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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 금화당에서 외국의 여인들과 어우러진 전통한국적인 시간들
세계여성학대회 참가자들에게 우리의 굿을 보여주기 위하여 금화당 당주 김금화 선생과 굿을 어떻게
진행할 것인가를 상의한 적이 있었다.
2시간에서 1시간 이내에 보여주어야 할 것을 정해야 하였다.
김금화 선생은 해외공연과 국내공연의 경험이 많은 분이라 굿을 하는데 어려울 것은 없었다.
복떡 나누어주기, 인연 맺기, 작두타기, 대동 춤의 네 가지로 정했다.
이 네 가지를 하기 위하여 아침부터 굿을 시작하여야 하였다. 이 굿의 이름이 서해안풍어제이다.
6월 24일 아침에 집을 나서면서 김금화 선생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노선생, 오늘 강화도로 꼭 와야 해요. 다른 데로 가지 말고.”
“김선생님이 오라고 하시면 그리로 가지요.”
김선생이 의례적인 인사말로 그런 말을 하는 것 같지 않았다.
내가 그곳에 가지 않으면 아니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렇다고 내가 가서 그 곳에서 할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투어 행사는 생극에서 소서노석상제막식을 시작으로 진행되었다.
여기에서 행사를 끝내야 다음 행사지인 강화도로 갈 수 있었다.
이귀선씨가 마고 춤을 시작하기 전에 숙명여대에서 한국사를 강의하는 강영경 선생을 만나게 되어
내가 강화도 금화당으로 간다고 했더니 안동으로 가려고 했던 마음을 바꾸어 함께 강화도로 가게 되었다.
가이드 학생에게 물으니, 3번 버스가 강화도로 간다고 한다. 운전기사에게 내가 함께 가겠다고 말하고,
승객들이 다 타기를 기다려, 맨 앞자리에 앉았다.
차가 출발한 시간은 오후 5시 58분이었다. 너무 늦게 출발한데다가 중간 중간 차가 밀려 시흥 톨게이트
를 지나면서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하였다. 나는 운전기사와 피로를 덜 겸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저는 선생님을 처음 보는 순간 마음이 편안해졌습니다.”
서로 만난 적이 없고, 오늘 인사를 나눈 적도 없는데, 그가 나를 보는 순간에 그러한 느낌을 받았다고
하니, 기이한 생각이 들었다. 나는 아무에게서도 그런 말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금화당에 도착하니 9시를 넘었다. 자지러지는 장구가락에 어우러지며 제자들이 굿을 하고 있었다.
당주께서 한복차림으로 손님들을 맞았다.
나를 보더니. “어쩐지.”하며 웃는다. 이 말에 무엇인가 드러내지 않은 뜻이 있었다.
금화당에서는 외국인과 내국인을 위하여 비빔밥을 준비하였다.
금화당의 1층 규모가 전면 5칸, 측면 3칸 반 정도 되므로 40명의 인원을 1층에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었다. 이 일을 위하여 수고하는 사람들이 남녀 합하여 10여 명은 되는 것 같아 보였다.
준비한 반찬은 비빔밥에, 전, 삶은 돼지고기, 오이미역창국, 셀러드, 김치, 조개젓, 쌈 등이다.
외국 여자들이 젓가락질로 식사를 하는 것을 보니, 젓가락문화가 세계화가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젓가락을 쓰는 나라는 우리, 일본, 중국이다.
시간이 너무 늦어 한 시간 정도만 공연을 보기로 하였다.
모처럼 보는 공연, 외국인으로서는 평생 한 번 볼 수 있을까말까 한 귀중한 공연인데 아쉽지 않을 수
없었다.
저녁을 마치고 공연장으로 내려갔다.
공연장은 금화당을 배경으로 동북쪽에 자연석을 세워 계단식의 돌좌석을 만들었다.
그러므로 무대를 내려다보게 되어 있었다.
악사들이 동쪽으로 자리를 잡았고, 풍어제를 알리는 깃발이 사방에 서있고, 아래에서 올라오는 계단이
끝나는 곳에, 솔문을 세웠다.
마지가 걸린 곳 바닥에 띠배도 만들어 놓았다.
조명을 밝혀 관람을 하는 데엔 지장이 없었다. 모기가 달려들어 물지 않았다.
김금화 무당이 손님들을 위하여 무복을 갈아입고 굿을 주도하기 시작했다.
