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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죽옷
창세기 3:20~21(20~24) (고난주일)
I. 생뚱맞은 본문 20~21
호주의 어느 유명한 목사님이 나체촌교회로부터 헌신예배 설교자로 초청을 받았습니 다.
나체촌교회 가서 설교할 때 복장을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했습니다.
설교자와 교인 사이에 동질의식이 중요하겠다라고 생각을 하고 옷을 벗고 설교하기로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마을 입구에 차를 세워 놓고 차 안에 차곡차곡 옷을 벗어 두고 성경책을 가슴에 끼고 망설이다가
예배 시간이 다 되어서 예배실에 들어갔습니다. 그 사이에 교인들이 의논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평상시에는 옷을 벗고 예배를 드렸 지만 그 경건한 목사님이 오시는데 옷을 벗고 앉아 있을 수는 없겠다.
오늘만큼은 모두 정장을 입고 나오라 광고가 되었던 겁니다.
교인들은 정장을 하고 목사님은 옷을 벗고 강단 위에 섰습니다.
교인들은 안 보이고 자꾸 자기 몸이 내려다 보입니다.
그래서 얼른 설교 제목과 본문을 바꾸었습니다.
창세기 2장 25절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
아담과 하와 에덴동산에서 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다가 선악과를 따먹은 다음에 벗은 몸을 부끄럽게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옷을 만들어 입는데 무화과나무 잎사귀로 자기 몸을 가립니다.
그게 옷이 되지를 않았던 겁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옷을 만들어 입히 는데 그 옷이 가죽이었다 하는게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성경에 보면 옷 얘기가 참 많이 나옵니다.
오늘 본문 창세기 3장 가죽옷으로 시작해서 66권 지나면서 마지막 요한계시록 19장에 보면 의의 옷, 세마포 옷이 등장합니다.
천국 잔치 비유에 보면 하나님 나라 잔치에 들어가기 전에 예복을 입지 않은 자들이 쫓겨납니다.
그래서 슬피 울며 이를 갈았다는 내용입니다. 여기 옷과 의, 구원과 연결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세례를 받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는 것이다 라고 설명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와 허물, 부끄러움과 수치를 덮기 위해서 피흘려 만든 의의 옷을 지어서 우리에게 입히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구약 성경은 옷과 구원과 연결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 설교 제목이 “가죽옷”입니다.
본문 창세기 3:20~21 바로 앞에서 아담과 하와가 저주를 받습니다.
오늘 본문 바로 뒤이어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납니다. 저주를 받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는 이 긴박한 상황 속에서 오늘 본문 20절과 21절이 이물질처럼 중간에 끼어 있습니다. 성경이 자연스럽 게 흘러가다가 흐름이 깨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이 대단히 생뚱맞게 느껴집니다. 심지어는 20절과 21절 단 두절 본문 사이에도 어떤 연관성이 보이지 않습니다. 20절은 아담이 아내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얘기입니다. 21절은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옷을 지어 입히는 얘기입니다. 이름을 짓는 일과 옷을 만들어 입히는 일, 이 둘 사이에 어떤 연관이 있단 말입니까? 이 시간 우리는 모순되어 보이고 아무런 연관성이 보이지 않는 단 두 구절 본문! 다소 생뚱맞아 보이고 이물감마저 느껴지는 두 구절이 주는 메시지, 은혜, 눈물겨운 감동을 찾아보고자 합니다. 옛날 영화를 선전하는 성우가 있다면 “아 기대하시라. 고대하시라! 본문이 주는 은혜와 감동, 그 짜릿한 써스펜스를! 씨네마스코프 총천연색...” 아마 이러고 선전할 만도 한 본문의 내용 입니다. 과거 우리학창시절 군사독재 정부하에서 신문을 읽을 땐 문자가 아닌 행간을 읽을 수 있어야 지성인이었습니다. 