붓 그림 노닐다 간,
이슬주 한 잔은 그대 손에 흘러내린, 허공의 긴 얼룩
사운대는 수건 손끝을 따라 간밤에 밟은 내 짧은 꿈이니.
―「지팡이 춤이 더 멋진 마지막 한량」, 부분
동래 고유의 풍류와 흥을 복원했다고 평가받는 최고의 춤꾼이며, 1930년대에 춤을 추기 시작하여 2011년 95세의 나이로 마지막 춤을 추었다는 춤꾼 문장원의 예술혼을 그리고 있는 작품이다. 시적 화자가 주목하는 문장원 춤꾼의 예술혼의 특징은 무엇일까? 두 가지가 눈에 띄는데, 첫 번째는 인위성을 떨쳐버린 자연(nature)으로서의 마음을 비운 예술혼이며, 다른 하나는 융합과 습합을 이룬 예술혼이다.
시적 화자가 주목하는 문장원 춤꾼의 특징은 “허튼 짓”이라든가 “한량”이라는 시어 속에 응축되어 있는데, 이러한 시어 속에는 세속적인 가치와 인공적인 의미로부터 자유로운 예술정신이 함축되어 있다. 시적 화자는 문장원의 춤이 지닌 아름다움에 대해서 “평생 허튼 짓 놀며 살아야 한량 춤이 될 둥 말 둥”하다고 하면서 특정한 의도와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울 것을 강조하고 있는데, 여기에서 우리는 칸트(Immanuel Kant)의 저 유명한 명제인 “무목적의 목적”이라든가 노자(老子)의 “무위이무불위(無爲而無不爲)”와 같은 도(道)의 경지를 연상할 수도 있다. 문장원은 엇 박 춤의 대가라고 평가받는데, 그러한 엇 박 춤은 “일부러 박을 어긋 내는 손발”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스스로 그러한 자연스러움을 실현하고 있다고 하겠다.
두 번째 주목되는 예술정신은 융합의 정신인데, 이는 몰아(沒我)의 체험이라든가 빙의(憑依)와 같은 경지를 연상할 수 있다. “몸짓이 가야금 선율에 파묻혀 들어가는 어깨춤 신명”이라는 구절이 문장원이 실현한 춤의 절대적 경지를 묘사해주고 있는데, 가야금 선율과 합일된 어깨,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몸에 어떤 기운이 지핀 상태를 암시하고 있다. 그러니까 타자와 구별되는 자아라는 분별이 사라지고 가야금의 선율이든가 자신의 몸에 깃든 감흥과 하나가 된 자아몰각의 상황을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흥이 나면 안개 속을 헤매 듯 절로 노닐게 돼야”라는 문장원의 말 속에는 앞서 언급한 자연스러움과 융합이라는 문장원 춤꾼의 두 가지 예술혼의 속성이 고스란히 녹아있다.
시적 화자가 주목하는 융합적 성격은 춤과 그림, 혹은 춤과 붓글씨가 결합하고 있는 장면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문장원의 춤을 묘사하면서 시적 화자는 “허공에 저절로 손가락이 붓방아 방아를 찧는”다고 묘사하기도 하며, 문장원의 장끼인 엇 박 춤에 대해서는 “옴싯옴싯 나는 듯 지팡이를 번쩍, 붓 그림 노닐다 간”이라고 하면서 문장원의 춤은 춤으로 그치지 않고 서예라든가 회화와 같은 다른 예술적 영역으로 초월하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구음(口音)의 대가인 “생짜기생 유금선”의 예술혼을 그리고 있는 「꿈나라, 학춤을 부르는 소리 口音」이라는 작품에서도 유금선의 구음은 “춤꾼의 깃털 날개 도포 자락 가볍게 목을 트는 몸짓”이라든가 “떨리는 음의 깃털을 털며 비상하는 학, 나리릿! 휘리릿!/ 발바닥을 차면 허공, 넓은 소매 자락 하늘이 햐아! 높다”라는 표현 등을 통해서 학춤으로 탈바꿈되는 현상을 묘사하고 있다. 이처럼 춤이 서예가 되거나 회화가 되고, 또는 구음이 춤이 되는 등 노혜봉 시인이 주목하는 예술의 융합 현상은 지극한 경지에 도달한 예술이 지닌 초월적 성격을 함축하고 있거니와 이러한 예술의 경지에 대한 관심이 곧 시인의 예술적 비전과 의지를 암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시인의 예술적 완성에 대한 지향은 판소리에 대한 관심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 시집에는 「별리, 애원성 눈물매듭이 빛날 때」를 비롯하여 「곡진하게 눈물로 매듭을」, 「천 년이 지나도 연꽃은 그냥 열여섯 살」, 「심청이 두 번 죽다」 등 춘향가와 심청가를 패러디 한 작품들이 포진하고 있는데, 이러한 작품들은 판소리의 사설을 모방한 문체를 통해서 판소리의 미학을 구현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창과 아니리, 발림, 그리고 고수가 치는 북소리가 없기에 판소리의 종합적 예술이라는 아름다움을 실현하기는 어렵지만. “우르르르르르 철썩 철썩 찰랑 찰락찰락찰락//떴다 보아라 인당수에 둥싯둥싯 봉오리 속에 꽃잠 든 청아”(「천 년이 지나도 연꽃은 그냥 열여섯 살」)와 같은 구절을 보면 판소리의 가락을 시적 리듬을 통해서 구현하려는 의도를 읽어낼 수 있다. 