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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경 제22강>
모든 것은 가야 할 곳으로 가고, 흘러야 할 곳으로 흐르고 있습니다.
그 흐름이 시간이고, 세월이고, 변화이고 역사가 됩니다.
또한 생,로,병,사의 실제 모습입니다.
마음도 그렇고, 감정도 그렇고, 느낌도, 그렇고, 관계도 그렇고.....
그 모든 것들은 그렇게 늘 부단 없이 시시각각으로 변해가고, 우리는 뿌리 없는 부초처럼 그 변화의
파도 위에서 떠밀려 다니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큰스님들께서는 ‘주인공’이라는 단어를 좋아하셨나 봅니다.
내 삶의 주인공이 되어라. 수처작주(隨處作主) 하라.
心行平等如虛空이라 孰聞人寶不敬承이리요
심행평등여허공 숙문인보불경승
今奉世尊此微蓋하니 於中現我三千界와 諸天龍神所居宮과 乾闥婆等及夜叉하며
금봉세존차미개 어중현아삼천계 제천룡신소거궁 건달바등급야차
悉見世間諸所有는 十力哀現是化變이라 衆覩希有皆歎佛일세 今我稽首三界尊하나이다
실개세간제소유 시방애현시화변 중도희유개탄불 금아계수삼계존
大聖法王衆所歸라 淨心觀佛靡不欣하며 各見世尊在其前하나니 斯則神力不共法이로다
대성법왕중소귀 정심관불미불흔 각견세존재기전 사즉신력불공법
佛以一音演說法하시니 衆生隨類各得解하야 皆謂世尊同其語하나니 斯則神力不共法이로다
불이일음연설법 중생수류각득해 개위세존동기어 사즉신력불공법
佛以一音演說法커늘 衆生各各隨所解하야 普得受行獲其利하나니 斯則神力不共法이로다
불이일음연설법 중생각각수소해 보득수행획기리 사즉신력불공법
佛以一音演說法하시니 或有恐畏或歡喜하며 或生厭離或斷疑하나니 斯則神力不共法이로다
불이일음연설법 혹유공외혹환희 혹생염리혹단의 사즉신력불공법
[해설]
마음과 행동이 한결같아 마치 걸림 없는 저 허공과 같으시어 인간들 가운데 가장 존귀하신 이 분을
어찌 공경하여 모시지 않겠습니까(心行平等如虛空이라 孰聞人寶不敬承이리요)
저희들이 이 작고 보잘것없는 일산을 부처님께 올리니 부처님께서는 그것으로 삼천대천세계와
(今奉世尊此微蓋하니 於中現我三千界와)
우주왕, 하늘왕들, 그리고 그들이 사는하늘세상과 또한 부처님을 옹호하는 모든 호법선신들을 보여
주시고 (諸天龍神所居宮과 乾闥婆等及夜叉하며)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삼라만상을 실제처럼 보여주시는 것은, 눈을 뜨고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저희들을 가엾이 여기시는 부처님의 자비로운 마음에서 드러내 보이신 가르침인것을 저희는 잘
아옵니다.(悉見世間諸所有는 十力哀現是化變이라)
이러한 부처님을 저희 대중들이 어찌 하나되어 찬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저 또한 삼계의 스승이신
부처님께 엎드려 예를 올리옵니다.(衆覩希有皆歎佛일세 今我稽首三界尊하나이다)
대성인이시고 법의 대왕이신 부처님께 모든 대중이 귀의하게 하시며, 청정한 신심으로 부처님을 뵈옵는
그 큰 기쁨을 일으키게 하시며(大聖法王衆所歸라 淨心觀佛靡不欣하며)
여기 모인 우리 각자들이 홀로 부처님을 뵙는 듯 감동스러움을 느끼게 하심이니, 이것은 부처님께서
가지신 남다른 신통력이십니다. (各見世尊在其前하나니 斯則神力不共法이로다)
부처님께서는 당신의 평범한 음성으로 말씀하시지만, 그 말씀은 모든 종류의 중생들이 각자 자기만의
언어로 들려지고 해석되어지게 하시고(佛以一音演說法하시니 衆生隨類各得解하야)
모두가 한결같이 부처님 가르침에 공감하고 동의하게 하시나니, 이것은 부처님의 남다른 신통력
이십니다.(皆謂世尊同其語하나니 斯則神力不共法이로다)
부처님께서는 당신의 평범한 음성으로 말씀하시지만, 중생들은 각기 자기 그릇만큼, 자기 수준대로
잘 알아듣고 이해하게 하시고(佛以一音演說法커늘 衆生各各隨所解하야)