외국사람들을 위하여 축원하고 韓中日의 평화와 번영과 공존도 기원하고, 마지막에 댕큐를 연발하니
외국 여자들이 박수를 치며 즐거워하였다.
이어서 복떡을 나누어주는 거리로 들어갔다.
단상을 사람 크기보다 크게 만들고, 그 위에 떡을 담은 그릇에 동글동글한 흰 떡을 담아 놓았다.
몇 사람의 외국 여성들을 대표로 불러 접시를 논아주고 떡을 담게 하여 일행으로 참석한 외국 여인들
에게 나누어주도록 하였다.
넙적한 떡은 둥근 반데기라고 하여 해를 상징하고, 둥근 공처럼 생긴 떡은 달을 상징한다.
네모난 직사각형의 떡은 땅을 상징한다. 이들 떡에 천지인天地人과 원방각圓方角의 의미가 있다.
원래 복덕 나누어주기는 만구대탁굿(만수대택굿)에서 일월마지행사로 하던 것이라고 한다.
다음엔 청실홍실을 꼬아 만든 실을 외국여성대표들에게 나누어주어 목에 걸게 하였다.
이승에서의 인연의 끈을 매어주는 것이다. 참가자들이 그 의미를 알고 나자 좋아하였다.
다음엔 작두타기이다. 드럼통 2개를 길이로 얹고, 그 위에 물동이를 놓고, 물동이 위에 말을 놓고,
그 위에 작두를 놓는다.
작두를 놓기 전에 무당이 작두의 성능을 실험한다고 한지를 갖다대면 썩하고 갈라진다.
이 칼날을 다리에 문지르고, 팔에 문지르고, 혀에 대어 사람들을 조마조마하게 한다.
그러나 상처는 나지 않고 말짱하다. 이런 위력을 보여준 다음에 작두를 설치한다.
당주가 대야에 발을 씻고 나서, 사다리 앞으로 뛰어간다.
사다리를 올라가서 작두를 탄다. 작두 위에 서서 먼저 오방기를 휘두르다 둘둘 말아서 외국인에게 뽑게
한다. 붉은 기를 뽑으면 참가자들이 좋다고 환호한다.
쌀을 뿌려 이를 받아먹게 한다. 터키 여자에게 공수를 주었는데 맞는다고 한다.
당주가 작두에서 내려와 상민의 복장으로 갈아입고 나서, 신복 한 가지씩을 참석자들에게 나누어주어
입게 하고, 전립도 나누어주어 쓰게 하고, 가면도 나누어주어 쓰게 하고, 소고도 나누어주어 두들기게
함으로써 대동굿의 중요한 장면으로 넘어간다.
신나게 가락과 리듬이 나오고, 주무를 따라 신나게 춤추며 돌아간다.
한국사람이나 외국사람이나 춤을 즐긴다. 강영경 선생도 황색의 포를 입고 춤을 춘다.
나도 황색의 포를 입고 소고를 두드리며 춤인지 뭔지 알 수 없는 걸 추고 있다.
아쉽지만 정한 시간을 넘겨 끝을 내야 하였다.
0시가 다 되어 버스를 타고 온 사람들은 서울로 출발하였다, 나는 밤에 별을 보기 위하여 이곳에 남았다.
산신각은 구려족과 동이족 시조의 사당
세계여성학대표자회의에 참석했던 여성들과 금화당에 도착하여 저녁식사를 마치고나서 산신각으로
갔다. 산신각은 6개의 계단 위에 정면에 3칸 측면에 칸 반의 크기로 지은 맞배지붕형식의 목조와 벽돌
혼합형의 한식 단층 건물이다.
벽면은 갈색과 주홍색이 섞인 벽돌을 쌓아 마무리를 하였다.
가운데에 두 쪽의 문이 나 있고, 우측 벽면에 한쪽 문을 내어 출입하도록 하였다.
처마의 네 귀퉁이에 풍경을 달았다.
금화당에 산신각을 공사할 때 몇 번 와 보았지만, 완성한 후에 정돈된 내부를 둘러보기는 처음이다.
전면에서 오른쪽으로 백호여신, 가운데에 백호남신, 왼쪽에 용신을 모시고, 왼쪽 벽에는 서낭을 따로
모셨다.
신화나 신화를 표현한 무신도에는 짐승을 인종 아이콘으로 쓴다.
산신도에 그려지는 용과 백호도 인종 아이콘으로 볼 수 있는 짐승이다.
