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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마고의 노래 원문보기 글쓴이: 사람이 하늘이다
『사기』 ‘조선열전’ 해설(제7회)
<임둔군은 현 중국 하북성 창주시滄州市 일대였다>
[해설]
13. 효혜고후孝惠高后
(1) 국사편찬위원회 주석
한 고조(B.C.206∼195) 사후 그의 여덟 아들 중 유일한 적자인 영盈이 즉위하였는바, 영이 곧 혜제(B.C.195~188)이다. 혜제는 태자시 ‘인약仁弱’하다 하여 폐위의 위험을 겪기도 하였으며, 즉위시 16세여서 모후인 여후가 섭정하였다. 고후(B.C.188∼180)는 혜제 즉위 후 여태후로 존칭된 여후의 시호이니, 이는 ‘부인종부시婦人從夫諡’란 예에 따라 추존된 것이다.
고후는 혜제의 유자幼子인 소제 공(B.C.188.~184)과 소제 홍(B.C.184~180) 대에도 섭정하였다. 따라서 ‘효혜ㆍ고후시’를 B.C.195~180년까지의 기간으로 보기도 하지만,『사기』에서 ‘효혜ㆍ고후시’라는 용법이 단지 혜제의 재위기간의 기록에서만 나타나고 있는 데에서 혜제 즉위(B.C.195)~혜제 사망(B.C.188)까지의 기간으로 보는 것이 보다 타당한 것으로 여겨진다.
(2) 필자의 주석 : 위와 동일
14. 외신外臣
(1) 국사편찬위원회 주석
한대의 외신은 한의 직접 통치가 미치지 못하는 외번外藩의 나라를 지칭한다. 이러한 나라 또는 군주를 외신이라 지칭한 것은 중국적 천하관이 분식粉飾된 용어로서 황제의 덕화가 미치어 신속臣屬되었다는 관념적 표현이며, 실제적으로는 인수印綬 정도만 받았을 뿐 한의 주권이나 법치의 대상은 아니었다.
위만은 한과의 이러한 의제적 상하관계를 통하여 병위와 재물을 취하는 실리를 얻어 국세를 신장시켰던 것이다.
(2) 필자의 주석 : 위와 동일
15. 군장君長
(1) 국사편찬위원회 주석
중국의 사서에는 우리 나라 여러 사회의 통치자가 군장ㆍ장수長帥ㆍ주수主帥ㆍ거수渠帥 등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러한 호칭상의 차이는 각 사회의 발전단계가 상이했던 사실을 반영한 것이라기보다는, 정치적으로 비슷한 단계의 통치자를 명칭만 달리하여 명칭한 것으로 이해된다.
중국의 천자와 직접 통할 수 있는 위치의 군장은 분명 정치적 지배자를 지칭하는 용어이다. 기존의 연구 결과 군장사회(Chiefdom)는 분명히 계급이 있는 사회이고, 관료적 체제도 있으며, 경제·사회·종교적 활동을 상호협의 하에 진행한다는 점에서 부족사회와는 다른 점이 밝혀졌다. (김정배,「군장사회의 발전과정시론」pp. 46∼68)
따라서 이 단계의 사회는 고고학적으로는 최소한 청동기문화의 단계를 딛고 서는 사회이며, 철기문화가 이미 깊숙히 들어온 사회로서 국가(State)형성의 전단계로 이해되어야 한다.
(2) 필자의 주석 : 위와 동일
16. 진번‧임둔
(1) 국사편찬위원회 주석
이 진번과 임둔은 위만조선의 공략을 받아 복속된 정치체명으로서 후에 한사군의 명칭으로 다시 나타난다. 다만, 여기의 진번은 전문에 나오는 연이 쳐 복속시킨 진번과는 그 위치가 다른 것으로 보인다. 만약 동일한 위치에 있는 것으로 파악한다면 연이 조선의 중심지인 평양지역을 정복하였다는 것이 되어 모순된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서영수,「고조선의 위치와 강역」 pp. 44~45)
이로써 볼 때 진번과 임둔은 위만조선과 별도로 존재한 군장사회(Chiefdom level) 단계 이상의 정치체로 추측되며, 그 위치는 한사군 위치비정과 관련되어 많은 논란이 제기되고 있다.
