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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에 처한 분에게
욥기 4:1~11
욥기 1~2장의 내용과 3장의 내용은 너무 대조적입니다. 욥이 그처럼 갑작스러운 상상할 수조차 없는 어려움을 잘 견디고 이겨내는 것 같았으나, 지난 시간에 생각한 3장에서 욥의 인간으로서의 나약함을 엿볼 수가 있었습니다.
욥은 자기의 난 날을 저주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이 세상에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원망스러웠습니다. 우리는 심한 고통 속에서 하는 말 전부를 다 믿을 것은 아닙니다. 정말 고통스러울 때는 본의 아닌 말을 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하나님이 사단에게 자랑하고 칭찬했던 욥이 이렇게까지 되었겠습니까? 우리는 욥의 심정을 이해하고 싶습니다.
욥이 하도 고통스러워 부르짖을 때 데만 사람 엘리바스라는 친구가 욥에게 말합니다.
참고 문헌에 의하면 엘리바스라는 친구는 욥의 친구 중에 가장 나이가 많고 경험이 풍부한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욥에게 비난의 말을 하면서도, 그래도 비교적 온건하고 분별력과 신중함이 있었던 것을 보게 됩니다. 그는 동방의 예의 바르고 진실하고 경건한 사람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의 말에는 일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아픈 사람에게 기름을 발라 주기보다는 쓸개를 발라 주는 격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의 말에는 동정과 사랑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경우에 따라서 책망을 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는 마음의 사랑을 가지고 해야 할 뿐 아니라 그 말이 부드러워야 합니다. “같은 말도 툭해서 다르고 탁해서 다르다”는 옛 말이 있습니다. 서양 속담에는 “면도날은 기름을 발라 갈았을 때 가장 날카롭다”는 말이 있습니다.
더구나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조심스럽게 부드러운 말로 대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2절에 “누가 네게 말하면 네가 염증이 나겠느냐 날지라도 누가 참고 말하지 아니하겠느냐”라고 하였는데, 고난받고 있는 사람에게 책망하기도 어려울 뿐더러 고난받는 사람이 책망을 감당하기는 더욱 어렵습니다.
잠언 16장 32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그래서 홀이라는 분은 “책망을 잘 받아들이는 사람은 사실 책망을 받지 않아도 될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다윗은 시편 141편 5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의인이 나를 칠지라도 은혜로 여기며 책망할지라도 머리의 기름같이 여겨서 내 머리가 이를 거절하지 아니할지라 저희의 재난 중에라도 내가 항상 기도하리로다.”
얼마나 훌륭한, 그리고 겸손한 자세입니까? 은혜가 많은 사람이라야 책망도 잘 받아들입니다.
엘리바스가 욥에게 어떤 책망을 합니까? 본문 3~4절에 “전에 네가 여러 사람을 교훈하였고 손이 늘어진 자면 강하게 하였고 넘어져 가는 자를 말로 붙들어 주었고 무릎이 약한 자를 강하게 하였거늘” 했습니다.
욥은 그 동안 재난 당한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교훈하였고, 위로하였고, 강하게 하였고 붙들어 주었습니다. 이처럼 욥에게는 동정심과 온정이 있었고 지혜와 지성이 겸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전에 네가 여러 사람들을 교훈하였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욥으로 하여금 영적인 위로자가 되도록 들어 쓰셨습니다. 이처럼 욥의 인격이 곧고 정직했을 뿐만 아니라, 그는 사랑과 자비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엘리바스가 욥을 칭찬한 것은 칭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현재의 행위를 책망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욥은 다른 사람을 위로하고 그들에게 위로를 주기 위해 있는 힘을 다했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하고 자기 희생의 봉사를 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교훈하고 위로했습니다. 그는 그 자신이 하나님을 경외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노력했습니다. 더구나 시련 중에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 힘을 북돋우려고 애썼습니다.
사무엘상 23장 16절에 보면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일어나 수풀에 들어가서 다윗에게 이르러 그로 하나님을 힘있게 의지하게 하였다”는 대목이 나옵니다. 시기 때문에 정신 이상이 생겨서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 하는데, 다윗이 대항하지 아니하고 피하여 다닌 것은 그에게 힘이 없어서가 아니었습니다. 사울이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종이요 인간적으로 말하면 장인이어서였는데, 그러면서도 다윗의 마음속에는 회의와 갈등이 있었습니다.
