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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선대회 시낭송 시제 33편
- 차 례 -
1. 설화
2. 어머니의 강
3, 불타는 놀
4. 소리없는 전쟁
5. 낙화의 숨결속에 봄날이간다
6. 웅천읍성
7. 오일장
8. 어물전
9. 바다로간 강물은 돌아오지 않는다
10. 논개
11.바람의 언덕에서
12.안골포 왜성
13. 가을의 여자
14. 어느 엄마의 고백
15. 흑백다방
16. 슬픈 눈동자 소년에게
17. 이보게 친구
18. 한폭의 세상
19. 풀빵
20. 북극성을 바라보며
21. 곰메바위 아리랑!
22. 백년 약속
23. 만월(滿月)
24. 수채화 같은 한사람
25. 삶
26. 비화
27. 모정
28. 지나고보니 알겠더라
29. 달의 변천
30. 누가 시간을 금이라 했든가
31. 제황산 전설
32. 섬진강가에서 띄우는 배
33. 그녀
34. 코로나 19
***대회용 본선 시***
1. 설화 雪花
* 광설이 춤추는 긴 겨울
숨죽여 우는 설원의 땅 위에
허공을 외치는 작은 새는
하얀 미학의 노래를 부릅니다.
지난가을, 한 잎 두 잎 떨어지는 것이
낙엽 아닌 시간이라는 걸 알면서도
얼어붙은 빙하 붉은 입술의 동백을
나인 양 홀로이 바라봅니다.
그대 하얀 옷깃이 넓어
나목의 맨살을 에워싸며
언제까지 소복이 핀 순백의
설화 雪花로 세상을 온통 하얗게
하시렵니까.
실어오고 실어가는 계절에
저 처마 끝, 고드름같이
언젠가 하나의 삶이 녹고 나면
설 눈 속, 복수초의 노란 미소로
피어날지…….
얼음장 밑으로 흐르는 물처럼
그 한 치 앞에서 나 또한
흐르고 있다는 덧없음을 알면서도
하얀 그대 앞에선 한없이 출렁이며
사슴처럼 뛰고 싶습니다.
2. 어머니의 강
* 어머니!
혹한 바람이 내 창을 두드리는 겨울밤엔
다문다문 잊었던 당신을 떠올리게 합니다.
지난밤 꿈속에서 당신을 만나
한없이 울었던 기억도 깨어나 보니
이유도 없이 그냥 슬퍼서입디다.
어찌 그리도 서럽던지
아직도 그 설움, 채 가시지 않은지라
노인들의 소식을 접할 때마다
문풍지 유난히 울던, 그해 겨울을 잊지 못합니다
푸른 별빛 스며드는 시린 문살엔
한지의 설움이 노래하고
새끼줄 묶은 누런 초가지붕 아래
장작불 지피고도 추울세라
겉치마 하나 훌훌 말아서
문지방 막아 놓으시던 어머니
그 빛바랜 치맛자락
새삼 눈앞에서 흘러내립니다.
어머니, 오늘 같은 추운 밤이면
부르기에도 목이 메오는 당신
반딧불 같은 기억 저편
바느질로 지새우던 섣달의 긴긴밤
애야 바늘귀 좀 끼워다오
등잔불 밑에 희미한 당신
이토록 가슴 저미게 하십니까.
평소, 인생무상이다
내 손이 내 딸이구나
이것이 무얼 의미하는 건지 그땐 몰랐지만
살아갈수록 되새겨지는 깊은 영혼의 파장
굳이, 그 음성 귀 기울이지 않아도
시시때때로 파도처럼 밀려옵니다.
살 속 깊이 파고든 무심의 강
그 무심한 등살에 밀려 그 소녀 역시도
바늘귀 좀 끼워 달라 시던 당신처럼
어느새 그 자리를 바라보는 언덕에 섰습니다.
그 무심이란 세월 한 모퉁이를 돌아
이 제사 알 것 같다는 말을 할 무렵
이미 살 속 깊이 전이된 세월 덧없음을
어머니, 어머니 당신은
그때,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3.불타는 놀
* 황혼 녘, 타는 놀 앞에 서면
동백의 입술보다 더 짙은
붉디붉은 가슴을 본다.
저 핏빛으로 불타는 놀 속에
언젠가 이 한 몸 뉘 일 것을 알면서도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살면서도 그 정의를 묻는다.