용은 부루단군이 다스린 용가龍加의 아이콘으로 보고, 백호는 부루단군이 단군왕검의 명을 받들어
호가虎加를 버리고 용가로 호칭(단군왕검 임진 25년 BC 2309)하게 된 쓸모없는 인종 아이콘으로 본다.
호虎를 백호白虎를 쓴 것은 백호의 백白이 사라져 없음을 뜻한다.
백을 없다는 뜻으로 보는 것은 뮤 제국시대로부터 전수해 내려오는 유습이다.
사라진 호가의 인종 아이콘인 백호를 곁에 끼고 있는 할아버지는 <산해경山海經>에 기록된 대인大人
이다.
“군자국 사람들은 의관을 갖추고 칼을 차고 있으며, 짐승을 잡아먹는다.
두 마리의 무늬호랑이를 부려 곁에 두고 있으며, 그 사람들은 사양하기를 좋아하여 다투지 않는다.
훈화초가 있는데, 아침에 나와 저녁에 죽는다. 말하기를 간유시의 북쪽에 있다고도 한다.
(재간유지시북在肝楡之尸北)” (<산해경> 해외동경海外東經 5 정재서 역 민음사)
여기에서 중요한 말은 在肝楡之尸北이다.
이 문자는 <산해경> 해외동경 4에 있는 肝楡之尸在大人北과 같은 문장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해석자들이 이 문장을 제대로 해석한 사람이 없었다.
지나支那 쪽 사람은 해석을 하면 득이 될 것이 없다고 보아 해석을 하지 않은 것이고, 우리 쪽 사람은
역사를 몰라서 해석을 하지 못한 것이다.
필자가 보기에, 在肝楡之尸北는 시尸자에 해석의 포인트가 있다.
尸를 임금, 칠성으로 해석하느냐, 염하지 않은 시체로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차이가 나는 것이다.
시를 임금시나 칠성시로 볼 때는 동이족의 문자로 볼 때이고, 염하지 않은 시체시자로 볼 때는 하화족의
문자로 볼 때이다.
후한後漢 때 허신許愼이 <설문해자>를 썼는데, <설문해자>가 나와 기존의 문자에 새로운 해석을
가하지 않았을 때의 문자를 동이의 문자로 보고, 새로운 해석을 가했을 때의 문자를 하화의 문자로
보아야 하는데, 이렇게 동이문자와 하화문자에 대한 개념을 명확히 한 후에, 在肝楡之尸北을 해석한
다면 해석의 오류를 방지할 수 있다고 본다 .
尸를 동이의 문자로 보면, 유지시楡之尸는 유망국楡罔國의 임금이라는 뜻으로 해석이 된다.
유지시의 앞에 있는 간肝은 간이라도 내 줄만큼 충성스럽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在肝楡之尸北은 북쪽에 있는 충성스런 유망국의 임금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간유지시의 북쪽에 있는 것이 대인이므로, 유를 유망국으로 보면 대인은 대인국, 즉 치우천왕이
다스리는 청구국이 된다.
따라서 유망국의 임금이 대인국의 임금인 청구국의 치우천왕에게 충성하고 있음을 나타낸 것이다.
다시말해서 유망이 치우천왕에게 충성하고 있음을 뜻하는 문장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유망이 임금을 할 때는 황제의 황제국, 치우천왕의 청구국이 중원대륙에 공존하였다.
유망국은 산동반도의 곡부曲阜에 있었다.
곡부의 북쪽이라면 탁록涿鹿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는데, 탁록에 치우천왕이 다스리는 청구국이 있었
음을 추론해 낼 수 있다.
탁록에 있었던 대인국이 바로 청구국이다.
탁록涿鹿의 탁涿은 강이라는 뜻이고, 록鹿은 사슴이라는 뜻이다.
필자는 최근에 중국사람 양만연이 “신라의 뿌리가 초나라”라고 쓴 글에 대한 반론으로, “신라의 뿌리는
초나라가 아니라 탁록에 있었던 청구국”라고 쓴 글에서, “단군조선의 마가馬加가 신라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고 주장한 바가 있다.
청구국이 탁록에 있었음을 알리는 것이 신라 왕관의 측면에 꽂는 사슴뿔 관식이다.
임금이 사슴뿔 관식을 함으로써, 신라가 탁록에서 온 청구의 후예임을 나타내려 하였던 것이다.
산신각에 모신 산신이 백호를 데리고 있는 것도 신라의 왕관에서 보여주는 사슴뿔로 본색을 밝히려는
의미와 유사한 의미가 있다.