이것을 숨겨진 기사, 감추어진 사건이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본문 앞 기사와 오늘 본문 그 사이에 생략된 기사, 감추어진 사건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행간을 어렵지 않게 상상하고 추론해 볼 수가 있습니다. 이런 상상을 저만의 생각이 아닙니다. 성경을 연구하던 고대 랍비들도 저와 똑같은 상상을 합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처절하게 회개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구했다는 겁니다. 그 회개 사건이 오늘 본문의 배경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생애」라는 유대 랍비들의 문헌에 아담과 하와가 금식하며 회개하는 장면이 나옵답니다. 아담과 하와의 회개가 있은 후에 오고오는 세대에, 교회 안에서 영성훈련을 한다고 했을 때에 이 회개 사건이 하나의 모델이 됩니다. ① 회개하면서 금식했습니다. 먹는 것을 절제했습니다 ② 부부관계를 절제했습니다. ③ 흙과 재를 뒤집어쓰고 엉겅퀴를 몸에 감고 기도했습니다. 욥기에도 요나서 니느웨 백성들이 굵은 베옷을 입고 흙과 재를 뒤집어쓰고 앉아 회개하고 기도하지 않습니까? II. 하와! 그 이름의 신비 어느 시대나 누구에게나 부흥의 선행 조건은 회개였습니다. 회개의 깊이만큼 은혜의 세계가 깊어집니다. 아담과 하와의 회개 사건 다음에 오늘 본문 20절, 21절 사건이 있었다면 오늘 본문은 만만한 사건이 아님을 우리는 쉽게 느낄 수가 있습니다. 본문 20절 말씀을 다시 한번 보십시다. “아담이 그의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 불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머니가 됨이더라” 사람의 이름은 그 부모가 짓지요. 그런데 하와라는 이 이름은 남편 아담이 지어준 이름입니 다. 지금까지 성경은 이 여인을 여자, 아내, 돕는 배필이라 불렀습니다. 오늘 본문은 구원사건, 용서 와 함께 영원히 불리워질 이름입니다. 하나님의 입에서 매일같이 되뇌일 이름입니다. 고유명사 입니다. 고유한 이름을 구원받은 다음에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 이름이 하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 믿고 생명책에 기록되고 천국에서 불리워지고 하나님께서도 매일 불러 주실 당신의 이름입니다. 이 얼마나 소중한 이름입니까? 영원히 불리 워질 그 이름! 날마다 주님이 불러주시는 그 이름! 성령님이 기억하고 중보하시며 부르시는 그 이름! 이 얼마나 귀한 이름입니까? 이 땅에서 거지로 살았지만 나사로라는 이름은 천국에서 빛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 이름을 날리던 부자는 그 이름이 기억되지 않습니다. 지옥간 그 이름, 성경은 아무런 의미도 가치도 없다는 듯이 그 이름을 생략하고 기록합니 다. 그래서 “부자와 나사로”입니다. 히브리어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 하나를 찾으라면 “하야”동사입니다. 존재한다. 그 안에 생명이 있다, 구원이 있다는 뜻입니다. 출애굽기에서 모세는 하나님께 이름을 묻습니다. 백성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물으면 무엇이 라 대답할까요? 그때 하나님께서 대답하시길, 나는 스스로 있는 존재이니라. I am who I am. 나는 나다. 누가 있으라 해서 있는 존재가 아니야. 나는 스스로 있는 생명자체다. 이런 뜻입니다. 여기 be동사가 하야동사입니다. “하야”동사에서 “하와”라는 이름이 온 것입니다. 아담이 사랑하는 아내를 하와라고 부르는 것은 이 여인에게 생명이 있다. 구원이 있다는 말입니다. 앞으로 오고오는 세대에 구원의 약속이 “하와”이름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창세기3:15 선악과를 따 먹자마자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보내서 “여인의 후손”으로 이 땅에 와서 구세주가 될 것이라는 예언을 하십니다. 그때 아담이 깨달았습니다. 아 메시아가 여인 의 후손, 이 여인의 후손으로 이 땅에 오시는구나. 그래서 지은 이름이 “하와”입니다. 생명의 약속이 이 여인에게 있다는 뜻입니다. “하와야”라고 부른 것은 앞으로 태어날 모든 사람, 생명 가진 자의 어미여! 라고 부른 것입니 다. 여러분, 선악과를 함께 먹고 하나님으로부터 책망과 저주를 받은 다음에 아담의 입에서 어찌 이런 복음의 언어가, 축복의 언어가 쏟아져 나올 수 있었을까요? 