융합적 예술의 시도라고 평가할 만한데, 시인이 명시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무엇보다 이러한 대목에서 판소리의 최고 경지라고 하는 “득음(得音)”이 연상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3. 사물과 자연 속에 깃든 예술 작품
하지만 시인의 예술에 대한 관심과 열정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은 오래된 사물에서 예술적 기품을 발견하거나 자연물에 깃든 예술적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장면이라고 할 만하다. 시인은 그 전에 견지했던 예술로서 세계를 바라보던 예술의 세계화에서 세계를 예술 그 자체로 바라보는 세계의 예술화라는 경지로 나아가고 있는 셈이다. 시인이 보기에 세계는 단순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음악을 연주하거나 화음을 형성하고 있는 예술품이며, 선과 색을 통해서 예술적 아우라를 실현하고 있는 창조자이기도 한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시인이 유독 예술적 기품을 간직하고 있는 사물과 자연물에 주목하고 있다는 말이 되겠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그러한 사물에서 예술적 가치를 읽어내는 감식안과 심미적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예컨대 이제는 박물관에서만 볼 수 있는 ‘다듬이 돌’은 예사로운 사물이 아니라 “울음 무늬”라는 아름다움을 지닌 예술품이기도 하고, 방망이로 쳐서 돌울음을 연주하는 “난타”의 공연(「사라진 다듬이 돌의 길」)이기도 하다. 또한 “책장 선반 한 쪽”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놋그릇인 옥바리는 “놋그릇 본래의 제 색을 지키려/ 안간힘 갖추고 있는 음전함에 윤이 나”는 “빛나는 품새”(「빛나는 먼지가 색을 입히다」)를 지닌 고고한 아름다움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다음 작품은 항아리가 음악을 연주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 고유의 문화에 서린 예술적 품격을 선명히 보여준다.
부드러운 입술 봉숭아꽃 꽃잎을 짓찧듯
바이올린의 활줄이 A선을 문질렀다
손가락이 여리게 E선 반올림 음을 누르면
뱃살과 꿀벅지 안을 지긋이 달구었다
젖꼭지에 간절한 바램을 졸이며
조개껍질 속 후벼 겹겹 살이 떨렸다
피치카토! 피치카토! 불꽃을 치달려
끊으며 꿈결처럼 활줄을 그었다
배꼽 나이테며 손금에 땀이 고였다
늘어진 솜털 옆 긴 주름이 깊게 남았다
힘찬 그의 숨결도 잠잠히 사위어 갔다
손가락 끝에서 사라진 침묵의 손길도
시간을 덮고 찬찬히 사랑의 기억까지
활줄에 G선 내림음을 느리게 묻었다
손끝에 오래 묵혀서 향기로운 몸
온 숨결로 새 생명을 배태한,
오지항아리 겹겹 주름살이 꽃술로 핀,
―「너의 손을 위한 환타지아-오지항아리의 물꽃, 숨꽃, 불꽃」, 전문
잿물을 발라 윤이 나는 항아리이기에 오지항아리에서 “봉숭아꽃 꽃잎을 짓찧듯”한 색깔을 읽어내거나 “손끝에 오래 묵혀서 향기로운 몸”, 그리고 “꽃술로 핀” “오지항아리 겹겹 주름살”을 발견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시적 논리에 따르면 오지항아리는 아름다움 빛깔과 향기만을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니며 한 편의 클래식을 연주하고 있는 바이올린이자 교향악이라고 할 만하다. 오지항아리는 단순히 정태적으로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역동적으로 꿈틀거리며 어떤 음악을 연주하고 있는 것이며, 따라서 생동감 있는 변화와 어떤 흐름을 담지하고 있는 유동체이기도 한 셈이다.