족명이 용가로 대체되는 바람에 사라지게 된 호가를 나타내고자 하는 의미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금화당의 산신각에 그려진 백호를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용왕의 용과 연결이 된다고 볼 수 있다.
족명 호를 없앤 분이 단군왕검이므로, 호를 단군왕검이 거느리게 되었음을 나타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용왕의 용은 호가의 호를 버린 부루단군이 새로이 갖게 된 족명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백호여신은 단군왕검의 부인 하백녀로, 백호남신은 단군왕검으로, 용신은 부루단군으로 볼 수 있는
신상이므로, 이 산신각은 단군왕검 일가 중에서 세분을 택하여 산신으로 모셨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전각의 성격은 산신각이다.
마리산에 천제를 지내는 참성단이 있으므로, 그에 걸 맞는 산신각이 이 곳에 들어서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따라서 이 산신각의 전각명칭은 <檀君殿>으로 해야 맞을 것으로 본다.
<단군전>으로 산신각의 이름이 정해진다면, 단군왕검의 첫째 부인 웅녀와, 강화도에 와서 참성단
塹星壇을 만들고 정족산성鼎足山城(삼랑성三郞城)을 쌓은 부여夫餘·부우夫宇·부소夫蘇 세 분의 아드
님의 신상도 함께 그려 모셔야 하리라고 본다.
이 고장의 역사가 그분들에 의하여 시작되었으므로 그렇게 하는 것이 정상일 듯싶은 것이다.
누군가 서낭이 누구냐고 한 무당에게 물으니, 임경업 장군이라고 대답한다.
임경업장군은 서해안풍어제에서 귀하게 모시는 신명이다.
그러나 이 고장이 강화도인 만큼 여기에 임경업장군을 모신다면 격에 맞지 않는다고 본다.
임경업장군이 계실 곳은 연평도이다. 임경업장군보다 더 격이 높은 장군을 모셔야 맞는다.
단군왕검이 신묘 24년(BC 2310)에 조선의 관제官制를 처음 정했을 때, 웅가熊加를 삼고 병兵을 주관
하게 했던 특명特明을 모시면 괜찮으리라고 본다.
웅가는 단군왕검의 첫 부인 웅녀熊女가 나온 부족이다.
또 단군왕검은 14세 때 웅가의 중심국인 웅심국왕熊心國王의 딸 웅녀에게 장가갔다.
단군왕검 일가는 모두가 신명으로 표현되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자면 연구가 필요하다.
인종 아이콘인 곰이 등장해야 하고, 웅녀에게는 웅족을 대표하는 부인으로서의 의미가 부여되어야 한다.
그가 백호를 탄다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용왕전>에는 호가虎加의 임금이었다가 임진 25년(BC 2309)에 호가의 이름을 바꾸어 용가龍加의
임금이 된 부루단군이 모셔졌다.
마가의 왕이 된 제2자 부여, 노가鷺加를 맡았던 제3자 부우, 응가鷹加의 왕이 된 제4자 부소도 신명을
살리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분들이 천제 지내는데 깊이 관여했으므로 신명을 살리는 것이 좋다고 본 것이다.
무당이 굿을 할 때 백로 깃을 단 갓을 쓰는데, 백로를 인종 아이콘으로 쓰는 노가의 왕인 부우를 표현
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산신도에서 백호가 그려지는 이유는 호가虎加를 폐하고 용가로 대체하였기 때문에 단군왕검이 이를
감싸안는다는 의미가 있다고 본다.
말하자면 족명을 폐하여 지위가 낮아진 호가를 측근에 두었다고 보는 것이다.
백호가 죽음을 의미하게 된 것도 이러한 의식변화의 한 단 단면일 것이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몇 사람의 외국여인들이 무신도 앞에서 경의를 표한다.
남의 나라의 고유한 종교를 존중해 주려는 마음 가짐은 지식인들이 마땅히 갖추어야 할 바람직한 일
이다. 좋은 현상이라고 본다.
그러나 우리의 무속신앙을 내 나라 사람은 물론이고 외국인 들에게도 속 시원하게 설명하지 못한
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일본 무용 부토(舞蹈)가 추구하는 교활함의 세계
2005년도 한일 우정의 해 무용교류전이 국립극장에서 펼쳐지고 있다.
무용가 이귀선씨 덕에 모처럼 일본무용을 접하게 되어 일본사람들이 무엇을 무용을 통하여 고민하는
가를 알아볼 수 있는 기회로 생각되어 함께 앞좌석에 앉아서 관람하였다.
