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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평화의 사도들 원문보기 글쓴이: stellakang
2021.12.12. 대림 제3주일(스바 3,14-18; 필리 4,4-7; 루카 3,10-18)
제1독서
<주님께서 너 때문에 환성을 올리며 기뻐하시리라.>
▥ 스바니야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3,14-18ㄱ
14 딸 시온아, 환성을 올려라. 이스라엘아, 크게 소리쳐라.
딸 예루살렘아, 마음껏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15 주님께서 너에게 내리신 판결을 거두시고 너의 원수들을 쫓아내셨다.
이스라엘 임금 주님께서 네 한가운데에 계시니
다시는 네가 불행을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16 그날에 사람들이 예루살렘에게 말하리라.
“시온아, 두려워하지 마라. 힘없이 손을 늘어뜨리지 마라.”
17 주 너의 하느님, 승리의 용사께서 네 한가운데에 계시다.
그분께서 너를 두고 기뻐하며 즐거워하신다.
당신 사랑으로 너를 새롭게 해 주시고
너 때문에 환성을 올리며 기뻐하시리라.
18 축제의 날인 양 그렇게 하시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제2독서
<주님께서 가까이 오셨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필리피서 말씀입니다.
4,4-7
형제 여러분,
4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5 여러분의 너그러운 마음을 모든 사람이 알 수 있게 하십시오.
주님께서 가까이 오셨습니다.
6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떠한 경우에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
7 그러면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지켜 줄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저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3,10-18
그때에 군중이 요한에게 10 물었다.
“그러면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11 요한이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이에게 나누어 주어라.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여라.”
12 세리들도 세례를 받으러 와서 그에게,
“스승님, 저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자,
13 요한은 그들에게 “정해진 것보다 더 요구하지 마라.” 하고 일렀다.
14 군사들도 그에게 “저희는 또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고 묻자,
요한은 그들에게 “아무도 강탈하거나 갈취하지 말고
너희 봉급으로 만족하여라.” 하고 일렀다.
15 백성은 기대에 차 있었으므로,
모두 마음속으로 요한이 메시아가 아닐까 하고 생각하였다.
16 그래서 요한은 모든 사람에게 말하였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러나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오신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17 또 손에 키를 드시고 당신의 타작마당을 깨끗이 치우시어,
알곡은 당신의 곳간에 모아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 버리실 것이다.”
18 요한은 그 밖에도 여러 가지로 권고하면서 백성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⒈ 전례의 뜻: 믿음으로 행하는 나눔
오늘은 대림 제3주일이고 자선 주일입니다. 자선은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한 가지 방법이며, 주님께서 당신 자신을 송두리째 내어 주신 성체성사를 체험할 수 있는 신앙 행위입니다. 믿는 이들의 자선은 성체성사의 정신에 따라서 물질적인 나눔에 그칠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깨달음의 계기가 되어야 합니다. 즉, 가난한 이들의 불쌍한 그 처지가 나와 무관한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하고, 따라서 그들이 그렇게 가난해지게 된 것이 세상의 죄악 때문이라는 깨달음이 필요하며, 그 죄악에 일조했던 우리 자신의 죄를 기워 갚는 보속의 마음으로 나눔을 행해야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마음에 우리 마음을 합치는 것이 되고, 성체성사를 제정하신 예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니까 자선을 위한 나눔에는 믿음이 담겨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우리 교회의 역사 안에는 나눔만이 아니라 선교처럼 더 종교적인 활동에 있어서도 믿음과 유리됨으로써 불행을 초래한 사례가 있었습니다.
⒉ 과달루페 성모 발현
1531년 12월 12일,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꼭 490년 전 오늘, 인류 역사상 처음이요 교회 역사상으로도 처음으로 성모 마리아께서 발현하셨습니다. 멕시코 시티 인근의 테페약(Tepeyac) 언덕에 성모 마리아께서 아기를 잉태한 원주민 임산부의 모습으로 후안 디에고(Juan Diego, Cuauhtlatoatzin)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멕시코 원주민들은 성모가 발현하기 10년 전 멕시코를 점령한 스페인 군인들의 야만적 행동에 충격을 받고 그들과 함께 온 선교사들이 전하는 신앙을 받아들이기를 꺼려했었지만, 후안 디에고는 프란치스코 수도회 수사 신부들에게서 감화를 받아 세례를 한 처지였습니다.