(2) 필자의 주석
진번과 임둔은 위만조선의 공략을 받아 복속된 정치체명으로서 후에 한사군의 명칭으로 다시 나타난다. 여기서 나오는 진번과 전문에 나오는 연이 쳐 복속시킨 진번은 동일하다. 위에서 국사편찬위원회 주석처럼 연이 쳐 복속시킨 진번과 위만조선이 공략하여 회복한 진번을 다른 곳으로 해석할 이유가 전혀 없다.
진번의 위치는 앞의 ‘진번‧조선’ 항목에서 살펴보았듯이 현 중국 하북성 지역으로 상곡(현 하북성 장가구시)에서 진황도시에 이르는 장성과 양하洋河‧영정하永定河 및 발해로 둘러싸인 지역이다. 아래의 『위만조선의 강역』 지도에서 현도2(진번)의 영역을 상곡(현 하북성 장가구시)에서 진황도시에 이르는 장성 북쪽의 산악지역을 포함시켰는데 이곳은 오환족이 흉노의 묵돌선우에게 패한 후 근거지로 삼은 곳으로 현도군에 포함된 곳이다.
임둔의 위치는 현 중국 하북성 천진시 남쪽의 창주시滄州市 일대이다. 『동사강목』 ‘임둔고臨芚考’에서 『고려사』 ‘지리지’를 인용하여 “명주溟州는 본시 예국濊國인데, 한 무제 때 임둔으로 만들었다”고 하였다. 또『여지승람』을 인용하여 “명주는 지금의 강릉부인데 딴이름으로는 임둔‧예국‧창해군‧동이현이다” 하였다. 즉 임둔은 예국이며, 창해군이 설치된 지역이다.
창해군의 위치는 위만조선의 강역을 파악하는데 매우 중요하다. 창해군의 설치과정과 위치를 살펴보자. 『한서』 ‘무제기’에 의하면 “(한 무제 원삭원년, BC 128년) 동이 예군 남려 등 28만 명이 항복하자 창해군으로 삼았다(東夷薉君南閭等 口二十八萬人降 爲蒼海郡)” 하였다. 또 『한서』 ‘식화지’에 “팽오가 예맥조선을 뚫어 창해군을 설치하였다. 이로 인하여 연나라와 제나라 사이가 시끄러웠다(彭吳穿穢貊朝鮮 置滄海郡 則燕齊之間靡然發動)” 하였다.
『중국고금지명대사전』은 ‘발해渤澥’를 다음과 같이 풀이하고 있다.
“(발해渤澥는) 즉 발해渤海이다. 『사마상여부』는 부발해라 하였고, 『초학기』는 ‘동해에 따로 발해渤澥가 있다. 옛날에는 동해를 발해渤海로 같이 불렀다. 또 창해滄海라고도 한다(卽渤海,《司馬相如賦》浮渤澥,《初學記》東海之別有渤澥,故東海共稱渤海,又曰滄海。)”
즉 창해滄海는 발해渤海의 별칭이다. 한나라 군현의 하나였던 발해군의 위치를 찾아보면 오늘날의 중국 하북성 창주시滄州市일대였다. 그러므로 현 중국 하북성 천진시 남쪽의 창주시滄州市일대가 한나라 발해군이며, 한무제가 일시적으로 설치했던 창해군滄海郡 지역이었다. 현 창주시滄州市 지명에서도 창해군滄海郡의 흔적이 남아있음을 알 수 있다. 위의 『한서』 ‘식화지’에서 ‘창해군을 설치하자 연나라와 제나라 사이가 시끄러웠다’고 하였는데 창해군이 설치되었던 현 하북성 창주시滄州市일대가 정확하게 연나라와 제나라 사이에 위치하였다.