충격적인 무대, 완성이 되어 있는 것 같으면서도 완성이 되어 있지 않은 정신의 세계, 드러내는 것 보다
숨기는 것이 많은 교활함, 무용 같지 않으면서 무용 같은 무용, 철학적이면서 비철학적인 세계관, 신화
적이면서 비신화적인 세계, 문명적이면서도 비문명적인 비평, 종교적이면서 비종교적인 종교성, 역사
를 해석하려고 하면서 바르게 역사를 해석해내지 못하는 어수선한 부조화의 세계가 부토무용이라는
이름으로 펼쳐진다.
제목은 <海印의 馬>이다.
우리에겐 생소한 제목이고, 이해하기 힘든 제목이다.
해인은 움직임이 없는 부처님의 마음으로 해석된다. 마치 거울과 같다.
그래서 삼라만상이 그대로 비춰진다.
여기에 말이라는 이미지는 대단히 역동적이다. 움직이는 마음, 즉 번뇌로 볼 수 있다.
이렇게 해석을 하면 이 작품이 불교의 구도적인 작품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기 쉬운데, 작품을 보면 전혀
불교적인 작품이 아니다.
부토는 우리의 <천부경>에서 영감을 얻어 자기 나름대로 무용철학을 완성한 것 같아 보이는 무용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천부경>은 1~10의 수리 체계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1~5를 강剛이라고 하면, 6~10은 柔가 된다는 강유剛柔의 구조를 갖는다.
부토는 1~10을 10배 확대하여 +100·-100=음양100으로 보는데, 여기에서 -1(음1)을 찾는다고 한다.
우리가 <천부경>에서 찾는 것은 1, 즉 하나님이다.
부토가 찾는 것도 하나님은 하나님인데, -1, 즉 부정적인 하나님이다.
우리의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하나님이고, 부토의 하나님은 비창조의 하나님이다.
따라서 우리의 하나님은 일석삼극一析三極이라는 <천부경>적인 하나님의 세계를 갖고 있지만, 부토의
하나님은 -(一析三極)이라는 반<천부경>적인 하나님의 세계를 갖고 있다.
순기능을 하는 하나님의 세계가 아니라 역기능을 하는 하나님의 세계로 볼 수 있는 것이 부토의 세계
관이다.
우주와 자연에 역기능을 하는 하나님이란 노자가 말하는 천지불인天地不仁의 하나님을 뛰어넘는 해악
害惡의 하나님이다. 이는 인공적인 악惡 그 자체이다.
그러므로 부토가 추구하는 세계가 불인과 악과 해악의 세계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해인의 마>가 마지막 부분에서 보여준 교활하고 절망적인 방기放棄의 세계관은 부토의 세계관을
너무나 혐오스럽게 표현하고 있다.
이들은 자신의 세계관을 극명하게 표현하기 위하여 인간의 자연적인 외모를 모두 비자연적인 외모로
바꾼다. 그리고 춤의 양식도 비전통무용적인 동작으로 일관한다.
무대는 수직적인 공간과 수직적인 벽이 교차하며 연속되어 있다.
여기에 자연이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좌측에 벽이 10개이고 공간도 10개이다. 우측에 벽이 10개이고 공간도 10개이다.
이를 다시 말하면 음양 1벽이 좌우에 10개씩 있다고 설명할 수 있는 것이다.
무대 중앙에는 벽과 공간이 5개 교차하며 연속되어 있다.
공간과 공간 사이에 목이 밧줄로 연결된 아직 태어나지 않은 인간들이 좌에 7인 중앙에 4인 우에 7인
으로 배치되어 머리를 숙이고 앉아 있다.
줄을 끊고 탈출하려 하나 불가능하다. 이들이 입을 벌리고 있는데, 다만 소리를 지를 때를 위하여
입을 벌리고 있을 뿐이다. 여기에 이성과 감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단순한 본능만이 눈을 뜨고 있다.
무대 전면으로는 양쪽에 원초적인 갈등의 감정이 붉은 색 부적을 매단 줄을 잡고 있다.
줄을 가지고 공간 안에 갇힌 인간을 통제하고 조정한다. 아직 태어날 때가 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아직 출생하지 않은 인간들은 두 팔을 하늘을 향하여 벌리고 이상스런 고함을 지른다.
