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갓핫수림
삼하 2:12-32
주요내용 = 마음의 전쟁
16절에 나오는 용어로 '단도들의 들판'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이 용어에서 다윗 왕가와 사울 왕가의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엿보게 됩니다. 지난 시간에는 유다와 이스라엘이라는 두 왕국의 태동을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두 왕국의 갈등입니다. 즉 두 왕국의 대표적인 장수 요압과 아브넬이 기브온 못가에 모여 이스라엘 12지파의 지배권을 놓고 다투고 있습니다. 그들이 기브온 못에 모인 이유는 그 못은 수천 명이 여러 달 동안 마실 수 있는 많은 물을 저장하는 저장고였기 때문에 전략상 중요한 장소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못을 누가 먼저 지배하느냐가 패권의 중요한 요소였습니다. 그래서 못가를 중심으로 전투가 벌어집니다. 이상의 말씀이 본문의 역사적인 배경입니다.
1.그럼 기브온 못은 무엇을 뜻할까요?
13절 "기브온 못가에서 저희를 만나 앉으니"
여기 기브온은 지리적으로 가나안의 중심부입니다. 그리고 그 곳에는 우물들이 많았고 그 물들을 저장하는 큰 인공 저수지가 그 곳에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곳을 차지하면 이스라엘 12지파를 지배할 수 있는 전략적인 귀한 요충지가 됩니다
그럼, 여기 서로 차지하려고 한 기브온 못은 무엇일까요? 이것은 신령한 의미에서 마음의 감동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이 마음이 얼마나 중요한지 영혼이 이 마음을 차지하면 영에 속한 사람이 되고 육이 이 마음을 차지하면 육에 속한 사람이 됩니다. 그러므로 서로 마음을 감동시켜 지배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2.그럼 구체적으로 이 못을 어떻게 지배할까요?
14절 "아브넬이 요압에게 이르되 청컨대 소년들로 일어나서 우리 앞에서 장난하게 하자"
이 못의 지배권 싸움을 아브넬의 제안에 따라 대표자들이 나와서 먼저 칼로 찌르기 시합으로 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시합에서 아브넬의 "장난하게 하자"고 한 말의 뜻을 잘 알아야 합니다. 이 용어는 '사하크'인데 그 의미는 '비웃다, 조롱하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이 두 진영은 선수를 내세워 겨루며 청군 이겨라 백군 이겨라 서로 상대 낮추기 응원을 시작했습니다.
이와 같이 영혼과 육신은 그들의 추구하는 바를 서로 낮추어 평가하므로 마음의 지배권을 가지려고 합니다. 예를 들면 육신은 '보이지 않는 것보다 보이는 것이 더 좋고 행복하니 그것을 탐하자' 고 말합니다. 그러면 영혼은 '그런 것들은 다 죽고 썩을 것이요 죄이므로 거기에 마음 빼앗기지 말고 영원한 것을 사모하라' 고 말합니다. 그래서 에서는 신령한 것이 보잘 것이 없다고 육의 사람이 되었고, 반대로 야곱은 그것보다 신령한 것을 추구하여 영에 속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지금 성도들의 마음 속에 이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영적인 겻이 호감이 가면 신령한 것을 추구하고 세상 것이 더 좋으면 세상 것을 추구합니다. 어느 주장이 더 옳습니까? 영혼의 주장이 더 옳습니다. 그러므로 성경 롬8:13에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했고, 고후4:18에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했습니다.
3.그런데 이 싸움은 승산이 없었습니다.
16절 "각기 적수의 머리를 잡고 칼로 적수의 옆구리를 찌르매 일제히 쓰러진지라"
이렇게 양 편에서 노련한 용사 12명씩을 선택하여 서로 빠르게 찌르기 시합을 한 결과 양편이 모두가 다 죽고 말았습니다. 참으로 무모한 싸움이었습니다.
이처럼 사람 생각 속에는 승산 없는 싸움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갈5:17에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했습니다. 기억해야 할 것은 아무리 영에 속한다 해도 마음의 갈등마저 아주 없어지지는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도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으셨지만 죄를 이기셨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아주 갈등조차도 없는 완전한 사람이 되게 기도해 달라고 하지만 신자는 그 갈등을 예수 공로로 이겨서 죄가 주장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지 완전하신 분은 하나님밖에는 없습니다.
4.그러나 두 번째 싸움에서는 다윗의 군대가 이깁니다.
17절 "그 날에 싸움이 심히 맹렬하더니 아브넬과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윗의 신복들 앞에서 패하니라"
대표로 시작한 싸움이 모두가 동시에 죽어 승패를 가리지 못하자 싸움은 전면전으로 번졌습니다. 그러나 승리는 다윗에게로 돌아갔습니다.
여기 다윗의 군대는 영의 군대를 상징합니다. 이 다윗의 왕국은 헤브론을 거점으로 하고 있었듯 이제 우리 성도들은 저 높이 되신 하나님 아버지의 우편의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있기 때문에 이미 이긴 자요, 이 확신을 가질 때 백전백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으로는 갈등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지만 예수승리라는 복음에 굳게 서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확신을 삶의 모든 분야에 적용시켜야 합니다.
5.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아사헬이 이 전쟁에서 죽습니다.