자신의 방식대로 부처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실천하게 하시어 모든 이들에게 빠짐없이 이익됨과
기쁨과 행복을 주시니 이것은 부처님의 남다른 신통력이십니다.(普得受行獲其利하나니
斯則神力不共法이로다)
부처님께서는 당신의 평범한 음성으로 말씀하시지만, 어떤 이는 깜짝 놀라 참회하게 하시고, 어떤
이는 기쁨으로 환호하게 하시며(佛以一音演說法하시니 或有恐畏或歡喜하며)
또 어떤 이는 불교에 대한 오해를 벗어나게 하시고, 어떤 이는 불교에 대한 모든 의심이 사라지게
하시니 이것은 부처님의 남다른 신통력이십니다.(或生厭離或斷疑하나니 斯則神力不共法이로다)
심행평등여허공 ~ 금아계수삼계존(心行平等如虛空 ~ 今我稽首三界尊) 까지는 앞의 21강에서
이어지는 부처님의 위신력에 때한 찬탄의 연속입니다.
‘500개의 일산을 하나로 만드시어 그 일산 안에다 삼천대천세계 삼라만상을 다 보여주시는 이러한
위대하신 부처님을 어찌 흠모하고 존경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하는 내용입니다.
대성법왕중소귀(大聖法王衆所歸)는 ‘이렇게 훌륭하시고 위대하신 부처님같은 스승께는 누가 뭐라하지
않아도 저절로 모든 존재들이 믿고, 따르고, 배우고, 의지하게 된다’하는 의미의 문장입니다.
꼭 부처님 정도는 아닐지라도, 우리 주위에 언행에 품위가 있고, 깊은 학식에 의해 향기와 품격를
가진 분들이 종종 있습니다. 그런 분들을 만나면 저절로 존경의 마음이 생기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정심관불미불흔(淨心觀佛靡不欣)은 앞의 문구에 이어 ‘부처님을 뵈면 저절로 귀의하게 되고 그렇게
자연스럽게 귀의하게 된 마음에는 ‘복’이라든지, ‘운’이라든지 하는 일체의 세속적 욕망을 버린 깨끗한
신심이 자연스럽게 생겨나고, 그런 신심이 생겨나므로 따라서 부처님을 뵈옵는 그 순간에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한 진정한 기쁨을 알게 된다‘라는 의미입니다.
각견세존재기전(各見世尊在其前)은 수많은 대중들 앞에서 법문 하시는 부처님은 한 분 이신데,
부처님을 뵈옵는 모든 각자들은 자기 혼자 부처님 전에서 가르침을 듣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가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내 마음을 어찌아시고.... 나만 바라보시고, 나를 위한, 나만을 위한
맞춤 법문을 하신다고 생각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욱 감동스럽고, 공감되고, 자세하게
듣게 되어, 기쁨을 느끼고 마음을 낸다는 것입니다.
사즉신력불공법(斯則神力不共法)은 이러한 일들이 다 부처님만이 가지신 남다른 신통력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을 집중시키고, 마음을 집중시켜서 기쁨을 느끼게하고, 이해되게 하시고, 알아듣게 하시는
그러한 신통력을 말하는 것입니다.
불이일음연설법(佛以一音演說法)은 아주 중요한 부분입니다.
부처님께서는 그냥 일상의 늘 하시는 그 목소리로, 그 톤으로, 그 언어로(佛以一音) 평범하게 법문을
하신다(演說法)는 것입니다. 외국인을 만났다고 영어로 말하거나 중국어로 말하시는 것도 아니고, 멀리
있는 사람을 위해서 일부러 목소리를 크게 내지도 않으시고, 늘 하시던 그대로 평범하고 조용하고
자비롭게 말씀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마치 사자의 으르릉 거리는 소리를 듣고 모든 동물이 그 뜻을
알아내듯, 부처님의 말씀도 누가, 어떤 상황에서, 어떤 마음으로 듣던간에 그 말씀을 다 이해하고
알아듣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불가사의한 것입니다.
