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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알 혁명의 꿈1 信天함석헌
내 생각은 民에 있다
오늘 ‘씨알’ 이야기가 나왔으니까 부득이 설명을 조금 해야 하겠습니다. 그전에 내 글을 보신 분은 물론 아시겠지만, 그렇지 못하신 분은 아마 모르실지도 몰라요. 우리말로 하면 ‘백성’이란 말인데 지금 말로 하면 민중, 영어로 하면 ‘피플’(people) 그런 것인데, 그럼 그것을 우리말로 해보자 그 말입니다.
그런데 그것도 내가 시작한 것 아녜요. 유선생님이 옛날 유교의 ‘대학’이라는 책을 풀이해 가르쳐주시다가 대학지도 재명명덕 재친민 재지어지선(大學之道 在明明德 在親民 在止於至善). 재친민(在親民)이라, 민을 번역하다 우리말로 없으니까 뭐라할까 ‘씨알'이라면 좋을까?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그런데 그것을 내가 퍽 좋게 들었기 때문에 그 뒤에 계속해서 써본 것입니다.
잡지 하기 전에도 물론 썼지만 잡지를 하려고 할 적에 잡지의 제목을 뭐라고 붙이면 좋을까, 그럴 때 나는 일제시대 때부터 내 생각 두기를 계속 ‘민’(民)에다 두는 것입니다. 민중계급에다가. 그러니까 민중이라고 해도 좋은데, 왜 민중이라고 안그러냐하면, 같은 의미의 말이라도 지금까지 있는 말이 모두 요새 있는 자연계같이 오염이 됐어. 더러워져서 때가 묻고 상처가 났어. 그래서 국민이라고 할 때도 민자가 들어가는데 혹은, ‘백성’이라고 그러면 아무래도 봉건시대의 말이고, ‘국민’이라고 그러면 요근래에 오다가 민족주의 시대, 군국주의 시대 이런 때에 그 민중을 가리키는 거고, ‘민중’이라고 하면 서양에서 하는 말이고, 또 ‘인민’이라는 말은 누가 듣자마자 벌써 이북의 공산주의자들이 하는 말로 알것이고, 공산주의자들이 쓴다고 무서워서 못 쓸 것은 없습니다. 또 공산주의자들이 썼다고 그 말을 쓰면 너도 공산주의가 아니냐 하고 배척을 하면, 그것은 몰라서 하는 말입니다. 그런 소리 하면 못쓰는 것입니다.
실례를 들면 나라를 사랑하자는 생각에서는 나도 다를 리 없습니다. 남보다 앞선다는 말을 어디 하겠어요? 그럴 수는 없지만 될수록은 나도 떨어지지 말고 나라 생각해야지 그런 생각이 있지만, 반드시 담벼락에다 국기를 붙여놓고 거기다 절을 해야 된다든지, 그런 것은 안합니다. 나 혼자 있을 때는 할지 몰라요. 하나 여럿이서 하자면 더구나 안 합니다. 왜 그런고 하니, 내 마음에서 내가 우러나서 어느 순간에 그러고 싶어서 하는 것이 정말 존경이요 절이요 그렇지, 남이 구령을 불러서 ‘국기에 대해서 경렛!’ 기계처럼 하는 것은 의미가 적으니까요. 노상 없다고 그럴 수는 없겠지만 또 사람 중에는 그런 것을 끔찍이 좋아 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제 걱정은 아니 하고 남의 걱정을 많이 하는 사람들이 그래요.
그런데 소위 정치라는 것이 이제 장박사님이 말했듯이 그런 정치라면 그럴 리는 없겠지만, 그 사람도 자유 모르면 불쌍한 사람이니까 그럴 때에 내 자유를 위해서 이렇게 모르면 귀쌈 좀 맞아도 괜찮소. 나 미운 생각 안하고 맞겠소. 그리고 이왕이면 욕지거리 마시고 가만히 서서 맞아보시오. 그러면 효과가 있을 거예요. 하여간 애국이라는 거 그런 데 있지 않다 그 말입니다.
같이 살아가자는 생각
그러니까 ‘씨알의 소리’는 그래 하는 거예요. 옛날부터 있는 말이지만, 옛날 정치로부터 오는 그 말과는 상관이 없는 데가 거기 오염이 된 점이 있어. 그러니까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우리 역사를 새롭게 해보자는 것인데, 우리가 세상에 나면, 우리보다 전에 있었던 분들이 알았던, 그 사는 가운데서 얻었던 전통이라는 것을 아니 받을 수는 없습니다. 역사라는 것은 전통이 있고야 역사가 있지 전통 없이는 역사 없습니다. 마치, 내 늘 하는 소리입니다마는, 사람이 살아가는 역사생활이라는 것은 릴레이 경주 같아서, 앞의 사람이 뛰었으면 내가 그 사람 다음에 계속해서 뛰어야 하는데 앞의 사람을 이어 뛴다는 표적이 없으면 뛰어도 된 것이 되지를 못해. 바통을 반드시 받아서 뛰어야 하지. 바통 받아 쥐지 않으면 소용이 없어요. 앞의 사람은 힘껏 뛰었어도 누구에게 바통을 넘겨주지 못하면 뛰어도 뛴 의미가 없어져요. 그러니까 뛰는 동작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이 전체에서 가지는 그 의미가 나와야 하는데, 나오려거든 반드시 바통을 넘겨주어야 하고 반드시 받아가지고 뛰어야 합니다. 그래 쉽게 비유한다면 역사라는 것이 그런 것입니다.
그러니까 전통이 없이는 역사가 안됩니다. 전통이 뭐겠어요? 제일 알기 쉬운 전통이 한국 사람으로 생겨난 것, 얼굴을 보면 당신 한국 사람이군, 중국 사람하고는 좀 다르군, 일본 사람과도 다른데, 만주족 비슷한데, 만주족도 아닌데, 서양 사람은 물론 아니고, 그렇게 보는 그게 받아 가지고 오는 바통입니다. 또 이다음에 우리가 시집 장가를 가서 애기를 낳는다고 하면 그것도 나 비슷하게 날 거예요. 그렇게 생김새가 비슷하게 되는, 또 그걸 따라오는 성격이라는 것도 가는 것이 있어요. 그건 학교에서 다 배워 알죠? 유전인자 속에 유전돼가는 그것을 통해서 우리가 민족이 된 거고 인류가 된 거고 인간이 된 거니까 전통은 존중 할 줄 알아야 돼. 전통 없이는 살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이미 있는 그것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서 의식적으로 그것을 더 발전시키자고 하는 것이 사람의 일입니다. 그래서 그 점에서 귀한 것이 ‘생각한다는 것’ 사람은 특색이 생각하는 존재다, 생각은 뭘 하나, 이미 하고 있는 것을 내가 알아서 새삼스럽게 의식적으로 그것을 다시 한 번 씹어보는데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전통이 없으면 내가 이 나라에 날 수도 없었고, 이 나라에 사는 사람으로서의 양심을 가질 수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우리들의 앞에 있었던, 얼마나 많은 우리 민족이 살았는지는 모르지만 그 사람들이 개인만이 아니라 여럿이 합해서 사회적으로 살림을 해가는 동안에 여러 가지 고통도 겪고 실패도 많이 당하면서 얻은 그 어느 보람된 것, 가치가 있는 것을 만들어갑니다. 이것은 이렇게 하는 것이 몸에도 좋고 우리 정신에도 좋고 이것을 가지면 나뿐 아니라 전 사회가 살아갈 수 있다는 그것을 실증해 얻은, 그것을 내가 전해 가지고 있는 것이 내 몸이요 내 맘이니까, 그 점에서 사람이 다른 동물과 다른 점이에요.
