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빛마저 사라진 캄캄한 밤, 우르르 쾅쾅 무섭게 울어대는 천둥소리,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번득이는 번갯불, 그리고 천지를 윽박지르는 괴물 같은 소리, 소리……. 마이삭 태풍이, 난리굿이다.
목이 타고 가슴이 쿵쾅거려서 물 한 모금 마실까 하고 부엌으로 가는 순간 갑자기 “찌이익” 하고 전깃불이 나가 버린다. 칠흑이다. 창살은 세찬 바람에 덜컹거리고 괴상한 바람 소리가 도깨비 춤을 춘다. 무서웠다. ‘명색이 귀신 잡는 해병대 출신인 내가 왜 이래?’ 하며 진정을 해도 쭈뼛쭈뼛 머리가 선다. 태풍이 휘몰아치는 고층아파트의 하룻밤이 내게는 소름 끼치는 악몽이었다. 구백여 명의 목숨을 앗아간 사라호 태풍 함석지붕이 날아가 밤새 비를 맞으며 떨었던 기억은 생생하지만, 태풍 때문에 공포의 밤을 지새우기는 처음이다.
마이삭과 하이런의 연이은 태풍이 휩쓸고 간 자리에 가을이 성큼 다가섰다. 핑크뮬리와 구절초의 향연에 넋을 잃었던 자라섬 은물결이 손짓을 한다. 가을 여행이나 갈까하고 마음을 뒤척이는데 오랜만에 친구가 저녁 초대를 했다. 외출복을 찾아 장롱문을 여는 순간 퀴퀴한 냄새가, 진동을한다. 긴 장마를 틈타 곰팡이가 떼거리로 쳐들어와 뽀얗게 집을 짓고 있었다. 도대체 어찌된 영문인가. 한정된 간에 구접스런 옷가지를 빽빽이 걸어놓은 관계로 바람의 길을 막았던 것이 화근이었다.
어서 빨리 바람의 길을 내어주어야겠다는 일념으로 장롱문을 열었다. 해묵은 점퍼와 티셔츠, 통으로 된 바지와 자켓 등이 빼곡하다. 돌고 도는 유행, 차마 버리지 못한 옷들이 곰팡이의 산실이 되고 만 것이다. 사지는 멀쩡하지만 다시는 볼 일 없는 놈들을 모두 퇴실시키기로 했다.
“ 그거 안 입어요. 다 버리세요.” 수년 동안 한 번도 입지 않은 것들을 모두 버리고 아끼는 옷들만 남겨 놓았다. 남겨진 옷들이 가볍게 ‘휴’하고 숨을 쉰다. 그들에게 바람의 길을 열어 주고 나니 마음이 가뿐해진다. 버린다는 것이 이렇게도 사람의 마음을 산뜻하게 할 줄은 몰랐다. 비워지면 허전할 줄만 알았는데 비워진 자리에 상큼한 마음이 채워질 줄이댜.
문득 파지 줍는 할아버지 생각이 났다. 박스를 비롯하여 고물과 헌 옷가지를 모아 두었다가 준다. 다소 불편하고 신경이 쓰이는 일이지만 그분에게는 도움이 되는 것 같아 오 년이 넘도록 하고 있다. 곰팡이 소동으로 내게서 비워지는 헌 옷가지들이 할아버지에게는 생활의 수단으로 채워지는 비움과 채움의 상관관계를 생각해 본다. 채워지는 사람이기에 비울 수가 있고 비워져야 다시 채울 수가 있다는 비움과 채움의 선순환을 되새김한다. 삶에 찌든 찌꺼기는 비우고 맑은 영혼을 채우겠다고.
친구가 이사 선물로 가져온 관음죽 나무에, 묵은 잎사귀가 누렇게 시들어간다. 가지 끝에는 파릇파릇 새순이 돋아난다. 헌 순은 비워지고 새순이 채워진다. 우리네 인생도 매한가지가 아닌가. 목숨이 다하여 비워지면 새로운 삶이 다가와 새 시대를 열어갈 테니. 인생은, 비움과 채움, 채움과 비움을 반복하면서 먼 길을 유랑하는 보헤미안. 기나긴 여행이 끝나면 빈손으로 돌아가야 하는 길손이 아닌가.
나이 들어 비우며 살라는 말을 실감한다. 이사할 때마다 망설였던 “버릴까, 가져갈까.” 이제는 버리는 쪽에 방점을 찍는다. 그것이 가볍게 사는 인생인 것을 하잘것없는 미생물에게서 배웠다. 비록 인간과 잡물과의 무언의 소통이지만 숨겨진 의미를 오늘날의 사회상에서도 찾을 수가 있을 것 같다. 소통이 사라지고 아집을 비우지 못한 채 질시와 반목으로 치닫는 정치풍토에 새로운 바람이 잦아들면 얼마나 좋을까. 화해와 협치의 바람으로 채워지는 날에는 쾌재를 부르리라.
태풍이 몰아치고 긴 장마가 머물다간 자리, 미처 비우지, 못한 우둔함을 일깨워 준 하찮은 미생물에게도 삶의 지혜가 숨어 있었다. 바람도 길이 있어야 불고 마음도 길이 있어야 통한다. 이제는 알게 모르게 퇴적되어버린 삶의 찌꺼기들을 하나 둘 비우며 가련다.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마음과 마음으로 통하는 바람의 길을 내어 주리라. 삶이 끝나는 날, “허 허 허” 웃을 수 있게. 무거운 세상 가볍게 살아간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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