그리고 돌아서면 잊어버린다
그러면서 쌓여만 가는
허무의 이파리들
만리포, 천리포가 넓다 한들
저 불타는 놀의 가슴을 어찌 아랴
바닷새 노닐다 간 자리
썰물에 맨살 드러낸 모래밭
가늘고 맑은, 긴 - 미세 혈관들
모래톱을 비비며 바다 품을 찾아가듯이
우리도 어느 한 곳을 향해
쉼 없이 쉼 없이 흘러가고 있다
4. 소리 없는 전쟁
* 처음엔, 스쳐 가는 바람인 줄 알았는데
뜨거운 태양의 계절, 여름이 오면
이 전쟁은 끝날 줄 알았는데
봄, 여름, 가을이 가고 겨울이 와도
뉴스 채널마다 내리치는 코로나 번개
죽음마저도 우아하게 떠날 수 없었던
저- 밤하늘 크고 작은 희미한 별들
이천이십, 수많은 코로나 별인지도 몰라
추락도 접어서도 안 될 삶의 분기점
하늘을 나는 백학처럼 하얀 영혼의 날개 날개들,
그 날개는 바람 앞에 깃털처럼 휘적이노니
항해하는 생의 뱃길 위에 어디 이뿐이랴
소국小國과 대국大國의 하늘길마저도
마비된 삶의 터전은 혈전처럼,
지구촌 혈관을 잘 흐르지 못하고
공포는 소리 없는 폭탄으로 무형적 공간을 휘돌며
마디마디 저리는 저마다의 가슴, 가슴들
하늘이여 정녕 모르시나이까?
소리 없는 전쟁은 격리隔離와 격리隔離 속에
삶의 바다 위에 휘 적이는 한숨, 한숨들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지속 데는 전쟁 속에
지칠 대로 지쳐버린 지구별의 아우성
무심한 세월은 나룻배처럼 그저 말없이 계절을 실어 나르고
소리 없는 바이러스와 전쟁은 언제 끝이 날지,
서리 까마귀 우짖는 아침,
떨어진 낙엽의 목쉰 노래가 이토록 슬플까,
아, 아, 사람과 사람이 자유도 행복도
얼굴 없는 마스크 가면에 갇혀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를
진정, 묻고 싶은 저– 하늘에
5. 낙화의 숨결 속에 봄날이 간다
* 땅에서 하늘까지
벚꽃 천국 문이 열렸다
천국 문 안에는 노파의 굽은 등에도
팔짱을 끼고 걷는 연인들의 머리에도
푸성귀 같은 해맑은 아이의 볼에도
꽃비는 입 맞추며 흘러내린다
한 폭의 그림, 하늘 벽에 걸린 듯
제각기 감상하는 거리의 향연
기적 소리도 없는 침묵의 경화역 진해
핑크빛 사월이 가슴을 푼다
꽃잎은 하염없이 바람에 지고
그대 연분홍빛 사랑도 흩날리는 향기도
속절없이 나부끼며 쌓이는 땅 위에
기차가 멈춰버린 폐 간이역
낙화의 숨결 속에 봄날이 간다
녹슨 철길 저 위로 나르는 한 마리 새야,
찻잔에 떨어지는 한 닢의 고독
너의 날개로 실어 가려무나
이 홀로 젖어버린 꽃비 속에서
그리운 이 저물도록 그리운 날에
꿈길을 가듯 꿈길을 가듯
낙화의 숨결 속에 봄날이 간다
6. 웅천읍성
* 삼포왜란三浦倭亂 그 발자취
고스란히 남아 있는 이곳
동문의 견룡문見龍門
서문의 수호문睡虎門
남문의 진남루鎭南樓
북문의 공신문拱宸門
세종실록의 역사가 흐른다
오백 년 사직, 충혼이 서린 이곳
돌성을 쌓기까지 오랜 세월!
무어라 한 서린 전설만 남긴 채
옛 성터는 보이지 않고
성벽에 흐르는 묵언의 흔적들,
왜 세의 말발굽에 짓밟힌 황톳길
그 성벽 밑으로 나부끼는 몇 잎의 가을 엽서
듬성듬성 서걱이며 우는 바람은
동문, 서문, 남문, 북문을 두드리고 있다
어둠 풀리는 서녘 하늘가
저 담청색 바다는 곱기만 한데
안골포 왜성 위로 나르는 한 줄 기러기는
충무공의 호각 소리를 기억하고 있을까
견용루見龍樓 서녘 하늘 유적지에서
웅천읍성 옛 노래를 띄워 본다.
7.오일장
* 봄을 파는 사람들이
봄을 사는 사람들로 붐비고 있다
살아 출렁이는 삶의 물결
진해 오일장 경화 장날이다
쑥 달래 두릅 씀바귀 겨울초 방풍
머위, 비비추, 돌나물, 취나물, 원추리
노파의 굽은 등은 가는 발길 세우고
취나물 한 움큼 더 얹어 놓는다
봄을 담은 장바구니 제각기 무겁다
나는 이 부드러운 봄나물들을
무치고 버무려서 저녁상에 올리기까지
주름 깊은 얼굴 굵은 마디의 손
북적이든 장터의 숨결이 귓전에 걸려 있다
봄 햇살 따습게 정 주고 가드니
허공에 연분홍빛 노점을 차린 그대
그대 이름은 진해 벚꽃
이렇게 좋은 날에 이렇게 좋은 날에
사랑과 희망이 살아 출렁이는 오일장
나는 진짜 봄을 사러 간다
흙의 맨살을 만지며 지갑을 열었다
천리향 한 그루 자몽 두 그루
이 꽃이 지고 나면 올가을엔
노랗고 빨간 행복이 주렁주렁 달릴 것이다
8. 어물전
* 진해 중앙시장 지하 어물전에 가면
하나둘, 문을 닫은 점포들이 왠지 서글퍼진다
저물녘은 아직 먼발치에서 서성이고 있건만
서둘러 펼친 어물전은 불이 꺼지고
수족 간 너머로 비릿한 생선 내 움만
노파가 앉았던 자리를 쓸쓸히 메우고 있다
몇 달 전만 해도 이곳에서
조기를 사고 해조류를 샀건만
등 굽은 백발 할머니는 보이지 않고
텅 빈 노점에 고무줄로 묶은
비닐 더미만 덩그렇게 앉아있다
얼마 안 가서 세월의 뒤안길로 사라지면
그리워질 어물전
그 비릿한 내음에 섞여 먼발치에서는
지금 이분들이 세상을 떠고 나면
그 아무도 장사할 젊은 사람은 없다는
숙덕임이 귓가에 들린다
한 시대의 노래가 저물어가고 있다
나 역시도 오랜만에 찾은 재래시장이니 오죽하랴
깎아 주고 덤으로 더 얹어주는 인정미
그 인정도 하나 둘 저물고 있다
스마트 시대 밀려 세상이 달라지고 있다
모닥불처럼 꺼져가는 어물전 앞에서
많은, 사람들이 북적대는 대형, 마트엔
환한 불빛이 도심의 거리를 밝히고 있다
9. 바다로 간 강물은 돌아오지 않는다
* 둥지 떠난 새들은 집을 잃었을까.