그래 그 씨이라는 것도 그렇기 때문에 과거의 것을 받아두는 것, 우리 선조들이 과거에 살아서 피땀으로 가치를 실현해서 실증을 해서 요것은 개인에게도 좋고 사회생활에도 좋다고 하는 것을 실증한 다음에 우리에게 넘겨주었습니다. 넘겨주는 줄도 모르게 아버지와 어머니가 집에서 밥상에서 밥을 먹는 동안에, 할아버지 할머니 옆에서 자는 동안에 옷을 입고 길을 걸어가고 학교의 동무를 만나고 말하는 동안에, 얻어 듣고 받아가진 역사적 가치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지켜야 합니다. 거기다 얼마큼을 또 진보시켜서 후에 전해야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거기에는 자연히 받으면서도 취사선택이 와야 돼요. 전에까지는 이게 좋아서 이렇게 해왔지만 시대가 변천됐으니까, 우리 사는 이 자연적인 환경도 그렇지만 그보다도 역사적인 환경이 더 많이 변했으니까, 옛날이 주는 대로 대체로 좋은 줄을 알지만 그대로 갖다 맞추기에는 맞지 않는 점이 있을 게다, 그것이 무엇일까, 그것을 생각해서 버릴 것은 버리고 지금의 목적에 살아가는데 조금 더 합리적으로 맞을 수 있는 점을 연구해나가는 게 사람의 일 아sP요?
'씨알’이라는 명사는 그래서 백성이라 국민이라 민중이라는, 지금의 말로 표현하면 어쩐지 부족을 느끼게 되니까, 이 앞에 살아가는 새살림을 해보자고 하는 것을 목적으로 두고 생각을 할 적에 이렇게 이 말을 한번 생각해보는 것이 좋을 거다, 그래서 쓴 것입니다.
오늘 씨알 철학을 다 말할 수는 없고 그건 우리 ‘씨알의 소리’라고 내는 것을 보면, 나도 이미 다 알아서 하는 소리 아녜요. 잡지를 낸다고 그러니까 저 사람은 이미 다 무슨 지식이 있고 경험을 쌓은 것이 있어서 그것을 전해주려나 하는데, 아녜요. 같이 살아가는 동안에 너도 그 전에 생각 못했고 나도 생각 못했던 것이 나오는 거, 사람은 생각하는 동물이지만 생각은 물론 생각하는 주체는 나지만, 내가 생각해내는 생각이 나 혼자 있을 때보다는 여럿이 있을 때가 훨씬 더 나아져요. 여럿이 모이면 네 생각 내 생각 여러 생각이 있으면, 이 사람의 생각보다도 보다 나은 어느 새로운 생각에 도달할 수가 있어요. 그 생각을 알아내는 것은 네가 할지도 모르지만, 일단 ‘보다 나은 것’이 나온 다음에는 그 사람의 소유가 아니고 전체의 소유가 됩니다. 학문상에서 새로운 이치가 났다는 것, 새로운 발견을 했다는 것, 다 그런 것 아니에요?
그러니까 우리 같이 살아가는 사회적인 역사적인 살림에 있어서 그런 점을 의식적으로 생각하면서 가자고 해서 붙인 이름입니다.
그러면 내가 왜 그런 말을 하게 되었냐 하면 아까 먼저 강연하신 그 말씀 참 좋은 말씀을 들었다고 하는 것, 어느 순간에도 잊지 마세요. 어느 순간에도 마음속에서 잊지 마시면서 내가 이제 말하려는 것을 될수록은 간단하게 하려고 하니까 들어보세요.
정치와 종교
우리 사람은 다 이렇게 보기에는 몸은 혼자인 것 같지만, 혼자서 살아가는 사람은 없어요. 내가 원하든지 원치 않든지간에 사람은 다 이렇게 사회적인 생활을 하게 마련이에요. 또 우리 사람만이 아니라 다른 동물도 그런 점이 있습니다. 그런 거는, 너무 그런 점만을 생각하려면 시간이 많이 가니까 말겠습니다마는, 크게 생각할 때에 두 가지로, 요새말로 하면 체제가 있다, 무슨 그런 것이 있어요. 하나는 종교라고 할 수 있고 하나는 정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의미 있는 것을 생각해내서 의식적으로 그것을 발전시켜가기 위해 애써야 하는데 아직 내게 의식되지는 않고 있는 거예요. 하지만 그것을 생각을 해서 ‘아, 그렇지’ 하기 시작하면 거기에는 자연히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서 어떤 조직이 생기고 제도라 할까 그런 것이 생겨 나와요.
그것 없이는 역사적으로 내려오는 법 없습니다. 그런데 그중에서 생각을 할 때에는 생각에서 또 생각이 나고 생각이 나오고 그러는데, 우리 그 생각을 하는 것은 이제 전체, 이 살아가는 목적에 합하도록 해가기 위해서, 어떤 제도를 만든다든지, 어떤 사상이라고 이름을 지어서 그렇게 해놓으면 그것은 그 다음에 고정이 돼버려요. 왜 그런고 하니, 집에서 길러보는 애기 모양으로 처음에는 그 애기에게는 좋은 옷이라고 잘 말라가지고는 옷을 해두지만, 애기는 점점 크니까 아무리 값진 감을 가지고 만든 거라도 후에는 벗어버리는 때가 와요. 그때에 돈을 많이 주고 값지게 만든 거라고 버리는 것이 아깝다 해서 벗기지 않고 두면 애기에게 손해가 되는 것은 우리가 잘 알잖아요? 개인만이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가 전체 사회살림을 하고 역사살림을 해가는 때에도 그렇다 그 말입니다.
그것은 종교에도 있고 정치에도 있다 그 말이에요. 그런데 종교는 비교적, 결국에는 마찬가지가 됩니다만, 옛날에는 다 같은 데서 나왔는데 아직도 종교에는 비교적 폭력을 쓰는 일이 없지 않습니다. 있긴 있지만 좀 적을 수 있어요. 정치에서는 흔히 폭력을 많이 쓰게 돼요. 일단 만들어놓으면 그걸 그 제도가 오늘날 살아가는 이 사람들에게 좋다, 그것 말고 그 일을 맡아가지고 있는 나 자신에게 사사로이 이익이 난다든지 기분이 좋다든지 하는 것이 서로 관계가 없는 것인데, 그것이 붙기 때문에 권력을 쥔 사람이 다 망하잖아요. 그런 것을 우리가 어떻게 해갈 건지, 그래서 내가 '씨알’이란 소리 하는 것입니다.
그럼 이거 왜 그러냐? 그 사람이나 우리나 바닥에 있을 때는 마찬가지인데 거기 올라가면…… 갈 때까지는 무슨 생각이냐 하면, 이것이 전체의 일이니까 우리나라를 위해 내가 이것을 맡아 한다는 생각이 있겠지요. 그러나 일단 그 자리에 올라가면 아까 장박사님이 말씀하실 때도 많이 비춰나왔습니다만 딴 것이 거기에 생겨요. 본래 우리 전체의 살림으로 하면 권력이란 결코 그 사람에게 주는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이 이 전체가 하는 일을 맡아서 하는 거예요.
다만 한 분은 즐거워서 전체를 위해서 한 것이고, 또 이쪽 사람은 아주 싫은 거를 불행하게 갑자기 오는 바람에 피하지도 못하고 당한 것이고. 그러니까 그것이 외양으로는 같으면서도 의미가 매우 다르지요. 그러면 이런 이야기를 길게 하지 않아도 잘 알 줄 압니다.
악의 뿌리, 너희는 못 뽑는다
간단하게 따져서, 씨알이라는 소리를 왜 하냐하면, 비교적 그런 약점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가 알 것은 왜 사람이 아무것도 아닌 지위도 없고 돈도 없고 각별히 사회적으로 존경을 받는다든지 그런 것 없이, 그저 어디 가나 있는 것과 마찬가지의 그런 사람으로 있을 때에는 비교적 그렇지 않다가, 왜 그런 데 올라가면 그렇게 되느냐? 이런 것 아주 알기 어려운 문제입니다.