유치원생이 들어도, 대학생이 들어도, 가난한 자가 들어도, 부귀한 자가 들어도, 과학자가 들어도,
인문학자가 들어도, 출가자가 들어도, 재가자가 들어도 다 단번에 이해가 되는 음성이라는 것.
굳이 1,000일 기도를 안해도, 만배 10만배를 안해도, 유마경, 금강경,반야심경 강의를 안들어도,
팔만대장경을 다 배우지 않아도, 선방에 앉아 용맹정진을 하지 않아도......한 번 듣기만하면 그 난해했던,
오리무중이었던 가르침들이 확연하게 알아져버리는......그러한 불가사의한 능력이 부처님께는 있다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45년간 모르는 중생들과 그릇된 믿음과 가르침을 가진 사람들을 위해 '길 위의 삶'을
사시면서 보여주신 실제의 모습이었습니다.
'배화교'를 따르던 1,000명의 제자를 거느린 가섭 3형제를 제도 하신 일에도, 사리불, 목건련, 마하가섭
등의 제자를 제도하신것에도, 빔비사라왕, 파사닉왕 등 모든 당시의 권력층과 지식인층들을 제도 하신
일에도. 술 취한 코끼리와 연쇄살인범을 제도하신 일에도....부처님은 늘 진리만을 말씀하셨고, 진리에
맞는 행위를 하신 것 뿐인데...그들은 그 몇마디에 부처님 말씀에 귀의하게되고, 이해하게 되고, 깨닫게
된 것을 우리는 경전을 통해 확인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 안계신 지금은........끊임없이 법문과 강의를 찾아다니고, 인터넷과 책을 뒤적이고,
졸음과 피곤과 싸우며 몇시간씩 해석과 강의를 듣고 보아야 합니다. 그래도 오직 모를뿐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늘 평범의 말씀(一音)으로 한 마디만 하셔도 다 알아듣게 하셨던 것을 왜 저는 이렇게 긴
글을 만들어서 불자님들을 힘들게 하는지.....ㅎ
중생수류각득해 개위세존동기어(衆生隨類各得解 皆謂世尊同其語)는 그렇게 각각에 맞추어 말씀하시지
않으심에도 불구하고, 모든 중생. 즉 인간, 동물, 천신, 육도의 모든 중생들까지 모두 각자의 언어와
방식과 사고로 이해되게 된다는 것입니다. 중국사람이 들어도, 미국사람이 들어도 알아듣게 되고
이해되어지는....그래서 부처님 가르침에 공감하고 고개를 끄떡이며, 참회와 발원의 마음을 내게 하는
힘이 있다는 것입니다. 더 쉽게 말을하자면, 굳이 이해시키려 하지 않아도, 자기들이 알아서 다
이해하고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저기 눈높이에 맞는 소리로 변화되어서들리기 때문일 것입니다.
중생각각수소해 보득수행획기리(衆生各各隨所解 普得受行獲其利)는 부처님의 가르침은 특별하지
않으심에도 불구하고 듣는 각자가 자기 그릇만큼 듣고, 이해하고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연설명도 없고, 자세하고 긴 말씀을 않으셔도, 의문도 가지지 않고 듣는 즉시 바로 이해되고 알아
듣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분명하게 믿게 되고, 믿은 만큼 실천하게 되어 반드시 큰 이익이 있게
해주시는 힘이 있다는 것입니다.
혹유공외혹환희 혹생염리혹단의(或有恐畏或歡喜 或生厭離或斷疑)는 부처님의 한결같은 가르침을 듣는
사람들 모두는 저절로 자기가 지은 악업들로 인해 두려움을 느끼게 되거나, 저절로 부처님 가르침을
듣고 신심과 환희심이 일어나게 되거나, 미워하고 싫어하고, 원망하고 분노했던 마음이 저절로 사라지게
되거나, 모든 마음에 있었던 의문들과 의심들이 저절로 해결되는 경험을 통해 저절로 문제를 찾아내고,
해결하고, 풀어내게 된다는 말입니다.
다음은 교리 Tip입니다.
부처님께 공양을 올린다는 의미의 불공(佛供)과 여기서 말하는 불공(不共)은 서로 다른 것 인줄은 다들
알고 계시죠?