위만조선의 강역
17. 방수천리方數千里
(1) 국사편찬위원회 주석 : 주석없음
(2) 필자의 주석
『사기정의』는 『괄지지』를 인용하여 “조선‧고려‧맥‧동옥저 등 다섯 나라의 땅이다. (위만조선은) 동서가 1,300리이고 남북 2,000리이다(朝鮮·高驪·貊·東沃沮五國之地, 國東西千三百里, 南北二千里)” 하였다.
방수천리方數千里에 대한 『괄지지』의 주석은 문제점이 있다. 위만조선이 다섯 나라의 땅이라고 하면서도 조선‧고려‧맥‧동옥저 등 네 나라의 이름만 나와 있다. 한 나라가 누락되었다. 그리고 나라 이름도 맥이나 동옥저 등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사기』 ‘조선열전’의 본문을 토대로 위만조선의 강역을 살펴보자.(위의 『위만조선의 강역』 지도 참조)
1. 조선
조선지역은 훗날 한사군의 하나인 낙랑군이 설치된 지역이다. 조선은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 만성현滿城縣을 중심으로 하는 지역으로, 앞의 ‘진번조선’ 항목에서 그 위치를 상세히 설명하였다.
2. 진번
진번지역은 훗날 한사군의 하나인 진번군이 설치된 지역이다. 진번군은 한 소제 시원5년(BC 82)에 폐지되었고, 7년 후인 한 소제 원봉6년(BC 75년)에 옥저지역의 현토군이 진번의 서북으로 이동하여 진번은 현토군에 소속되었다. 『한서지리지』 ‘현토군’조에서 응소가 주석하기를 “(현토군은) 옛 진번조선 오랑캐의 나라이다(故真番朝鮮胡國)” 하였다. 또 “(고구려는) 옛 구려 오랑캐이다(故句驪胡)” 하였다.
진번의 위치는 현 중국 하북성 천진시 계현薊縣을 중심으로 하는 지역으로, 앞의 ‘진번조선’ 항목에서 상세히 설명하였다. 위 응소의 주석에서 보는바와 같이 진번지역은 고구려의 발상지이다. 필자는 고구려의 첫 도읍지인 졸본성의 위치를 현 중국 하북성 천진시 계현薊縣으로 입증한 바 있다.(필자의 글『갈석산은 고구려의 역사를 알고 있다(제6회) <졸본성의 위치>참조)
3. 임둔
임둔지역은 훗날 한사군의 하나인 임둔군이 설치된 지역이다. 앞의 ‘진번‧임둔’ 항목에서 살펴본 바와같이 현 중국 하북성 천진시 남쪽의 창주시滄州市 일대로, 한 무제 원삭 원년(BC 128년) 동이 예군 남려 등 28만 명이 항복하자 창해군으로 삼았던 지역이다.
4. 옥저
옥저지역은 훗날 한사군의 하나인 초기 현토군이 설치된 지역이다. 『삼국지』‘위지동이전’에 따르면 한무제가 조선을 정벌하고 그 지역을 분할하여 4군을 설치하였는데, 옥저성을 현토군으로 삼았다. 뒤에 이맥夷貊의 침략을 받아 현토군을 고구려의 서북쪽으로 옮겼다. 앞의 진번지역에서 살펴본 바와같이 고구려의 서북쪽은 곧 진번의 서북쪽이다. 옥저는 단단대령單單大領 동쪽에 있었는데, 단단대령은 현 중국 하북성과 요령성의 경계인 칠로도산七老圖山으로 비정된다.
5. 대륙 삼한
대륙 삼한지역은 훗날 조선에서 항복한 장상들이 대부분 분봉을 받은 지역으로 현 하북성 남부지역 및 산동성 동‧북부지역이다. 『사기』 ‘조선열전’ 본문에 조선에서 항복한 장상들 중에 니계상尼谿相 삼參이 나온다. 니계尼谿는 산동성 제齊지역에 있던 지명으로 산동성 지역도 위만조선의 강역에 포함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다음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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