그러면 내 재주 가지고는 여기서 오늘 저녁에는 못 푸는 거지만, 오늘 저녁만이 아니라 몇 해를 두고 풀어도 그것은 못 푸는 것입니다. 악이라는 것은 어디서 나오는 거냐? 왜 있는 거냐? 그것은 못 푸는 것 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감히 풀겠다는 것은 아니고 그 점에 관해서는 간디가 아주 좋은 대답을 해주었어요. “악의 근원이 무엇인지는 우리의 힘 가지고는 못 푸는 것이지만, 우리로서 할 것은 다만 선이 뭐고 악이 뭔지를 아니까 될수록 선을 행하고 악은 아니하는 것뿐이지 그 이상은 못한다.”
그 가르침에서 그보다 더 적절하게 아주 깊은 것은 예수라는 이가 성경에서 가르쳐준 것입니다. 제자들이 말하기를 “선생님, 우리가 씨 뿌릴 때에는 좋은 곡식을 심었습니다. 그런데 어디서 가라지가 나왔습니까?” 예수님이 “밤사이에 도둑놈이 그랬구나.”
도둑놈이 그랬다는 것은 결국은 어떻게 됐는지 모른다는 말이에요. 왜 그런고 하니 도둑놈 이름 대라고 하면 이름 댈 수 있어요? 그리고는 그 제자들의 말이, “그러면 선생님, 좋은 씨를 뿌렸는데 나쁜 것 났으니 그럼 우리가 나가 뽑으렵니까?”
그러니까 거기가 아주 놀라운 대답이예요. 어쩌면 왜 그러실까, 우리가 모르겠다 그럴이만큼 뭐라고 그랬냐 하면 “뽑지 마!”
뽑으라고 그럴 것 같은데 ‘뽑지 마.’ 그 다음에 설명이 “가라지를 뽑으려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두렵다!”
그런 것은 ‘너희 힘 가지고는 악을 뿌리째 뽑지는 못한다, 너희 능력으로는 못하는 것이다.’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것은 하고, 할 수 없는 것은 아니하는 것이 참으로 선을 하는 거지, 할 것도 내가 하겠다고 그러고 하지 못할 것도 내가 하겠다고 하는 것은 못쓰는 거예요.
그래서 참으로 그것은 깊은 가르침이에요. 그러나 악의 문제가 해결 안된다는 것은 아니니까, 이다음에 어느 때에 가면 하나님이 자기의 심부름꾼은 어느 누구라고 이름 지을 수 없는 천사라 그랬어요. 자기의 일꾼을 보내서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서 불로 싹 없애버리고 알곡은 곳간에 들이는 날이 온다. 그렇게 해서 우리가 할 것과 자연이라고 할까 역사 자체에 따라서 해결이 되는 문제를 구별해주신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잘못하는 것 중에 흔히 있는 것의 하나가 그것이에요. 제가 할 건지 못할 건지 도무지 알지도 못하고 하겠다고 하는 것, 가령 가정을 합시다, 학생 데모하는 것을 보면 요새 뭐라고 그랬지, 옛날 하는 대로 그대로 했는데 “몰지각한 놈들이 공부할 생각은 안하고 그런다” 그랬어. 그러면 그 말하는 사람에 대해선 두 가지 생각을 할 수가 있어요. 배운 것이 그것밖에 없어서 그것이 제일 적절하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말했을 수가 있고, 그 다음은 또 아주 딴 생각이 있어서 단호하게 데모를 뿌리 뽑아볼 그런 심산이 있어서 말조차도 모방해 가져다 썼을 수도 있고, 두 가지 경우가 있을 수 있는데,그 어느 경우나 잘못된 것 입니다. 할 수 없는 소리입니다.
하나의 운명 공동체
가령 누가 가서 이런 아름드리 나무를 내 길 가는 데 이놈이 방해를 하더라, 내가 이놈을 뽑아버릴란다 하면 여러분이 승낙을 하겠어요, 안 하겠어요? 아이고 되지 못한 소리, 나무 뿌리 뽑아봐, 네 뿌리가 뽑히지. 그것은 크고 작은 것을 몰라요. 크고 작은 차이만이 아니라, 만물의 이치를 몰라서 그래. 소위 그 데모라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고 잘못 하는 때에는, 여러분은 그 잘못은 안하는 줄 압니다만 그러나 그런 점으로 싸우시려면 요런 것 분명하게 생각하셔야 돼요.
데모라고 그럴 때에 그 사람들이 다 옳은 것으로 가정을 하면 잘못이에요. 그 학생들이 나와 열심으로 데모를 하지만 7천명 8천명, 어제도 만 명 소리 있었다고 전주에서 그랬는데, 그 7천명 8천명이 아주 다 훌륭하게 사회를 위해서 우리 국가를 위해서 모든 것을 다 바 칠 열심이 있어서 그러겠어요? 그렇지를 못할 거예요. 개중에 참 선한 뜻에서 하는 사람도 있고 또 평소에 하던 공부 싫어서 그러는 사람도 있고 별사람 다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거기서 볼 줄을 몰라서 그래.
학생 데모라고 하는 것은 사회적인 현상으로 보아야 하지. 김 아무개, 이 아무개 개인이 문제가 아냐. 그 자연인이 문제가 아니에요. 학생인 고로 그때에는 김 아무개 이 아무개, 나는 기독교신자, 그래서 거기서 동원돼 나온 것이 아니고, 이 사회에 지금 있으면서 이 사회가 돌아가는 꼴을 보고 그 공기를 마시고 그것 때문에 저도 모르게 동원이 돼서 나온 거니까. 그럴 때에는 정치하는 사람은 학생들이 데모를 한다. 그중에 무지몽매한 놈들이 있어서 그렇게 한다, 그것은 벌써, 거기서 잘못 본 거요. 지식이 부족해서 잘못 보았다면 그것 또 용서할 수가 있어요. 그래도 그 사람도 나라일 해보자는데 배운 것이 그것밖에 없어서 그랬지, 그러고는 잘못된 것을 용서해줄 수가 있어요.
그러니 그런 것은 우리 자신을 위해서도 그렇고 저 사람들을 위해서도 그렇고 분명하게 생각해서, 그런 생각을 하고 데모를 하셔야 할 것인데…… 그러니만큼 스스로 내 몸을 돌아봐서, 내가 무슨 의미로 나서게 되었는지 잘 몰랐다면, 깊이 생각해서 내가 나도 모르게 내 뒤에 어느 뜻 있는, 막아낼 수 없이 커다란 힘이 있어서 이러한 것인데 이게 뭐냐? 이 힘이 어디서 오는 거냐? 어디서 이거 오게 됐냐? 그 점 잘 알고 하셔야 하는 거고. 또 내가 거기에 어그러진 점이 있다면, 물론 반성해서 아니 그러도록 하는 거고, 그런 점이 있다 그러면, 그런 사람들에게도 가르쳐서 또 그런 일이 없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치하는 사람의 자리에서 생각한다면 그렇게 될까?
가령 안보라 그럽시다. 나라의 안보문제 때문에 이걸 이래서는 안된다, 그러는 사람과 의견에 차이가 있어. 차이가 심해지면 아주 피차에 원수같이 생각돼. 저 사람들은 어떻게 하든지……,그래서 말을 하는데 뭐라고 그랬죠? “단호하게 처치한다”고 그랬더군요. 그거는 그 사람들이 잘못한 말이에요. 듣기 싫으니까, 우리보고 그랬으니까, 그렇게는 생각하지 마시고, 불유쾌하게 들리거든 왜 그것이 잘못된 말인지를 생각해 여러분이 아셔야 돼요.