구체적으로 “바이올린의 활줄이 A선을 문질렀다”는 표현을 비롯하여 “손가락이 여리게 E선 반올림 음을 누르면”, 그리고 “활줄에 G선 내림음을 느리게 묻었다”는 표현 등이 오지항아리가 바이올린처럼 음악을 연주하는 하나의 악기임을 암시하고 있다. 특히 “피치카토! 피치카토! 불꽃을 치달려/ 끊으며 꿈결처럼 활줄을 그었다”는 대목을 보면 현을 손끝으로 튕기며 격렬하게 절정을 향해 치닫고 있는 연주의 현장을 목격하는듯하기도 하다.
오지항아리에서 바이올린의 연주 소리를 듣는 것은 물론 제목이 시사하듯이 “환타지아”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러한 환상이 전혀 근거가 없거나 시적 논리가 빈약한 것은 아니다. “솜털 옆의 긴 주름”이라든가 “오지항아리 겹겹 주름살”등에서 알 수 있듯이 시인이 오지항아리에서 주목하는 주름이 매개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흙으로 빚고 잿물을 바른 오지항아리는 숨을 쉰다고 한다. 그래서 오지항아리에 담은 된장이나 고추장이 발효가 잘되고 숙성이 잘된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니까 오지항아리는 단순히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들숨과 날숨을 통해 호흡을 하고 있는 셈이다. 더구나 햇살과 구름, 그늘에 따라서 오지항아리의 빛깔과 주름살은 변화무쌍한 모습을 보일 것이다. 햇빛이 비치는 각도나 양에 따라서 윤이 나기도 하며, 일렁이는 파도처럼 변하기도 하는 것이다. 이처럼 들숨과 날숨을 교차하며 호흡을 하고, 햇빛의 변화에 따라서 무수한 변화와 흐름을 보여주는 오지항아리에서 한 편의 연주를 상상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는 것이지만, 오지항아리에서 바이올린의 연주를 읽어내고 한 편의 교향곡을 연상하는 것은 예술에 대한 시인의 관심과 열정이 만들어낸 현상이라고 할 만하다. 세월의 때가 묻으며 낡아가는 사물이 음악을 연주하고 있다면 자연이 그러한 일을 못할 리 없을 것이다.
저 멀리 동굴 빛이 새어 비추는 들머리,
물소리의 폭포가 흐르다 멈춘,
종유석 파이프 오르겐 둥글고 긴,
가는 관을 깎아내린 장엄, 저 신전
빛이 닿자 온 살과 몸이 덩어리 채
깨어났다 동굴진주도 석화도
석순 석주도 주름진 커튼들도, 환희의 떨림
교향시 『짜라투스트라』 가 울려 퍼졌다
―「그대가 스며들어 녹인 조각, 종유석」, 부분
석회동굴 내부의 동굴 천정에서 지하수가 물방울로 떨어질 때, 동굴 천장에 고드름같이 달려 있는 탄산칼슘 덩어리인 종유석과 석회질 물질이 동굴 바닥에 쌓여 원주형으로 위로 자란 돌출물인 석순 등이 생성되는 과정을 상상하며 시인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작곡한 교향시 <짜라투스트라>라는 관현악 연주를 듣는다. 시적 화자는 종유석을 “파이프 오르간”에 비유하고 있는데, 이러한 비유는 종유석이나 석순이 한 편의 교향악으로 울려 퍼지고 있다는 시적 진술에 설득력을 부여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자연의 생성과 변화의 활동을 음악을 작곡하고 연주하는 예술 활동으로 읽어내는 시인의 시선이라고 할 수 있는데, 시인이 그 만큼 자연 속에 깃든 리듬과 아름다움에 주목하고 있다는 하나의 방증이기 때문이다. 시인이 자연의 음악 소리에 귀기울일 때 다음과 같은 아름다운 작품이 탄생한다.
그대는 나의 반쪽, 운명의 버팀목입니다
나의 반쪽, 당신은 영원한 첫 손님이지요
바람의 청아한 목소리를 솔잎 귀에 쟁입니다
풋풋한 숨결을 솔방울 비늘깃마다 새긴답니다
난데없는 번개와 우레 폭풍, 올곧은 믿음이 꺾이고
번쩍! 가슴엔 온통 거북껍질이 갈라지기 시작
눈물이 패여 찐득한 송진은 마를 새가 없었어요
고단한 몸을 등줄기에 기울여 봐요. 업어 줄게요
가슴에 포옥 안기어 멈춘 숨, 황홀한 포옹,
어지러운 용틀임 살과 살 붉게 타오르는 몸짓
쉼표와 줄임표 그 생각을 솔잎에 챙겨 둘 게요
눈발에 솔잎마다 쌓이는 높은 휘파람소리
하늘을 우러러 낏낏한 빗질을 자꾸 해 봅니다
그대는 한 권의 자전적 소설 황장목을 품었지요
세월을 나이테로 촘촘히 쓴 이름씨, 움직씨, 그림씨,
온전한 느낌씨, 토씨의 금빛 문장들을 새겼습니다
어느 날, 그대의 버팀목 서재의 책장이 되었지요
무늬의 나이는 살리고 다듬고 문지르고 옻칠을 해
빛나는 당신 책상으로 거듭 태어났습니다
들리나요. 눈물의 목소리, 깊은 울림, 장엄미사가
햇살과 바람이 담금질한 향기의 저 교향곡이!