그런데 그 후 성모 발현 장소인 테페약 언덕이 공교롭게도 아즈텍 토난친(Aztec Tonantzin) 여신의 신전이 있던 곳이었기 때문에 성모발현 이후 전 멕시코의 원주민들이 토속신앙을 버리고 세례를 청했고, 여신전에서 인신을 공양하는 우상숭배 풍습에 젖어 있던 죄인들은 회개하여 줄을 지어 고해성사를 청했습니다. 과달루페에 발현하신 성모님께서 허리에 맨 검은 띠는 임신한 여성을 나타내는 원주민들의 전통이었고, 성모님께서는 당신을 ‘과달루페(Guadalupe)의 영원하신 동정 마리아’로 불러주길 원하셨습니다. ‘과달루페’는 ‘뱀을 물리친 여인’이라는 뜻입니다. 창세기 3,15의 말씀을 연상시키지요? 과달루페의 성모님께서는 발현 직후 멕시코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셨다가 1910년에는 라틴아메리카 대륙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셨고, 1999년에는 남북 아메리카 대륙 교회의 수호자로 선포되셨습니다. 2002년에는 발현 목격자인 후안 디에고가 성인품에 올랐습니다.
⒊ 과달루페 발현의 논리적 귀결인 루르드 발현
지난 12월 8일 우리는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 대축일을 지냈습니다만, 이 대축일은 이와 관련된 성모 발현 사건, 즉 1854년에 프랑스 루르드에서 베르나데트 수비르 소녀에게 발현하신 성모 마리아께서 직접 당신의 원죄 없으신 잉태를 알려주셔서 지내게 된 것입니다. 원죄 없는 잉태, 즉 무염시태는 창세기 3,15을 확인해 주신 과달루페 성모의 논리적 귀결입니다. 뱀의 머리를 바술 정도로 악에 맞서는 여인이라면 예수의 어머니이신 마리아밖에 없고, 또 그런 어머니이시라면 잉태될 순간부터 마귀가 부추기는 원죄에 물들지 않으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근세 유럽에서는 성경의 말씀을 믿지 않는 세속적 풍조가 프랑스 혁명 이후 만연해 있었습니다. 물론 일부 소수의 신자들은 공식 교리로 반포되기 전인데도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를 열심히 믿고 있었지만, 대다수의 신자들은 이 신비는 물론 하느님을 믿지 않는 무신론 사조가 팽배해 있기 때문에 성모님께서 발현하셔야 했던 사정이 있습니다. 이처럼 최초의 성모 발현인 이 과테말라 발현 역시, 사람들의 죄악 특히 선교를 한다고 하면서 원주민들을 우상숭배자로 몰아 패악을 저질렀던 악행과 관련이 있습니다.
즉, 성모 마리아께서는 후안 디에고에게 “너희가 나의 사랑과 자비, 보호를 증거하기 위해 이곳에 성당에 세우길 바란다.”고 메시지를 남기셨으며, 이 자리에 성모 마리아 발현 기념 성당이 세워짐으로써 1492년 콜럼버스가 남아메리카 대륙을 정복한 이래 원주민 8백만 여명을 죽이는 등 스페인 가톨릭 정복자들에 의해 자행되어 온 학살이 당장 멈추었고, 뱀의 여신을 숭배해 오던 멕시코 아즈텍 문명의 원주민 8백만 여명이, 그러니까 당시 멕시코의 전 인구가 그 후 7년 만에 집단으로 개종하는,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믿음과 상관없이 행해지던 종교적 행위가, 아무리 선교라고 하더라도 얼마든지 성모 마리아께 발현하시어 반대 메시지를 주셔야 했을 만큼 비복음적일 수 있다는 역사적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⒋ 가톨릭 교회의 나눔
나눔에 믿음을 더하여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해온 가톨릭 교회의 전통적인 방식은 네 가지인데, 긴급구호, 사회복지, 사회개발 그리고 사회운동입니다.
긴급구호는 일시적으로 화재나 수재, 철거나 지진 등 재해를 당하여 어려워진 이웃들에게 긴급하게 도움을 주는 것입니다. 이들에게는 한 번만 도움을 주어도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부모를 잃어버린 고아나, 부양해 줄 가족이 없는 독거노인, 또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장애를 입은 경우에는 한 번만 도와주어서는 안 되고 지속적이고도 전문적으로 도움을 주어야 합니다. 국가나 민간 그리고 교회의 사회복지 활동이 여기에 해당됩니다.