왜 그런가? 왜 그런고 하니 사람의 사람 된 점은 폭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폭력도 쓸 수 있지만, 폭력이란 것은 쓴다 해도 최후에 어쩔 수 없이 부득이한 경우에만 쓸 수 있지 그러기 전에는 아니 쓴다. 그것은 누구에게나 마찬가지로 적용이 되는, 사실 인류가 지구 위에 있은 지 지금 아는 지식으로도 2백만 년 3백만 년 전부터 차차 발달해서 오늘에 왔다는데, 그러는 동안에 동서양을 말할 것 없이 어느 나라 어느 민족을 말할 것 없이 그 점에선 같아요. 경험해서 아는 것이 그 점에서 다 일치되는 점인데, 뭔고 하니 우리는 살아 있으면 판단이 달라서 이런 행동이 있고 저런 행동도 할 수 있지만, 누구도 여기서 제외할 수는 없다. 이것은 우리의, 가령 민족이라 합시다, 민족이란 것은 살아도 같이 죽어도 같이, 운명을 같이하는 하나의 공동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돼요.
우리가 그들과 싸운다는 것도 결국은 그것 때문에 하는 싸움인데 우리가 만일 저 자식은 아예 없애버려라, 그런다면 옳은 생각을 가지고 시작을 했어도 방법이 목적에 위배되는 일에 빠지게 마련이에요.
약속한 것은 생명처럼
그러니까 그 점이 어떻게 생각하면 아주 당연한 것 같아요. 이럴 때는 극단의 예를 들어 이럴 거예요. 가령 강도가 들어와서 칼로 나를 죽이련다든지 그런 때에도 폭력을 안 써야 합니까? 물론 그거는 말로 구체적으로 나타난 것은 아니니까 미리 그런 것을 상상해서 대답하기는 어렵지만, 마지막에 아주 부득이한 경우라면 그야 물론 내가 살기 위해서…… 사람이 아니고 짐승이라면, 물론 짐승의 경우에는 폭력을 써서 그래야죠. 그렇지만 사람인 경우에는 무슨 문제가 늘 있는고 하니, 나는 살고 싶지만 내가 과연 저 사람을 죽일 권리가 있던가, 그것이 내게 부여된 것인가, 만일 내가 저놈은 잘못됐으니까 죽여도 좋다, 그러면 처지를 바꿔놓고서 저 사람이 판단하기를 저놈은 죽여도 좋다, 그러면 그럴 때 뭐라고 대답하겠느냐? 그럼 내 판단은 옳고 저 사람은 그르다, 그러겠지만 또 그 사람이 볼 때 내 판단 옳고 그 판단이 그르다, 그러면 뭐라고 하겠느냐?
이런 것은 수천 년 전에 노자, 장자라는 사람들이 다 실컷 토론했어. 시비토론 가지고는 시비 못 가린다니까. 그 문제로 너무 깊이 들어갔으니 그 토론은 맙시다마는, 그런 점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고 내가 왜 말 하는가 하면, 내가 주장하고 싶은 것은 우리가 싸우는 것은 너도 살고 나도 살기 위해서지, 내가 살기 위해서 너는 있어서는 안된다, 그런 주의가 성립해선 안된다 그 말입니다. 그것을 우리에게 분명히 가르쳐준 분이 예수요 석가요 소위 성인이라고 했던 분들인데, 그들은 다 그 점에서 일치해요. 보통사람이 그것을 들을 때는 이해하기 어려운 곤란한 점도 있지마는, 그러나 그래도 그 가르침이 인류가 이때까지 경험해 온 가르침 중에 제일 높은 가르침이다, 그 점을 잊지 마시고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구체적인 경험을 다 보기 전에는 물론 말하기 어렵지만 그게 원리원칙이라는 것만은 잊지 마세요.
그러면 우리 마음이라는 것, 내 양심이라는 것, 이것이 사람이 살아가는 하나의 뜻이 있는 인간으로, 사회적인 인간으로, 역사적인 인간으로 그뿐만 아니라 마지막에는 정신적인 저 우주엘 올라가면 사회적인 역사적인 생활을 안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정신생활에게까지 가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럼 인간으로 볼 때에 이것은 의미가 있는 거다, 그래 살아가는 것이 사람이니까 그런 견지에서 볼 때에 반드시 지켜야 할 원리가 있다, 이 원리를 위해서는 차라리 죽는 한이 있더라도 이 원리를 살리는 것 이것이 사람의 일이다, 그것을 마음속에 언제든지 잊지 않고 있으면 구체적인 일을 당했을 때도 어떻게 할 것인지 판단이 나요. 미리 가상으로 하기 어려운 점을 생각해놓고 요럴까 저럴까 그래서 고민하는 그걸로는 해결이 안돼요.
원리원칙이라는 것은 간디 말을 빌어온다면, “내가 하나님과의 사이에 한 약속을 내 육신이 살기 위해서 그걸 깨칠 수는 없다.” 언제 그랬냐 하면 간디는 자기가 살아가는 동안에 사람이라면 생명을 귀히 여겨야 하니까 그 원리에서 볼 때에는 전연 다른 생명을 죽이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지마는 될수록은 동물을 죽이는 일은 하지 말자, 그렇게 작정을 했어요. 동물이라고 했으니까 그 속에는 모든 것이 다 들어가요. 큰놈 작은놈 할 것 없이 다 들어가는데, 그래 불살생(不殺生)을 지키려니까 일체 동물의 고기를 안 먹는다. 그 속에는 물론 우유도 들어가지. 간디가 맹장염을 아주 심하게 앓아서 의사들이 마지막에는 선고를 했어. “당신이 계속 우유를 안 먹는다면 우리는 이 이상 책임질 수가 없소.” 강권해도 안 들으니까 그렇게 알라고 그랬어요. 간디 말이 “내가 하나님 앞에 맹세하기를 우유는 안 먹는다고 약속을 했소. 조건이 좋을 때는 믿는다 그러고, 나쁠 때는 안 믿는다고 하는 그런 따위의 하나님이 아녜요.”
간디는 그대로 정말 믿은 사람이에요. “하나님이 나를 한 번도 저버린 일이 없는데, 내가 어디 내 몸 살겠다고 내 맘을 갖고 정한 것을 범할 수 있나?” 안한다고 그랬어요. 그래 의사들이 논란이 많았었는데, 옆에서 듣던 간디 부인이 무식한 분이지만 남편을 위하는 생각에서 재치 있게 말했어. “여보시오, 당신이 맹세할 때 우유 안 먹겠다고 그랬지, 산양유를 안 먹겠다고 하지는 않았지요? 그러니 산양유는 먹어도 되잖아요?”
간디같이 밝히 아는 이도 그때는 슬쩍 속았어요. 그래서 산양유를 먹었어요. 왜 내가 아까운 시간에 이런 이야기를 하는고 하니, 옳다 그르다를 지켜가기가 이렇게 어렵다, 간디만한 사람도 그렇다 그 말이에요. 그 다음에 뉘우쳐요. “뭐 그래, 그게 우유라고 할 때에 산양이 포함되는 것을 물론 나도 다 아는 건데, 살고 싶다는 욕심 때문에 아내가 마침 그러는 것을 거기다 이유를 두고 내가 그걸 먹었지.”
그러고는 그 후에까지 후회하고 후회하고 했어요. 그렇게 지켜가기 어렵습니다. 실패하긴 했지만 그래도 다른 사람보고는 권해요. 한번 작정해서 한 것은 꼭 지켜야 한다, 그러는 것은 육신보다는 사람이 역시 정신에 산다, 정신적인 가치가 위에 있다. 육신이 죽는 한이 있더라도 보다 더 귀히 여겨야 하는 것이 저 위에 있다, 그것을 인정하느냐 안하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이 생각하는 선이 뭐고 악이 뭣인지가 달라지게 돼요. 그러니 여러분이 생각 많이 하시라는 것입니다.