―「연리지(連理枝) 금강소나무의 노래」, 전문
시인은 줄기가 굵고 곧으며, 붉은 색을 띠고 향기가 진한 소나무, 연륜이 오래되고 목질이 양호하여 임금님의 관으로 사용하여 황장목이라고도 하는 금강송에서 음악을 발견하고 있다. 시적 화자는 연리지 금강소나무에서 “장엄미사”와 “교향곡”을 듣는데, 시적 논리에 의하면 그러한 음악은 연리지 금강소나무가 직접 연주하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그런데 연리지 금강소나무는 어떻게 그러한 음악을 연주할 수 있는 것일까?
시적 논리를 쫓아가 보면, 연리지 금강송은 “바람의 청아한 목소리를 솔잎 귀에 쟁이”고, “풋풋한 숨결을 솔방울 비늘깃마다 새”겨 놓고 있으며, “눈발에 솔잎마다 쌓이는 높은 휘파람소리”를 간직하고 있기도 하다. 연리지 금강송은 소리들의 저장고인 셈이다. 게다가 연리지 금강송은 두 줄기가 “황홀한 포옹”을 하고 있으며 “어지러운 용틀임”으로 “살과 살 붉게 타오르는 몸짓”을 하고 있다. 즉 연리지 금강송의 두 줄기가 하나의 몸처럼 이리저리 꼬거나 비틀면서 하나의 화음(和音)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금강송은 “세월을 나이테로 촘촘히 쓴 이름씨, 움직씨, 그림씨,/ 온전한 느낌씨, 토씨의 금빛 문장들을 새”긴 “한 권의 자전적 소설”이기도 하다. 금강송은 무수한 나이테로 표상되는 시간의 흐름을 견디며 풍상을 겪어온 한 생명의 일대기로서 자전적 소설이기도 한 셈이다.
금강송의 삶이 이렇다면 금강송의 죽음은 어떠한가? 죽음 또한 한 편의 아름다운 예술작품이 된다. 금강송은 베어져서 “무늬의 나이는 살리고 다듬고 문지르고 옻칠을 해/ 빛나는 당신 책상으로 거듭 태어”난다. 목재가 된 금강송은 자신의 그 아름다운 나이테의 무늬를 간직한 채 옻칠을 해서 윤기가 나는 아름다운 책상이 된 것이다. 시적 화자는 이러한 금강송에 대해서 “눈물의 목소리, 깊은 울림”의 “장엄미사”라고 규정하기도 하고, “햇살과 바람이 담금질한 향기의 저 교향곡”이라고 명명하기도 한다. 온갖 “난데없는 번개와 우레 폭풍”을 겪으며, “눈물이 패여 찐득한 송진은 마를 새가 없었”던 금강송에서 “장엄미사”를 듣는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 또한 온갖 소리를 저장하고 있으며, 두 줄기의 화음이 있고, 한 권의 자서전이자 붉은 색과 향기를 지닌 금강송이 “교향곡”이 아닐 리가 없다. 이때 교향곡이란 관현악을 위하여 작곡한, 소나타 형식의 규모가 큰 악곡으로서의 교향곡(交響曲)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비유적 의미에서 소리와 향과 색과 문자가 서로 어우러져 아름다운 결과 무늬를 이룬 종합예술로서의 교향곡을 의미하기도 할 것이다.
지금까지 노혜봉 시인의 여섯 번째 시집의 특징과 성과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아름답고 매력적인 시인의 시를 보고 있으면, 맑게 흐르는 시냇물의 청아한 물소리를 듣는 듯한, 햇살에 빛나는 물결의 반짝임인 윤슬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무엇보다 소리와 춤이, 그리고 향기와 색이, 문자와 무늬들이 서로 교감하고 화답하는 예술적 융합의 경지가 황홀하게 다가온다. 이러한 시적 성취는 첫시집인 산화가에서부터 시인이 줄기차게 밀고 나온 “미학적 견인주의”가 발효되어 복욱한 향기를 내게 된 것이라 판단된다. 그리고 그 과정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예술의 현실화에서 현실의 예술화에 이르는 길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