고적한 침묵의 숲엔, 홀로 선 나목이 외롭다.
보일 듯 보이지 않고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무형의 강
그 강물 속엔 너도 흐르고 나도 흐른다
어느 시인의 별 하나 그리움을 닮아가고
능소화 전설처럼 담 너머 바라보는 꽃이 되었을까
빈 배의 사공 하현 달빛으로 분칠한 얼굴을 씻어본다
밤을 이고 하루가 가고
하루를 지고 달이 가고
그달을 묶은 열두 달은
삼백육십 다섯 날을 쉬지 않고 실어 나른다
오늘도 내일도…
목이 쉬도록 우는 바람아
아래로만 흐르는 강물아
수 없는 계절이 땅에 눕고
수없는 시간이 바다로 간 뒤
백 년 강가에 이르면
비로소, 뜨거운 강의 의미를…….
10. 논개
* 한 조각 세월을 베었든가
빛바래지지 않는 꽃잎
살아, 살아서 휘도는 너의 혼불은
어두운 밤, 빛의 향연으로 흐르고 있구나.
푸르디푸른 남강(南江) 저 홀로 솟은 바위
그대 한 잎 꽃잎으로 가을 강에 피었구나.
낙화한 숨결, 한 폭의 치맛자락
그대 숭고한 넋이여
그대 붉은 눈물이여
죽어서 태어난 이름이여
죽어서 살아있는 논개여
저문 노을 아래 스치는 발자취는
은빛 물비늘로 일렁이는 것을
아, 서럽도록 노래하는 바람이여
이 세월 억만년, 두고 흐른다 해도
그 한 맺힌 설움, 어찌 잊힐 리야.
11.바람의 언덕에서
* 살아가는 것은 다 바람이다
생을 사랑한다는 것은 바람 속을 걷는 일이다
벽을 타고 오르는 담쟁이로, 흔들리는 갈대의 몸짓으로
장대비 같은 폭우 속에서 휘적이는 날개의 젖은 모습으로
가끔은 태풍에 쓰러진 잣나무의 굽은 등으로
때로는 해일이 스쳐 간 잔해 위에 아이의 울음으로
비틀대는 바람 속의 숨 가쁜 걸음걸음들
한때, 모국어도 바람에 쓸려갔다 되돌아오지 않았든가
민초에서, 천하의 진시황도 떠난 것은 바람이다
심산유곡 산새로 지저귀는 것도
바위 틈새 해풍을, 먹고사는 것도
한 잎 출렁이는 이파리같이 인연의 물결 따라 밀려왔다 밀려간다.
우리 모두 냉정한 바람에 실려 가는 구름, 구름 들이다
이래 스치고 저래 스치는 구름, 구름들
이래 스치고 저래 스치는 바람, 바람들
저 하얗게 질색하는 절벽 밑 바위를 봐라
멋지고 잘생긴 수석의 볼을 철썩, 때리고도
그것도 모자라 흰 거품을 물고 사방을 흩트리며
성난 용의 몸부림처럼 꿈틀대며 달려드는 파도
이 세상, 바람으로 생기는 일이다
우리 모두 바람 앞에 돌아가는 언덕에 풍차일 뿐이다
12. 안골포 왜성에 올라
* 내항의 바다, 작은 포구
안골포 왜성에 가 보았는가
충무공의 승 전지 안골포 해전
안골포 크고 작은 숨소리를
한 번쯤 들어 본 적이 있는가.
포구를 품어 안고 도는 굴 향기
초겨울 문턱에서, 짜디짠 갯바람은
언덕 대숲으로 숨어들고
버둥거리며 던져진 굴, 껍질은
여기저기 작은 성을 이루며
한창인 이 계절을 노래하고 있다.