씨알 혁명만이 참 혁명
아까 우리가 4.19 말씀도 듣고 그랬지만 저번에 내가 4.19 이야기를 하다가 4.19는 참 좋지만 했었지요. 오늘도 내가 장박사님 말씀을 들으면서 생각한 것이 그거예요. 그렇지. 여러분들이 무슨 박수칠 만큼 흥분할 것이 없는데 어찌해서 마음이 그렇게 떨어질 사이가 없이, 다른 잡념이 나올 사이가 없이, 그야말로 심취해서 귀를 기울이고 들으셨나 하면, 그것은 어쩌면 이치에 그렇게 합해, 이게 착착 들어맞지 않아요?
그래 사람이 무어냐 하면 먹는 것도 좋고 맛있는 것을 보면 그저 먹고 싶고, 코에 좋은 냄새 맡고 싶고, 꽃이 고운 것이 있으면 가지고 싶고, 그것도 견딜 수 없어서 그러는 것이지만, 그것 못지않게 무슨 이치에 합하는 이성이 있어서, 도리에 맞는 이야기가 나올 때에는 먹고 입는 그런 것을 다 잊어버리고 그편이 훨씬 더 좋아서, 거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점이 있다는 것, 그래 공자님은 아주 그런 분이었기 때문에 자로(子路)가 언제 와서 “선생님, 다른 사람이 너의 선생님은 무엇을 하는 분이냐? 그러기에 제가 미처 대답을 못했습니다.” 하자, “이 사람 아, 아 날더러 말하란다면 그 사람은 배우기를 좋아해서 한번 배우고자 열심을 내면 밥 먹기를 잊어버리고, 나이가 몇 살인지 늙어 죽게 되었는데 그저 배우는 데만 취하는 사람이라고 그런 말을 왜 못해줬나?” 하고 말했습니다.
그러는 것을 보면 공자라는 이는 안다고 하는 데 얼마나 취미를 느낀 분인지 알 수가 있잖아요? 그러니까 그것은 공자에게만 있는 것이 아녜요. 우리에게도 다 있어요.
사람이 처하기를 아주 낮게 처해서 그저 마실 것만 있는데 먹을 것만 있는데, 눈에 보이고 귀에 듣는 게 그런 것만 있는데서 자라나면 그런 사람이 되지만, 친구 취하기를 높이 취해서 눈에는 안 보이지만 책 속에 있는 훌륭한 분들, 정신적인 가치를 위해서 일생을 바쳐 살던 그 분들을 친구로 삼고 날마다 살아가노라면, 도저히 맛있는 것 안 먹고 살 의미가 없던 것은 잊어버리고, 먹을 때가 지나가도 지나가는 것을 모르고 도취해서, 지식 욕구를 만족시키는 데 쾌감을 느끼는 것을 여러분도 다 경험해서 아시지 않아요?
그러니까 내가 씨알이라고 할 때에 씨알에서 말하고 싶은 것은 씨알이 박수 잘하는 것이 씨알이에요. 하지만 박수만 쳐서는 씨알이 못돼. 물론 그것도 씨알이지.
사람이란 감정이 있으니까 시원한 말을 할 때 박수도 치고 그래야지. 그럴 줄도 몰라서야 되겠어요? 하지만, 그보다 이치에 들어맞는 말을 해줄 때엔 도리어 박수치기도 잊고 내가 듣는지 저 사람이 듣는지, 내가 말하고 저 사람이 듣는지, 저 사람이 말하고 내가 듣는지를 잊어버리고 하나가 돼서 갈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모르고 있었는지 몰라. 나는 그것을 옆에서 보면서 참 좋다, 이것이 씨알의 혁명이지, 이 자리에서 지금 혁명을 하고 있다, 혁명의 준비를 하고 있다, 이게 씨알의 혁명이다, 오늘 ‘씨알의 혁명’이라고 그랬지만 나는 그 생각을 하면서 들었어요.
왜 그런고 하니 여러분이 그 말 듣기 전과 한사람이 아닐거요. 분명히 달라진 것이 있을 거요. 지극히 적은 정도인지 몰라도 분명히 달라진 것 있어. 분명히 달라지기만 했으면 그 어느 때에 가서라도 반드시 말을 하고야 마는, 그렇게 하는 것이 소위 세상에서 말하는 혁명이라는 거요. 그러니, 참 혁명이라고 하면 엄정한 의미에서 씨알의 혁명만이 참 혁명이야.
그래 아까 하던 말로 다시 돌아갑니다만, 지위가 있고 학식이 있는 사람은 나의 참 ‘나’라는 것을 잊어버리고 '나’가 있은 고로 내게 와서 붙었던 어느 그거를 ‘나’로 착각하고…… 쉬운 말로 해서 내가 재주가 있어서 돈을 벌수가 있었지. 돈이 와서 내게 붙으면 이것이 곧 나인 줄 알아. 내 돈이라고 해서 돈을 지키다가 목숨을 잃는 경우도 있잖아요? 그것은 분명히 살기 위해서 돈 모은 건데 돈을 지키다가 죽는 사람이 있어. 그런 사람 있습니까, 없습니까? 세상에 그런 사람 많잖아요?
요새 세월이 이렇게 어렵고 하면 강도 들어올까 봐 걱정합니까, 안합니까? 강도 들어올까 봐 걱정할 건 없어. 언제든지 들어오기만 하면 준비해두었다가 내주면 돼요. 그게 아까워서 그러다 죽으면 그 돈 못 지키지 않아? 못 지키는데 차라리 그 사람 줬으면 좋잖아. 이치가 그렇지 않아요? 저번에 미국 갔더니 하는 말이 “여기는 도둑이 참 많습니다.” 지금 우리나라 사람들이 거기서 비교적 많이 하는 직업 중에 성공 한다는 게 그로서리라는 것, 식료품점 그것을 하는데, 아주 도둑이 많이 든대요. 권총강도가 열 번을 들어왔는데, 그것을 알아들으셔요. 여러분 그렇기 때문에 그 사람들은 언제나 큰돈을 거기에 두질 않고 현금 절대로 뵈지 않아요. 그렇게 하고 현금이라는 것은 10불짜리 5불짜리 1불짜리, 최고 있다고 해야 10불이나 20불인데 이것은 언제나 준비되어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밤손님이 들어와, 주면 그럼 또 간대요. 도둑놈이라도 거기는 좀 인심이 나아. 그렇지만 거기는 대체로 말하면 사람이 살아가는 이성이 우리보다 조금 발달했다 그 말예요. 강도를 하더라도 무슨 크게 빼앗아가자는 게 아니라 그 사람들이 대개 술값이 없어서 그러는 건데, 술값이나 주면 가는 것을 어리석게 난지 내 몸인지 내 몸에 와 붙은 건지.
못났기 때문에 잘난 씨알
그러니까 씨알이라는 건 뭔고 하니 그런 것이 아예 와 붙지 않았어. 잘해 붙었든지 못해 붙었든지간에. 쉽게 말하자면 못난 사람들이 돼서 안 붙은 거예요. 재주도 적고 힘도 적고. 힘이 강해보세요. 자연히 남을 업신여기는 생각이 나지 않아요? 어떻게 돼서 군인 갔던 것 잘했다면 좋은 일이지만 군인 갔다고 그래도 권총이라는 게 없으면 도둑질 안 할 사람이 많을 게요. 어떻게 돼서 이놈의 권총이라는 것 생겨서 도둑질 했지, 그 도둑질했기 때문에 저도 죽었지.