부부가 살아가다 보면, 부모와 자식이 살아가다가 보면 서로 실망할 때가 있지 않습니까? 가끔은 실망하고 상처를 입을 때가 있지 않습니까? 어떤 분은 가끔이라니요? 자주 있지요! 또 어떤 분은 자주라니요? 매일 있지요! 하는 분들도 계실 겁니다. 아담은 하와가 따다 준 선악과를 나눠먹고 얼마나 실망을 했을까요? 얼마나 아내가 원망스 러웠을까요? 그러나 아담은 다시 구원을 보았습니다. 다시 소망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지은 이름이 하와입니다. 이건 놀라운 믿음입니다. 아담과 하와 사이에 아직 자식이 없을 때 하와는 생명이여! 생명의 어머니여! 라고 이름을 갖게 됩니다. 이것이 믿음의 눈입니다. 결정적인 실수로 죄지은 여인 안에서 구세주 메시야 를 본 것입니다. 이 여인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았습니다. 아담은 심판을 보지 않았 습니다. 하나님의 책망과 저주를 뛰어넘은 하나님의 은혜를 보았습니다. 그 이름이 하와입니 다. 인간에겐 두 개의 눈이 있습니다. 하나는 상대의 장점, 약점, 단점을 보는 눈입니다. 다른 하나는 상대방의 장점 선행을 보는 눈, 의를 보는 눈입니다. 교회 공동체를 이루고 살아가는 것, 가정 공동체를 이루고 살아가는 것은 단점, 약점, 실수를 보는 눈을 감고 장점과 그의 좋은 점을 보는 애꾸눈 생활입니다. III. 가죽옷! 그 구원론적 의미 선악과를 먹은 아담과 하와는 영광의 옷을 잃어버렸습니다. 죄와 수치로 벌거벗은 자신들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창2:25 마지막 절입니다.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리고 7절이 지난 창3:7 벗은 것이 부끄러워 옷을 찾습니다. 그 수치와 부끄러움, 자신들의 실체를 가려보고자 무화과 나뭇잎을 엮어 옷을 만들어 입습니다. 자신들이 만든 무화과 나뭇잎으로는 부끄러 움을 가릴 수 없었습니다. 한나절 햇빛에 나뭇잎 옷은 바싹 말라 부서지고 다시 벗겨졌습니 다. 인간은 자신들의 지혜와 지식, 선행과 도덕, 공로와 업적으로는 죄를 가릴 수 없습니다. 인간의 모든 구원의 가능성이 끝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이 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구원의 옷을 지어 입히기로 작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옷가게에 가셨대요. 주인이 “이 옷이 어울립니다. 이 옷이 멋집니다.” 그럽 니다. “얘로 살래요?” 이 가게가 있던 장소가 어디일까요? 돌발퀴즈입니다. 얘로 살 래요? 예루살렘! 입니다. 예수님께서 옷을 사셨다는 기록은 성경에 없지만 옷을 만든 얘기는 성경에 많이 나옵니다. 그 옷이 의의 옷입니다. 본문 21절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싸구려 옷 대신 비싼 옷, 좋은 옷을 입혔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짓고 죽어야 할 그 자리에서 대신 한 마리 양을 잡아 지은 옷이 가죽옷입니다. 가죽옷은 대속의 옷입니다. 구원의 옷입니다. 가죽옷에서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봅니다. 골고다 언덕을 봅니다. 내 죄와 허물을 덮으신 하나님의 사랑, 한 마리 양을 죽이시 는,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서 죽게 하는 하나님의 눈물을 봅니다. 가죽옷은 히브리어 “오르”라는 말과 “게토네르”라는 말이 합쳐져서 만들어진 단어입니다. “오르”는 출애굽기에서 꼭 한번 나옵니다. 나머지는 레위기에서 주로 사용되는 말로 “속죄용 제물”이란 뜻입니다. “게토네르”라는 말은 덮는다, 감춘다, 숨긴다라는 뜻입니다. 가죽옷, 게토네르는 누군가의 희생으로 속죄제물이 되어서 내 죄가 덮혀졌다. 내 죄가 감추어졌다. 가죽옷이라 번역했지만 그 옷은 구원의 옷을 의미합니다. “오르 게토네르” 가죽옷이 보여주는 구원론적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가죽옷은 하나님이 친히 지으신 옷입니다. 인간이 만든 선행의 옷, 도덕의 옷, 철학의 옷, 지식의 옷은 우리의 죄를 덮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친히 지으신 옷만이 우리의 죄를 덮고 우리를 구원할 수 있습니다. 둘째, 가죽옷은 누군가 죽어야 만들 수 있는 옷입니다. 