의미 없는 듯한 몸짓을 하다가 공간 속으로 사라진다. 갈등의 신은 줄을 잡아당기며 감으며 갈등을
자기 쪽으로 끌어가려 하나 갈등은 풀리지 않는다. 서로 몸을 붙이는 극한적인 대립으로 치닫는다.
하늘에서 왼쪽으로 어둠의 닫집이 내려오고, 오른쪽으로 밝음의 닫집이 내려온다.
갈등이 어둠의 닫집으로 사라진다. 붉은 옷을 입은 화녀가 나와서 사라진 갈등을 끌어내어 화해를
시키려고 애를 쓴다.
화해가 이루어지는 듯 하나, 화녀는 밝음의 닫집에서 태어나는 사내에게 가슴을 젖혀 젖을 먹인다.
아직 출생을 이루어지지 않고, 갈등과 화해 모두 어둠의 닫집으로 사라진다.
무당이 등장하고, 이어서 오니(악령)도 등장하여 일본의 전통 무속을 보여준다.
젖을 먹은 인간이 밝음의 닫집에서 일어나 하늘을 향하여 소리를 지르고 기를 받는다.
무희들이 나타나 앉아서 방울을 흔든다. 단으로 올라가 앉아서 하늘을 바라보기도 한다.
다시 두 갈등이 밧줄을 들고 등장한다. 그러나 줄을 걷어 무대 밑으로 버린다.
속박의 갈등이 끝나는 것이다.
마야족의 신들이 나타난다. 머리에 쓴 관이 요란하다. 케찰코아틀로 보인다. 앉아서 주술행위를 한다.
이불을 쓴 여자들이 나타난다.
그들은 한쪽 구석에 가서 고인돌처럼 미동도 하지 않는다.
마야의 신들은 일어서서 옆걸음으로 간다. 바르게 움직인다.
이불을 뒤집어 쓴 여자들도 일어서 타조처럼 간다. 마야신들이 이불을 들고 사라진다.
여자 1명이 나타난다. 서양음악에 맞추어 춤을 춘다. 서양문명을 보여준다. 여럿이 나와 춤에 합류한다.
머리에서부터 붉은 망토입고 왜장의 투구를 쓴 왕이 등장한다. 거대한 남근이 서있다.
그는 거들먹거리며 돌아다니다가 사라진다.
삼신으로 보이는 여자들 3인이 등을 돌리고 앉아 손동작, 팔 동작만 약간씩 보여준다.
활을 목에 건 동이족 3인이 등장한다. 삼신을 감동시키려 하나 삼신을 꿈쩍도 하지 않는다.
동이족이 임금을 데리고 와서 구석에 서있으나 삼신은 이들과 동화가 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중이 나와서 시적시적 어리바리하게 춤을 춘다.
그가 좌정을 하고 각 인종의 대표자들이 등을 들고 나와서 불을 밝힌다.
그러다가 불은 꺼지고 갈등은 단말마의 비명을 지른다. 멸망을 예언하고 있는 것이다.
춤의 스토리를 대강 적어 보았는데, 다양한 문명과 철학이 이 춤에는 반영되어 있다.
그러나 어느 것이 일본 것인지, 그것의 근원적인 것이 무엇인지 밝혀지지 않아 머리가 혼란스럽다.
<천부경>적인 사유와 음양론의 혼요, 갈등의 사유체계와 조화의 사유체계의 갈등, 이러한 철학적인
면모가 단순명료하게 춤으로 정리가 되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1의 부정적인 하나님에 사로잡혀 부토에 충실하려다 보니, 그러한 결과가 나온 것은 아닌지. 원초적인
동양문명·마야문명·현대문명이 한 무대 위에서 춤으로 형상화할 수 있다는 것도 각 문명을 부정적인
관점에서 비교할 수 있어 흥미로웠던 점이라고 하겠다.
특히 활을 목에 걸고 나타나 동이족과 삼신의 관계를 춤으로 표현한 것도 우리와 관련이 있다는 점에서
관심이 간다.
동이족의 삼신문화의 미래에 대하여 부정적인 관점에서 해석하고 있으므로 우리 문화와 역사에 관심이
있는 관객 중에 충격을 받은 사람들이 있었을 것으로 본다.
일본 사람들의 적어도 절반은 우리와 같은 핏줄일 것이므로, 일본 사람들도 충격을 받은 사람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부토 <해인의 마>가 보여주는 비아냥거리는 결말에 대하여 문명비평적인 분석이 가해져야 할 것으로
본다.
-끝-
(노중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