임진왜란이 남긴 흔적,
조선 왕조 오백 년이 어린 이곳
갈색 잡초 뉘 여진 가파른 언덕배기
무너진 돌성 옆으로 휘감긴 마른 칡넝쿨
한해살이, 풀 들이 마른 호흡을 하고 있다
아, 아, 누가 저 해풍의 휘청거리는
자디잔 하얀 포 말을, 보았다 했든가.
누가 섬뜩한 서릿발로 아늑한 포구
이 청색 물비늘을 탐하려 했든가.
어머니 품속 같은 온화한 안골 포이거늘
소금기 묻은 바람은 재생의 역사를 풀고
방파제 끝단에 서 있는 말 없는 등대는
시름에 젖은 명장의 얼굴로 우뚝, 서 있다
아, 수장된 원혼 보듬은 저 담청색 바다
그리고, 서쪽의 수로를 지키는 가덕도
성북 왜성에서 눌차 왜성까지
오르면 오를수록, 짙은 푸른 물결 안골포
천년 세월을 두고 역사는 말없이 흐르고 있다
13가을의 여자
* 언제부터인가
억새풀처럼 늘어나는 숲을 이고
물감을 찾아 거리를 헤매었다.
가을 문턱에 서서 머뭇거리는 여자
푸른 신록을 삼킬 만큼이나
아카시아 향기로 가득했던 오월
베란다 시도 때도 없이 피는 꽃처럼
계절을 모르고 피는 화분의 여자
가시 돋은 줄기 이슬 머금은 꽃망울
장미의 붉은 열정을 고집했던 여자
그 계절을 어디쯤 보냈을까.
돋아나는 그리움의 씨앗들은
녹색을 잃어가는 이파리이기에
더욱 간절하리라
계절이 계절이니만큼, 자주 서걱대는
갈바람 소리를 듣고 하나둘 떨어지는
정원에 솔방울처럼 삶의 뜰에도
간간이 허무의 솔 씨들이 떨어진다
들녘에 구절초가 웃는 날이면
더욱 젖어드는 음악을 듣고
가끔은 호숫가에 해오라기가 되는 여자
늘 뒷모습만 스케치하는 여자
가을로 가는 길목
결실의 풍요로움 위에도 달은 기울고
차면 비운다는 것 어디 달뿐이랴
익어간다는 것 비우면서 익는다는 것일까.
거울 속을 기웃거리는 여자
가을로 익어가는 여자
14.어느 엄마의 고백
* 아들아!
저 창공을, 나르는 한 마리 철새도
알에서 막 깨어나 퍼덕일 때가 있었듯이
둥지 안에 새처럼 너도 어미 품에서
퍼덕이며 말과 글을 익히며
포릉거릴 때도 있었단다
잉태한 너를, 풀어놓은 창가엔
너를 위한 기도로 채우고
희망의 배를 띄우는 날엔
너의 작은 가슴에서 우러나는 효심
어미의 두 손을 모으게 했단다
한때는 바위 같은 삶이 버거워
하늘을 우러러 원망도 설움도 던졌지만
눈을 뜨면 새로운 태양이 비추고 있었지
그 보듬은 세월이 얼마나 흘렀으면
얼룩 군복에 늠름한 군인이 되었구나
수 없는 계절이 땅에 눕고
냉혹한 삶의 전선에서
너 가 있어 내가 존재한다는 거
엄마의 버팀목이 바로 너희였음을
아들아! 고백한다
15. 흑백다방
* 세월이 흘러도
흩어질 수 없는 마음처럼
그 시절 그 노래가 있다
스마트한 시대 급물살에 휩쓸리는
빠른 걸음걸음들 상관없이
도심 속의 한 모퉁이 흑백다방
육십 년대 이름 그대로
들녘의 핀 들국화처럼 향수를 안고
그 시절 유일한 가슴으로 남아
애틋한 눈으로 바라보게 한다.
검고 작은 글의 간판은
한 번도 화장하지 않은 얼굴로
노파의 등같이 구부정한
낡은 입구 대문 위에서
늘 비에 젖고, 바람을 맞는다.
수많은 비밀 간직한 채
먹먹해서 오히려 좋은 흑백다방
세월도 간혹 머물다가는
이 시대 문인들의 구름 같은 공간
사월이 오면
벚나무 가지 망울져 올라
그 앞에 두 개의 맷돌이 더욱 운치 있을
진해, 중원 로터리 흑백다방
16. 슬픈 눈동자 소년에게
* 소년의 머리카락은 장발
부는 바람 없어도 휘감긴 얼굴
한 생각 바꾸면 낮이요
한 생각 바꾸면 밤인 것을
푸른 날개를 접고 방황하는 영혼아
밤하늘 영롱한 별빛만큼이나
찬란했던 푸른 꿈은 어디에 접어두고
교문 아닌 교문을 두드리고 있단 말가.
가슴 한, 켠 무한한 밀물 썰물 따라
섬은 등대로 서서 희망의 등불을 비추고 있건만
저- 넘실대는 푸르디푸른 바다
배 한 척 띄우지 못하고 날 저물면
그 뜨거운 핏줄 어디에 쓸 것인가.
푸른 소년이여! 이렇게 좋은 날에
아침 햇살과 맑은 바람의 손을 잡고
꿈과 희망을 실어 볼 만하지 않은가.