23절 "아브넬이 창 뒤끝으로 그 배를 찌르니 창이 그 등을 꿰뚫고 나간지라 곧 그 곳에 엎드러져 죽으매"
아사헬은 요압의 삼 형제 장수 중 하나요, 다윗의 누이의 아들들이니 친족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다윗왕국의 지대한 공로자일 뿐 아니라 반대로 다윗에게 큰 장애물었습니다. 이 세 형제는 영적으로 지정의 즉 마음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마음을 잘 사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 즉 마음을 영혼을 따라 주님을 충성되이 받드는데 사용하면 지대한 효과가 있지만 육신을 따라 내 고집대로 나가면 큰 방해물만 됩니다. 즉 이는 자아로서 자아란 마음의 자기 주관형태로의 타락입니다.
그런데 여기 아사헬의 죽음이 나타납니다. 여기 아사헬의 죽음이 보여주는 교훈은 절대로 인위적인 힘으로 영적인 싸움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아사헬은 삼하 23장에 다윗의 30용사 중의 하나이지만 자신의 주제를 파악하지 못하고 단지 자기의 발이 빠른 것만 생각하고 적장의 실력을 무시하고 적장을 죽여 무공만을 세우고자 과욕을 부렸습니다. 21절에 아브넬이 그에게 다른 사람과 싸우라고 타이름에는 너는 나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 고집을 버리지 못하다가 아브넬의 창 그것도 창의 뒷끝에 찔려 죽고 말았습니다. 여기에 대해 학자들은 아브넬은 아사헬의 형 요압을 생각해서 아사헬을 죽이지 않기 위해 창 손잡이를 사용했지만 아사헬이 너무 빨리 쫓아왔기에 그 창자루에 깊이 찔렸을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그러니까 미련해서 스스로 죽음을 자초한 것입니다.
여기서는 주는 교훈은 우리의 전쟁은 복음에 선 예수로 말미암는 순수한 영적인 전쟁이 되어야지 스스로 이기려고 하면 진다는 것입니다.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그리고 발이 빠르다는 것은 결코 내가 나서서는 안됨을 보여줍니다. 많은 성도들이 복음의 승리와 아울러 패배를 경험하는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의지한다고 하면서도 나도 모르게 내가 스스로 이기려는 내가 주가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절대로 스스로 이기려는 마음을 가미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를 들면 잘해야지 혹은 이겨야지 하는 마음도 엄밀히 분석하면 내가 하려는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우리는 스스로 할 수도 없고, 하려고 해서도 안되며, 따라서 문제를 앞에 두고 고민해서도 안되며, 도리어 할 수 없는 나를 바울처럼 자랑스럽게 여기며, 그리스도의 승리를 나의 승리로 노래하며, 주님을 의지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6.요압과 아비새가 추적하지만 실패합니다.
24-25절 "요압과 아비새가 아브넬의 뒤를 쫓아 기브온 거친 땅의 길 가 기아 맞은편 암마산에 이를 때에 해가 졌고 베냐민 족속은 함께 모여 아브넬을 따라 한 떼를 이루고 작은 산꼭대기에 섰더라"
요압과 아비새는 형제 아사헬의 보를 갚기 위해 그 거친 기브온의 들판을 거쳐 아브넬을 쫓아갑니다. 그러나 그들은 물이 풍성한 기아의 맞은 편 암마산까지 확보했음에도 불구하고 해가 져서 더 이상 싸울 수가 없게 됩니다. 여기 기아는 '폭포, 솟는 샘'이라는 뜻이요, 암마산은 '수로'라는 뜻으로 이 곳에는 물이 풍성한 곳입니다. 즉 당시 물은 전쟁에서 아주 중요한 전력인데 해가 졌기 때문에 이 물도 무용지물이 되고 만 것입니다. 그 틈에 베냐민 지파가 아브넬에 몰려들어 아브넬의 전력은 더욱 막강해지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여기 물은 말씀이요 해는 은혜인데 우리 스스로 인위적으로 노력하면 은혜도 떨어지고 말씀을 안다고 해도 말씀이 그 작용을 하지 못할 뿐 아니라 은혜없는 인위적인 노력은 도리어 육신의 세력인 자아만을 더 강하게 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은혜로 해야지 스스로 하면 자아만 더 강해집니다.
마지막. 그러므로 그들이 한 일은 아사헬을 아비 묘에 장사하고 다시 헤브론에 돌아온 것입니다. 그러자 날이 밝았습니다.
32절 "무리가 아사헬을 베들레헴에 있는 그 아비 묘에 장사하고 요압과 그 종자들이 밤새도록 행하여 헤브론에 이를 때에 날이 밝았더라"
이처럼 우리 의지로 스스로 하려는 율법적인 노력마저도 십자가에 장사하고 오로지 헤브론 즉 높이되신 그리스도 안에 서야 합니다. 그래야 은혜의 해가 밝아옵니다. 그 때 3장 1절 말씀대로 더욱 더욱 강해지는 영적인 삶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예수 안에 견고히 서야 하겠습니다. 문제는 얼마나 견고히 그 안에 서며 또 얼마나 그것을 삶 속에 적용하느냐가 우리의 영적 삶을 결정합니다. 그래서 다윗의 왕국처럼 영원히 견고한 영적 삶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