인간 사이의 일도 그러하지만 하나님이 공의로우시다면 어떻게 이렇게까지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무척 괴로워했습니다. 그런데 다행한 것은 사울 왕의 아들 요나단이 아버지의 생각과는 정반대였다는 것입니다. 아버지 사울이 원수처럼 생각하고 죽이려고 쫓아다니는데 요나단은 다윗의 친구로서 다윗을 보호하고 위로하고 격려한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시련 중에 있는 사람을 위로하며 격려하는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로마서 15장 14절에 보십시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선함이 가득하고 모든 지식이 차서 능히 서로 권하는 자임을 나도 확신하노라” 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1절에는 “그러므로 피차 권면하고 피차 덕을 세우기를 너희가 하는 것같이 하라”고 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사역은 가르치고 위로해 주는 일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 자신의 심령이 깨우침을 받아야 합니다. 부드러운 마음을 소유하고 은혜로운 혀로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죄많고 괴로움이 많은 이 세상에는 이런 상한 심령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마음이 어두워 있고 손이 늘어져 맥이 없어지고 다리에 힘이 없어 넘어져 가는 무릎을 가진 사람들이 우리 생활 주변에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연약한 사람, 낙심한 사람, 타락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들은 고통 속에서 신음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는 위로의 힘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위로의 창고입니다.
그런데 오늘 주신 말씀 5절을 보세요. “이제 이 일이 네게 임하매 네가 답답하여 하고 이 일이 네게 당하매 네가 놀라는구나.”
사실 이 말의 어조는 엘리바스가 욥을 위로하고 격려하기보다 조롱하는 것입니다. “네가 다른 사람들이 어려운 자리에 있을 때에는 위로하고 격려했었는데 이제 이 일이 네게 임하니까 네가 답답하여 하고 놀라는구나!”하는 말입니다.
마태복음 27장 42절에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상에 매달려 고난 당하실 때 지나가는 사람이 뭐라고 말했습니까?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 이 얼마나 모욕적인 언사입니까?
이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귀담아 들어야 할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좋은 충고를 주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목사가 좋은 말씀으로 설교는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 따라 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자신에게 적용시키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할 일입니다.
역경을 당할 때 일어서는 것은 내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실 때, 넘어지나 아주 넘어지지 아니하고 다시 일어나는 경험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잠언 24장 10절에 보면 “네가 만일 환난 날에 낙담하면 네 힘의 미약함을 보임이니라”고 했습니다.
환난이 극심할 때 우리는 휘청거리고 넘어집니다. 권투 선수는 강한 상대방의 펀치에 쓰러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주 넘어지지 않고 다시 일어서면 됩니다. 우리의 심령이 넘어졌다가 일어설 수 있는 힘이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를 붙들어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의 오른팔에 있습니다.
욥은 낙심했을 뿐만 아니라 답답해 하였습니다. 당황해 하였습니다. 3장의 말은 1장과 2장의 말과는 슬픈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믿음의 방패가 버려집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위대한 성도가 지니고 있는 믿음과 인내라고 할지라도 버려질 때가 있습니다. 욥은 베드로처럼 물위를 걸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무서운 파도가 밀려오는 것을 보고 그만 물 속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습니다.
어떤 이가 그런 말을 했습니다. “모든 인간의 탁월함 위에는 ‘변하기 쉬움’이라는 말이 새겨져 있다.” 의미 깊은 말입니다. 사람은 아무리 훌륭하다고 해도 변할 수가 있습니다. 변하지 않는 분은 주님밖에 없습니다. 말라기 3장 6절에 보면 “나 여호와는 변역지 아니하나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누가 강한 사람입니까? 이사야 40장 31절을 같이 읽으십니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은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을 앙망하는 가운데 새 힘을 얻어서 이 험한 세상을 승리하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주신 말씀 6절에 “네 의뢰가 경외함에 있지 아니하냐 네 소망이 네 행위를 완전히 함에 있지 아니하냐” 했습니다. 한 사람의 신앙은 그에게 환난의 때가 오는 그때에 참 신앙 여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엘리바스의 이 질문은 그의 이전 진술과 마찬가지로 욥의 경건에 대한 증거입니다. 그것은 1장 1절에 대한 인정입니다. 욥은 하나님을 경외하였고 그의 삶이 온전하기 때문에 탁월한 사람으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문제가 되는 것은 그것이 사실인가 하는 것입니다. 참된 경건은 현재에 대한 확신과 미래에 대한 소망을 제시해 줍니다. 엘리바스의 말은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잘못 적용되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욥의 경외심은 흔들리지 않았으나 그의 믿음은 흐려졌습니다. 빌립보서 4장 6~7절에 보면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했습니다. 이사야 26장 3절에 보면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에 평강으로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 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는 우리의 영혼이 모든 환난에서 승리하게 하십니다. 마틴 루터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저 원수들이 악한 행위를 하는 것을 내버려둡시다. 우리 아버지가 저들을 지배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의인은 사자처럼 담대합니다.”