비 온 뒤 오색의 무지개가 아름답듯이
한 방울의 빗물이 땅을 적실 때
그 빗물이 모여 강을 이루고
그 강물이 흘러 바다가 되는 것은
뜻이 있으면 길이 있다는 법 아니겠니
효가 근본이듯 존재의 두 글자 소중함을 알게 되면
세상은 감사와 사랑으로 달라질 걸세
아가야! 아니 슬픈 눈동자의 소년이여!
뜰 앞에 오동잎이 가을 소리를 전하기 전에
이 계절에 알맞은 옷을 입고 너의 푸른 바다
푸른 이름으로 희망의 돛대를 올려 보자꾸나
저 넓은 삶의 바다를 향하여 -
17. 이보게 친구
* 꽃이, 꽃의 아름다움을 서로 나누듯이
사랑은 그렇게 피어나는 거야
사랑은 그렇게 향기로 오는 거야
철이 아닌데도, 먼저 필 때도 있고
한창인 철에도 늦게 필 때도, 있지
비바람에 흔들리다 보면 다 그런 거지 뭐
살다 보면 꽃이 생이고 생이 꽃이라는 것도
세월 깊이 들어가면 알게 되는 거야
누구나 가슴속에 외로움은 서식하고
누구나 크고 작은 쓰나미는 있는 거지
그게 삶의 내용 아니겠니?
맘껏 촌스러워지고 싶은 날엔
컬컬한 막걸리 같은 웃음, 한 사발 마시고
정 묻은 밭두렁 언덕에 가서
보리밥 오두막 노래도 부르다가
어쩌다 풀꽃 같은 친구 만나면
제비집 같은 둥지를 틀고
낮에는 치자꽃 향기로
밤에는 부엉이 울음소리로
다시 피워 나 보는 거야
늘 - 봄 같은 생의 꽃으로 말일세
18. 한 폭의 세상
* 선홍빛으로 물들이는 황혼 녘
한 폭의 세상이 이곳에 있다.
도심 속, 외치는 물결처럼
연육 교 밑으로 흐르는 물살은
저무는 놀 속에 함께 번득이며
비행하는 바닷새 휘젓는 날개 아래
출렁, 출렁, 일렁일렁 바람의 힘을 빌려
구호를 외치며 흘러가고 있다
제각기 색깔을 내세우는 세상
그러면서 미워하는 세상
그러면서 사랑하는 세상
그러면서 함께하는 세상
그렇게 흘러가는 세상
옛 성인의 말씀을 빌리지 않아도
돌아서면 백 년, 하룻밤 꿈인 것을
때론 폭우 속에 젖기도 하고
때론 믿는 돌에 발등도 찍히면서
산과 구름 사이 바다와 하늘 사이
가까우면서도 먼 사이, 멀고도 가까운 사이
바람 앞에 구름이 흘러가고 있다
19. 풀빵
* 하얀 겨울 썰렁한 장날
혹한의 기세가 등등한 오후
구수한 풀빵 내 움이
찬바람에 업혀서
어깨를 툭 치고 간다
돌아보니 붕어빵 몇 마리가
나를 쳐다보고 있다
따끈한 내음의 구수한 유혹
그래 참말로 오랜만에 보는 옛사랑이구나
살며시 다가오는 희미한 그림자는
따습은 온기로 포옹하며
가는 옷깃을 잡는다
한때 참 많이 사랑했지
잊지 못할 산업화 시대
잠시 스치는 회상, 그때 그 시절
시린 손으로 지갑을 연다
언 골목길 -
붕어빵 한 마리 더 얹어주는
한국인의 인심, 풀빵 아지매
호호 손을, 불며 한입 베어
옛 추억을 먹어본다
20. 북극성을 바라보며
*아침이면 유독 뿌연 하늘과
한낮에 찌는듯한 이, 숨 막힘
아이스, 커피 한잔으로 식혀보지만
뜨거운 물에 얼음일 뿐,
에어컨 바람만 부둥켜안고
이래도 저래도 칠월 땀방울은
삼복더위 치마폭을 벗어날 수가 없다
낮이면 매미 소리 하늘을 찌르고
밤이면 영롱한 별 대신 한증 막이다
뜨겁게 달구어진 대지는 검은 밤에도
식을 줄 모르고 온열을 뿜어댄다
칠월 이런 날엔 어쩌란, 말인가
가을바람이 너무도, 그립다
한 통의 편지라도 부치고 싶다
어서 오라고 문자를 보낼 수 있으면 좋으련만
순리를 따르는 자연의 철칙 앞에
결실의 선물인 줄 알면서도
풍요의 들판, 그 열매를 기다리면서도
숨 막히고 눅눅해서......
아, 이런 날엔 저 밤하늘 북극성에는
왠지 차디찬 빙산이 있을 것 같아
내일 만날 태양은 저 북극성에서
뜨거운 몸을 식히고 오면 좋으련만
숨 막히는 칠월 이런 날에
작은 곰 자리 북극성을 바라보며.
21. 곰메바위 아리랑!