앞의 佛供은 ‘부처님과 부처님 가르침을 지키고 전승하는 승단과 교단을 위해 보시하여, 자기
스스로에게도 이익이 되고, 부처님 가르침이 영구히 지속되는 데에도 이익이 되는 공양을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뒤의 不共은 남다른, 특별한.....등의 의미를 가집니다.
여기서 잠깐. ‘승공(僧供)이 불공(佛供)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승단에 공양하는 것이 부처님께
공양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라는 의미의 표어입니다. ‘붓다’가 되기 위해 수행하는 스님들께 공양을
베푸는 것이, 미래의 부처님께 공양을 베푸는 것이다.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남방불교에서는 부처님전에 불공을 올리거나, 무슨 무슨 기도...등을 하지 않습니다. 대신에
스님께 법을 청하고, 스님께 공양을 올리고, 스님께 모든 고민을 털어놓습니다. 관세음보살님도,
지장보살님도, 불상도 아닌, 스님들께 부처님께서 남기신 가르침과 그 방향과 길을 묻고, 듣고,
배우고, 참회하고, 발원하는 것입니다.
<반드시 알고 봐야하는 유마경 핵심주제>
첫째. ‘현실의 국토가 불국토(정토)’라는 것입니다.
불국토라는 것이 이상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들이 현재 살고 있는 이곳이라는 것입니다. 「불국품」에서
“직심(直心), 심심(深心), 보리심(菩提心)이 보살의 정토이다.” “이 마음이 청정하면 불국토도 청정하다.”
라고 하여 정토(불국토)라는 것은 그것을 실현하고자 하는 보살(사람들)의 마음에 내재되어 있으므로
실천하고 표현해서 마음과 행위를 같게 한다면 현실국토(고통의 땅)가 바로 정토(불국토. 행복의 땅)라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둘째. 자비정신의 실천입니다.
「문질품」에서 “어리석음과 탐욕, 성내는 마음으로부터 내 병이 생겼습니다. 모든 중생들이 병에 걸려
있으므로 나도 병들었습니다. 만일 모든 중생들의 병이 나으면, 그때 내 병도 나을 것입니다.”라는
유마거사의 말은 중생과 고통을 함께하는 보살의 모습을 표현한 것입니다. 즉 보살(우리들)의 병은
자비로운 마음에 의해서 생긴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보살(우리들)의 병은 이 자비를 실천하여야
치유되며, 타인의 치유에 의해서 보살(우리들)도 함께 치유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비를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번뇌에 싸인 중생(병든 중생)들을
깨달음(치유)에로 인도하는 것이 보살입니다. 그러므로 중생의 병을 치유해주기 위해서는 5무간죄.
지옥, 아귀, 축생의 3악도. 탐, 진, 치의 3독에 몸을 던지면서도 주저하거나, 망설이거나, 피하려하거나,
무서워하거나 하는 마음 없이 실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지옥을 갈지언정, 이것이 자비로
누군가를 치유해 줄 수 있다면, 그 길을 가겠다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 보살의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셋째. 평등과 존중의 불이사상(不二思想)입니다.
출가, 재가. 부처와 중생. 정토(행복의 땅)와 예토(불행의 땅). 보리(깨달은 즐거운 마음)와 번뇌(힘들고
지친 중생마음)와 같은 이분법적 구분으로는 궁극적인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모든 이분법적 사고를 버리는 불이(不二)사상을 통해 절대 평등의 경지에 들어가야 깨달음을 성취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가장 이상적인 ‘진리’는 사실 볼 수도, 말로 표현할 수도, 글로 적을
수도 없는 것이어서 오직 자신의 확실한 신념과 의지에 달려 있다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넷째. 중생들에게 모두 깨달음의 가능성이 있음을 말합니다.
유마거사는 현실의 인간이 비록 번뇌를 가지고 악을 행하고 있더라도 그것이 악인줄 알고, 번뇌인줄을
알아서 바꿀수만 잇다면, 궁극적으로는 깨달음을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일체의 번뇌가 곧
부처의 씨앗이다.”라고 하여 부처님 가르침은 이러한 중생의 번뇌에 기인하고, 그것을 고쳐주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유마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