욥의 신앙은 예수님의 제자들의 신앙과 같아서 폭풍을 만나 시험을 받게 되고 결함이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엘리바스는 욥에게 책망조로 권면합니다. 7절에 “생각하여 보라 죄 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정직한 자의 끊어짐이 어디 있는가” 했습니다. 이 말이 절반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절반은 사실이 아닙니다. 경건한 자도 경건치 않은 자와 마찬가지로 멸망합니다.
전도서 9장 2절에 보면 “모든 사람에게 임하는 모든 것이 일반이라 의인과 악인이며 선하고 깨끗한 자와 깨끗지 않은 자며 제사를 드리는 자와 제사를 드리지 아니하는 자의 결국이 일반이니 선인과 죄인이며 맹세하는 자와 맹세하기를 무서워하는 자가 일반이로다” 했습니다. 때로는 악인이 번창하고 경건한 자가 고난을 당하는 경우도 있습니다(시 73:3~12).
그런데 환난을 하나님이 치시는 것으로 생각하고 하나님이 치시는 것은 죄 때문이라고 말하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욥의 친구도 이런 생각에서 말합니다. 8~9절 말씀에 “내가 보건대 악을 밭 갈고 독을 뿌리는 자는 그대로 거두나니 다 하나님의 입기운에 멸망하고 그 콧김에 사라지느니라” 했습니다.
모든 환난은 죄값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일반적인 사상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9장에 보면 나면서부터 앞을 보지 못하는 소경에 대해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 때문입니까? 자기입니까? 그 부모입니까?”
인간이 왜 고통을 받는가 하는 것은 인간의 영속적인 질문입니다. 가장 쉬운 답변은 죄값으로 하나님이 벌하시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생각하는 욥도 선한 삶을 살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재산, 자녀, 건강을 모두 잃었습니다. 그의 친구는 욥의 시련과 고통은 욥의 잘못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죄 없이 망한 자는 누구인가”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모든 사람들에게 가르쳐진 것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통치였습니다. 그들은 폭풍우나 지진, 전쟁이나 질병까지 하나님의 명령을 통하여 온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명하지 않았는데도 무슨 일이 일어난다고 믿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이 선하시다면 하나님의 자녀들이 왜 고통을 받을까요? 여기에 대하여 날 때부터 소경이 된 것은 죄를 지었기 때문에 그 대가를 받는 것이라고 설명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이론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고통에 대하여 이유를 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고통이 죄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그러면서 이것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모양으로든지 고난 당하는 사람,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있다면 그 원인에 대해서 논쟁하지 말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도움을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이 소경이 된 원인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대신 곧 그 사람을 도와 주셨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주제입니다. 어떤 사람은 설명하는 데 바빠서 일하기에 충분한 시간을 갖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생명이 어떻게 변화할 수 있는가를 말로 설명하시는 대신 창녀를 택하여 그들에게 그의 부활을 맨 먼저 보게 하셨습니다. 영이 물질보다 강한가 하는 데 대해 논쟁하시는 대신 물위를 걸어 가셨습니다. 사람에게 빵이 필요하다고 설명하는 대신 오천명을 먹이셨습니다. 반신불수가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를 말로 설명하는 대신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고 명하셨습니다. 다른 사람을 용서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대신 그는 죽으면서까지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하고 기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대신에 “나는 길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께 고통의 문제에 대한 논쟁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주님의 관심은 논쟁이 아니라 고통 당하는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것입니다.
이런 전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수렁에 빠져 들어가며 살려 달라고 허우적거리고 있습니다. 공자가 그를 보고 말했습니다. “인간은 조심해서 그런 곳에 들어가지 말아야 하느니라” 하였습니다. 부처가 그 옆을 지나가다가 “저 사람이 당하는 것은 세상에 살아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교훈이 될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마호메트는 그를 보고 “아! 알라의 뜻이로다”하고 탄식하였습니다. 힌두는 그를 보고 “여보시오. 용기를 잃지 마시오. 당신은 다른 모습으로 이 세상에 다시 돌아올 것이요”하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를 보시고 “형제여, 네 손을 내밀라. 너를 건져 주리라”하고 수렁에 빠져 들어가며 살려 달라는 그 사람의 팔을 번쩍 잡아 끌어내어 주셨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은 정죄하기에 바빠서 일을 할 만한 시간을 갖지 못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죄인을 구하기에 바쁘셔서 이유를 설명하는 시간적 여유를 갖지 못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생활 주변에서 영적으로, 육신적으로 어려움 당하는 사람들을 너무 많이 봅니다. “왜 저렇게 되었나? 저것이 누구 때문인가?”라고 묻고 따지고 밝히기 전에 “저와 같이 어려움 당한 사람을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도 주님을 따라서 말로 하지 말고 손으로 합시다. 우리의 하는 일에 복이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