*어둠 속에 전설은 더욱, 선명하다
한줄기 영롱한 빛을 따라
전설은 서투른 날갯짓으로
초저녁 흘리는 달빛 아래 퍼덕이고 있다
눈길 닿는 저곳, 영혼마저 걸린 달빛으로 서서
그리워 저물지 못한 저 산마루 시루봉
오백 년 아리랑이 허공에 가슴을 푼다.
웅산 정상에서 흐느끼는 달빛
침묵은 무거워 흐느끼는 볼에 눕고
비련의 아천자, 전설에 감기운 채
희끄무레 스치는 작은 바람들
태어난 자리에서 우리는, 누구인가
우뚝 솟은 시루봉이 소리치고 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밤하늘 곰메가 부르고 있다
조선이라는 태를 두르고 순종의 무병장수
명성황후 백일기도, 한 맺힌 역사가 전설 속에
흐느끼고 있다
곰메여
한마디 말도 없는 곰메여
웅산 정상에 묻힌 전설이여
외세의 말발굽에 짓밟혔던 아리랑이여
단 한 번, 흰 바람이라도 붙잡고
곰메의 가슴을, 풀어놓고 싶지 않은가
명성황후도, 비련의 아천자도, 할배 할매도
넋이 감겨 우는 거암 시루봉 곰메여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강물은 흐르고 있다
강물은 흘러도, 저 시리도록 푸른 별들
억만년 그 자리에 있었으리라
곰메여, 눈을 뜨고 말이다.
22. 백 년 약속 [결혼축송]
*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오늘도 내일도, 그리고 그 내일도
당신의 손을 놓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햇살 가득한 날이나 비구름 걷는 날이나
달밤이나 그믐밤이나, 별은 그 속에서도 반짝이고 있듯이
변함없이 나는 당신 곁에 있을 것입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지금의 젊음과 아름다움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를 지나 먼 후일 백 년 강가에서
당신의 작은 꽃잎마저도 존중하며 사랑할 것입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이 순백의 웨딩드레스와 연미복을 입고
둘이 하나로 태어나는 이 순간 이날을
나는 매년 수첩에 기록하겠습니다.
좋은 날에 장밋빛 좋은 날에
청실홍실 꿈을 가득 실었습니다.
인연이란 하늘의 뜻이요 땅에 축복이니
감사의 절을 어찌 올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마주 보는 눈동자 백 년 강가에서
오직, 소중한 나의 한 사람 손을 잡고
이 푸르른 풀밭, 한창이던 꽃잎을 새며
먼 훗날 억새꽃 필 때까지
당신과 영원히 함께 거닐 것입니다.
23. 만월滿月
* 천지를 밝히는 당신은
모시 저고리 옷소매 걷으시고
사뿐사뿐 청마루 걸으시는
울 어머니 버선발로 오십니다.
천지를 밝히는 당신은
매미 소리 저문 베틀에 앉아
누런 거친 올 삼베를 짜던
굵은 마디의 손길로 오십니다.
고요는 비단 치마 어둠을 휘덮고
가볍게 떠오르는 당신의 발길은
옛 초가지붕 별빛을 뿌리는 저녁
호박넝쿨 언덕 돌 담장을 넘어가고
눅눅한 장맛비, 흔들리던 이파리들
굵은 빗방울에 찢겨 쓰러지고
바람이 뜯어간 살점 없는 손으로
돌 틈을 타고 오르기까지 긴 아픔, 어이하셨나요.
저 작은 풋 호박이 누렇게 익어가는 것처럼
이제야 둥근 당신을 닮아가고
산허리 고즈넉한 당신의 모습에서
나 또한 달이 되어 흘러가는 나그네임을
수없이 오고 간 계절 앞에
저 작은 풀잎 하나의 소중함을
내 뛰는 맥박 안에 담아놓고
간절히 돋아나는 날에
나의 가을도 당신 만월로 채우고 싶소.
개구리 소리 합창하는 논길에선
삽을 든 농부가 가을을 기약하듯이.
24. 수채화 같은 한 사람
* 당신은 누구십니까
가끔, 이파리 무성한 나무로 서서
석산에 돌처럼 바라보다
연기처럼 사라지는 당신은 누구십니까
돌연, 안개로 피어나 시야를 흐리게 하는
당신은 누구십니까
은하수를 만드는가 하면 조각달도 띄웁니다.
구름을 풀어 놓는가 하면 비도 내리게 합니다.
가끔은 부드러운 풀잎 위에
이슬방울처럼 아슬하기도 하는
당신은 누구십니까
이글거리는 광선이 다하는 시간
석양이란 이름으로 바다 저 끝에
붉게 피어나는 수채화 속 놀 같은
당신은 누구십니까
어제도 오늘도 이파리 무성한 나무로 서서
석산에 돌처럼, 바라보다
연기처럼 사라지는 당신은
당신은 누구십니까
25. 삶
* 폐지를 실은 리어카 한 대가 끙끙대며
가는 둥 마는 둥 오르막길 도로에서 얼쩡거리고 있다
빵! 빵빵! 그 빵빵대는 자동차 앞에서도
어눌한 동작은 비켜설 줄 모른다.