가죽옷이 만들어졌다는 건 그 가족의 주인이 피흘리고 죽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대속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분이 바로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셋째, 가죽옷은 입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느끼게 됩니다. 가죽옷이 따뜻했겠지만 더 따뜻한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서 쫓아낼 때에 발가벗겨 쫓아내지 않았습니다. 구원의 옷을 입혀 서 나가 살다가 다시 낙원으로 돌아오너라. 그 약속입니다. 넷째, 아담과 하와를 위해 피흘리며 죽는 어린양을 통해 택한 백성을 구언하기 위해 십자가 에서 죽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담아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내가 벗었으므로 나무 밑에 숨었습니다. 누가 벗었느냐 입었느냐를 물었느냐? 네가 먹지 말라는 선악과를 먹었느냐? 네가 선악과를 먹을 때는 정녕 죽으리라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 몽둥이를 높이 치켜들고 내려칩니다. 이제는 죽었구나. 아담과 하와가 두 눈을 감고 있다 보니까 안 죽었어요. 여보 우리가 안 죽었어? 옆에 보니까 양 한 마리가 메에메에~ 피 흘리고 있습니다. 머리가 박살이 났습니다. 다리가 부러졌습니다. 그때 큰 손이 나타나 양의 가죽을 벗기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옷을 짓는 장면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아담에게 입히고 또 한 마리의 양을 잡아 하와에게 입히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 매달리십니다. 채찍 맞으며 골고다 언덕을 오르고 머리에 가시관을 쓰고 손과 발에 못이 박히고 옆구리에 창이 찔려서 물이 쏟아지고 피가 줄줄 흐릅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한 마리 양이 되어 십자가 위에서 죽으십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 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사53:5) 다섯 번째,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옷 한 벌로 번갈아 가며 입도록 하지 않았습니다. 아담의 가죽옷과 하와의 가죽옷을 따로 지어 입히셨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 서야 합니다. 한 사람 한 사람 각자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해야 합니다. 대신 밥 먹어 줄 수 없고 대신 옷을 입어 줄 수 없고 대신 믿어 줄 수가 없습니다. 부모의 신앙에 따라 자식을 구원할 수 없고 아내 치맛자락 붙잡고 천국에 들어가는 것도 아닙니다. 각자 내가 예수를 주님으로 구세주로 영접해야 합니다. 이것이 가죽옷의 원리입니다. 하나님 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예수를 믿는 자만이 구원을 받습니다.(요3:16)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만이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요1:12)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습니다.(롬3:23) 각자 자신이 하나님 앞에 죄인임을 고백하고 하나님께 돌아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해야 합니 다. 어떤 부흥사가 인간의 죄에 대해서 설교를 하고 우리는 모두 죄인입니다. 한 번도 죄 지은 적이 없는 사람 누구 있습니까? 손들어 보세요? 그랬더니 한 사람 이 손을 번쩍 들었습니다. 그리고는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 나옵니다. 옆에 앉았던 아내가 이 사람의 손을 붙들고 끄집어 내리면서 따라 나옵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목사님, 이 사람은 오늘 아침에 정신병동에서 나왔습니다. 고 침 받으려고 부흥회에 나왔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깨달았습니다. ‘죄 없다고 하는 사람은 정신병자인가 보구나.’ 모든 사람이 죄인임에 주님 앞에 돌아오면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새 옷을 입혀라. 