내 몸이 아니고 와서 붙은 다음에는 마찬가지예요. 그런 것 때문에 마음이 혹하게 돼. 씨알은 그 점에서 못생겼는데 못생긴 고로 이것이 행복이다, 그 말이에요. 왜 그런고 하니 나도 그런 것 붙었다면 그랬을 터인데 다행히 못 붙었어. 안 붙었어. 그러니까 나는 그런 위험성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에요. 예수님도 보통 사람처럼 생각한다면 이왕이면 재주 있고 남다른 게 있는 놈 그를 제자로 삼았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것 혹시 바랐는지도 몰라. 그런데 와도 제 재주만 내세우는 놈 예수님이 좋아해요? 물론 상대 안하니까 다 가버리고 가버리고 못생긴 것들만 이렇게 있는데, 그러니까 “감사합니다. 지혜가 있고 위대한 것들에게는 감춰보이시고 세상에서 못난 것들에게만 가르쳐준 것이 잘되었습니다.”
씨알을 내가 자꾸 말하는 것은 잘나서가 아니라 못나서, 못난 것이 진짜 못난 것이 아니라 못났기 때문에 잘났다는 말이에요. 하늘나라라면 요새 가치체계라는 그런 말 많이 하잖아요? 그런 것 많이 하는데 가치 체계가 똑같지 않아요. 그래 땅의 가치체계 다르고 하늘나라 가치체계가 다르다 그 말이에요.
여기서는 그리스, 희랍 사람들이 하던 논리를 배우니까, 그 철학만을 생각하니까 이성이 그런 것인 줄 알지만, 예수님이 말씀하신 성경 속에 있는 논리를 보면, 석가에게도 그런 것이 많이 있어요. 나는 불경 많이 보지는 못했습니다만 보면 마찬가지예요. 가령 예수님의 책에 있는 것을 실례를 든다면, 아침에 9시에 나가서 “너 포도밭에 들어가서 일해라” 그러고 또 12시에 사람보고 “너 포도밭에 들어가 일해라” 그러고, 마지막에는 오후 5시가 다 돼가는데 그때에도 일을 못하고 있는 사람보고 “당신 왜 놀고 있어?” “누가 나를 일 시켜야죠.” 그래 “우리 포도밭에 들어가 일해라.” 그 일 했죠. 마지막에 돈을 주는데 오후 5시에 들어온 사람으로부터 돈을 1달러씩 준단 말이야. 그러니 아침에 들어온 사람이 화를 내면서 “당신 왜 그 사람한테 1달러 주는 거요? 우리에게 1달러 주면서 저 사람에게도 1달러 준단 말이오?” 그러니까 예수님이 뭐랬죠? “야, 내가 내 것 가지고 선하게 쓰는데 네가 왜 그래? 뭐 잘못이 있냐?”
그것은 사람이 이성은 있지만 그 이성을 잘못 사용한 경우예요. 그러니 이성이 있기 때문에 사람이지만 잘못 쓰면 그렇게 되는 점도 있어요. 그것은 뭔고 하니 이 세상 논리 그것도 논리는 논리거든. 일 많이 했으면 돈 많이 줘야지. 작게 했으면 작게 줘야지. 그것도 옳은 진리지.
하지만 또 다른 면에서 예수님의 편에서 보면 돈을 말하면 많이 가진 놈도 있고 적게 가진 놈도 있지만, 양심은 많이 가졌다 적게 가졌다가 없잖아? 양심 값은 똑같지 않느냐? 사람값은 똑같지 않느냐? 사람의 값이 무슨 그 사람의 키에 달린 것도 아니고 생김새 이쁘다 안 이쁘다에 달린 것도 아니고, 인간의 가치, 인격의 가치는 그런데 달린 것이 아니니까 똑같이 대접해야하지 않아? 그 사람도 하루 먹으려면 1달러 있어야지, 이 사람도 하루 살려면 1달러 있어야지. 그러면 일 시킨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 사람 살아가는 것을 표준으로 주어야 하지 않냐, 하는 논리가 있잖아요. 어느 논리가 보다 높은 논리냐 ? 내가 일 시킨거니까 그만큼 주어야 하지 않냐 하는 것은 낮은 논리이고, 그 사람도 사람이니까 일이야 얼마큼 했든지 살아갈 만큼은 줘야지, 그것은 높은 논리입니다. 쉽게 말하면 하늘나라의 수학과 땅의 수학이 같지 않다 그 말이에요. 이제 종교적인 말로 하면 그런데, 이 세상에 있는 정신교육이 그런 것에 접할 기회가 비교적 없어, 비교적. 아주 없는 사람이야 없습니다만 이 돌아가는 것만을 많이 본 사람은 논리가 그렇게 되니까 학생들 데모했다, 하면 ‘단호하게’ 그것부터 나와요. 그것은 왜 그런고 하니 땅에 속한 논리예요. 강한 놈은 살고 약한 놈은 죽는다, 내가 어떻게 해서든지 강하게 살아야지, 그것도 저를 위해서는 옳은 논리예요. 하지만 그것은 하나에게는 적용되지만 여러 사람에게는 적용이 안돼요. 전체에는 적용이 안돼요. 그래 그것 못쓴다는 거예요.
그러나 보다 높은 데서 이야기를 한다면 그럴 수는 없지. 왜 그런고 하니 사람이란 그저 힘만이냐, 이성이라는 것도 있고 양심이라는 것도 다 있으니까 문제가 다를 때에는, “이 사람아 우선 말을 해봐. 왜 데모 나왔나? 우리나라가 지금 어렵지 않는가?” 이렇게 하면 이해되는 점이 있겠는데 그것은 물어보지도 않고 ‘단호하게’, 그러면 말이 오고가고할 여지가 없어요. 그러니까 그런 것은 써도 마지막에 부득이해서 최하의 아주아주 할 수 없어 하는, 아주 최하의 방법이고, 최선의 방법부터 해보다가…… 그렇지 않아요?
평상시와 비상시
그래 어제 저녁에 저기서도 그 실례를 이야기했소마는 그것 여기서도 이야기하면, 6.25 때 우리나라 장교가 미군 앞을 지나가는데 미군 졸병이 경례를 붙이지 않았단 말이야. 그래 저는 별을 달았지만 미국놈의 눈에는 ‘에개, 코리안의 그까짓 장성이 뭐야’ 하고 깔봐서 그랬는지 몰라. 말야. 또 이 사람은 ‘나도 장군이야’ 하는 맘은 있어서 가서 귀쌈을 올렸단 말이야. “이자식아, 왜 경례 안 붙였나?” 그것 또 미국놈이라 저도 우월감이 있으니까 문제가 생겼어. 그러니 군사재판에 회부가 됐대요.
그런데 그 재판장이 재미가 있어. 그 말을 하니까 “왜 당신이 그 사람의 귀쌈을 갈겼나?” 하니까 “지나가는데 경례를 안 붙여서 그랬다” 그러니까 “그래요. 그런데 당신이 그때에 할 수 있는 일이 그것밖엔 없었소?” 그래 그것밖엔 없다는 것은 동물과의 경계선이 얼마 멀지 않아요. 가령 그때에 턱 내가 별을 단 한국 무엇이라 한다면 그 미국놈이 건방진 듯해도 “아 외국친구가 와서 수고를 하누만” 그러면 척 경례 붙였을 거예요. 그렇게 붙였으면 그게 얼마나 의젓하게 잘 받은 거예요? 다 생각이 모자라서 그래, 생각이 모자라서. 왜 모자랐나? 자라기를 군대 속에서만 자라났기 때문이지.
내가 군대를 깔보기 위해서 이런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오해하면 안돼요. 군인이라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비상시에 비상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만든 것입니다. 가령 사람의 건강으로 말한다면 약이라 그 말입니다. 병이 나면 약을 먹어야 하지만 이것 아주 비싼 거다, 이거 미국에서 부쳐왔다, 한 달에 수만 원씩 하는 거다 하더라도 “수만 원짜리이니까 그것을 날마다 먹을래” 그것은 찬성을 할 수가 없잖아요? 그것은 아파서 어디가 고장이 난 때에 그때에만 이것을 먹으라는 것이 지, 평상시에는 값으로는 몇 닢이 안되더라도 밥이 역시 좋고 국이 좋고 채소가 좋지. 사람이 살아가는 데 평상시에 중요한 일이 그저 중요한 것 아니야?