그는 굽을 대로 굽어서 상체가 없다
둔한 걸음과 하체만 보일 뿐,
백발은 엉성한 폐지에 기댄 채
도시의 매연과 소음을 담고
리어카에 상반신이 실려서 가고 있다
빌딩 모서리엔 상현 달빛 한 줄기
폐지 위에 앉아 굽은 등을 만지며
말없이 실려 간다
한 잎, 낙엽 같은 밤
하얀 입김마저 고독을 이고 배고픈 저녁
백발 걸음이 쇠사슬처럼 무겁다.
저만치서 심층 깊이 파고드는 성당의 종소리
차고 어두운 도로 위에서 살기 위한 가쁜 숨소리
어쩜, 소리 없는 삶의 전투 현장일지도
황혼 녘, 그의 마지막 텃밭일지도
아- 살아있으매…
당신의 굽은 등에서 모두의 등을 본다.
26. 비화(飛花)
* 누가 너의 눈물을 아름답다고 했든가
거문고의 선율 같은 몸짓으로
신화의 선녀 같은 옷깃으로
무리 진 나비의 날갯짓으로
가는 곳 어딘지 몰라도 아름다운 작별
천 년이 흐른들 너의 마음 어찌 알랴
바람의 냉혹, 떨고 있는 숨결들
한가락 음률의 신음들을 누가 그리도 아름답다 했든가
허공에서 허공으로 어디로 가서 머물지 몰라도
싸늘한 흙 위에 싸락눈, 너의 이름은 비화(飛花)
숙명은 너를 내몰아 계절의 역사를 만들고
찬 서리 튼 살, 새의 발톱 자국
혹독한 긴 겨울 망울망울 잉태한 산고의 인내를
어찌 그리도 쉽게 보낼 수 있으랴
달무리 지는 저녁 답 파릇이 적시는 빗소리
분홍빛 연정 사월이 걷는 소리
오가는 행인들의 발걸음 소리, 노파의 기침 소리
애수의 잠기는 어느 시인의 미학적 선율
창백한 노을 앞에 식어가는 너의 뒷모습을
차마, 누가 꽃답다고 했든가
너의 이별의 몸부림까지도.
*비화(飛花): 바람에 흩어져 날리는 꽃잎
27. 모정(母情)
* 고이 접어 당신께서 주신 모시 홑이불
막내딸, 시집보낼 때 주신 보물이라고
장롱 속 깊이 간직했건만…….
세월이 얼마나 흘렀으면 접어둔 자리마다
새겨진 당신의 말씀, 성서처럼 일어설까
손수 짜신 당신의 모시 한 필
그 굵은 올의 모시 한 필에는 먼 산 부엉이 울음도
귀뚜라미 울음도, 낙엽 지는 소리도, 당신의 노랫가락도
베틀 소리도 담겨있어, 아끼고 아낀 것이
삭고 삭아 이토록 적실 줄이야,
묵은 먼지 털어내고, 골 깊은 주름 다시 펴서
청옥 빛 저 햇살에 헹궈내어도 보지만
그곳엔 따스한 온돌방이 있고, 호롱불이 있고
동백기름에 은비녀 그리고 빛바랜 치마
산비탈 들국화 내음까지도 가득한 이 저녁
한 해 두 해 늘어나는 홀씨 같은 머리이고
백발 당신 앞에서 나무람을 듣습니다.
“자고로 여자는 살림을 잘해야 혀”
“시집가서 버릴망정 여자는 다 배워 가야 혀”
“그래야 시집가서 친정 부모 욕을 안 먹이는 겨”
모락모락 굴뚝의 연기같이 피어나는 말씀들
계절이 하나씩 바뀔 때마다 속담 같은 꽃잎으로
하나둘, 피면 시들고 시들면 핀다.
스마트 시대 좋은 이불들이 천지인데
창호지 문에도 어울리지 않을
삭아 흐늘거리는 이, 모시 홑이불 하나
진정, 버리지 못하는 나는
한 잎, 추풍낙엽 되면 모를까
올올이 묻어있는 당신의 모성애를
차마, 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28. 지나고 보니 알겠더라
* 계절이 지나가는 길목에는
떠난 이의 뒷모습을 참 많이 닮았어라
비 온 뒤 산허리 휘감은 운무 속에
한때는 산이 되어 앞을 보지 못하고
눈멀고 귀먹은 소설만 읽었더라
살아 숨 쉰다는 것
한 송이, 풀꽃을 닮았어라
한 점 부는 바람 앞에
빛바래져 가는 꽃잎이라는 것도
천년 아닌 백 년 꽃잎이라는 것도
세월 깊이 들어가니 이제사 알았더라
한동안 내가 내를 잊고 살 때는
봄 여름 가을 겨울 가고 오는 줄 몰랐더라
해 시계 등에 지고 숨 가쁘게 돌다 보니
밤하늘 별도 달도 있는 줄 몰랐더라
나 지금 묻노니 그 최선, 이였다는 거
그것이 바로 산다는 것이었어
29. 달의 변천
* 그 옛날 보름달에는 계수나무 한 나무
토끼 한 마리와 이태백이 있었는데
그 옛날 보름달에는 옥도끼 금도끼
초가삼간도 있었는데
달의 사랑 달의 가슴이 변하고 있다
성조기를 꽂아 놓은 달의 표면
암스트롱과 올드린 달의 발자국
암반과 지반을 지고 오던 날
계수나무도 스러지고 초가삼간도 내려 앉고
이태백도 토끼 한 마리도 우주 숲으로 사라졌다
달아 달아 밝은 달아 이태백이 놀던 달아
저기 저기 저 달 속에 계수나무 박혔으니
옥도끼로 찍어내어 금도끼로 다듬어서
초가삼간 집을 짓고 양친 부모 모셔다가
천년만년 살고 지고 천년만년 살고 지고
한 세상 부르던 울 어머니 달 노래
돛대도 아니 달고 삿대도 없이 멀어진 달
그달이 나를 품어 흘러가고 있다
하늘에서 흐르던 달이 내 안에서 흐르고 있다
30. 누가 시간을 금이라 했든가
* 이 하루 꽃답게 피어나
삶의 노래에 음표를 붙이는 것은
소중한 하루의 음반이기 때문이다
나의 하루가, 너의 하루가 될 수 없고
너의 하루가 나의 하루가 될 수 없듯이
맥박이 뛰는 한, 일 초의 시간인들
어찌 헛되이 보낼 수 있겠는가.