가죽옷을 입혀라. 반지를 끼워라. 이는 하나님의 자녀이니라. 살찐 송아지를 잡아라. 복음의 신발을 신겨라. 잔치를 벌여라. 이 구원의 축제가 가죽옷입니다. 입은 거칠기 짝이 없고 자기는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입만 열면 부정적인 얘기, 비판의 얘기, 비난의 얘기가 쏟아져 나옵니다. 저런 사람도 구원받았을까? 싶을 때가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꽤 괜찮습니다. 반듯하고 기도 열심히 하고 흐트러짐도 없습니다. 도덕적으 로 신앙적으로 완벽합니다. 그런데 자신의 의로 다른 사람을 비난하고 비판하고 장로도, 목사도 그 비난의 칼에 상처를 입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사탄이 거짓된 뉴스를 물려주면 믿음 약한 온 교인들을 어지럽히고 시험 들게 만듭니다. 저도 젊었을 때는 지금도 많이 젊지만 다윗의 기도를 할 때가 있었습니다. 다윗은 시편 58편에서 이빨이 너무 날카로워, 비난의 말이 너무 거칠어 독사의 이빨을 꺾어 달라고, 저 사람 말은 말이 아니고 독사의 이빨이라고 사자의 어금니를 꺾어 달라고 기도합 니다. 방망이로 박살 내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때 하나님이 교회에 주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저런 사람도 이빨 뽑는 치과가 아니니라. 저런 사람도 방망이로 박살 내는 방앗간이 아니니라. 저런 자를 위해 내가 죽었다. 저런 자도 예수를 의지하면 가죽옷 입은 구원받은 백성이다. 사랑해라. 용서해라. 하나되라. 흠을 덮어라.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 부끄러운 사람이지만 너도나도 의의 가죽옷을 입고 하나님 앞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IV. 왜 생명나무를 옮기셨나?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죄지은 아담과 하와를 용서하시고 가죽옷까지 친히 만들어 입히셨습니다. 본문 다음에 보면 그런데 왜 하나님은 생명나무 열매를 먹지 못하게 하신 것일까요? 아담과 하와가 생명나무 실과를 먹고 이 땅에서 영생하는 모습을 하나님은 왜 허락하지 않으신 것일까요? 그것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배려와 사랑이었습니다. 죄지은 인간은 병들고 늙습니다. 이 땅은 기후의 위기가 있고 가난과 질병이 있고 갈등과 전쟁이 끊이지 않는 곳입니다. 고생하다 병들고 고통 중에 늙어가는 인간이 이 땅에서 생명 나무 실과를 먹고 영생한다면 그건 축복이 아니라 저주입니다. 살만큼 살다가 죽는게 복입니다. 그래야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하는 것같은 아름답고 빛나는 모습으로 천국에서 신랑되신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에덴동산을 폐쇄하시고 생명나무 실과를 멀리 옮기신 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또 다른 계획이 요 사랑이었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우리가 천국에 만날 때 생명나무가 서 있는 생명나무 그늘 밑에서, 생명 수 강가에서 만나게 됩니다.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서 생명나무 열매를 먹게 해 주겠다.(계 2:7) 계22:1-2 말씀엔 생명나무 실과를 매달 다른 열매, 열두 가지 열매를 맺고 그 나무 잎사귀는 만국을 치료하리라고 합니다. 죽음이 왜 슬피지 않겠으며, 왜 아쉬움이 없겠습니까? 그러나 죽음 이후엔 진정한 에덴의 회복, 생명나무 열매가 기다리는 낙원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오늘 밤이라도 하나님이 나를 부르시면 평안히 가세요. 기쁨으로 가세요. 우리 모두 생명나 무 그 시냇가에서 노래를 부르며 한소망 가족들이 춤을 추는 그 날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 나 가나안 땅 귀한 성에 들어 가려고 내 무거운 짐 벗어 버렸네 죄 중에 다시 방황할 일 전혀 없으니 저 생명 시냇가에 살겠네 길이 살겠네 나 길이 살겠네 저 생명 시냇가에 살겠네 길이 살겠네 나 길이 살겠네 저 생명 시냇가에 살겠네 (찬246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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