비상시의 어느 때에 그게 중요하냐? 그럼 내 목숨을 준 것으로 하면 내가 병이 들었을 때 의사가 나를 고쳐주었으니까 은인이라고 그러겠지만, 그럼 그 은인이 집에서 낳아준 아버지 어머니보다 더 중요하냐? 그것은 그렇지 않지. 그거다 잘 알지 않아요? 어느 때 비상한 때 내 병을 고쳐준 것은 은인이지만, 그래도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릴 때부터 길렀고 마지막까지 자식으로 여기고 있는 그 부모지. 그 점을 착각하는 이는 없잖아요? 그런 모양으로 나라의 일도 그렇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결코 군에 반대하는 게 아니에요. 6.25 때 군인들이 죽을 각오를 하고 나가 싸우지 않았더라면 절대 우리가 무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때 나갔던 군인이나 지금 군인이나 군은 마찬가지에요. 지금 군인이니까 6.25 때는 안 나갔지,그런 것이 아니에요. 한국의 군이라는 것은 그것은 창군이래 이 나라의 안보를 위해서 자나깨나 언제든지 지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어느 특수한 문제, 이북에서 침입해온다고 하는 데에만 썼지, 이것이 그저 배고플 때 옷을 입을 때 동리에서 면에서 군에 가서도 이거, 그것은 아니다 그 말입니다.
그런데 내가 군에 가서 별이 달렸다는 것을 기화로 나 이제부터 정치할란다, 그러면 그것은 마치 좋은 약이니까 이제부터 나는 밥은 그만두고 이것만 먹을란다는 것과 마찬가지에요. 먹어본댔자 몸이 죽는 것밖에는 없지 않아요. 그것과 마찬가지로 나라의 일도 마찬가지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결코 어려운데 있지 않습니다. 마음을 바로 쓰나 안 바르게 쓰나인데, 바르다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나는 군인이지, 그 생각 말고, 나는 대통령이지 그것은 괜히 와 붙은 거고, ‘나’라는 생명이 있고, 그 다음에 와 붙은 거지. 첫째 생각에 나는 사람이지 할 때에 이 몸을 이르는 것이 아니에요. 그 속에 사람으로서의 나를 아는 정신을 말하는 그 이성, 그 인간성, 그 양심을 말하는 거니까 언제든지 그것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문제가 지극히 간단해요. 지나가던 사람이 욕을 했어도, ‘나 사람이지, 내가 욕으로 대답하면 못쓰지’ 곧 대답이 나와요. 하지만 그렇지 않고, ‘나 표준으로만 생각하는 사람, 뭐 시끄럽게 굴어’ 그러고 지나가던 사람하고 싸움 잘 걸지 않아요? 술이 취한 다음에는 더 잘 그래요. 술 취해놓으면 이성이 죽어버려요. 그리고 짐승적인 것만 많이 남기 때문에 이 사람보고도 이러고 저 사람보고도 저러고…… 그러는 것이 무슨 상쾌나 한 것처럼 그러고는 술 깬 다음에는 내가 마셨었나, 괜히 그랬어, 후회하고. 유치장에 들어가서 후회해도 소용이 없어. 이미 잘못된 것이니까.
다 지내보았죠? 어려운 문제 아니에요. 그러기에 아까 말한 대로 사람이 세상에서는 영광스러운 것 같지만 권력이라는 것을 쥐고 무력이라는 것을 쥐면 내 속에 있는 이것은 그만 쑥 뒤로 들어가고 이것만이 나오게 돼. 왜냐하면 이놈을 죽이면 다른 놈들이 와서 절을 잘하거든. 이 비겁한 것들이 도덕이 있다는 목사님이라면 와서 절하는 놈은 별로 없어도 저 군인 온다, 더구나 우리나라에서는 그렇게 돼있어요. 왜? 수 백 년이래 아까 장박사님이 말할 때 우리가 잘 들었지만 우리나라 정치 잘못됐어.
바닥사람으로 돌아가는 것
우리 집이 가난해서, 나는 어머니 아버지 잘못 만났다고 그러지만 다행히 가난한 아버지 어머니 만났기 때문에, 우리 집에 돈이 많지 못했기 때문에 공부 많이 하지 못했고, 공부 많이 하지 못했기 때문에 나 생각 많이 했고, 생각 많이 했기 때문에 세상이 무언지 알았고, 그렇게 되지 않아요? 어느 학교 무슨 선생이 호텔에 있는 레스토랑에 갔더니 거기 자기 학교 학생이 왔더래요. “너 어떻게 여기에 왔냐?” 그러니까 “이따금 와요” 그런단 말야. “너 한 달에 용돈 얼마나 쓰냐?” “한 오십만 원 쓰죠.” 학생 한 달 용돈이 선생 한달 월급보다 많단 말이야. 세상이 이렇게 되지 않았소? 세상 어딘가가 근본적으로 잘못되어 이런 건데, 하여간 줄여서 말씀해서 ‘씨알의 소리’하는 것은, 그런 것을 다 쓸어버리고, 이것이 잘못돼서 와서 붙어 있는 거니까. 학식도 높고 돈도 많고, 돈도 1대만 많은 것이 아니라 2대 3대로 많고, 또 계속해 고관집에서 출세해서 사회적 지위가 높았던 사람은 대개가 내 본성을 잃어버리고 말았어. 씨이란 다른 것 아니고 인간으로서의 본성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 그 말이오. 그래 그것을 표시하기 위해서 씨알이라는 말로 발표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혁명을 한다면 천상 그 바닥에 있는 씨알이 하게 마련이에요. 위의 사람이 할 수가 없어요. 여러 가지 밤새도록 해도 그 말 외에 새 말이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아까 말씀이 뭔고 하니 그 이치를 따져서 다 당하고 당한 말인데, 우리는 슬쩍슬쩍 지내보내서 생각하고 지냈던 것을 일일이 회상해서 요때요때 설명을 하니까, 고것이 아주 못으로 박혀서 쪽쪽 머리에 들어와. 그렇게 들어온 다음에 이 마음이 안 달라질 수가 없단 말이야. 마음이 한번 달라진 다음에는 그 사람의 하는 일이 모두 다 달라지게 돼. 당장 달라지지 않아도 언제인가 말하는 데서 다르고 친구 사귀는 데서 다르고 글쓰는 데서 다르고, 학교에 가도 다르고 교회에 가도 다르고, 어디를 가나 다르게 마련이에요.
그러니까 마지막에 총칼 가지고 이러는, 불놓고 약탈하는 것을 혁명이라고 우리가 알지마는, 그것은 잘못해서 그러는 것, 그런 혁명이란 겉에 나타난 것을 가지고 하는 말이지 본래 혁명이 그런 게 아녜요. 이제 한문자로 써서 가죽이라는 '혁’(革)자 아니요? 가죽 ‘혁’(革)자는 가죽이 아니라 '달라진다’는 혁자에요.
본래는 가죽에 썼지. 한데 짐승의 껍데기, 옛날 사람은 지금 사람보다 짐승의 껍데기를 많이 썼어요. 짐승의 껍데기를 빗겨놓았는데 털이 있을 때는 피(皮)자를 써요. 혁이라는 것은 가죽을 이겨서 털이 홈싹 빠지고 이제 영어로 하면 레더(leather)만이 남아요. 그게 혁이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면목을 알아볼 수 없죠. 아까는 털 있고 훌륭한 호랑이 가죽이라도 털을 다 뽑아놓으면 개 가죽이나 호랑이 가죽이나 마찬가지야. 달라지지 않아요? 달라진다는 의미에서 혁. 그런 좋은 실례가, 앓다가 마지막에 병이 악화되어서 죽을 대목에 들어가면 병혁(病革), 병이 아주 도져서 죽게 된다 말이에요. 그 혁(革)이라는 것은 '달라진다’ ‘새로워진다’는 겁니다.