백 년이란 꽃잎 속에서
일 년 삼백육십오일 하루하루를 엮어,
심장이 뛰는 꽃잎을 만들고
그 일 년을 엮어서 백 년을 만든다.
유효기관은 백 년 -
백 년 꽃잎 속에 달이 흐르고 있다
백 년 꽃잎 속에 등이 굽어지고 있다
백 년 꽃잎 속에 돌고 돌아가고 있다
한 잎 떨어지는 하루의 등 뒤에서
누가 시간을 금이라 했든가
31. 제황산 전설
* 삼백 육십오 계단을 올라
옛 부엉산 진해 탑 산을 둘러본다
산새가 부엉이를 닮았다 하여 부엉산
속천항을 품은 작은 산
동쪽으로 장복산,
서쪽엔 굴암산
북쪽으로 산성산 한 폭의 병풍
아름다운 해변의 도시 진해
언제부터인가 도심 빌딩 숲,
부엉이 마을 작은 산,
소리 없는 울음으로
눈물 없는 눈물로
영혼 없는 영혼으로
그 벽화가 전설을 채운다
임금이 나올 명당자리 제황산이라 하여
일제 강점기 러일, 승전 탑을 세워
기를 꺾었다는 전설이 흐르는 이곳
옛 부엉산 제황산은 아늑한 눈빛으로
해가 뜨고 질 때까지 명장의 얼굴로
내항의 바다 속천항을 바라보고 있다
32. 코로나 19
* 사람과 사람이 나라와 나라가
총과 총이 전쟁인 줄 알았는데
눈에 보이지 않고 귀에 들리지 않고
하늘에도 땅에도 그 실체도 없는 것이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숨을 거둬가는
우한에서 시작된 코로나 전쟁
지구촌 마을을 쓰나미처럼 강타하고 있다
무형의 공간을 건너 하늘에도 땅에도
격리隔離와 격리隔離 속에
거리에도 어느 곳에서도 공포의 거물
소리 없는 폭탄은 곳곳마다
삶의 터전을 마비시키고 있다
마음 놓고 다닐 수가 없는 마스크 세상
세계 경제 날개가 추락하고 있다
쓰나미처럼 밀려오는 시대적 변화
그 파도 속에서 뉴스 속보가 흐른다
진해 군항제 취소, 57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다
이월 매화마저 고개를 숙인 뜰 앞에 서서
하늘을 우러러 간절히 두 손을 모으는 날
허공의 까마귀 울부짖는 소리는 또 한 사람
죽음을 슬퍼하는 것일까
33. 섬진강 가에서 띄우는 배
* 하늘과 땅 바람 앞에 이 마음 환히 늘어놓고
한 자락 휘도는 바람 어귀에
청옥 빛 저 하늘을 나는 새들이여
나는 묻노라 묵언의 저 강물처럼 우리들의 해후
얼마나 기다렸든가 얼마나 갈망했든가
이제 입을 열고 이제 귀를 열고
금빛 물비늘 치는 저 물살처럼
내 호숫가에 일렁이는 목마른 바람들이여
천불산 천 불탑 두 손 모았던 여느 날처럼
꽃눈 내리는 매화 언덕에 간절한 사랑 묶어놓고
굽이굽이 기운 한 세월 빛바래져 가는 노을빛에
그 마음 어찌 잊을 리야
여울목 같은 삶의 물길을 돌아 샛강의 갈림길
허나, 다시 하류에서 만나 큰 강물로 흘러야 할 우리
그 먼 길 돌아온 저 끝에 아늑히 흐르는 온유한 강물이여
어머니 품속 같은 고향의 하늘이여
다시 만나는 강 모래밭에
천 년을 흘러 또 천 년이 흘러도 흘러야 할 너의 심장처럼
너의 푸른 숨결 위에 갈맷빛 사랑의 배를 띄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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