그런데 이런 도움은 일방적일 수밖에 없다는 한계가 있습니다. 더 많은 수의 가난한 이들은 가정도 있고 노동력도 있는데 자기 집이 없고 일자리가 불안정해서 어렵습니다. 이런 이들에게는 일방적으로 도와주어서는 효과도 없고 반감을 사기 일쑤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스스로 조직을 형성하고 자기 문제를 주장하게 함으로써 공론화의 장으로 끌어내어 정책적으로 도움을 주는 사회개발 방식이 필요합니다. 이를 공동체 운동이라고도 합니다.
가난이 사회병리 현상이라고 볼 때, 위의 세 가지 방식은 사후 치료에 해당됩니다. 질병도 사후 치료보다는 사전 예방이 중요하듯이, 가난에 대해서도 미리 예방하는 일이 중요한데 그것은 가난한 이들이 생겨나지 않도록 여론을 조성하는 계몽 활동이나, 정책을 개선하기 위한 청원 활동 또는 필요할 경우 법률을 만드는 입법활동이 있습니다. 이를 사회운동이라 합니다.
⒌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신 예수님
이상 가톨릭 교회가 전통적으로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해온 방식은 예수님께 기원을 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성령께서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는 자의식을 매우 강하게 지니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공생활 시작 무렵부터 이렇게 당신의 사명을 천명하시고 나서 사람들을 찾아 다니셨습니다. 그러자 소문이 금새 퍼져서 병든 이들, 마귀 들린 이들이 많이 찾아와서 도움을 받았습니다. 이 과정에서 종종 기적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오늘날의 긴급구호와 사회복지에 해당되는 활동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복음서에는 예수님께서 만나시어 도움을 주신 가난한 이들을 부르는 호칭이 매우 다양합니다: “눈먼 사람, 절름발이, 불구자, 나병환자, 굶주리는 사람, 우는 사람, 박해받는 사람, 억눌린 사람, 묶인 사람, 무거운 짐을 지고 수고하는 사람, 군중, 보잘것없는 사람, 가장 작은 이들, 맨 끝자리의 사람, 어린아이, 철부지,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 등입니다. 그런데 부유한 바리사이들은 이들에 대해서 율법도 몰라서 죄를 짓는 저주받을 족속이라고 낮추어 불렀습니다. 그러면서도 헌금을 많이 낸다고 자랑할 뿐, 그 가난한 이들이 죄를 짓지 않고도 살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은 결코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위선자라는 책망을 들었던 것이지요. 그들과 대조적으로 믿음으로 나눔을 행한 모범적 사례는 가난한 과부입니다.
이렇게 가난한 이들에게 직접 도움을 주신 일도 많았지만, 하느님 나라가 가난한 이들의 것이라고 선포하시면서 배고픈 이들에게 먹을 주고 목마른 이들에게 마실 것을 주며 서로에게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고 가르치신 산상설교에서처럼 간접적으로 하지만 지속적일 수 있도록 도움을 주신 적도 많았습니다. 오늘날의 사회개발이나 사회운동에 해당되는 활동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세례를 주는 운동을 벌이면서, 군중에게 정의롭게 나눔을 실천하라고 가르친 일도 여기에 해당됩니다. 사실 가난한 이들에게는 믿는 이들이 행하는 나눔이 큰 힘이 됩니다. 이 믿음의 나눔은 우리가 이 대림 시기에 성탄을 준비하면서 행할 수 있는 회개입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신 예수님을 따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난한 이들이 믿는 이들보다 예수님의 성탄을 더 간절하게 기다립니다.
⒍ 가난한 이들의 권리
바오로 6세 교황은 회칙 ‘민족들의 발전’에서 가난한 라자로와 인색한 부자의 비유를 들어주신 예수님의 가르침(루카 16,19-31)을 인용하면서, 이제는 부자와 라자로가 같은 식탁에 앉아 먹을 수 있는 사회를 건설해야 한다고 역설하였습니다. 성경에서는 굶주린 라자로에게 부자가 빵부스러기조차 나누어주지 않았지만, 그러나 바람직한 사회는 부자가 라자로에게 개별적으로 자선을 베푸는 사회가 아니라 라자로의 권리로 구조적이고도 제도적으로 정의가 실현되는 사회로 나아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바오로 6세의 호소는 가난이라는 사회 현상의 정곡을 꿰뚫어본 성찰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당시에나 지금이나, 가난한 이들이 겪는 가장 큰 고통은 빈곤으로 인한 불편이 아니라 누군가의 도움으로 살아야 한다는 수치심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이들의 자선에 의지함이 없이 떳떳하게 정책과 법률 등 제도적으로 지원을 받게 해 주는 일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이것이 가난한 이들에게 부여된 권리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는 결코 이룰 수 없는 꿈이 아닙니다.
첫댓글 아멘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