‘명’(命)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이에요. 옛날 사람이 옳게 안거요. 나라의 모든 일이 돼가는 것은 하늘에서 주시는 명령에 따라서 돼 가는 거다, 그렇게 믿었기 때문에 그래 혁명이라고 할 때에는 하늘에서 주시는 명령에 따라서 돼가는 거다, 그렇게 믿었기 때문에 하늘에서 명령을 받아서 나라의 임금이 됐는데 임금 노릇을 잘못하면 하늘이 바꿔치고 다른 사람에게다 그 말씀을 내린다, 그 명이라는 게 ‘말씀’이에요.
그러니까 말씀이 새로워진다 그 말인데 그거는 옛날 사회에서 그렇게 한 말인데 지금도 글자의 뜻으로는 그거요. 거기에 무슨 총 쓴다는 뜻도 없고 불을 놓는다는 뜻도 없고 사람 죽인다는 뜻도 없고 아무것도 없어요. 명을 새롭게 한다는 말예요. 받았던 명을 잊어버렸어. 때가 앉아서 오염이 돼서. 사회의 제도 때문에 사회의 돌아가는 풍조 때문에 어지러워진 것을 다시 한번 새롭게 한다, 그것을 쓸어버리고 본래 우리의 속에 있던 대로 고쳐 다시 밝혀서 그것을 새롭게 한다, 그런 의미에서 하는 건데……,
그런 거를 참 의미에서 할 때는 씨알의 자리에서만 가능합니다. 그러나 따로 씨알이란 종자가 있는 것 아니에요. 사회적으로 있던 나를 잊어버리고 나 위에 덧붙어서 영광스러운 것같이 있던 그것을 일체 부정해 버리고 본래 있던 내 바닥사람에 돌아가는 것이 씨알의 자리인데, 우리는 불행이 다행이 돼서 나라의 대부분 사람은, 소수의 사람이 권력을 가지지, 대부분 사람은 가지는 거 없어요.
왜 참지 못하는가
그러니까 사람의 착한 대로할 수 있는 사람은 의욕이 있으니까 혁명이 날 때에는, 혁명을 위한 때에는 민중과 함께 ‘와’ 하고 일어서야 되는 게 아녜요?
지난번에 기회가 왔다면 왔어요. 말하자면 사람들이 다 그러니까 야, 이제부터는 정말로 자유민주주의로 돌아간다, 바람이 다 그렇게 불지 않았소, 그랬는데 새마을 노래 요새도 곧잘 해. 그것을 들을 때마다 불쾌해 죽겠는데 새마을이라는 말은 그 글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새마을이라고 그럴 때 연상되는 사회에 있는데, 그렇기 때문에 새 정치를 정말 할 생각이 있는 사람 같으면 그 글자에 구애되지 말고 싹 쓸어버려야 돼요. 사람의 마음속에서 묵은, 좋지 않은 감정을 싹 없애는 것이 마땅한 거에요.
내가 과거에 술을 많이 먹어서 나쁜 일이 많이 있었으면 우리 집에서 아주 술병도 없애버려! 술병만 없애버리는 것이 아니라 술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가서 사는 것이 마땅하지. “나 이제 술 끊을래” 그러면서 술집에 날마다 가서 들여다보면서, 술 끊을래, 술 끊을래, 그게 어디 술 끊으려는 사람의 말이오? 그것과 마찬가지로 한국민이 정말 새로워지고 싶은 생각이 있거든 과거의 그런 쓸데없는 것을 기억나게 하는 것을 집어치워! 아침마다 나올 때 여러분 엽서를 보내셔요. 제발 그것 좀 그만두시오. 과거에 지나간 것이 자꾸 생각나니까. 이왕 새마을운동을 하려면 이름을 새로 고치고 실제로 있는 일이 있으면 해도 좋지만 감정 을 가지고 하지 말고, 나라를 위하는 생각으로 그 사람을 가르쳐 고쳐 만들 생각으로 보내시면 그거 확실히 효과날 것입니다.
우리 혁명이란 그런 거요. 그런데 사람들이 어디서 잘못되나 하면 갑자기 어서 효과가 나야지. 그런데 혁명이란 그렇게 쉽게 빨리 되는 것이 아니오. 오늘날 인류가 이렇게 되기까지 세월이 얼마나 들었는지 아세요? 아까 이야기대로 2백만 년 3백만 년 들었다는 거에요. 그런데 뭐가 그렇게 급해서 하루이틀내에 갑자기 해보자고. 그 동안도 그렇게 살아왔지. 그런 모양으로 또 이 앞의 것도 내가 아니라 내가 참는 게 이기는 거지. 어떻게 그렇게 당장에 되겠어요? 당장에 급히 하자고 그러는데, 답답해. 못 나가는 것 같지만 겁내지 마세요. 겁내지 마세요. 길게 봐서 좋은 열매 맺는 것이 그게 옳은 거지 당장에 어디 되나?
그래 맹자도 벌써 지금부터 수천여 년 전에 그런 따위의 정치를 보았기 때문에 “요새 정치하는 사람, 송나라 사람 같지 않은 놈 없다” 제 곡식이 안 자라니까 기다리다 못해 잡아당겨 고갱이를 뽑아놓았어. 당장에 큰 것 같아서 좋아서 아들을 보고 "야 나 오늘 큰일했다.” “뭐요?” "곡식을 크게 했지.” 아들이 나가보니까 다 말라죽었더라는 거에요.
문제는 그런 게 아녜요. 우리는 그런 것을 아는데, 하겠다고 나간 사람한테 그것을 깨닫도록 해주어야 해. 그런데 그것은 몽둥이 가지고 깨닫게 하기는 어렵단 말입니다. 칼 가지고는 더 어렵고, 욕질로도 어렵고. 아까 그 말씀을, 우리 정부 사람들 다 오라고 해서 오늘 우리 강연 들으라고 그랬으면 좋겠는데, 자유당 때부터 요렇게 했는데 거기에 반대할 놈이 하나나 있어요? 누가 그것을 반박하겠어요? 그렇게 귀중한 것은 감정도 감정이지만 지성이지.
이제 내 시간도 많이 가 미안합니다. 우리 몇 해 전에 독일분이 여기에 왔다 간다고 그래서 저녁을 한번 같이 먹었는데, 그이가 날보고 하는 말이 그래요. “지금으로 보아서는 한국에 혁명 일어날 조짐이 아무것도 안 보입니다.”
이 사람의 말에 내가 어떻게 대답할지 잠깐 준비하였다가, 내가 “그래요? 오늘 보기에 혁명 일어날 조건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고 말기에는 나도 부끄러운 생각이 있어서 “그렇지만 오늘 혁명 일어날 조건이 없다가 내일 혁명할 수 있는 것이 한국입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도 하하 웃고 나도 웃고 말았단 말이야. 그게 이치가 있지 않아요? 하지만 사실을 말하면 오늘 혁명의 조짐이 없다가 내일 혁명할 수 있는 민족은 정도가 낮은 민족입니다. 그것은 뭔고 하니 선동만 하면 뭐든지 될 수 있단 말이에요. 그것은 주로 감정에 움직인다 그 말이에요. 감점을 이기는 것이 무엇이냐 그러면 냉철한 의지에요. 박수 하나 나오지 않는 사실을 사실대로 들어서 뼛속에 쏙쏙 들어가 박히도록, 건천에 물결이 이는 것이 아니라 쏙쏙 그 말이 들어가는데 혁명이 안 날 리가 있어요? 필요한 것은 우리 씨알을 그렇게 교육해가자는 것입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